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한는 프로듀서-595화 (595/760)

595화

백설하는 방에서 짐을 챙기는 장하양을 물끄러미 보았다.

장하양은 설날을 맞아 성필과 함께 그의 부모님을 뵈러 간다.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땐 ‘이게 무슨……?’이란 생각이 절로 생겼지만, 지금은 이해한다. 장하양이 겪었던 일을 두 눈으로 보아왔으니.

장하양에겐 진실로 회사가 집이고, 성필이 가족일 것이다.

그래, 지금은 이해하고 익숙해진 일이다.

장하양이 명절마다 성필과 당일치기로 부모님을 뵈러 가는 것 말이다.

그런데.

“언니 고데기 좀 빌릴게요.”

신아름이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장하양의 책상 근처 선반에 놓인 고데기를 집어 들고 사라졌다.

“응.”

장하양의 대답은 신아름의 물음보다 훨씬 뒤늦게 나왔다. 신아름이 고데기를 들고 사라진 후였다.

장하양은 어딘가 넋이 나가 있는 듯했다. 마치 첫 소풍을 맞은 유치원생 같다고 할까.

명절쯤이 되면 항상 이러하다.

아무튼.

‘왜 아름이는 아무렇지도 않지?’

백설하는 이런 의문을 품어왔다.

‘아름이는 왜 아무 반응도 안 보일까?’

백설하가 아는 신아름이라면, 성필과 장하양의 관계를 고깝게 보는 게 당연했다.

고깝게 보는 걸 넘어서 명절마다 장하양에게 달려들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실제로 신아름이 가로 엔터로 들어온 초기엔 묘하게 장하양과의 기 싸움이 있었다.

그런데 장하양이 처음 성필과 부모님을 뵈러 갈 때도 그렇고, 지금도 신아름은 장하양에게 별다른 적개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감히 내 아빠를 빼앗아!’라며 투쟁 상태에 들어가도 모자랄 거 같은데.

‘왜일까?’

여태까지는 젊잖은 언니로서 장하양과 신아름 사이의 일에 간섭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성필의 집안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사소한 호기심이더라도 세월이 쌓이면 크게 부풀려지곤 하는 법이다.

‘박 이사님의 아버님과 어머님…….’

과연 어떤 분일까.

아마 아버님은 엄격하실 것 같다. 연습생 시절 자신을 대하던 성필처럼 말이다.

어머님은 유하실 것 같다. 자신을 칭찬하고 용기를 북돋워주는 성필처럼 말이다.

“하양아.”

역시, 장하양의 대답은 살짝 늦었다.

그녀는 짐을 챙기면서 답했다.

“네, 언니.”

“내일 가는 거지?”

“네.”

“힘들겠다. 몇 시간이나 차 타고 가는 거잖아.”

“아하하, 제가 가겠다고 한걸요. 안 힘들어요.”

“음, 그래도 가면 명절 음식 많을 테니까.”

짐을 챙기던 장하양의 손길이 느려졌다.

“맛있다고 너무 많이 먹는 거 아니지?”

백설하가 헤헤 웃으면서 말했다.

“박 이사님 친척은 많으셔? 처음 갔을 때 다들 안 놀라셨어? 혹시 애인이라고 착각한다거나 안 그랬어?”

여느 때처럼 장하양의 답은 뒤늦었다.

“아하하, 글쎄요.”

장하양은 짧은 말 대신 손이 바빠졌다.

이것저것 가방 안에 담던 장하양은, 갑자기 백설하를 돌아보았다.

“언니, 박 이사님 가족 이야기는 이사님이 안 계실 때 할 만한 게 아닌 거 같아요.”

“으, 응? 아, 그렇지…….”

“그리고 제가 이러쿵저러쿵 떠들 이야기도 아니구요. 죄송해요.”

“죄송하긴!”

백설하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웃음으로 최대한 무마했다.

동시에, 이렇게나 단호하게 숨길 이야기인가 싶었다. 그냥 이런 분위기였다, 이런 분이 있었다, 그 정도만 들어도 만족할 텐데.

‘……설마.’

백설하는 미래를 상상했다.

소녀연맹의 7년 활동이 끝을 맺고, 성필과 장하양이 손을 맞잡은 채 선언한다.

‘저희 결혼합니다.’

장하양이 말을 받는다.

‘상견례는 6년 전에 마쳤어요. 아하하, 부모님은 저만 뵀으니 단견례(單見禮)겠네요.’

그리고 결혼식장.

백설하가 모르는 성필의 친척들이 대거 와서 둘의 결혼을 축하해준다.

‘처음 볼 때부터 원앙 같았어. 성필아 축하한다.’

‘아이고 우리 성필이, 이제 걱정 하나 덜었네.’

‘이렇게 예쁜 색시를 얻고, 우리 부족한 아들만 어쩌다 이런 호사를 누리는지…….’

‘여보, 저랑 결혼한 건 호사가 아니란 뜻이에요?’

‘물론 내가 누린 행운보다는 덜하지. 아니, 며늘아기가 모자란단 뜻은 아니야!’

장하양은 행복한 미소 속에서 부케를 던진다.

부케는 백설하의 손안에 안착한다.

그녀는 부케를 바라본다. 새하얗다.

“언니?”

“어, 응?”

“어떻게 되셨어요?”

“응? 뭐가?”

장하양은 익숙하단 듯 애정 어린 웃음을 보였다. 옛날부터 그러했지만, 백설하는 쉽게 넋을 잃곤 한다.

“가사요.”

“아, 가사.”

“잘돼가고 계세요?”

“가사…….”

백설하는 자신의 빈손을 내려다보았다.

방금까지 무언가 쥐고 있었다는 것처럼. 그리고 무언가를 쥐려는 것처럼.

그녀의 손은 허공만을 붙잡았다.

* * *

“가사…….”

“응?”

“아.”

백설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설날을 맞아 본가로 왔다.

평소 보기 힘든 가족들과 식탁에 도란도란 앉아 식사를 하던 와중이었다.

“설하야 왜?”

“으응, 아냐.”

백설하는 식사 중에도 쉽게 넋을 놓았다.

명백히 이상한 모습이지만, 어머니와 가족들은 그러려니 하고 넘겼다.

오히려 신경 쓰이는 쪽은 백수현이었다. 그는 집에 온 순간부터 지금까지 잠시도 진정하는 순간이 없었다.

지금도 다리를 덜덜 떨며 ‘끄응, 으음, 흐윽’이라는 신음을 간간이 내뱉고 있었으니까.

“아 형 쫌 가만히 있어 쫌.”

보다 못한 둘째 남동생이 형을 타박했다.

백수현은 어벙한 말투로 ‘어’라고 한 후 잠시 조용해졌다. 그러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냉장고로 달려가 냉수를 퍼마셨다.

형에게 핀잔을 준 둘째는 이번엔 뭐라고 하지 못했다.

‘한 달 이내에 데뷔조가 발표된다지.’

평범한 학생으로 치자면 수능 결과 발표, 아니.

입시 결과 발표다.

심지어 재시(再試)가 불가능한 입시다.

한 달 이내에, 백수현이 들였던 시간이 가치 있었는가 아닌가가 판명된다.

백설하는 그런 동생을 보자 자신도 속이 안 좋아졌다. 원래 수험생이 있는 집안은 찬물도 마음 놓고 못 마신다지 않은가.

“야, 힘 남아돌면 턱걸이라도 해. 운동하면서 머리 비워.”

입시의 부담감 따위 알 리 없는 셋째가 너무나 정상적이고, 너무나 공감성이 부족한 발언을 꺼냈다.

“그래야겠다.”

그런데 백수현은 그걸 받아들였다. 그는 동생들의 방문에 설치된 철봉에 매달려 턱걸이를 하기 시작했다.

[진저―조아라 팀의 모던 댄스입니다!]

텔레비전에서는 ‘아이돌 육상 금메달’이 한창 방영 중이었다.

가족들은 정신없는 백수현을 보는 대신 아육금을 보기로 했다. 화면 안의 진저와 조아라는 편집의 힘까지 등에 업고, 그야말로 굉장한 퍼포먼스를 보여주었다.

도중에 백설하의 얼굴도 화면에 잡혔다.

[최고다 우리 아라―!]

리더 백설하는 혼신을 다하여 동생을 응원하는 중이었다. 뼈를 깎으며 밤낮없이 연습하던 조아라의 모습이 떠올랐는지 굵은 눈물마저 흘렸다.

“내년엔 수현이도 저기서 볼 수 있겠네.”

어머니가 가볍게 말했다.

백설하는 애매한 미소만 지을 뿐, 뭐라고 답해줄 수가 없었다.

어느새 백수현은 턱걸이를 마치곤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도 어머니의 말을 들었을 테지만, 백설하처럼 마땅한 답을 꺼내지 않았다.

그저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고를 뿐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난 뒤 후식으로 과일까지 먹었다. 백설하는 과거엔 자신의 방이었던 백수현의 방, 그리고 곧 둘째 동생의 방이 될 곳으로 들어왔다.

백수현은 과일을 하나도 입에 넣지 못하여, 백설하보다 먼저 방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는 백설하가 들어와도 아무런 반응 없이 침대에 앉아 있기만 했다.

“수현아.”

“……어.”

백수현이 한 발 뒤늦게 답했다. 망상에 빠진 백설하처럼.

“왜.”

“노력은, 후회하지 않을 만큼 했다고 생각해?”

“……아니.”

백수현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1년이라도 더 빨리, 아니, 몇 개월이라도, 며칠이라도 더 빨리 연습생이 됐으면 좋았을 텐데…….”

가로 엔터의 연습생들은 A반과 B반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런데 몇 달 전, B반 연습생이 모두 방출되었다.

백수현은 방출이 있기 고작 한 달 전, 간신히 A반에 들었었다.

울며 떠나가는 경쟁자들, 혹은 동료들을 보면서 마음이 얼마나 아팠는지 모른다. 그들을 동정해서가 아니라, 몇 개월 뒤엔 자신이 저렇게 될 수도 있단 생각 때문이었다.

그 순간이 다가왔을지도 모른다.

“모르겠어, 진짜, 아무것도 모르겠어…….”

백수현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마구 비볐다. 백설하는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 포옹해주었다.

“잘할 수 있을 거야.”

백수현은 백설하에게 안겨 몇 번이고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그의 등이 호흡에 맞춰 오르락내리락했다.

숨이 안정을 되찾았을 때, 백수현이 물었다.

“누나.”

“응.”

“나는, 누나만큼 빛날 수 있어? 회사 사람들이, 누나에게서 봤던 빛을, 나한테서도 봤을까?”

동생의 질문을 듣고, 백설하는 아주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어 성필의 제안을 물리쳤을 때를.

실패했단 이유로, 나이가 들었단 이유로, 자신이 한없이 모자란단 이유로, 백설하는 성필의 부탁을 거부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거절한 건 이런 뜻이었던 듯하다.

‘내 말을 반박해줘.’

나 대신 나를 믿어줘.

백수현도 그러할 것이다.

스스로가 모자라게만 보여서, 도저히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는 상태.

“물론이지. 수현이가 얼마나 멋진데.”

“……누나.”

“응.”

“내가 전에 했던 말 기억해? 누나를…… 미워할 거 같다고…….”

백설하의 동생 백수현.

그는 누나의 후광에 괴로워했었다.

그에겐 평생 ‘백설하의 동생’이란 이름이 따라다닐 것이기에.

“근데, 사람 마음이 진짜 간사하다? 지금이면, 데뷔할 수만 있으면, 평생 누나 동생으로만 불려도 될 거 같아.”

백설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생들이든, 아니면 수험생들이든, 혹은 스포츠선수든.

인생이 갈리는 진정한 시험장에 섰을 때는 다 같은 마음이다. 만약 기적처럼 기회가 주어진다면, 설령 그 기회가 타인의 기회를 깔아뭉개는 종류일지라도, 불합리할지라도, 그런 기회가 주어지기만 한다면.

‘누구든 잡고 싶겠지.’

정정당당한 승부 따위는 집어치우고, 부정한 기회를 움켜쥘 게 분명하다.

자신이 쏟아온 몇 년의 노력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수현아.”

백설하는 그의 등을 쓸면서 다정하게 말했다.

“넌 내 동생으로만 불리기엔 아까운 애야. 사람들이 너를 좋아한다면, 그건 네가 내 동생이라서가 아니야. 너란 사람을 좋아해서일 거야. 말했잖아, 우리 수현이가 얼마나 멋진 애인데.”

백수현은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백설하는 그가 더 크게 울었으면 했다. 이런 싸구려 위로로나마 동생이 마음을 풀길 바랐다.

아마 성필이었다면 이보다 훨씬 더 따스한 말을 해줄 수 있었겠지.

하지만 자신에겐 이 정도가 한계다.

백설하는 동생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계속, 계속 등을 쓸어주었다.

아무 걱정 없던 어린 시절처럼.

* * *

성필은 모니터에 떠오른 그림을 면밀하게 관찰했다. 그림이라고 부르기에도 뭐한 게, 그림판으로 개발새발 그린 것이었다.

정지음이 그린 소녀연맹의 타이틀곡 송폼(Song form)이었다. 아니, 송폼을 설명하는…… 설계도 같은 것이었다.

‘타이틀곡의 주제는 팬송. 팬을 향한 사랑.’

그걸 표현하는 방식은 멤버마다 천차만별일 것이다. 사랑이라는 주제 안에, 천차만별인 표현법과 가사가 통일성을 지녀야 한다.

다섯 개의 이야기는 하나의 곡 안에서 조화를 이루어야만 한다.

‘그렇다면 파트는 다섯.’

1절을 절반으로 나누어 멤버 두 명에게 부여한다면, 전체 곡에는 여섯 개의 자리가 생긴다.

이 여섯 자리를 멤버들에게 하나씩 준다고 치면 한 자리가 남는다. 이건 멤버들의 파트마다 늘이고 줄이면 큰 문제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통일성을 확보하는 방법이지.’

성필이 생각하기에, 이 곡은 하나의 멜로디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나갈 수 없다.

멤버마다 가사에 담을 이야기와 감정이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작업에 가장 알맞은 비유는, 래퍼들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항상 등장하는 단체곡 미션이다.

하나의 곡이 주어지면, 그 곡에 참여한 대여섯 명의 래퍼들이 각자 파트를 하나씩 맡아 가사를 쓴다.

랩이란 보통 정해진 멜로디가 없다. 그래서 랩을 뒷받침하는 음악은 곡이 아니라 ‘비트’라고 불린다.

박자만 있어야 곡에 참여하는 래퍼들이 저마다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으니 말이다.

‘하이라이트는 고정된 멜로디를 집어넣기도 하지만.’

요즘은 멜로디컬한 랩이 유행이라, 아예 곡 전체에 멜로디가 있기도 하다.

싱잉랩이라고 한다.

어쨌거나, 성필은 이 타이틀곡을 래퍼들의 단체곡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아예 멤버들의 각 파트마다 어울리는 멜로디를 따로 넣는 건…….’

그러면 믹스팝(Mixpop)처럼 될 거 같다.

‘멤버들이 전부 랩을 하면?’

그럼 벌스에는 비트만 있을 테니, 본인만의 심상을 표현하기 훨씬 쉽겠지.

‘아니야. 그나마 랩을 랩답게 할 수 있는 애가 하양이뿐이니…….’

당연히 곡의 하이라이트에는 멜로디가 있다. 하이라이트 멜로디는 곡의 정체성이자 통일성 그 자체다.

그 외의 벌스는 어떻게 채워야 하는가…….

‘랩을 하고 싶은 멤버는 랩을 하고, 노래하고 싶은 멤버는 노래를 한다?’

아니면 정석대로 모든 파트가 같은 멜로디를 사용한다면 어떨까.

그러면 멤버들이 쓴 가사는 멜로디를 맞추기 위해 첨삭을 거듭해야 할 것이다.

흔히 ‘자수를 맞춘다’고 표현하는 작업이 수행되어, 멤버들이 쓴 가사가 뭉텅이로 잘려 나가겠지.

‘비트에 노래하는 게 가능한가?’

소녀연맹의 ‘아니’가 그런 종류의 곡이었다. Inst버전을 들으면 이게 무슨 음악인가 싶을 정도로 베이스와 드럼에 충실한 곡이다.

그런데 그 곡도 1절과 2절에 통일성이 있었다.

‘하긴, 비트에 노래를 부르면 노래 자체가 멜로디지 뭐.’

보컬이 멜로디라인이 되는 것이다.

즉, 백지에 자신만의 멜로디를 입히는 게 멤버들의 작업이다.

“……어떤 노래가 나오는 거지?”

지금으로선 상상조차 안 간다.

편곡의 천재로 불리는 정지음도, 천차만별인 가사와 보컬 멜로디, 분위기를 하나로 봉합하는 게 가능할까.

성필이 이 고민을 시작한 건 완성된 신아름의 가사를 받고 나서였다.

그 가사를 보고 깨달았었다.

‘아, 주제가 팬송이지만 멤버마다 분위기가 아예 다르겠구나.’

어쩌면, 가사를 전부 받았을 땐 수습할 수 없을 정도의 혼란이 펼쳐질지도 모른다.

아예 맞지 않는 조각들이 이어붙이려, 정지음이 끙끙 앓다가 항복을 선언할 수도 있겠지.

만약 그렇다면 지금 가사 주제를 좁혀야 한다. 통일된 감상이 곡에서 계속 유지되도록.

‘물어보러 가야겠…….’

덜컹!

성필은 옆에서 들리는 큰소리에 깜짝 놀랐다.

손혜빈이 벌떡 일어난 것이다. 그녀의 의자가 거의 튕겨 나가듯 밀려났다.

“나갔다 올게.”

손혜빈은 심각한 얼굴로 사무실을 나섰다. 그녀가 사라지자 일순 경직되었던 분위기가 확 풀렸다.

하지만 그녀의 충실한 심복인 A&R팀 이재호만은 긴장된 표정을 풀지 못했다.

손혜빈은 요즘 항상 저런 상태였다.

‘데뷔조를 골라야 하니까.’

B반 연습생들을 떨어뜨릴 때도 술을 퍼마시면서 통곡했던 손혜빈이다. 이젠 A반 연습생 중 데뷔조를 골라내야 한다.

그녀의 손에 어린아이들의 인생이 달려 있다.

그룹을 성공시켜야 한다는 압박감과는 별개로, 그녀는 커다란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성필은 요즘 그녀에게서 풍기는 담배 냄새를 모른 척하고 있었다.

“저는 지음이한테 갔다 올게요.”

성필은 부하 직원들에게 그리 말하곤 사무실을 나섰다.

사실, 성필도 손혜빈이 받는 스트레스를 그대로 받는 중이었다. 데뷔조를 고를 권한은 손혜빈에게만 있는 게 아니었으니까.

신인개발팀과 A&R팀 전원이 모여 매일 회의와 회의, 토론과 토론을 거듭하고 있다.

거기에 성필은 한 가지 작업을 더 하고 있다. 바로 남자 연습생이 필요한 기획사들을 알아보는 것이다.

취업 알선이라고 해야 할까.

요즘은 남자 연습생 가뭄이니, 알아보는 기획사들마다 호의적인 대답을 들려주긴 했다.

아무렴, 소녀연맹을 만든 가로 엔터의 이사가 손에 쥐고 있던 연습생들 아닌가. 보내면 연신 감사를 표하며 받아들이겠지.

‘그래도, 내가 다른 기획사들 알아봐 준다고 해도 연습생들의 좌절감이 가시는 건 아니겠지.’

리카처럼 데뷔조에서 떨어지고 나서 새로운 기회가 주어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한 회사의 데뷔조에서 떨어졌단 건 성공의 사다리에서 굴러떨어졌음을 의미한다.

사다리에서 밀어 버리는 입장인 성필과 손혜빈의 기분은 절대 좋을 수가 없다.

이것도 비즈니스라고 냉철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둘 다 그렇게 속 편한 인간들이 아니었다.

“응?”

정지음은 작업실에 없었다.

컴퓨터가 켜져 있는 것으로 봐선 잠시 어디에 나간 듯했다.

성필은 모니터 바탕화면에 눈길이 갔다.

정지음과 이수연의 커플 사진이었다. 언제 여행을 갔다 왔는지, 배경은 강원도의 ‘알파카 월드’였다.

“새끼…….”

성필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잘 지내고 있는 거 같아 다행이다.

어떻게 그가 정지음과 이수연이 사진 찍은 장소를 바로 알았냐면, 전생에 가 본 적 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났다.

‘으와, 아라야 얘 봐! 내 손 핥았어!’

‘뭔데. 왜 나한텐 관심이 없고 오빠한테만 와. 야, 여기 봐. 나도 먹이 있어.’

‘귀엽다, 귀엽다.’

‘아니 진짜 뭔데.’

‘이름표 봐. 암컷이잖아.’

‘어이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오네.’

알파카 월드 근처에는 시에서 운영하는 특이한 숙소가 있다. 천막 형태를 흉내 냈지만 진짜 천막은 아닌 그런 숙소다.

가격은 수십만 원대인데 너무 좁아서 당황했던 기억이 있다.

‘돈 아깝네. 그냥 멀어도 시에 있는 숙소 잡을걸.’

‘오빠.’

‘응? 너, 너 뭐, 벌써?’

‘걔가 핥아주니까 좋았어?’

‘걔? 아, 알파카?’

‘내 앞에서 바람을 피워?’

‘걘 여자가 아니라 암컷이자아흑……!’

“아저씨.”

“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성필이 혼비백산했다.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성필보다 더 놀란 조아라가 보였다.

“뭔데 뭐 여기서 이상한 짓 하고 있었어요? 왤케 놀란대.”

“어, 아니야. 갑자기 부르니까 놀랐잖아.”

“하긴, 여기 문 열리는 소리도 안 나서 그렇긴 해요. 바닥도 이렇게.”

조아라가 쿵쿵 발을 굴렀다.

발을 굴렀대도, 바닥의 폭식한 재질 때문에 별다른 소리도 나지 않았다.

“암살 최적화고.”

“그러게. 작업실은 암살에 취약하긴 해.”

“신사옥은 이거 보강 좀 해야 해요.”

“왜 왔어?”

“한 이사님 새 건강즙 나왔어요. 지음 오빠 주려고요.”

“한 이사님 지금 안 계시잖아.”

“방금 냉장고에 추가된 거 발견했거든요. 내가 먼저 먹긴 겁나서 오빠 먼저 먹일 생각이에요.”

지음아, 최대한 늦게 돌아와.

“근데 없네. 아저씨는 왜 왔어요?”

“일하려고 왔지 왜 왔겠어.”

“여기서 계속 기다릴 거예요?”

“아니. 사무실 가게.”

“일 없으면 연습실 잠깐 와요. 우리끼리 볼룸 댄스 춰보고 있어요.”

“우리? 누구?”

“나랑 쌤이요. 아저씨도 와서 한 곡 춰요.”

“난 못 춰.”

“스텝 하나만 배우면 돼요.”

성필은 아육금에서 보았던 진저와 조아라의 춤을 떠올렸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밀착했던 둘…….

그리고 이어서 떠오르는 백설하…….

“난 괜찮아.”

“쫄?”

“어, 쫄았어.”

“아니면 가서 쌤 상담이나 해줘요.”

“상담?”

백설하가 또 고민이 있나?

“가사 때문에 골머리 엄청 쓰는 거 같아요. 아저씨 이런 거 잘하잖아요. 고민 풀어주기.”

“무슨 고민인데?”

“걍 아이디어죠 뭐. 그리고 아저씨는 쌤한테 특별하잖아요.”

“내가?”

“쌤 아이돌 꿈 다 포기한 상태에서 아저씨가 딱 나타났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아저씨가 쌤 1호 팬 아니에요? 아저씨 의견이 제일 도움 되지 싶은데.”

논리적이라서 무어라 반박할 여지가 없군.

“그래, 내 팬심을 들려주면 설하가 아이디어를 떠올릴 수도 있겠네.”

“또 길거리 고백 한 번 팍 갈겨줘요.”

“너 그 영상 아직 갖고 있어?”

“옛날 폰에 있는데. 그 폰 아마 숙소에 있을 거예요.”

“아마?”

“몰라요. 뒤져보면 있겠죠 뭐.”

언제 한 번 숙소에 기습 방문해서 수거해야겠다.

성필은 조아라의 제안을 받아들여 연습실로 향했다. 둘이 계단을 타고 올라 1층에 도착하자, 때마침 한구인이 외근을 마치고 돌아왔다.

“한 이사님 오셨어요?”

“예, 갑자기 밖에 눈이 오더군요.”

한구인은 어깨에 남은 눈을 손으로 털어냈다.

“운전할 일이 있으시면 조심하시는 편이 좋겠습니다. 음? 아라 씨 그거 제가 만든 건강즙입니까?”

“…….”

조아라가 손에 든 텀블러를 슬쩍 등 뒤로 감추었다.

“맛은 어떻습니까?”

“맛있었어요. 한의사님 최고.”

조아라는 입술에 침 하나 안 바르고 거짓말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참혹했다.

“그렇습니까. 다행입니다.”

그 대가란, 따스한 한구인의 미소였다.

“…….”

조아라는 죄책감 가득한 눈빛으로 텀블러 뚜껑을 열고 한 모금 들이켰다.

“으, 으음, 맛있다.”

“많이 드셔 주십시오. 얼마든지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아저씨 빨리 가요.”

“아, 박 이사님.”

조아라가 성필을 데리고 사라지려던 찰나, 한구인이 그를 불러 세웠다.

“잠시 괜찮으시겠습니까?”

“뭐예요. 아저씨 내가 먼저 선약했어요.”

한구인은 아육금 댄스스포츠 때의 김민주처럼 성필을 향해 고풍스레 손을 내밀었다.

“잠시만 시간을 내어주시겠습니까?”

“아저씨, 선택해요. 나예요 한의사님이에요.”

“한 이사님.”

“아 가요 가. 신아름처럼 배신하고 떠나가요.”

조아라는 툴툴대면서 계단을 올랐다.

성필과 한구인은 그런 조아라의 뒷모습을 귀엽단 듯 바라보았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둘은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한구인은 의자에 앉았다. 몸을 가누는 그의 태도엔 무거운 마음에서 기인한 뻣뻣함이 있었다.

그는 깍지를 끼더니 잠시 테이블을 응시했다.

“‘옐로 서브마린 엔터’에 다녀왔습니다.”

옐로 서브마린 엔터란 보이그룹 ‘웨이퍼센트’가 속한 기획사다.

가로 엔터가 인수 대상으로 눈독 들이는 중이고, 오늘 드디어 한구인이 그쪽에 방문했다.

“반응이 안 좋던가요?”

“반응이 좋았습니다.”

“아.”

성필은 안도했다.

보이그룹 웨이퍼센트는 가로 엔터 상장 계획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0만 장벽이란 별명이 붙은 그들에게 성공을 안겨다 주는 건, 가로 엔터의 저력을 증명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업적일 테니.

벌써 가로 엔터의 A&R팀은 웨이퍼센트를 위한 기초 프로듀싱 기획에 들어간 상태였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호들갑 떤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젠 그런 걱정은 없다.

상대가 긍정적이라고 하니 말이다.

“그런데, 반응이 너무 좋았습니다.”

“……네? 너무 좋아요?”

한구인은 굳은 얼굴로 짤막하게 당시 상황을 이야기했다.

* * *

옐로 서브마린 엔터의 대표 신대영.

그는 좁은 집무실에서 한구인을 맞았다.

신대영은 한구인의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끈기 있게 경청했다. 도중에 질문은 일절 던지지 않았다.

이야기를 마친 한구인은 묘한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저 굳은 표정으로 보아하건대, 좋은 대답이 나오진 않을 듯해서였다.

‘몸값을 올리려는 블러핑일까?’

매도 의사가 있음에도 본심을 숨기는 건가?

Yes 사인을 얻는 데 시간을 쓰고 싶진 않다.

지지부진하더라도, 처음부터 협상 테이블에 앉고 싶은 마음이 크다. 괜한 몸값 올리기 시간은 최대한 피하고 싶으니.

“하아…….”

신대영은 갑작스레 마른세수를 했다.

개운한 한숨과 함께.

“다행이다, 다행이야, 드디어…….”

드디어?

한구인이 이상함을 느낀 순간.

“팔겠습니다.”

신대영은 얼굴을 덮은 손을 치웠다. 그의 얼굴엔 후련함과 개운함, 그리고 안도감과 욕망이 뒤섞여 있었다.

“얼마나 주실 겁니까?”

* * *

“아주 잠깐의 망설임도 없었습니다.”

“그건…….”

“예.”

한구인이 긍정했다.

“어떤 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회사에 문제가 있을 겁니다.”

대표가 회사를 포기하고 싶을 만큼의 문제가 존재한다.

“내부 정보가 필요합니다.”

성필은 한 인물이 떠올랐다.

그의 친구이자 웨이퍼센트의 관리자급 매니저, 유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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