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1화
정신을 차리니 밖이었다.
턱 끝까지 올라온 호흡.
부술 듯 목구멍을 때려오는 한기.
달리느라 힘이 빠진 다리.
육체적 고통은 성필의 정신을 순간적으로 마비시켰었고, 또한 고통이 성필을 정신 차리게 했다.
그는 골목 어딘가에 서서 숨을 가다듬었다.
“하아, 하아…….”
성필의 육체에 각인된 감각은 자연스럽게 어느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운동할 때였다.
어떤 무거운 고민이 있더라도, 운동은 성필의 머릿속을 백지처럼 비워버리곤 했다.
기구를 들고 안간힘을 쓸 때만은 어떤 고민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성필이 전력 달리기, 고강도의 무산소 운동을 펼쳤던 건 그러한 기억 때문이었다.
성필의 무의식은 심적인 고통을 잊기 위해 신체적 고통을 갈구했던 것이다.
“하아, 후우.”
입이 아닌 코로 숨을 쉴 수 있을 만큼 호흡이 돌아왔다. 겨울의 공기 때문에 폐와 목, 코가 아려왔다.
‘내가 뭐라고 하고 나왔더라.’
잠시 나갔다 온다고 했던가.
신아름과 김민주가 자신을 잡았는지, 그건 기억나지 않았다.
성필은 주머니에서 폰을 꺼내었다.
신아름이 전화를 걸어오고 있다.
성필은 받지 않고 제자리에 쪼그려 앉았다.
‘1분만.’
딱 1분만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성필은 명상을 시도했다.
하지만 잘되지 않았다.
머리를 비우려고 할수록 아까 보았던, 들었던 기억이 머리를 가득 채우기만 했다.
‘진짜 오타쿠 같애.’
‘그니까.’
성필이 아껴왔던, 그리고 남들이 들으면 과장이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딸처럼 소중히 여겼던 신아름.
성필이 동경하는, 그리고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프로듀싱의 지향점으로 삼아왔던, 유스로서 사랑했던 케이어스의 김민주.
둘이 성필의 사진과 영상을 보면서 비웃음을 나누었다.
맨정신으로 버티기 어려웠다.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의 사진을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도 심장이 철렁이는 일이다.
그런데 소중하고 동경하는 이들이 그런다면…….
“…….”
1분이 지났다.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성필은 도망쳤던 것이다. 부끄러운 처신이었다.
하지만 도망치는 건 부끄러워도 도움이 된다.
만약 성필이 그 상황에 정면으로 맞섰다면, 지금쯤 어색한 미소를 짓는 둘과 마주하고 있겠지. 그리고 성필도 미소를 지으면서, 속은 마른 산보다 더 빨리 타들어 갔을 것이다.
‘좋아, 박성필. 평정을 되찾자.’
성필은 옛날에 어느 곳에서 읽었던 자기관리법을 실천했다.
바로 객관화다.
자신을 마치 게임 속 캐릭터처럼 생각한다. 위에서 내려다보듯이 사태를 관찰한다.
‘지금 내 상황은, 뒷담을 마주하고 도망친 35살 어른이야.’
부끄러운 일을 했으니, 가서 수습하자.
적어도 아까 그대로 남아서 둘과 대화를 나누는 것보단 나은 결과가 나올 게 분명하다.
‘이 평정을 유지하고, 둘과 만나는 거야.’
자기계발서 시장에서 뜨거운 주제 중 하나가 바로 ‘좋은 상사가 되는 법’이다.
상사들도 부하들이 자신을 욕한단 사실을 안다. 건너건너 듣지 않더라도 직접 목격하는 경우도 있다.
그때마다 상사들은 자괴감을 느낀다.
그 자괴감을 부하를 괴롭히는 걸로 푸는 사람들도 있으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 이들도 있다.
성필은 후자가 되고 싶었다.
‘그래, 취해서 노래 부르고 춤춘단 게…… 35살이 아이돌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른단 게…… 썩 좋게 보이진 않겠지.’
성필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폰을 꺼내었다.
신아름에게서 온 부재중 전화가 벌써 10회에 다다르려 한다. 성필은 그녀에게 다시 전화가 오기 전, 빠르게 연락처를 펼쳤다.
왜 연락처를 펼친 걸까.
성필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손가락을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의 손가락은 ‘실버타운 메이트(이거 바꾸면 15분 대화 금지예요!)’를 눌렀다.
착신음이 몇 번 가지도 않아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이사님 웬일이신가요!]
“어, 리카…….”
성필은 침을 삼켜야 했다. 목이 막혀서 제대로 된 목소리가 안 나왔었다.
“지금 바빠?”
[하양 언니한테 지옥의 작사 수업 받고 쉬는 중이에요! 이사님 ‘흐드러지게’란 뜻 아시나요! 놀랍게도, ‘많다’란 뜻이에요!]
성필이 짧고 탁한 웃음을 터뜨렸다.
“몰랐네. 아니, 알았던가. 모르겠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리카의 목소리에서 종전의 활기가 사라졌다.
“리카.”
[하이(네).]
“기억나? 너희랑 나랑 미사토 본부장님네에서 놀았던 날.”
[아무것도 기억 안 나요! 아타시(제)가 안 만졌어요! 분명 모함이에요! 이사님과 제 사이를 갈라놓으려는 제삼자의 계략이에요!]
“뭐? 만지긴 뭘 만져?”
[에? 어, 음, 어, 아하하, 농담!]
“진짜 맥락 없네.”
장하양에게 지옥의 작사 수업을 받았다더니, 단기적으로 장하양의 유머 감각을 획득한 걸까.
“그때 나 막 춤추고 노래하고, 좀 기분이 많이 하이했잖아. 보기 좀…… 그랬어?”
[누가 이사님 험담을 했나요! 제가 가서 혼내줄게요! 빨리 이름을 대세요! 그 이름은 영원토록 소련의 살생부에서 지워지지 않을 거예요!]
아, 그래.
이런 답을 바랐다.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지지해주고 받쳐주는, 그런 답을 바라서 리카에게 연락했던 것이다.
[남의 취미를 이유로 욕하는 사람은 무조건 나쁜 사람이에요! 저는 아라쨩이나 아름이가 ‘씹덕’이라고 하면 웃고 말지만, 이사님을 욕하는 사람은 용서할 수 없어요!]
“……고마워.”
[자, 어서 이름을 말하세요! 제 모든 능력을 동원해서 그 사람을 매장시킬게요!]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에에엑?!]
성필은 통화를 끊고 김민주의 연습실을 향해 나아갔다.
그곳에 기다리고 있는 건 성필의 우상과 성필의 대녀(代女)다.
자신을 비웃었던 우상과 대녀…….
과연 어떤 얼굴로 마주하게 될까. 아직 잘 모르겠지만, 어떤 얼굴로 마주해야 할지는 안다.
성필은 전생에 읽었던 진소유의 인터뷰를 복기했다.
‘제가 좋아하는 것만이, 세상으로부터 저를 지켜줘요. 세상 대부분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좋아하는 자그마한 것들 덕분에 세상을 사랑할 수 있어요.’
가슴에 절절히 와닿는다.
성필이 좋아하는 것만이 성필을 지켜준다.
그러니 설령 우상과 대녀가 자신의 소중한 것을 비웃더라도, 성필은 그것을 놓지 않는다.
‘가면, 아무 일도 없단 듯이 행동하자.’
김민주는 중요한 비즈니스 파트너다.
신아름은 앞으로 몇 년, 몇십 년, 수십 년은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할 사람이다.
그러니 고작 이런 일로 관계를 무너뜨릴 순 없다. 성필은 어른이니까, 이런 일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옛날, 소속사 애들 방송 한 번 내보내겠다고 죽을 때까지 방송국 스태프들과 대작하고 무릎 꿇고 애원했던 것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 * *
20분째다.
20분째 신아름이 울고 있다.
김민주는 그녀의 옆에 함께 앉아 등을 쓸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뭐라 위로하려 해도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위로가 먹힐 것 같지도 않다.
‘어떡하지?’
성필은 잠시 나갔다 오겠다며 연습실을 나섰었다. 신아름이 불러도 멈추지 않았었다. 멈추게 할 수도 없었다.
성필은 그야말로 전력으로 달려 나갔었으니까.
김민주조차 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따라잡으려는 생각을 버렸다.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지?’
김민주는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관계를 떠올렸다.
아버지가 죽은 후에야 이해하게 된 거지만, 아버지는 자신을 사랑했었다.
아버지는 그걸 자신만의 방식대로 표현해왔다. 하지만 김민주는 그 방식을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고, 결국엔 이해하지 못했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란 그런 것이다.
언어는 마음을 표현하기에 불완전한 도구다.
‘내가 삐뚤어질 때마다 아버지가 할 수 없단 듯 털어놓았던, 사랑한다는 변명들…….’
그 변명이 진심이란 걸 깨닫는 덴 아버지의 죽음이 필요했었다.
성필이 신아름과 김민주에게 진실을 듣더라도, 그것을 자기식대로 소화하는 덴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김민주가 아버지의 사랑을 의심했던 것처럼, 성필도 둘이 자신을 비웃은 게 아니란 사실을 의심할 것이다.
‘우리가 하는 설명은, 박 이사님에겐 변명처럼 들리겠지.’
사실과 감정은 별개다.
성필은 신아름과 김민주가 뒷담 했다고 여길 것이다. 둘이 변명하고 오해를 바로잡아주려 해도, 성필이 마음속에 품은 의심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거다.
신아름이 우는 이유는 그것이었다.
눈물과 사과가 성필의 마음을 완전히 치유할 거라고 확신하지 못하기에.
신아름은 완벽한 화해까지 도달할 시간이 아깝고 한탄스러워 우는 것이었다.
“전화를 안 받으셔어…….”
[연결이 되지 않아 소리샘으로 연결됩니다]
“차단했나 봐아, 어떡해애…….”
발신음이 고작 한두 번 갔을 뿐인데 연결 불가 안내음이 나왔다. 이런 경우는 김민주가 알기로 번호 차단을 당했을 때뿐이다.
김민주와 신아름은 모르는 사실이지만, 통화가 동시에 걸려 오거나 착신과 발신이 쌍방으로 엇갈릴 때도 이런 안내음이 나온다.
하지만 너무 희귀한 경우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른다. 김민주도 신아름도, 성필이 차단했다고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이런 걸로 차단까지…….”
김민주는 신아름을 위로하려 그리 말했다. 그런데 그 순간, 울기만 했던 신아름의 눈이 표독스러워졌다.
“너는? 너 같으면 안 그러겠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자기 뒷담 깠다고 생각하면 차단 안 하겠냐고오! 충격 안 받겠냐고!”
“하, 해. 할 거야. 응, 해.”
신아름이 언급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란, 아마 자기 자신일 것이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충격 수준이 아니라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일 게 확실하다.
아무리 그래도 성필은 어른인데 그러겠냐, 김민주는 그런 생각도 들었으나 곧 고개를 저었다.
‘둘은 보통 사이가 아니야.’
김민주는 어쩌면 둘이 연인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그도 그럴 게, 최근 신아름과 지내면서 보아 온 것들이 있으니.
신아름은 성필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김민주가 생각하기에 그건 평범한 애정의 범주를 넘어섰다.
성필도 신아름에게 그런 감정을 가졌으리라 생각하는 건 이상하지 않았다.
그럼 하늘이 무너지겠지, 당연히.
‘그리고 또…….’
김민주의 안색이 안 좋아졌다.
‘유스시니까…….’
김민주는 팬사인회에 왔던 성필을 기억했다.
보이그룹 중에선 앨범 활동기마다 팬사인회 10회, 20회, 30회를 하는 그룹도 있다.
앨범 판매량을 최대한 높이기 위한 방법이었다. 아이돌을 한 번이라도 더 만나고 싶은 팬들의 골수를 빨아먹는 방법.
그런데 케이어스는 앨범 하나 낼 때마다 팬사인회 두 번 하면 많이 하는 것이다. 즉, 팬사인회에 오기 위해선 앨범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사야 한다.
팬사인회는 흔히 고래라고 부르는 끝판왕 소비자들을 위한 이벤트나 마찬가지다.
그런 곳에 성필이 왔었다.
‘사과를…… 오해를 풀어야 해.’
고래 소비자를 붙잡아야 한다, 그런 마음이 아니었다.
김민주는 팬을 좌절에 빠뜨린 것이다. 팬의 동경과 환상을 지켜야 할 아이돌이, 손수 망치를 들고 그 환상을 부숴버린 것이다.
그건 어찌 보면 죄였다.
마약을 반대하는 70년대 록스타 같은 것이다. 체제 전복과 세계 변혁을 부르짖는 록스타가 실은 바른생활 사나이에다가 체제 우호적이라면, 팬들은 배신감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 않겠는가.
“아름아.”
김민주가 부르자, 울음의 단계를 넘어 절망의 단계까지 나아간 신아름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일단, 일단은, 돌아오시면 뭐라고 말씀드릴지부터 생각해보자.”
“돌아…… 오셔……?”
신아름은 김민주가 동아줄이라도 되는 듯 간절히 매달렸다. 김민주는 일순 당황했지만, 확신을 담아 답해주었다.
“당연히 오시지. 오늘 너 보러 오신댔잖아. 나갈 때도 잠시 나갔다 오신…….”
“저 왔어요.”
성필이 부지불식간에 들어왔다.
그는 눈물 자국 가득한 신아름의 얼굴과, 당혹으로 얼룩진 김민주를 보더니 가볍게 웃어 보였다.
“갑자기 나가서 죄송합니다. 음료를 너무 클린한 것들만 사 왔어서, 다른 것도 사 왔어요.”
김민주는 직감했다. 성필은 아까 있던 일을 없던 걸로 만들려는 것이다.
과연 그의 의도대로 행동해야 하나?
“팀장님!”
김민주가 고민을 끝내기도 전에 신아름이 스프링처럼 튀어 나갔다.
성필이 작게 놀라면서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그보다 빨리 신아름이 성필을 껴안았다. 그리고 오열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그게, 팀장님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라아…….”
“아니에요.”
김민주는 반사적으로 말했다. 자연스레 성필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꽂혔다.
김민주는 슬픔에 잠식당한 신아름 대신 사건의 전모를 밝혔다.
얼마 전부터 둘은 쉬는 시간마다 성필의 사진이나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주로 웃긴 것들이었다.
각 잡고 찍은 성필의 멋진 사진에 김민주가 관심 있을 리 없으니까. 그래서 신아름은 일차적으로 김민주가 관심을 보일 만한, 이른바 성필 유머 콘텐츠 모음으로 영업을 시도했던 것이다.
성필이 보았던 장면이 바로 그것이었다.
“오타쿠 같다고 했던 것도 모욕…… 이 아니라요. 열정적인 모습이 멋져 보여서 했던 말이에요. 진짜, 찐으로요.”
성필이 물끄러미 보기만 하자, 김민주는 제 발 저려 오버하기 시작했다.
“그렇잖아요! 막, 회사 이사가 다키스트 춤 외워서 추는데 신기하잖아요? 아니, 신기한 게 아니라 열정적이라서 멋졌어요. 네, 진짜예요, 이사님 욕한 게 아니라…….”
김민주는 늪에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성필이더라도 이런 엉터리 변명을 듣고 납득하진 않을 것이다.
“아, 난 또…….”
그런데.
“그랬던 거구나…….”
성필은 납득한 것처럼 보였다.
아니, 납득했음이 틀림없다.
저 안도감 가득한 표정은 절대 연기일 리 없다. 김민주의 본능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성필은 허탈한 얼굴로 신아름의 뒷머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런 거였구나……. 난 또, 민주 씨가 팬사인회에 온 팬들 보고 ‘육수 냄새 오지네 좀 씻고 오지 그딴 것들도 팬이라고’라 하는 아이돌인 줄 알고…….”
“제가요?!”
묘하게 구체적인 비유에 김민주는 거의 역정을 냈다.
“제가 유스를 그렇게 생각할 리 없잖아요!”
“다행이에요 진짜…….”
김민주는 말문이 막혔다.
광야에서의 오랜 고난을 마치고 가나안 땅에 이른 수행자처럼, 성필의 얼굴엔 평온만이 가득했다.
‘사람이 어떻게…….’
김민주는 성필에 대한 자신의 감상을 언어화하는 데 애를 먹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품은 감정은 사람에게 쓰기엔, 그것도 다 큰 어른에게 쓰기엔 매우 희귀한 단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김민주가 떠올린 단어는 순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