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한는 프로듀서-586화 (586/760)

586화

정지음은 순정 만화 매니아다. 장하양이 빌려준 ‘유리구두’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다.

그와 함께 ‘순정만화 매니아 소모임’을 창립했던 작곡가 엘릭은, 요즘 일이 바쁜 듯 연락이 뜸했다.

그래서 근래 그의 취미는 개인적이었다.

‘아름답네…….’

정지음은 혼자만의 공간인 어두운 작업실에 갇혀, 아니, 자발적으로 틀어박혀 순정만화를 질리도록 읽었다.

한 권씩 덮을 때마다 그의 가슴엔 꽃이 폈다.

볼 만한 순정만화를 전부 독파한 후, 그는 다음 스텝으로 넘어갔다. 다음 스텝이란 여성향 순정만화가 아닌, 남성향 로맨스 코미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단 뜻이다.

‘자극적이네…….’

남성향 로맨스 코미디의 시작인 타카하시 루미코의 작품을 시작으로, 아다치 미츠루를 거쳐 하렘물의 시초인 아카마츠 켄의 작품.

그리고 현대에 나온 것들까지. 그는 순정만화 못지않게 로코물에 빠져들었다.

여성향 만화가 마음의 에로티시즘이라면 남성향 만화는 시각의 에로티시즘이었다.

순정만화는 너무 많이 읽어서 질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가 남자이기 때문인지 정지음은 후자에 더 끌렸다.

‘재밌다.’

그것도 최근까지였다.

그는 장난을 굉장히 잘 치는 여주인공이 나오는 만화책을 읽곤, 어느 순간 허탈감에 빠져들었다.

‘난 뭐 하는 거지?’

정지음은 폰을 꺼내어 이수연 작사가와 나누었던 톡 기록을 쭉 훑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오늘 어떤 일이 있었으며, 자신은 이런 기분이다. 그런 사소한 이야기만을 주고받는, 지극히 사소한 것들의 향연이다.

그렇다. 지극히 사소한 대화. 하지만 정지음은 그녀와의 기록을 다시 읽기만 해도 가슴이 간질거렸다.

순정만화를 읽을 때처럼 가슴에 꽃이 피었고, 로맨스 코미디를 읽을 때처럼 꽃잎이 바람을 타고 요동쳤다.

정지음은 그녀에게 선톡을 보내려 했다.

“…….”

하지만 곧 그의 손가락은 움직이길 그만두었다.

로맨스 만화의 끝이 무엇인지 아는가. 바로 사귀기 시작한 직후이다.

현실의 사랑이란 사귄 후에 시작되건만, 만화 속 세계는 사귀는 것으로 완결된다.

정지음이 상상하는 설렘이란, 진지한 관계가 시작하기 이전의 흔들림과 갈등과 방황이었다.

그 이후엔 무엇이 있을까.

문득 성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넌 제발 커뮤니티 개념글 같은 거 좀 그만 봐. 밖에 나가서 사람을 만나. 인터넷이 아니라 사람을 믿는 법을 배워.’

정지음이 이수연의 저의를 의심했을 때 성필이 해준 충고였다.

그때를 떠올리면 정지음은 창피해졌다.

뭐라고 했더라.

‘저를 가지고 놀려는 거면요? 여러 남자한테 간 보면서 어장 관리하는 거면 어떡해요? 그럼 저만 바보되는 거잖아요. 아니면 제 돈을 노리고 접근한 거라던가…….’

그렇다.

정지음이 사랑에 품은 동경은 모두 사귐이 시작되기 이전의 것이었다.

그에 비해 그가 목격한, 정확히는 인터넷에서 목격한 사랑의 과정과 끝이란 너무나도 참혹한 것들이었다.

세상엔 나쁜 여자밖에 없는 듯하다. 아니, 여자란 존재들이 애초에 끔찍하도록 창조된 것처럼만 보였다.

정지음은 가상의 이야기로 사랑을 동경하는 동시에, 가상의 세계로 사랑을 두려워하게 됐다.

“하아…….”

이런 걱정을, 정지음은 가장 신뢰하는 형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당연히 술을 먹고 물어본 것이었다.

상대는 성필이었다.

성필은 말했다.

‘다 사실이야.’

‘아, 역시…….’

‘세상의 밑바닥에서 건져낸 사실.’

‘네?’

‘세상엔 밑바닥이 있으면 구름 위도 있는 법이잖아. 지옥의 풍경을 찍어서 여기가 인간이 사는 곳이라고만 하면, 그게 진짜 전체를 대변하겠어? 당연히 천국만 보고 그곳만이 세계라고 하는 것도 거짓말이지.’

요컨대.

“자신이 직접 판단하는 수밖에 없다, 고…….”

정지음은 엎어둔 만화책을 바라보았다.

남성향 로맨스 코미디.

“…….”

정지음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갈 채비를 마쳤다.

그는 만화의 세상을, 사랑을 동경했다.

그러나 알고 있다.

현실엔 자신만을 바라보고 사랑해주며, 그 사랑을 깨달아줄 때까지 기다릴 여자는 흔치 않다.

정지음은 확신을 바랐다.

자신이 굼뜨고 느리고 모른 척해도, 이수연 작사가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리란 확신.

언제까지고 지고지순하게, 해바라기처럼 자신만을 바라봐주길 원했다.

그래, 만화 속의 인물들처럼.

‘아니야.’

사랑은 단방향이 아니라 쌍방향일 때 성취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자신도 상대방과 함께 걸음을 내디뎌야 이뤄지는 거겠지.

‘가자.’

솔직히, 정지음은 이미 확신에 가까운 믿음이 있었다. 이수연은 이미 차고 넘치도록 사인을 보내왔으므로.

단지 모솔 정지음이 지레짐작 겁먹고 도망치기만 했던 것이었다.

정지음은 어두운 작업실을 나섰다.

허구의 세계가 아니라, 사람이 사는 곳으로.

정지음은 차를 몰고 이수연 작사가의 작업실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그녀의 작사가 동료들이 놀란 모습을 보였다.

그보다 살짝 늦게 탕비실에서 이수연 작사가가 나왔다. 그녀는 커피를 들고나오는 중이었는데, 정지음을 보더니 놀라서 어깨를 흠칫 떨었다.

“지음아?”

“수연아.”

정지음은 얼굴부터 귀, 어깨까지 전부 발갛게 달아 있었다.

겨울이라 다행이다.

두껍게 껴입은 옷 덕분에, 붉은 얼굴과 귀만이 보일 테니까.

“오늘, 오늘, 아니.”

정지음은 피하던 시선을 이수연에게로 똑바로 향했다. 시야가 미친 듯이 일렁였다. 피가 눈에 몰려서 뜨겁다.

이명이 귀를 덮쳤다.

세상엔 오직 자신과 이수연만이 존재한다. 그럼에도 정지음의 감각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오직 정신만이 멀쩡했다.

그의 정신이 외쳤다.

“지금, 시간 있어……?”

이수연은 잔을 떨어뜨렸다.

잔이 깨지며 커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마치 하늘을 수놓는 불꽃놀이처럼.

* * *

“으이이이잌!”

이야기를 듣던 성필이 비명을 내질렀다. 그는 손으로 어깨를 쓸면서 바들바들 떨었다.

“이가! 이가 달아서 썩어버릴 거 같애!”

“아직 안 끝났어요!”

관객이 드라마틱하게 반응하니, 이야기꾼인 신아름도 이야기할 맛이 났다.

그녀는 소파에 몸을 묻고 발작하는 성필의 어깨를 팍팍 두드렸다. 신아름의 채근에 성필은 일어나긴 일어났으나, 여전히 미세하게 몸을 떨고 있었다.

35살 아저씨가 받아들이기에, 정지음과 이수연의 이야기는 당도가 너무 높았다. 이가 아니라 심장이 녹아내릴 듯하다.

“그래서요 들어봐요.”

신아름은 헤실헤실 웃으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게 아마 세 번째 데이트일 건데, 지음 오빠가 그날따라 되게 불안해 보였대요. 처음 만났을 때도 주변 막 힐끔거리고. 작사가님이 왜 그러냐고 물어도 아니라고만 하고.”

“뭐야, 지음이 연예인병 걸렸어?”

정지음은 얼마 전에 음악 웹진에 인터뷰를 했다. 케이팝을 이끌어가는 차세대 프로듀서로 말이다.

인터뷰 말머리는 이러했다.

‘수백만 개의 갈림길 중 내가 택한 길, 나의 음악.’

거기에 실린 정지음의 화보는, 보는 성필이 창피할 정도로 무게를 잡고 있었다.

그 후로 왠지 모르게 모자를 쓰고 다니기 시작했었는데. 설마 이수연과의 세 번째 데이트가 그때쯤이었을까?

“아뇨, 그것보다 더 재밌어요.”

“뭔데 뭔데 빨리 말해애애애!”

“식당에 마주 보고 앉아서도 지음 오빠가 계속 불안해 했대요. 못 참고 작사가님이 진지하게 물었더니, 오빠가 이랬단 거예요.”

네가 너무 예뻐서, 걱정돼.

다른 남자들이 너한테 막 들이댈까 봐…….

그, 이게, 음, 다음부터는, 조금만 덜 꾸미면, 아니, 아니다.

미안…….

“정지음 이 미친놈아아아앜!”

성필은 너무 행복해서 욕까지 써버렸다. 신아름은 성필의 반응을 보곤 매우 만족하여 물개박수를 쳤다.

“나, 나 죽어어, 진짜 죽어…….”

성필은 종국엔 정신착란을 호소했다. 그는 소파에 몸을 기대고 흐물거리듯 늘어졌다.

정지음과 이수연.

과연 언제 연인이 될까. 이 질문은 가로 엔터 전원이 추이를 지켜보던 것이었다.

그런데 드디어 결판이 났다.

정지음의 고백으로 사랑이 시작됐다.

사실, 이수연은 점점 자존감과 자신감이 깎여갔다고 한다. 들이댈수록 ‘응? 뭐라고?’란 식으로 회피하며 도망가기만 하니, 그럴 만도 했다.

이수연은 정지음이 자신을 동정하여 자꾸 어울려주나 싶어 우울증이 생길 지경이었다고.

성필은 정지음을 볼 때마다 알 수 없는 적개심마저 생기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결국은 해냈다.

‘장하다 지음아…….’

천재 케이팝 프로듀서 정지음, 모쏠 탈출.

“그래서……?”

정지음의 ‘네가 너무 예뻐서 걱정돼’ 발언을 들은 이수연의 반응은?

“어떻게 됐는데?”

신아름이 씩 미소 지었다.

“모르겠어요. 거긴 작사가님이 말씀 안 해주셨거든요. 왜 안 해주셨는진 알겠지만요.”

“어.”

성필이 이수연이었어도 심장이 터져나갔을 것이다.

아마 이수연의 취향은 곰돌이형 남친인 듯하다. 그렇다면 정지음이 아주 취향에 직격이겠지.

“둘이 잘 사귀겠다.”

“곰돌이형 남친요?”

신아름은 성필이 언급한 단어를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몰라? 그냥, 사람 타입 같은 거야. 규격화된 건 아니고, 저 사람은 고양이 같네 그런 거 있잖아.”

“아, 옛날에 본 거 같아요.”

신아름은 스타그래프에 게시물을 검색해보았다.

“맞네. 있어요.”

신아름은 그걸 쭉 훑어보더니 활짝 웃어 보였다.

“팀장님은 이거예요?”

[여우형 남친

언제나 화제의 중심이자 분위기 메이커! 모두를 홀리는 엄청난 매력의 소유자! 섹시하고 적극적이고 눈치도 빠른데다 밀당 고수라 항상 가슴이 두근거려! 근데 여친은 항상 불안해 ㅜㅜ.]

“뭐, 그런 편이지?”

“우와, 기분 나빠.”

“…….”

“농담이고, 진짜는 이거?”

[사슴형 남친

매사에 철저하고 진지하고 계획적이야! 고고한 한 마리의 사슴…… 보고 있으면 자기반성 씨게 온다. 그만큼 의지할 수 있는 오빠미가 멋져! 근데 고집이 세서 피곤해……. 난 너만큼 고고할 순 없어 ㅜㅜ.]

“고고해? 내가?”

“팀장님 기분 좋아 보이네요? 사슴 닮았다고 하니까 좋아요? 근데 이거 진짜 팀장님 같아요. 팀장님 무단횡단도 안 하잖아요.”

차 하나 안 지나다니는, 거리가 5m도 안 되는 횡단보도조차 초록불이 켜지기 전엔 안 건넌다.

“그건 고고하다기보다, 자존감을 지키는 데 도움을 줘. 내 도덕성을 확인함으로써 우월감을 느끼는 거지.”

“이거 봐요. 분석적이네. 근데 흐음…….”

신아름은 관련 피드를 몇 개 더 찾아보곤, 흥미가 다했는지 폰을 뒤집어두었다.

“MBTI 나오기 전엔 사람들이 이런 거 했었구나. 이런 것도 시대를 따르나 봐요.”

“넌 잘 모르겠지만, 옛날엔 혈액형 성격설 같은 게 유행이었어. 그보다 전에는 별자리였고.”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을 설명해주길 바란다. 혈액형 성격설이나 MBTI는 그러한 욕망의 발현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팀장님, 그럼 저는 무슨 여친형일 거 같아요?”

“너? 음, 보자…….”

“여우형.”

성필과 신아름은 소리가 들리는 쪽을 보았다.

품에 책을 한 아름 안은 장하양이 서 있었다. 그녀는 짧게 미소를 짓곤 다시 말했다.

“아름이는 여우형 아닐까?”

“제가요?”

“여우.”

장하양이 자신의 손을 머리 위로 올려 여우 귀 모양을 만들었다.

“닮았으니까?”

“그래요? 팬들은 저보고 고양이상이라고 하던데.”

“맞아, 아름이가 여우형은 아니지.”

성필이 진지하게 말했다.

“아름이는 분위기 메이커는 아니니까. 사교성도 그리 좋지 못하고.”

“아 뭐래요. 내가 얼마나 인간관계가 원만한데. 팀장님도 알잖아요?”

전생이었다면 성필도 쉽게 ‘응’이라고 답했을 것이다. 신아름은 글로브의 리더로서, 팀의 분열을 여러 번 이겨낸 경력이 있었다.

또한 석세스 엔터의 만인에게 사랑받다시피 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자기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끔찍이도 아끼고 챙겨주니까.

물론, 조아라를 제외하고.

조아라는 석세스 엔터와 매니지먼트 계약을 체결했던 배우였지만, 신아름의 미움을 받았었다.

아무튼, 현재의 신아름은 전생과는 여러 의미로 달랐다.

‘설하랑 하양이 덕분이겠지.’

의지할 언니들이 있으니, 굳이 신아름이 리더십을 발휘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녀는 동생으로서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게 긍정적인 면만 있는 건 아니다.

요즘은 덜하지만, 이전의 신아름은 전생에 보여주지 않았던 증상을 보이기도 했었으니.

성필은 그게 전생과의 차이점, 즉 리더십의 부재라고 생각해왔다.

‘그래도 요즘에 잘 지내는 걸 보면, 적응한 거 같아 다행이야.’

“팀장님 지금 저 비웃어요?”

“어딜 봐서? 누가 봐도 따스한 미소였잖아.”

신아름도 성필과 비슷한 미소를 띠었다.

“여우형.”

장하양이 또 말했다.

“맞는 거 같아.”

“……그거 뭐 농담 같은 거예요? 언니는 유머 감각 언제 기를래요?”

“아하하.”

“하양아 그런데 그 책들 다 뭐야?”

“이거요?”

장하양은 책이 품을 벗어나지 않도록 꼭 끌어안았다.

“가사 쓸 때 도움받을 책들이요. 시집이나 소설책이 작사에 도움이 많이 돼요. 참신한 표현이 많거든요.”

“……그대로 옮겨 적으려는 거 아니지?”

“아하하, 살짝씩 바꾸죠. 어미나 단어, 문장 구조를 바꾸면 아예 다른 글이 되는걸요. 굳이 그대로 옮길 필요가 없어요.”

“그렇구나.”

하긴, 시인들도 책을 읽다가 눈에 띄는 단어나 문장이 있다면 수첩에 적는다고 하니.

인류가 문자를 발명한 지 어언 5,000년이다.

참신한 표현이랄 건 없다. 그 변용만 있을 뿐.

장하양의 방식은 현명했다.

“근데 그걸 다 읽으려고?”

“그래야죠. 후회를 남기고 싶진 않아요. 최선을 다해서 최고를 만들고 싶어요.”

“멋지네.”

“반하셨어요?”

“음, 그게 지금 물을 건가?”

“네?”

“수십 번은 말한 거 같은데.”

살짝 불안함을 띠었던 그녀의 눈썹이 기분 좋은 호선을 그렸다.

“그렇죠. 부끄러울 정도로 많이 들었죠. 그럼, 좋은 시간 보내세요.”

장하양은 2층으로 올라갔다.

성필은 그녀를 올라가는 것을 쭉 바라보다가, 허벅지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시선을 내렸다.

신아름이 여기나 보란 듯 그의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찰싹찰싹 쳤다.

“우리도 하던 거 계속해요.”

“어, 그러자.”

둘이 하던 건, 작사였다.

신아름은 작사에 성필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지금까진 도움보다 정지음과 이수연의 연애사에 집중했었다만.

사실, 신아름은 작사에 집중할 생각이 딱히 없는 듯했다. 그녀는 성필과 함께 있는 시간에 밀도를 더하는 것을 더 중요시했다.

‘요즘 아름이랑 같이 보낸 시간이 적긴 했지.’

그녀는 성필과 무언가를 같이 한단 것 자체가 즐거웠다. 그게 작사든 연애 이야기든 뭐든, 이 순간을 즐기는 것이다.

그랬기에 둘의 이야기는 자주 다른 곳으로 튀었다.

“팀장님, 올해 설날 메뉴는 뭐예요?”

“똑같지 뭐.”

“매너리즘에 빠진 거 아녜요? 좀 더 정성을 들여봐요.”

그리 말한 신아름은 잠시 눈치를 보더니.

“지금도 충분하지만, 그래도요. 같이 새로운 거 생각해봐요.”

“응. 맞다, 준비는 잘 돼가?”

“가게요?”

신아름의 어머니는 드디어 가게를 차리게 됐다. 야심 찬 ‘아름청과’의 시작이다.

과일과 채소를 취급할 예정이라고 한다.

성필은 이미 개업일에 맞춰 화환을 주문해두었다. 개업식에도 참여할 예정이다.

“잘은 몰라요. 엄마가 잘하고 있겠죠.”

“어어? 네가 투자자인데 너무 관심 없는 거 아니야?”

“난 아이돌이지 가게 매니저가 아니거든요. 엄마가 채소만 몇십 년을 팔았는데, 저보다 훨씬 더 잘 알겠죠.”

“그렇지.”

거의 신아름이 태어난 순간부터 채소를 파셨다.

먹고 살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갓 태어난 신아름을 맡아줄 사람 한 명 없는 상황에서, 어머니가 제대로 된 일을 구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소규모로 채소를 떼어 거리에 자리를 잡고 파는 게, 신아름의 어머니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자그마치 20년 넘게 이어진 경력이다.

그리고 그중 6년을 신아름도 함께했다. 그녀는 아기일 때부터 어머니의 품에서 떨어지는 일이 없었다.

덕분에 그녀는 시장의 아이돌이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다.

유치원에 들어가기까지 매일 개근했으니, 주변의 사랑을 받을 만도 했다. 지금은 시장에 현수막이 항시 걸린 상태라고도 한다.

‘대체…….’

성필은 신아름의 가정사를 떠올릴 때마다 궁금해지곤 한다.

‘아름이의 부친은 어떤 사람일까?’

왜 신아름을 버리고 도망갔을까?

어째서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을까?

어머니껜 한 번도 여쭤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건 어머니의 가장 큰 상처 중 하나일 테니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이와 함께 버림받은 여인의 심정을 어찌 짐작하겠는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질 지경은 아닐는지.

“팀장님?”

성필이 침묵하자, 신아름이 옅은 불안을 품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랐으나, 그곳엔 아버지의 자리가 없었다.

아버지와 애착을 형성할 기회 없이 어른이 된 그녀는 성필과의 관계에 집착한다. 성필은 그게 청소년기와 성인기를 거쳐 이어지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애착 형성이라고 생각했다.

성필의 앞에서만큼은, 그녀는 유아기다.

그 유아기가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도 있었다. 석세스 엔터를 나갈 때였다.

시원하게 성필을 떠나보내던 그녀에게, 드디어 자립할 힘이 생겼다고 생각했건만. 1년 후에 만난 그녀는 더 심각한 상태였었다.

“응, 왜?”

성필이 평소와 다름없이 인자한 목소리를 들려주자, 신아름의 얼굴에서 불안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이 문장 어때요?”

신아름은 아까부터 지지부진하던 가사를 어느새 완성해선 성필에게 보여주었다.

[다들 말해 내 날개가 커졌다고

맞아 난 날고 있어 알고 있어

이 날개는 네 거라고 내 게 아니라고

다시 내려갈게

너와 같은 높이로 너와 눈 맞추러]

“와, 멋진데?”

“에헤헤, 진짜요? 불러줄까요?”

“근데 멜로디가 미정이지 않아?”

“그쵸. 지금 지음 오빠한테 가서 붙여달라고 할까요?”

“음절이 보자…… 넷째 줄에는 감탄사 같은 거 넣으면 수가 맞을까?”

“어떤 거요?”

“예압 베이비. 그럼 ‘다시 내려갈게 예압 베이비’가 되는 거지.”

“아 절대 싫어요!”

신아름이 꺄르륵 웃었다. 그때 그녀가 갑자기 웃음을 뚝 멈추었다.

성필은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보았다.

장하양이 있었다.

“내가 방해했어?”

“아, 아뇨. 언니가 너무 갑자기 나타나서…… 진짜 무슨 귀신인 줄 알았어요.”

“아하하.”

성필은 둘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읽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둘은 기묘하게도 사이가 가깝지 않았다. 가까이 붙어있지만 맞물리진 않는 톱니바퀴 같다고 할까.

성필은 사람에게도 상성이 있다고 믿는다.

어쩌면, 둘은 상성이 안 좋을지도 모른다.

“경섭 오빠한테 들은 건데, 내가 내려온 김에 너한테 말해주려고.”

“일 들어왔어요?”

“일은 아니고, 음, 요청이 더 맞는 표현이겠다.”

“요청?”

* * *

조아라는 올해 설날 아육금(아이돌 육상 금메달)의 종목을 찬찬히 확인해보았다.

그중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댄스스포츠.’

남녀가 파트너를 이루어 선보이는 춤이다.

조아라는 민시화가 댄서로서 활동했던 마지막 무대를 떠올렸다.

그때의 민시화는 불꽃이었다. 그 불꽃은 영원토록 조아라의 가슴에 남아, 죽는 순간까지 꺼지지 않을 불씨가 되었다.

당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조아라의 등에 전율이 내달렸다.

‘남자 파트너를 구해야 하나?’

조아라는 적당한 대상을 물색했다.

댄스스포츠가 가능한 사람…….

‘선수밖에 없잖아.’

댄스스포츠 선수를 섭외해야 하리라.

그때, 그녀는 추가 룰 설명을 발견했다.

‘동성 파트너도 가능해?’

민시화에게 들은 이야기이지만, 댄스스포츠 대회에선 동성 파트너로 출전 가능하다.

청소년 대회 정도까지 말이다.

여느 댄스계가 다 그렇듯, 댄스스포츠도 남녀 성비 불균형이 심하다. 그래서 학생 대회엔 여―여 파트너가 많이 나온단 모양이다.

남자가 없으니 여자가 리더를 맡아, 같은 여자인 팔로워를 이끄는 것이다.

‘이러면…….’

굳이 파트너를 찾을 필요도 없잖아?

‘신아름이랑 하면 되겠다.’

* * *

“저는 춤의 신임미다.”

진저가 결연히 선언했다.

잡지를 보던 진소유는 잡지 위로 눈을 흘끗 내밀어 진저를 보았다. 그리고 금방 잡지로 눈을 가렸다.

“안 해.”

“누가 소유 언니한테 부탁한다고 했슴미까? 소유 언니는 춤의 신인 저한테 부적격임미다.”

“그래.”

진저는 괜히 뿔이 났다.

“‘댄스스포츠’ 안 나가고 싶슴미까? 옷이 예쁩미다.”

“난 댄스스포츠 못 춰. 너도 배운 적 없잖아.”

“조금 해본 적 있슴미다. 연습하면 숙련하는 것도 금방임미다.”

“대단하네.”

진저는 또 뿔이 났다. 그녀는 진소유에게 뭐라고 말하려다가, 그냥 한숨과 함께 분노를 떠나보냈다.

“그럼 누구랑 하게?”

어린아이에게 관심을 가져주듯, 진소유가 물었다. 진저는 금방 또 신이 나서 답했다.

“저에게 어울리는 파트너는 민주 언니뿐임미다.”

“하긴, 걔 진짜 온갖 거 다 배웠으니까. 댄스스포츠도 배웠겠지.”

“제가 리더임미다. 민주 언니가 팔로워임미다.”

“그래, 너 키 커.”

진저가 자랑스레 가슴을 폈다. 그녀의 중성적인, 더 아름답게 포장하여 요정같이 비현실적이고 신비한 분위기의 매력이 돋보였다.

“올해도 케이어스의 우승임미다.”

* * *

신아름이 의아해했다.

스케줄도 아니고, 요청이라니?

무슨 자선 행사 참여 요청인가?

“무슨 요청요?”

장하양이 답했다.

“응, 케이어스 민주 씨가 KS 엔터 통해서 요청하셨어. 설날 아육금에 ‘댄스스포츠’ 부문, 같이 파트너로 나가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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