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한는 프로듀서-596화 (596/760)

596화

유하음은 발작하듯 잠에서 깨어났다.

황급히 자명종의 라이트를 켜서 시각을 확인하니 새벽 1시 40분이었다.

베개에 머리를 댄 지 한 시간이 겨우 넘었다.

“아…….”

맞다.

오늘은 애들 오전 스케줄이 없지.

유하음은 긴장하여 일어났던 만큼 진한 탈력감을 느꼈다. 그리고 힘없이 침대에 드러누웠다.

눈을 감고 잠이 들려 노력했다.

옆에선 아내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깨어있는지 자는지 알 수 없을 감각 속에서 그는 자명종 소리를 들었다.

눈을 뜨니, 옆에 누워 자고 있어야 할 아내는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깨어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잠이 들긴 들었던 모양이다.

“여보 일어났어요?”

“네.”

유하음은 눈두덩을 꾹꾹 누르며 식탁으로 다가왔다.

맞은편에 앉은 유치원생 아이는 식탁에 올라온 폰을 열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응애, 상어는 아가야.

아가 상어는 아껴줘야 해.]

유하음은 주방으로 가 한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눈이 어지러울 만큼 많은 영양제와 처방받은 약이 있었다. 유하음은 상자와 약병들을 하나씩 꺼내어 먹어야 할 양만큼 그릇에 담았다.

그릇에 수십 개의 알약이 찼다.

식탁에 앉아 아내가 뒤로 다가왔다.

“이거 빼먹었어요.”

그릇에 알약 두 개가 새로 차올랐다.

“괜찮아요. 요즘에 좀 나아진 거 같아서.”

아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유하음은 돌아보지 않아도 그녀의 표정을 알 듯했다. 결국 그는 그릇 안에 든 영양제와 약을 모두 비웠다.

아침을 해치운 그는 세면을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후 현관에 섰다.

“아빠 다녀오세요, 해야지.”

“아빠 안녕히 다녀오세요.”

“응, 우리 공주님도 유치원 잘 다녀오세요. 아빠 뽀뽀.”

유하음이 무릎을 굽히고 뺨을 내밀었다.

그런데 딸은 다가오지 않았다.

“아빠, 뽀뽀는 사랑하는 사람끼리 하는 거래요.”

“뭐? 우리 공주님은 아빠 안 사랑해요?”

“아빠는 엄마랑 결혼했어요.”

“그럼 우리 공주님이랑도 결혼해야겠네.”

“여보, 저는요?”

“거참, 이야기가 너무 복잡해졌네. 알겠어요, 오늘부터 뽀뽀는 안 해줘도 돼요.”

그러곤 유하음은 뽀뽀를 받는 대신 딸의 뺨에 뽀뽀를 해주었다.

딸이 꺄르륵 웃었다.

유하음은 차를 타고 직장으로, 서울로 향했다.

집에서 그의 직장인 옐로 서브마린 엔터까지 가는 데에는 일반적으로 2시간이 걸린다.

유하음은 꽉 막힌 도로를 멍하니 바라보며 차를 몰았다. 그리고 차가 조금씩 앞으로 갈 때마다 기계적으로 액셀을 밟았다.

그런 일을 2시간 동안 한다.

“……흐읍.”

갑자기 심장이 빨리 뛰었다. 그는 크게 심호흡하면서 핸들에 이마를 대었다.

탁 트인 곳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2시간 동안 도로에, 좁은 차 안에 있어야 한다.

‘이런 일을 앞으로 30년 동안 해야 하는 건가?’

30년 동안 할 수는 있을까?

떠오르는 건 생각이나 감정이 아닌 가족의 얼굴이었다.

유하음은 핸들에 대었던 이마를 천천히 들었다.

여전히 닿을 듯 가까운 앞차의 꽁무니만 보였다.

영겁과 같은 시간이 지나 직장에 도착했다.

작은 빌딩 앞에 도착하여 엘리베이터를 타고 옐로 서브마린 엔터 문에 섰다.

그는 힘차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차에서 지었던 멍한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는 마주치는 직원들에게 웃음 가득한 인사를 전했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유하음이 향한 곳은 연습실이었다. 들어가기 전, 문에 난 작은 창으로 안쪽을 보았다. ‘웨이퍼센트’ 멤버들이 모여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유하음은 문을 쾅 열고 들어갔다.

“황금빛 황금빛 나의 성공! 파이어 파이어 성화 봉송!”

그가 춤을 추면서 들어오자 멤버들이 질색했다.

“형은 어떻게 맨날 기운이 넘쳐요? 좋은 거 있으면 나눠 먹어요.”

리더인 강현이 좋은 시절 다 끝났단 듯 폰을 주머니 안에 넣었다. 춤추면서 나아가던 유하음은 강현 앞에서 멈췄다.

“너희들은 좋은 거 안 먹어도 힘이 넘쳐야지. 벌써부터 이러면 30대 때는 어쩌려고? 아 맞다, 유빈이 어제 라이브 재밌더라. 잘했어.”

유빈은 대답 대신 손으로 V사인을 만들어 보였다.

“자, 오늘은 아주 중요한 스케줄이 있지?”

멤버들이 낮은 목소리로 ‘예……’라 답했다.

유하음은 가라앉은 분위기를 자신의 힘으로 메우려는 듯,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11차 팬사인회야! 팬들의 마음을 더! 더! 더! 확실하게 사로잡자! 그리고 범남이 너는 커플 폰케이스 빼고 다른 걸로 맞춰.”

“이거 티 별로 안 나잖아요. 빼면 또 걔가…….”

“쓰읍!”

“알겠슴다.”

“자, 구호 외치고 오늘 하루도 사랑스럽고 멋진 하루 보내자! 하나, 둘, 셋!”

멤버들은 힘없이 외쳤다.

“100퍼센트…… 여러분의 마음으로 가는 길…….”

“더 크게!”

“100퍼센트 여러분의 마음으로 가는 길!”

웨이퍼센트입니다!

“실장님.”

연습실 문이 열리고 부하 직원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유하음은 연습실 밖으로 나왔다.

“로드 또 도망갔어?”

“아뇨. 근데 곧 도망갈 거 같아요. 그건 그렇고, 오늘 스케줄이 있잖아요.”

“어, 팬사인회? 그게 왜?”

“아뇨 아뇨, 팬사인회 후에 스케줄 하나 더 추가됐거든요. 충청도 홍성에서 축제요.”

“……홍성?”

유하음은 곧바로 편도 거리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계산해냈다.

“6시거든요.”

“뭐?! 야 그거 맞추려면 팬싸 끝내자마자 바로 달려야 하잖아! 뭔데? 난 못 들었는데?”

“대표님이 직접 잡으셔서…… 며칠 전에…….”

“…….”

유하음은 손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이 스케줄을 알리면 유하음이 거부하고 반발할 게 뻔하기에, 미리 알려주지 않고 대표 독단으로 일을 받은 것이다.

축제 행사라면 주최 측에서 웨이퍼센트의 등장을 홍보했을 것이다. 진즉 웨이퍼센트 팬 커뮤니티로부터 반응이 왔음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유하음이 축제 당일까지 몰랐던 건, 옐로 서브마린 엔터에는 팬 반응을 살피는 직책이 없기 때문이었다.

팬 매니지먼트 부서가 없는 옐로 서브마린 엔터는 SNS나 커뮤니티 반응을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파악할 힘이 없다.

웨이퍼센트 멤버들도 인터넷에 자기 이름 쳐보는 시기는 훌쩍 지났으니, 이 갑작스러운 스케줄을 접할 방법이 없었다.

“뭐…… 돈을 많이 준대?”

“그냥 저희 받는 페이로…….”

“왜 그러시냐 대표님으은……. 애들, 애들 안 그래도 어제 그거 무슨 축제냐 그거…… 피로도 안 풀렸을…….”

유하음은 됐단 듯 손을 저었다.

“알겠어, 가봐.”

“넵.”

부하 직원은 금방 자리를 떴다.

유하음은 한숨을 내쉬곤 바닥을 보았다. 그리고 갑작스레 천장으로 눈을 돌렸다.

그의 입가에서 말인 듯 말 아닌 읊조림이 새어 나왔다.

“사랑스럽고…… 멋진 하루…….”

유하음은 자신의 뺨을 때렸다.

“사랑스럽고, 멋진 하루, 보내자.”

* * *

“아니 그게 아니라고요!”

백설하와 상담해주기 위해 연습실을 찾은 성필. 그는 현재 조아라에게 한껏 구박받는 중이었다.

“이걸 왜 못해요?”

조아라는 자리에 가만히 서서 자신의 발을 가리켰다.

“이렇게라고요. 왼발 앞으로, 왼발 뒤로, 오른발 앞으로, 오른발 뒤로. 이렇게 왔다 갔다 하는 게 다예요. 자, 알겠어요?”

“난 설하 상담해주러…….”

“저기 쌤도 응원하잖아요.”

조아라는 구석에 앉아 있는 백설하를 가리켰다. 그녀는 지목당하자마자 ‘파이팅’ 주먹을 들어 보였다.

“서, 설하야, 고민 있단 거 거짓말이었어? 나 설하한테까지 배신당한 거야? 난 이제 아무도 못 믿어어!”

“쌤 고민 있단 건 내가 말한 거잖아요.”

“아, 다행이다…….”

“뭐요. 나한테 배신당하는 건 일상이란 거예요? 걍 온 김에 맞춰줘요. 혹시 알아요? 이렇게 춤춰보는 게 아이디어의 원천이 될지. 자, 다시 해봐요.”

성필은 왼발을 앞으로 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오른발을 뒤로 뺐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어, 그거예요. 그것만 기억해요. 이제, 자.”

조아라가 한 손으로 성필의 손을 맞잡고, 다른 손은 성필의 겨드랑이 아래로 가져갔다.

“뭐해요? 내 등 잡아요.”

“등 어딜?”

“아무 데나요.”

성필은 조아라의 등으로 손을 가져갔다.

“아니, 매너손 뭔데. 내가 넘어지면 걍 놔버리겠네. 이래서 훌륭한 리더가 되겠어요? 그리고 왜 엉덩이 뒤로 빼고 있어요. 설마…….”

조아라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신성한 춤을 두고, 이상한 생각하는 거 아니죠?”

“아니야, 아냐. 나중에 사교 파티에 가면 뻘쭘하진 않겠네. 고맙다, 사교댄스도 알려주고…….”

성필은 길게 숨을 내쉬곤, 아까보다 훨씬 과감하게 조아라를 품에 안았다. 그러자 오히려 당황한 건 조아라였다.

“너무 가깝잖아요!”

“어쩌란 건데!”

“됐어요. 발이나 움직여요. 왼발 앞.”

“외, 왼발 앞.”

조아라는 오른발을 뒤로 뺐다.

그 상태로 성필은 멈췄다.

“……움직여요!”

“아, 아, 맞다.”

성필은 왼발을 뒤로 뺐다.

“그리고, 그리고 오른발.”

오른발을 뒤로…….

“아니 앞이라고요!”

“난 재능이 없나 봐…….”

“다른 아이돌 춤은 잘 추면서 이건 왜 못해요? 아니, 이 간단한 걸 왜…….”

“아라야.”

보다 못한 백설하가 성필을 구원해주러 다가왔다. 성필은 진실로 그녀를 구원자로 보았다.

“설하야, 구해주러 왔구나!”

“이사님이 ‘넥타르’ 같은 춤을 출 수 있으셔도, 볼룸댄스는 아예 다른 거잖아.”

“너희 그거 봤어?!”

성필은 옛날에 케이어스가 ‘넥타르’로 컴백했을 때 넥타르 챌린지 영상을 찍은 적이 있다.

그걸 각종 SNS에 올려 이벤트에 당첨되길 바랐다. 하지만 극악한 확률 때문에 당첨되지 못했다.

그렇게 잊히나 했건만.

“에리카가 보여줬어요.”

“아…….”

성필이 감동하여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어스는 팬의 챌린지 영상을 봐주는구나…….”

“뭘 감동하고 자빠졌어요.”

조아라가 성필의 정강이에 장난스러운 로우킥을 날렸다.

“아무튼 너무 그렇게 몰아붙이면 안 돼. 잘 봐.”

백설하가 손을 내밀었다.

성필은 당황하여 눈만 깜빡였다.

그러자 백설하도 당황했다. 그녀는 우물쭈물하다가 어색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쉐, 쉘 위 댄스?”

“아냐, 나 그만할래……. 재능도 없고…….”

“……네.”

백설하의 손이 힘없이 내려갔다. 실망하는 게 눈에 훤히 보여서 절로 미안해졌다.

“상담해주러 왔다면서 쌤 기를 꺾으면 어떡해요.”

“……그으, 그런데 사람이 바뀌었다고 갑자기 잘할 리는 없잖아.”

“그건 모르죠. 솔직히, 나도 포기한 아저씨를 쌤이 어떻게 가르칠지 쫌 궁금하긴 해요. 쌤은 진짜 선생님이잖아요.”

“…….”

성필은 실망한 백설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쉘 위 댄스?”

백설하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는 성필의 손을 살포시 잡곤, 조아라를 향해 강의하듯 말했다.

“이사님은 이렇게 가만히 있어도 주눅 들어 계시잖아. 그런데 윽박지르면 더 위축하시는 게 당연하지.”

“아저씨는 나 연습생 땐 위축 돼 있어도 윽박질렀잖아요.”

“……이사님은 아라랑은 살짝 달라. 채찍보다 당근이 더 효과적인 타입이셔.”

“쌤, 아저씨한테 채찍질한 적 있어요?”

“어? 어, 아니.”

“당근은요?”

“그냥, 말이 그렇다구…….”

성필은 백설하의 강의를 흥미롭게 들었다.

자신이 채찍보다 당근이 더 잘 먹히는 타입이란 소리는 처음 들어봤다. 백설하가 자신을 그렇게 보고 있단 것도 처음 알았다.

“상대가 위축했을 땐 몰아붙이지 말고 부드럽게 보듬어줘야 해.”

“어린애가 된 거 같네.”

백설하는 성필의 손을 더욱 꼭 쥐었다.

“이사님, 잘하고 계세요. 스텝 몇 번 밟지도 않았는데 벌써 폼이 꽤 나세요.”

너무 속 보이는 칭찬이다.

“다시 해볼게요. 저랑 손만 잡구요.”

“응.”

“자, 퀵, 퀵.”

왼발 앞으로, 왼발 뒤로.

“슬로우, 슬로우.”

오른발 뒤로, 오른발 앞으로.

“이것만 반복해볼게요.”

백설하의 발은 성필과 대칭으로 움직였다. 성필은 아래만 보면서 그녀의 발을 따라갔다.

그랬더니 감각이 점점 근육에 새겨진다.

“다음은 마지막 스텝에 한 바퀴 빙글 돌아볼게요.”

백설하가 성필의 손을 갑자기 놓았다.

성필은 온 신경을 발에만 집중했다. 그리고 한 바퀴 빙글 돌았다.

“네, 그걸 다시 반복해볼게요.”

퀵, 퀵, 슬로우, 슬로우, 풀 턴.

퀵, 퀵, 슬로우, 슬로우, 풀 턴.

“어, 된다! 된다! 이렇게 하는 거 맞지?!”

백설하가 소소하게 박수를 쳐주었다.

“잘하시네요. 그렇게 하시면 돼요. 다음은 실전으로 해볼게요.”

백설하는 스텝 무아지경인 성필의 손을 잡았다.

“설하야 괜찮아?”

“아저씨가 안 괜찮은 거 같은데.”

“춤이잖아요.”

둘은 리더와 팔로워가 되어 자세를 잡았다.

당연하지만, 일반적인 파트너보다 거리감이 있었다. 거리감이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둘 사이는 붕 뜬 느낌이 있었다.

조아라가 둘 사이로 손을 넣어 휘휘 저었다.

“이게 무슨 사교댄스 포지션이에요. 아저씨, 어깨에 손을 얹는 게 아니라 등에 손을 대는 거라니까요.”

“설하는 너랑 달라!”

조아라가 또 성필에게 로우킥을 날렸다.

“이사님.”

그때 백설하가 진지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성필을 불렀다. 성필은 절로 긴장했다.

“이건 춤이에요. 볼룸댄스에서 신체 접촉은 당연한 거구요. 이사님은 음방에 나오는 아이돌들에게 백댄, 백업 댄서가 신체 접촉을 해도 음란하게 보세요?”

아.

성필은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안개가 걷힌 기분이었다.

백업 댄서가 아이돌을 터치할 때도 음란하게 보냐고? 절대 아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안무를 구성하는 요소니까.

하나의 예술 작품이니까.

“그래.”

성필은 진지하게 이 자리에 임하기로 결심했다.

볼룸댄스란 원래 이러한 것이다.

부끄러울 것 따윈 없다.

“알겠어. 진지하게 할게.”

“…….”

“…….”

“……그, 그냥 이대로 할까요?”

“그러자.”

마음은 진지하지만 거리감은 그대로였다.

이 두 가지는 다른 문제였다.

이 이상 거리가 줄어들면 진지했던 마음이 금세 증발할 수도 있다.

“자, 해볼게요. 퀵, 퀵.”

슬로우, 슬로우.

풀 턴.

“네, 잘하셨어요. 이대로 계속.”

둘은 같은 스텝을 다섯 번 반복했다.

반복할수록 동작은 완벽해져 갔다.

발에만 신경 쓰던 성필에게도 여유가 생겼다. 그리고 여유가 생겨서야 이 춤의 즐거움을 알게 됐다.

“그냥 발만 움직이는 건데…….”

“재밌죠?”

조아라가 보란 듯이 물어왔다.

성필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함께 춤을 추는 상대와 합을 맞춘다는 게 이렇게 즐거운 일인 줄 몰랐다.

성필은 인생 절반 손해 본 기분이었다. 이 즐거움을 미리 알았더라면 젊었을 때 사교댄스 학원에 다녔을 텐데.

“다음은 발을 더 멀리 뻗으세요. 움직여봐요.”

“움직여? 제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네. 익숙해져서 제대로 움직일 수 있으면 더 재밌어요.”

성필은 아까보다 살짝 더 발을 멀리 뻗었다.

백설하는 그보다 훨씬 더 뒤로 발을 물렸다.

둘이 생각한 ‘멀리 뻗다’의 감각이 달랐다.

뻗은 발이 제자리로 돌아오자 백설하가 다시 말했다.

“더 깊이 들어오셔야 해요. 이렇게 깊이 들어가도 되나 싶은 수준까지요.”

“더? 여기서 깊이?”

“네.”

성필은 마음먹고 할 수 있는 한 발을 더 멀리, 깊이 뻗었다. 백설하도 그러했다.

그러자 백설하의 허리가 뒤로 꺾이듯 했다. 자연스레 성필의 상체는 앞으로 기울어졌다.

“아, 이거.”

아육금 댄스스포츠에서 보았던 ‘오버스웨이’ 동작과 비슷하다.

성필은 처음 느껴보는 성취감을 지니고 백설하를 내려다보았다. 백설하는 성필을 올려다보면서 밝은 표정을 지었다.

“네! 이렇게요! 잘하시네요! 그럼.”

백설하는 성필이 배운 스텝에서 벗어났다.

오른발이 뒤로 빠진 상태에서 왼발도 뒤로 뺐다. 성필은 그녀의 손에 이끌려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턴!”

빙글 한 바퀴 도니, 이젠 성필이 나아가는 입장이 됐다. 그렇게 둘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걸음을 내디딜 수 있게 됐다.

‘말도 안 돼.’

백설하를 잡고 있는데도 혼자인 것처럼 걸을 수 있다. 백설하를 잡고 있는데도 혼자인 것처럼 돌 수 있다.

마치 혼자가 된 것만 같…… 아니.

‘하나가 된 거 같아.’

백설하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면, 성필은 그녀와 하나가 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래도 되나?’

성필은 남자이니 리더여야 했다. 그런데 백설하에게 이끌려 팔로워가 됐다.

백설하도 그걸 인식한 듯 이끌던 힘을 뺐다. 걸음도 멈추었다.

“이젠 이사님이 움직이세요.”

“내가 리드하면 넘어질 거 같은데.”

“괜찮아요. 제가 다 맞추면 돼요.”

“그게 돼?”

“겨우 걷는 거랑 도는 거잖아요. 아라랑 하면 저보다 훨씬 대단한 동작도 할 수 있을걸요?”

“대신 내가 피곤하겠죠.”

성필은 백설하를 믿고, 그녀가 없다 생각하고 발을 뻗었다. 그녀가 말한 대로 이렇게 깊이 들어가도 괜찮을까 싶을 지점까지.

그리고 그렇게 계속 걸었다.

놀라웠다.

‘정말 되잖아?’

백설하는 성필의 모든 동작을 맞춰 주었다.

성필은 아까보다 훨씬 짙은 성취감을 느꼈다.

“아, 아.”

너무 감동해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듀오 댄스란 게 이렇게나 아름다운 건지, 행복할 수 있는 건지 미처 몰랐다.

인간은 혼자 움직이는 데 익숙하다.

둘이서 움직인단 일 자체가 드물다.

이인삼각을 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두 사람이 같은 의지를 가지고 있더라도, 같은 동작을 수행할 수 없단 것을.

그리고 이인삼각에서 가끔 찾아오는 순간이 있다. 둘이 하나가 된 것처럼 뛸 때다. 그 간단한 동작을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인간은 행복해진다.

서로 다른 인간과 하나 된단 건 그런 의미다.

“아……!”

이 쾌감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다.

신에게 도전한 벌로 바벨탑이 붕괴한 이후, 인류는 아담의 언어를 잊어버렸다.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인류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완벽한 수단이 자취를 감추었다.

그건 인간의 원죄였다. 서로가 서로를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것. 서로가 서로와 영원히 진정한 하나가 될 수 없는 것.

인간은 신 앞에 선 독단자이거나 유물론적 객체로만 존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춤은 그 한계를 깨부순다.

성필은 책으로만 읽었던 그 고리타분한 비유들을 이 순간에야 진정으로 이해했다.

“아으, 아, 와!”

정말, 발을 뻗는 대로 품의 백설하가 따라온다.

성필이 아는 한, 이 일체감과 비교할 만한 건 성관계가 유일했다.

흔히 인터넷에서 치킨을 먹거나 게임을 하는 등, 소소하게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걸 ‘이게 야스지 ㅋㅋ’라고 표현하곤 한다.

성필은 그런 글을 볼 때마다 쓸쓸한 자기위로의 해학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외설스럽지만, 이 순간을 표현할 비유가 그것뿐이었다.

성필은 인류의 원죄가 걷힌 황홀경을 걸었.

“앗!”

“아!”

성필은 땅을 강하게 디디는 것으로 휘청거림을 멈추고, 그의 힘에 휩쓸려 뒤로 넘어가려던 백설하의 등을 받쳤다.

성필은 그녀를 받치기 위해 붙잡고, 백설하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그에게 매달렸다.

둘은 밀착했다.

둘이 어정쩡한 자세로 턱 멈춰 섰다.

성필의 발은 너무 앞을 밟았었다. 그런데 백설하가 뒤로 발을 물린 거리가, 성필이 뻗는 만큼이 되지 못했다.

서로 발과 다리가 엉켜 넘어질 뻔한 것이다.

“너, 너무…….”

백설하는 아직도 넘어지려던 순간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눈이 크게 뜨여 있었다.

“깊이 오셨어요…….”

“아, 미안, 너무 몰입했네…….”

텅!

문 쪽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경악한 표정의 신아름이 서 있었다. 그녀가 들고 온 것으로 추정되는, 한구인의 건강즙이 담긴 텀블러가 바닥을 굴렀다.

“뭐 하는 거예요오오오!”

신아름은 날개 단 범처럼 달려와 성필과 백설하를 떨어뜨렸다.

“쌤 적당히 해요! 춤을 빌미로 팀장님을 유혹해?! 팀장님도 몸가짐 조심하라고 했잖아요! 남사스럽게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나, 남사스럽……. 볼룸 댄스, 댄스스포츠…….”

“옛날에도 말했지만 다시 말할게요! 들어요! 쌤은! 위험! 하다고요! 생물학적인 아우라가! 26살의 페로몬이! 있다고요! 연애 금지가 풀려서어어어!”

신아름은 그리 일갈한 후 잔뜩 긴장하여 백설하를 경계했다.

평소였다면 신아름의 목을 움켜잡고 ‘내 나이를 입에 올리는 자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라고 했을 백설하.

그녀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왜 아무것도 안 해요?! 쌤도 찔리죠?! 평소처럼 내 목 붙잡고 협박해요!”

“야 신아름. 너 개갑분싸야. 그만 흥분…….”

“넌 왜 가만히 있어?! 내가 잘 봐달라고 했잖아!”

“그런 부탁을 했어?!”

백설하가 경악했다.

그에 조아라는 침착하게 답했다. 그녀는 태어나자마자 하늘과 땅을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읊었던 부처처럼 경건함에 차 있었다.

“춤은 순수하다. 신체 접촉을 연인과밖에 하지 못하여, 춤을 성애적으로 소비하는 미디어에 익숙하여, 춤을 성애적으로만 그려왔던 가련한 영화 드라마 시나리오 작가들의 무지 때문에, 무용에서의 접촉조차 성애적으로밖에 해석할 수 없는 불쌍한 인생…….”

“무용학 논문은 너나 처읽어!”

신아름은 성필을 이끌고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나간 자리엔 쓸쓸하게 굴러다니는 텀블러만이 있었다.

“……쟤는 어째 날이 갈수록 이상한 데서 히스테릭해지는 거 같애. 우리 연애 금지 풀린 후로 아저씨한테 이상한 강박 생겼어. 옛날보다는 낫긴 한데, 안 그래요 쌤?”

“으, 으응.”

백설하는 헤헤 웃었다.

“아름이가…….”

그녀는 고개를 아래로 숙여 자신의 빈손을 보았다.

아까까지 무언가로 가득 차 있던 손을.

그녀는 잃어버렸을 것을 되찾고 싶단 듯 손을 꼼지락꼼지락 쥐었다 폈다.

“아름이가 이사님을 많이 아껴서 그렇지.”

“근데 방금 말 진짜 너무하지 않았어요? 쌤한테 뭐 생물학적인 뭔가가 있다느니 뭐니. 걍 쌤을 남자에 미친녀, 미친 여자로 취급하잖아요.”

“이해는…… 돼. 방금 이사님이랑 자세가…….”

“쌤, 다시 말하지만 사람들이 춤을 해석하는 방식은 미디어에 너무 큰 악영향을 받았어요. 영화나 드라마 작가들이 남녀가 사랑하면 무조건 같이 춤추게 만드니까 그 꼴이 난 거라고요. 그리고 같이 춤추면 꼭 반해요. 심지어 발리우드 영화는 남녀의 댄스씬이 섹스의 은유래요. 근데 쌤은 그러면 안 되죠. 쌤은 직접 춤을 춰본 사람이잖아요.”

“미, 미안…….”

“…….”

“…….”

“……쌤 상담은 어떡해요?”

“돌아오시겠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조아라는 연습실 구석에 놓인 백설하의 수첩과 펜을 보았다. 아까까지 백설하가 가사를 끄적이고 있던 물건이었다.

백설하도 그것을 보다가 밝게 답했다.

“응, 어차피 할 것도 없는걸. 기다릴래.”

그날, 성필은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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