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0화
이음 엔터 최종결전의 날.
대표 김명운은 대표 집무실 겸 아티스트 휴게실에서 가로 엔터 사람들을 맞기로 했다.
집무실 겸 아티스트 휴게실엔 대표 김명운을 비롯한 이음 엔터의 중역이 있었다.
바로, 이음 엔터의 유일한 아티스트이자 비서(자칭)인 우효민이었다.
둘은 집무 책상 앞에 마련된 응접 공간에 있었다. 평소엔 나란히 앉아 컵라면을 먹던 소파에 앉아, 평소와 전혀 다른 긴장감을 느끼는 중이다.
“계약…….”
우효민이 정적을 없애려 간신히 입을 뗐다.
“할까요? 가로 엔터가?”
“모르지…….”
“가로 엔터 사장님이 대표님 마음에 들어 했다면서요. 그런데 확신이 안 서요?”
“너도 박 이사 거의 홀렸다면서. 그런데 확신은 없어?”
서로를 탓하는 게 아니었다.
둘은 서로에게서 확신을 찾았다.
안타깝게도 둘 다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대표님.”
“응.”
“만약 이 계약이 파투 나면요, 제 후배 그룹을 만드는 건 먼일이 되겠죠?”
“만드는 건 시작할 수 있지.”
“시작부터 끝까지 정확히 얼마 정도 필요해요?”
“아마, 적어도 10억……. 20억이나 30억…….”
“…….”
우효민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엔터 일이란 거, 진짜 말이 안 되는 수준의 도박이네요…….”
블록버스터 사업 모델이라고 한다.
쉽게 말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다.
“저도 은퇴할 때까지 10억 모을지 못 모을지 모르겠는데, 아니, 20억이 든다고요? 실화예요?”
“실화야…….”
자비(自費)로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대부분은 투자자와 투자사를 뻔질나게 찾아다니며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
“걸그룹…… 이라고 하셨죠?”
“아니, 다시 생각하니까 보이그룹이 낫겠어.”
“네?”
“걸그룹은 수익화시키기가…… 더 어려워 보여.”
요즘 걸그룹의 가치는 네임드 그룹이 컴백할 때마다 천장을 부수고 있다.
수익성은 보이그룹을 따라잡으려 하고, 대중성은 보이그룹과 비교 안 될 정도로 높다.
하지만 연예계가 다 그렇듯,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그룹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대다수는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싸늘히 사라진다.
당장 밖으로 나가 아무나 붙잡고 요즘 걸그룹 이름 열 개만 대보라고 하면, 열 개도 못 대는 사람이 파다할 것이다. 열 개를 대려면 이전 세대 그룹까지 합쳐야겠지.
이렇듯, 빛을 보는 자는 한정되어 있다.
“너무 레드 오션 같아. 아니다, 이런 말 해서 뭐하겠냐. 오늘 계약 파투 나면 하지도 못할 건데…….”
“대표님!”
우효민이 김명운의 양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김명운은 놀라서 눈만 크게 떴다.
“약한 소리 하지 마세요!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뼈가 닳도록 노력해서 2년 이내에 프로듀싱 시작하게 해드리겠다구요! 저 못 믿으세요?”
김명운은 겨우 미소를 만들었다.
“믿어, 우리 효민이 믿어…….”
“그럼 어깨 펴고…….”
문이 열리고 직원이 고개를 내밀었다.
“대표님, 가로 엔터 분들 오셨습니다.”
김명운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아까의 약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강인한 태도를 보였다.
“이쪽으로 모셔요.”
* * *
성필, 홍규헌, 한구인은 협상을 마치고 이음 엔터에서 나왔다. 한 건 해결하고 나니 진득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뭐라고 할까…….”
성필은 기지개를 켰다.
“별거 없었네요.”
“박 이사는 별거 없었겠지. 조건 따지는 건 전부 우리가 했으니까.”
“고생 많으셨어요.”
가로 엔터는 이음 엔터에 지분 투자를 결정했다.
요구 사항은 경영권 분할과 주기적인 감사(監事), 그리고 가로 엔터의 인원 하나를 사외이사로 두어 매니지먼트와 프로듀싱에 관여할 수 있을 것.
이쯤으로 원만하게 마무리했다.
이러한 조건은 가로 엔터가 이음 엔터의 목줄을 쥐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김명운은 기꺼이 목줄을 차기로 했다.
그 대신 그에게 가장 필요한 것, 바로 돈을 얻어냈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는 성필과 쌓아온 유대를 신뢰했고, 그에 따라 가로 엔터도 신뢰했다.
“저희의 고생은 여기서 끝이지만.”
한구인은 성필을 놀리듯이 말했다.
“이젠 박 이사님의 고생이 시작되지 않겠습니까.”
이음 엔터의 사외이사로는 성필이 임명됐다.
한구인의 말마따나 성필의 고생은 오늘부터 시작이다.
“일이 늘다니 기쁘네요.”
“그런데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이음 엔터까지 관리하려면 많이 바쁘실 겁니다.”
소녀연맹 프로듀싱.
총괄 프로듀서로서 가로 엔터의 차기 그룹을 감독.
거기에다가 이음 엔터의 사정까지 신경 써야 한다. 즉, 성필의 관리 아티스트엔 우효민과 이음 엔터의 차기 그룹이 추가되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바쁘진 않을 거 같은데요? 대표님이 잘해주실 거라고 생각해요. 오늘 한 이사님도 들으셨잖아요? 대표님의 비전.”
“…….”
한구인은 말이 없었다.
그래, 들었지.
뭐라고 했더라.
‘일본어처럼 들리는 가사를 쓰는 겁니다. 일부러 발음을 뭉개서요. 이 가사는 꼭 넣고 싶은데, 진짜 팬들이 씹덕사할 겁니다. ‘호시오 미루카(별을 볼까)?’입니다. 혹시 꿈일까? 호시오 미루카?’
김명운은 청량 전문 그룹을 만들길 바랐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노래마다 일본어처럼 들리는 가사를 넣을 거라고 한다.
일본 시장을 노리는 걸까. 그렇다기엔 고작 가사 몇 마디 넣는 것으로 얼마나 큰 효과가 있을지 의심된다.
“호시오 미루카(별을 볼까).”
성필은 그 구절이 썩 마음에 든 듯했다.
한구인은 뭐라고 물어보려다가, 그냥 관두었다. 프로듀서에겐 프로듀서만의 시선이 있는 듯했으니.
“박 이사, 이음 엔터 관리한답시고 자리 자주 비우면 안 돼.”
“제가 외근 간다고 해놓고 김 대표님이랑 놀러 가기라도 할까 봐요?”
설마 성필이 그런 양아치 같은 짓을 하겠는가.
“아니, 이음 엔터네 차기 그룹 말하는 거야. 한 이사도 알지? 박 이사가 우리 애들 찾으러 다니고 케어할 때 얼마나 지극정성이었는지.”
“요즘도 그러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니까, 그쪽 애들한테 너무 정붙일까 봐 걱정인 거야.”
성필은 애매한 미소로 답했다. 답하기 애매한 질문이었으니, 미소만이 유일한 답이었다.
홍규헌의 발언은 직접적으로 가로 엔터와 이음 엔터의 급을 가른 것이었다.
물론 이음 엔터는 딱히 가로 엔터에 완전히 합병된 게 아니니, 완벽한 가족이라고 보기엔 뭐했다.
하지만 성필은 이왕 김명운과 동료가 되었으니, 그들과 우리 사이를 나누는 발언을 하기가 꺼려졌다.
“제가 새로 정 붙일 애들이 어디 이음 엔터 애들뿐이겠어요?”
“그렇네.”
홍규헌은 차 앞에 도착해선 키를 꺼내었다.
“올해 나올 보이그룹도 있고, 또.”
그녀는 운전석 문을 열었다.
“올해부터 준비할 차기 걸그룹도 있지.”
홍규헌이 운전석에, 한구인이 조수석에 탔다.
성필은 계속 운전석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이후에 따로 가야 할 곳이 있다.
“뭐어, 박 이사가 어련히 잘할 거라고 생각해. 너무 무리하진 말고.”
“네, 그럴게요. 그럼 살펴 가세요.”
“일찍 들어와.”
홍규헌은 차를 몰고 골목을 빠져나갔다. 성필은 그녀의 차가 사라지는 것까지 보곤, 따로 세워둔 자신의 차로 향했다.
‘정붙일 애들…….’
작년 말, 가로 엔터는 남자 연습생 충원을 중단했다. 그때를 기점으로 남아 있는 인력만으로 그룹을 구성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데뷔조가 정해진다.
그리고 그 직후.
‘여자 연습생을 모아야지.’
성필은 소녀연맹 멤버들이 아직 연습생이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 성필은 멤버들에게 너무 큰 정을 붙였다. 그래서 고민했었다. 이래선 안 되는 거 아닌가?
‘여러모로 석세스 엔터랑은 달라서, 나조차도 깜짝 놀랐지.’
연습생을 모질게 대하는 데 익숙했던 성필은, 가로 엔터에서도 비슷하게 하려고 했었다.
적어도 데뷔 전 트레이닝 기간엔 그리해야만 했다. 끊임없이 멤버들을 달구고 두드려서, 남 보기에 부끄럽지 않은 아이돌로 만들어야 했으니까.
성필은 멤버들을 달구고 두드릴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정든 멤버들이 고뇌하고, 방황하고, 괴로워하는 걸 보기 힘들었다.
‘그런데 뭐.’
결국은 여기까지 왔다.
소녀연맹 4년 차.
성필은 그때와 다름없이 소녀연맹을 사랑한다.
그런데, 올해 들어올 여자 연습생들도 소녀연맹처럼 애정을 줄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하겠지.’
성필과 한구인이 직접 뛰어다니면서 찾았던 아이들이다.
그러나 남자 연습생들이 그러했듯, 올해부터 들어올 여자 연습생들엔 성필의 손이 닿지 않을 것이다.
연습생을 영입하고 스카우트하는 건 신인개발팀의 일이다. 더는 성필과 한구인, 이사급들이 발에 불붙여 가며 돌아다닐 이유가 없다.
성필은 새로 들어올 이들을, 전생의 석세스 엔터 시절과 비슷하게 대할 가능성이 높았다.
회사가 인간 중심에서 시스템 중심으로 옮겨가는 과정이었다.
‘내가 소녀연맹만큼 사랑할 그룹은.’
어쩌면 앞으로 나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성필이 소녀연맹에게 쏟았던 관심과 애정은 그 순간에만 존재했던 기적이었다.
다시 만들려 해도 만들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리 생각하면 쓸쓸해진다.
명명백백하게, 성필에겐 현재가 화양연화다. 인생에서 가장 찬란한 순간이다.
그렇기에 성필에겐 내리막길만이 남았다.
소녀연맹이 끝나는 순간, 성필 인생의 가장 찬란한 순간도 막이 내리는 것이다.
성필은 차 앞에 도착했다.
운전석에 타고 시동을 걸었다.
‘지금이 내 화양연화니까.’
후회하지 않도록 온 마음을 쏟아야겠지.
오늘은 바쁜 날이다.
‘아라랑 아름이를 차례로 보러 가야 해.’
성필에게 바쁜 날이란 건, 그만큼 행복으로 충만한 날이란 뜻이었다.
아무렴, 성필의 현재는 화양연화니까.
* * *
조아라와 진저는 따로 연습실을 빌려 연습했다.
가끔 민시화가 와서 지도해주었다. 그 외엔 둘이 영상을 보고 따라 추고, 수정하고, 다시 추고를 반복했다.
조아라는 평소 연습할 때도 어딘가 필사적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강도가 훨씬 셌다.
진저가 생각하기에, 오늘 성필이 보러 와서인 듯했다.
‘나도 정호환 이사님이 온다고 하면 긴장해서 훨씬 더 열심히 연습할 테니까.’
성필이 온다는 게 긴장되지 않는단 뜻은 아니었다. 단지, 조아라는 진저보다 훨씬 더 긴장될 것이다.
자신의 프로듀서가 결과물을 보러 온단 건 그런 의미였다.
“아라 씨.”
쉬는 시간.
진저는 체력을 많이 썼기 때문인지 정신이 멍했다. 그래서 멤버들에겐 말하지 않았던 꽤 진지한 질문을 던졌다.
“아라 씨는 춤출 때 이미지가 있슴미까?”
“이미지? 뭐, 노래할 때 태양을 삼킨 것처럼 하라거나, 그런 거?”
“태양? 뭠미까 그 거창한 이미지는.”
“……아니야.”
백설하가 옛날에 자주 했던 소리였다.
노래할 땐 이미지를 연상하는 게 중요하다는 모양이다.
예를 들어, 신아름을 가르쳤던 보컬 트레이너는 임신했다고 상상하라 했었다. 남자인데도 말이다.
임신했다고 상상하면 무게 중심을 아래에 두게 되고, 쉽게 자세와 호흡이 흐트러지지 않는다고 하던가.
백설하의 태양이란 이미지는 확실히 거창하긴 했다. 태양을 삼키고 빛을 내뿜듯 하라니.
솔직히 조아라는 아직도 이해가 안 갔다.
“음, 이미지라…….”
노래할 때 이미지를 연상하는 것처럼, 댄서들도 이미지를 연상할 때가 있다.
조아라는 여러 사람들에게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리카는 불을 켜는 거 같대. 춤을 추면 관객석에 불이 하나씩 들어와서, 춤이 끝났을 땐 세상이 밝아진다고 하더라.”
“아, 이해가 감미다. 콘서트에서 응원봉 불빛이 점멸하는 거 같은 이미지임미까.”
“또 이명철이라고…… 우리 보조 댄서 자주 맡아주시는 분이 있어. 그 오빠는 농구래. 박자 맞춰서 통, 통, 통, 통, 공을 드리블하다가 슛, 골인.”
“그거도 이해가 감미다. ‘여기다’ 싶은 순간까지 달려가는 이미지임미다.”
“그리고 또, 내 쌤은 물에 잠긴 거 같대. 리듬이 파도고, 파도 따라 흘러가면 어딘가에 도착해 있다고.”
이러한 춤의 이미지는 수동적이기도 능동적이기도 하다.
리카와 이명철은 능동적인 편이고, 조아라의 쌤인 백민정은 수동적인 편이다.
“아라 씨는 어떤 이미지임미까?”
“나는…… 색칠. 도화지를 앞에 두고 마아악 물감을 뿌리는 느낌?”
“파워풀함미다.”
“너는?”
“저는 모르겠슴미다.”
“……?”
“춤출 때는 연상이라고 할까, 생각이란 게 잘 작동하지 않슴미다.”
그렇겠지.
조아라는 바닥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속으로 답했다. 진저의 춤은 조아라와 같은 이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옛날부터 그렇게 느껴왔다.
“그 이미지 때문임미까?”
“뭐가?”
“아라 씨 춤이 옛날보다 절박해진 거 같슴미다. 힘이 확 들어간…… 아, 힘 조절을 못 한단 의미가 아님미다! 막, 막, 으음…….”
“나도 알아.”
조아라는 진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았다.
이 변화는 ‘아오아’를 전후하여 일어났다.
성필의 100점이 되고 싶다고 결심한 순간부터, 조아라에게 춤은 더 이상 놀이고 유흥이고 클럽이고 남자가 아니게 되었다.
진저는 절박하다고 표현했으나, 아니다.
조아라는 필사적이었다.
필사적으로 100점을 향해 나아간다.
‘넌 모르겠지.’
정확하게는, 알았지만 잊어버린 것이다.
진저는 이 단계를 진즉 벗어났다. 미국에서였다.
절박하고도 필사적으로 춤을 추던 진저는, 어느 순간부터 춤을 즐기게 되었다. 그리고 미국에서의 수업이 끝나는 날 조아라를 쉽게도 넘어섰다.
조아라는 ‘더닝 크루거 효과’를 나타낸 그래프를 떠올렸다.
조아라는 막 우매함의 봉우리로부터 절망의 계곡으로 떨어진 것이다. 이젠 깨달음의 오르막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진저는 아주 옛날부터 절망의 계곡 안에 있었고, 옛날에 진작 깨달음의 오르막을 넘어 현재는 지속 가능의 고원을 달리고 있다.
춤을 추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다.
“막…….”
진저는 ‘아’ 하며 밝은 표정을 띠었다.
“아라 씨는 그냥 춤 같슴미다.”
“뭐?”
“인간이 아니라, 춤이 춤을 추는 거처럼 보임미다.”
조아라는 어안이 벙벙했다.
왜냐하면 진저의 표현은 옛날부터 조아라가 진저에게 가지고 있던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조아라는 자신의 몸에 어떻게든 테크닉을 굴복시켜 붙잡아 놓으려 한다.
진저는 춤과 대화하며 도와달라고 부탁한다. 설득한다. 그래서 진저는 인간이 아닌 춤 자체가 체현된 것으로만 보였다.
조아라처럼 아등바등 춤을 무릎 꿇리고, 나를 따르라며 겁박하지 않는다.
진저는 춤 그 자체니까.
자신을 무릎 꿇리는 인간은 없다. ‘이걸 해라’고 설득하는 과정이 필요할 뿐이다.
“……그래?”
자신의 생각과 달랐으나, 조아라는 진저에게 칭찬받는 게 순수하게 기뻤다.
옛날엔 진저가 자신의 팬이란 것도 인성질로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젠 그런 생각을 그만두기로 했다. 어차피 따라잡지 못할 거……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아라야, 진저 씨.”
노크 소리와 함께, 문 너머 성필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조아라가 허락하자 문이 열렸다.
음료와 간단한 요깃거리를 든 성필이 나타났다. 그는 진저를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진저는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당황하면서도 착실히 일어나 허리를 굽혔다.
“안녕하심미까 이사님.”
“안녕하세요 진저 씨. 어? 키 더 크셨어요?”
“알아보시겠슴미까?”
진저가 한 바퀴 돌았다.
“아직도 성장이 안 멈췄슴미다!”
“우와, 대단하시네요.”
“아저씨 왜 날 봐요.”
“네가 내 시야 안에 있잖아.”
조아라가 손을 뻗었다. 성필은 한숨을 쉬며 진저와 조아라를 번갈아 보았다.
“진짜?”
“뭐예요. 꿈에 그리던 케이어스가 앞에 있다고 부끄러워요? 빨리.”
조아라는 아예 양손을 뻗었다. 성필은 그녀에게 다가가 손목을 잡고 일으켜주었다.
‘어차피 따라잡지 못할 거…….’
그래, 그런 이유로 진저에 대한 열등감을 떨쳐버린 게 아니었다.
조아라는 100점이 되기로 했다.
프로듀서인 성필의 이상향, 성필의 100점이.
그리고.
‘진저, 너는.’
성필의 100점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소녀연맹이, 소녀연맹의 조아라가 성필이 찾아낸 최고의 해답이니까.
그가 ‘최고의 아이돌’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한 최선의 가능성이니까.
조아라는 진저라는 상대적인 목표를 버렸다.
대신 성필이라는 절대적인 목표를 취했다.
그렇기에 열등감 따위는 없다.
죽었다 깨어나도, 진저가 성필의 100점이 될 일은 없을 테.
“노래 불러드림미까? 아직 ‘IWY’는 제 육성으로 들은 적 없지 않슴미까?”
“또 저 울리시게요? 아라도 앞에 있는데 하지마세악! 왜 차?!”
“아저씨가 나 꼴받게 하잖아요.”
“뭐?! 꼬, 꼴받게?”
“‘IWY’고 나발이고, 우리 춤 보러 왔으면 춤이나 봐요.”
진저는 티격태격하는 성필과 조아라를 보곤 얼이 빠졌다.
KS 엔터에선 상상도 못 할 광경이다.
아니, 상상 정도는 할 수 있나?
진저는 자신과 정호환을 지금 상황에 대입했다.
만약 조아라가 정호환에게…….
‘정 이사님, 춤춰줘요?’
‘허허, 저를 또 울리실 셈이십니까. 진저도 옆에 있는데 하지마세아아아악!’
안 된다.
정호환은 진저의 로우킥을 맞으면 바로 골절되어 병원에 실려 갈 것이다. 30살만 젊었어도 저런 장난을 칠 수 있었을 텐데.
“진저, 시작하자.”
조아라가 진저의 손을 맞잡았다.
망상에 잠겨 있던 진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손을 잡자마자 세계가 하얗게 변했다. 무대 위에 선 듯, 세상엔 자신과 춤만이 남았다.
아니, 자신과 춤 그리고 조아라만 남았다.
“아저씨, 똑똑히 봐요. 그리고 신아름한테 가서 전해요. 너흰 절대 우리 못 이긴다고. 그렇지, 진저?”
진저는 머뭇거림을 지우고 답했다.
“그렇슴미다. 저희의 물감으로 세계를 까맣게 색칠하는 검미다.”
* * *
성필은 약 1시간에 이르는 조아라―진저의 연습실 탐방을 마치고 차에 올랐다.
둘의 춤은 뭐라고 해야 할까…….
‘잘 모르겠어.’
성필은 아이돌 춤만 오래 보았을 뿐, 볼룸댄스엔 문외한이었다. 그래서 둘이 이룬 성취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민시화 선생님 춤은 보자마자 알겠던데.’
백설하가 그랬었지.
일반인이 보았을 때 ‘오’ 감탄할 정도면 정말 대단한 수준이라고 말이다.
민시화가 그러한 경지였었다. 민시화가 그럴진대, 볼룸댄스를 익힌 지 고작 며칠에 불과한 진저와 조아라가 감탄을 자아낼 리가 없다.
그렇기에 성필은 다른 관점에서 둘의 춤을 보았다.
‘팬들이 보면 엄청 좋아하겠다.’
소셜 댄스의 덕목 중 하나가 파트너끼리의 일체감이라고 하던가.
두 사람의 춤에선 일체감을 느끼기 힘들었다. 일체감은커녕 서로를 잡아먹으려는 듯 서로를 압도하기에 바빴다.
그래서 더 볼 맛이 있었다.
‘같이 추는 춤이지만 꼭 대결 같으니까.’
소녀연맹과 케이어스 팬들은 홀린 듯 조아라와 진저의 춤을 탐닉할 것이다.
문외한이 보아도 감탄할 완성도는 아니지만, 다른 관점으로 충분히 볼 맛이 있는 춤이다.
그리고 아이돌 춤 한정이지만, 춤을 오래 보아온 성필에겐 또 다른 볼거리가 있었다.
‘꼭 둘이 대화하는 거 같았어.’
두 사람의 댄서가 자신들이 쌓아온 해답을 맞부딪치는 느낌이었다. 서로의 정답을 필사적으로 강요하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마치, 같은 동작을 수행하는 군무라도 멤버마다 표현 방식과 느낌이 전혀 다른 것처럼 말이다.
‘일체감이 느껴지지 않는다지만, 아육금까진 시간이 남았어.’
준비할 시간은 많다.
그때가 되면 둘의 춤은 또 다른 경지에 올라 있을 것이다.
성필은 김민주의 작업실 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겨울의 한기와 기대감이 동시에 그의 몸을 감쌌다.
과연 신아름과 김민주가 보여줄 춤은 어떨까?
두 사람의 경험과 노력을 여실히 드러내는 춤일 것이다.
두 아이돌의 춤이 보여주는 서로 다른 인생의 궤적. 성필은 그걸 볼 생각에 벌써부터 등을 따라 전율이 내달렸다.
“아름아, 민주 씨.”
성필은 투명한 연습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
없었다.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옛날에 에리카와 믹스테입 작업을 하던 당시, 에리카의 작업실로 쓰였던 작은 방에서였다.
성필은 그쪽으로 다가갔다.
‘둘이 안무 영상 확인하고 있나?’
그런데 다가갈수록 들리는 목소리는, 대화라기보다 수다에 가까웠다.
성필은 열린 문으로 다가갔다.
문 안쪽의 작은 방 안에서, 둘은 나란히 앉아 함께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신아름의 핸드폰이 USB잭으로 연결된 노트북을.
“이것도 봐 이거.”
“와 뭐냐, 이거 실화냐아하하하핰!”
김민주는 화면에 떠오른 사진을 보자 박장대소했다.
리카와 앞뒤로 서서 정면을 바라보고, 마치 태양권을 쏘듯 이마에 손가락을 가져다 댄 사진이었다.
한없이 진지한 성필의 표정과 강제로 웃음 참기 중인 리카의 표정이 어우러져 묘한 시너지를 냈다.
“뭐야, 뭔데 이거!”
“나도 몰라.”
“다음 거, 빨리 다음 거!”
김민주의 닦달에 신아름은 다음 사진으로 넘어갔다. 아니, 사진이 아니라 동영상이었다.
20초 내외의 짧은 영상은, 진지하게 다키스트의 ‘더 킹’을 추는 성필을 담고 있었다.
참고로 그가 걸친 재킷은 미사토의 자택에 있는 서유선의 애장품 중 하나였다. 무슨 뜻이냐면, 진짜 다키스트의 무대 의상이란 뜻이다.
“으아하하흐하하하핳핳!”
김민주는 테이블을 쾅쾅 두드리면서 웃었다.
“표정! 표정 뭔데에!”
성필은 무대를 소화하는 아이돌의 진지함과, 동경하는 아이돌의 무대 의상을 입은 팬의 설렘, 그리고 우상을 마주하고 춤을 추는 팬의 결연함을 동시에 담고 있었다.
사방에선 미사토네 집에서 벌어진 파티에 참석했던 인물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소녀연맹 멤버들, 미사토, 세이코, 서유선이 한마음이 되어서 환호를 보냈다.
[다키스트가 킷타아아아아(다키스트가 왔다아아아)!]
취한 성필이 포효하자 환호(웃음)가 더욱 거세졌다.
[키미가 이루 호오니(네가 있는 쪽으로)
토비타츠 와타시 히코오키(날으는 나는 비행기)
다레카노 키키미미난테 이라나이(누군가의 소문은 필요 없어)
키미노 하쿠슈가 호시이(너의 박수가 필요해)]
김민주는 너무 웃어서 배가 아픈 듯 배를 부여잡으며 책상에 이마를 박았다.
“일본어로오, 일본어로 랩! 래앱! 진짜 오타쿠 같애!”
“그니까. 팀장님 다키스트 얘기만 나오면 진짜 정신을 못 차려. 여기선 진짜 다키스트가 보고 있기도 했어서 거의 제정신 아니셨다니까.”
김민주는 끅끅 웃으며, 왠지 모르게 만족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텐션이 미쳤다. 아이돌인 나도 팬미팅 때 이렇게 못 신날 거 같아.”
“…….”
눈꼬리가 비 맞은 강아지처럼 우울하게 내려간 성필은, 조심스럽게 뒷걸음질 쳤다.
그의 발이 나무로 된 바닥을 밟자.
삐거억―.
하필 아귀가 안 맞는 바닥 판이 소리를 냈다.
김민주와 신아름은 움찔하며 뒤를 보았다.
그곳엔.
“하, 하하, 미안, 미안해요……. 노크, 했는데, 말도, 했고, 요…….”
울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입술을 꽉 문 성필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