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2화
KS 엔터 총괄 프로듀서 정호환.
그는 오랜 세월 한국의 엔터계에 몸담아 왔다. 사실, 마음먹고 과장해보자면 그의 커리어가 곧 케이팝의 역사라 보아도 좋았다.
케이팝의 큰 어른인 그는 여느 업계의 중역들이 그러하듯이 엣헴 한 소리 할 수 있는 위치였다.
‘요즘 애들은’으로 시작하는 세태 비판은, 그의 위치로 말미암아 커다란 영향력을 가질 터다.
하지만 그가 비판하는 ‘요즘 애들’은 그를 꼰대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어른으로서의 시선을 철저히 숨겨왔다.
그래도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건 괜찮으리라. 그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런 정호환이 생각하건대, 그는 고민 없는 프로듀싱을 싫어한다.
‘충분한 고민과 숙고, 아이디어의 숙성 없이 마구잡이로 행해지는 프로듀싱.’
뒤에 컨셉을 붙여 행해지는, 고민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값싼 무대들.
청춘 컨셉, 걸크러시 컨셉, 섹시 컨셉, 학생 컨셉, 할로윈 컨셉, 다크 컨셉, 몽환 컨셉, 판타지 컨셉, 국악 컨셉…….
남들이 시도한 성과에 숟가락을 올려, 클리셰만 잔뜩 모아두고 새로운 도전이라면서 관심을 호소하는 무대들이다.
자기가 해본 적 없는 컨셉을 시도한다고 도전이 되는 게 아니다. 도전이란 찬란한 이름은, 진정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했을 때 빛나는 것이다.
‘작곡가한테 대충 곡 구해오고, 작사가한테 대충 가사 받고, 스타일리스트한테 대충 옷 받고, 뮤비 감독한테 대충 스토리보드 받고.’
그러면서 프로듀서가 고민한 결과물이라면서, 스태프들에겐 클리셰로 범벅된 단어들 몇 개만 던져주었겠지.
그렇게 고민 없이 만들어진 무대는 가볍다.
코스프레나 다름없다.
진정으로 아이돌을 위한 무대란 곡의 구조와 사소한 장치조차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가사의 가장 미세한 어감마저도 고려해야만 한다.
밖으로 내보이지 않는 옷의 안감조차 심각한 논의 대상이 되어야만 한다.
설령 한 명도 눈치채지 못할 뮤직비디오에서의 심볼조차 체계적으로 배치되어야 한다.
춤의 말단인 손가락 끝도 디렉팅의 대상에 포함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정호환은 ‘컨셉’이란 이름이 붙은 클리셰 범벅을 혐오한다. 그건 프로듀서는 물론이고, 프로듀싱에 참여한 스태프들의 상상력이 말살된 결과이므로.
“그러니까.”
사랑스럽기 그지없는 케이어스의 멤버 중 하나. 정호환의 보석인 진소유의 얼굴만큼이나 아름답고 매혹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곡은 소설이 되어야 합니다. 내용은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윤회를 거치고 거쳐, 모든 생에서 연인이었던 두 사람의 이야기요. 현대에서도 둘은 사랑해야만 합니다. 그게 운명이에요. 하지만 그걸 깨달은 건 가사의 화자인 저뿐입니다. 이 곡은 소설이고, 소설의 주제는 애틋함과 기다림이며, 저는 가사 속의 ‘너’를 향해 노래합니다.”
진소유는 프로젝터 스크린을 등 뒤에 두고 열띤 발표를 이어 나갔다.
스크린에는 그녀가 구상한 솔로 데뷔 타이틀곡의 세계관이 묘사되어 있었다.
이 자리는 ‘케이어스 아티스트십 프로젝트’의 첫 번째 계획 발표회였다. 강동현 수석 프로듀서와 1팀장이 제안했던 프로젝트의 성과가 처음 발표되는 자리다.
영광스러운 첫 타자는 진소유였다.
그녀는 첫 타자다운 열정적이고 도전적인 태도를 내보였다.
“전생의 연인이 시공을 뛰어넘어 현대에 다시 만난다…….”
클리셰다.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두 사람이 그려가는 로맨스.
“네, 전생의 연인이란 로맨스 장르에서 흔히 사용되는 서사구조입니다. 저는 그걸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타이틀곡 가제(假題)는.”
스크린의 사진이 바뀌었다.
진소유가 직접 그린 스케치였다.
연필로 러프하게 표현된 그림은, 드레스를 입은 사람과 연미복을 입은 사람이 역동적으로 껴안은 모습이었다.
“‘하나였어’입니다. 한국의 ‘창세가’나 서양의 신화에서 보아도, 하늘과 땅으로 비유되는 남녀는, 즉 연인은 원래 하나의 인간이었다고 합니다. 신들은 여러 이유로 그를, 그러니까 원래 하나였던 인간을 둘로 나누어 떨어뜨려두었습니다. 이유는 오만해서, 혹은 계속 붙어 있으려 해서, 신이 아님에도 완벽하기에. 저는 이런 신화에 착안하여, 가사 속 화자가 표현하는 사랑을 ‘하나였어’란 가제로 나타내고자 합니다. 네.”
우리는 원래 하나였어, 그러니 다시 하나가 될 거야, 사랑으로써.
“이게 제 솔로 데뷔곡 기획입니다.”
프레젠테이션이 끝났다.
회의실에 자리한 프로젝트 스태프들은 조심스레 정호환의 안색을 살폈다.
정호환은 일단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천천히 손을 움직여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으어허어어어…….”
흐느낌 비슷한 한숨을 내뱉었다.
진소유가 프로젝트 스태프, A&R팀과 혼신을 다하여 뽑아냈을 이 기획은 클리셰 범벅이었다.
로맨스 판타지 웹툰 홍보 노래라고 해도 믿을 지경이었다.
이 기획엔 정호환이 싫어하는 모든 게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걸 진소유가 하고 싶다고 한다.
“흐어어어어…….”
정호환은 생각했다.
‘박 이사님, 당신은 대체 어떤 싸움을 하고 계셨던 겁니까?’
이러한 소녀(27세)의 걸러지지 않은 아이디어들을 그토록 정갈하고 세련되게 표현해왔단 건가?
‘대체…….’
대체 이걸, 어디서부터 건드려야 할까?
“‘하나였어’의 세션 녹음은 국내 최대 규모의 레코딩 스튜디오를 대여할 예정입니다. 60인조 오케스트라를 세션 연주자로 초대할 거고요. 편곡의 용이함을 위해서 세계 정상급 지휘자도 섭외하고 싶습니다.”
“으허허허엉…….”
정호환의 흐느낌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이사님이 감동하셨나 봐…….”
정호환의 마음도 모르고, 강동현 수석 프로듀서는 뿌듯함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 * *
성필의 휴가 소식은 모두에게 갑작스러웠다.
특히 멤버들에게 그러했다. 말 한마디 없이 한 주 동안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니, 자연스레 궁금증이 생겨났다.
“카노죠(여자친구)?”
“아냐.”
리카의 추측을 신아름이 단박에 부정했다.
“그러면?”
“여행 가신다고 하셨어.”
“에엑?! 아름이한테는 얘기해준 거야? 치사해!”
“나도 오늘 아침에 톡으로 들은 거야.”
신아름은 평소처럼 출근하자마자 성필을 찾았었다. 그런데 없었다.
연락하니 ‘자아 찾기 여행’을 떠나야 해서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한다.
“뭔 사춘기 청소년이야?”
조아라는 어처구니없단 듯 혀를 찼다. 그녀의 어투에는 옅은 언짢음마저 있었다.
아마 얼마 전 그녀가 성필에게 가사를 보여주러 갔을 때, 그가 차갑게 대했기 때문이리라.
요새 성필은 유독 조아라에게 차가웠었다. 그녀는 뒤바뀐 성필의 태도에 혼란스러웠고 동시에 불안했다. 하지만 그걸 그대로 표현하진 않았다.
그녀의 불안은 짜증으로 뒤바뀌어 표현되었다.
“걍 쉬는 거지 자아 찾기는 개뿔이…….”
“아라쨩, 박 이사님도 드디어 슈투름 운트 드랑(Sturm und Drang)의 시기에 진입하신 거야!”
조아라는 리카의 독일어 발음에 살짝 놀랐다. 꼭 한구인이 말하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저 단어도 한구인에게 배웠을 수도 있겠지.
“슈투름…… 그게 뭔데?”
“질풍노도! 박 이사님은 어느 날 머리에서 뿔이 자라신 거야! 참고로 뿔은 사춘기의 비유야!”
“……무슨 밈이야?”
별로 알고 싶진 않다.
어쨌거나 사춘기라니. 35세 아저씨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시기다. 그런 건 10대 다 겪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쌤은 뭐 아는 거 없어요?”
백설하가 흠칫했다. 그녀는 놀란 나머지 가볍게 들고 있던 건강즙 텀블러를 놓칠 뻔했다.
“아저씨가 쌤 편애하잖아요.”
“야 조아라, 팀장님이 누구 더 좋아하니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했잖아. 쌤은 편애받는 게 아니라 리더로서 신뢰받는 거지.”
조아라는 신아름을 무시했다.
“쌤한테는 귀띔이라도 해줬을 거 같은데.”
백설하는 입술을 뻐끔거리다가, 예능에서 ‘우파루파 보여주세요’란 부탁을 받았을 때처럼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흠, 쌤도 모르고…….”
“근데 자아 찾기 여행이 뭐지?”
스마트폰이 신체 일부가 된 리카는 궁금증이 떠오르자마자 인터넷에 검색해보았다.
“자아를 찾으러 떠난 여행이 돌이킬 수 없는 위험으로…….”
리카가 기사 제목을 읽자 백설하는 화들짝 놀랐다.
“실존적 고민을 품은 사람들은 일부러 위험지역에 여행을 가곤 한다. 이를 자아 찾기 여행이라고 하며, 위험에 자신을 맡기는 걸 정당화한다. 역사상 많은 인물들이 그러했으며, 가장 유명한 이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일 것이다. 그는 삶의 의미를 찾고자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백설하의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정부는 위험지역으로의 여행을 만류하는 입장을 표한 지 오래다. 하지만 이러한 혼행(혼자 여행)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현대 사회가 낳은 몰개성화와 자아 말살의 증거일까.”
백설하는 아까 위 안에 넣은 건강즙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자아를 찾는다는 명분으로 위험지역으로 가는 젊은이들에게 권고하고 싶다. 삶의 의미는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치르치르와 미치르의 이야기처럼, 파랑새는 집 안에 있는 것이다. 모험심과 한계 극복의 욕구를 충족하고픈 마음은 이해하지만, 일단 주변을 둘러보면 어떨까. 에에, 뭐야 이게.”
리카는 시시한 기사라는 듯 바로 기사 페이지에서 벗어났다.
“그냥 평범하게 대충 쓴 칼럼이네.”
“그래도 자아 찾기 여행이 뭔진 대충 알겠다. 걍 심심해서 돌아다닌단 거잖아.”
“아라쨩은 세상이 단순해서 좋겠네!”
조아라는 리카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동생 라인은 성필의 자아 찾기 여행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연말에 연차 소진 때문에 다키스트 성지 순례로 전국 방방곡곡, 일본 여기저기를 돌아다닌 사람인데 자아 찾기 여행이 무슨 대수라고.
하지만 그 이야기를 옆에서 들은 백설하는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없었다. 그녀는 심란한 마음을 필사적으로 숨기며 연습실을 나섰다.
백설하는 장하양을 찾아 회사를 돌아다녔다.
“아뇨, 언니.”
장하양은 2층의 복도 외진 곳에서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다.
“네, 이해했어요. 뮤직비디오 스토리도 알겠고요. 그런데 이미 말씀드렸듯이, 이 일은 제 독단으로 결정할 일이 아니에요. 먼저 저희 회사에 문의를 주세요. 네? 개인적인 감상…… 하아. 저, 언니. 주제가 전생의 연인이 사랑을 찾는 이야기인 거죠? 동성애에 대한 편견이 있는 건 아니지만, 퀴어코드가 있는 뮤직비디오에 출연하는 건 심사숙고가 필요해 보여요. 네? 검토하겠단 뜻이 아니라 완곡한…….”
장하양은 모퉁이에서 나타난 백설하를 보곤 전화를 끊었다.
“죄송해요, 일이 생겼어요. 죄송해요 언니. 네, 조만간 뵀으면 하는 마음이 제 가슴 깊은 곳 어딘가에는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장하양은 폰을 패딩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그리고 백설하에게 고개를 돌린 그녀는 전화할 때의 예민함이 온데간데없이 가셔 있었다.
“하양아아…….”
하지만 장하양의 미소는 백설하의 울상을 마주하곤 금세 자취를 감추었다.
“언니, 왜 그러세요?”
“이사님 얘기는 들었어……?”
“네. 여행 가셨다고 들었어요. 심경의 변화가 있으신 거 같아요. 유머 영상을 보내드렸는데도 큰 반응이 없으시더라구요. 평소엔 ‘ㅋ’을 10개 이상 써주시는데, 오늘은 ‘재밌네ㅋㅋ’라고만 보내셨어요.”
“…….”
딱히 상담과 관련이 없긴 하지만, 백설하는 무슨 영상을 보냈는지 물었다.
장하양이 폰을 꺼내어 보여주었다.
로마군 복장의 시바견이 ‘이탈리아 이탈리아 파스타 이탈리아’란 노래를 부르면서 행군하는 영상이었다.
“……???”
대체 이게 뭐가 웃긴 지 모르겠어서, 백설하는 방금까지 마음을 어지럽히던 슬픔도 가셨다.
“그래서, 무슨 일이세요?”
백설하는 퍼뜩 ‘이탈리아 이탈리아 파스타 이탈리아’의 충격에서 벗어났다.
다행히 아까보다 우울하지 않아, 논리적이고 냉철하게 장하양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었다.
어디까지나 ‘아까보다’는 그러하단 것이었다.
“내, 내 사과 때문이야아……. 하양이 말이 맞았어어……. 내가 괜히 이사님한테 또 상처를 줬나 봐아…….”
“…….”
이런 상황에 와서까지 장하양이 백설하를 쉽게 위로할 순 없었다.
장하양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백설하가 했던 말이 성필에겐 상처였던 모양이다. 그 일이 있고 난 바로 다음 날 휴가를 내곤 여행을 떠난 걸 보니 말이다.
“내가 쓴 편지가, 뭔가 잘못됐던 걸까…….”
“제가 볼 수 있을까요?”
백설하는 꼬깃꼬깃 접힌 편지를 장하양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걸 읽은 장하양이 떠올린 생각은, 백설하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녀의 고민과 전혀 상관없는 것이었다.
‘이거.’
장하양은 백설하의 편지에서 영감의 반짝임을 보았다.
‘몇 문장만 빼서 가사로 넣어도 되겠는데?’
* * *
워크숍이 끝났다.
1팀장은 강의가 끝난 후 성필의 귀추를 주목했다. 의외로 그는 금방 짐을 챙겨서 강당을 나섰다.
‘……음?’
케이어스 멤버를 만나러 왔다거나, 정호환을 보고 청탁을 한다거나, 하물며 1팀장에게 KS 엔터의 노하우를 캐내려 하지도 않는다고?
정말 수업만 듣고 갔어?
“저!”
1팀장은 마음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복도를 나서 성필을 따라잡았다.
“박성필 이사님!”
방금까지 강단에 서서 프로페셔널하게 강의하던 1팀장. 그가 자신을 알아보자 성필은 놀란 기색을 역력히 드러냈다.
“예, 맞습니다.”
“정 이사님이랑 애들한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1팀장이 악수를 청하고, 둘은 손을 섞었다.
워크숍을 끝내고 돌아가던 이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성필을 보는 시선은 두 종류였다.
강단에 섰던 KS 엔터의 관리자급 매니저가 따로 아는 척하는 사람이 있단 게 신기해서.
아니면 소녀연맹의 프로듀서인 박성필을 알고 있기에.
성필은 관심이 집중되자 불편했다.
“시간 괜찮으시면 뭐라도 마시지 않으실래요?”
그때 1팀장은 호감을 사는 사근사근한 투로 물었다.
성필은 짧은 고민 끝에 알겠다고 답했다.
그래서 현재에 이르렀다.
둘은 KS 엔터 근처 프랜차이즈 카페 흡연실에 있었다.
“저 담배 한 대만.”
“아, 네.”
1팀장은 내심 당황했다.
성필은 담배를 피우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었다. 그런데 막상 흡연실로 들어오니 담배가 없다니.
“라이터도 좀…….”
“아…….”
라이터도 없다?
담배를 얻어 피우는 버릇이 든 사람도 라이터는 가지고 다니기 마련이다. 그런데 라이터마저 없다니.
‘이상한 사람이네.’
특이한 걸 넘어서 그냥 이상하다.
1팀장은 연기를 한 모금 마시곤 기계적인 미소를 만들어냈다. 다른 사람이 보아선 절대 연기라고 생각하지 못할 숙련된 표정이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젠가 직접 뵙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회사 밖이든 안이든 이사님 이야기를 못 들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저희 워크숍에는 어떤 일로?”
“제가 지금 휴가거든요.”
“아, 그러세요? 자기 계발 그런 걸로 얻으셨나요?”
“아뇨, 진짜 휴가요.”
“……?”
“제 인생에서 의미 있는 장소를 돌아다니려고요. KS 엔터가 첫 목적지였어요.”
“…….”
1팀장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야기를 더 들어봐야 알 듯했다.
둘은 담배를 다 피우고 자리로 돌아왔다.
둘 다 어색함은 느끼지 않았다. 매니저란 존재는 처음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가 어색한 종류의 인간이 아니다.
성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KS 엔터로 오고 싶었어요.”
“옛날에 말씀이시죠?”
“네. 그런데 KS 엔터는 로드매니저도 학벌을 보더라고요. 제가 대학을 안 나와서, 결국 입사 지원도 못 했습니다.”
무거운 이야기다.
하지만 1팀장은 유머로 받아쳤다.
“지금도 그렇고, 옛날 윗분들이 그렇잖습니까. 학벌을 모든 능력의 기준으로 생각하는 거요. 참, 인사처 꼰대들 때문에 굉장한 프로듀서를 놓쳤네요.”
“그렇게 말씀하셔도 돼요?”
“그럼요, 박 이사님 아닙니까!”
둘이 짜기라도 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술을 먹지도 않았건만 술 먹은 것처럼 벽을 허물어버리는 능력. 영업으로 단련된 매니저의 힘이었다.
“자아 찾기 여행이라고요? 부럽네요. 자아…… 사람이 직접 입으로 말하는 걸 들어보긴 거의 처음이에요. 학교 강의에서 교수님이 말하는 거 빼고요. 그런데 박 이사님이면 이미 자아가 확고하시지 않습니까? 제가 박 이사님이었으면 어깨가 한라산급이었을 텐데요.”
“그냥 인생의 쉼표라고 생각해요.”
“KS 엔터 다음은 어디로 가실 생각입니까?”
성필은 폰의 메모장 안에 적어둔 장소, 아니.
사람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성필은 그 목록을 ‘영혼의 지도(Map of the soul)’라고 부르기로 했다. KS 엔터는 지도의 시작점일 뿐이다.
“정호환 이사님을 뵐까 말까, 고민하는 중입니다. 어제도 연락을 드릴까 몇 번이나 고민했는데, 그냥 안 드렸어요.”
“왜요?”
“음, 저도 잘 모르겠어요.”
“소녀 같은 대답이네요.”
성필은 피식 웃었다.
조아라가 떠올라서였다. 그녀가 1팀장이 하는 말을 들었으면 ‘성에 대한 고정관념이 강하네요’ 같은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뭐 어떱니까. 박 이사님처럼 대단한 프로듀서님이 오신다면 정호환 이사님도 두 팔 벌려 환영하실 텐데요.”
“그러면 좋겠네요.”
“저희 매니저들도 박 이사님 얘기 많이 하고 그래요. 매니저 출신 프로듀서 중에 가장 성공하신 분이니까요.”
“정말요?”
“제가 알기로는 그래요.”
“음.”
성필은 쑥스러워서 반쯤 남은 음료 컵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생각이 나 물었다.
“프로듀싱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하신 적 없나요?”
“저요? 저 원래 작사가였어요.”
“아, 진짜요?”
“네. A&R에 참여한 적도 꽤 있어요.”
“그런데 왜…….”
“매니저가 됐냐고요? 저는 뭐, 일하면서 저절로 자아를 찾은 케이스예요.”
1팀장은 오랜 시절의 과거를 훑는 것처럼 눈동자를 여기저기로 굴렸다.
“A&R에 몇 번 몸담고, 제가 낸 기획이 성공하는 걸 보니까 어깨가 한라산이 되더라고요. ‘내가 프로듀서랑 뭐가 달라?’란 생각도 들고, ‘나 프로듀서가 돼도 성공하는 거 아닌가?’ 하는 교만함까지 생겼어요.”
“어떤 곡 맡으셨는데요?”
1팀장이 2세대 그룹의 곡을 줄줄이 읊었다.
성필은 감탄했다. 그리고 1팀장의 스타일을 어느 정도는 알 듯했다.
파격적인 걸 좋아하는 듯했다.
1팀장은 성공한 곡을 읊다가, 이내 실패한 곡도 나열하기 시작했다.
확실하다.
그는 파격을 좋아한다.
“실패도 겪다 보니 자괴감이 들더라고요. 내가 가사를 이상하게 써서, 내가 낸 기획이 괜히 채택돼서, 내가 추천한 의상이 안 어울려서, 다 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 아닌가 하고요. 근데 아시겠지만, A&R팀원은 성공했을 땐 공을 나눠 갖지만 실패했을 땐 아니거든요.”
“그렇죠.”
성공은 팀원들과 나누지만, 실패는 책임자인 프로듀서의 것이다.
그래서 프로듀서란 이름이 무겁다.
“난 절대 저 자리에 못 앉겠다 싶었어요. 사소한 의견 낸 걸로도 자괴감 느끼고 세상이 망한 거 같은데, 프로듀서? 지나가던 개가 웃지.”
1팀장은 버릇처럼 테이블 위에 올라온 차 키를 만지작거렸다.
“제가 봤을 때 프로듀서는 영감이 아니라 통찰이 필요한 직업이에요.”
A&R팀은 곡을 수급하고, 만들고, 편곡하지만, 결국 최종적으로 곡을 선택하는 건 프로듀서다.
퍼포먼스 디렉터, 비주얼 디렉터, 의상 책임자, 뮤직비디오 감독, 스테이지 감독.
모든 감독직이 결과물을 내놓지만, 마찬가지로 최종적으로 선택하는 건 프로듀서다.
그래서 프로듀서는 실패의 모든 책임을 진다.
그런 프로듀서에게 필요한 건 즉흥적인 감이 아니다.
“통찰, 계산, 그리고 책임. 저한텐 무거운 말들이었어요. 그래서…….”
“매니저가?”
“도망 같은 거였어요. 그런데 하다 보니까, 저는 작사가나 A&R 일보다 인간관계를 조율하는 데 더 적성이 있더라고요. 아마 박 이사님은 반대였겠죠?”
“그런 편이라고 생각해요.”
“프로듀서가 되셔서 다행이네요. 세상한테도 득이 됐고요. 저마다 운명이 있는 거겠죠.”
“팀장님도요.”
“……제가요?”
“케이어스를 담당하시잖아요. 1팀장님의 노력 덕분에 케이어스가 원활하게 활동할 수 있는 거겠죠. 유스로서 항상 감사한 마음이에요. 케이어스처럼 휴식기를 잘 보장해주는 그룹 또 없으니까.”
“하하, 참.”
1팀장은 빙긋 웃으면서 차 키 만지는 것을 그만두었다.
“매니지먼트가 칭찬받는 게 참 어려운 일인데, 유명한 프로듀서님께 칭찬받으니 감개가 무량하네요.”
1팀장이 ‘담배?’라고 물었다.
성필은 고개를 저었다.
1팀장은 홀로 흡연실로 갔다. 담배를 물고 그는 약 30분간의 대화를 복기했다.
‘생각보다 훨씬 좋은 사람이잖아?’
아직도 6,000만 유스 드립은 용서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냥저냥 넘어가 줄 만한 인성의 보유자인 듯하다.
진저에게 6,000만 유스 드립의 진실을 밝히고 사과한다면, 묵은 반감을 전부 없애줄 수도 있다.
이런 말은 그 앞에서 못 하겠지만.
그때 그의 전화가 울렸다.
정호환이었다.
“예, 이사님.”
[자네 지금 어딘가?]
“아, 워크숍 마치고 잠시 밖에 있습니다. 프로젝트 건입니까?”
[그래요. 밖에 있으면, 업계 사람이랑 있나? 바로 오기 힘든 분위기인가?]
“아닙니다. 한담만 나눴습니다. 워크숍 참가자 중 한 명인데, 가로 엔터의 박성필 이사님이었습니다.”
[뭐요?! 거기 어디예요!]
“예? 아, 여기.”
1팀장이 프랜차이즈 카페의 이름을 말했다.
[기다려요!]
뚝.
전화가 끊겼다.
1팀장은 황망한 기분으로 폰을 주머니 넣었다.
‘기다리라고?’
설마, 여기로 오신단 뜻인가?
1팀장은 흡연을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다.
“슬슬 일어날까요?”
성필이 물었다.
“아뇨, 그게, 잠시만 기다려주실 수 있으실까요? 오신다고 하셔서……. 회사에서 바로 오실 테니까 얼마 안 걸릴 겁니다.”
“와요? 어떤 분이요?”
“정…….”
카페 현관문에 달린 종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문이 열린 곳엔 달려왔는지 머리칼이 어지럽게 헝클어진 정호환이 있었다.
그는 거칠게 숨을 내쉬며, 산소가 부족해 몽롱해진 눈동자로 카페를 훑었다. 그리고 성필을 발견하곤 부릅뜬 눈으로 거의 뛰듯 걸어왔다.
“박 이사님!”
“정호환 이사님?”
“컨설팅 좀 부탁드립니다!”
“네, 네?”
컨설팅?
‘내가?’
KS 엔터의 정호환 이사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