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화
“아뇨, 언니.”
그건 여느 날과 다름없던 일상의 끝자락이었다.
“섭외료가 얼마인지가 문제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잖아요. 이 일은 저한테 개인적으로 문의 주실 일이 아니라, 가로 엔터를 통해야 해요. 네? 하아, 네. 제 의사가 있으면 회사도 긍정적으로 검토할 가능성이 높지만요. 저는 독단으로 섭외를 처리하고 싶지 않아요. 일단 회사에서 검토한 후에 제가 받아서…….”
“하양아.”
진소유와 전화를 통하여 설왕설래하던 장하양은 언니 백설하의 부름에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곧 느슨하게 누워 있던 자세를 바꾸어 바르게 앉았다.
백설하의 표정이 진지했다.
“언니, 이만 끊을게요. 귀찮아서 끊는 거 아니에요. 네, 저도 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장하양은 폰을 침대 어딘가에 던져놓곤 백설하와 마주 보았다. 마주 보니 더 확실히 보인다.
백설하의 얼굴은, 특히 눈은 불안과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뒤범벅 섞여 있었다.
그녀는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보곤.
아니, 보는 것만으로는 안심하지 못하여 문고리를 몇 번이나 당겨 잠겨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제야 다시 장하양의 앞으로 돌아왔다.
“가사가 잘 안 풀리세요?”
백설하는 묵묵히 고개를 저었다. 그 뒤로도 말이 나오기까지는 꽤 긴 침묵을 거쳐야만 했다.
장하양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백설하가 꺼내는 이야기가 보통 무거운 건 아닐 거라고 예상하면서.
“하양아.”
“네.”
“너 박 이사님이랑 명절에 본가로 가잖아.”
장하양은 표정 관리에 더 힘을 썼다. 그리고 백설하에게 들려줄 95개 조 반박문을 머릿속으로 써 내려갔다.
사랑스러운 언니이지만, 성필의 가정사를 털어놓는 건 해선 안 될 일이다.
성필조차 백설하에게 밝히지 않은 것을, 장하양이 뭐라고 왈가왈부하겠는가.
“그거, 그러니까, 귀성이 아니라, 본가로 찾아뵙는 게 아니라.”
백설하는 겨우겨우 턱 끝에 맺힌 목소리를 밖으로 꺼내었다.
“성묘야?”
“…….”
장하양의 눈이 깊이를 더했다.
그녀는 백설하가 떠보는 건지, 아니면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지, 그것도 아니면 이미 알고 말하는 것인지 알아내려 했다.
결론을 내는 건 빨랐다.
“어떻게 아셨어요?”
“박 이사님 회사 인사 정보를 우연히 봤어…….”
“우연하게요? 그걸 우연히 볼 수 있나요?”
장하양은 백설하가 호기심에 이기지 못한 나머지, 한구인의 컴퓨터나 서랍을 털었다고 생각했다.
그에 백설하는 평소처럼 당황하지 않았다. 담담히 자료를 보게 된 경위를 설명해주었을 따름이다.
장하양은 납득했다.
납득하고, 그걸 인정하기까지 몇 초가 필요했다.
성필의 가정사를 입에 담는 건 힘든 일이었다. 비록 상대가 그 사실을 알고 있더라도 말이다.
“맞아요.”
그게 장하양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답이었다.
“그런데 그 이상으로 제가 뭘 말씀드릴 수는 없어요.”
“그렇구나.”
백설하의 고개가 천천히 밑으로 기울었다.
“그렇구나, 그렇구나…….”
“……언니?”
“그래, 응, 그렇구나…….”
갑자기 백설하가 울기 시작하여, 장하양은 당황하며 그녀에게 다가가 품에 안았다.
“하양아 나 어떡해애…….”
이윽고 장하양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2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아직 ‘아라베스크’가 나오기도 전의 사건이었으니.
에리카와 함께 출연했던 ‘음악을 위한 동행’ 촬영 중, 한국에서 어느 소식이 들려왔었다.
백설하의 모친이 교통사고를 당했단 것이었다.
당연히 백설하는 혼비백산하여 거의 넋이 나갔다. 당장이라도 한국으로 가고 싶었다.
설령 회사의 중요한 거래 협상 상황이더라도, 사정을 설명하면 다들 가보라고 등을 떠밀 사안이 아닌가.
그런데 그때 성필이 백설하에게 던진 말은 너무나 예상 밖이었었다.
너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회를 밟고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니, 그 책임을 다하라.
“그래서…….”
백설하는 성필에게 말하고 말았다.
‘이사님이 뭘 아냐고요! 이사님이 제 마음을 아세요? 뭘 다 안다는 듯이 말하세요? 이사님은 부모님이 그렇게 심하게 다친 적도 없잖아요! 그런데 뭘 알아서 잘난 듯이 말하세요?!’
다시금 그때를 떠올린 백설하는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벌벌 떨었다.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전신의 핏기가 가신다.
“하양아, 나는 있잖아, 이사님이 화를 참는 걸 본 적이 없어…….”
아니, ‘화’라는 단어는 너무 부드럽다.
그때의 성필은 분노를 참는 듯했다.
“이사님은 화나는 일이 있으면 그냥 대놓고 말씀하시잖아. 화 축에도 못 끼는 일이면 웃으시고. 그런 분이셔.”
장하양은 동감했다.
그녀가 본 성필의 유일한 분노는, 그녀의 친부가 가로 엔터로 찾아왔을 때뿐이었다.
성필이 ‘닥쳐 이 시발새끼야!’라고 외쳤던 건, 패닉에 빠진 장하양의 뇌리에도 깊이 남아 있었다.
그걸 직접 보았던 리카와 조아라는 사건의 당사자가 아님에도 벌벌 떨었었고.
“물론, 마음속으로는 여러 번 참으셔서 겉으로 안 드러나셨던 걸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지. 있지만, 그러니까 더 기억에 나…….”
성필이 입술을 꽉 물면서까지 분노를 참았던 광경 말이다.
“하양아, 이사님한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
장하양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을 말해주면 백설하의 마음이 더 새까맣게 타들어 갈 뿐일 터다.
그녀는 단지 성필이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었을 거란 말만 해주었다.
백설하의 눈가에 핑 돌던 눈물이 떨어져 장하양의 어깨를 적셨다. 장하양은 언니의 등을 쓸어주었다.
“그 일 이후로 박 이사님은 뭐라고 하셨어요? 사과는요?”
“했어…….”
“받아주셨겠죠?”
“응, 괜찮다구…….”
“언니, 언니.”
장하양은 언니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면서 몇 번이고 그녀를 불러주었다. 느린 부름에 맞춰 거센 심장을 진정시키라는 것처럼, 규칙적이고 안정된 목소리였다.
“대체 몇 년 전 일을 걱정하고 계시는 거예요? 2년도 훨씬 전이에요. 그 일 이후로 박 이사님이 언니를 못마땅하게 보는 것 같았나요?”
“……아니.”
“박 이사님이 구박하신 적이 있나요?”
“……아니.”
“그 일을 다시 꺼낸 적은요?”
“없어…….”
“언니, 박 이사님은 이미 끝난 옛일을 들먹이면서 앙심을 품고 계실 분이 아니세요. 박 이사님과 함께 지내 온 언니도 아시잖…….”
장하양은 위로를 멈추었다.
백설하는 바들바들 떨 뿐 울음소리를 내지도, 자그마한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장하양은 품에 안고 있던 백설하를 살짝 밀어내어, 다시금 그녀와 마주 보는 자세로 돌아왔다.
백설하는 아랫입술을 질끈 문 채, 눈을 감고 눈물만을 조용히 흘리고 있었다.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지 못하여 속에서 삭일 수밖에 없는 사람의 모습이다.
백설하는 몇 번의 흐느낌 끝에 물었던 입술을 놓아주었다. 들숨과 날숨이 어지러이 뒤섞여, 그녀의 숨은 물 밖에서 방금 나온 사람처럼 급박하게 들렸다.
“얼마나…… 화가 나셨을까…….”
백설하는 유난히 공감 능력이 좋았다. 그녀의 공감성은 그녀가 펼치는 망상의 근원이었다.
그녀는 당시 성필이 느꼈을 감정을 필요 이상으로 떠올릴 수 있었다.
성필이 얼마나 화 났을까.
얼마나 억울했을까.
얼마나 심란했을까.
새파랗게 어린애에게 그런 말을 듣고,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는 기분이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박 이사님은 나를 늪에서 꺼내주신 분인데…….”
백설하는 은인에게 새겨진 상처에 소금을 뿌렸다. 아니, 그런 흔해 빠진 상용어론 자신이 주었던 고통을 표현할 수 없었다.
백설하는 사지가 일그러진 사람 앞에서 자신의 팔이 다쳤다고 고래고래 소리쳤던 것이다.
나를 보라고. 내가 이렇게 아프다고.
상대는 그걸 보며 자신의 이야기는 하나도 꺼내지 않고 가만히 마음을 다잡고 있던 것이다.
“그런 분한테, 나는…….”
성필은 갑질당하는 기분과 비슷했을 것이다.
악성 민원인이 던진 서류를 맞는 공무원.
사장에게 인신공격을 당하는 알바생.
중요한 거래처의 무례를 참는 영업사원.
부당한 언사를 당하면서 입 하나 뻥끗할 수 없단 점에서, 성필이 겪었던 감정은 그와 비슷할 것이다.
“…….”
장하양은 우는 언니의 손을 꼬옥 잡아주었다.
백설하도 멤버들을 달랠 때마다 이렇게 손을 잡아주곤 했다. 그녀는 온기가 마음을 전할 수 있다고 믿었으므로, 손잡길 좋아했다.
이번엔 장하양이 그렇게 해주었다.
“저는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생각해요. 박 이사님도 그러실 거예요. 이 이야기를 꺼내는 건 긁어 부스럼일 거예요. 하지만, 박 이사님께 사과하는 걸로 언니의 마음이 편해진다면 그렇게 하세요.”
“응, 사과, 할 거야…….”
근데, 그런데.
백설하는 여전히 흐느끼며 몇 번이나 역접(逆接)을 입에 담았다.
사과를 할 건데, 그런데…….
“그걸로 괜찮을까?”
백설하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있다.
‘미안하다고 했잖아.’
‘내가 사과했잖아.’
‘뭘 더 어떡하라고?’
천박함과 악의의 극치에 이른 말이다.
이 말이 끔찍한 이유는, 사과는 자의적인 행동이지만 마음이 풀리는 건 자의적일 수 없단 것이다.
사과받더라도 분노가 풀리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과하는 사람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고, 발가락이라도 핥을 수 있지만, 사과받는 사람은 마음이 가라앉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과하는 걸로 충분할까……?”
사과했단 이유만으로 상대가 즉시 용서하길 바라는 건, 그렇기에 천박하다.
사과를 상대의 마음을 풀려는 의도가 아니라, 자신의 가슴속에 자리 잡은 꺼림칙함을 털어버리려는 의도로 하는 것이니까.
사과는 미안함을 털어내려고 하는 게 아니다.
미안함을 마음 깊이 새기려고 하는 행위다.
백설하는 떠올린다. 성필이 사과받고도 그 분노와 실망감, 억울함과 허탈함을 완전히 승화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그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끌어안고 지샐 밤은 얼마나 외롭고 힘들지. 힘들었을지.
앞서 말했듯 분노란 건 스스로 어찌할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사과나 사죄를 받고서도 영원토록 풀리지 않을 수도 있다.
그걸 보고 속이 좁다, 라고 표현할 순 없다.
그런 감정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부처라고 불려야 마땅하니까.
분노를 갈무리하고 금세 지우기란 노련한 정치인이나 고결한 수도사에게도 힘든 일이다.
“내 사과에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아……?”
“언니 말씀이 맞아요.”
“……어어?”
장하양은 백설하의 손을 더욱 강하게 잡았다.
“사과하는 사람은, 사과하는 수밖에 방도가 없어요. 상대가 용서하길 기다리는 게 유일한 길이에요. 그리고 용서를 받으려면, 언니의 마음이 편하려면, 일단 움직여야죠. 이사님을 마주 보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죄송하다고.”
인간과 인간은 말이 없인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서로 다른 인간, 각기 다른 우주의 만남은 언어라는 빛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빛이 없곤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용기를 내세요, 언니. 말씀으로 힘들다면 편지로, 편지도 힘들다면 시간을 두고 천천히 다가가는 것으로 대신해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하양아아.”
백설하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 * *
백설하는 성필에게 줄 편지를 썼다. 하지만 그에게 다가갈 타이밍이 마땅치 않았다.
옐로 서브마린 엔터와의 합병이 지척에 다가온 현재, 성필은 바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게 그에게 접근하긴 힘든 유일한 이유는 아니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요즘 성필은 이상했다.
백설하는 성필이 회사에 있는 한, 거의 미행하듯 움직였기 때문에 그의 이상을 누구보다 잘 파악할 수 있었다.
“너 보험판매원이이이이yeeee…….”
“이사님?”
“아, 나, 화장실.”
“에에, 그런 건 말씀 안 하셔도 된……!”
리카랑 대화하다가 갑자기 도망간다던가.
“이사님, ‘어른이라 알겠다’의 반대말은 뭘까요?”
“모르겠네.”
“조금은 생각해주시면 안 될까요?”
“진짜 모르겠어. 난 네 유머를 3초 안에 파악 못 하면 영원히 모르겠더라.”
“정답은, ‘에라 모르겠다’! 아하하!”
“하하하아아아아아음.”
“이사님?”
“아, 졸리다. 나 잠시 휴게실 좀 갈게.”
“제가 자장가 불러드릴까요?”
“아냐, 괜찮아. 난 혼자서 잘 자.”
장하양의 유머를 듣고 황급히 도망간다던가.
“팀장님, 우리 일본에서 ‘한국갸루’란 애칭 있는 거 알아요?”
“어, 알아. 히무라 실장님한테 들었어. 갸루가 약간 잘 놀고 재밌는 언니 같은 느낌의 단어라면서?”
“진짜요. 듣고 놀랐어요. 전 갸루하면 옛날에 개콘에 나왔던 그 개그맨 있잖아요. 그 사람처럼 약간 이상한 화장? 그거 떠올라서, 처음 들었을 땐 ‘우리가 왜?’ 싶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아라가 처음 가로 엔터에 왔을 때 리카가 갸루라고 했었지.”
“찾아보니까 요즘 갸루 같은 애들 옷 예쁘게 입더라고요. 아, 맞다. 일본 교복 좀 예쁘지 않아요? 입어볼까요? 저 고딩 때 교복 줄여 입는 게 나름 꿈이었는데 팀장님이 막았잖아요.”
“내가 네 꿈을 좌절시켰다고?”
“지금이라도 소원성취해보자는 거죠.”
“가로 고등학교 때 성취했잖아.”
“그건 예능이고요. 시세리 때처럼 각 잡고 코스프레 해보자는 거죠. 여기, 이거 어때요. 제가 이 교복 입는다고 생각하세요.”
“으으으으으으음 나 갑자기 할 일 생각나서 가볼게.”
“네? 티, 팀장님. 팀장님! 팀장님?!”
신아름과 정답게 대화다가 쏜살처럼 뛰쳐나간다거나.
“어, 아저씨 찾았다. 내가 가사 썼…….”
“미안 나 바빠. 나중에 얘기하자.”
조아라와는 마주치자마자 도망쳤다.
조아라는 망연자실하여 우두커니 서 있다가, 손등으로 핑 도는 눈물을 훔쳤었다.
이렇듯 백설하는 성필과 독대할 기회를 잡기가 힘들었다.
메신저로 연락하는 건 꺼려졌기에, 백설하는 자연스럽게 기회가 오길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왔다.
그 혼자 회의실에 남아 있단 소식을 들었을 때였다.
“응, 설하한테 내줄 시간이야 얼마든지 있지.”
기회가, 마침내 왔다.
* * *
백설하는 프랑스에서의 일을 설명하는 걸로 이야기의 시작을 열었다. 그리고 우연한 계기로 그의 가정사를 알게 됐음을 알렸다.
약 3분에 이르는 짧은 이야기를 듣고, 성필은 백설하가 아니라 백설하의 살짝 위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은 허공에 맴돌았다.
백설하는 그의 눈에서 고뇌를 읽었다.
“저, 저는 말주변이 없어서…….”
백설하는 품 안에 꼬깃꼬깃 넣어두었던 편지를 꺼냈다. 그리고 놀랐다. 처음 품에 넣었을 땐 빳빳하게 펼쳐져 있던 것이, 지금은 여기저기 구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계속 만지작거려서 이렇게 된 듯하다.
게다가 품 안에 넣고 있어서인지, 회의실을 맴도는 옅은 한기와 대비되는 온기가 풍겼다.
백설하는 이걸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눈을 질끈 감고 내밀었다.
성필은 시선을 살짝 내리며 그것을 받았다. 여전히 그는 백설하를 똑바로 보고 있지 않았다.
성필은 편지를 열고 읽었다.
백설하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자신이 편지에 쓴 내용을 되새겼다.
[이사님 안녕하세요. 문자로 이야기를 나누는 건 메신저를 제외하곤 처음인 것 같습니다. 제 부족한 말주변 때문에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이 편지를 전해드리기까지, 제가 사정을 잘 설명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간략하게 내용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다시금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저는 얼마 전 이사님의 가정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알자마자 제가 프랑스에서 이사님께 생각 없이 뱉었던 말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이사님이 받으셨을 상처를 저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이사님은 다정하시게도 그날 이후로 이 일을 한 번도 꺼내신 적이 없습니다. 저를 홀대하거나 구박을 주신 적도 없습니다. 그저 한없이 따스할 뿐이셨습니다.
그 따스함이 지금은 제 심장을 찌릅니다. 저는 저를 향해 구원을 손길을 내밀어준 이사님에게, 말 따위로는 갚을 수 없는 상처를 보답이라며 던져버렸습니다.]
[여기서 이사님이 저에게 어떤 분이신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말로는 부끄러워서 할 수 없던 제 마음을 부족하게나마 밝히고자 합니다.
이사님은 제 꿈의 구원자이십니다.
이사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무대 뒤의 존재로 평생 남았을 겁니다. 보컬 트레이너를 비하하는 건 아니지만, 그건 분명 제 꿈이 아니었습니다. 언제까지나 무대 뒤에서, 자아실현의 만족이 아닌 대리만족으로 여생을 보냈을 겁니다.
기분 전환으로 만든 자작곡을 홀로 쓸쓸히 연주하면서, 곡만큼이나 씁쓸한 미소로 삶을 보냈을 겁니다.
노래를 부르며 제 실력이 좋다고 자신하면서, 그걸 내보일 무대가 없단 데 슬퍼했을 겁니다.
제 꿈은 현실이 아니라 먼지 덮인 꿈으로만 남았을 겁니다. 저는 먼지를 털어낼 용기조차 없었겠지요. 그렇기에 꿈 위에 차근차근 쌓여 마침내 지층이 되어버린 먼지를 그대로 놔두고, 꿈 대신 추억이란 이름을 붙였을 겁니다.
난 옛날에 아이돌이었지. 노래를 불렀지. 춤을 췄었지. 그랬지. 그랬었지. 그렇게 저의 소중한 꿈을 추억으로, 술자리 무용담 정도로 소비하는 삶을 살았을 겁니다.]
[그럼에도 저는 꿈을 바랐을 겁니다. 노래방에서 꿈에 잠겨, 홀로 무대를 상상하고, 홀로 박수를 망상하며, 비참한 현실을 순간이나마 잊으려 노력했을 겁니다.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저는 비참한 현실을 보면서 억지로 웃었을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꿈만 꾸는데, 저는 맛이라도 보았다며 저를 위로했을 겁니다.
그게 제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겁니다. 저는 꿈 같은 현실을 바라는 게 아니라, 현실적인 꿈만을 바랐을 겁니다.
어릴 적부터 가슴에 품었던 노래를 버리고, 제 꿈의 풍경은 단란한 가정이나 아이의 건강한 성장이 전부였을 겁니다. 그곳에 제 자리는 전부가 아니라 부분으로 남았을 겁니다. 제 꿈일진대도 그러했을 겁니다.]
[이사님.
이사님은 탁 트인 들판에서 소리친 제게 돌아온 메아리였습니다. 절대 돌아올 리 없는 반사광이자 영혼의 공명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닿을 리 없으리라 생각하면서 피맺힌 노래를 부르던 저에게, 이사님은 다정한 대답을 돌려주셨습니다.
다시 아이돌을 하지 않겠냐고.
그 답은 제가 바란 모든 것이자 세상의 전부였습니다. 그 답은 제가 바란 모든 것이자 세상의 전부입니다.
이사님의 그 권유 하나가, 그 시절의 제가 바랐던 모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사님의 권유로 만들어진 이 삶이, 제가 바라는 삶의 모든 것입니다.
그런 이사님에게 제가 준 건 돌이킬 수 없는 실수이자 상처입니다.
고개 숙여 사과합니다.
이 사과는 글자로 담을 수 없을 듯합니다.
현실의 제게 맡기겠습니다.
부디 노여움을 풀어주시기 바라겠습니다.]
[백설하 배상(拜上).]
길고 긴 시간이 끝났다.
성필은 편지를 다 읽었는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백설하를 본 시각은 아주 짧았다. 그는 시선을 다시금 내리깔았다.
백설하가 말했다.
그가 편지를 읽을 때까지 몇 번이나 날카롭게 갈았던 사과의 말을 전부 잊어버리고.
가장 원초적인 사과 한마디. 그렇기에 그녀의 마음을 온전히 대변하는 한마디를.
“죄송해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