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한는 프로듀서-588화 (588/760)

588화

신아름은 김민주의 연습실에 도착했다. 김민주가 사비를 들여 따로 빌린 장소라고 한다.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부터, 신아름은 연습실 곳곳을 훑었다.

‘여기가 에리카 그년이 믹스테입 만들 때 작업실로 썼던 데란 거지?’

성필은 퇴근하자마자 이곳에 와서 에리카와 믹스테입 작업을 했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신아름은 이곳이 싫어졌다.

“왔냐?”

거울을 보며 연습하던 김민주. 그녀는 거울을 통해 신아름과 눈을 맞추었다.

신아름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더 안으로 들어갔다.

“뭐 마실래?”

“아니. 바로 시작하자.”

둘은 작은 원형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김민주는 노트북을 꺼내어 영상을 하나 띄워놓았다.

“댄스스포츠가 뭔지는 알지?”

“둘이 춤추는 거잖아.”

“그래, 글킨 하지.”

김민주는 굳이 어려운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했다. ‘둘이서 춤춘다’는 설명이면 충분하다.

“댄스스포츠는 시퀀스 무용이라 정해진 동작들을 숙달하면, 어떤 곡이든 대강 출 순 있어. 정해진 동작들이 장르마다 적게는 수십, 많으면 수백 개라서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간단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래서 간단함 이상이 중요해. 정해진 것 이상을 표현할 수 있는 힘이 우열을 가리는 거야. 그 방법은 한 파트너만을 위해 개발된 전용 바리에이션부터, 표현력을 중심으로 한…….”

“야, 잠시만.”

신아름은 당황하여 김민주의 설명을 멈추었다.

“왜?”

“갑자기 웬 이론? 그냥 보고.”

신아름이 노트북 화면에 뜬 영상을 가리켰다.

“그대로 추면 되는 거 아니야?”

“너야말로 무슨 소리야. 이론을 알아야 잘 추지. 스포츠 선수들이 시간 남아돌아서 체육학 공부하는 줄 알아?”

신아름은 질색했다.

이론의 중요성이야 그녀도 익히 안다. 백설하에게 노래를 배우면서, 실전뿐 아니라 이론도 배워야 했으니까.

백설하 또한 김민주처럼 이론의 중요성을 강조했었다. 배우지 않고도 잘 부르는 사람이 있지만, 배우면 더 잘 부를 수 있을 거라고.

재능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영역이 있다.

재능으로 모든 게 해결됐다면, 인류가 수천 년 동안 이론을 쌓아오고 기술을 전수할 필요가 없었을 테니.

그런데.

“이건 춤이잖아.”

신아름이 당황스럽단 듯 말했다.

“우리가 안무 받아서 연습하듯이 보고 추면 끝 아니야?”

김민주는 신아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곤 내키지 않는단 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래, 그러면 한 번 춰보자.”

김민주가 영상을 재생했다.

신아름은 김민주가 이론을 읊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집중력으로 영상을 탐닉했다.

10초 정도 지났을까, 신아름이 ‘아’ 하며 영상을 멈추었다.

“누가 리더야?”

“보고 결정해야지.”

신아름은 미리 결정한 후에 보고 싶었다. 자신이 리더인지 팔로워인지 알아야, 영상 속 누구에게 집중할지 정할 수 있으니 말이다.

“김민주 너 스포츠댄스 배운 적 있어?”

“어.”

“그럼 네가 리더 해.”

“진짜? 난 분명 네가 리더하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

“나도 사리 분별은 하거든? 배운 쪽이 더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게 맞지.”

김민주도 내심 자신이 리더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신아름의 말대로 ‘리더가 더 중요한 역할’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물론 심사와 평가에선 팔로워보다 리더의 역할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김민주는 두 파트너 사이엔 우열이 없다고 여겼다.

그럼에도 김민주가 리더가 되고 싶은 건.

‘신아름 얘는 나보다 키가 작으니까.’

일반적으로 리더가 더 크다. 남자가 맡는 역할이니 당연하다.

그리고 스포츠댄스란 키가 큰 남자와 그보다 작은 여자가 함께 추는 춤으로 정립되고 발전되어왔다.

“그래 그럼. 내가 할게. 이제 재생한다?”

영상이 재생됐다.

영상 속의 남자와 여자는 몸매가 훤히 드러나는 달라붙는 옷차림이었다.

아무래도 김민주와 신아름에게 춤선을 명확히 보여주어야 하니 저런 옷을 택한 듯했다.

그래서인지, 안 그래도 관능적인 춤사위가 더 야릇하게 느껴졌다.

“그, 스포츠댄스가 다 이런 건 아니지 않아? 양복 같은 거 입고 추는 종류도 있지 않나?”

“맞아. 이건 라틴 계열 중 자이브야. 네가 말하는 건 왈츠나 퀵스텝, 폭스트롯일 거고.”

“라틴……. 라틴으로 한 이유가 있어?”

이 안무는 KS 엔터에서 준비한 것이다. 그렇다면 안무 결정 과정에서 김민주가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았다.

김민주가 라틴 계열을 좋아해서 라틴 안무를 받은 것일까?

“아, 그거?”

김민주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네 키가 작잖아.”

“……뭐라고?”

“네 키가 작다고.”

“그게 뭔 상관인데?! 그리고 나 안 작아!”

그렇다. 신아름은 키가 작지 않다.

대한민국 여성 평균보다 2~3cm 정도 더 크다.

그런데 그건.

“안 작아?”

평균 신장인 여성과 비교해서다.

김민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아름은 그녀의 체고(體高)에 순식간에 압도당했다.

케이어스의 데뷔 무대를 본 후, 백설하는 이렇게 말했었다. 멤버 전원이 모델 같다고.

김민주도 그러했다.

중학생 시절 한국 청소년 육상계를 제패했던 김민주다. 그녀의 신체는 단순히 서 있는 것만으로 상대를 주눅 들게 했다.

“우리 아름이, 안 작아요?”

김민주가 실실 웃으면서 신아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신아름이 짜증 난단 듯 거칠게 김민주의 손을 쳐냈다.

“내 키가 작은 거랑 라틴을 고른 거랑 무슨 상관인데?”

“여자 라틴 댄서들은 모던 댄서들이랑 비교해서 키가 작은 편이야. 작은 편이 더 유리하다, 고 할 수도 있고. 모던 댄스는 아무래도 둘 다 길쭉한 편이 더 부각되는데, 넌 길쭉하다기엔…….”

“알겠다 알겠어…….”

더 나은 무대를 위해 택한 결정이라는데, 신아름이 하찮은 자존심으로 초를 칠 순 없는 노릇이다.

둘은 다시 앉아 안무를 감상했다.

안무를 쭉 보던 신아름이 미간을 좁혔다.

“야, 이거 여자 골반 쓰는 게 너무…….”

“너무, 뭐?”

“…….”

진지한 춤을 가지고 이런 말을 하긴 싫지만, 외설적으로 느껴진다.

골반의 무브먼트부터가 그러했다.

게다가 자주 골반을 전방으로 빼어 둔부를 부각하는데, 보는 신아름이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자신이 추어야 할 춤이라고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여자 쪽이 훨씬 눈에 띄지?”

“저런 옷 입고 저런 춤 추는데 눈에 띌 수밖에 없겠지…….”

남자 쪽은 오히려 수수한 편이다.

호피 무늬 레깅스에 크롭을 입은 여자에 비하면, 남자는 달라붙는 옷차림이라도 색이 검어서 그다지 눈에 띄지 않았다.

“라틴의 주인공은 여자야. 리더에게 집중되는 경향이 큰 스포츠댄스지만, 라틴에선 여자 쪽도 리더 못지않게 눈에 띌 수 있어. 어떨 땐 리더보다 훨씬 빛나고.”

흔히 이런 비유를 쓴다.

꽃병과 꽃이라고.

리더는 꽃병이 되어 팔로워인 꽃을 담는다. 어디까지나 꽃병은 꽃병일 뿐, 꽃보다 부각되지 않는다. 꽃병의 사명은 꽃을 아름답게 돋보이는 것이기에.

“난 너한테 주인공을 양보한 거야.”

“……왜?”

영상이 끝났다.

신아름의 물음에 김민주는 즉답했다.

“네가 더 어울리니까. 그리고 이건 예술이잖아. 스포츠가 아니야.”

“춤 이름이 댄스스포츠인데?”

“춤 이름이 댄스스포츠가 아니라, 볼룸 댄스로 우열을 가리는 종목의 이름이 댄스스포츠야. 그리고 우린 아이돌이잖아. 엔터테이너라고. 우리는 경쟁이 아니라 협동하는 거지, 안 그래?”

김민주가 손을 내밀었다.

신아름은 그 손을 잡았다.

악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김민주는 그녀의 손을 꽉 붙잡고 일어남과 동시에 신아름을 일으켰다.

“첫 동작 외웠지? 한 번 해볼까?”

“바로?”

“내가 이론 알려준다니까 춤부터 춰보자던 게 누구더라.”

신아름이 픽 웃었다.

“나지.”

안무의 첫 시작은 힙 범프(Hip Bump)라는 동작으로 시작한다.

옆으로 나란히 서서 손을 맞잡은 둘은, 부드럽게 서로를 향해 걸음을 옮긴다. 그리고 서로의 한쪽 힙을 부드럽게 톡 맞부딪치는 것이다.

단독으로 하면 골반을 좌우로 가볍게 흔드는 동작이지만, 둘이 붙어서 하면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신아름은 그게 가볍게 입술을 맞추는 것 같이 느껴져서, 그리고 민망해서 웃음을 터뜨렸다.

“춤바람이란 말이 왜 있는지 알겠다. 이런 걸 남녀끼리 계속 추면 바람이 안 날 수가 없겠네.”

김민주도 그 말을 듣곤 민망한지 짧게 웃었다.

아마 조아라가 방금 신아름의 발언을 들었다면 화냈을 것이다.

사람 대 사람의 신체 접촉을 연인과밖에 이루지 못한 불쌍한 인간들. 그래서 피부의 맞닿음을 성애적으로밖에 해석하지 못하는 가련한 인간들.

춤이란 행위의 사회성을 겪어본 적 없으니 ‘춤바람’ 같은 괴상한 단어나 만들어냈다 뭐다…….

실제로 ‘춤바람’이란 단어는, 춤을 배우는 여자들을 정숙하지 못하다고 규정하려 했던 과거의 잔재였다.

그런데 그런 걸 진지하게 이야기했던 조아라를 떠올리니, 신아름은 마냥 웃기기만 했다.

“이게 그렇게 웃겨?”

김민주는 신아름의 웃음이 멎지 않으니 당황했다.

“아니, 조아라 생각나서.”

“아라 씨……. 근데 아라 씨는 댄스스포츠 안 나와? 춤 좋아하시지 않나?”

“안 그래도 나랑 나오고 싶어 했어.”

“근데?”

“근데, 네가 먼저 나한테 파트너 제안을 한 거지. 오늘 너 만나러 오는데도 조아라가 계속 배신자니 뭐니 했거든. 진짜 짜증 나서.”

“아, 우리네 진저도 그랬는데.”

“진저 씨가?”

“어, 나랑 하고 싶었는데 못 하게 됐다고 그래.”

“그럼 둘이서 하면 되는 거 아니야?”

그 발상에 와닿은 신아름은, 곧이어 불안함에 사로잡혔다.

‘조아라랑 진저 씨랑 팀을 이루면…….’

당연히 그녀들과 겨루게 된다.

그럼, 신아름―김민주 팀은 이길 수 있나?

“그러면 되겠네. 돌아가면 진저한테 말해봐야겠다.”

김민주는 신아름과 같은 걱정은 없는 듯했다.

신아름은 그녀에게서 승리에 대한 흔들리지 않는 확신 같은 것을 느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나 평온할 리는 없을 테니.

아니면.

‘아까 한 말이 허풍이 아닌가?’

자신들은 엔터테이너다.

우리들이 하는 건 스포츠가 아니라 예술이다.

경쟁이 아니라 협동이다.

‘진짜 그렇게 생각해서 걱정이 없나?’

물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괜히 이 걱정을 꺼내면 지는 느낌이라, 신아름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어.”

연습은 약 2시간 동안 이어졌다.

동작 자체는 어찌어찌 맞춰볼 수 있었다.

아무렴, 연습생 때는 물론 아이돌이 되고 나서도 카피한 안무만 몇인데. 장르가 달라졌다고 경험치가 어디 가진 않았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본격적인 듀오 댄스란 게 생소한 경험인지라 시행착오가 많았다.

‘아, 또 여기서…….’

신아름은 춤에서 불협화음을 느꼈다.

김민주의 리딩에 따라간다고 느낀 순간 앞서나가 있기도 했고, 그녀보다 빠르다고 생각했건만 순식간에 발이 느려지는 경험도 했다.

확실히 자신만 잘 춘다고 되는 춤이 아니었다. 아니, 합이 맞지 않으면 잘 춘다고 할 수 없는 춤이었다.

정해진 동작을 따라 추는 것. 그 이상의 무언가가 확실히 존재하는 춤이다.

아이돌의 군무와는 또 다른 영역의 벽이 있다.

“여기까지 하자.”

김민주는 숨을 헐떡이면서 신아름의 손을 놓았다. 둘은 약속한 것처럼 동시에 바닥에 털썩 앉았다.

김민주가 신아름에게 물병을 건네며 물었다.

“야. ‘빛나솔’에 그 에피 있잖아.”

물병을 받으려던 신아름의 손이 움찔했다.

“박 이사님이 김하슬 바람맞혔을 때. 너 그때 에리카한테 전화해서 뭐라고 한 거…….”

“걔가 너한테 뭐래?”

“어?”

김민주는 당황했다.

신아름이 이제껏 보인 적 없던 적의를 보였다. 마치 부모를 살해한 원수의 이름이 나온 듯한 반응이었다.

“그년…….”

자연스럽게 ‘년’ 호칭에 이어 욕설을 뱉으려던 신아름. 그녀는 이전에 에리카를 X년이라고 불렀을 때를 떠올리곤 고개를 저었다.

그때 신아름은 정말 오랜만에 성필에게 혼났었다. 에리카를 욕했단 이유가 아니라, 적나라한 욕설을 썼단 이유였다.

신아름으로선 그딴 년에게 욕을 쓴 게 뭐 그리 큰 잘못인가 했지만, 성필이 싫어하니 그만두기로 약속했었다.

신아름은 ‘년’이란 호칭을 집어넣고, 침착하게 다른 호칭을 꺼냈다.

“걔가 너한테 변명이라도 하든?”

“아니…….”

김민주는 신아름의 반응을 대강 이해했다.

성필은 빛나솔 이후 여러 의미로 유명인이 됐다. 아이튜브에 ‘짝짓기 예능 최악의 빌런 TOP5’ 같은 영상의 주인공으로 나오기도 했었으니까.

여느 밈이나 사람들의 관심이 그렇듯이, 성필에 대한 관심도 프로그램 종료 후 몇 주 만에 사그라들었지만 말이다.

‘그렇네, 나야 에리카 입장에서만 생각해서 몰랐는데. 신아름 얘 입장에선…….’

에리카가 빌런일 것이다.

순진한 성필을 꼬드겨 국민 욕받이로 만든 원인의 90%는 에리카에게 있다고 생각하리라.

나머지 10%는 에리카를 향한 성필의 책임감, 열정, 애정이 고른 비율로 섞여 있을 것이다.

‘반응이 좋을 수가 없겠구나.’

“아니, 음, 에리카가 네 얘기만 나오면 막 우울해지고 그러더라고. 에리카가 그런 애가 아니거든?”

오만하기까지 한 자신감으로 똘똘 뭉친 아이다.

자존감이 비정상적으로 높다.

김민주도 가끔 자기 이름을 인터넷에 검색한다. 아이돌 관련 커뮤니티에서 나오는 온갖 비난과 악담을 보면, 아무리 김민주라도 멀쩡하지 않다.

그런데 에리카는 그런 걸 그냥 농담 소재로 쓰곤 한다. 이 정도 유명세(有名稅)야 얼마든지 지불할 수 있노라고.

에리카에겐 성이 있다. 어떤 파도에도 휩쓸리거나 무너지지 않는 성이다. 유일하게 무너졌던 순간이라면, 정호환에게 믹스테입 발표를 허락받지 못했던 때였다.

“누구한테 욕먹은 정도로 그럴 애가 아닌데, 네 얘기만 나오면 침울해지니까 궁금해서.”

이건 진심이었다.

김민주는 대체 어떤 말을 들어야 에리카가 침울해질 수 있는지 너무나도 궁금했다.

에리카가 어떤 인간인가.

케이어스란 그룹을 장악하겠답시고 멤버 전원 반말을 쓰자고 했던 인간이다.

에리카는 진소유란 언니이자 인생 선배의 존재가 그룹 장악에 방해되리라고 판단했었다. 그래서 그룹이 모인 첫날 전부 반말을 쓰자고 했었다. 아니, 강요했었다.

사회에서 만났다면 에리카는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진소유는 대학생이었다.

그 나이대의 애들이 그러하듯 1살 차이도 하늘과 같을 텐데, 에리카는 스스럼없이 ‘소유야’라고 불렀더랬다.

미친년인 줄 알았다.

그래서 더 궁금하다. 그 미친년을 눈물짓게 할 수 있는 말이란 무엇인…….

“(검열).”

“……?”

“(검열).”

김민주는 충격받아 몸이 미세하게 떨렸다.

귀에서 피가 나는 듯했다.

속이 안 좋아져서 구토감이 밀려오기도 했다.

다행이다. 에리카가 일본인이라서. 그녀가 네이티브 한국인이었으면, 우는 걸 넘어 다른 부정적인 감정이 함께 생겨났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검열).”

“그, 그만해도 돼 이제…….”

“에리카 걔도 미안한 건 아나 보네.”

신아름은 처음보다 기분이 살짝 풀린 듯했다.

“근데 너희끼리 내 얘기가 나올 일이 있어?”

“있지. 에리카가 ‘빛나솔’ 재탕만 수십 번을 했거든. 지겨워 죽겠어.”

“왜?”

“응?”

“왜 재탕을 그렇게 해? 뭐가 재밌다고?”

김민주는 직감했다.

‘있는 그대로 말하면 X된다.’

에리카가 ‘빛나솔’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성필의 몰락이며, 거기까지 이어지는 빌드업과 하이라이트를 즐긴다고는 절대 말해선 안 된다.

어찌 보면 에리카는 ‘빛나솔’의 히든 주인공이다. 성필은 김하슬과 쌓아왔던 관계를 전부 내던지고, 히든 루트를 향해 달려갔던 것이다.

그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볼 수 있는 히든 주인공 입장에선, 볼 때마다 희열이 생기지 않을까.

‘모든 걸 내던지고 자신을 위해 달려와 주는…….’

성필은 기사나 왕자와 같은 포지션이었다.

그런데 그대로 말하면 신아름이 과도를 집어 들고 케이어스의 숙소로 갈 것만 같다.

그래서 김민주는 선의의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아니, 어, 덕질? 같은 거지.”

“덕질?”

“박 이사님 캐릭터를…… 덕질? 캐릭터가 독보적이잖아. 에리카 취향에 맞는 거 같더라. 나도 걔가 빛나솔 보면 같이 보고 하는데, 어, 괜찮더라.”

김민주는 긴장했다.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신아름의 눈동자 속에 어떤 감정이 떠오르는지 필사적으로 파악했다.

신아름의 눈동자는 탁한 갈색이었다. 그 안엔 감정이 뒤얽힌 혼돈이 있었다.

방금 대답은 NG였나?

“그래?”

신아름의 기세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이해해.”

이해하는구나.

“너도 그래?”

“뭐?”

“팀장님. 너도 에리카랑 같이 자주 봤다면서.”

“어어? 어, 그치.”

신아름의 눈빛이 아까와 다른 의미로 바뀌었다.

부정적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이거 볼래?”

그녀는 폰을 꺼내어 사진첩을 열었다.

폴더 중 하나의 이름이 ‘팀장님’이었다.

신아름은 그 폴더를 터치했다. 안엔 성필의 사진이나, 신아름이 성필과 함께 찍은 사진들이 가득했다.

김민주는 아연해졌다.

“봐봐. 팀장님 멋지지?”

“…….”

김민주는 아연해지는 것을 넘어 정신이 아득해지려고 했다.

동시에 익숙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중학생 때도 이런 학우들이 있었다. 약간 관심을 내보이면, 자기 폰 안에 든 아이돌 사진들을 보여주며 영업하려던 애들 말이다.

신아름의 모습이 딱 그러했다.

“이것도 봐. 거리에 가다가 떠돌이 개랑 마주쳤거든? 팀장님 막 굳어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는데 엄청 귀여웠어. 팀장님 개 무서워하거든.”

“……어.”

그러고 보면, 김민주의 학우 중에 담임 선생님을 덕질하는 애가 있었다.

직접 볼 수 있고, 만질 수도 있고, 자신에게 다정하고, 환하게 웃어주고, 이야기도 할 수 있으니, 아이돌 덕질보다 가성비가 훨씬 높다고.

선생님의 결혼 소식이 전해지던 날, 그 애는 울면서 사진첩에 담긴 사진을 깡그리 삭제했었다.

그 애랑 신아름이 겹쳐 보인다.

‘아이돌 활동이 고돼서 맛이 가버린 건가?’

김민주는 폰 안에 담긴 35살 아저씨의 사진을 보며 심란해했다. 사진 속의 성필은 자기 발목을 겨우 넘어서는 체고의 강아지에게 쫓겨 도망치는 중이었다.

* * *

“다녀왔어.”

“어서 와.”

에리카는 또 거실에 누워 ‘빛나솔’을 보고 있었다. 방송의 마지막, 참가자들이 최종 선택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성필은 김하슬을 최종 선택했다.

하지만 김하슬은 약속 장소에 나오지 않았다.

쓸쓸한 음악과 함께, 성필은 후련하게 미소 지어 보였다. 동시에 그의 얼굴에선 쌉싸름함이 느껴졌다.

그걸 보는 에리카의 표정도 좋지 않았다. 여느 때와 같이.

‘얜 왜 이럴까.’

김민주는 항상 이게 의문이었다.

성필의 연애가 결국 실패하는 방송의 최후. 에리카는 기뻐해야 하지 않을까?

왜냐하면, 그의 연애 실패는 곧 에리카를 향한 그의 열정을 나타내는 것이었으니까.

왜 이 장면에서 에리카는 죄지은 사람처럼 우울한 표정으로 변할까.

‘신아름한텐 얘가 박 이사님을 덕질한다고 거짓말했는데…….’

이런 걸 보면, 덕질은 절대 아니다.

에리카는 성필에게 미안한 듯하다. 그의 연애가 실패한 게 자기 탓이라고 생각해서일까.

그렇다면 성필이 김하슬을 바람맞힐 때 기분이 좋아지는 게 아귀가 안 맞다만, 사람이 원래 그렇지 않은가.

일관적으로 사는 사람은 극히 소수다.

하나의 사건을 가지고도 기뻐할 수 있고, 또 슬퍼할 수 있는 게 사람이다.

커피 농장에서 착취당하는 제3세계의 아이들을 보며 눈물짓지만, 동시에 커피값이 낮다는 데 만족하는 인간들처럼.

“메이크업하신 거겠지?”

김민주는 에리카의 뒤에 서서 물었다.

텔레비전 안의 성필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쓸쓸히 멀어져가는 중이었다. 그의 얼굴은 김민주가 기억하는 실물보다 밝은 톤이다.

“그렇겠지.”

“화장하니까 일반인 안 같다.”

“소녀연맹 메이크업 맡아주시는 샵에서 하셨다고 하시더라.”

“그럼 인정이지.”

“응.”

“야 에리카. 만약 박 이사님이 갑자기 키스하면 밀어낸다 안 밀어낸다.”

에리카가 피식 웃었다.

“또 그거야?”

이건 진소유가 만들어낸 놀이였다.

그녀는 어느 날 갑자기 이런 말을 꺼냈다.

‘고연주 선배님이 갑자기 키스하면 밀어낸다 안 밀어낸다?’

고연주는 톱 여배우다.

비현실적인 얼굴로 유명했다.

젊었을 땐 국민 첫사랑으로 불리기도 했었다.

진소유가 던진 화두는 이것이었다. 만약 엄청난 미인이 키스한다면, 자신이 이성애자라도 밀어낼 수 있는가?

참고로 1팀장도 같은 질문을 받았었다.

‘유지성 배우님이 키스하면 밀어낸다 안 밀어낸다?’

유지성도 비현실적인 외모로 유명한 남자 배우였다.

1팀장은 꽤 진지하게 30분 정도 고민하고, ‘그냥 당황해서 몸이 안 움직일 거 같은데’란 답을 들려주었더랬다.

만약 평범한 사람이 그런다면 두말할 나위 없이 주먹을 날릴 거란 말도 덧붙였었다.

진소유의 이 질문은 1팀장과 멤버들에게 한 깨달음을 주었다. 외모란 게 정말 중요하구나, 그런 당연한 깨달음이었다.

“음, 글쎄. 모르겠네.”

에리카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건 대수롭지 않은 게 아니었다.

“너 고연주 선배님이 키스하면 정중하게 어깨 붙잡고 밀어낼 거라면서? 근데 박 이사님은 ‘글쎄’야?”

“진지하게 묻는 거야?”

에리카가 김민주를 돌아보았다.

진지하게 물었냐고?

“걍 아무 생각 없이 물은 거야.”

성필이 키스하면 밀어낼까 안 밀어낼까, 그건 딱히 진지하게 고민할 거리가 아니었다.

진소유가 만들어낸 이 질문은, ‘외모가 과연 동성애의 한계를 극복시킬 수 있는가’가 주제였다.

그런데 질문의 대상이 이성으로 바뀐다면, 단순히 ‘너 그 사람 어떻게 생각해?’란 주제가 되어버린다.

김민주는 화면 안의 성필을 찬찬히 관찰했다.

그리고 짧게 픽 웃었다.

“왜?”

에리카가 이상하게 여겨 물었다. 김민주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냐.”

신아름이 보여주었던 사진이 떠올랐다.

소형견에게 쫓기는 성필 말이다.

* * *

성필은 이유이가 내놓은 옷을 보았다.

테이블 위에 올라온 그 옷은, 이유이가 신아름을 위해 혼신을 다하여 만든 복장이었다.

아육금 댄스스포츠 종목을 위해 만든, 라틴댄스복이다.

“어때요, 좋죠?”

성필은 그 옷을, 아니, 천 조각을 들어 보였다.

검은색과 붉은색이 아름답게 조화된 색이었다.

그는 옷의 어깨 부분을 양손으로 잡고 펼쳐보았다. 아니다, 어깨 부분이 아니다.

애초에 어깨가 파인 부분이기에, 성필이 집은 건 가슴 부분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과장을 조금 보태서 이 온 전체 면적으로는 성필의 가슴도 다 못 가릴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옆구리가 까져 있었고, 어깨도 까져 있었고, 골반쯤엔 치마인지 천 조각인지 모를 게 달려 있어서 ‘둔부를 가린다’는 치마의 목적을 완벽하게 배반했다.

성필은 그걸 테이블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

이유이는 ‘난 칭찬을 바란다!’는 마음을 눈에 잔뜩 담아 성필을 응시했다.

그녀에겐 자신의 재능을 향한 더 없을 믿음만이 느껴졌다.

“다른 옷으로 하죠.”

“손나(그런)! 말도 안 돼요! 이건 아름이를 위한 오트쿠튀르(맞춤복)라고요! ‘후쿠요 히다카’에 입사 제의를 받았던 저, 이유이가, 모든 힘을 다해서 디자인하고 만든 옷이에요! 겨우 몇 초 본 걸로 안 된다뇨! 적어도 입혀보…….”

“아름이한텐 이 옷 못 입혀요.”

아니.

“안 입혀요 절대!”

“에에에엑?!”

“아앗! 유이 언니 아타시(저) 따라 하지 마세요! 이거 인종차별이에요!”

함께 옷을 구경하기 위해 온 리카는 이유이의 인종차별을 대차게 지적했다. 그리고 테이블에 올라온 옷을 들고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쬐끔 마음에 들지두…….”

“리카는 입어도 돼.”

“취급 차이가 너무 심한 거 아닌가요?! 아름이는 안 되고 아타시(저)는 되는 이유가 뭔가요!”

“음…….”

“애정의 차이인가요!”

“에이, 설마.”

“바로 대답이 안 나오는 게 수상해요! 소중한 딸인 아름이한텐 노출도가 높은 옷을 허락 못 하는 거잖아요! 제 추리가 맞다고 인정하세요!”

“맞다.”

“손나(그런)!”

성필을 테이블을 양손으로 짚었다.

“아름이가 이 옷 입는 꼴은 내 두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안 돼요!”

“에잇!”

리카가 성필에게 라틴댄스복을 던졌다.

그의 머리에 걸린 라틴댄스복은, 그 면적의 부족함으로 말미암아 성필의 눈조차 제대로 가리지 못했다.

그의 눈에 흙을 넣긴커녕 눈도 못 가리는 것이다.

“그치만.”

이유이는 어떻게든 이 옷을 신아름에게 입히겠단 듯 반박을 시작했다.

“라틴댄서들은 다 이렇게 입잖아요. 라틴댄스는 육감적인 몸매를 자유롭게 표현하고 드러내는 게 심사기준의 하나 아닌가요?”

“그래도 이건 좀 심하잖아요 유이 씨. 치마 길이만이라도 늘려줘요. 이게 뭐예요. 그냥 팬티잖아요.”

“아이돌 디스코 팬츠보다 나은데요? 면적도 그것보단 넓고요.”

“그렇, 긴한데, 느낌이란 게…….”

“애들이 입는 디스코팬츠랑 면적이 크게 다르지도 않아요! 박 이사님의 편협함과 선입견이, 이 옷을 아름이가 입는 데 유일한 걸림돌이에요!”

논파(論破)!

“하지만, 아름이는, 아름이는……!”

“에 또, 이사님. 아타시(제)가 던져놓고 이런 말 하긴 뭐하지만, 언제까지 그 옷 머리에 쓰고 계실 건가요?”

“박 이사님.”

이유이가 단념하란 듯 성필의 어깨를 짚었다.

“패션은 과감한 거예요. 사실, 과감한 것도 아니죠. 댄스스포츠 선수들은 다 입는걸요. 이 옷을 모욕하려면, 전 세계 1억(이유이의 과장)이 넘는 사교댄스 인구를 모두 적으로 돌리게 될 거예요.”

“1억…….”

그래, 로마에선 로마법을 따라야겠지.

이 옷이 엣찌(음란)하게 보이는 건 성필 자신의 선입견 탓이다.

이유이 말대로, 이 옷은 아이돌들이 자주 입는 디스코 팬츠+크롭티보다 면적이 넓다.

“그럼, 아름이한테 보여주고…….”

“팀장님.”

회의실 문이 열리고 신아름과 민경섭이 들어왔다.

“제가 무슨 소식 가지고 왔…….”

신아름과 민경섭이 우뚝 멈췄다.

머리에 옷을 뒤집어쓴 성필 때문이었다.

정적이 회의실을 채웠다.

그리고.

“……팀장니임.”

신아름이 당장이라도 와락 터져 나오려는 눈물을 막는 것처럼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혀엉…….”

민경섭은 존경하던 상사의 외도를 목격한 것처럼 넋이 나갔다.

“아니에요!”

그런 성필을 감싸준 건 리카였다.

“박 이사님은 의복 도착증이 없어요! 그리고 이 옷은 아름이가 입을 거예요! 아름이가 거절하면 아타시(제)가 입을 거구요!”

“변호하려면 제대로 좀 해! 인과를 그렇게 설명하면 어떡해!”

성필은 머리의 옷을 붙잡아 거칠게 테이블 위에 두었다. 그리고 괜히 머리칼을 쓸며 진지한 투로 말했다.

“무슨 소식인데?”

“어…….”

민경섭은 신아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 기쁜 소식을 자신이 전하고 싶다고 하여, 민경섭은 신아름을 데려온 것이었다.

신아름은 충격에서 반쯤 벗어났다.

“마, 맞혀보세요. 팀장님이…….”

“나랑 옷이랑 번갈아 보는 거 그만해줄래?”

그나저나 맞춰보라니.

기쁜 일?

기쁜 일이랄 게 뭐가 있을까.

“일본에서 ‘애플 크러쉬’가 트리플 플래티넘 앨범 인증받았나?”

“그거보다 더 기쁜 일이에요. 팀장님이 매일 노래 부르는 거.”

“다키스트가 재결합했어?”

“……아뇨.”

“뭐지, 모르겠네…….”

신아름은 기대된단 듯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해외에서 일 들어왔어요!”

“러시아?”

“아뇨.”

“설마…….”

성필의 눈이 기쁨을 담아 점점 커졌다.

그의 기쁨에 발맞춰 신아름이 밝혔다.

“미국이요! 미국에서 뮤직 페스티벌 섭외가 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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