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한는 프로듀서-592화 (592/760)

592화

“벌써 끝내?”

“어.”

신아름은 김민주를 신기하단 듯 보았다.

성필이 떠나간 후 고작 1시간 30분 정도밖에 연습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연습 시간이 짧은 편이었지만, 오늘은 더 짧았다.

“너도 빨리 끝내는 편이 좋잖아. 이사님 빨리 안 보고 싶어?”

김민주가 놀리듯 말하자 신아름이 부끄러워 뺨을 붉혔다. 그리고 김민주를 흘기자, 그녀는 농담이란 듯 손사래를 쳤다.

“나야 뭐…….”

김민주의 말이 맞았다.

신아름은 오늘 연습을 일찍 끝내고 싶었다. 성필과의 오해를 푼 반동이라고 해야 할까, 평소보다 그를 훨씬 더 보고 싶었다.

자신이 겪었던 기적 같은 화해가 진실이란 걸, 조금이라도 더 빨리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그렇긴 한데…….”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너도 팀장님 말씀 들었잖아.”

조아라와 진저 팀의 분위기가 장난이 아니라고 한다.

거의 매일 만나 연습하고, 그 시간은 신아름―김민주 팀의 거의 두세 배이며, 민시화란 걸출한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는다.

여러모로 신아름과 김민주보다 우월하다.

신아름도 숙소에서 조아라와 마주칠 때마다 막연히 불안해지곤 했다. 과연 자신이 패배했을 때 조아라가 얼마나 놀릴지 감도 안 잡혔다.

“앞으론 연습 시간 더 늘리는 게 안 나아?”

신아름이든 김민주든 패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를 가는 성격이다.

적어도 신아름이 파악한 김민주는 그런 인간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묘하게 여유로웠다.

자신의 재능을 과신해서?

“아…… 시간을?”

김민주는 살짝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무어라 말하려던 때, 그녀의 폰이 요란한 발신음을 뱉었다.

케이어스의 ‘IWY’였다.

김민주는 전화를 받곤.

“어, 응, 그래, 아, 그런가? 그럼 그래. 어, 알겠어, 안녕.”

아주 짧은 대화를 마쳤다.

“누구야?”

“친구.”

“친구? 너 친구가 있어?”

신아름의 촉이 발동했다.

김민주가 옛날보다 부드러워지고, 연습 시간을 늘리지 않으려고 하는 건 설마…….

‘남자친구?’

아이돌의 연애 금지는 3년 차에 풀리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케이어스도 그러할 것이다.

케이어스 멤버들에게 남자친구가 있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한국에서 가장 매력 있는 여자들 아닌가.

“아…… 그냥 뭐…….”

김민주는 애매하게 대답을 끌었다.

“있어.”

“……그래.”

신아름은 왠지 패배한 기분이라 굳이 사정을 캐묻지 않았다.

신아름과 김민주는 오랜 경쟁 관계였다. 비록 아이돌이란 분야에 한정해서이지만, 다른 분야에서도 지고 싶진 않았다.

연애라는 인생의 경험에서도 그러했다.

물론 사랑을 만나는 시간은 경쟁 같은 게 아니다. 누구는 10대에, 누구는 20대에, 아주 희귀한 경우이지만 30대에 첫사랑을 시작할 수도 있다.

그래, 경쟁이 아니긴 하지만 신아름은 왠지 뒤처지는 기분이 들었다.

‘난 아이돌 일이 더 중요하니까…….’

그런 말로 어중간한 열등감을 달랬다.

“아름이 네가 늘리고 싶으면 늘리고.”

“너 많이 바뀌었다?”

“바뀌어?”

“어. 옛날엔 승부에 미친년 같았는데…….”

“요즘엔 안 그렇다고?”

김민주는 씩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겠네.”

그녀는 스포츠 브랜드 마크가 큼지막하게 박힌 더블백을 어깨에 메곤 고개를 까딱였다.

“가자. 연습 더 하고 싶어도 오늘은 안 돼.”

둘은 연습실 불을 끄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건물 앞에서 각자의 길로 찢어졌다.

‘이사님이 데리러 온다고 하신 시간보다 빠르게 나왔네.’

신아름은 근처 편의점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걸어가면서 김민주의 변화를 곱씹었다.

‘사랑하면 유해지나?’

모르겠다.

해본 적이 없어서.

그렇지만, 성필은 연애할 때 확실히 조금씩 부드러워지곤 했었다.

‘아닌가.’

석세스 엔터 시절에 연애할 때보다, 요즘이 훨씬 더 부드럽다. 딱히 연애하는 게 부드러워지는 조건은 아닌 듯하다.

‘그래도, 잘됐네.’

신아름은 시원하게 친구의.

‘아니.’

일시적인 동맹 관계의 연애 성공을 축하해주었다. 나중에 상대의 얼굴이나 봤으면 한다.

김민주의 변화를 생각하고 있자 문득 리카가 떠올렸다.

‘그래, 리카랑 비슷해.’

현재의 김민주는 리카랑 비슷하다.

리카는 소녀연맹 멤버 중에서도 특이했다. 어떤 의미냐면, 유독 케이어스에 대한 경쟁심이 약했다.

다른 멤버들이 케이어스 타도를 부르짖을 때도, 그녀는 분위기를 적당히 탈 뿐이었다.

케이어스를 이기면 좋겠지만, 필사적으로 쓰러뜨리고 싶진 않다. 그런 느낌이었다.

옛날엔 그런 리카가 살짝 아니꼽기도 했었다.

‘멤버들이 합심해도 모자란데.’

리카는 적당적당히 분위기만 맞춰주니 말이다.

몇 년 전, 이 이야기를 한구인에게 한 적이 있었다. 리카가 착한 척하는 것 같다고 말이다.

한구인은 조심스럽게 자신의 추측을 들려주었다.

‘리카 씨가 들으면 인종차별이라고 하실 거고, 저도 일정 부분 동의하는 바이지만, 아마 민족성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는 역사를 ‘도전과 응전’이라고 요약했다.

일본 열도의 민족이 가장 많이 받아온 도전은 자연으로부터였다. 그건 태풍이었고, 지진이었고, 해일이었다.

일본인이 할 수 있는 응전이란 이를 악물고, 눈물을 삼키고, 친지의 시체를 치우고, 다시 집을 짓고 옛날과 다름없이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그에 비해 한반도 민족이 가장 많이 받아온 도전은 외침이었습니다.’

한반도 민족의 응전이란 이를 악물고, 눈에 불을 켜고, 자신의 터전을 위협하는 적들과 죽을 각오로 싸우는 것이었다.

문화란 DNA에 기록되지 않은 진화다.

역사도 문화의 일부다.

인간은 역사를 습득함으로써 일정 부분 환경에 알맞은 태도를 갖춘다.

‘아마도 리카 씨에겐 케이어스란 존재가 태풍, 지진, 해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를 악물고, 꿇었던 무릎을 펴서, 그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만 꿋꿋이 해나가는 것이다.

리카의 여유로움은 그런 민족성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한구인은 그리 추측했었다.

신아름도 동의했다.

한국인인 나머지 넷은 눈에 불을 켜고 케이어스를 타도하려고 했었으니까.

지금은 열등감과 투쟁심이 많이 희석되어, 옛날처럼 적개심을 세우진 않지만.

그러니까 김민주가 리카와 비슷해졌단 건…….

‘우리가 하려는 건 스포츠가 아니라 엔터테인먼트야.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고.’

김민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진심인지 아닌지 헷갈렸던 말.

신아름은 이제야 알겠다.

김민주는 진심으로 그리 말했단 것을.

“많이 바뀌었구나.”

하긴, 4년 차다.

아이돌이 된 지 3년이 넘었다.

입학한 고등학생이 졸업할 시간이다.

“아름아.”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근처에서 성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갓길에 세워진 성필의 차다. 그가 열린 창문으로 손을 흔들었다.

고민으로 굳어 있던 신아름의 얼굴이 금세 따스한 온기를 머금었다.

성필의 차로 가볍게 뛰면서, 신아름은 자문했다.

‘나도 바뀌었나?’

그럼 어떤 부분이 바뀌었을까.

조수석에 탄 신아름은 추위에 손을 비볐다. 그러자 성필이 바로 핫팩 두 개를 건넸다.

“많이 춥지?”

“팀장님.”

“응?”

“나 뭐 바뀐 거 없어요?”

성필의 얼굴이 쩍 굳었다.

“어, 음, 어어, 음, 잠시만 알 거 같아!”

“이거 그런 문제 아니에요. 나 있잖아요, 옛날이랑 비교하면 바뀌었어요?”

“그럼, 옛날보다 훨씬 예쁘지.”

“그런 문제 아니라니까요!”

신아름은 화내는 척하면서 즐거이 웃었다.

“걍, 연습생 때나, 몇 년 전이랑 비교해서 달라진 거요.”

“그걸…… 글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몇 년의 성장을 그렇게 쉽게는 표현할 수 없지.”

몇 년의 성장.

그 말을 들은 신아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다들 어느 정도는 변했을 것이다.

아마 3년 전의 자신과 나란히 세워두면 깜짝 놀랄 정도로 말이다. 단지, 변화가 느려서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다.

신아름은 자신의 그 변화가 긍정적이길 바랐다.

김민주가 그러한 것처럼.

* * *

욕조에 몸을 담근 김민주는 멍하니 욕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오해를 푼 후, 성필과 나누었던 대화들을 복기했다. 주로 아이돌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아이돌에 대해 말하던 성필은 꿈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그가 언어의 형태로 빚어낸 꿈은 비현실적일 만큼 아름답고 거창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의 눈동자는 아름답고 거창한 만큼 깨끗하게 빛나고 있더랬다.

‘아마…….’

김민주를 비롯하여 케이어스 멤버들은 책을 많이 읽는다.

정호환의 방침 때문이었다.

그녀들은 달에 한 번씩 꼭 한 권의 책을 읽게 되어 있다. 때론 정호환과 함께 서점으로 가 책을 고르기도 한다.

신아름과 처음 만났던 곳도 서점이었다.

‘박 이사님은…….’

김민주는 심리학과 철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녀는 자신이 어딘가 망가진 인간이란 것을 알았다. 망가진 인간이 해야 할 건, 망가진 걸 감수하고 평범한 사람들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게 아니다.

망가진 부분을 고치는 것이다.

김민주는 그 해답을 인문학에서 찾아왔다. 그랬기에, 성필이란 인간을 인문학적으로 해석했다.

‘말 그대로 현실을 꿈처럼 여기는 거겠지.’

사이비 신도 중엔 소설에 익숙하지 않은 이들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모양이다. 일반적으로 어릴 적에 남들의 반만큼도 소설을 읽지 않았다.

그 대신 철학이나 과학, 수학에 정통한 비율이 높았다. 또는 애니메이션, 영화, 드라마 등의 시각적 자료에 깊이 빠져 있었다.

그들은 형이상학적 세계와 시각적 허구에 몰두하고 깊이 빠졌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에겐 어느 능력이 보통 사람보다 부족하다. 바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만드는 일이다.

소설을 읽는단 건 언어란 기호를 머릿속에서 재구성하는 일이다. 기호를 자기식대로 해석하여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포스트모더니즘에선 해석의 권능이 작가에게서 떠났다고 말한다. 그 권한은 모든 독자에게 있기에, 독서란 작가에 이은 세계의 2차적인 창조가 된다.

인간은 문자란 기호로 자신만의 허구를 상상한다.

소설을 따라 정글에, 설원에, 용이 뛰노는 환상계에, 피로 점철된 무림에 빠져들었던 독자들은, 결국 어느 과정을 거친다.

책장을 덮는 일이다.

그로써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짓는다. 아무리 몰입하더라도 끝이 존재하는 세계를 경험한단 건 그런 일이다.

‘박 이사님은 어렸을 때 소설을 별로 안 읽으셨다고 했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럴 여건이 아니었다고 했었다.

아마 성필에게도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긋는 능력이 부족할 것이다.

그래서 허구가 현실을 침범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는 꿈과 현실을 나누는 필터가 없다. 아예 꿈으로 현실을 본다. 그에게 꿈은 아이돌이며, 따라서 현실에서 가장 중요한 것도 아이돌이다.

‘그래서겠지.’

김민주는 욕조 모서리에 머리를 가볍게 기댔다.

‘아름이를 볼 때 그 비현실적으로 따뜻한 눈빛은, 그래서 나올 수 있는 거겠지…….’

성필은 꿈에 빠져 영원토록 책장을 덮지 않으리라. 아마, 덮을 수 없으리라.

사이비 종교를 예시로 들었기에 부정적으로 보이겠지만, 나쁜 면만 있는 게 아니다.

꿈을 현실로 이루어냈던 수많은 혁명가와 몽상가, 과학자와 정치가들이 긍정적인 예시다.

실제로 성필의 꿈은 최고의 형태로 현실에 존재하고 있다.

소녀연맹이다.

“…….”

김민주는 물 안에 머리를 담갔다.

물로 인해 일그러진 시야로 보이는 건, 그녀가 자주 상상했던 평행세계의 김민주들이다.

메달리스트가 트럭으로도 담을 수 없을 만큼 많이 존재한다. 그녀들에게 미안해서라도, 김민주는 아이돌로서 게으를 수 없다.

아버지는 김민주에게 왕관을 씌워주려 했었다.

행복하기 위한 왕관. 하지만 가시가 박혀 있어, 쓰려면 고통을 감수해야만 하는 왕관을.

김민주는 그 가시관을 당연하단 듯 받아들였다.

많은 걸 포기해왔다.

과자를, 한낮의 산책을, 자기 전 침대 위에서의 독서를, 생일의 조각 케이크를, 평범한 인간관계를, 무료한 여유를.

좋아하는 것을 하나, 둘, 셋, 수없이 많이 버리고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푸하!”

김민주는 물 밖으로 급히 머리를 내었다. 잠시 멍하니 있던 그녀는 욕조에서 나와 거울 앞에 섰다.

자신이 보인다.

미(美)를 위해, 아니, 그 이상의 것을 위하여 극한으로 단련된 몸이 보인다.

이 몸은 그녀의 가시관이었다.

아버지에 이어 정호환이 씌운 가시관.

그의 ‘아이돌의 길을 택해줘서 고맙다’란 말이 김민주의 황금관이자 가시관이 되었다.

“……참.”

김민주는 자신의 복근을 검지로 짚었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내리그었다.

“길었어.”

김민주는 가시관을 벗고 싶었다. 사실, 꽤 옛날부터 반쯤 벗겨져 있었다.

오늘부터 완전히 벗기로 했다.

성필을 보고서였다. 그녀도 현실과 허구의 경계 따위 긋고 싶지 않았다. 꿈속에서 살고팠다.

그 꿈은 가시관의 고통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과자를, 한낮의 산책을, 자기 전 침대 위에서의 독서를, 생일의 조각 케이크를, 평범한 인간관계를, 무료한 여유를.

친구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

김민주는 행복하기 위한 왕관이 아니라 행복의 왕관을 쓰고 싶었다.

자신을 깎아가며 달려가는 길에 의미는 없다.

아이돌이 된 후 3년이 지나서야 내린 해답이었다.

김민주는 가시관을 벗었다.

화관(花冠)을 썼다.

그리고 나아간다.

* * *

수천 명의 관중이 내려다보는 체육관의 스테이지. 태양처럼 내리쬐는 스포트라이트. 귀를 뒤흔드는 함성과 KS 엔터 선배들의 응원.

그리고.

“갈까.”

곁에 선 친구, 신아름.

김민주는 흰 장갑을 낀 손을 신아름에게로 내밀었다. 상체를 살짝 굽힌 채 내미는 손엔 품위가 짙게 배어 있었다.

어릴 적 사교댄스를 배울 때 선생님이 해주었던 동작이다.

의미는 숙녀를 향한 에스코트.

“아름아.”

숙녀이자 파트너, 열정적인 붉은 장미와 같은 복장의 신아름은 어이없단 웃음으로 손을 잡았다.

“그래, 가자.”

승리가 아닌 행복을 향해.

경쟁이 아닌 협동을 위해.

승부가 아닌 엔터테인먼트의 길.

화관을 쓴 자만이 나아갈 수 있는 부드러운 꽃길로.

* * *

연미복을 입은 진저가 굳은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푸른 드레스 차림의 조아라는 결연히 그 손을 잡았다.

“아라 씨.”

“어.”

간다.

타는 듯한 스포트라이트와 세상을 뒤흔드는 함성을 뚫고, 승리만이 존재하는 길을 향하여.

승부 끝에 도달할 승리라는 낙원을 위하여.

왕관이 존재하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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