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한는 프로듀서-580화 (580/760)

580화

로자는 고등학교 2년(러시아의 중등 교육 최종 학제는 한국 고등학교 3년과 달리 2년이다)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밀도 없는 삶을 살았다.

케이팝 댄스 동아리 덕분이었다.

동아리라고 해도 마음 맞는 이들끼리 만든 소모임에 가까웠다. 학교의 인정이나 지원은 없었으니.

“케이팝 알아?”

로자를 끌어들인 학생이 물었었다.

그때의 로자는 케이팝을 몰랐다. 그러자 학생은 기뻐하면서 뮤비를 하나 보여주었다.

“어때? 좋지?”

학생은 ‘남자 아이돌의 얼굴이 좋지’란 뜻으로 물어본 것이었다.

“응, 멋지다.”

그런데 로자의 답은 ‘춤이 멋지다’란 뜻이었다.

그날부터 로자는 처음 만난 친구들과 매주 조금씩 케이팝 퍼포먼스를 익혔다.

그건 로자의 삶에서, 처음으로 유대감이란 것을 익힌 경험이었다.

개개인이 파편화되고 지역 공동체가 붕괴하다시피 한 현대 사회.

그 사회의 정수인 도회지에선, 서로 살을 부대끼며 성취감을 느낄 일이 흔치 않았다.

로자는 스포츠를 하고 싶었다. 남자애들이 땀 흘리며 서로를 격려하고, 때론 갈등과 화해를 겪는 걸 보면서 로망을 품었다.

동료라는 이름의 로망이었다.

안타깝게도 로자의 학교엔 여자를 위한 스포츠 모임은 없었다. 그런데, 이젠 그와 비슷한 게 있었다.

“조회 수가 100이야!”

그녀들은 찍은 영상을 아이튜브에 올렸다.

보는 사람은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누군가 자신들의 춤을 본다는 사실이 기꺼웠다.

무엇보다, 같은 취미와 목표를 공유하는 친구들이 있단 게 행복했다.

“얘들아, 잘 가.”

하지만 그것도 학교 졸업과 함께 끝났다.

누군가는 직업 학교로, 누군가는 전문 대학으로, 또 누군가는 종합 학교로 갔다.

연락은 하지만, 이전처럼 모일 기회는 없었다.

로자는 잃어버린 유대감을 보상받으려는 듯 케이팝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소녀연맹.’

졸업 공연 때 소녀연맹의 ‘아니’를 춘 것으로 알게 된 그룹이다.

로자는 소녀연맹 덕질을 시작했고, 인민이 됐다.

인터넷으로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다.

그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었지만, 아무래도 손에 닿는 관계가 필요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플레하노브와 만났다.

“기립해라, 너도! 여긴 인터내셔널이다!”

처음 봤을 땐 제정신이 아닌 줄 알았다.

하지만 외모와 어투만 부자연스러울 뿐, 좋은 사람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플레하노브와 함께 있던 인민이들 모두가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현재, 로자는 그들과 함께 무대에 서 있다.

‘고마워요 다들.’

로자는 그들과 필사적으로 연습한 ‘아라베스크’ 퍼포먼스에 몰두했다.

미소가 지어졌다.

‘정말 고마워요.’

로자라고 플레하노브와 인민이들이 이런 일을 꺼린단 것을 모르겠는가.

40줄에 들어선 아저씨들에게 케이팝 댄스를 춘단 건 부끄러운 일이겠지. 그럼에도 그들은 로자의 바람을 들어주었다.

물론 소녀연맹을 가까이서 보고 싶단 욕망도 있었겠지만, 대회에 참여한 이유의 대부분은 로자 때문이다.

‘고마워요.’

감사는 대회가 끝난 뒤에 실컷 하도록 하고, 로자는 집중했다.

눈앞에 소녀연맹이, 장하양이 있다.

이 ‘아라베스크’는 그녀를 위한 춤이다.

장하양과 눈이 맞을 때마다 로자의 몸이 전율을 토해냈다.

로자는 자신의 이상향과 마주하고 있으니.

‘당신의…….’

당신의 노래가 좋아서.

당신의 춤이 좋아서.

당신의 음악이 좋아서.

당신의 얼굴이, 이야기가, 모든 게 좋아서.

‘열심히 연습했어요.’

당신과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마주하기 위해.

이런 제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지만, 보여드릴 수 있어서 영광이에요.

‘당신은 제 아이돌이니까.’

로자는 자신이 될 수 없는, 하지만 되고 싶은 아이돌을 본다. 그리고 모방한다.

그녀처럼 되길 소망한다.

그리고 그녀에게 바치는 모든 찬사는, 로자의 안에 잠자고 있는 이상향을 위한 것이다.

아이돌.

모두의 우상.

로자의 이상향.

흔들리고 방황하는 청년기를 붙잡고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준 그녀를 위해, 로자가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사랑.

모방.

‘당신처럼 되고 싶어요.’

당신은 너무 멋지고, 너무 착하고, 모든 면이 너무나……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우니까.

그러니까 닮고 싶다.

아이돌에겐 무엇보다 기쁜 말이겠지. 그것을 이 장소에 섬으로써, 그리고 춤으로 전달한다.

‘아라베스크’는 그녀를 위한 찬사이다.

그녀가 알아주길 바란다.

‘당신은.’

내가 닮길 소망할 정도로 멋진 사람이라고.

나는 그런 당신을 선망하는 팬이라고.

그런 당신이기에, 내가 그런 당신을 위한 팬이기에, 나는 이곳에 서 있노라고.

“스읍, 후우.”

퍼포먼스가 끝났다.

로자는 엔딩 포즈를 취한 채 멈췄다.

장하양이 마이크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이제까지와 비할 바 없이 환한 미소를 품었다.

“■■■.”

한국어였다.

그 한국어를 장하양의 뒤에 선 남자가 통역해주었다. 하지만 통역이 없었어도, 로자는 알아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만큼 장하양의 얼굴에 배인 감정은 뚜렷했다.

“굉장히 멋졌어요.”

로자의 눈가가 붉게 달아올랐다.

“감사합니다(스파시바)…….”

이윽고 로자는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얼굴을 감싸 쥔 채 오열했다. 우상에게 받는 한마디의 칭찬이 그녀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플레하노브와 선전관, 인민이들이 그녀에게 달려들어 가마를 태웠다. 아직 심사평도 안 끝났건만, 그들은 벌써 축제 분위기였다.

장하양은 살짝 놀랐지만, 곧이어 아까보다 더 밝은 미소를 띠었다.

* * *

“대대장님이.”

악셀로트 소령은 담배를 피는 둥 마는 둥 하며 말했다.

“탄약 소비가 너무 심하다고 하시더군.”

플레하노브는 헛웃음을 뱉었다.

“평균치 아닌가? 이유를 모르시는 것도 아닐 텐데.”

통계적으로 전쟁에서 적 한 명을 사살하는 데 총알 수만 개가 들어간다. 때론 수십만 개가 들어가기도 한다.

그 총알값을 적군에게 쥐여주면, 전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겠느냔 우스갯소리도 있다. 대중들의 생각은 거기서 멈추지만, 이엔 다른 이유가 있다.

“우리 부대 병사들은 전쟁이 처음이니. 경험이 부족해.”

적 한 명을 죽이는 데 총알이 그토록 많이 필요한 이유는 단순하다.

병사들이 사람을 죽이길 꺼리기 때문이다.

정조준으로 적을 죽이는 병사는 극소수다. 대부분의 병사는 총알을 무수히 갈겨대면서 기도한다. 제발 도망가라고. 물러가 달라고. 내가 사람을 죽이지 않도록, 제발…….

“총알을 많이 쓰는 게 당연한 거지. 장교 교육 내용에도 나와 있잖아.”

인간은 전쟁이란 극한 상황에서도 사람을 죽이길 꺼린다.

자극적인 소설이나 만화엔 전쟁이나 그에 준하는 극한 상황이 자주 등장한다. 초현실적인 게이트가 열려서 몬스터가 나오고 사회가 붕괴한다던가, 그런 거.

그곳의 주인공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살인을 저지른다. 자신에게 해가 되는 행위를 저질렀다거나, 동료를 위협했단 이유로 말이다.

사이코패스가 분명하다.

제대로 된 인간이라면, 상황이 극에 이르러도 살인을 망설이는 법이다. 그렇기에 살인의 죄가 그토록 깊다.

인간을 죽인단 건, 총알 수만 발의 망설임을 버린단 뜻이기에.

“대대장님도 아시지.”

악셀로트 소령은 담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냥 땅에 버렸다.

“그런데, 진급에 눈이 머셔서 그래.”

“총알 사용량도 진급에 영향을 미치나?”

“그야 뭐, 총알도 군의 자산이니. 적게 쓰고 승리할수록 좋은 거지. 병사들이 잘 훈련되어 있단 증거가 될 수 있잖아.”

악셀로트 소령은 담배를 버린 손을 꼼지락거렸다. 영 손이 허전한지, 그는 주머니 안에 든 것을 꺼내어 매만졌다.

정교회의 십자고상이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나타낸 그 상징물을, 악셀로트 소령은 몇 번이고 손에 꾹꾹 쥐었다.

“그래서…… 교육이 필요하다더라.”

그가 말하는 교육이란 곧 이런 뜻이었다.

병사들이 살인에 망설임을 갖지 않도록 하라.

아니, 살인이 아니다.

‘살인이란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거.’

교육의 실체는 곧 밝혀졌다.

부사관들이 병사들을 집합시켰다. 그리고 본보기 몇을 골라 구타했다.

“너희들은 우리가 장난치는 걸로 생각하나 보지? 너희가 있는 곳은 전장이다!”

한 부사관은 눈이 충혈되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우리의 조국과 우리의 민족을 위한 성전이란 말이다! 너희들의 조국에게 수치를 안겨줄 셈이냐! 너희들의 부모와 형제자매들, 자식들의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셈이냐!”

플레하노브는 군기 교육의 현장으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서 지켜보았다.

“알료샤! 네 부모 앞에서도 그래 봐라! 아예 영상으로 찍어서 부모님께 보내봐! 겁쟁이처럼 몸 숨기고 탄창 몇 개를 시원하게 비우는, 그런 인간쓰레기만도 못한 행각을 그대로 보여줘라!”

“죄송합니다!”

“네가 바로 조국이다! 네 조국은 겁쟁이인가!”

“아닙니다!”

“네 민족이 겁쟁이인가!”

“아닙니다!”

“그럼 어떡해야 하나!”

코피가 터진 알료샤란 병사는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두려움과 분노로 마비된 머리로 외쳐댔다.

“용감하게 적을 찢고 죽입니다! 저는, 러시아는 겁쟁이가 아닙니다!”

“그래!”

잘 대답한 상으로, 알료샤는 부사관에게 복부를 얻어맞았다.

꺼윽, 꺽. 고통스러운 신음이 흘렀다.

그 후로도 부사관들은 애국심에 대한 연설을 늘어놓았다.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어야, 병사들이 비로소 두려움을 상실하게 되겠지.

자신들이 하는 건 살인이 아니다.

조국과 민족의 적, 즉 인간 아닌 것을 죽이는 일이라고. 서서히 그런 생각을 체화할 것이다.

군인에게 애국심은 선택사항이 아니다. 없으면 자신이 망가지니까.

알료샤는 비틀거리면서 일어났다. 플레하노브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알료샤가 퍼뜩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와 동시에 플레하노브도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곧 저녁 시간이군.’

플레하노브는 산등성이를 보았다.

산중이라 해가 지는 시각이 빠르다.

벌써 주변이 어둑어둑하다.

‘10분 정도만 더 하고 그만하라고 해야겠…….’

그때였다.

공기를 찢는 굉음이 들렸다.

임시 진지 전체를 가득 메우는 무게감이다. 하늘로부터 온 그 소리는 대기를 무섭도록 울렸다.

플레하노브는 하늘을 보았다.

‘박격포.’

그 생각과 동시에, 누군가 외쳤다.

“적습이……!”

플레하노브의 정신이 끊겼다.

* * *

플레하노브는 눈을 떴다.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동시에 시야가 흔들린다.

필사적으로 몸의 감각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손과 발을 까딱거리다 보니 현실감각이 돌아왔다. 하늘에 내려앉은 어둠이 무색하게 땅은 밝은 불꽃으로 가득했다.

“어, 으어…….”

플레하노브는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하체에서 느껴지는 격통 때문에 괴로워하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절반쯤 베여 끊어진 종아리가 보였다. 근처엔 플레하노브의 피를 머금은 양철판이 뒹굴었다.

폭발에 날아온 듯했다.

플레하노브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아비규환이다.

피어오르는 불꽃 사이사이로 움직이는 그림자들은 공황에 빠져 소리 지르길 반복했다. 진지 외곽에선 총성과 포성이 교대로 울려 퍼졌다.

플레하노브는 멍한 정신으로도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대대장이 맞대응보다 철수를 우선하는 듯했다.

“아, 으…….”

플레하노브는 낑낑대며 몸을 일으키려 노력했다. 걷진 못하더라도 길 순 있을 것이다.

이대로 있다간 과다출혈로 죽거나, 포로로 사로잡힌 뒤에 적절한 치료조차 못 받고 죽을 것이다.

어떻게든 부대와 함께 철수해야 한다.

“이, 이봐. 아무나…….”

그때였다.

플레하노브와 10m 거리.

포로가 보였다. 그는 자유의 몸이 되어 진지에서 도망가려다가 플레하노브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피가 말라붙은 군복 차림이었다.

포로는 플레하노브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빠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망할……!”

어깨에 사선으로 메고 있던 끈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그리고 등에 메고 있던 총을 손으로…….

‘없어.’

끈이 끊어져 있다.

폭발 때 끊어진 듯했다.

플레하노브는 재빨리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가 대검을 뽑으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포로가 빨랐다.

그가 플레하노브의 뒤를 잡았다.

플레하노브는 최후를 예감하고 눈을 감았다. 그런데 겨드랑이 사이에서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곧이어 플레하노브의 몸이 그에게 끌려 움직였다. 그가 플레하노브를 붙잡고 어딘가로 끌고 가고 있었다. 적이 있을 방향이 아니라, 러시아군이 철수하는 방향으로.

“뭐…….”

플레하노브는 놀라서 위를 보았다.

포로는 두려움과 공포, 분노가 뒤섞인 낯짝이었다. 그런 상태로 플레하노브를 질질 끌고 갔다.

“뭐, 왜…….”

포로는 그의 얼굴처럼 두려움과 분노가 반반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담뱃값!”

“……뭐?”

플레하노브의 시야가 거칠게 흔들렸다. 머릿속이 헤집어지는 것만 같았다.

시야에 어떤 풍경이 겹친다.

플레하노브의 부대가 폐허로 만든 마을.

2층 창가에 기대어 자신을 내려다보던 여자.

땅을 뒤덮은 시체.

‘조국을 위해서야, 민족을 위해서고.’

악셀로트 소령의 목소리.

“담뱃값이라고!”

포로가 재차 외쳤다.

그건 자신을 설득하려는 듯 단호한 어조였다.

그의 목소리와 함께 플레하노브가 보던 세상이 무너져내렸다. 눈물이 만들어낸 일그러짐이, 플레하노브의 세계를 일그러뜨렸다.

플레하노브는 오열했다.

떠올리려 하지 않았던 것, 자신이 죽인 적들의, 아니. 인간들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안 돼, 안 돼…….’

플레하노브는 눈가를 거칠게 닦으면서 무너지려는 정신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되지 않았다.

자신을 구하려 뛰어든 적군 포로의 손길이, 그 손에서 느껴지는 인간의 온기가, 플레하노브가 군인이 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플레하노브의 방패가 무너진다.

애국심이란 감정이 사라진다.

그에겐 무엇보다 소중했던 보물이었다.

‘이러면 안 된다고…….’

애국심은 이타심의 가장 구체적인 발현이다.

국민이라는 이유로, 사람들은 한 번도 본 적 없으며 한 번도 볼 일이 없을 인간들에게 공감한다.

국민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굶지 않길 바라고.

국민이라는 이유로 그들이 죽지 않길 바라고.

국민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돕고.

국민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위해 싸우게 하고.

국민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위해 죽을 수 있게 하는.

이타심, 인간의 가장 아름다운 감정이 가장 거대하게 발현한 인간 이성의 승리라고.

그렇게 생각해왔다.

애국심은 플레하노브가 만난 적 없는 1억 5,000만 명을 사랑하게 한다.

동시에 그건 공감의 한계였다.

플레하노브는 국민이 아닌 수백만 명이 기아로 죽든 말든.

국민이 아닌 이들이 해수면 상승으로 집과 삶의 터전을 잃든 말든.

국민이 아닌 이들이 열악한 노동 환경에 시달리든 말든.

국민이 아닌 이들이 죽든 말든.

국민이 아닌 이들을, 방관과 무시와 총알과 전쟁으로 죽일 수 있었다.

내 나라와 내 민족을 위해서, 58억 5,000만 명은 어찌 되어도 좋다.

이 포로도 그중 하나였다. 국민이 아니기에 죽일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럴 수 없었다.

공감의 한계가 깨지고, 플레하노브는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고통과 슬픔에 잠겼다.

애국심을 잃은 군인이 망가져 간다.

“플레하노브!”

차에 탑승하려던 악셀로트가 플레하노브에게로 다가왔다. 포로는 악셀로트가 권총을 들고 다가오자 기겁하면서 떨어졌다.

악셀로트는 플레하노브와 포로를 번갈아 보더니, 곧 괴로운 듯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포탄과 총성이 들려오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불꽃과 굉음이 가득한 지옥을 향해, 그가 손가락을 뻗었다.

“가라.”

포로는 다시 묻지 않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악셀로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십자고상을 매만졌다. 그는 눈을 질끈 감고는, 쓰러진 플레하노브를 안아 일으켰다.

플레하노브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 * *

플레하노브는 PTSD 증상으로 대인기피증을 겪었다. 전역하고 한동안 집에만 박혀 살았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어 밖으로 나섰다.

러시아와 전쟁을 치렀던, 플레하노브가 군인으로 땅을 밟았던 나라였다.

그 포로를 붙잡았던 마을로 갔다.

어느 정도 재건되었으리라고 생각했던 그 마을은 아직도 폐허였다. 포격에서 살아남은 집 몇 채만이 있었다.

“…….”

플레하노브는 이층집 아래에 이르러 한동안 땅만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활짝 열린 창가엔 아무도 없었다.

플레하노브는 한동안 그곳을 바라보다가, 터덜터덜 걸음을 돌렸다.

그는 바리스타가 되었다.

돈을 모아 카페를 열었다.

“이래도 괜찮겠습니까?”

같이 전역한 친구인 선전관은 카페의 단골이었다. 사실 선전관은 플레하노브의 커피가 다른 곳과 비교하여 썩 빼어나진 않다고 생각했다.

“제대로 말도 못 하는데 무슨 카페입니까?”

그럼에도 단골이 된 건, 플레하노브가 굶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플레하노브는 여전히 대인기피증을 겪었다. 손님에게 제대로 말도 못 붙이는데 카페는 무슨 카페인가.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넘기시는 게 어떻습니까.”

“…….”

플레하노브는 고개를 저었다.

선전관은 한숨을 내쉬었다.

몇 달 후, 선전관은 이대로는 안 되겠단 생각에 어느 제안을 하나 던졌다.

“아이돌?”

일단 인터넷 친구부터 사귀자는 게 그 제안이었다. 플레하노브는 처음엔 질색했으나, 선전관의 집요한 영업에 못 이겨 소녀연맹 덕질을 시작했다.

빠져드는 건 금방이었다.

소녀연맹은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인터넷에서 사귄 친구들이 플레하노브에게 더욱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는 사람과 사귀는 법을 처음부터 배워갔다.

“기념 카페?”

“네. 한국에 그런 문화가 있다더군요. 이번 소녀연맹 컴백을 기념하여 카페를 꾸며보는 게 어떻습니까?”

선전관이 은근한 투로 말했다.

“친구들도 초대해보고요. 다른 사람들보다는 다가가기 쉬울 겁니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예, 분명.”

플레하노브는 망설이다가, 알겠다고 했다.

소녀연맹의 굿즈로 카페를 꾸몄다. 그의 전우들이, 아니. 이젠 인민이가 된 이들이 도와주었다.

대망의 기념 카페 개시일.

플레하노브는 못내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어떻게 인사하면 좋을까.

내가 과연 제대로 말할 수 있을까.

인터넷에서처럼, 제대로 친해질 수 있을까…….

“이벤트 시작 시간이군요.”

선전관이 말했다.

정해진 시각이지만, 아직 인민이는 한 명도 오지 않았다.

플레하노브는 아쉬우면서도 안도했다.

그때였다.

카페 문이 열리고 어느 소녀가 들어왔다. 그녀는 신기한 듯 카페의 인테리어를 바라보았다.

플레하노브는 침을 꼴깍 삼켰다.

선전관이 격려하듯 그의 등을 밀었다.

이윽고, 플레하노브가.

“인민…… 인가?”

그 소녀는 ‘히읏?!’이란 작은 비명을 내질렀다.

플레하노브는 벌써부터 기가 죽었다.

하지만 아직은, 아주 조금 용기가 남아 있었다.

“시간에 맞춰서 왔군.”

자기도 모르게 군대 시절 말투가 나왔으나, 상관없었다. 상관없을 만큼 플레하노브의 머리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건단 건, 그에게 매우 어려우면서도 두려운 일이었기에.

그럼에도 어떻게든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다.

지켜보던 선전관이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플레하노브다. 앉아라.”

“네, 네?”

“다 온 것 같으니 시작하자, 동무들!”

그 뒤론 기억이 명확하지 않았다.

분위기만이 기억난다.

플레하노브와 인민이들은 그 소녀, 로자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주었다.

“이런 식으로 덕질을 해오다니! 더 슬기롭게 할 수 있단 말이다!”

덕질 꿀팁을 공유하고, 함께 노래도 부르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플레하노브는 아무렇지 않게 로자와 대화를 나누는 자신의 모습을 믿기 어려웠다.

이게 정말 자신인가?

“고마워요, 플레하노브 씨!”

로자가 활짝 웃었다.

그걸 보고, 플레하노브도 웃었다.

그리고 그는 무언가를 깨달았다.

‘아, 인간이란 건…….’

같은 것을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이렇게나 가까워질 수 있는 거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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