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4화
왠지 모르게 집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홍규헌과 한구인은 주방에서 음식을 준비했으나, 서로 대화를 나누진 않았다. 가끔 ‘후추’ ‘소금’ 같은 단어만 말할 뿐이었다.
성필과 리카는 식탁에 앉아 음식이 나오길 기다렸다.
“이사님…….”
리카가 불안한 듯 성필을 불렀다.
“호, 혹시 아타시(저) 혼나러 온 건가요? 설마 전에 SNS로 책 추천한 것 때문인가요? 그게 정치적 색깔을 드러냈다고 생각한 건가요?!”
리카는 옛날부터 감명 깊게 읽은 책을 SNS로 공유하곤 했다.
최근에는 ‘Meritocracy trap(능력주의의 함정)’이라는 영문 도서를 추천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책이 한국에 정식 발간됐다.
덕분에 리카는 그 책의 홍보 모델이 되기도 했었고, 작가인 예일대 교수가 SNS에서 직접 리카를 언급하는 일이 있었다.
“언제 적 일이야. 그걸 지금 와서 뭐라고 하려고? 그리고 뭐, 좋은 일이었잖아.”
리카는 뇌섹녀(뇌가 섹시한 여자) 이미지를 얻게 됐다. 그리고 성필이 보기에, 리카는 객관적으로 뇌섹녀가 맞았다.
영어 원문으로 책을 읽는다니, 대체 어쩌다 이런 애가 나타났는지 모르겠다.
“덕분에 뇌섹녀 타이틀도 얻고.”
“뇌섹녀보단 그냥 세쿠시(섹시)한 이미지가 좋아요!”
그러곤 리카는 성필에게 얼굴을 들이대곤 좌우로 휙휙 고개를 돌렸다.
“자, 여러 각도에서 저의 미모를 감상하세요! 어떤가요! 옛날보다 훨씬 성장한 저는!”
“그래, 예쁘다.”
성필이 대강 답하자 리카는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성필을 이해했다.
리카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성필은 이 공간의 무게를 느끼고 있을 테니까.
곧이어 홍규헌과 한구인이 완성된 음식을 테이블로 내놓았다.
맥앤치즈, 가지 돈까스, 파스타와 간단한 스테이크였다.
리카가 두 눈을 반짝였다.
“한 이사님 요리는 오랜만이네요!”
“나는 왜 빼먹어.”
“사장님 요리는 거의 4년만 아닌가요!”
“아, 그때?”
성필이 취해서 정신을 잃고 홍규헌의 집에서 깨어났을 때다.
“뭐어, 그 얘기는 우리끼리의 비밀로 간직하자고 했잖아. 박 이사 창피할 테니까 그만 말하자.”
다들 자리에 앉았다.
“잠시만.”
홍규헌은 다시 일어나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술이 든 박스를 두 개 가지고 왔다.
그걸 본 한구인은 주방에서 술잔을 가지고 돌아왔다.
“자, 이건 한 이사 거.”
한구인은 포장을 뜯어 와인을 꺼냈다. 그것을 본 한구인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제가 받기엔 과분한 술이군요.”
“비싼 건가요!”
“‘라 타슈’입니다.”
“비싼 건가요!”
“이건…… 100만 원이 넘겠군요.”
“술이 백만 원?!”
리카는 부르주아 홍규헌을 향해 질시와 부러움을 아낌없이 내비쳤다.
“그리고 이건 박 이사 거.”
성필은 포장을 뜯었다.
사실 포장에 이름이 적혀 있었기에 술의 정체는 쉽게 알 수 있었다.
리카는 그게 비싼 술이라고 확신했다. 포장을 벗기는 성필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기에.
“미친, 진짜 서봉주네…….”
“비싼 건가요!”
“진짜배기는 한 이사님이 받은 와인이랑 가격이 비슷해.”
코뮤니스트가 되기로 선언했었던 리카는 다시금 부르주아를 향한 부러움과 질시를 내비쳤다.
그러면서도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을 드러냈다.
리카가 홍규헌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타시(저)는 어떤 건가요!”
“이거.”
홍규헌이 알코올 도수 3짜리 술을 주었다. 캔에 담긴 것으로, 여자들에게 인기인 술이다.
“…….”
“뭐.”
“이, 이에(아뇨).”
“취향 따라서 박 이사나 한 이사랑 나눠마셔.”
“에, 이 자리에서 먹는 건가요? 선물이 아니라?”
“그러니까 한 이사가 포장을 뜯었지. 애초에 둘이서 나눠 마시려고 가져온 거니까. 나는 와인.”
홍규헌이 와인 잔을 한구인 쪽으로 슬쩍 밀었다. 한구인은 오프너로 코르크를 뽑곤, 숙련된 솜씨로 잔에 와인을 채웠다.
리카는 와인과 중국술 중에 고민하다가, 성필을 향해 작은 술잔을 내밀었다.
“아타시(저)는 박 이사님이요!”
“괜찮겠어? 이거 도수 높은데.”
“박 이사님이 중국술 좋아하시잖아요! 저도 언젠가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참고로, 옛날에 도전해본 적이 있었다. 슈퍼마켓에서 파는 싸구려 고량주로 말이다.
그걸 한 모금 마신 리카는 곧바로 뱉었었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겠단 듯, 그녀는 손가락 두 마디보다 작은 도자기 잔을 결연히 들었다.
성필은 잔을 반 정도만 채워주었다. 그리고 침을 꼴깍 삼킨 후, 자신의 잔에도 술을 채웠다.
“건배.”
잔 네 개가 부딪쳤다.
두 개의 와인 잔과 두 개의 도자기 잔.
각자 술을 음미했다.
“크흡.”
리카는 강렬한 향에 오만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꼴깍 삼키더니, 성필을 향해 애처롭게 웃어 보였다.
“마히혀효(맛있어요)…….”
“그냥 와인 마셔.”
“아니에요! 이제 와서 포기할 순 없어요! 원래 익숙해지면 맛있어지는 거예요!”
성필은 자신과 맞춰주려는 리카가 고마웠다.
‘아니, 이건 리카가 이득인 거 아닐까?’
술을 마시더라도 항상 싸구려 소주, 맥주, 그리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사케만 마시던 리카다.
그런 그녀에게 진정한 술맛을 가르쳐줄 수 있다면, 이건 리카에게 고마워해야 할 게 아니라 리카가 고마워해야 할 거 아닌가?
“그래, 맛있게 먹어.”
성필이 또 잔을 채워주자, 리카는 마지못해 헤헤 웃었다.
그녀는 술 대신 음식에 집중하기로 한 듯 바쁘게 젓가락과 숟가락을 놀렸다.
세 임원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따스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리카의 얼굴이 반찬이라도 되는 듯, 느리게 식사하며 그녀만 바라보았다.
“…….”
리카는 그런 분위기가 적응 안 되는 듯 점점 먹는 속도가 느려졌다. 그러곤 갑자기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톡! 내려쳤다.
“역시 아타시(저)를 혼내기 위한 자리였나요! 목 막혀서 죽게 만들려는 건가요! 박 이사님, 저를 정말 소중히 여긴다면 여기서 함께 도망쳐요! 도피예요!”
“먹는 모습이 예뻐서 그래.”
“그런가요? 에헤헤.”
리카는 홍규헌과 한구인, 성필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조용히 식기를 내려두었다.
“하실 말씀이 있는 건가요?”
“할 말이라기보다…….”
홍규헌은 한구인을 곁눈질했다.
한구인은 언뜻 심각해진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자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띠었다.
“리카 씨.”
“하이(네).”
“리카 씨에게 팬카페는 어떤 존재입니까?”
“팬카페요? 으음…….”
리카는 시선을 위로 올리며 고민을 거듭했다.
단답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이야기가 길어지겠단 듯, 잔에 든 술을 반쯤 비웠다.
“처음엔 ‘에?’란 생각이 들었어요! 가입하려면 문제를 풀어야 하는 카페라뇨!”
그 말대로였다.
팬카페에 가입하기 위해선 소녀연맹에게 보통 애정이 있어선 안 됐다.
앨범 판매 인증, 스트리밍 시간 인증, 좋아요 인증, SNS 팔로우 인증 등 매우 복잡한 증명을 거쳐야만 한다.
거기에다 수능처럼 문제를 풀고 통과해야 한다. 예를 들어 ‘아라의 생일은?’ 같은 쉬운 문제부터.
‘XX년 XX월 XX일에 발매된 앨범의 제목과 그 세 번째 트랙의 제목은?’ 같이 세세한 문제.
‘소녀연맹 자체 예능 중 가로 고등학교의 자막에서 이게 바로 XXX의 아우라란 파트가 있는데, 여기에 들어갈 단어는?’ 같은 악의적인 문제까지.
“이걸 풀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싶었어요!”
거기에다 이름, 나이, 성별, 거주지와 같은 개인적인 정보도 요구한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란 의구심? 같은 것도 생겼고……. 그런데 시간이 지나다 보니까 이해가 갔어요.”
팬카페엔 소녀연맹 멤버들의 손편지나 내밀한 속마음 등, 공개적인 SNS에선 하기 힘든 이야기들이 많다.
팬에게 급을 나누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멤버들도 알고 있다. 이 팬카페에 가입한 이들은, 정말로 자신들을 사랑한단 것을.
그런 팬들이기에, 남들에게 하기 힘든 이야기들도 할 수 있는 것이다.
팬카페와 팬클럽은 소녀연맹과 팬들 모두에게 소중한 공간이다.
팬은 소녀연맹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고, 소녀연맹은 팬에 대한 사랑을 키울 수 있는.
아주 소중한 공간.
“소중한 곳이기에, 더 엄격했단 걸 알아요. 저희 행사 때마다 응원 현수막 가지고 오시고, 음악 방송에서도 응원 구호에 맞춰주시고, 생일 때마다 힘을 합쳐 선물도 보내주시고…… 무엇보다, 어떤 일이 있어도 저희를 응원해주실 거란 마음이 느껴져서…….”
리카는 눈가에 자그마한 물기를 머금곤 활짝 웃었다.
“무슨 이야기였었죠?”
“리카 씨에게 팬카페란 어떤 존재인지, 여쭸었습니다.”
“소중한 곳이에요.”
그 표현이면 충분하다.
한구인은 고개를 주억였다. 성필도 마찬가지였다.
다키스트 팬카페에 가입했고, 지금도 가입되어 있고, 코어한 ‘장막’으로 활동했었기에 충분하고 넘치도록 이해한다.
전생엔 케이어스가 데뷔했을 때 팬카페 제도가 없어져서 아쉽기도 했었다. 훗날 다시 생각했을 때, 그건 글로벌화에 발맞춘 현명한 선택이었다.
글로벌 팬덤 플랫폼.
그 거대한 변화 때문에 기존의 그룹들이 겪을 진통을 겪지 않아도 됐으니.
지금 소녀연맹이 맞이한 상황처럼.
“좋은 답변 감사합니다. 감동적이군요.”
“한 이사님은 감정 표현이 너무 서툴러요! 전혀 감동한 거 안 같다구요!”
“옛날보단 나아지지 않았습니까?”
“옛날보단 훨씬 낫지만요!”
식사가 재개됐다.
리카의 따스한 말 덕분인지, 이전보다 분위기가 훨씬 부드러웠다.
디저트는 서양식 동양식 과자들이었다.
당연히 와인파가 서양식 과자를 먹었고, 서봉주파는 동양식 과자를 먹었다.
리카는 이젠 서봉주를 곧잘 마셨다. 눈이 풀린 것을 보니 취한 듯하다.
“대체 이사님 바디 프로필 사진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그걸 아직도 찾고 있어?”
“이상하잖아요……. 다른 데 가지고 간 적도 없는데…… 홀연히 사라졌어요…….”
“바디 프로필이라.”
홍규헌은 그리 말하곤, 잠시 식탁 아래로 손을 내렸다. 아마 자신의 배를 문질러본 듯했다.
성필이 픽 웃었다.
“요즘 헬스장 잘 안 나오시던데.”
“요즘 들어 피곤해서 그래. 박 이사는 계속하고 있어? 아니다, 계속하고 있겠지. 안 물어봐도 알겠네. 진짜 대회에 나가려고?”
“모르겠어요. 권강철 트레이너님이 인생 업적 만들어보라고 자꾸 말하시는데, 부끄럽기도 하고…….”
“부끄럽단 애가, 리카한테 바디 프로필 사진을 줘?”
“리카가 애원했단 말예요…….”
“정말이야? 네가 애원했어?”
“이사님은 허풍이 심하시네요!”
아까부터 한구인이 조용했다.
아마 부끄러운 거겠지.
그의 바디 프로필 컨셉은, 좋은 말로도 정상이라고 할 수 없었다.
카우보이 모자에 승마용 장화, 거기에 드로즈 차림이었으니…….
리카가 말했던가. 여성 잡지 코너에 가면 베스트셀러 1위 표지로 있을 것 같다고.
“한 이사가 애인이 없는 게 신기해. 우리 회사는 성비가 거의 반반이잖아.”
홍규헌이 와인을 홀짝였다.
“아무리 직책이 이사라도, 미친 척하고 들이댈 법한 애가 한 명쯤 있을 거 같은데.”
“그렇게 따지면 박 이사님이 없는 것도 이상해요!”
“박 이사는 뭐어…… 연애 안 하기로 했다면서? 애초에 주변에 철벽 치는 스타일이고.”
“철벽이요? 제가 그래요?”
홍규헌이 씩 웃었다.
“너 일할 때 어떤 느낌인지 전혀 모르는구나?”
홍규헌이 성필을 ’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도 취한 것이다.
“한 이사, 말해줘.”
“아이돌에 미친 사람 같습니다. 특히 여자 아이돌 직캠을 틀어놓고 심각한 얼굴로 모니터에 눈을 들이댈 때는…….”
“헤헤, 부끄럽네요.”
“저거 보십쇼. 저게 맨정신인 인간의 반응입니까?”
성필이 시무룩해졌다.
한구인이 큭큭 웃었다. 그는 잔을 잡고 이리저리 돌리더니, 성필을 향해 말했다.
“성필아.”
“……?!”
리카가 화들짝 놀라 벌떡 일어나려다 허벅지가 테이블에 부딪혀 끼에에엑 비명을 지르고 다시 앉아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바, 바, 방금 한 이사님이 박 이사님을……! 에에엑?! 말도 안 돼요! 언제 두 분이 이렇게 친해지신 건가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장르가 다른 로맨스 스토리가 진행된 건가요!”
“아, 한 이사 취했네.”
“한 이사님의 주사(酒邪)가 반말인가요! 이사님의 주사를 본 여자는 죄다 넘어가게 생겼어요!”
“성필 오빠한테 반말하고 그러면 안 되지. 셋이 있을 때만 하기로 했잖아.”
“미안하다 규헌아.”
리카, 혼절 직전! 그녀의 반응을 보고 세 명은 배꼽 빠지게 웃었다.
“아무튼 뭐어, 셋이 있으면 반말하기로 했는데 그 이후로 한 번도 한 적이 없네. 박 이사랑 한 이사만 있을 때도 그래?”
“예.”
“참…… 우리끼린 이러는 게 편하다 그치?”
“그런 편이죠.”
“에? 에? 꿈인가요? 아니면 술이 환각을 보여주는 건가요? 혹시 이런 것도 가능한가?”
리카가 성필의 가슴으로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성필이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끼에에에에엑!”
“아하하핰! 얘는 진짜 옛날이랑 바뀐 게 없네!”
홍규헌이 손뼉까지 두드리면서 웃었다.
“좀 연예인다운 그런 거 없어? 막 고고하고 오만한 아우라? 보통 그렇게 변하지 않아?”
“그런 것보다 아타시(저)의 손목을 걱정해주세욧! 이, 이 이상 계속 잡고 있으면 저를 납치하는 거라고 판단할 거예요!”
성필이 그녀의 손목을 놔주었다.
“리카, 안 불편해?”
“이사님 때문에 손목이 불편해요!”
리카가 손목을 흔들어 덜렁거리는 손을 과시했다. 부러졌다고 항의하는 듯했다.
“이사 둘이랑 사장 사이에 껴 있잖아. 안 불편해?”
“불편을 강요하는 건가요!”
리카는 셋에게 동시에 윙크를 날렸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윙크를 잘 못 한다. 눈에 모래가 들어간 사람처럼 세차게 깜빡이는 게 최선이었다.
“불편할 게 뭐 있나요! 저희는 친…… 동료잖아요!”
“오, 사회생활 잘하는데?”
“진심이었는데! 사장님 나빠!”
그러면서 토닥이는 건 성필의 어깨였다.
“하하.”
홍규헌은 건조하게 웃고는 잔에 담긴 와인을 한입에 들이켰다.
다들 그녀에게 집중했다.
홍규헌은 사람의 얼굴을 보는 대신 테이블 중앙 언저리쯤을 보았다.
“다들 기억해? 나 처음 만났을 때. 사장실에서 담배 피우면서 술 마시고, 가끔은 업무 시간에 취해 있고, 그랬었지.”
당연히 기억한다.
성필이 처음 마주한 모습이 담배와 술 냄새에 찌든 채 전화하는 상대방을 향해 욕설을 지껄이는 그녀였으니.
“회사가 궤도에 오르면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어. 실제로 그랬고. 나는, 매일 5시 30분에 일어나. 담배를 한 대 피우고, 이불을 개고, 씻고, 아침을 먹고, 다시 양치하고, 옷을 입고, 정확히 7시에 집을 나서. 일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선,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보고, 다시 자. 나와의 약속이었어. 이런 정상적인 삶의 사이클을 가지는 건, 약속이야.”
홍규헌이 잔을 슬쩍 들었다.
한구인이 채워주었다.
“사람은 시간과 에너지에 순번을 둬야 해. 직장인이 아니라 사장이라면, 무언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리라면 더욱 그래야 해. 내적인 시스템을 확실히 해두지 않으면, 에너지가 어디론가 조금씩 새어나가거든. 그렇잖아, 누구도 나한테 명령하지 않아. 누구도 나한테 무슨 일을 하라고 하지 않아. 모든 일은 내가 나한테 하는 명령이고, 모든 결단은 내 머리와 입에서 나와야 해. 난 내 인생을 지배해야 해.”
인간은 자유를 바라지만, 자유를 감당하기 어려워한다.
방학을 맞은 학생, 취업 준비에 들어간 취준생, 재수를 결심하고 독학하는 재수생, 소설을 쓰는 작가, 일정을 스스로 조율하는 프리랜서 등.
다들 통제할 수 없는 자유를 손에 쥐고, 결국엔 나태와 게으름으로 시간을 보내곤 한다.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고 그걸 따르게 한단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사장도 그중 하나다. 원한다면 가장 바쁠 수도, 가장 한가할 수도 있는 사람이다.
“내 인생의 우선순위는 인간관계야. 너희한테 하는 아부가 아니야. 왜냐하면 그 첫 번째는 너희가 아니거든.”
홍규헌이 담담히 말했다.
“나는 사장으로서, 첫 번째 우선순위를 고객에게 둔다. 추상적인 인간관계, 불특정 다수와의 느슨하고도 강한 관계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거야.”
인간 홍규헌의 우선순위는 다를 것이다.
그건 그녀가 즐긴다는 음악이나 영화, 혹은 회사의 친밀한 동료들, 또는 가족일 수 있다.
그러나 사장인 홍규헌에게 가장 중요한 건 언제나 고객이다.
“그런데 고객이란 건 되게 두루뭉술한 개념이야. 고객이라고 뭉뚱그려 표현하더라도, 그들 개개인은 바라는 것과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과 표현하는 정도가 전부 다르거든.”
한구인이 공감을 표했다.
고객의 범위와 성질을 결정하는 건 언제나 경영학의 필수적인 분야였고, 또한 웬만해선 풀리지 않는 난제였다.
그걸 해내는 인간이 성공을 거머쥘 수 있다. 하지만 해내더라도, 그건 우연일 가능성이 높다.
한 명의 인간, 혹은 몇 명의 인간, 또는 수백 명의 인간. 고객이란 허상을 규명해내기 위해 모인 전문가들은, 수천만 명 수억 명에게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찾아야 한다.
인간이 할 수 있을 만한 일이 아니다.
그저 우연과 행운에 의지하여 조금씩 나아갈 뿐이다.
“소녀연맹이 무언가를 하면 기뻐하는 사람이 있어. 반대로 화내는 사람도 있고, 슬퍼하는 사람이나 행복해하는 사람이나 조롱하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어. 그들은 고객이면서 고객이 아닐 수 있고, 팬이면서 팬이 아닐 수 있어. 사람 정신 나가기 딱 좋은 상황이지. 그래서, 어느새부터인가, 술이 늘더라.”
홍규헌은 다시 테이블 아래로 손을 가져갔다. 배를 만져보는 것이다.
바디 프로필을 찍을 정도로 단련되었던 몸은 점점 사라지고, 술이 만든 지방이 서서히 붙기 시작했을 것이다.
여전히 그녀의 몸은 일반인보다 좋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 현상을 무너짐으로 판단할 것이다. 정신과 함께, 몸도 무뎌져 간다.
“볼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관념적인 관계. 명확한 형체조차 없는 게,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거라니…….”
홍규헌이 자조했다.
“고객이란 허상에게 행복을 주려면 어찌해야 하나. 어떡하면 그들 모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가. 난 도저히 답을 내릴 수가 없어. 이제 고작 30살을 넘었는걸. 그런데도 난 이상을 쫓았지. 내 선배들과 형제자매, 그리고 아버지의 말을 꼰대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면서. 그런데 지금 와선 그 말이 맞다고 느껴. 뭐냐면.”
모든 사람을 웃게 할 순 없다.
홍규헌의 아버지는 사업에 관해 이야기하며 그리 말했다. 그건 변하지 않는 진리라고 했다.
어린 홍규헌은 반감을 가졌다.
“난 다를 거라고. 모두를 웃게 할 수 있는 걸 만들고 싶다고. 그럼으로써 세상을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었어. 아니야. 그럴 순 없어.”
홍규헌이 프랑스 혁명이란 단어를 꺼냈다.
성필과 한구인은 그 비유가 김덕팔 부장으로부터 비롯했단 걸 알았다.
“혁명은 한순간에 모든 걸 해결하겠단 의지로 이뤄지지. 하지만 역사가 증명하듯, 모든 게 일순간 해결되는 기적 따위는 없어. 혁명 후, 프랑스가 진정한 민주주의를 얻기까지 150년이 넘게 걸렸어. 제정으로 복귀하고, 유산자들에게만 투표권이 주어지고, 남자들에게만 투표권이, 그리고 마침내 여자들에게까지, 보통 선거에 도달하기까지 무려 150년이 넘게…….”
인류는 천천히 나아간다.
시대가 바뀐다고 폐습이 전부 사라지지 않는다. 나라가 바뀐다고 악습이 전부 사라지지 않는다. 대통령이 바뀐다고 문제점이 전부 사라지지 않는다.
전부 사라지고, 전부 뒤바뀌는 일 따위는 없다.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혁명은, 그런 기적적인 결단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최대다수의 행복은 인간의 영역이지만 절대다수의 행복은 신의 영역이다.
“역사에 이름을 남긴 대단한 인간들도 그런데, 내가 뭐라고? 심지어, 내겐 하늘 같았던 아버지마저 안 된다고 했던 건데…….”
모든 사람을 웃게 할 순 없다.
그 명제를 향해, 홍규헌은 젊은이의 치기와 이상을 지니고 반대를 표했다.
자신은 다를 거라 굳게 믿었다.
“아버지가 말했어. 그건 결백의 유통기한이라고. 네가 더럽다고 외치는 사회를 향해, 자신은 결백하다고, 나는 깨끗하며 다르다고, 그리 주장할 수 있는 유통기한. 그 기한의 이름은 젊음이야. 나는, 이제 유통기한이 끝났어.”
더는 ‘나는 다르다’고 말할 수 없다.
애초에 결백한 인간이 존재할 수 없단 사실만을 뼈저리게 깨닫고, 사회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박 이사, 꿈이 뭐지?”
멍하니 있던 성필이 급히 답했다.
“최고의 아이돌을 프로듀싱하는 겁니다.”
“한 이사는 뭐였지?”
“이미 이뤘습니다. 음악 방송 그랜드슬램. 소녀연맹 분들과 회사 전원의 노고로 이룰 수 있었죠. 그리고 지금은, 박 이사님과 같습니다.”
“리카는?”
“최고의…….”
리카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 속에서 눈을 굴렸다. 그러다가 기운 없이 답했다.
“아이돌, 이요…….”
“나도 그래. 지금은 그래. 내 원래 꿈은 이미 이뤘거든.”
홍규헌이 리카를 향해 싱긋 미소 지었다.
“내가 반할 수 있는 아이돌. 지금은 최고를 꿈꿔.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나는 처음부터 이 꿈을 가지고 있던 거 같아. 단지 인정하기 무서웠던 거지. 안 이뤄졌을 때, 크게 절망할 테니까. 너희들 덕분이야, 고마워. 당당하게 ‘최고’가 내 꿈이라고 말할 수 있어서.”
그 말에, 리카는 울먹이기 시작했다.
성필도 피해 가지 못했다.
한구인은 고개를 내리깔았다.
“우린 정상에 오른다.”
가로 엔터의 가로는, 길을 더한다(加路)란 뜻이다.
홍규헌은 사람들이 행복으로 나아가는 길을 더하고 싶었다. 하나, 둘, 셋, 그렇게, 사람들이 행복으로 가는 길을 헤매지 않을 수 있게.
“멈출 순 없어.”
사업은 추운 세상이다.
뛰지 않고 걸으면 얼어 죽는다.
힘들어도 달려야 한다.
그리고 힘들어서 멈춘다면, 홍규헌을 죽이는 건 추위가 아닐 것이다. 포기를 택한 비참한 모습 자체가, 홍규헌을 죽일 것이다.
“그 길로 향하는 동안, 모든 명예는 소녀연맹에게. 그리고 모든 오명은.”
내가 짊어진다.
가로 엔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