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9화
미국에서 들어온 섭외란, 미국의 음악 페스티벌 중 하나인 ‘롤라팔루자’였다.
시카고 시(市)를 기반으로 하는 롤라팔루자는 매년 수십만 명의 관광객을 모으고, 그에 따라 수십 수백억에 이르는 수익을 창출한다.
흔히 북부의 ‘코첼라 밸리 뮤직 앤드 아츠 페스티벌’이나 ‘오스틴 시티 리미츠’, 그리고 남부 최대의 음악 축제이자 세계적인 음악 마켓인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와 함께 이름이 오르내리곤 한다.
참여 아티스트도 백 단위다.
그런데, 실은 이 일은 섭외 요청이 왔다고 보기엔 애매했다.
김덕팔의 노력이 일정 부분 작용했으니.
“90년대 초중반이었을 겁니다. 정확한 연도를 떠올리기 힘들군요.”
성필은 김덕팔과 대면하여, 그가 파악한 사건의 전모를 들었다.
“제 전(前) 직장은 엔터테인먼트 전반을 취급했지만, 그게 공연 프로모터 일까지 한단 건 아니었습니다. 제 회사가 해외의 록스타를 초빙했던 건, 어떻게 보면 정부의 입김 때문이었지요.”
냉전에서의 승리를 짧은 자축으로 마무리하고, 경기후퇴로 골골대던 미국.
어떻게든 버블 붕괴의 여파를 수습하려 악을 쓰던 일본.
통일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피를 토하던 독일.
전체적으로 암울했던 시기였으나, 대한민국은 꿈속에 살았다.
나날이 고공행진을 기록하는 경제 지표와 눈에 띄는 생활 수준 향상. 거기에 민주적인 정권 교체까지 이루어지자, 국민들은 대한민국의 경제, 정치적 발전에 자부심을 가졌다.
IMF 사태 직전의 평화이긴 했지만, 경제와 정치가 해결되자 국민들의 눈은 문화로 향했다.
“정부도 그에 호응했던 거지요.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정부는 기업들에게 뭘 시키기 좋아했습니다. 문화 쪽으로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내봐라, 그렇게 지침을…….”
김덕팔은 ‘지침’이란 표현이 과도하게 정경유착을 암시한다고 생각했는지, 고민과 함께 단어를 바꾸었다.
“권유를, 예, 권유를 했지요. 제 전 회사도 음악은 전문 분야가 아니었지만, 문화계에 영향력을 뻗치고자 수락했습니다. 예, 그 담당자가 그나마 젊었던 저였습니다.”
김덕팔은 유명 록스타와 팝스타의 내한 공연을 추진했다.
거의 무(無)에 시작하여, 그야말로 개고생이라 해야 할 노력을 거쳤다. 전화를 걸고 걸고 또 걸고, 일본에 가고 미국에 가고 아무튼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아직도 그때의 감동이 가시지 않습니다. 그 유명하다던 록밴드 멤버들을 공항에서 마중했을 때 말입니다. 그런데 섭외란 게 막무가내인 데다가, 딱히 이익을 보려 한 일이 아니어서, 그분들의 스케줄이 굉장히 널널했습니다.”
“그렇겠네요. 국민한테 보여줄 눈요기였을 테니까요.”
덕분이라고 해야 할까, 그 록밴드는 공연 한두 시간 하는 조건으로 며칠간 한국 관광을 질리도록 했었다.
그들의 곁에는 졸지에 여행 매니저가 된 김덕팔이 있었고 말이다.
김덕팔은 한 손에 지도, 한 손에 악기를 든 그들과 함께 지하철을 수십 번 갈아타며 서울 관광을 시켜주었더랬다.
“그게 인연이 됐지요. 공연을 여러 번 추진하다 보니, 미국의 ‘테이스트 메이커’들과 안면을 트게 됐습니다.”
“테이스트 메이커요?”
“……음, ‘게이트 키퍼’라는 표현이 더 익숙하실까요?”
성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예계에서 성공의 열쇠를 쥔 이들을 게이트 키퍼라고 표현한다. 한국으로 따지면 방송국 PD나 공연기획사의 담당자, 에이전시 에이전트들 정도겠지.
그들은 성공으로 이어지는 길목 길목을 지키고 있으며, 그들의 눈에 들어야 방송에 나오거나 무대에 오를 수 있다.
성필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테이스트 메이커’라, 표현이 인상적이네요.”
“최근 미국의 뮤직 비즈니스 서적들이 그렇게 표현하더군요.”
곱씹을수록 그럴듯하다.
‘맛을 만드는 사람’이란 뜻 아닌가.
의역하면 ‘취향을 만들어내는 사람’ 정도일까.
성필은 어느 래퍼의 말을 떠올렸다.
씬을, 문화계를 바꾸고 싶다면 뮤지션이 아니라 열심히 공부해서 방송국 PD가 되란 말이었다.
비유하자면 록을 부흥시키려면 록커가 아니라 PD가 되어서 록과 관련된 음악 프로그램을 만들어 대중에게 보여주어라. 그런 뜻일 터다.
대중의 테이스트를 바꾸기 위한 길은 뮤지션에게 주어진 게 아니라, 문화계의 권력자들에게 있다.
‘씬을 바꾸는 건 소수의 천재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니까.’
문자 그대로 10년에 한 번 나오는 재능이 없고선 꿈도 꾸지 못한다.
데모 테이프를 들고 회사에서 도망쳐, 고양이가 주인을 간택하듯 어느 매니저를 찾아가 자신들을 프로듀싱하라고 윽박질렀던 걸그룹.
스파이스 걸스. 그녀들은 ‘걸스 파워’란 표어로 여자 뮤지션에게 주어지던 이미지의 한계를 깼다.
라나 델 레이는 스파이스 걸스와는 다른 의미로 여성에게 강요되었던 이미지를 부수었다. 그녀는 강인함뿐 아니라 연약함도 포용했다.
빌리 아일리시는 아예 얼터너티브(대안)로서 팝씬을 전복시켰고 말이다.
그런 소수의 천재가 아니고서야, 업계의 향방은 테이스트 메이커들이 주도할 것이다.
“그때 연락했던 면면들이 지금은 다들 훌륭하신 분들이 되어 있더군요. 그야 물론.”
김덕팔이 허허 웃었다.
“그렇게 높은 분이 되셨으니, 동양의 어느 회사원 정도야 금방 잊어버렸지요. 겨우 연락이 된 사람들 중에서도 ‘다음에 연락하시죠’라는 인간들이 부지기수였습니다.”
“그럼 그중에서 진지하게 김 부장님을 대해주셨던 분이…….”
“예, 있었지요. 미국 문화계의 중역이 되어 있더군요. 이야, 동년배들이 높은 곳에 앉아 있는 걸 보니 세월이 실감되덥니다. 그렇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김덕팔은 자신의 노력을 설명할 기회라고 여겼는지, 성필을 향해 구구절절 자신의 고난을 늘어놓았다.
‘이렇게 말씀 안 해주셔도 대단한 일이란 건 충분히 알겠는데…….’
왠지 모르겠지만, 김덕팔은 성필에게 매우 점수를 따고 싶은 듯했다.
그 욕망을 읽은 성필은 최선을 다해 그의 이야기에 호응해주었다.
“가장 도움이 됐던 건 역시 ‘빌보드 200’에 진입한 기록이었습니다.”
“아, 그렇겠네요. 아니었으면 케이팝에 관해 일장연설을 해야 했을 테니까요.”
“그랬으면 제가 이야기를 마치기도 전에 ‘오케이, 바이’란 말을 들었겠지요. 물론 그렇다고 케이팝에 관한 설명이 빠져선 안 됐습니다.”
빌보드 200 14위란 기록은 대단하지만, 그것만으론 모자랐을 것이다. 왜냐하면 ‘빌보드 핫 100’의 기록이 없으니까.
뮤직 페스티벌이란 이러니저러니 해도, 유명한 밴드나 가수를 불러 관광객을 최대한 많이 유치해야 한다.
앨범을 많이 팔았단 기록은 팬덤의 크기를 증명한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인지도를 증명하진 않는다.
페스티벌 주최 측 입장에서 빌보드 200 상위 기록은 주목할 만한 것이겠지만, 의구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사람이 오긴 오는 걸까?
안 그래도 미국은 큰 나라다. 어찌나 큰지, 지역에 따라 식습관도 차이가 난다. 어느 지역에선 가난하면 죽을 때까지 신선한 채소를 못 본다고 할 정도다.
앨범이야 미국 전역에 공급될 테니 그러려니 해도, 사람이 직접 축제로 오는 건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미국 케이팝 팬덤의 특성인 멀티―팬덤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데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해외의 케이팝 팬들은 어느 한 그룹의 팬이라기보다, 케이팝이란 문화 자체를 향유한다.
그들에게 케이팝은 자국 문화를 대체하는 대안문화의 경향을 띤다.
‘한국으로 따지면 제이팝…… 인가.’
한국 콘텐츠진흥원에서 발행한 산업백서에 따르면, 한국에서 케이팝을 소비하는 이들은 전체 인구의 92%다.
미국의 팝을 소비하는 이들은 75%.
그리고 제이팝은 약 8%다.
묘하게 케이팝과 제이팝 소비 비율이 맞아떨어지게 보이는 건 착각이 아니다. 아마 둘 사이엔 교집합이 거의 없을 가능성이 높다.
‘한국에서 제이팝을 좋아하는 건, 케이팝이 싫어서일 확률이 높지.’
주류 문화의 대안문화로서 제이팝을 소비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케이팝의 위상도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케이팝이 한국의 제이팝과 다른 점이 있다.
‘케이팝은 미국에서 음악산업으로 소비된단 거.’
한국의 제이팝 소비는 사실 음악 그 자체와는 큰 관련이 없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만화 산업이 만들어낸 효과니까.
한국에서 제이팝은 애니메이션, 만화와 함께 소비된다. 그렇기에 일본 음악산업 입장에서, 한국의 제이팝 소비자들을 딱히 고려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한국 음악산업은 미국 소비자들을 고려해야만 한다. 미국 소비자들은 케이팝을 다른 문화의 곁가지가 아니라 음악으로 소비하니까.
“굳이 소녀연맹의 팬이 아니더라도 축제에 올 거다. 그들은 소녀연맹 팬이 아니라 케이팝 팬이니까. 그걸 이해시키는 데 정말, 정말 오랜 시간과 많은 노력이 들었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렇게 사후 보고를 받는 처지에선,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스러운 마음만 드네요.”
“죄송스럽긴요. 이게 제 일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그쪽에 이 말도 했습니다. 미국의 케이팝팬들은, 소녀연맹을 안 좋아하더라도 올 것이다. 하지만 소녀연맹이 아니라 다른 그룹을 데려다 놓는다면, 소녀연맹보다는 훨씬 적게 올 거다.”
그만큼 소녀연맹이 케이팝씬 내에서 지니는 위상이 대단하다. 김덕팔은 그리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성필은 그의 호언장담이 재밌어서 무심코 웃음을 뱉었다.
“그래서요? 그쪽이 뭐라고 했어요?”
“며칠간 응답이 없더군요. 그랬더니 대뜸 연락을 와서 이러는 겁니다.”
페이는 얼마지?
“예, 이렇게 된 겁니다.”
“와…….”
성필은 김덕팔이 연하였다면, 아니, 나이대가 비슷했으면 격려의 의미로 어깨를 세차게 두드려주었을 것이다.
아니다, 어깨가 뭔가.
격렬하게 포옹했을 것이다.
“경섭이는…… 민경섭 이사는 뭐라고 하던가요?”
성필은 아직도 입에 안 익은 호칭으로 민경섭의 이름을 꺼냈다.
가로 엔터 매니지먼트 이사는 뭐라고 했을까.
“상징성 때문에라도 가야 한다, 고 하셨습니다.”
그렇겠지.
‘코첼라’나 ‘SXSW’와 달리, ‘롤라팔루자’는 아직까지 케이팝에서 미지의 영역이다.
소녀연맹이 가장 먼저 발자국을 찍는다면, 언론이 앞다투어 홍보할 것이다.
‘우리가 부끄러울 정도로 홍보해주겠지.’
케이팝이 전미를 강타하다!
또다시 새 기록을 세운 소녀연맹, 과연 그녀들의 끝은?
한국의 문화가 세계를 지배한다!
‘그 정도는 아닌데…….’
한국 사람들은, 당연하지만 미국의 뮤직 페스티벌을 잘 모른다.
그냥 엄청 큰 축제고, 거기에 나가는 게 굉장히 대단한 일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런 페스티벌에 나가는 건 물론 대단한 일이지만, 미국 내에선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 이들도 이름을 올릴 수 있다.
빌보드 차트 입성 기록이 없어도 섭외되는 일이 잦다. 애초에 축제이고, 수백 명이나 섭외하려면, 일정 비율은 유명하지 않은 아티스트로 채워야 한다.
‘근데 뭐, 호들갑은 어쩔 수 없지.’
기자들은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클릭할 만한 제목과 내용으로 기사를 써야 하니까.
그러려면 ‘엄청 큰 축제에 케이팝 아이돌이 섰다!’라고 과장해야 할 것이다.
‘무대에도 급이 있다’거나, ‘섭외 대상에게도 등급이 갈리는데, 섭외된 이들은 등급이 낮다’란 불리한 정보는 빼야 한다.
그런데 성필이 생각하기에, 그건 딱히 기자들이 의도적으로 정보를 왜곡하는 게 아니다.
왜곡이라기보다는 정보 누락에 가깝다.
‘기획사 보도자료를 받은 대로 게시하는 것뿐이지.’
아마 기자들은 보도자료를 받기 전엔 그런 축제가 미국에 있는지도 몰랐을 것이다.
당연하게도 무대의 종류나 급, 섭외 대상의 중요도 구분을 모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기획사가 자사 아이돌에게 유리하도록 쓴 보도자료를 필터 없이 게시하는 것이다.
기자의 덕목인 팩트 체크와 내용의 중립성은 옛날에도 희귀한 재능이었으나, 인터넷 시대를 맞아 더욱 희귀한 재능이 되어버렸다.
그렇다면, 가로 엔터는 케이팝의 화려한 면만 부각하지 않고 중립적으로 기사를 낼 건가?
“홍보팀한테 준비하라고 해야겠네요.”
대답은, ‘절대 아니다’다.
“우리 애들이 부끄러워 죽을 정도로 띄워주는 보도자료를 쓰라고요.”
케이팝은 계속 대단해야만 한다.
성필은 ‘테이스트 메이커’로서, 아이돌 문화의 지속과 발전에 헌신할 것이다.
“축제는 여름쯤이죠?”
“예.”
“그때까지 이 일은 김 부장님이 컨트롤해주세요. 경섭이, 가 아니라, 민 이사랑 협의해서요.”
“알겠습니다.”
김덕팔은 짙은 사명감을 띠며 답했다.
그는 매사에 진지하게 임한다. 그가 이쪽 일에 흥미와 책임감을 가지게 된 건 기쁘다.
‘그런데 유독 나랑 대화할 때면…….’
더 진지해진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잘 보이려 한다고 해야 하나. 꼭 홍규헌을 대할 때 같다.
성필은 김덕팔에게서 알 수 없는 괴리감을 느꼈다.
“맡겨주십시오.”
“……네.”
성필은 매우 열정적인, 또한 매우 연상인 부하 직원을 향해 어찌할 바 모르는 미소로 답해주었다.
* * *
“댄스스포츠라 이거지…….”
민시화는 나란히 선 조아라와 진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마지막 대회 이후, 스스로 만족할 만한 춤을 출 수 없게 됐다. 예전부터 아킬레스건 파열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완전히 못 쓰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의사는 거의 화내면서 ‘춤을 추시면 안 됩니다!’라고 했더랬다.
민시화는 댄스 스튜디오를 팔았다. 그리하여 그녀가 어린 제자와 그 친구를 맞은 곳은 그녀의 자택이었다.
“으음…….”
볕이 잘 드는 거실.
민시화는 조아라와 진저의 주위를 돌며 긴 고민에 들어갔다.
진저는 그런 민시화가 껄끄러웠다. 조아라가 민시화를 처음 대면했을 때처럼, 진저도 민시화의 아우라에 압박감을 느끼는 것이었다.
설령 스텝조차 마음대로 못 밟는 몸이 되었어도, 민시화의 자세와 태도는 무용수 그 자체였다. 세월이 밴 고고함은 어린 진저를 주눅 들게 했다.
“아라 씨…….”
“괜찮아.”
진저는 옆에 선 조아라를 곁눈질했다.
‘아오아’ 이후 진저는 더는 조아라를 순수하게 좋아하지 못했다. 그녀를 향한 동경이 경쟁심으로 바뀌어, 옛날처럼 막무가내로 다가가지 못했다.
조아라는 반대였다.
‘아오아’ 이후 묘하게 진저를 친근히 대했다. 그 거리감이, 진저는 괴로웠다. 자신이 소인배처럼 느껴졌다.
“라틴댄스지?”
민시화가 물었다.
조아라는 이상하단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까 모던댄스라고 말했잖아요.”
“라틴댄스가 낫겠는데?”
“왜요?”
민시화가 짧게 웃었다.
조아라도 이유를 모르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반문하는 건, 라틴댄스를 하기 싫단 뜻이겠지.
‘진짜 그림이 잘 사는데.’
특히 조아라가 그러했다.
옛날에 조아라의 몸을 보고 무용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하지만 라틴댄스는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가슴이야 어쩔 수 없지만, 저 골반을 봐라.
민시화는 인종차별적인 표현이란 건 알았지만, 조아라를 보면 진짜 라티노(Latino)가 와도 한 수 접고 들어갈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조아라는 라틴댄서로서 관능과 열정을 표현할 수 있는 신체를 타고났다. 다시 말하지만, 가슴은 그렇다 치고.
‘천부(天賦)의 재능.’
비록 반쪽일지라도 그러하다.
게다가 라틴댄스는 골반 무브먼트가 중요하니, 딱히 반쪽도 아니었다.
민시화는 조아라가 훗날, 어쩌면 지금도, 혹은 과거에도, 남자들 속 좀 태우리라 여겼다.
‘그렇지만 이쪽도…….’
민시화는 진저를 훑었다.
이쪽은 조아라와는 다른 의미로 천부의 재능을 타고났다.
미국이나 러시아의 발레 프로듀서들이 진저를 본다면 당장 자기네 스쿨에 들어가자고 할 게 분명하다.
‘탈리오니가 살아나면, 당장 자기 딸을 내치고 얘를 실피드 역으로 발탁할 거야.’
진저는 그야말로 요정이다.
길게 뻗은 팔다리와 중성적인 몸매.
순수의 결정체.
모던댄스 쪽의 기품을 살리기에 적합하다. 여자 역보다는 남자 역이 어울리기도 하겠다.
‘얘가 아라를 리드하면 볼 맛이 날 거야.’
민시화는 계산을 마쳤다.
“알겠어, 모던댄스로 하자. 리더는 진저, 팔로워는 아라로. 괜찮지?”
“네.”
“괜찮슴미다.”
민시화는 의외였다.
조아라의 성격이라면 ‘내가 왜 팔로워인데요?’라고 할 줄 알았다.
민시화가 관찰한바, 둘의 관계도 조아라가 따라가는 쪽이 아닌 끌고 가는 쪽인 듯했으니. 게다가 조아라가 연상이기도 하고.
“둘이 볼룸댄스는 초심자란 걸 감안하고, 기본 동작들로 안무를 짜줄게.”
“어려워도 괜찮슴미다.”
“너.”
민시화의 목소리가 바로 싸늘해졌다.
“방송 안무 좀 췄다고 너무 오만하지 않니? 볼룸댄스는 네가 쌓아온 경험과 다른 영역이야. 춤이라고 다 같지 않아. 내가 이런 기본적인 것도 설명해줘야 하니?”
진저는 순식간에 말라붙은 뿌리처럼 쪼그라들었다. 조아라는 그런 진저를 감싸듯이 한 발 앞으로 나왔다.
“쌤쌤, 그렇게 해줘요. ‘여기까지는 얘들이 못 하겠다’ 싶은 수준으로요.”
“너희의 한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는 수준까지?”
“네.”
“힘들 거야. 말했다시피, 볼룸댄스는 너희가 쌓아온 경험의 영역과 달라. 기본자세만 취해도 진땀이 날걸.”
그러니, 돋보이고 싶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아예 댄스스포츠 선수와 팀을 짜는 것이다.
숙련된 남자 리더와 함께하면, 리더가 능숙하게 리드해줄 테니까.
볼룸댄스 초심자인 둘을 데리고 그럴듯한 안무를 만들기란 어렵다.
‘내가 생각한 적정선은…….’
동네 사교댄스 학원의 중년들이 발표회 때 할 법한 수준……. 당연히 그것도 어렵다. 몇 개월은 배워야 할 테니.
‘하지만 얘들이 프로란 걸 감안해야겠지.’
댄스 학원 매주 2회, 회당 1시간.
일반인이 들일 법한 한 달의 노력을, 이 아이들을 고작 하루 만에 채울 수 있다.
춤추고 노래하는 게 직업인 아이들이니까.
게다가 그 경험과 능력, 재능은 일반인을 아득히 넘어선다. 같은 시간을 들여도 보통 사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결과물이 나올 것이다.
그러니, 민시화가 제시할 ‘여기까지는 얘들이 못 하겠다’의 수준은 이 아이들의 예상을 한참 뛰어넘을 것이다.
“정말 하고 싶니?”
조아라는 진저를 힐끔 보았다. 그녀의 눈에선 옅은 열등감이 느껴졌다.
조아라는 포기했단 듯 낮게 한숨을 쉬더니, 진저의 손을 잡았다.
“얘 춤추려고 태어난 애 같아요.”
“어?”
진저는 조아라가 손을 잡자, 그리고 칭찬을 해주자, 인식할 새도 없이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아, 아라 씨……?”
“미국에 컨템퍼러리 댄스 배우러 갔을 때도 나 금방 앞질렀어요.”
“그거에 배울 게 뭐 있다고. 그래봤자 현대무용 테크닉 어중간하게 짜깁기한 걸 텐데. 컨템퍼러리 댄스는 테크닉이나 작품이 아니라 사조나 분위기…….”
“쌤쌤.”
조아라가 진지하게 말했다.
“얘는, 나보다 훨씬 뛰어난 댄서예요.”
진저의 표정이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열등감, 슬픔, 기쁨, 여러 감정이 담겨 있었다.
민시화도 자신의 어린 제자가 그렇게까지 말하니 백기를 들었다.
“짜줄게. 기한은 사흘이야. 그 안에 가능성이 안 보면 쉽게 바꾸는 걸로. 괜찮겠어?”
“……근데, 쌤쌤. 내가 입금하는 입장이잖아요. 원래 고객이 해달라는 대로 해주는 게…….”
“고객이 무너질 집을 지어달라는데, 건설사가 그대로 지어줘야 하니?”
“아…….”
“알아들었으면.”
민시화가 손뼉을 두 번 쳤다.
“테스트나 해볼까.”
조아라와 진저가 서로를 보았다. 둘은 곧 서로의 눈에 담긴 의지를 알아채곤, 동시에 민시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네.”
“하겠슴미다.”
둘에겐 같은 의지가 있었다.
이긴다.
반드시 이긴다.
김민주와 신아름, 자신을 버린 배신자들을 이길 것이다.
아육금 녹화까지 3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