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3화
정호환은 컨설팅이라고 표현했지만, 진짜 컨설팅처럼 내부 정보를 전부 공개할 수는 없다.
어쨌거나 KS 엔터의 프로듀싱 기획은 단순한 줄글뿐이더라도 회사의 자산이며, 이사인 정호환조차 외부 발설이 제한된다.
그래서 성필과 정호환이 나눈 건 컨설팅이란 이름의 경험 교환이었다.
“만약 멤버가 낸 컨셉이나 계획이 정말 얼토당토않다면 어떡합니까?”
“반려해야죠.”
정호환의 머리 위에 커다란 전구가 켜졌다.
“그렇군요!”
“설마 기획을 내면 무조건 받아들이려고 생각하셨어요?”
“‘우리들의 프로듀싱’에선 그러지 않았습니까?”
정호환이 언급하는 ‘우리들의 프로듀싱’은 소녀연맹 아이튜브 채널에 게시된 장편 영상을 뜻하는 것이었다.
“당연하지만 중간에 편집이 많아요. 아이디어 확정 회의 수십 회짜리를 그대로 올릴 순 없잖아요.”
“그렇긴 합니다만…….”
정호환은 인형탈 안에 들어있는 게 실은 담배를 달고 사는 40대 중년 남성이란 걸 깨달은 표정이었다.
그는 엔터계에 몸담은 세월이 긴 만큼, 미디어가 허상의 덩어리란 것을 알고 있었다.
‘진짜 저러겠어?’라며 ‘우리들의 프로듀싱’을 폄훼해오던 정호환도, 내심 소녀연맹의 여정이 사실이길 바랐던 것이다.
편집되지 않은 소녀들의 순수한 투쟁과 고난, 그리고 극복. 꿈을 만들어 먹고 사는 자임에도, 만들어낸 꿈이 진짜이길 바랐었다.
“다큐멘터리도 편집이 들어가는데, 아이튜브에 올라가는 영상은 어떻겠어요. 사람들이 지루해할 부분은 자르고 선형적인 이야기로 만들어내는 거죠.”
그 답을 들은 것만으로도 정호환의 걱정 대부분이 해소되었다.
그렇다, 반려하면 그만이다.
“정호환 이사님이 총괄 프로듀서로서 하시던 대로 하시면 돼요. 확인하고, 검토하고, 반려하거나 확정하는 거.”
“갈등은 없습니까?”
정호환이 기획을 반려하면, 아이디어의 중추인 진소유는 물론이요 그녀를 도왔던 A&R팀 전원이 실망할 것이다.
그건 문제다. 평소 정호환이 하는 일이 그것이긴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이 프로젝트의 이름 자체가 ‘케이어스 아티스트십 프로젝트’다.
정호환이 쉽사리 반려하고 피드백한다면, A&R팀은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아, 이거 그냥 이름만 아티스트십이라고 하는 거지 이전이랑 똑같구나.’
그럼 A&R팀은 진소유의 망상에 살을 덧대기보다, 자신들끼리 결과물을 만들어내려고 할 가능성이 높았다.
이는 프로젝트 발의자인 강동현 수석 프로듀서나 1팀장의 의도와는 맞지 않는다.
지금도 보아라.
“…….”
1팀장이 화나기 직전의 치와와처럼 이빨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은가. 그는 성필을 향해 언짢은 시선을 감추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갈등이 있죠. 그래서 반려는 신중해야 해요. 거듭된 부정은 창의성을 소극적으로 만들잖아요. 자신만의 무언가를 만들어내려기보다, 누군가의 기준에 맞추려고만 노력하게 돼요.”
“그럼 어떻게…….”
“대화가 중요하죠. 시도 때도 없이 이야기를 나누고, 공감대를 형성하며, 함께 구상하는 과정을 지속적으로 이어 나가야 해요.”
정호환은 속으로 동의했으나, 그에겐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KS 엔터의 총괄 프로듀서다. 케이어스만 붙잡고 있을 순 없다.
당장 KS 엔터는 케이어스의 다음 타자인 보이그룹을 론칭하기 직전이다. 거기에다가 3년 후에 나올 또 다른 걸그룹도 있다.
말하면 입 아픈 사실이지만, 케이어스의 선배 그룹도 몇 개나 포진되어 있다.
솔로 아티스트들도 많다.
현실적으로, 정호환은 케이어스와 꼭 붙어 언제 끝날지도 모를 아이디어 회의를 계속할 여력이 없다.
‘박 이사님이니까 가능하신 방법이겠지.’
성필은 소녀연맹의 메인 프로듀서니까.
애초에 가로 엔터에는 그룹이 하나밖에 없다. 아니, 없었다.
정호환이 듣기로, 가로 엔터는 우효민을 영입한 데 이어서 옐로 서브마린 엔터를 합병할 예정이라고 하니까.
거기에 더하여, 일반적인 엔터사의 그룹 론칭 사이클로 추측하자면 곧 가로 엔터의 그룹 하나가 더 나올 것이다.
‘그건…….’
조금 걱정되기도 한다.
성필의 방법은 이상적이다. 하지만 가로 엔터가 커지면 커질수록, 그는 자신이 만든 수렁에 빠지게 될 것 아닌가.
언젠가 그도 현장에서 괴리되는 순간이 올 것이다.
“제 생각일 뿐이지만요.”
성필은 정호환에게 조언을 해주며 시종일관 조심스러움을 잃지 않았다. 그는 항상 정호환의 눈치를 살폈다.
무려 그 정호환인 것이다.
보통 사람은 정호환이 조언을 요청해왔다면 어깨에 힘이 들어가 이것저것 자신만만히 떠벌렸을 것이다.
하지만 성필은 그러지 않았다.
충분한 숙고 없이 내던지는 조언은 그냥 아무 말에 불과하다. 상대를 진지하게 대한다면, 말에는 포장이 필요하다.
“정호환 이사님은 ‘아티스트십’이란 이름을 너무 무겁게 생각하시는 거 같아요. 제 느낌으로는, 멤버들이 A&R팀으로 참여하는 정도거든요.”
‘우리들의 프로듀싱’은 멤버가 중심이 된다는 기획이지만, 아무래도 처음부터 끝까지 홀로 끌어갈 순 없는 노릇이다.
주변의 적극적인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니 ‘우리들의 프로듀싱’은 어느 천재 아티스트의 눈부신 결과물 같은 게 아니다.
단지 아이돌이 중심에 있을 뿐, 여전히 회사의 팀원들이 힘을 합쳐 만들어낸 공동의 결과물인 것이다.
“저도 처음에는 안절부절못했었거든요. 저는 그러니까, 정호환 이사님이랑은 반대였어요.”
“반대 말씀이십니까?”
“오히려 강하게 ‘안 된다’고 말하는 쪽을 선택했었어요. 저는 거절당하는 경험도 멤버들에게 필요하다고 확신했었으니까요.”
이는 당연한 일이다.
신입사원의 패기 넘치는 기획서는 높으신 분들이 보기에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망상의 모음이다.
코웃음 치면서 반려한다.
새파란 신입사원은 거절과 거절의 경험이 쌓여 대리가 되고 과장이 되는 것이다.
성필은 멤버들에게도 그러한 과정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아니었다.
“‘우리들의 프로듀싱’이 가지는 본질은 사실 이거거든요. 별로 하고 싶지도 않은 애들 잡아다가 억지로 ‘생각해! 고민해! 너 자신을 표현해!’라고 다그치는 거요.”
“아…….”
“저는 물론 멤버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지만, 그게 멤버들에겐 곧이곧대로 위로나 격려로 통하진 않았을 거 같아요. 그것 때문에 멤버들이 상처를 많이 받았을 거예요. 차라리 정호환 이사님처럼 훨씬 조심스러웠던 편이 더 나았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정호환은 그가 던진 말을 가슴 안에 넣고 묵묵히 소화시켰다. 그러면서 옆자리에 앉은 1팀장을 흘끗 보았다.
1팀장도 느끼는 바가 있던 모양이다. 화가 난 치와와는 온데간데없었다.
실제로 1팀장이 성필에게 가지는 평가는 시시각각 변해갔다.
‘혜성처럼 등장한 초인인 줄로만 알았는데.’
성필이란 사람도 나름의 고민이 있었다.
보통 그처럼 빠르고 확실한 성공을 구축한 이들은,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고집이 있기 마련이다.
권력은 인간을 짐승으로 만든다지 않던가.
심지어 성필이 구축한 권력은 그만한 능력을 증명함으로써 얻어낸 것이다.
자존감과 자신감으로 점철되어 눈이 멀어도 이상하지 않을 테고, 그 자신감에 누구도 반박하지 않을 텐데.
“어떤 후회는 시간이 오래 지나고서야 알 수 있는 거니까요. 어쨌든 저는 그 상황에서 제가 판단한 최선을 택한 거니, 감수해야죠.”
그는 본인이 가진 명성과 달리 겸손했다. 꾸민 태도인가 의심스럽기도 했으나, 일단 보이는 모습은 겸손하기 그지없었다.
“……마지막으로.”
정호환은 성필의 조언을 들은 즉시 전부 자신의 것으로 소화시켰다. 벌써 어떻게 이 프로젝트를 감독해야 할지 판단이 섰다.
“제가 더 알아야 할 게 있을까요?”
“믿는 거요. 정말 안 될 거 같을 땐 어쩔 수 없지만, 긴가민가할 때도 있잖아요. 그땐 믿으려고 노력하는 자세도 필요할 거 같아요. 아시다시피 아이돌이 10대와 20대에게 소구하는 이유는, 근본적으로 그 나이대의 감성을 대변하기 때문이잖아요.”
요컨대 아이돌의 감을 믿어보란 것이었다.
그들은 시대가 선사하는 자양분을 흠뻑 빨아들이며 성장한 이들이므로, 그들의 아이디어엔 분명 어떠한 빛이 있을 것이다.
복잡한 계산이나 어른의 통찰로도 잡아낼 수 없는 시대의 빛 말이다.
정호환은 옅게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박 이사님.”
“뭘요. 제가 영광입니다 정 이사님.”
“제가 이사님의 시간을 너무 많이 뺏은 건 아닌지, 죄송스럽습니다.”
“저 휴가예요. 남는 게 시간이에요.”
“1팀장, 혹시 박 이사님께 더 할 말이 있나?”
이 자리를 끝내겠다는 사인이다. 그러니 헤어지기 전에 무언가 따로 할 말이 있는지 묻는 것이다.
“네? 어…….”
고민하던 1팀장은 고개를 저으려다가,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박 이사님 ‘븨이에스’ 채널에 올라오는 건데, ‘어쩌다 만났슴다’ 아세요?”
“네, 알아요.”
“거기 나와보실래요?”
“정말요? 제가요?”
‘어쩌다 만났슴다’는 븨이에스의 멤버인 박수련이 진행하는 자체 예능이다.
내용은 리카의 자체 예능인 ‘자정의 인터뷰’와 비슷하다. 사람을 데려다 놓고 인터뷰하는 것이다.
‘어쩌다 만났슴다는 인터뷰라기엔 격식이 많이 없긴 하지만.’
‘어쩌다 만났슴다’는 정말 온갖 사람들을 다 불러서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눈다.
대본이 있다고는 하는데, 도저히 있는 걸로 보이지 않는다.
어느 에피소드에선 박수련이 ‘대본 이거 보세요, 이런 걸로 제가 어떻게 진행해요?’라며, 출연자 앞에서 대본을 던진 적도 있었다. 그리고 곧바로 프리토킹으로 들어간 것이다.
특유의 B급 감성과 박수련의 재담 덕에 조회 수가 상당히 높은 편이다.
“언제요?”
“오늘인데, 바쁘시면 내일이나 모레로 미루셔도 괜찮…….”
“할게요 저 오늘 시간 많아요!”
성필은 대체 오늘 몇 번이나 행운을 잡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정호환을 만나 그에게 상담을 제공했다. 이것만으로도 그의 자존감이 한 층 더 높아졌는데, 그의 작은 꿈 중 하나였던 ‘어쩌다 만났슴다’에 출연한다고?
‘올해는 일이 잘 풀릴 거 같아.’
일이 잘 안 풀려서 자아 찾기 여행을 떠난 거긴 하지만, 그래도 여행의 시작은 느낌이 좋았다.
“그런데, 오늘 갑작스럽게 찾아가도 괜찮나요?”
“네. 그거 촬영 보통 2시간도 안 걸려요. 편집은 하루 넘겨서 완성되고요. 별로 공들이는 예능은 아닌데, 가성비가 높은 편이죠.”
“와, 꿈 같네요.”
“너무 좋아하시면 제 쪽이 미안한데……. 직접 가보시면 많이 실망하실 수도 있어요. 정말 무계획으로 진행되는 거라서요.”
“부담감 없고 좋네요. 저도 수련 씨한테 ‘맞선 행동’ 당해보는 거예요?”
“아, 그거.”
1팀장과 정호환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박수련, 30대 아이돌. 올해 활동 7년을 꽉 채울 예정이다.
븨이에스의 멤버 중 하나가 재작년에 공개 연애를 선언한 이후, 븨이에스 팬 사이에선 밈이 하나 생겨났다.
공개 연애를 선언한 멤버에게가 아니라 박수련에게 말이다. 그녀는 미디어에서 ‘얘도 연애하는데 나는 언제 하나’라며, 남자 출연자들에게 예능용 플러팅을 반복했다.
븨이에스 팬덤은 박수련의 플러팅 모먼트를 모아 ‘맞선 행동’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그녀의 결혼을 응원하는 게 밈이 된 것이다.
그렇다, 팬들은 연애를 뛰어넘어 결혼을 응원한다. 박수련은 30대니까…….
성필도 ‘맞선 행동’ 영상 중 가장 유명한 ‘현재까지 수련이가 차인 남자 95명 목록’를 재밌게 본 기억이 있었다.
‘어쩌다 만났슴다는 B급 감성 덕분에 그게 더 잘 드러나지.’
무엇보다 박수련의 플러팅은 과하지도 않고 노골적이지도 않다. 그런데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설레온다.
예를 들어, 술자리에서 우연히 마주 앉게 된 털털한 학과 선배가 아무렇지 않게 ‘너 애인은 있냐?’라고 물어보는 것처럼.
“가끔 진짜 오해하시는 남자 출연자분들이 있어요.”
1팀장이 경고했다.
“그런데 그거 다 이미지 메이킹이에요. 예능용 이미지요. 그러니까 너무 몰입하시면 안 돼요.”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다.
박수련은 진소유 등장 이전까지(성필의 개인적인 의견으로 장하양의 등장 이전까지), 아이돌 중 외모 원탑이라고 불렸던 사람이다.
그녀의 무심한 매력에 끌려 심장이 타들어 갔던 남자가 과연 몇 명일까.
솔직히, 성필은 그녀가 애인이 없단 걸 믿지 않았다. 1팀장에게 직접 물어보고 싶었지만 대답해줄 리는 없다.
“그럼 지금 가능하세요?”
“예, 바로 갈까요?”
* * *
‘어쩌다 만났슴다’ 촬영 끝.
촬영은 소형 회의실 중 하나에서 진행됐다.
정말 테이블과 의자 두 개, 카메라 한 대가 설비의 전부였던 B급 방송이었다.
촬영은 예정된 2시간을 넘어 3시간 가까이 진행됐다.
성필은 긴장하여 흘린 진땀을 닦으며 박수련에게 허리를 숙였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보통 촬영이면 스태프들에게도 인사해야겠지만, 이 회의실엔 둘뿐이었다.
아무리 저예산 B급 예능 영상이지만, 이렇게 막무가내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듣자니 박수련이 재미로 시작했다는 모양인데, 그때의 정신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반말.”
“네?”
“반말하자고 했잖아.”
방송 시작 17초 만에, 박수련은 이 방송에선 5살 차이 이내는 무조건 반말한다며 반말을 강요했었다.
그냥 예능으로 하는 건 줄 알았는데.
“아…… 응.”
박수련은 카메라로 손을 뻗어 잡곤 촬영이 잘됐는지 확인했다.
성필은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괜히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나, 그럼 이제 갈게?”
“롤렉스네.”
“네? 아니, 어?”
박수련은 여전히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손목에.”
“아, 이거?”
일본에서 타츠야에게 선물 받은 것이다.
“선물받았어.”
“선물? 롤렉스를 선물로? 여자친구?”
“방송 때 없다고 말했는데, 하하.”
박수련은 카메라를 테이블에 두고 성필을 쳐다보았다. 약간의 시차를 두고 그녀가 빙긋 미소 지었다.
“안 믿었어. 아니다, 못 믿겠다? 어, 못 믿겠어.”
“아…….”
성필은 겸연쩍어서 볼만 긁적였다.
박수련의 말은 이런 뜻이었다.
‘박 이사님 같은 분에게 애인이 없다뇨? 못 믿겠는데요?’
은유적으로 사람 얼굴에 금칠해주는 법이다.
‘이게 영상으로만 보던 맞선 행동…….’
1팀장이 경고한 이유가 있었다.
“으음, 뭐, 선물. 알겠어.”
박수련은 성필을 배웅하려는 듯 일어났다.
성필은 회의실을 나선 후, 뒤로 돌아 박수련에게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가보겠습니, 가볼게.”
박수련이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연락해.”
성필은 쓴웃음과 함께 돌아섰다.
약간 멍한 정신으로 복도를 걷고 있자니, 엘리베이터 앞에서 정호환과 마주했다.
“이사님?”
“예상보다 촬영이 훨씬 길군요. 수련이가 많이 신났나 봅니다.”
정호환은 엘리베이터 옆에 배치된 벤치에서 일어나 성필에게 다가왔다.
“수련이가 곤란하게 한 건 아니지요?”
“아닙니다. 재밌었습니다.”
“다행입니다.”
성필은 엘리베이터 버튼으로 손을 옮기려고 했다. 그보다 빨리 정호환이 입을 열었다.
“박 이사님. 오늘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카페에서 상담했던 일을 말하는 것이리라.
“아닙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영광이었습니다.”
“보답이라고 하기엔 부끄럽지만, 저도 박 이사님께 몇 말씀 좀 드려도 괜찮을까요?”
“정호환 이사님 말씀이면 뭐라도 금처럼 여기죠.”
아무렴, 업계 최고의 프로듀서.
그리고 올해의 총괄 프로듀서 아닌가. 언젠가 성필이 도달해야 할 자리에 앉은 자였다.
“가로 엔터의 행보가 걱정스럽습니다.”
예상보다 훨씬 직접적인 말에, 성필은 표정 관리하는 것도 잊어버렸다.
“효민이 속한 이음 엔터에 지분투자를 할 때만 해도 별생각 없었습니다. 하지만, 옐로 서브마린 엔터 관련 기사를 보자 걱정이 되더군요. 박 이사님, 너무 빠르게 덩치를 불리는 게 아닌가 합니다.”
정호환에겐 어떤 심계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진실로 업계 후배를 걱정하는 것이다. 그 걱정이 전해지길 바라서, 성필의 귀에 달게 들릴 리 없는 말을 줄줄이 뱉었다.
“효민, 소녀연맹, 가로 엔터의 차기 그룹, 거기에 웨이퍼센트까지. 효민을 제외하자면, 박 이사님이 감독하는 그룹만 세 개입니다. 두 개까지는 박 이사님이 충분히 감당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만약 세 번째 그룹이 있더라도, 그게 가로 엔터 소속이었으면 가능했으리라 믿습니다. 그런데 외부 그룹이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
“게임 업계로 비유해보자면, 박 이사님은 한물간 게임을 산 겁니다. 그 게임을 개발했던 개발자들조차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모를 게임을 말입니다. 그 게임은 블랙박스입니다. 코드가 이리저리 꼬여 있어서 어떻게 뜯어고쳐야 할지조차 알 수 없을 겁니다. 골수 유저들만이 즐기고, 그들조차 이 게임이 더 유명해지리란 기대를 접었습니다. 심지어 유통기한까지 있죠.”
정호환은 웨이퍼센트를 직설적으로 표현하길 꺼려서, 굳이 게임이라는 비유를 가져왔다.
너무나 찰떡인 비유라 이해가 쉬웠다.
“비유가 아니라 다시 실재로 돌아오자면, 제가 보기에 웨이퍼센트는 포텐셜이 높은 그룹도 아닌 것 같습니다. 박 이사님이 거기에서 무엇을 보신 건지, 저는 물론 모릅니다. 하지만, 혹시 이런 생각 아니십니까?”
웨이퍼센트를 기사회생시키면, 성필 자신의 가치는 천정부지로 높아질 것이다.
“제 지레짐작일 수도 있겠지만, ‘올해의 총괄 프로듀서’가…… 박 이사님께 어떤 심경의 변화를 일으킨 겁니까?”
정호환은 관리하는 그룹만 한 손으로 꼽을 수 없다. 솔로 아티스트까지 따지자면 양손을 다 써도 셀 수 없다.
그렇기에 그는 ‘올해의 총괄 프로듀서’로 선정됐었다. 케이팝을 떠받치는 가장 거대한 기둥이니까.
정호환은 과거 성필과 나누었던 담소를 기억했다. 그의 팬임을 자처하고 함께했던 술자리를.
정호환이 굳이 성필에게 물어볼 것도 없이, 성필이 지닌 경쟁의식은 정호환에게도 절절히 느껴진다.
소녀연맹은 의심할 나위 없는 현세대의 정상급 그룹이다. 담당 그룹을 그 위치에 올려놓은 성필이니, 더 욕심이 생겨도 이상하지 않다.
최고의 총괄 프로듀서.
그의 능력을 보자면, 그러한 욕심은 적절하기까지 하다.
“적절하지만, 이건 너무 빠릅니다. 큰 산은 급히 오르는 게 아니라 천천히, 그러나 한 걸음 한 걸음 확실하게 오르는 겁니다.”
“맞아요.”
“예?”
“정호환 이사님, 제 꿈은 최고의 아이돌을 만드는 겁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얼마 전에 꿈이 하나 더 생겼어요. 저희 애들 덕분에요.”
“무엇입니까?”
“최고의 프로듀서가 되는 거예요.”
정호환은 대답하지 않고 미소만 지었다.
학생의 꿈을 듣는 선생의 미소였다. 학생의 꿈이 거창하여 이뤄질 가능성이 없단 걸 알아도, 선생이 할 수 있는 건 감탄하고 칭찬해주는 것뿐이다.
그런 의미의 미소였다.
정호환은 젊은이의 꿈에 가타부타 첨언하고 싶지 않았다.
“저는 산을 천천히 올라선 안 돼요. 급하게, 하지만 한 걸음 한 걸음 확실하게 오를 거예요.”
“알겠습니다. 제가 쓸데없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미 제 상상 이상의 성공을 이뤄내신 분에게 말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프로듀서란 건 그냥 성공한 그룹을 많이 만들었단 의미가 아닐 겁니다. 최고의 프로듀서가 있는 곳은 응당 최고의 기획사일 테니까요.”
정호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는 성필의 능력을 믿었으나, 안타까움을 숨기기 힘들었다. 정호환과 겨루었던 최초의 라이벌들은 가로 엔터와 비슷한 방식으로 무너졌었기에.
현재 대형 기획사라고 불리는 이들은, 몰락한 라이벌들과 다르게 천천히 확실히 성장해왔다.
살아남았기에 최고가 된 것이다.
십수 초 후 문이 열렸다.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박 이사님.”
“저도 그렇습니다. 다시 만날 날을 즐겁게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정 이사님.”
성필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또.”
성필이 말했다.
“저는 제가 담당할 그룹을 아무렇게나 고르지 않습니다.”
웨이퍼센트는 정호환이 말한 것처럼 포텐셜이 없는 그룹이 아니다. 그런 뜻이었다.
“정호환 이사님이 그렇듯이요.”
“예, 그들의 금의환향을 기대합니다.”
문이 닫혔다.
성필은 1층으로 내려와 KS 엔터의 홀을 걸었다. 언제나 생각한다. 정말이지 큰 곳이라고.
이만큼 큰 건물을 쓰려면 돈을 얼마나 벌어야 할까. 직원은 정확히 몇백 명이나 있을까.
가로 엔터도 이렇게 되는 날이 올까.
‘아니, 오지.’
어떤 성공은 믿음 없이 우연히 찾아오기도 한다. 하지만 성필이 추구하는 성공은 믿음 없이 찾아오기 힘들었다.
아무렴, 업계의 터줏대감을 꺾어야 한다.
최고의 아이돌을 프로듀싱하고, 최고의 프로듀서가 되고, 가로 엔터가 최고의 자리에 앉고.
‘우리 애들과 했던 약속을 지키려면.’
작년 시상식이 끝나고 멤버들과 했던 약속.
동시에 성필 스스로 맺은 약속.
그건 최고가 되겠단 선언이었으며, 그렇기에 KS 엔터를 꺾는단 뜻이었다.
성필은 KS 엔터를 나섰다.
폰을 꺼내어 메모장 앱을 펼쳤다.
‘어디 보자.’
메모장에는 그가 휴가 동안 찾아갈 장소와 사람들이 적혀 있었다.
그가 영혼의 지도라고 이름 붙인 목록 중 가장 첫 번째가 지워졌다.
KS 엔터는 끝났고.
‘다음은.’
* * *
“우리에겐 비대칭 전력 필요다!”
노아가 또 이상한 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글로브 멤버들은 듣는 둥 마는 둥, 연습실 곳곳에서 자기 할 일만 했다.
“왜 세계가 북한을 못 건드리나. 핵 때문이다. 우리도 윤 피디에 대항할 전력이 필요해!”
“너 아직도…….”
라희는 한숨을 쉬었다.
“윤 피디님 바뀌셨잖아. 더는 옛날 같지 않아. 또, 저번에 너도 그랬잖아. 피디님이 친절해지신 거 같다고.”
“그랬지.”
얼마 전 글로브 멤버들에게 경천동지할 일이 벌어졌었다. 무엇이냐면, 윤상열이 멤버들에게 ‘안녕’이라고 인사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인사 뒤에 감춰진 칼날을 느꼈다. 안심은 금물이야. 역사만이 거울인 법.”
“……그래서, 어쩌려구?”
보다 못한 라희가 노아의 말을 받아주었다.
반응이 오자 노아는 더 힘이 넘쳤다.
“글로브를 파멸시키겠다고 선언해!”
“연습 땡땡이치게?”
“방송에서 노래를 부른다. 노래는 가장 강한 힘이니까!”
“노래?”
노아는 목청을 가다듬고 노래를 불렀다.
“와레와 칸쿤 와가테키와
(우리는 관군 우리의 적은)
텐치 이레자루 쵸테키조
(천지도 용서치 않는 역적들이다)
테키노 타이쇼…….
(적의 대장……).”
몸의 절반에 독일인의 피가 흐르는 라희(본명 라우라 그라비나)는 노아의 노래에서 이상함을 감지했다.
라희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경고등이 깜빡였다.
문화는 DNA에 새겨지지 않은 진화다.
라희의 몸에 새겨진 문화가 비명을 지르기 직전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노아를 기절시켰다. 노아는 널브러진 비닐봉지처럼 연습실 바닥을 자기 침대로 삼아 누웠다.
“위험했어…….”
하나의 위기를 막았지만, 라희는 마음이 불편했다. 지유의 난 이후 글로브의 처우는 눈에 띄게 향상됐다.
그럼에도 윤상열에 대한 반감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게다가 옛날보다 그룹 내의 분위기가 안 좋아진 것 같기도 했다.
서로가 바라보는 곳이 다르다고 해야 할까.
윤상열이 통제할 때는 다들 ‘최고’라는 비현실적인 이상향만을 바라보았다면, 지금은 저마다의 목표를 향해 각개전투를 펼치는 기분이다.
라희는 그런 분위기를 쇄신하고 싶었지만, 힘들었다.
‘파벌이 갈렸어.’
그룹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일이었다.
글로브는 ‘안주하는 파’와 ‘조바심을 느끼는 파’로 나누어 있었다.
안주파의 수장인 지유와 그녀를 따르는 이들은 현재의 생활에 만족한다.
그에 비해 조바심을 느끼는 이들은 명확한 구심점이 없었다. 내심 옛날처럼 연습하던 시절을 바라는 이들도 있었다.
양소민이나 위세라처럼 말이다.
아직 두 그룹 사이에 그럴듯한 갈등은 없지만, 사이가 점점 벌어지는 게 느껴진다.
사건이 벌어진 건 그런 어느 날이었다.
“얘들아.”
대표 김태훈이 글로브 멤버들을 불러 모았다.
“지금까지 상열이가 너희한테 많이 모질었지?”
김태훈은 애정 어린 눈길로 멤버들과 한 명씩 눈을 맞추었다.
“나도 최근에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됐어. 지유 덕분이지. 지유가 그렇게까지 해야 했던 거, 충분히 이해한다.”
김태훈이 고개를 숙였다.
지유가 당황하여 손사래를 쳤다.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 거야. 윤 피디는 뭐랄까, 이런 관계에 서툴지. 언젠가 옛날처럼 변해버리지 않을 거라곤 확답 못 해.”
“역시 필요했어…….”
노아의 눈빛이 빛난 순간, 라희가 테이블 아래에서 그녀의 허벅지를 꼬집었다.
“대비를 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김태훈이 기대하란 것처럼 씩 미소 지었다.
“글로브에겐 앞으로 선택지가 있을 거다.”
“선택지요?”
“우리 회사에 유능한 프로듀서님이 또 들어오셨거든.”
김태훈은 그가 작곡한 곡을 쉬지 않고 읊었다. 그중엔 유명한 그룹의 타이틀곡, 수록곡이 많았다. 심지어 소녀연맹도 그 안에 껴 있었다.
멤버들이 감탄했다.
“그런 분이 저희 회사에 프로듀서로……?”
“그럼! 석세스 엔터 그 정도 된다 이거야! 다 너희 덕분이다, 고마워 얘들아.”
글로브 멤버들 사이로 훈훈한 분위기가 퍼졌다.
동시에, 그녀들은 어째서 최근 윤상열의 상태가 이상했는지(친절해졌는지) 알게 됐다.
그는 입지의 위기를 느끼고 뒤늦게나마 멤버들의 환심을 사고자 했던 것이다.
“어디 보자, 이건 일종의 경쟁이지. 윤 피디랑 그 프로듀서님이 경쟁하는 거야. 무려, 너희들의 선택을 두고! 자, 윤 피디가 앞으로 너희한테 함부로 못 하겠지? 어, 유현아.”
김태훈은 손을 든 최유현을 가리켰다.
“왜?”
“윤 피디님이 그냥 저희를 버리시면요?”
“버려? 상열이가? 으하하!”
김태훈이 배를 잡고 웃었다.
“너희는 동의 못 하겠지만, 걔는 너희를 되게 소중하게 여겨.”
“소중히는 뭔…….”
지유가 작게 혀를 찼다.
“뭐, 소중하단 게 꼭 아껴준다는 이야기는 아니지. 아무튼, 상열이가 너희를 포기하진 않을 거야. 그렇게 두지도 않을 거고. 어쨌거나 이 선택권으로 말미암아 너희는 옛날 같은 처지에 절대, 절대 안 처하게 될 거야! 이게 바로 노사 혁신 아니겠니?”
“옳소!”
노아가 주먹을 불끈 쥐고 들어 올렸다.
“드디어 우리에게도 볕이 들다! 더는 공포와 압제에 신음할 일 없어!”
“노아가 한국말이 많이 늘었네.”
“그렇다, 대표.”
“존댓말만 좀 어떻게 했으면 하는데.”
김태훈은 손뼉을 쳤다.
그러자 회의실 문이 열리고, 석세스 엔터의 새로운 프로듀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프로듀싱 2부의 총괄 프로듀서.
“안녕 얘들아, 유구성이야. 예명은 엘릭. 앞으로 잘 부탁한다.”
노아가 김정은을 마주한 북한 주민처럼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박수를 쳤다.
다른 글로브 멤버들도 호의적으로 그를 맞았다. 라희만이 불안한 눈빛을 숨기지 못했다.
엘릭은 부끄러운 투로 그만하라 하고 멤버들의 앞에 섰다.
“자, 그럼 대면식 잘 치르도록. 나는 가볼게. 어, 구성이 잘해.”
“넵 대표님.”
김태훈이 나갔다.
엘릭은 천천히 글로브 멤버들을 둘러보았다.
“나도 이런 건 익숙하지 않거든. 아니, 처음이지. 곡으로 경쟁이라니. 뭐, 작곡가란 게 곡을 팔려면 이런 일이 있긴 하지만, 아예 그룹을 걸고 경쟁하는 건 처음인 거 같다. 암튼, 크흠. 일단 내 프로듀싱 계획을 설명하려고 해. 즉, 너희의 다음 앨범 계획이지.”
글로브 멤버들은 기대감에 부풀어 그의 입만을 응시했다.
오늘은 혁명의 날이다. 그토록 바랐던 완전한 자유가 손에 쥐어진 날이다.
게다가 엘릭은 윤상열처럼 강압적인 성격도 아닌 듯하다. 왠지 그와 잘 지낼 수 있을 듯한 예감이 들었다.
“너희의 다음 앨범 컨셉은 몽환청순이야.”
* * *
“윤 피디!”
윤상열의 작업실 문을 벌컥 열어젖힌 노아가 피 맺히는 목소리로 외쳤다.
“내가 이런 말을 할 줄은 몰랐지만, 임시 동맹이다!”
작업실 안에는 윤상열과 성필이 마주 보고 있었다.
“……엑?”
노아는 성필과 윤상열을 번갈아 보곤.
“아하!”
사건의 전말을 깨닫자마자 성필에게 쪼르르 달려가 팔에 매달렸다.
“어이어이 박 팀장! 믿고 있었다구! 우리를 구해주러 왔구나! 이렇게 된 이상 무서운 건 하나도 없다! 윤 피디, 동맹은 파기다!”
“그냥 얼굴 보러 온 거야.”
“엑.”
노아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 슬며시 성필에게 떨어졌다. 그리고 윤상열의 옆에 붙었다.
“임시 동맹이다!”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