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한는 프로듀서-598화 (598/760)

598화

회사가 다른 회사를 합병한다고 할 때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 중 하나가 무엇일까.

사람이다.

인사(人事) 업무는 평상시일 때도 중요하지만, 합병할 때는 그 중요성이 몇 배나 상승한다.

“그런데 왜 가로 엔터에는 인사부(人事部)가 없어요?”

업무를 보던 경리이자 총무이자 인사부원 권아인이, 최고운영책임자이자 재무팀장이자 인사부장이자 옐로 서브마린 엔터 합병담당자(임시직) 한구인에게 물었다.

질문을 받은 한구인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여태껏 저희 둘이서 잘 처리해오지 않았습니까? 굳이 부서를 따로 만들 필요가 있습니까?”

“제 호칭이 경리이자 총무이자 인사부원인 걸 보면 필요한 거 같지 않으세요? 다른 직원들이 매일 저한테 연차 겹치는 사람 없는지 물어보는 것도 신물 난다구요.”

한구인은 고민하는 것처럼 턱을 몇 번 쓸었다.

“그렇군요. 한 명 정도 더 뽑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겨우 한 명이요? 하물며 새로 생긴 해외사업부도 저희 팀 인원을 넘어서게 생겼잖아요.”

현 해외사업부는 부장 김덕팔과 신입사원 한 명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사원은 사원이라기보다 김덕팔의 비서 비슷했다.

권아인은 그 신입을 보면서 예술가의 도제(徒弟)를 떠올렸다. 스승의 옆에서 이런저런 시중을 들면서 동시에 스승의 기술을 익히는 사람…….

아무튼, 새로 생긴 해외사업부조차 재무팀보다 인력이 많아질 예정이었다.

“저희 팀이 돌아가는 건 사실상 한 이사님 덕분이라구요. 갑자기 한 이사님이 병이라도 걸리시면 저는 어떡해요?”

워커홀릭인 한구인이 없었다면 재무팀 인원은 진즉 다른 부서와 비슷해졌을 것이다.

권아인은 가끔 ‘이걸 언제 다 해?’라는 업무량과 마주하곤 한다. 그런데 한구인은 그걸 말이 안 되는 속도로 해결한다. 그럴 때면 ‘이걸 어떻게 다 했지?’란 소리가 절로 나온다.

그걸 몇 년째 보고 있다.

옛날엔 업무가 손에 익으면 당연히 저렇게 되는구나 싶었는데, 친구들 말을 들어보니 아닌 듯하다.

“걱정 마십시오. 설령 제가 병에 걸리더라도 아인 씨에게 일을 떠넘기진 않을 겁니다.”

참으로 믿음직스럽다.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 믿음직스러워서 문제였다.

저 믿음직함 때문에 몇 년째 재무팀 인원은 둘뿐이었다.

“여기 이분들 몇 명 데려오는 건 어떠세요?”

권아인은 옐로 서브마린 엔터 ‘경영지원실’ 직원들 파일을 내밀었다.

그들이 맡은 업무를 보아하니, 가로 엔터 재무팀에 들일 인재들이 많다.

“음…….”

한구인은 목록을 쭉 살폈다.

합병 업무에서 인사가 중요한 이유는, 합병되는 회사에서 ‘살릴’ 직원들을 선별하기 때문이다.

가끔 뉴스에선 합병당한 기업의 직원들이 붉은 머리띠를 메고 시위하는 장면들이 나오곤 한다.

합병한 회사가 피합병 회사의 직원들을 대거 해고하기로 했거나, 연봉을 낮추었거나, 복지 혜택을 삭감했거나, 불리한 조건을 추가했기 때문이다.

가로 엔터도 옐로 서브마린 엔터에서 ‘살릴’ 사람들을 선별해야 한다. 권아인은 그중에서 경영지원실 인원들을 지목한 것이고 말이다.

“고려해보긴 했습니다만…….”

“……습니다만?”

“지금으로도 충분한…….”

“안 충분해요!”

권아인이 버럭 소리를 높였다. 당연히 한구인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쌓인 게 많았나?

‘하긴, 아인 씨에게 잡무를 너무 맡기긴 했어.’

한구인은 새삼 자기반성을 하게 됐다.

어쩌면 이번 합병은, 권아인이 잡일꾼 처지에서 벗어날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렇게나 격렬하게 반응하는 거겠…….

“한 이사님은 주말에 제대로 쉬어본 게 얼마 만이세요?”

“예? 저 말씀이십니까?”

“연차도 거의 안 쓰시잖아요. 그렇게 일만 하시다간 언젠가 몸이 못 버틴다구요. 한 이사님은 다른 사람을 믿는 법을 더 배우셔야 해요.”

다른 사람을 믿는 법…….

그렇다, 어쩌면 한구인 자신은 자아도취가 심한 것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일하지 않으면 회사가,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밤낮없이 일만 하는 것이다.

그건 일종의 오만이었다.

“그렇다고 저를 믿고 일을 더 맡기란 뜻은 아니, 물론 믿고 맡겨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지만, 어쨌든 그래요! 가로 엔터는 더 커질 거잖아요? 비록 지금은 저희끼리 어떻게든 해나가고 있지만, 나중엔 아닐 거예요. 조금 이르다고 생각돼도 팀원을 늘리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그럼 한 이사님도 주말에 꽃구경하고 영화도 보고 맛집 탐방도 가고 얼마나 좋아요?”

꽃구경이랑 영화랑 맛집 탐방은 잘 모르겠지만, 권아인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다.

“그렇군요. 맞는 말씀이십니다.”

“어, 그럼 사람 더 들이시는 거예요?”

“안 그래도 오늘 옐로 서브마린 쪽으로 면담을 가야 했습니다. 면담을 나누고 괜찮은 분이 있다면, 저희 팀에 들이는 것도 좋겠습니다.”

권아인이 ‘해냈다’는 듯 만개한 웃음을 보였다. 한구인도 그녀를 보고 마주 웃어주었다.

“저는 어쩌면 아인 씨랑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익숙해져서, 그 시간이 계속 이어지길 바랐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네?”

“익숙함은 경계해야 마땅한 거겠죠. 알겠습니다. 긍정적으로 고려하겠습니다.”

“아, 아니, 방금, 뭐라고 말씀하신…….”

재무팀 파티션 너머로, 사무실 인원들이 내심 손발을 오그라뜨렸다.

이 삭막한 사무실에 둘이서 오피스 로맨스 드라마를 찍고 있으니, 버티기 힘들었다.

* * *

가로 엔터 응접실.

백설하는 무릎 위에 손을 공손히 올려두고 맞은편의 장하양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마치 숙제 검사를 맡는 학생 같았다.

장하양은 백설하가 쓴 가사를 진지한 눈으로 음미하는 중이었다.

장소를 응접실로 고른 건, 백설하가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쓴 가사가 혹여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누출되길 원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중에 다 밝혀질 텐데도 그러했다.

마음을 담은 글을 타인에게 보여준단 건 이렇듯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언니.”

장하양이 부르자 백설하가 어깨를 크게 떨었다.

“으, 으응.”

“‘좋아요, 그런데……’라는 허례허식은 때려치우고 직설적으로 말씀드릴게요.”

백설하는 벌써부터 응접실을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충동을 참고 소파에 엉덩이를 무겁게 붙여두었다.

“굳이 테두리가 큰 가사를 쓸 필요는 없어요.”

백설하는 곧바로 장하양이 하는 말을 이해했다. 백설하는 이수연에게 따로 작사 강의를 받아왔으니 말이다.

작사하는 이들이 흔히 하는 생각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공감의 테두리가 큰 이야기’를 써야 한단 것이다.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항상 옳은 이야기는 아니다.

“개인적인 걸 보편적으로, 보편적인 걸 개인적으로.”

장하양은 이수연 작사가가 말하곤 하던 작사의 원칙을 읊었다.

“언니는 보편적인 이야기를 보편적으로 쓴 느낌이에요. 주제가 팬송이라고 굳이 틀에 박힌 이야기를 쓰진 않아도 돼요.”

팬 여러분 사랑해요.

여러분은 소중해요.

함께 해줘서 고마워요.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아이돌의 팬송이라면 웬만해선 빠지지 않는 이러한 고마움의 감정들이 있다.

모범적인 데다 팬들이 들으면 감동하겠지만, 그 이상의 무언가는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가사를 보던 장하양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앞을 보니 턱을 가슴에 묻을 듯 머리 숙인 백설하가 보였다.

장하양은 온화한 미소와 함께 백설하의 손을 잡았다.

“언니, 이수연 작사가님이 쓴 ‘노을 같은 손’이란 노래 아세요?”

“응…….”

“그 가사는 작사가님이 유치원생일 때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했대요. 작사가님은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셔서 늦게까지 유치원에 있어야 하셨대요. 그리고 노을이 질 때쯤 어머니가 오셔서, 항상 손을 잡고 같이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예요.”

이수연 작사가는 그 가사에서 맞잡은 손의 따스함, 항상 다니던 집으로 가는 길에 비치는 붉은 노을, 그리고 시각과 촉각이 합쳐진 아름답고 노스텔직한 분위기를 표현했다.

물론 그 가사에선 유치원생인 자신이나 일을 마치고 데리러 온 어머니의 언급은 없다.

그저 ‘너’를 향해 ‘내’가 느끼는 감정만이 있을 뿐이다.

이수연의 아주 개인적인 경험으로 쓴 이야기이지만.

“사람들은 다 저마다의 추억을 배경으로 깔고 가사를 받아들였대요. 때론 넓은 테두리의 감정보다 좁은 테두리의 감정이 더 많은 공감을 일으킬 수도 있어요. ‘노을 같은 손’처럼, 누군가와 손을 잡고 걸은 기억이나 우연히 본 노을. 개인적인 경험이 보편적으로 작용하는 예시예요. 제가 언니한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언니만의 이야기를 써보는 건 어떠냐는 거예요.”

“나만의 이야기……?”

“‘월드 온 파이어’ 기억하세요?”

백설하가 에리카와 함께 출연한 ‘음악을 위한 동행’에서 만들었던 둘의 자작곡이다.

“그거 가사 좋았어요.”

‘월드 온 파이어’의 주제는 사랑이다.

그런데 표현법이 참신했다.

네가 날 보지 않으니 세상을 불태워 보게 해주겠다. 혹은, 네가 날 보지 않는 세상은 불타서 사라질 재나 다름없다.

사랑을 바라보는 시각이 화염에 휩싸인 세상이라니, 장하양은 처음 들을 때부터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건 언니가 상상한 사랑의 감상이잖아요. 언니만의 감상이요.”

“에리카랑 같이 얘기해서 만든 건데…….”

“그래도 언니의 마음이 담겨 있잖아요. 그것처럼 언니가 보는 필터로 가사를 써보는 건 어떨까요? ‘다른 사람이 이해할까’ 같은 생각은 잠시 내려두고요.”

“예를 들면 어떤 식으로…….”

장하양이 싱긋 미소 지었다.

“그건 언니가 정하셔야죠, 는 성의 없죠? 음, 예를 들면…… 언니가 아이돌로 살면서 느꼈던 감정?”

“그것도 테두리가 넓지 않아?”

“‘못 해 먹겠네’ 싶은 순간이라거나?”

“그런 걸 팬송에 넣는다고?!”

“‘난 아이돌이긴 한데 잘 때 침 흘리면서 자, 네가 생각하는 고결한 천사는 아냐’ 같은 거?”

“절대 안 해!”

장하양이 킥킥 웃었다. 백설하는 꿍해져선 그녀를 귀엽게 노려보았다.

“아, 또 하나 생각났어요. ‘I’m not fxcking 우파루파, It’s just fake concept’ 어때요?”

“퍼킹……?”

“‘Freakin’으로 바꾸는 편이 나을까요?”

“또 놀리는 거지…….”

“놀리는 거 아니에요.”

장하양이 진지해졌다.

“언니는 우파루파 이미지 별로 안 좋아하시잖아요.”

“……보여?”

“보이죠 그럼.”

스타가 모든 관심과 사랑을 좋아하는 건 아니다. 자신이 바라지 않는 이미지로 사랑받는다면, 스타도 심경이 복잡할 것이다.

스타는 아니지만 ‘셜록홈즈’의 작가인 아서 코난도일이 그러했다. 그는 그냥 돈벌이 좀 하려고 셜록홈즈를 연재했던 건데 초대박이 났다.

본업인 역사서를 쓰고 싶었지만 주변이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셜록홈즈를 연재하라는 협박 편지를 받고, 심지어 가족조차 셜록홈즈 다음 편을 쓰라고 재촉했다고 한다.

행복했을까? 그다지 행복하진 않았을 듯하다.

백설하에겐 우파루파가 그러한 것이다. 좋은 노래인 것도 맞고, 백설하에게도 의미가 깊지만, 때론 족쇄처럼 느껴진다.

자신을 보고 ‘우파루파!’라 환호하는 팬들을 보면 당혹스럽고, 가끔 심술이 나기도 했었다.

“꼭 우파루파에 관해 쓰라는 게 아니에요. 그런 개인적인 감상과 경험도 가사의 주제가 될 수 있단 거예요. 도움이 좀 됐나요?”

백설하는 자신이 써 온 가사를 바라보았다.

‘우파루파에 대한 아쉬움’에 비하면, 그녀가 써 온 가사는 심심하긴 했다.

개성이 느껴지지 않았다.

“응, 대충은…….”

“막히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세요. 제가 귀찮아할 거라곤 생각하지 마시구요. 저는 언니를 돕는 게 좋아요.”

“하양아…….”

백설하는 사랑스러운 동생이 쥔 손으로부터 온기를 듬뿍 느꼈다. 아니, 장하양은 손이 차가운 편이라 지금도 차갑긴 한데 아무튼.

이렇게나 좋은 동생을 둔 건 백설하의 인생에서 커다란 행운임이 틀림없다.

“설하야? 있어?”

문밖으로 성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설하는 감동의 호수로부터 빠져나와 ‘있어요’라 답했다. 성필이 문을 반쯤 열고 안으로 발을 들였다.

“가사 얘기 중이야?”

“네에.”

“하양아, 설하 좀 빌려 가도 돼?”

“보통 당사자한테 먼저 묻지 않나요…….”

“미안. 설하야, 시간 괜찮아?”

“네.”

“하양아, 설하 빌려도 돼?”

“아하하, 또 언니랑 춤추시게요?”

“응. 와, 저번에 춰보니까 너무 기분 좋더라. 평소에도 계속 생각나. 나 중독된 거 같아. 이런 게 춤바람일까? 늦깎이 바람이 무섭다더니 정말 그렇네. 근데 농담이니까 얼굴 펴 하양아.”

백설하는 성필을 따라 응접실 밖으로 나섰다.

“지금 연습실 차 있을 거예요.”

“응?”

“춤추러 가는 거 아니에요?”

성필이 픽 웃었다.

“너까지 나 놀려?”

“정말 그럴 수도 있잖아요.”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저도 좋았어요.”

“뭐가?”

“춤추는 거요.”

성필이 애매모호한 감정을 담아 입꼬리를 올렸다. 아마 수줍음일 것이다. 수줍은 소년처럼, 상쾌함까지 느껴지는 미소다.

“아까 내가 했던 말 장난이야, 과장이고.”

“그럼 안 좋으셨어요?”

“그으, 좋았지. 재밌더라.”

‘좋았다’라고 말하려던 성필에게선 미세한 망설임이 느껴졌다. 여전히 수줍어하고 있다.

옛날부터 그러했지만, 백설하는 성필이 신기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면 그는 나이에 맞지 않는 감성의 소유자다.

‘나잇값 좀 해라’라는 사람들이 보자면, 성필은 어른아이겠지.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사람들이 보자면, 성필은 마음이 젊은 사람이다.

‘처음 뵀을 땐 서른이셨지.’

그래서 서른이시니까, 라며 성필의 감수성을 이해했었다. 그런데 그는 서른다섯까지 옛날과 거의 같았다.

백설하는 그런 성필이 신기했고, 보기 좋았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수줍음이란 감정을 유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부끄러우세요?”

“응, 뭐…… 나도 놀랄 정도로 재밌어서. 그때 나 좀 바보같지 않았어? 계속 ‘와, 워, 우와’ 이러기만 하고.”

“조금?”

“하하…….”

“그래도 귀여웠어요.”

“쓰읍, 어른한테 귀엽단 말 쓰지 마.”

백설하는 큭큭 웃었다.

사람은 나이 들수록 억척스럽고 무덤덤해지기 마련이다. 칭찬에도 ‘허허’ 부드럽게 받아들이고, 욕을 먹어도 ‘허허’ 넘긴다.

그건 곧 타인에게 무감각해짐을 뜻한다.

지하철에서 사람을 밀치고 기어코 빈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이나, 비용을 지불했다면서 카페에서 세상이 떠나가라 떠드는 사람들.

주로 나이 든 사람들이 그러한 경우가 많다. 세상살이에 닳고 닳아, 마침내 지쳐서 수줍음을 내려놓은 사람들이다.

더는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는 자신감, 혹은 자존감이라 표현해도 될 것이다. 아니면 연륜에서 나오는 지혜나 능글맞음이다.

하지만 백설하는 그런 이들의 마모되어 단단해진 자신감을 보며 서글픔을 느낀다.

저들에게도 모든 일에 민감했을 수줍은 소년 소녀 시절이 있었을 텐데.

그리고 자신도 언젠가 그렇게 될까 싶기도 하다. 언젠가 세상을 상대하는 것에 지쳐, 수줍음을 포기하게 될까 봐 걱정된다.

“사실인데 어떡해요?”

그래서 백설하는 성필을 볼 때 기분이 좋다.

그 같은 사람이 있단 게 위안이 되고, 자신도 그처럼 나이가 들길 바라게 된다.

언제나 청춘이길, 소녀이길.

그리고 성필이 이렇게 성장한 건 부모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롤모델이 있을 거란 예감이 든다. 그래서 언젠가는 만나 뵙고 싶다.

어쩌면 성필의 부모님을 뵙는 건 미래의 성필을 보게 되는 것일 수도 있으니까.

영원토록 청춘인 삶.

“언제 다시 한번 해요. 시간 있으시면요.”

“괜찮아?”

“괜찮…… 냐뇨?”

“아니, 난 초보자잖아. 좀 급이 맞는 사람끼리 춰야 재밌는 거 아니야?”

“그렇긴 한데…… 바보 같은 이사님을 볼 수 있으니까요.”

“그래, 나 바보다. 귀엽다. 또 뭐 있어?”

“생각해볼게요.”

둘은 회의실 앞에 도착했다.

성필이 문 앞에서 멈췄다.

“설하야.”

“네?”

“지금부터 면담하려고 하거든.”

“면담이요? 아.”

옐로 서브마린 엔터와의 합병을 앞두고 가로 엔터 직원들의 인사 평가가 있을 거란 말을 들었다.

다들 한구인과 면담을 거치게 될 거라고 한다. 그럼 아이돌은 한구인 대신 성필과 면담하는 걸까?

“……저, 저희도 인사 평가를 받나요?”

“뭐? 아니! 그거 때문 아니야. 좀 민감한 걸 물어보려고 하는데…….”

“…….”

백설하는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성필이 이렇게 분위기를 깔면 눈을 가리면서 ‘이사님, 저는 아이돌이고, 이런 식으로 행동하시는 건 부적절하고, 너무 갑작스러워서…….’ 이런 온갖 종류의 착각을 내뱉었었지.

하지만 이제 착각하지 않는다.

‘나는 어른이니까.’

확실히, 점점 나이를 먹어간단 건 수줍음을 잃어버리는 과정인 듯하다.

백설하는 당당하게 답했다.

“네, 뭐든지 물어보셔도 돼요.”

“일단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 * *

면담이 끝났다.

백설하는 밖으로 나와 화장실로 향했다. 세면대 앞 거울에서 자신의 눈가를 들여다보았다.

다행히 눈물 자국은 남지 않았다.

‘에휴, 이 바보야…….’

성필의 질문은 정말 민감한 것들이었다.

실례가 된다기보다, 백설하의 가슴 깊이 잠자고 있던 무거운 기억들을 끌어올렸다.

백설하가 옛날에 속했다가 해체한 그룹에 관한 것. 그때의 기억, 그때의 감정, 그리고 그 이후로 느꼈던 것들…….

즉, 성필은 아이돌로서의 꿈을 꾸고, 그게 좌절되고, 좌절된 이후의 이야기들을 질문했었다.

후반에는 면담이 아니라 성필이 백설하를 달래주는 흐름으로 향했다. 그리고 극후반에 이르러선, 백설하는 성필에게 연신 감사만 전했다.

‘저를 찾아주셔서 고마워요, 아이돌 다시 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이런 이야기만 몇십 분 동안…… 울면서…….’

그걸 떠올리자 백설하는 얼굴을 붉힌 채 한숨만 뱉었다.

‘이렇게 눈물샘이 약해서 어쩌려구…….’

성필과의 면담 때문인지, 전에 속했던 그룹의 일들이 떠올랐다.

어느 날 백설하는 활동이 힘들어 울었었다. 달래주던 멤버들과, 너만 힘드냐며 손가락질하던 멤버들이 반반이었다.

백설하는 자신을 감싸주던 손길과 다정한 위로보다, 짧았던 손가락질과 비난이 더욱 선명히 기억났다.

‘어른이 되긴 무슨. 난 아직도 애야…….’

백설하는 심호흡하곤 화장실 밖으로 나갔다.

배가 조금 고파서 1층 휴게실로 향했다. 냉장고에는 한구인이 만든 건강즙이 남아 있을 것이다.

‘박 이사님이 나랑 면담하신 건, 웨이퍼센트분들이랑 면담할 때 필요해서라고 하셨지.’

자세한 건 말해주지 않았으나, 백설하는 대충 짐작이 갔다.

성필은 웨이퍼센트 멤버들의 심리상태를 최대한 이해하고 싶었던 것일 터다.

과거의 백설하가 완벽한 표본은 아니겠지만, 어느 정도 도움은 됐겠지.

백설하는 휴게실에 들어와 냉장고 손잡이를 잡았다. 잡고, 몇 번 휘적휘적 움직였다. 파트너를 붙잡고 춤을 출 때처럼.

“…….”

백설하는 혼자 이런 짓을 한 게 창피하여 재빨리 건강즙이 든 텀블러만 꺼내어 휴게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아까는 안 보이던 게 보였다.

현관 옆, 소파가 놓인 휴게 공간에 앉아 열심히 서류를 들여다보는 한구인이었다.

백설하는 아까까지 정신이 다른 곳에 팔려 있었는지, 한구인이 버젓이 있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었다.

“한 이사님 안녕하세요.”

“아.”

한구인은 서류 너머로 백설하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아까 인사를 드려도 무시하시기에 제가 뭔가 잘못한 게 있나 했습니다. 다행이군요.”

“아, 죄, 죄송해요. 제가 생각을 깊게 했나 봐요…….”

백설하는 헤헤 웃으면서 그에게로 다가갔다.

테이블 위엔 서류가 두 개로 분류되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한구인은 하나를 들고 다 읽자 두 개의 서류 더미 중 한 곳에 두었다. 아마 한쪽은 읽은 것, 나머지 한쪽은 읽지 않은 것인 듯하다.

“왜 여기서 일하고 계세요?”

“곧 박 이사님이랑 함께 외근 나갑니다. 바로 나갈 수 있게 여기서 일하는 겁니다. 그리고 또, 개인적으로 저는 사무실 공기가 너무 건조하더군요.”

“음.”

백설하는 서류들을 흘끗 보았다.

가로 엔터 직원들의 인적 사항이 기록된 프로필이었다.

“가족관계까지 있네요. 필요한가요?”

“직원이 업무 중 사망하면 부고 문자를 보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농담입니다. 그렇게까지 극단적인 경우는 거의 없고, 무단으로 도망가면 가족에게라도 연락하여 잡아야 하니까 수집하는 겁니다.”

이것도 농담인가?

백설하는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한구인이 다 본 서류를 또 내려놓았다. 그걸 본 백설하는 눈을 크게 떴다.

“박 이사님 거네요? 와, 이거 박 이사님 증명사진이에요? 엄청 젊으세요!”

사진관이 힘을 좀 썼는지, 사진 속의 성필은 연예인처럼 밝고 잡티 하나 없었다.

증명사진이 대체로 이런 거긴 하지만 말이다.

“언제 찍으신 걸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현재랑 큰 차이는 없어서 가만히 두고 있습니다만, 업데이트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긴 합니다. 그건 그렇고 꽤 자세히 보시는군요. 주민등록번호나 금융 정보를 도용하실 셈이십니까?”

“농담이시죠?”

한구인이 테이블에 놓인 서류를 슬쩍 안쪽으로 당겼다.

농담이 아닌 듯하다.

“농담입니다.”

농담이었구나.

백설하는 성필의 서류를 다시 더미 위에 놓으려 했다. 관련자도 아닌데 보는 것도 예의가 아니었다.

그때 백설하는 성필의 가족관계로 눈길이 갔다. 보려고 한 게 아니라, 눈이 자연스럽게 움직여 그곳에 머무른 것이었다.

[공란(空欄)]

비어 있다.

처음 든 생각은 의아함이었다.

왜 비어 있지?

정보가 누락된 건가?

백설하의 눈은 다른 직원의 프로필로 향했다.

[관계:부(父) / 성명:신철용

/ 연락처:010―xxxx―xxxx]

[관계:모(母) / 성명:임수애

/ 연락처:010―xxxx―xxxx]

있다.

백설하는 다시 성필의 프로필을 보았다.

[공란(空欄)]

정보의 누락일 리 없다.

성필은 가로 엔터의 초창기 멤버이기에, 그의 정보가 5년간 누락되어 있을 순 없다.

그러니 비어 있단 건.

“……아.”

백설하의 등으로, 형용할 수 없이 서늘한 전율이, 순식간에 척추를 꿰뚫고 정수리로.

“아, 아…….”

빠져나왔다.

번개가 치듯 세상이 흰색으로 물들었다.

하얗게 탈색된 세상 대신 머릿속에 그린 풍경이 시야를 대신했다.

떠오르는 건 2년 전 프랑스.

‘이사님이 뭘 아냐고요! 이사님이 제 마음을 아세요? 뭘 다 안다는 듯이 말하세요? 이사님은 부모님이 그렇게 심하게 다친 적도 없잖아요! 그런데 뭘 알아서 잘난 듯이 말하세요?!’

자신이 성필에게 무심코 던졌던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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