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2화
성필은 회의실로 들어왔다.
U자형 탁자엔 벌써 소녀연맹 멤버 전원이 모여 있었다. 성필은 가장 상석으로 가서 멤버들의 면면을 쭉 훑어보았다.
그러곤 인자한 미소를 띠었다.
“오랜만이다, 얘들아.”
“이틀밖에 안 지났는데요!”
“야, 리카, 받아주지 마.”
조아라가 리카를 제지했다.
“아저씨 저러다가 ‘난 하루라도 너희랑 떨어지는 게 싫거든. 단 하루라도 내겐 오랜 기다림일 테니까’ 같은 말 한다고.”
“소나노(그런 거야)?”
리카는 성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성필은 아까와 같은 미소를 품은 채로, 손에 든 서류를 부자연스럽게 갈무리했다.
“‘우리들의 프로듀싱’ 회의 시작할까?”
“봐봐, 진짜 그러려고 했다니까.”
멤버들 사이로 옅은 웃음이 퍼졌다.
성필은 부자연스럽게 웃었다. 확실히 4년 넘게 얼굴을 맞대고 지내다 보니 마음이 전부 읽힌다.
“일단…….”
“팀장님, 회의 들어가기 전에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요.”
“어, 아름아. 뭔데?”
“저희 신사옥으로 옮긴단 거요.”
멤버들도 궁금했는지 성필에게 집중했다.
가로 엔터가 신사옥으로 옮겨야 한단 이야기는 옛날부터 나왔던 이야기다.
가로 엔터는 3.5년 주기로 그룹 하나씩 내놓는, 그런 평범한 기획사 사이클을 굴리는 게 목적이 아니니까.
몇 년 후 지금보다 훨씬 큰 기획사로 거듭날 것이다. 그룹 두세 개라면 어찌저찌 현재 건물로 충분하지만…….
‘효민이랑 웨이퍼센트, 그리고 추가될 다른 그룹들까지 고려하면…….’
현재 건물로는 부족함이 있다. 그래서 아예 커다란 빌딩으로 옮기자는 제안이 나왔던 것이다.
신사옥은 예로부터 가로 엔터의 꿈이기도 했다.
하지만.
“아마 아닐 가능성이 높아. 지금 상황에선 낭비니까. 아마 새 동료들이 생기면, 작은 건물을 사거나 빌딩 한두 층을 빌려서 따로 지내게 될 거야. 아니면, 여길 거점으로 삼지만 연습실만 따로 빌려서 거길 쓰거나.”
소녀연맹은 2층을 쓴다.
현재 남자 연습생들은 3층을 쓰고, 올해 보이그룹이 데뷔하면 그대로 3층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우효민 혼자라면 2층을 공유해서 써도 되겠지만, 웨이퍼센트는 인원이 너무 많다.
‘3층에 구겨 넣자면, 우리 차기 그룹이랑 돌아가면서 쓸 수도 있겠지.’
그렇지만 그룹 하나에 연습실 하나씩은 너무 부족하다. 멤버 개인 트레이닝이나 개별 연습을 할 공간도 필요하니까.
2층과 3층의 연습실을 돌아가면서 쓴다면, 결국엔 피해를 보는 그룹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러니 건물을 나눠서 지내는 쪽이 효율적이다. 아예 큰 빌딩을 사지 않는 이상에야.
“에에…….”
리카가 눈에 띄게 실망했다.
그렇겠지. 가로 엔터의 임원들에게 신사옥이 꿈인 만큼, 멤버들도 달라진 가로 엔터를 바라고 있을…….
“드디어 박 이사님한테 반말할 수 있나 했는데…….”
성필이 눈을 꿈뻑였다.
“반말? 나한테?”
“에엑?! 잊어버리신 건가요!”
“아하하.”
장하양이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는 성필과 여러 약속을 했었는데, 성필은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했다. 전부 다 장하양이나 다른 멤버들이 말을 꺼내고서야 기억해냈었다.
예를 들어 장하양과 놀이공원에 간다거나, 그녀를 목말 태우고 가로 엔터 한 바퀴 돌기라거나.
성필은 리카와 했던 약속마저 잊어버렸다.
“히도이(너무해)! 이사님은 사랑스러운 아타시(저)와 한 약속이 가볍나요! 이건 계약 사기예요! 제가 일본에서 떼돈 벌 기회까지 버리고 이사님을 따라 한국으로 왔는데, 취급이 겨우 이 정도인가요!”
“왜, 왜 그래. 내가 무슨 약속을 했어……?”
“가로 엔터가 신사옥으로 이전하면 ‘성필이’라고 부르게 해주겠다고 하셨어요! 또 저만 진심이었나요!”
“어, 너만 진심이었어. 설령 가로 엔터 신사옥으로 옮겨도 네가 나를 성필이라고 부를 날은 없어.”
“손나(그런)!”
진짜 계약 사기였다.
리카가 머리끈을 질끈 동여매는 제스처를 취했다.
“아타시(저), 재계약 거부합니다!”
“그래, 오늘 회의는…….”
“붙잡지도 않는다고?!”
“시즌3의 메인 프로듀서인 하양이가, 너희에게 요청할 게 있어서야.”
멤버들이 장하양을 보았다.
장하양은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이어지는 시선을 견디다 못해 아하하 웃었다. 그리고 성필에게 고갯짓했다.
“이사님이 말씀해주실 거예요.”
“하양이가 너희한테 요청할 건…….”
멤버들은 긴장했다.
백설하의 프로듀싱 때는 멤버 전원이 수준급의 보컬 실력을 갖춰야만 했다.
‘애플 크러쉬’는 댄스가 어렵진 않으나, 보컬 퍼포먼스가 매우 힘들어 무대에서 하기 부담될 수준이다.
조아라의 프로듀싱 때는 멤버 전원이 수준급의 댄스 실력을 갖춰야만 했다.
곧 봄 축제 시즌이 될 것이다. 멤버들은 ‘오토마타’로 행사를 돌 생각에 벌써부터 머리가 핑 돌았다.
그리고 드디어 장하양의 차례다.
그녀가 멤버들에게 요구할 건 무엇일까? 수준급의 외모? 그렇다면 성형을 해야 할까?
“작사야.”
“아…….”
백설하는 이해한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장하양의 특기는 랩과 작사다. 그중 하나를 멤버들에게 요구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다들 들었다시피 이번 타이틀 주제는 ‘팬송(Fan Song)’이거든. 너희들이 연맹을 지지해주는 인민들에게 품었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줬으면 해.”
“아저씨 되게 정치적인 발언한 거 같은데.”
“근데 팀장님.”
신아름이 우려를 표했다.
“설하 쌤은 작사 배우고, 하양 언니는 작사 여러 번 해봤잖아요. 근데 우리는 경험이 없지 않아요? 그런데 작사를 할 수 있어요?”
“음.”
작사는 아이돌이 프로듀싱에 참여할 때 가장 먼저 손을 대는 영역이다. 그만큼 진입 장벽이 낮다.
하지만 그게 절대로 쉽단 뜻은 아니다.
멜로디는 곡의 얼굴이고 가사는 곡의 영혼이다. 그 영혼을 새기는 작업이 쉬울 리 없다.
설령 의미 없어 보이는 가사라도, 거기엔 작사가의 고민과 노력이 짙게 밴다.
“이번엔 단체로 작사 배워요?”
“아니, 다행스럽게도 도와주실 분이 계시거든. 들어와주세요!”
회의실 문이 열리고 익숙한 얼굴이 나타났다.
“앗!”
리카가 그녀를 곧바로 알아보았다.
소녀연맹과 오랫동안 합을 맞춰온 작사가인 이수연이었다. 그녀는 멤버들에게 허리를 꾸벅꾸벅 숙이면서, 어쩐지 주눅 든 태도로 성필의 곁에 섰다.
“얘들아 안…….”
“지음 오빠 여자친구!”
리카가 이수연 작사가의 정체를 밝혔다.
그렇다. 이수연과 정지음은 오랜 기간의 탐색전을 끝내고 마침내 사귀게 되었다.
참으로 긴 시간이었다. 거의 4년이나 이어진 탐색전이었으니 말이다.
아마 둘의 이야기를 로맨스 코미디로 엮어도 꽤 재미있을 것이다. 로맨스 코미디의 미덕은, 서로에게 호감을 느끼면서도 엇갈리는 남녀의 마음이잖은가.
“…….”
이수연은 ‘지음 오빠 여자친구!’ 발언에 일순 당황하더니.
“헤헤.”
기분 좋게 웃었다.
골방에 박혀 작사만 한지 수년간. 그녀는 마침내 연애를 시작했다. 기분이 좋았다.
연애 세포가 거의 다 죽어버린 상황에서 사랑을 가사로 쓰는 게 얼마나 고역이었던가.
이젠 그럴 필요가 없다.
그녀의 능력은 이제 정점에 올랐다. 정지음과의 연애가 그녀를 완성시켰다.
성필이 사족을 붙였다.
“참고로, 지인 찬스 아니야. 지음이 애인분이라고 일감 몰아주기 한 거 전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해.”
“누가 뭐래요?”
아무도 오해 안 한다.
이수연은 ‘아니’부터 시작해서 ‘아라베스크’, 거기에 소녀연맹의 거의 모든 메인 곡 작사를 맡아왔으니까.
“얘들아 잘 부탁해. 막히는 부분 있으면 언제든지 나한테 연락해. 참고로 내 비장의 작사법을 담은…….”
이수연이 가방에서 책을 한 권 꺼냈다.
“책을 냈거든? 필요하면…….”
“주시는 건가요!”
“매장에서 사서 봐도 도움이 될 거야.”
“…….”
“어차피 권당 나한테 천몇백 원밖에 안 들어와……. 이건 이왕 들고 왔으니까 선물로 줄게. 갖고 싶은 사람?”
아무도 손을 안 들었다.
이수연 작사가의 입술이 당장이라도 울음을 토해낼 듯 바들바들 떨려왔다.
장하양이 손을 들었다.
“아, 하양아! 가질래?”
“감사합니다.”
장하양이 책을 받아 테이블 앞에 두었다.
책의 표지엔 이수연 작사가의 사진이 있었다. 거의 화보다.
“그리고 또.”
책 증정이 끝나고, 성필이 설명을 이었다.
“너희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이벤트를 준비했어. 이벤트라고 할까, 자체 예능 영상에 가깝긴 하겠다.”
가로 엔터가 준비한 이벤트란 건, 바로 팬과의 간접적인 만남이었다.
“면담 형식으로 팬분들을 초대해서 ‘당신에게 소녀연맹이란 무엇입니까?’ 같은 질문들을 할 거야. 그 있잖아, 면담 설문 같은 거.”
형식은 이러하다.
가로 엔터와 전혀 상관없는 응접 공간으로 팬을 부른다. 그리고 사회학에서의 면담조사법처럼 소녀연맹에 관한 여러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너희의 감성을 충만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 그걸 너희는 다른 방에서 카메라로 지켜보고 있는 거지.”
“그리고 면담이 끝나면 저희가 짜잔 등장하는 건가요?”
“음, 그것도 나쁘진 않겠다. 그건 또 따로 이야기해볼게.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니야. 팬뿐만 아니라, 대중들과의 면담 기회도 가져볼 거거든.”
“대중?”
말 그대로, 대중이란 이름에 걸맞도록 무작위 표본을 골라 면담할 것이다.
“너희를 모르거나, 알더라도 팬은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겠지. 그래서 질문은 ‘당신에게 아이돌이란?’ 같은 종류가 될 거야.”
대중과 팬의 면담을 비교하다 보면, 소녀연맹 멤버들은 팬이란 존재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대중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알게 될 테고 말이다.
뮤지션들에게 대중이란 이름은 때때로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처럼 느껴지곤 한다. 하지만 같은 대중이란 타이틀을 달고 있더라도, 사람마다 생각의 범위가 다르다.
성필은 멤버들이 그걸 알아줬으면 한다.
가끔 연예인 중에는, 악플러들에게 시달리다가 대중 그 자체를 혐오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다’라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보다, 뭉뚱그려 팬을 제외한 전체를 적으로 생각하는 쪽이 훨씬 편하니까.
굳이 사람들을 이해하려 노력하느라 힘 빼지 않는, 어찌 보면 현명한 정신상태다. 그렇지만 그게 옳으냐고 물으면, 옳진 않다.
‘원래 옳은 길로 가는 건 노력이 필요해.’
성필은 멤버들이 아이돌 활동을 그만두더라도, 대중에 대한 막연한 혐오를 가지고 일반인으로 돌아가길 바라지 않았다.
“너희는 각자의 방법으로 인민이들과 보통 사람들의 차이를 이해하게 될 거야. 그게 가사를 쓰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아닐 수도 있겠지. 그래도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해. 덤으로 자체 예능 영상도 뽑고. 자, 그럼 질문은?”
신아름이 손을 들었다.
“어, 아름이.”
“작사가님 지음 오빠랑 연애 얘기 해줄 수 있으세요?”
이수연은 당황했다. 그러곤 성필을 힐끔거렸다.
“팀장님, 잠시만 나가주세요.”
“뭐?”
멤버들은 빛나는 눈으로 성필에게 눈총을 주었다. 다들 이수연과 정지음의 달콤쌉싸름한 로맨스 스토리를 듣고 싶은 것이다.
아무래도 다른 질문은 없는 모양이다.
“…….”
성필은 씁쓸히 회의실을 나섰다. 그리고 꽉 닫힌 회의실 문을 바라보았다.
‘나도 듣고 싶었는데…….’
* * *
해외사업부 부장 김덕팔.
그는 입사한 후 몇 주간 회사 내부를 파악하는 데만 시간을 보냈다. 그는 출근하면 책상에 앉아 다른 부서로부터 넘겨받은 서류를 읽기만 했다.
덕분에 권아인 경리를 볼멘소리를 냈다.
“그냥 파일을 받아서 모니터로 읽어도 되지 않나요……?”
김덕팔은 수백 페이지 분량의 서류를 전부 프린트했다.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고선 잘 읽히지 않는단 모양이다.
가로 엔터는 한구인의 주장에 힘입어 모든 작업과 연락을 전산화해왔다. 그 때문에 종이와 잉크 사용량이 극도로 낮았다. 그 말은 종이와 잉크 비축분이 적단 뜻이었다.
그런데 그게 순식간에 동났다. 권아인은 오랜만에 A4 용지와 잉크 발주를 넣었다.
아낄 수 있는 비용을 추가로 지출하게 된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사소한 비용 하나하나에도 집착하는 상사, 한구인을 닮아가는 그녀였다.
“주간 회의 시작…….”
변화는 천천히 일어났다.
주간 회의의 시작을 선언한 홍규헌은 김덕팔의 눈치를 살피더니.
“……시작하겠습니다.”
존댓말을 사용했다.
김덕팔은 회의 중 별다른 발언을 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이 노트북이나 스마트 패드를 보고 있을 때, 그는 미리 인쇄한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김덕팔은 가끔 질문을 던졌다.
“이 ‘인터내셔널 연맹 대회’란 건 무엇이지요……?”
“소녀연맹 팬미팅이요. 콘서트형 팬미팅이랑 구별해서 쓰는 용어예요.”
“인터내셔널…….”
그는 금세 용어를 잊어버린 듯, 서류에 코를 박을 듯 얼굴을 책상 가까이 붙였다.
시력이 많이 안 좋은 듯했다.
“인터내셔널 연맹 대회가요? 아, 네. 알겠습니다.”
“…….”
김덕팔은 아이돌 업계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
그의 적응은 단순히 가로 엔터에 적응하는 게 아니었다. 이 업계를 파악하는 기간도 포함됐다.
회의가 끝나고, 성필과 한구인은 1층 휴게 공간에서 김덕팔에 관해 담소를 나누었다.
성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벌써 시간이 꽤 지났는데, 김 부장님은 아직도 업계 파악에만 골몰하시네요. 언제쯤 끝나실까요?”
김덕팔과 가장 가까운 이는 한구인이었다. 둘 사이엔 가로 엔터의 학벌 카르텔이란 이름까지 붙어 있었으니까.
“부서 인원 충원 같은 요청도 안 주시고요.”
“…….”
한구인은 답할 거리가 마땅하지 않았다. 괜히 김덕팔에게 압박감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일부러 ‘언제쯤 일을 시작하실 겁니까?’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때가 되면 어련히 시작하겠지 싶었다.
하지만 그 ‘때’라는 게, 쉽사리 오지 않았다.
다들 김덕팔이 가지는 적응 기간을 이해했다. 하지만 모두 이런 아쉬움을 품었다.
‘적어도 이 업계에 대한 지식이 있는 사람이었다면…….’
그랬으면, 진즉 해외사업부는 인원을 충원하여 본격적으로 기동했을지도 모른다.
가로 엔터는 아직 작은 회사다.
아이돌 업계에 관한 지식만 있다면, 업무 파악에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는다.
“제가, 오늘 한 번 대화를 나눠보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김덕팔을 영입하는 데 가장 열정적이었던 사람이 바로 한구인이다. 김덕팔이 그럴듯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입지가 위험해지는 건 한구인이다.
한구인은 김덕팔을 찾아 나섰다.
김덕팔은 2층 복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손에는 서류 한 장을 쥔 채였다.
“아, 한 이사님.”
김덕팔이 천천히 한구인에게로 다가왔다.
정말 느렸다.
그는 계단을 내려갈 때도 거의 2초에 한 계단을 내려간다. 걷는 것도 그만큼이나 느렸다.
한구인은 최대한 빨리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팬 매니지먼트팀이…….”
김덕팔이 들고 있는 건 가로 엔터의 건물 내부 구조도였다.
아직도 회사 구조를 완벽히 외우지 못한 것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몇 번 돌아다니는 것으로 충분했을 텐데, 그는 지도까지 가지고 다닌다.
한구인은 심장이 철렁했다.
‘노령으로 지적 능력이 감퇴하신 건가?’
괜히 회사들이 정년을 잡아두는 게 아닐 것이다. 혹시 김덕팔이 이전의 회사에서 권고사직을 당한 건, 나이 때문이라기보다 나이 때문에 감퇴한 능력 때문일까?
“그, 어느 쪽이지요?”
“……저쪽입니다.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한구인은 그와 함께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가던 도중, 한구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팬 매니지먼트팀은 왜 찾으십니까?”
“서류로는 알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팀만 유독 어떤 활동을 하는지 파악하기 어렵더군요. 저장된 내용은 계획서나 임시 보고서가 전부라서요.”
“부서가 그리 체계적인 곳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팬의 욕망과 반응을 분석하고 관리하는 곳입니다.”
“그건…… 아주 중요한 일 아닙니까?”
한구인은 자신의 설명이 부족했음을 깨달았다.
“아,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그렇단 뜻입니다. 고객 니즈 파악은 팬 매니지먼트팀이 아니라 프로듀싱 파트에서 이뤄지니까요.”
“그럼 이 팀은…….”
“고객 관리…….”
한구인은 설명하기 힘들었다.
팬 매니지먼트 팀은 너무나 당연하게 존재해온 곳이었다. 그들의 주요 업무를 설명하자면, 인민이들의 반응을 살피는 것이었다.
그 반응을 토대로 프로듀싱, 매니지먼트 파트가 기획한 이벤트나 일정을 검토하기도 한다. 이른바 팬의 마음에 가장 가까운 부서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정확하게 ‘이게 그들의 업무다’라고 하긴 힘들었다.
“하하.”
김덕팔은 인자하게 웃었다.
“제가 가서 직접 여쭈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발걸음하는 거니까요.”
“죄송합니다.”
“죄송하긴요. 원래 회사엔 그런 부서들이 있잖습니까. 이름만 보곤 뭐 하는지 모를 부서들 말입니다. 설명을 들어도 ‘일을 하는 것 같긴 한데, 정확히 어떤 업무를 담당하지?’ 같은 곳도 있고요.”
김덕팔은 팬 매니지먼트 팀원들이 속한 사무실 앞에 도착하곤, 한구인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였다.
한구인도 그렇게 했다.
김덕팔이 사무실 안쪽으로 들어가고, 한구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못 여쭤봤군.’
한구인은 사무실 앞에서 잠시 기다렸다.
김덕팔은 금방 나왔다. 그는 한구인이 기다리는 것을 보곤 놀란 티를 냈다.
“한 이사님?”
“음, 김 부장님. 여쭈고 싶은 게 있어서 기다렸습니다. 업무 파악이 언제쯤 끝나실까요?”
김덕팔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더니,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인자한 미소를 띠었다.
“안 그래도, 조만간 사장님께 제언하고픈 게 있습니다.”
“정말입니까? 어떤 겁니까? 제가 도와드릴 게 있겠습니까?”
“아직은 구상 단계라서 무어라 표현하기 힘들군요. 더 조사해 봐야겠지요. 하지만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빠르면 며칠 안에 말씀드릴 수 있을 겁니다.”
김덕팔이 허허 웃었다.
“도와드리겠다고 하신 말씀은 기쁩니다만, 한 이사님은 저와 업무 영역이 아예 다르지 않습니까. 도움받는 건 아무래도 염치가 없군요.”
“아닙니다. 필요하시면 편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예, 그러겠습니다. 항상 감사드립니다.”
얼마 안 가 김덕팔이 업무 파악을 끝낼 거라고 하니, 한구인은 안심했다.
사장 홍규헌에게 할 제언이란 건 해외사업부의 맨파워 충원일 것이다.
‘과연 몇 명이나 필요할까?’
아예 신입들만 받을 순 없을 것이다.
다른 부서에서 한두 명을 받아야, 신입을 고용하더라도 업무 혼란이 덜할 것이다.
‘신입만 있으면, 김 부장님처럼 업무 파악에만 또 몇 주가 걸릴 거야.’
몇 주면 다행이지.
초보 부장과 초보 직원들이 환장의 삽질만 벌일 수도 있다.
‘아무튼.’
다행이다.
* * *
한 주가 지났다.
김덕팔이 임원 회의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요청했다. 임원들은 자연스럽게 기대감을 품었다.
한구인은 프로젝터의 전원을 켜고 노트북과 연결했다. 김덕팔은 직접 PPT를 만들어 왔다.
“감사합니다.”
김덕팔은 대본으로 보이는 서류를 들곤 계속해서 외웠다. 그건 홍규헌과 다른 임원들이 모두 도착할 때까지 반복됐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김덕팔은 대본을 테이블 위에 사뿐 내려놓았다. 아마 이 자리에서 서기까지 몇 번이고 시연해보았을 것이다.
“먼저, 여러분들의 앞에 자료를 두었습니다. 필요하다면 보아주시기 바랍니다. PPT 중간에 참고 자료의 페이지를 표시해두었습니다.”
김덕팔은 한 번 심호흡을 하더니, 리모콘을 들고 PPT를 실행시켰다.
흰색 배경에 심플한 폰트로 ‘소녀연맹의 글로벌 수익성 향상을 위한 제언’이라 적혀 있었다.
글로벌 수익성 향상이라니.
홍규헌은 그 글자를 보자마자 흥미로움에 몸을 떨었다. 과연 김덕팔이 준비해온 제언이 무엇일까 너무 궁금했다.
그의 목소리로 직접 듣고 싶어, 일부러 자료도 안 읽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소녀연맹은 ‘위어스’에 입점해야 합니다.”
스크린에 ‘위어스’의 마크가 나타났다.
‘위어스’는 글로벌 팬덤 플랫폼이다.
WTP의 기획사는 상장을 거쳐 종합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거듭났다. 그들은 직접 팬덤 플랫폼을 개발하여 내놓았다.
그게 바로 ‘위어스’였다.
베타 버전을 시험적으로 론칭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위어스’와 비교할 만한 글로벌 팬덤 플랫폼이라면, 게임 회사에서 만든 ‘코스모스’ 정도가 있다. 이것도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됐다.
“‘위어스’에서 제공하는 서비스는 다음과 같습니다. 연(年) 30,000원 정도의 가격으로 원하는 아티스트의 폐쇄적인 팬덤 커뮤니티 이용 가능. 이에 따른 독점 콘텐츠 시청. 혹은 콘텐츠와 머천다이즈 구매 등. 글로벌 플랫폼답게 영어와 일본어 같은 외국어를 지원합니다. 이미 WTP의 기획사, 그리고 이들이 인수한 기획사의 아이돌이 입점하거나 입점을 예고했습니다. 그에 더해 해외 팝스타를 영입하여 인지도를 올리고 있으며…….”
“잠시만요.”
한구인이 손을 들었다.
김덕팔은 기다렸단 듯 설명을 멈추었다.
한구인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홍규헌의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 건은 이미 이전의 임원 회의에서 기각되었습니다. 소녀연맹은 ‘위어스’에 입점하지 않습니다. 하더라도 훨씬 훗날의 일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예?”
“알고 있지만, 한 이사님이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어째서 그런 결정을 내렸던 것입니까?”
한구인은 김덕팔의 의중을 파악했다.
그는 이전 임원 회의의 기록을 보고, 이게 불합리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모두를 설득하기 위해 다시금 자리를 마련했다.
김덕팔은 당연히 어째서 가로 엔터가 ‘위어스’ 입점을 거절했는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시 묻는 건, 그 논리를 깨부수기 위해서다.
“…….”
한구인은 아까의 당황을 지워버렸다.
“소녀연맹의 팬분들을 배신하는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김 부장님께서 다시 이 주제를 꺼낸단 건, 저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팬을 배신하자.
“그런 뜻이 맞습니까?”
“맞습니다.”
김덕팔이 시원하게 인정했다.
그는 홍규헌을 바라보았다.
“이전 회의록을 쭉 읽으면서, 사장님께서 하신 말씀을 보았습니다. ‘사업에서 남겨야 할 건 돈이 아니라 사람이다’라고……. 정말 멋진 말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팬을 배신한단 건 곧 팬을 버린단 뜻. 사람이 아니라 돈을 남기겠단 뜻. 가로 엔터의 이념과 이상에 반대되는 것이겠지요.”
그럼에도.
김덕팔은 ‘그럼에도’에 강세를 힘껏 주었다. 지금까지의 부드러운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업에서 사람을 버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더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을 때입니다.”
김덕팔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저는 제언합니다. 예, 한 이사님의 말씀대로 표현하자면, 팬을 배신하자고. 그럼으로써, 더 많은 팬을 얻자고.”
참으로 교묘한 화법이다.
김덕팔의 목적이 단순한 설득이었다면 ‘팬을 배신하자’와 같은 과격한 발언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굳이 자신의 주장을 비도덕적, 비윤리적으로 보이게 만들 이유가 없을 테니.
그가 펼친 건 상당히 고단수의 화법이었다.
한구인은 그의 심정을 꿰뚫듯 알 수 있었다.
‘팬을 배신하자. 힘들고 죄책감마저 느껴지는 일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런 주장을 하는 건…….’
‘팬을 배신하는 것’, 그럼으로써 입을 손해 이상의 이익이 있다. 김덕팔은 그리 주장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리스크를 필요 이상으로 강조하여, 리스크를 감수했을 때 얻을 이익을 부각하는 방법이다.
‘팬을 배신하자.’
듣는 사람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왜?’
자연스럽게 질문이 따라온다.
한구인은 당황스러운 것과 별개로 감탄했다.
‘그렇지. 이미 임원 회의에서 기각된 안건이야.’
그 결단을 뒤집으려면, 이토록 과격한 발언으로 회의를 열 수밖에 없었으리라.
조심스럽고 소심하게 ‘다시 생각해보면 어떨까요?’라고 해봤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김덕팔의 제안에 힘이 있을 리 만무하다.
한구인이 굳이 그에게 ‘팬을 배신하자는 뜻입니까?’라고 물었던 건, 그가 이 제언을 포기하길 바라서였다.
사실상 이 자리의 모두가 그의 반대자였으니.
하지만 그는 ‘배신하자는 뜻입니다’라며, 오히려 더욱 과격한 입장을 견지했다.
그의 과격함은 현명함의 반증이었다.
한구인은 흔들리는 눈으로 홍규헌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성필을, 손혜빈을, 민경섭을, 차례로 보았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홍규헌은 검지로 테이블을 두드리다가 한구인을 힐끗 보았다. 그러곤 감정 변화 없는 어조로 말했다.
“들어볼까.”
김덕팔이 소리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 이사님이 팬을 배신하는 것, 이라고 말씀하셨고 저도 동의했습니다만. 이는 상당한 비약이라고 생각합니다. 좁혀보겠습니다. 배신이란 게 통용되는 건 기존의 한국 팬, 그중에서도 극히 소수입니다.”
“팬클럽을 말하는 건가요?”
홍규헌의 물음에 김덕팔이 고개를 끄덕였다.
“케이팝의 글로벌화가 진행되고, 완성된 지 시간이 꽤 흘렀습니다. 팬클럽이라는 폐쇄적인 커뮤니티는 그 문화적 소임을 완료했습니다. 한국이 아니라 세계를 타겟으로 삼는 소녀연맹 아닙니까. 그러하니 팬클럽은…….”
지금까지 소녀연맹을 지지하고 누구보다 아껴주었던 코어 팬층들은…….
“거시적인 입장에서, 다른 인민이들에게 역차별로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다른 팬들에게는, 특히 해외의 팬들에게는, 그들보다 더 우월한 폐쇄적인 팬 커뮤니티가 차별적인 존재입니다. 심지어, 언어적 장벽으로 가입조차 불가능한 커뮤니티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겠죠. 예, 비유를 들자면.”
김덕팔이 리모콘 버튼을 눌렀다.
스크린에 그림이 하나 나타났다.
프랑스 혁명을 상징하는 그림이었다.
“이건 혁명입니다. 기득권을 타파하여 권리를 모두의 손에 평등이 양도하는, 혁명입니다. 이게 저의 제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