604화
성필이 두 번째로 찾은 목적지는 장소가 아닌 사람이었다.
윤상열.
그에게 전화를 거니, 의외로 흔쾌히 회사로 오라고 했다.
[보고 싶으면 네가 와라. 내가 따로 나갈 시간은 없어.]
‘너한테 시간 써가면서 발걸음하고 싶지 않다’란 말을 흔쾌하다고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다만.
성필은 거절당하는 것보다 낫다고 여겼다.
점심 시각이 지나 석세스 엔터 신사옥을 방문했다. 입구 데스크에서 방문증을 받아 윤상열의 작업실로 향했다.
‘김태훈은 내가 오는 걸 알고 있을까.’
방문증 발급이 어느 부서의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새삼스럽게 대표에게까지 보고가 올라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성필은 이전에 석세스 엔터에 몸담았던 데다, 석세스 엔터를 나가고 훨씬 성공한 인물이다.
그 예외성 때문에 김태훈에게 보고가 올라갔을 수도 있겠지.
‘그런데…….’
감시역은커녕 안내인도 없다.
윤상열이 데스크에 성필의 방문을 알렸을 때 ‘신경 안 써도 되는 사람이다’라고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일부러 무시하는 건가.’
다른 회사의 중역이 석세스 엔터의 중심인 총괄 프로듀서를 만나러 온다.
대표라면 응당 촉각이 곤두서야 할 텐데.
성필의 방문을 보고받지 못했거나, 보고받았더라도 무시하는 것. 둘 중 하나다.
만약 보고받았는데도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면, 성필이 생각할 만한 가정을 두세 개가 전부였다.
‘김태훈은 옛날에 날 다시 영입하려고 했었지. 그때 내가 석세스 엔터를 인수할 거란 말을 면전에서 들었으니, 기분이 꽤 상했겠지.’
그래서 무시한다.
혹은.
‘윤상열한테 생색낼 거리를 만드는 건가.’
나중에 윤상열이 김태훈에게 ‘박성필이 왔는데 뭐라고 했는지 안 궁금해?’라고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김태훈은 ‘네 손님이잖아’라며 너스레를 떨 것이다.
성필이 어떤 목적으로 왔든, 김태훈 자신은 윤상열을 믿는단 표시가 될 수 있다. 은유적으로 신뢰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하아.”
성필은 의식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석세스 엔터로 오니 생각만 많아진다. 딱히 알 필요 없는 일들을 자꾸만 지레짐작하게 된다.
김태훈과 윤상열의 사소한 것 하나까지, 자기 멋대로 상상해버린다.
미련이 많다.
‘그래.’
바로 이게, 성필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다.
‘영혼의 지도’라고 이름 붙인 목록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다. 성필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장소와 인명의 나열이다.
성필이 지향점으로 삼은 KS 엔터.
전생에서 성필의 인생이나 다름없던 석세스 엔터. 그리고 성필이 가장 큰 영향을 받고, 가장 많이 교류했던 프로듀서인 윤상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윤상열은 성필의 영혼을 일부분 차지하고 있다. 그건 김태훈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성필은 그를 딱히 다시 만나고픈 마음은 없었다.
‘옛날에 만난 걸로 됐어.’
과거 김태훈이 성필을 불러냈을 때, 그는 양소민과 글로브를 인질로 삼아 협상하려 했다.
‘얘들이 너를 이렇게 그리워해, 그런데 넌?’이라며 선심 쓰듯 행동했던 놈의 면상이 아직도 선명히 떠오른다.
그걸로 성필은 김태훈에 대한 평가를 마쳤다.
그럭저럭 마음을 정리하고 나니 윤상열의 작업실 앞이었다.
노크했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윤상열이 눈앞에 있다.
“…….”
“…….”
둘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성필은 먼저 인사를 꺼내기가 꺼려졌다. 아니, 인사보다는 그의 호칭을 정하기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형’이라고 했던가.
‘김태훈이랑 만났을 때 결심했었잖아.’
김태훈은 앞으로 ‘김 대표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윤상열도 마찬가지다. 그를 ‘윤 피디님’이라고 부르리라 다짐했었다.
더는 형이라는 호칭으로 부르고 싶지 않았다.
인간적인 관계를 전부 끊어내고자 했기에.
하지만, 성필은 ‘윤 피디님’이라는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윤상열이 문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들어오라는 뜻이다.
그제야 성필은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윤 피디님.”
“……?”
윤상열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애냐?”
성필은 창피함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래,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아서 지금까지 윤 피디님이라고 안 부른 거지.’
성필이 딱딱한 호칭으로 바꾼다면, 윤상열은 김태훈처럼 진지하게 받아들이진 않을 것이다.
실제로 그러했고 말이다.
윤상열은 성필의 호칭 변경을 어린애다운 삐침으로 받아들이고 놀릴 것이다.
성필은 무의식적으로 그걸 알았기에, 그를 김태훈처럼 격식 있는 호칭으로 부르지 않아 왔다.
“들어간다.”
“이미 들어와 놓고선.”
문이 닫혔다.
* * *
“요즘…….”
조아라는 침대에 가지런히 누워 혼잣말하듯 읊조렸다.
“아저씨가 나한테 쌀쌀맞았거든.”
신아름은 방금 머리를 감았다. 방바닥에 앉아 헤어 에센스를 꼼꼼히 바르느라 머리가 귀신처럼 풀어 헤쳐져 있었다.
“내가 뭐 잘못했나.”
“넌 존재 자체가 팀장님한테 민폐야.”
“……내가 왜.”
“팀장님이 뭔 말만 하면 로우킥 날리고 주먹 날리고, 그게 민폐 아니면 뭐임?”
“장난인데…….”
에센스를 다 바른 신아름은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 때문에 조아라가 하는 말이 전부 씹혔다.
몇 분 후 드라이기를 끄자, 조아라는 아직도 혼잣말인 듯 혼잣말 아닌 중얼거림을 내뱉는 중이었다.
“아저씨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진짜 그거 때문인가?”
“맞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딨어. 너 또라이이…… 맞구나.”
“……휴가 간 것도 나 때문일까?”
“넌 세상이 다 너 중심이지? 팀장님이 그거 아직 청소년기에서 탈피 못한 증거래.”
스으으읍, 하아아아.
조아라는 천천히 심호흡을 반복했다.
“지금 연락하면 민폐야?”
“아하니 진짜 미치겠네. 아주 그냥 세상사 다 네 중심이다 야. 왜, 대통령 당선자도 네가 지지해서 당선됐다고 하지?”
“밍나(다들) 이거 봤어?”
리카가 머리칼을 수건으로 닦으면서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숙소에서 항상 스마트폰을 들고 다니며 아이튜브 영상을 본다.
그건 샤워할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심지어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오는 순간까지 폰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또 시답잖은 동물 영상이나 봤겠지 했는데, 리카의 폰에서 성필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다.
“아저씨?!”
“어, 팀장님 목소리 아니야?”
“맞아! 다들 소식이 느리네! 사장님이 공지방에 올려두셨어!”
둘 다 황급히 톡방을 확인했다.
[리카: 건강즙에 꿀 넣어 주세요]
[한구인: 알겠습니다]
[홍규헌: 여기 공지방이다]
[리카: (사자가 머쓱하게 머리 긁는 이모티콘)]
[한구인: (독일 국기가 그려진 동그라미 캐릭터가 부끄러워하는 이모티콘)]
[(여기까지 읽으셨습니다)]
[홍규헌: (영상 첨부)]
[홍규헌: 박 이사 유명해졌네]
[홍규헌: 부럽다]
[박성필: (부끄러워하는 분홍 수달 이모티콘)]
영상을 누르니, ‘븨이에스’ 박수련의 자체 예능인 ‘어쩌다 만났슴다’에 출연한 성필이 나왔다.
* * *
[오늘 게스트 누구예요?]
영상 속의 스태프가 박수련에게 출연자 프로필을 전달한다.
[어? 진짜요? 이분 나와요?]
[아세요?]
[네, 이분 완전 유명하잖아요. 저 ‘빛나그솔’ 밤마다 챙겨봤어요. 박성필 프로듀서님. 연애 예능 빌런……(검열)]
지켜보는 성필은 슬프다.
[이분 잘생겼어요. 빛나그솔 방송할 때 스타그래프 팔로우도 해뒀어요. 그 왜, 상대랑 수영장 있는 글램핑장 갔을 때 수영복 입었잖아요. 그 사진 올린다길래…….]
화면에 떠오르는 성필의 수영복 사진.
[나도 이런 분이 프로듀서였음 좋겠다.]
눈물을 글썽이는 정호환.
[근데 방송용 계정인가 봐요. 빛나그솔 끝나니까 귀신처럼 업데이트 끝나더만.]
[되게 들뜨셨네요.]
[우리 삼 연속 여자 게스트였잖아요.]
[어? 성차별?]
[아니이!]
‘어쩌다 만났슴다’는 그 어떤 차별적 관점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자, 들어와 주세요!]
쭈뼛쭈뼛 들어오는 성필.
[안녕하세요, 박성필입니다. 가로 엔터 이사고, 소녀연맹 메인 프로듀서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앉으세요.]
[넵, 사랑합니다 수련 씨.]
[……?]
[…….]
[뭐라구요?]
[왜 그렇게 보세요?! 대, 대본이랑 다르잖아요! 대본엔 수련 씨 대답이……!]
[아하하핰! 이 방송 대본 없어요! 그거 제가 이사님 골리려고 방금 쓴 거. 앉아요 앉아. 어? 얼굴 빨개졌다. 더우면 옷 벗어요.]
[괜찮…….]
[벗어요.]
재킷을 벗는 성필.
오빠 나 죽어.
[자, 그럼 방송 시작!]
[안녕하세요 박성필입니다.]
[나이는?]
[서른다섯이요.]
[진짜요? 반말하자. 나이 차이 별로 안 나네.]
[그래도 돼요?]
[되지 그럼. 네 살 차이는 궁합도 안 본대.]
누나 나 죽어.
[성필아, 내가 너 섭외하려고 얼마나 노력한 줄 알아?]
[거짓말하지 마. 오늘 매니저님 섭외받고 왔거든? 밖에서 보니까 나 오는 것도 방금 전달받았더구만.]
[야, 네가 맞춰줘야 내 기가 살지.]
[근데 대본 없으면 무슨 얘기해?]
[몰라. 걍 잡담 한두 시간 나누고 분량 뽑으면 가면 돼.]
[잡담 한두 시간이면 뭐, 섭외료가 빵빵한 편이네. 난 그냥 너랑 얘기하면서 놀면 되는 거 아냐?]
[야 근데 성필이 너 되게 거리낌 없다. 예능인 아니야? 보통 반말하라고 하면 쩔쩔매는데.]
[수련이 얼굴 보면 남자들을 보통 쩔쩔매겠지.]
[넌? 여자친구가 나랑 외모가 비슷해? 아이돌이야 혹시? 아님 전 아이돌?]
[나 여자친구 없어.]
[진짜? 헤어졌어?]
[7년 동안 없었어.]
[에이, 그건 진짜 뻥이다.]
[리얼이야.]
[혹시 특정 기능이…….]
검열.
[내가 이런 사진을 입수했거든.]
떠오르는 성필의 해병대 시절 사진.
[이걸 어떻게…….]
[빛나그솔 비하인드에 나오던데? 캡처해뒀지.]
[아, 그거 봤어……?]
[안 봐도 알 사람은 알지. 빌런이잖아.]
[할 말이 없다.]
[근데 우리 후배님 때문에 간 거라면서? 그래도 돼? 회사 애들이 뭐라고 안 해?]
[그냥 뭐, 그럭저럭.]
[얘기하기 싫음 말고. 근데 너 젊었을 때 나이트 많이 갔어?]
[나이트흐흐흫!]
[야, 우리 어렸을 땐 나이트였잖아!]
[너랑 내가 같은 세대야?]
네 살 차이는 궁합도 안 본다.
[수련이 넌 나이트 갔어?]
[못 가지! 연습생이 어떻게 가? 아이돌도 못 가고. 넌 좀 놀았어?]
[그냥, 몇 번…….]
[취향에 안 맞았어?]
[왜 이렇게 관심이 많아?]
[원래 못 겪어본 경험이 더 궁금하잖아. 나도 명동 같은 데 마음대로 놀러 가고 싶었어.]
[언제 적 명동이야.]
[우리 젊었을 땐 명동이었잖아. 너 아까부터 계속 나 늙은이 취급한다?]
네 살 차이.
[성필이 너 븨이에스 좋아해?]
[좋아하지.]
[내 별명.]
[한국 최고 미녀, 비주얼 만재(萬才), 맞선 행동.]
[그거 말고 또?]
[또 뭐?]
[아니 진짜 몰라? 맞선 행동까지 아는데?]
[내 입으로 말해도 돼? 약간 어감이 욕 아니야?]
[해봐.]
[퐉스련…….]
박수련(별명: 퐉스련, 여우년).
[직접 보니까 어때?]
[내 어깨에서 손 치워.]
[븨이에스 좋아한다면서?]
[좋아하지.]
[왜 좋았어?]
[음악이라든가, 비주얼이라든가. 아니, 난 진짜 너희 대상 받을 때 있잖아? 븨이에스를 뛰어넘는 걸그룹은 앞으로 안 나올 거다, 그렇게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런데…….]
진화하는 케이팝 시장의 피해자, 븨이에스.
[우리 앨범 있어?]
[다 있어. 최근 앨범에 너 앰배서더하는 브랜드 상품으로 도배하고 화보 찍었잖아.]
[보테가 베네타?]
[말…… 해도 돼?]
[여기 티비 아니야. 그리고 난 말할수록 좋아. 앰배서더니까 홍보해야지. 근데 화보가 왜?]
[좋았다고. 되게 옛날부터 하지 않았어?]
[아니, 나 그거 코 꿰었어. 우리 회사가 그냥 명품이라고 계약 조건을 아무렇게나 보고 사인했다니까.]
[어? 진짜?]
[옛날이니까. 암튼 그래서 계약 기간이 되게 길어. 보상은 적은데.]
[말…… 해도 돼?]
[여기 티비 아니라니까.]
보테가 베네타 최고!
[옛날엔 케이팝 아이돌 앰배서더 이런 게 잘 없었잖아. 그래서 뭐 페스티벌이나 브랜드 쇼에 가도 취급이 박했거든. 근데 요즘엔 진짜 잘해줘.]
[어, 위상이 많이 올랐지. 얼마나 잘해주는데?]
[해외 투어 도는데 공항에 리무진을 보내주더라. 계약 사항에도 없는 건데. 그건 진짜 가오가 살았지.]
[가오흫.]
[너 약간 이런 거 좋아하는구나?]
[너 좀 도도하고 고아한 이미지잖아. 근데 직접 보니까 털털해서, 갭이 신선하네.]
[이런 취향이야? 나?]
맞선 행동 시작.
[넌 뭐, 거의 모든 남자의 이상형이지.]
[너는? 성필이 이상형은 뭐야?]
[나? 외모적으로?]
[외모만.]
[이거 약간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남자?]
‘어쩌다 만났슴다’는 그 어떤 차별적 관점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보통 여성분들이 그러는데, 나이가 들면 볼살이 빠져서 볼이 약간 들어가잖아?]
[어, 광대가 부각되는 그거?]
[그게 좀…… 뭔가 매력적으로 다가와.]
[아, 미시(Missy)…….]
검열.
[그런 단어를 어떻게 알아?]
충격받은 성필.
[아이돌도 인터넷 해! 무슨 수도원에서 사는 줄 아냐? 다 보고 어? 다 해! 맞다, 우리 젊었을 때 갑자기 애용하는 사이트들 다 워닝 뜨고 막히고 그랬잖아. 기억하지?]
[어…… 그랬지…… 어느 순간부터…….]
환상이 깨져가는 성필.
이게 계약 만료 직전 아이돌?
[여자들 검색어 1위가 뭐였는지 알아?]
[뭔데?]
[뱀파이어.]
참고 자료.
미국 아이돌 그룹 백스트리트 보이즈의 ‘Everybody’ 뮤직비디오.
미라, 뱀파이어, 어인 등 각종 괴물 분장을 한 멤버들이 춤춘다.
아이돌 컨셉의 시초.
[암튼 넌 취향이 미ㅅ…….]
검열.
[…….]
[왜 점점 표정이 안 좋아져?]
[너무 프리한 거 아냐?]
[어차피 자를 건데 막 뱉어. 넌 예능 촬영장 안 가봤어? 거기서도 아무렇게 말한 다음에 짜깁기해서 방송에 내보잖아.]
[아, 하긴.]
안 잘리고 다 나오는 중.
[음, 그런 게 취향인 남자들도 있구나. 나 피부관리 받는 거 중에 울쎄라라고 있거든?]
광고 아님.
광고 문의 010-XXXX-…….
[너 상처 입으면 주변 피부가 조여드는 거 알아? 팽팽하게?]
[딱지 생기면 어, 그러지.]
[울쎄라가 원리가 그거거든. 피부밑을 레이저로 지져서 상처를 입히면 피부가 당겨지는 거야.]
[그런 게 있어? 신기하다. 나중엔 돈만 있으면 계속 젊은 모습으로 있을 수도 있겠네.]
[그치. 근데 성필이 취향이 이런 건 줄 알았으면 울쎄라 안 했을 텐데.]
박성필 1홀림.
[성필이 집은 있어?]
[이 나이에 자가가 있겠냐?]
[난 있는데?]
[부럽다.]
[차는 있지?]
[차는 있지.]
[난 차가 없거든. 그럼 둘이 합치면 어느 정도 합이 맞네?]
박성필 2홀림.
[성필이 돈은 얼마 벌어?]
[갑자기 왜 소개팅 분위기야?]
[이게 어떻게 소개팅이야? 넌 소개팅 때 집 있는지 차 있는지 물어봐?]
[7년 동안 안 해서 모르겠다.]
[세후 얼마?]
[에휴.]
소곤소곤.
[와, 생각보다 많네? 근데 안정적이진 않고.]
[이 업계가 다 그렇지. 아이돌은 물론이고 프로듀서도 10년 후를 못 보…… 아니!]
[응?]
[난 최고의 프로듀서가 되고 소녀연맹도 그럴 거라서, 난 노후 걱정 없어.]
[근데 사람들이 다 비빌 언덕이 필요하잖아. 이 업계 혹시 몰라. 언제든지 나락 갈 수 있어.]
[이건 맞선 행동인 거 딱 알겠다. 비빌 언덕 뭐, 너? 살림 합치자고?]
예지력 상승.
[아니, 너 말하는 거 보니까 방송에서 활동해도 괜찮겠는데? 이렇게 기 안 죽는 게스트 오랜만이야. 솔직히 재밌다.]
[어? 어, 고마워.]
[우리 둘이 자체 예능 하나 만들까?]
[음, 인터뷰 프로그램이면 나도 괜찮겠다. 게스트들은 아이돌로 하고.]
[‘우리 결혼했어요’ 찍자.]
성필 3홀림.
[빨리 도장 가져와.]
[……계약서?]
[혼인신고서.]
회상 장면 ‘사랑합니다 수련 씨’.
그 후로도, 영상은 무려 20분이나 더 이어졌다.
‘어쩌다 만났슴다’ 역사상 최장 기록이었다.
* * *
“……이게 뭐야?”
영상을 다 본 조아라는 얼이 나갔다.
왜 성필이 ‘븨이에스’의 자체 예능에 출연한 거지? 왜 저 여자, 가 아니라 박수련 선배님은 성필을 꼬시고 있는 거지?
“이게 뭔…….”
조아라는 같은 감정을 공유하려고 신아름을 보았다. 그녀는 벌써 댓글창에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둘이 잘 어울려요’란 우결충(우리 결혼했어요 충忠/蟲, 방송인의 연애 기류나 분위기에 과몰입하여 엮으려는 사람) 댓글엔 ‘진심임? 박성필이 훨씬 아깝다 ㅋㅋㅋㅋㅋ’를 도배했다.
그리고 ‘연애 예능 빌런’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댓글엔 ‘에리카 도망 사건’ 정리글 링크를 남겼다. 그리고 ‘뇌수가 비어서 알아보려는 노력도 안 하냐?’ 같은 답글을 남겼다.
“…….”
조아라는 신아름에겐 신경을 끄기로 했다.
“야 리카, 뭐냐 이게.”
“수련 선배님 컨셉이야! 아라쨩은 ‘어쩌다 만났슴다’ 본 적 없어?”
“그게 아니라…… 아저씨가 왜 여기 있냐고.”
“영상에 나오잖아! KS 엔터 매니저님이 섭외했다고 했어!”
“…….”
조아라는 왠지 모르게 쓸쓸했다.
자신 같은 걱정을 하는 이가 아무도 없는 듯해서였기 때문이다.
신아름은 댓글창에서 싸우고, 리카는 둘의 케미를 즐겁게 보았을 뿐이니.
조아라는 다시 영상을 보았다. 영상 속의 성필은 박수련과 대화하면서 밝게도 웃었다.
‘아저씨, 최근엔 이렇게 웃은 적 없잖아.’
성필이 다른 아이돌과 정답게, 그것도 이제껏 본 적 없을 정도로 친근하게 이야기하는 걸 보니 기분이 묘하다.
묘하게 더럽다.
“네, 언니.”
열린 문으로 급히 현관 쪽으로 걸어가는 장하양이 보였다. 곧이어 현관에서 신발 신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대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네네, 지금 KS 엔터로 갈게요.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가는 거라서, 민폐일까 걱정되네요. 네, 그럼 다행이구요. 변심이라기보다, 적어도 언니를 뵙고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적절한 처신이란 생각이 들어서요. 네? 아니에요, 제가 갈게요. 저희 숙소 찾기도 어려워요. 네, 택시 타면 KS 엔터까지 금방이에요.”
“언니 어디 가요?”
조아라가 방을 나와 장하양에게로 다가갔다.
장하양은 폰을 손으로 막아 소리가 전해지지 않도록 하며 답했다.
“KS 엔터에 소유 언니 만나러.”
“지금요? 이 밤에?”
“응.”
장하양은 다시 진소유와 통화를 이어갔다.
“그럼 1층 데스크로 가서 방문증만 받으면 되는 거죠? 언니는 지금 연습실에 계시는 거구요. 그냥 여쭤보는 건데, 선배 그룹도 같은 층 연습실을 사용하나요? 아아. 그럼 제가 받은 방문증으로 그 층에 입장할 수 있을까요?”
장하양이 숙소에서 떠나갔다.
조아라는 닫힌 문을 몇 초간 바라보다가, 힘없이 뒤돌아갔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려던 순간, 갑자기 백설하가 떠올랐다.
그녀도 성필의 영상을 봤을까.
조아라는 언니 라인 방으로 갔다.
문을 열었다.
“쌤.”
그곳엔 폰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망연자실하여 철푸덕 앉은 백설하가 보였다.
* * *
“왜 왔냐.”
윤상열은 냉장고에서 에너지 드링크를 꺼내어 성필에게 주었다. 냉장고 안을 흘끗 보았는데, 안에 든 건 에너지 드링크밖에 없었다.
성필은 정지음을 떠올리며 그것을 받아 마셨다.
“나 휴가야.”
“……그래서 뭐? 귀중한 휴가 시간을 써서 나를 보러 왔다, 그러니까 고마워하라?”
“사람이 왜 이렇게 꼬였어. 나 나올 때보다 더하네. 걍, 내 인생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을 한 명씩 만나보고 있어.”
“우리가 같이 지낸 시간이…….”
윤상열은 드링크 캔을 따서 벌컥벌컥 마셨다.
“그렇게 길진 않은데.”
옳은 소리다.
성필은 전생에서 윤상열과 10년 넘게 부대끼며 살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윤상열에겐 전생의 기억이 없다.
윤상열이 성필이란 인간과 지낸 시간은 1년이 안 된다. 그 1년이 둘 모두에게 참으로 스펙터클하긴 했다만.
어쨌든, 윤상열이 성필과 쌓아온 감정의 깊이는 성필보다 훨씬 얕다.
“너도 나름 예술가라고 예술가 흉내라도 내게?”
“뭐가?”
“투쟁심을 창작의 원천으로 삼는 예술가들은 꽤 많아. 창작할 분위기를 내려고 현실의 아티스트를 적으로 설정하거나, 그것도 안 되면 가상의 적을 만들기도 하지.”
성필이 전생에 그에게 들은 이야기였다.
미국의 어느 래퍼 이야기였다. 그는 이미 정점이라고 불릴 아티스트가 되어, 마땅히 꺾겠다고 선언할 만한 래퍼가 없었다.
한 분야에서 일가(一家)를 이룬 수준이었다.
그래서 그는 가상의 적을 만들었다. 거대 미디어 권력이 자신의 몰락을 바라며, 그를 몰락시킬 공작을 물밑에서부터 진행 중이다, 라고.
그때부터 그는 미디어 관계자들에게 공개적으로 욕을 퍼붓고 과격한 비난을 일삼았다.
사람들은 그를 미친놈 취급하고, 기업은 파트너십을 해제하고, 브랜드 앰배서더에서도 해임됐다.
스스로를 궁지에 몰고 진짜 적을 만든 후, 그는 비로소 창작에 임할 수 있던 것이다.
이는 정신과 의사들의 해석이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창작욕을 자극하는 법을 알고 있었거나, 아니면 그냥 미친 거였다.
“너도 그래? 좆되게 만들고 싶은 놈 얼굴 보려고? 요즘 일이 잘 안 풀리나?”
“형이 좆되길 바라는 건 맞는데, 그거 때문에 찾아온 건 아니야.”
“그럼?”
“얘기나 하자고.”
“난 너랑 떠들 만한 소재가 없어.”
그렇겠지.
소재가 없는 게 아니라, 면전에 대고 할 만한 소재가 없는 거겠지만.
“형, 혹시 아이돌을 보고 애정을…… 이성적인 느낌을 받은 적 있어?”
“녹음기 켰냐?”
“뭐? 아니. 뭔 사고회로가 그렇게 돌아가?”
“폰 줘.”
보여줬다.
윤상열은 성필의 폰을 이리저리 확인하더니, 성필이 건들지 못하도록 자신 쪽 테이블 모서리 끝에 두었다.
성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윤상열은 다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이성적인 느낌이라. 사랑? 아니면 리비도(Libido)?”
“리비도…….”
윤상열은 방금 성필이 지은 것처럼, 어처구니없단 표정을 띠었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
미친 변태 새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