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한는 프로듀서-583화 (583/760)

583화

김덕팔은 상당히 문학적인 수사를 사용했다. 소녀연맹의 팬덤 플랫폼 가입을 혁명이라고까지 표현하다니.

개인적으로 꽤 골몰한 표현이겠으나, 반응은 시원치 않았다.

‘다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거겠지.’

성필조차 그러했다. 그는 현재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 모범생처럼 각진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거의 아버지뻘인 인물이 프레젠테이션하고 있으니,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옛날처럼 편한 분위기를 낼 수 없었다.

게다가 그런 그에게 어찌 반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는 것도 어려웠다.

‘만약 이런 말을 한 게 경섭이었으면…….’

지금쯤 열렬한 토론이 벌어졌을 것이다.

왜 이미 기각된 사안을 가져왔지? 근거는 있나? 어디서 수집한 근거지? 만약 문제가 발생하면?

하지만 김덕팔을 상대로는 요원한 일이었다.

다들 조심스러웠다.

‘나이도 나이고…….’

이 순간은, 김덕팔이 입사 후 처음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자리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태클을 걸어버리면 그가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

김덕팔을 제외한 이들 모두 회사의 시작을 함께했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가족 같은 사이다.

그런 이들이 합심해서 1부터 10까지 반박하면, 김덕팔은 ‘여긴 진짜 가 족 같은 기업이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우스갯소리도 있으니…….’

삼국지의 서서가 위나라로 가버린 건 어머니가 인질로 잡혀서가 아니었다.

유비, 관우, 장비 이 세 사람의 가족 경영 형태를 버티지 못하고 대기업으로 도망간 것이다. 뒷일은 제갈량에게 짬 때려 버리고 말이다.

회사 내부의 끈끈한 유대감은 업무 효율을 높이는 동시에, 새로운 외부자에겐 마이너스 요소로 작용할 여지가 크다.

“그래서요?”

홍규헌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김덕팔이 위축될 것을 걱정했다. 그녀는 다른 이들을 대할 때 보이는 친근함을 배제한 채, 김덕팔을 향해 차분히 물었다.

“그 혁명으로 얻을 수 있는 건요?”

발표란 티키타카가 되어야 흥이 산다.

사장의 질문에 김덕팔은 아까보다 기운을 얻어 목소리를 높였다.

“저에게 해외사업부 부장이란 과분한 직책을 주신 사장님께 감사드리며. 저는 견마지로를 다하여 제 역할을 수행하려 합니다. 먼저, 해외사업 분야를 개척하는 데 가장 큰 문제는 자본과 인력입니다.”

“자본과 인력?”

“직설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저희는 해외 전체를 아우르는 서비스 시스템을 확립할 힘이 없습니다.”

그렇겠지.

가로 엔터가 소녀연맹으로 성공을 구가하고 있다고 하여도, 법적으로 중소기업에 불과하다.

“천천히 할 수는 있겠지요. 일본의 사례부터가 그러합니다. 웨벡스 사무소처럼 강력한 조력자를 찾아 파트너십을 체결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나라 하나하나 그런 과정을 밟아갈 순 있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많이 든다?”

“사실 시간은 부차적인 문제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관리할 인력이 모자랍니다. 충원한다 하여도, 저희가 모든 나라의 업무 상황을 파악하긴 요원한 일이지요. 돈도 쓰고, 사람도 쓰고, 예, 요컨대 비효율적입니다. 하지만.”

스크린에 다시 ‘위어스’의 마크가 떠올랐다.

“나라별로 조력자를 구축하고, 저희만의 판매로를 개척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방법이 있습니다.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플랫폼과의 협업입니다. 여길 봐주시겠습니까.”

스크린이 다른 사진을 띄웠다.

케이팝 관련 굿즈를 판매하는 베트남의 인터넷 쇼핑몰이었다. 그중엔 소녀연맹의 열쇠고리가 있었는데, 가격이 한국보다 더 비쌌다.

베트남의 물가를 고려하자면, 보통 사람은 거의 살 수 없을 지경이다.

“저희가 통제할 수 없는 판로를 거치게 되어서 벌어진 현상입니다. 누가 사겠습니까. 그렇다면 다른 곳의 사정은 어떨까요.”

또 다른 사진이 나타났다.

마찬가지로 베트남이었지만, 이번엔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글로벌 쇼핑몰이었다. 회사의 상표가 마치 사람이 웃는 모습인 것처럼 생긴 그곳이다.

그곳에서 소녀연맹 열쇠고리가 있었다.

“아, 다행히 이곳엔 한국과 거의 같은 가격에 팔고 있군요. 역시 세계적인 기업입니다.”

“뭐여. 우리 물건 저기 판 적 없는데.”

홍규헌은 너무 당황해서 자기도 모르게 말했다. 김덕팔이 빙긋 웃었다.

“개인적으로 구매하여 파는 사업자가 있는 듯합니다. 자, 볼까요.”

사진이 넘어갔다.

열쇠고리 판매 페이지로 넘어가니.

“안타깝게도, 구매가 불가능하군요.”

영어로 ‘베트남까지의 배는 사용 불가’라고 적혀 있었다.

상품으로 등록만 되어 있을 뿐이다.

온갖 걸 다 판다는 글로벌 플랫폼이지만, 이렇게나 사소한 물건은 취급하지 않는 듯했다.

“어쩌면 저희가 이 플랫폼에 직접 판매자로 등록하여 물건을 팔 수도 있겠지요. 만약 물량을 넣을 창고와 배를 구하기만 한다면요. 자, 이게 제가 인식한 문제점입니다. 사장님이 저에게 주신 일 중 하나는, 소녀연맹의 상품을 해외에 원활히 파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방법을 쓰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뿐더러 효율도 낮습니다. 괜히 팔았다가 불량품이라도 나온다면, 주요국도 아닌 곳에 보상을 제공하는 건 품과 돈이 많이 드는 일이지요.”

만약 그 업무를 원활하게 하려 인원을 충당하면, 해외사업부가 현재의 가로 엔터 인원을 뛰어넘을 수도 있다.

취급하는 상품이 소녀연맹 관련된 굿즈뿐인데 말이다. 물론 서비스 품질이 상급이라는 가정하에 그러하다. 어쨌거나 본말전도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바로 눈앞에 있습니다. ‘위어스’입니다.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팬덤 플랫폼이지요. 이곳에서는 굿즈를 팝니다. 사이트를 개설하고, 창고를 빌리고, 배를 띄워서, 저희 대신 물건을 팔아줍니다. 해외의 팬들도 편하겠지요. 인터넷의 바다를 뒤질 필요 없이, 이 어플과 사이트 하나만 있으면 소녀연맹의 공식 굿즈를 구할 수 있을 테니까요.”

“김 부장님.”

듣던 중, 손혜빈이 입을 열었다.

“‘위어스’에 입점해서 물건을 판다 해도, 그건 미국이나 일본 같은 케이팝 주요 소비국에 한정될 거예요. 그쪽에서 직접 저희한테 한 말이에요.”

아무리 글로벌 플랫폼을 지향한다고 하더라도, 갑자기 전 세계를 상대로 유통업과 소매업을 벌일 순 없는 노릇이다.

일단 수익성이 나는 국가에만 판매를 시작하는 게 옳고, ‘위어스’도 분명 그럴 것이다.

“그건 그것대로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일본과 미국, 그 외 주요국들에게 판매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다.

그때.

“직접요?”

김덕팔은 처음 듣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에 당황한 건 손혜빈이었다. 김덕팔이 이 자리에 ‘위어스’ 안건을 가져왔단 건, 이전의 회의록을 전부 읽어봤단 뜻일 텐데.

아니면 우연찮게 그 부분만 빼먹었나?

“네. ‘위어스’ 쪽에서, 직접 저희에게요.”

WTP의 소속사, 현재는 엔터 공룡이 된 그들에게서 먼저.

“제안이 왔어요. 입점하라고요. 그리고 덧붙인 말이, 현재 굿즈 판매를 제대로 행할 수 있는 나라는 한 손가락 안에 꼽을 거랬어요.”

거기에 더해, 그들은 가로 엔터 인수를 제안했다. 상식적인 가격을 훨씬 뛰어넘는 금액이었다.

그들은 어떻게든 케이팝 시장 지배력을 확보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소녀연맹의 입점을 제안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그렇군요. 그쪽에서 먼저. 그렇다면 더욱더 할 수밖에 없군요.”

“……네?”

“지금이 아니면, 지금과 같은 조건에서 다시 계약할 수 없을 테니까요. 모르시겠습니까? 지금은 그들이 저희에게 애원하는 처지입니다.”

‘위어스’에 들어와 주세요.

차라리 그건 애원에 가까웠다.

그럴 만하다. WTP의 소속사는 아이돌 기획사를 넘어서, 플랫폼 기업으로 도약하리란 야망을 품고 있다.

그들의 상대는 더 이상 아이돌이 아니다.

세계 유수의 SNS 기업과 한국의 포털 사이트, 어플들이다. 플랫폼 기업이 된단 건 그런 의미다.

즉, 그들의 목적은 ‘좋은 아이돌을 창조한다’를 뛰어넘었다. 소비자들의 시간을 점유하는 게 최종 목적이다.

게임을 할 시간에 아이돌을 보게 하고, 아이튜브에서 영상 찾아볼 시간에 자신들의 플랫폼을 즐기도록 만드는 것.

그러기 위해서, 그들은 최대한 많은 아이돌 그룹을 ‘위어스’로 끌어 들어야만 한다. 어떻게든 플랫폼 사용자와 사용 시간을 늘려야 하기에.

그들에게 소녀연맹의 팬덤은 군침이 도는 먹이였을 것이다.

“그들은 상장 후 1조가 넘는 자금을 손에 넣었습니다. 그걸 그대로 시장에 때려 부은 겁니다!”

수십 개의 아이돌 그룹과 십수 개의 회사를 손에 넣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팝스타들에게 돈을 먹여 ‘위어스’에 이름을 걸치도록 했다.

자본으로 행해지는 광기다.

기업의 제1목적은 생존이다. 그들은 현재 거대한 도박판 위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 상태에 들어갔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고, 시장 지배력을 확보하려 할 것이다.

“향후 몇 년간 잡음이 많을 겁니다. 하지만 이후 ‘위어스’가 안정되고 나면, 이젠 저희가 매달리는 처지가 될 겁니다. 지금과 같은 조건으로 절대, 절대로 똑같이 계약할 수 없습니다.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저희가 가장 유리한 지점이 바로 지금인 겁니다.”

손혜빈은 할 말을 잃었다.

김덕팔은 일부러 그녀의 물음을 모르는 척하고, 그대로 반박해냈다. 이런 식의 대화를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아까 한구인에게도 똑같이 했으니.

성필은 그의 화법과는 별개로, 그의 본능적인 감각에는 감탄했다.

‘그래, 지금이 아니면 절대 이 조건으로 계약 못 하지.’

미래엔 수수료를 얼마나 떼먹을지 모른다.

김덕팔의 말마따나, 지금은 그들이 가로 엔터에 애원하지만 훗날엔 가로 엔터가 애원하게 될 수도 있다.

‘사업적 판단이 상당히 저돌적이시네.’

현시점에선 누구도 저토록 확신을 가지고 ‘들어가자!’라고 못할 것이다.

‘위어스’는 소속사 아이돌을 우대할 게 확실한데, 굳이 다른 회사의 아이돌이 거기에 들어가서 뭐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로써 창출될 수익이 김덕팔의 예상처럼 클지 적을지도 모른다.

모든 회사가 ‘위어스’란 존재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지만, 망설이는 중이다.

하지만 성필은 안다.

‘몇 년 내에, 다른 그룹들도 결국엔 들어가.’

거의 모든 아이돌 팬덤이 집결한 플랫폼이다. 거기에 이름이 걸리는 것만으로도 홍보 효과가 생긴다.

굳이 비유를 들자면, 현재 존재하는 모든 아이돌 팬카페를 강제로 하나의 사이트로 합쳐버리는 것이다.

그 사이트에서 굿즈도 팔고, 독점 영상도 올라오고, 자체 예능도 만들고, SNS 서비스도 제공한다.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서비스 플랫폼이지.’

수많은 아티스트의 팬덤을 끌어모아 구축한 통합 커뮤니티. 이런 발상이 최초로 잉태된 게 한국이란 점은, 그다지 특이하진 않다.

팬덤 문화가 가장 다양하고 거대한 형태로 발달한 게 바로 케이팝 분야니까.

세상의 모든 영상을 모은다, 아이튜브.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를 모은다, 스타그래프.

그리고 이번엔 세상의 모든 팬을 모은다, 인류는 그런 발상에 도달한 것이다.

‘또, 새로운 플랫폼이 생겨나면 지배적 존재가 태어나기까지 시간이 걸려.’

스타그래프나 페이스룩이 자리 잡기 전까지 사멸했던 SNS가 몇 개던가. 아이튜브가 주도권을 쥐기 전에 죽어 나갔던 영상 플랫폼은 또 몇 개던가.

‘위어스’도 그런 꼴이 되지 말란 법은 없다. 그렇기에 김덕팔의 저돌성이 돋보인다.

일리가 있기도 하다.

다만 성필이 걱정하는 점은…….

“김 부장님.”

김덕팔의 독무대를 끝내려는 듯, 한구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반대 이유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제가 직접 말씀드리는 걸 바라시는 듯하니.”

김덕팔은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경청했다.

“일단 김 부장님은 팬이란 존재를 잘 이해하지 못하시는 듯합니다. 팬은 단순히 헤비한 소비자를 뜻하는 게 아닙니다. 돈을 많이 쓰는 사람을 일컫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소녀연맹을 진심으로 응원하시는 분들입니다. 그중에서도 소녀연맹의 팬클럽에 가입하신 분들은, 팬 중의 팬이라고 불릴 만합니다.”

팬카페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그들에겐 여러 혜택이 주어진다.

‘키트’라고 불리는 소녀연맹 굿즈 박스 증정.

콘서트 우선 예매권. 팬미팅 우대권.

팬카페에 올라오는 멤버들의 게시글이나 손편지를 관람할 수 있는 사소한 권리 또한 포함된다.

그런 만큼 그들은 소녀연맹의 가장 굳건한 지지자들이다.

매해 두 번 있는 아육금에 현수막을 지니고 응원하러 오거나, 음악 방송 출석률을 보장하고, 소녀연맹이 출연하는 방송에 커피차나 밥차를 보내어 스태프들에게 조공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들은 온갖 커뮤니티와 SNS에서 소녀연맹을 홍보한다. 그리고 소녀연맹 관련 루머와 악성 비방에 조직적으로 대응하기도 한다.

이는 가로 엔터가 요구하는 게 아니다. 그들이 자발적으로 하는 일이다.

한구인의 말마따나 그들은 팬 중의 팬이니까.

“‘위어스’에 입점한단 건 팬클럽 해체와 같은 뜻입니다.”

“정확히는 팬카페지요. 연 30,000원으로…….”

“예, 연 30,000원 가격의 ‘위어스’ 멤버십. 소녀연맹 팬덤을 위한 폐쇄적 커뮤니티. 이는 팬카페와 양립할 수 없습니다. 서로에 대한 역차별 논란이 발생할 테니까요.”

“더욱 평등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겠습니다.”

“모르시겠습니까? 저희는 가장 코어한 팬들을 적으로 돌리게 될 겁니다.”

소녀연맹이 바닥에 있을 시절부터 응원하고, 지지하고, 누구보다 소녀연맹의 성공을 바랐을 이들.

가로 엔터는 그들이 누리던 혜택을 30,000원 가격으로 모든 이에게 개방한다.

팬클럽에 가입한 이들은 허탈할 것이다. 이제까지 자신들이 해오던 헌신으로 얻어왔던 혜택이, 돈 몇만 원의 가치밖에 없었노라고 공인된 꼴이니.

“가장 강력한 안티는, 이전엔 팬이었던 이들입니다. 소녀연맹을 가장 잘 알기에, 소녀연맹을 가장 잘 상처입힐 수 있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을…… 팬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렇기에 팬인 겁니다. 기대치가 높은 만큼 실망도 큽니다. 선배님.”

한구인은 김덕팔을 선배님이라고 호칭했다.

“배우셨지 않습니까? 대중은 어린아이입니다. 소녀연맹은 장난감입니다. 즐겁게 가지고 놀더라도 언제든지 쉽게 질려 버릴 수 있습니다. 아니, 버리면 다행이지 불태우고 꼬챙이에 매달에 세상에 전시할 겁니다.”

“한 이사…….”

홍규헌은 한구인의 과격한 어투에 당황하여 그를 말리려고 했다.

한구인은 그녀를 보곤, 힘겹게 심호흡했다.

“사업은 성인을 상대로 하는 게 아닙니다. 어린아이를 상대하는 겁니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아이는 저희를, 판매자를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이해할 필요도 없고요. 그냥 상품을 사서 즐기면 끝입니다.”

“알지요, 압니다.”

김덕팔은 선선히 인정했다.

“하지만, 실망하고 떠나가는 이들보다 기뻐하며 몰려오는 이들이 더 많다면 해결되는 일 아닙니까. 대중이 어린아이라고요? 맞는 말씀입니다. 그 아이들이 얼마나 속상했겠습니까. 해외의 인민이들 말입니다.”

한국 인민이들은 팬카페에 가입해서 멤버들의 손편지와 직접 쓴 글들도 볼 수 있다더라.

우린 가질 수 없는 굿즈도 가질 수 있대.

우리는 한국에 발매하는 굿즈의 절반도 제 가격에 사지 못하고, 살 수 없는 경우도 허다한데.

아무리 케이팝이 한국의 문화라지만 이건 차별이 아닌가? 우리에게도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해줬으면 좋겠는데…….

“지금까지는 ‘좋겠는데’에 머물렀을 감상이, 이젠 완전히 뒤바뀔 겁니다.”

‘위어스’와 ‘코스모스’ 같은 플랫폼이 있는데, 왜 소녀연맹은 거기에 들어가지 않는 거지?

“차별로 느낄 겁니다. 다른 팬덤이 위와 같은 플랫폼에서 수혜를 누리는 걸 보면서, 더욱더 박탈감을 지니겠지요. 탈덕하는 이들도 있을 겁니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겠습니까?”

“구더기…….”

한구인이 흥분을 가라앉히려 주먹을 꾹 쥐었다.

“실망할 거란…… 말입니다……. 팬들이…… 소녀연맹에게…….”

누구보다 소녀연맹을 사랑했던 이들이, 소녀연맹을 미워할 수도 있다.

김덕팔은 그런 한구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연극톤으로 말했다.

“우리 프랑스 귀족은 고래(古來)의 특권을 조국의 재단에 바치고, 국민의회는 장엄히 선언한다. ‘봉건제를 폐지한다’.”

김덕팔이 빙긋 웃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국민의회의 선언입니다. 국가를 위한 희생이었지요. 한 이사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팬은 단순한 소비자가 아니지요. 소녀연맹의 성공을 누구보다 바라는 이들입니다. 그렇기에, 그 성공을 막고 그로 인해 소녀연맹을 미워한다면 팬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특권을 탐하던 프랑스의 귀족들을 애국자라고 부를 수 있었겠습니까? 프랑스가 귀족국가라면 물론 그들은 애국자이지요. 국가의 존재 이유가 귀족의 존립이니. 하지만 프랑스가 국민국가로 거듭난다면, 그들은 애국자가 아닙니다.”

다들 김덕팔의 비유를 이해했다.

그는 한국을 주요 소비국으로 한정했던 시절의 아이돌을 귀족국가에 비유했다. 그리고 팬클럽 제도는 그때의 유산이었다.

또한 그는 현재의 글로벌화된 케이팝 아이돌을 국민국가에 비유했다. 국민국가의 입장에서, 귀족제의 유산은 반드시 철폐해야 할 것이었다.

“예, 절대 아니지요. 그들은 절대 애국자가 아니지요. 그들은 프랑스를 좀먹던 수구 세력이었지요. 소녀연맹은 이 혁명을 거쳐, 이보다 더 멀리 나아갈 겁니다. 더 많은 인민이들의 지지를 등에 업고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장님?”

홍규헌은 답하지 않았다.

“최고의 아이돌이 되려면, 그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어봅시다.”

한구인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소녀연맹분들이 진정으로 그걸 원하시는지…….”

“한 이사님.”

성필이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한구인이 깜짝 놀라 그를 내려다보았다.

성필이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그건.”

“…….”

“사업적인 판단은 저희의 영역이에요. 팬이 욕하는 건 저희여야만 해요. 우리 애들한테 물어보는 순간부터, 그럴 수 없게 돼요.”

한구인은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홍규헌이 헛기침을 했다.

“오늘 바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야. 김 부장님이 하신 말씀은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논점이…… 후반엔 감정적으로 흘러갔네요.”

한구인을 제외한 임원들이 고개를 주억였다.

“사업이란 게 이런 거죠. 미래를 모르고 발을 내딛는 거. 의외로 ‘위어스’ 가입에 기존 팬들이 반발하지 않을 수도 있고요.”

성필은 내심 ‘아니다’라고 답했다.

전생에선 WTP마저 팬들의 민심 이반을 피하진 못했었다.

안티들과 오랜 세월 맞서 싸우고, WTP를 위해 미국 라디오 방송국에 노래를 틀어달라고 메일을 보내고, 온갖 홍보활동으로 ‘빌보드 소셜 톱 아티스트’ 자리에 앉힌 팬덤 아닌가. 심지어 세계적인 팝스타를 물리치고 말이다.

하지만 WTP는 결국엔 버텨냈다.

‘소녀연맹은 어떨까.’

해외 팬이, 소녀연맹에게 단단한 토양을 제공해주었던 국내 코어 팬층만큼 커다란 역할을 해줄 수 있을까.

KS 엔터의 팬덤에게 하루가 멀다고 얻어맞을 때, 독기를 품고 싸워주었던 게 바로 팬클럽을 중심으로 한 인민이들이다.

“하지만 한 이사 말처럼, 가장 애정 깊은 팬은 언제든지 가장 강한 안티가 될 수 있어요. 특히…….”

홍규헌은 성필을 보았다.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3의 주제가 ‘팬송(Fan Song)’이니까.”

팬을 향한 세레나데를 전하겠다고 선언한 장하양이다. 그런데 얼마 안 가 그런 팬들을, 그것도 가장 중심적인 팬들을 배신하게 된다면.

장하양의 노래에 진정성이 있을까?

아마 소녀연맹은 언론에 이런 입장을 발표해야 하리라.

‘회사의 선택이 우리의 선택입니다, 라고.’

소녀연맹이 ‘아닌데? 우린 회사랑 의견이 다른데?’라곤 할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그녀들의 어깨에 가로 엔터 수십 명의 직원들, 그리고 후배들의 미래가 걸려 있다. 또한 가로 엔터는 그녀들의 집인 동시에 가족이다.

성필은 미래를 안다.

하지만 그게 무조건 옳은 결단을 내릴 수 있단 뜻은 아니다.

미래에 발생할 사건들을 종합해보아도, 소녀연맹이 처한 상황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으니까.

게다가 이번 경우는 훨씬 더 어렵다.

‘일장일단이 존재하는 선택이란 거.’

김덕팔의 말을 따른다면 하나의 이득과 하나의 손실이 있다.

한구인의 주장을 따른다 해도 하나의 이득과 하나의 손실이 있다.

어느 쪽의 손해가 더 클지는 직접 겪지 않곤 모른다. 결과적으로 보면, 성필은 두 가지 모두 선택하고서 후회하는 미래를 볼 수도 있다.

성필은 최선을 보는 게 아니라, 후회를 보는 것이니까.

혹은 둘 다 후회하는 미래를 안 볼 수도 있다. 각자를 선택함으로써 얻는 이득에 만족하는 경우다. 아니면, 두 선택으로 발생하는 단점을 결국엔 극복하게 됐거나.

‘위어스 입점을 기각한 순간에 후회할 미래를 보진 않았다.’

그렇다고 입점을 결정하더라도 후회할 것 같진 않다. 입점할 때 발생할 이익은 성필에게도 달콤하게 다가왔으니.

그럼에도 성필이 이 제안을 반대했던 건…….

‘미래를 봐서가 아니라, 과거를 봐서.’

과거의 그룹들이 몰락한 이유 중 하나.

유의미한 팬덤을 얻은 후, 급격히 상업화에 들어가는 것. 이는 팬들의 실망을 유발하여 장기적으로 그룹을 몰락하게 만들기도 했다.

물론 반례도 존재하지만, 아무래도 인간은 리스크를 더 크게 느끼는 법이다.

‘이제 소녀연맹은 4년 차.’

성필은 사업적인 도박을 감행하길 바라진 않았다. 이왕이면 안전하게, 보수적으로 나아가는 편이 끌린다.

소녀연맹의 목표는 그저그런 그룹으로써 그저그런 수익을 올리는 게 아니다.

최고의 아이돌이 되는 것이다.

한 번의 실수도 그 꿈에 치명상을 가할 수 있다.

“이미 결정한 사안이지만, 김 부장님의 말씀은 일리가 있어요. 소녀연맹의 해외 수입을 증대하는 데 글로벌 플랫폼 가입은 주요한 방도로 작용하겠죠. 하지만 바로 결정을 내릴 순 없어요.”

홍규헌은 다른 임원들을 둘러보았다.

“일주일 후야. 다들 이 사안에 대해 다시 고민해보고, 일주일 후에 다시 이야기해보자. 프레젠테이션을 하든, 감상을 말하든, 보고서를 내든, 어떤 방법이든 좋아. 그리고 김 부장님.”

“예, 사장님.”

“일단 제가 궁금한 건, ‘코스모스’도 있는데 왜 ‘위어스’여야 하냐는 거예요.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이 자료엔 없어서. 일주일 후까지, 정리해서 올릴 수 있겠어요?”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홍규헌이 손뼉을 쳤다.

“일주일 후에, 이 문제로는 모두 준비가 끝났을 때 다시 모입시다. 해산.”

* * *

성필은 회의가 끝나고 잠시 1층을 서성였다. 홍규헌이 따로 그를 불렀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손목시계를 확인한 성필은 계단을 올라 2층으로 향했다.

가던 도중 김덕팔이 보였다. 그는 휴게실 앞의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손을…….’

김덕팔은 식은땀을 흘리며 손을 떨었다. 난간에 둔 그의 손이 애처롭게 흔들렸다.

‘긴장을 많이 하셨었구나.’

그럴 것이다.

그는 굳건했던 가로 엔터에 균열을 내려던 거나 마찬가지니까. 아무리 부장급 신입이라 해도 굉장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자칫하면 자신의 목이 위험했을 테니.

그는 몇 주간 가로 엔터를 파악했다. 당연히 임원들 사이의 끈끈한 정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그런 이들이 낸 협의를, 김덕팔은 부수려 했다. 모두의 미움이나 반박을 받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부딪치신 건가…….’

적어도 보신만 꾀하는 인간이 아니란 건 알겠다. 퇴직하고 노후 자금을 더 쌓으려고 가로 엔터에 들어왔다, 는 건 확실히 아니다.

그는 자신의 업무에 진심으로 임한다. 설령 본인의 위치가 위태로워지더라도, 자신이 택한 믿음을 실천한다.

성필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사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어, 박 이사. 편한 데 앉아.”

“앉으라고 해도 사장님 앞밖에 없잖아요.”

성필은 그녀의 책상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홍규헌은 멍한 눈길로 담배를 태우는 중이었다.

“어떤 용무로 부르셨어요?”

그리 물었지만, 예상은 간다.

홍규헌은 총괄 프로듀서로서 성필의 의견을 듣고 싶은 것이다. 이전에 들었지만, 그 의견을 재확인하길 바랐겠지.

성필은 자기도 모르게 쓴웃음을 머금었다.

‘여러모로 김덕팔 부장님께는 불리한 판이네.’

홍규헌은 중요한 사안을 판단할 때, 김덕팔보다는 다른 이들의 의견을 신뢰할 가능성이 높으니.

지금 이 순간만 보아도 그러하다.

그녀는 굳이 공적인 자리가 아니더라도, 다른 이들을 불러 이야기를 들으려 한다. 다른 임원들도 이렇듯 홍규헌을 자유롭게 찾을 수 있다.

즉, 김덕팔에겐 사적인 정치력이 없다. 회사에 들어온 지 고작 몇 주밖에 안 됐으니 당연한 일이다.

“오랜만에 창립 멤버들끼리 자리 한 번 가져볼까 싶어서.”

“……네?”

“술 마셨으면 해서.”

성필은 고민했다.

홍규헌이 성필, 한구인과의 친분을 드러내어 김덕팔의 기를 꺾으려는 건가?

셋이 따로 모인다면 소문이 퍼져나갈 것이다. 김덕팔은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움츠러들 게 분명하다.

안쓰럽게 손을 떨던 김덕팔의 모습이 뇌리를 스친다.

“일 얘기는 안 해. 다만, 내 마음을 확인하고 싶어서.”

“마음이요? 저랑 한 이사님을 동시에 앉혀두고, 마음을 확인하고 싶으시다고요?”

“날 드라마 여주인공으로 만들지 마. 어때, 오늘 시간 있어?”

성필은 권강철 트레이너와 나눈 문자를 확인했다.

[회원님. 오늘 오후 8시에 수업 있으십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십쇼^^.]

바로 답장을 보냈다.

[오늘 PT 취소해주실 수 있으실까요?]

바로 답장이 왔다.

[으하하하하하하하!]

무서운 답장이다.

“네, 있어요. 굳이 물어보실 필요 없는데. 사장님께는 언제든지 제 시간을 드릴 수 있어요.”

“아부가 늘었네.”

홍규헌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곤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그럼 오늘 일 끝내고 우리 집으로 와.”

“저랑 한 이사님을 집으로…….”

“그만해.”

“하잇(넵).”

* * *

성필은 차를 몰고 홍규헌의 집으로 향했다.

“제가 어제 쓴 가사예요! 들어보세요!”

조수석엔 리카가 있었다.

“너와 함께라면 우주의 진리도 필요 없어! 네가 나의 진리니까! 네 앞에서 말라버린 마음을 쥐어짜서 외쳐볼래! 네가 물감이라면 난 캔버스가 되고 싶어!”

“팬송이 아니라 그냥 사랑 노래잖아.”

놀랍게도, 홍규헌이 언급한 창립 멤버엔 리카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리카가 가로 엔터에 들어온 날에 네 명이서 회식하러 가기도 했었지.

“그리고 가사가 좀 그래.”

“어떤 부분이 말인가요!”

“음, 글쎄.”

“빨리 말해주세요! 어서요!”

리카의 목소리엔 장난기가 짙게 배어 있었다.

이 녀석, 알고 하는 말이다.

“물감과 캔버스는 성적 은유로 해석될 여지가 있잖아. 아니, 네가 의도한 거니까 해석될 여지가 아니라 그게 정설이지.”

“에에, 이사님 사고방식이 너무 음흉해요!”

“응 네가 더 음흉해.”

“아타시(저)는 순수하다구요! 그런 엣찌(음란)한 해석은 감히 떠올릴 수도 없어요! 에리쨩이라면 몰라도요!”

“음, 에리카 씨라…….”

“요즘도 에리쨩이랑 연락하나요!”

“가끔. 최근엔 ‘IWY’ 좋았다…… 정도? 그리고 올해의 프로듀서상 못 받아서 슬프겠다고 위로해주시더라.”

“그건 위로가 아니라 인성질이에요! 자기 프로듀서는 올해의 총괄 프로듀서인데, 라이벌인 박 이사님은 아무런 상도 못 받았으니까요!”

“리카,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그렇게 생각하기 싫은 거 아니신가요!”

맞다.

에리카가 그렇게 음흉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성필은 1초도 더 맨정신으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사장님이 웬일이실까요?”

“글쎄다.”

성필은 이유를 알지만, 리카에게 말해줄 순 없다. 홍규헌의 심란한 심정을 표현하자면, 오늘 있던 회의까지 이야기가 흘러갈 테니.

홍규헌의 아파트 앞에 도착하여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복도부터가 굉장히 넓어서, 성필은 새삼 자신의 집과 비교하게 됐다.

언젠가 이런 집에 살 수 있을까.

“사장님이 부러우신가요!”

“뭐, 안 그렇다고 하면 거짓말이지. 언젠가 이런 데 살 수 있을까.”

리카는 ‘으음’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살게 되실 거예요!”

성필은 픽 웃었다.

그래, 소녀연맹의 최고의 아이돌이 되면 성필에게도 그런 기회가 올 수도 있겠지.

리카가 ‘살게 되실 거예요’라며 확정적으로 말한 건, 최고가 되겠다는 결심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하나부터 열까지 너무 기특하다.

“들어갈까.”

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십수 초 후, 문이 열렸다.

“박 이사, 리카, 왔어?”

앞치마를 두른 홍규헌이 나왔다.

“오.”

성필이 작게 감탄했다.

“사장님한테 무슨 무례인가요!”

리카가 그의 옆구리를 쳤다.

“오셨습니까?”

그 뒤로 앞치마를 두른 한구인이 나왔다.

“오.”

리카가 작게 감탄했다.

성필도 그녀의 옆구리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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