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9화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제가 갈게요.”
성필은 일어나려던 한구인을 제지하고 현관으로 향했다. 문을 여니 장하양이 보였다.
“어, 하양아. 혼자 있으니까 심심해?”
“아하하, 그것도 있구요.”
성필이 문에서 비켜서자 장하양이 짧게 묵례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한 이사님 안녕하세요.”
“하양 씨도 안녕하십니까. 시차는 괜찮으십니까?”
“음, 한 이사님 수업 덕분에 잠을 못 자서요. 많이 피곤하네요.”
“…….”
“아하하, 농담! 재밌었어요.”
장하양은 방 안쪽까지 들어와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그녀는 침대가 하나인 것을 보곤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침대가 하나네요?”
“돈 아껴야 하니까. 그래도 커서 두 사람이 누울 수 있어.”
“이왕 러시아까지 온 건데 돈 좀 더 쓰시지…….”
장하양은 탓하듯 한구인을 보았다.
성필은 그를 대신해 변명했다.
“원래 한 이사님 혼자 오셔도 충분한 자리였잖아. 사실, 내가 따라올 필요가 없는 일이었고.”
“필요가 없다뇨. 이사님은 총괄 프로듀서시고, 저는 메인 프로듀서잖아요. 몇 개월간은 일심동체예요. 부…….”
“그래, 절친처럼?”
“……네.”
장하양은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다.
“진짜 심심해서 온 거야?”
“그것‘도’ 있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여쭈고 싶은 게 있어요.”
“뭔데?”
“짧게라도 무대를 쓸 수 있을까요?”
“무대? 대회 무대 말하는 거야?”
“네. 그게, 제 역할이 심사위원이잖아요. 물론 제 역할은 심사를 내리고 우승자에게 상품을 주는 게 전부예요. 하지만…….”
이 대회엔 예상보다 많은 참가자가 모였다.
구경꾼도 마이어가 당초 예상한 인원을 까마득히 넘을 것이다.
하지만 급조된 대회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부탁할 염치가 없던 걸까, 심사위원 축하 무대는 없었다.
“저희를 보러 오신 분들이 많잖아요. 케이팝 커버 댄스 대회라는 대회의 취지도 있지만, 그래도 저희의 이름값 때문에 모인 분들이 많아요.”
적어도 한 곡 정도는 퍼포먼스를 보여도 괜찮지 않을까.
성필은 장하양의 따스한 마음이 느껴져서 절로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는 주어진 역할 이상을 소화하려 했다. 팬들을 위해서 말이다.
“축하 무대가 없는 이유는 이해가 가요. 그룹 전체도 아니고, 저 혼자 왔으니…….”
“할 수 있겠어?”
장하양의 표정이 밝아졌다.
“네.”
“음, 그런데 솔로로는 구색을 맞추기 힘들 거야. 네 솔로곡을 한다 하더라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걸.”
아이돌을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수록곡까지 듣는 경우는 드물다. 굳이 아이돌이 아니더라도, 현대의 뮤지션들 모두 겪는 고충이다.
어차피 리드 싱글, 타이틀곡만 들을 텐데 앨범 수록곡 가득 채워서 뭐 하는가? 이런 불만과 자괴감이 팽배하다.
그래서 미국 뮤지션들은 앨범에 넣을 곡들을 순차적으로, 싱글로 발매하기도 한다. 그중 대표곡을 ‘리드 싱글’이라고 부른다.
한국처럼 앨범에 타이틀곡이란 명칭을 딱 박아두지 않는다. 곡을 차례로 발표해서, 가장 반응이 좋은 곡을 대표로 앨범 활동을 하는 것이다.
즉.
“하양이 네가 소화할 수 있는 곡이라면 솔로곡일 텐데, 그다지 반응이 좋진 않을 거야.”
소녀연맹을 보러 왔다지만, 장하양의 솔로곡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겠지. 당연히 모르는 곡엔 호응해주기 어렵다.
“알고 있어요.”
“그래도 하겠다고?”
“아니요. 같이 온 다른 분들한테 부탁했어요.”
“……부탁?”
장하양은 때가 됐단 듯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문을 여니, 사랑의 응급 구조요원 우효민과 웨이퍼센트의 유빈이 나타났다.
“두 분이 도와주시기로 했어요.”
“안녕하세요! 러브 레스큐 효민입니다!”
우효민이 깜찍한 포즈와 함께 윙크했다. 그걸 보고 당황한 유빈은 자기도 모르게 그녀를 따라 했다.
“안녕하세요오, 발랄한…….”
유빈은 관객이 남자들(성필, 한구인)뿐인 것을 깨닫곤, 턱에 꽃받침을 만들려던 손을 힘없이 내렸다.
“웨이퍼센트 유빈입니다.”
그의 분홍 머리칼이 쓸쓸하게 찰랑였다.
“세 명이면 아이돌 퍼포먼스의 최소 인원이에요.”
센터 포지션을 만들 수 있으니까.
성필은 염려를 담아 물었다.
“괜찮겠어? 대회가 바로 내일이야. 내일까지 셋이서 퍼포먼스를 연습하는 게 되겠어?”
성필의 말은, ‘아이돌이란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있겠냐’는 뜻이었다.
자신의 곡이라면, 설령 몇 년 전에 발표했던 곡이더라도 조금만 연습하면 바로 완벽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 사람은 속한 그룹도, 아이돌로 지내 온 기간도, 소화하는 스타일도 다르다.
고작 하루 연습해봤자 결과물이 좋을 리 없다.
아마 관객 전원이 셋의 퍼포먼스를 폰으로 찍을 텐데. 시원찮은 퍼포먼스를 보여줄 바엔 안 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해야죠.”
유빈이 말했다.
그는 평소 팬들에게 하듯 애교스러운 말투를 쓰지도, 귀엽게 보이려 말꼬리를 늘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원래 목소리는 걸걸했다.
담배 피우나?
‘악!’
성필은 담배란 단어를 떠올리자 머리가 아팠다. 머릿속에 스멀스멀 떠오르는 얼굴을 필사적으로 지워버렸다.
“저를 보러 국경을 넘은 팬들도 있을 거예요. 그냥 얼굴만 보여주고 가는 건 저도 싫어요. 팬들이 실망할 거예요.”
우효민이 유빈을 뚱하니 바라보았다.
‘웨이퍼센트 보러 올 사람이 그렇게 많을까?’란 눈빛이었다.
유빈이 제 발 저려 발끈했다.
“한 명이라도 있을 거 아녜요!”
“알아요 선배님. 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유빈은 우효민의 앨범 판매량을 입에 담고 싶었지만, 상도덕상 차마 그럴 수 없었다. 그는 판매량으로 우열을 나누는 것만큼 천박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어쩌면 몇 년이나 10만 장벽을 돌파하지 못해서 생긴 방어기제일 수도 있다. 판매량보다, 얼마나 팬들을 행복하게 만드는지가 중요해…….
“아무튼.”
장하양은 손뼉을 침으로써 사소한 다툼을 끊었다.
“다들 같은 마음이에요. 이미 순서도 정했어요.”
“어떻게?”
“약 1분씩 세 곡. 그러니까 1절씩만 하는 거예요. 소녀연맹 ‘아니’랑, 효민 씨의 ‘러브 레스큐’, 웨이퍼센트의 ‘펑크내고 싶은 날’이요.”
성필은 세 아이돌을 차례로 보았다.
장하양은 결연했고, 나머지 둘은 불안한 듯 자꾸만 눈동자를 굴렸다.
“효민 씨.”
“네, 사랑의 응급 구조요원 효민입니다!”
왜 자꾸 본인의 시그니처 소개 대사를 읊는 걸까. 김명운 대표가 시켰나?
“하실 수 있으시겠어요?”
“당연하죠! 포유 때 ‘아니 챌린지’도 했는 걸요! 하이라이트 파트는 어느 정도 몸에 익혀뒀어요!”
성필은 고개를 끄덕이고 유빈을 보았다.
“유빈 씨.”
“네.”
웨이퍼센트의 유빈. 언젠가 가로 엔터 소속이 될 수도 있는 아이돌이다.
성필은 그를 주의 깊게 살폈다. 그는 성필이 계속 쳐다보자 안절부절못하면서 시선을 피했다.
“유빈 씨, 설마 해서 묻는데, 하양이한테 협박당해서 억지로 한다거나…… 아니죠?”
“네?!”
유빈이 화들짝 놀랐다.
정말 장하양에게 협박을 당했기 때문, 은 아니었다.
대체 사고방식이 어떻게 되면 저런 오해를 할 수 있을까? 그런 놀라움이었다.
‘내가 협박당한다고?’
유빈은 장하양을 보았다.
얼마 차이 안 나지만 자신보다 키도 작고, 기도 그리 세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성격도 착하고, 몸도 가녀릴 것이다.
저런 사람한테 어떻게 협박을 당한단 말인가?
유빈은 그리 생각했다. 아마 여름 복장의 장하양을 보았다면 이렇게 생각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 내가 협박당할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했겠지.
유빈은 아이돌인 만큼 굶는 일이 잦고, 그래서 꽤 말랐다. 장하양과 팔씨름하면 질 것이다.
“아, 아니에요. 뭘 그런 걸 묻고 그러세요…….”
정말 어이없단 말투다.
성필은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두 분의 프로 정신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그럼 내일 무대에 서기 전에 퍼포먼스를 볼 수 있을까요?”
확인도 안 하고 축하 무대에 올릴 수는 없다.
장하양을 위해서, 그리고 두 사람을 위해서도.
팬을 위한다는 마음은 좋다. 하지만 그에 어울리는 무대가 아니라면, 차라리 안 올라가는 게 좋다.
팬들의 선망과 동경을 부수게 될 테니까.
급조된 무대란 건 그런 뜻이다.
“당연하죠! 저 효민은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아요!”
우효민이 또 깜찍한 포즈와 함께 윙크했다. 저 정도면 컨셉이 아니라 그녀의 인간성이다.
여러모로 프로젝트 포유 때와는 다르다.
자리는 사람을 바꾼다더니, 우효민을 보고 하는 말인 모양이다.
“알겠어요. 주최 측에 말해볼게요.”
세 사람은 화색이 됐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감사를 표했다. 그걸 보자 성필은 마음이 따뜻해졌다.
멀리서 왔을 팬들을 생각하여 예정에도 없던 무대를 하려고 하다니. 심지어, 먼 타국에 와서 쉬지도 않고 연습에 몰두하려 한다.
아이돌의 모범이라 할 만한 모습이다.
아, 감동해서 살짝 눈물 나올 거 같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셋은 해냈단 듯 들떠서 방을 나섰다.
성필은 곧바로 마이어에게 연락했다.
[예, 박 이사님.]
왠지 모르겠지만 마이어도 들뜬 말투였다.
“좋은 일 있으셨어요?”
[참가자들 중에서 아주 멋진 팀을 찾았습니다. 초청 댄스팀도 아닌데, 굉장히 감동적인 무대였습니다.]
“기대되네요. 연락드린 건 다름이 아니라…….”
성필이 사정을 말하자 마이어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안 그래도 부탁드리고 싶었는데, 염치가 없어서 말씀을 못 드렸습니다. 먼저 말씀해주시니 제가 감사합니다. 그럼 배정된 시간은 약 6분으로 괜찮을까요?]
“네, 퍼포먼스 무대만 6분이요. 최대 6분.”
[알겠습니다. 무대팀에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걱정하시던 문제는 해결됐나요?”
모스크바의 숙박 대란을 말하는 것이다.
성필과 한구인, 그리고 다른 심사위원 아이돌들의 방은 마이어가 주선해서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회를 위해 모스크바에 오는 관광객들은 어떨까?
[그게, 박 이사님이 신경 써주신 게 무색하게도…….]
“아…….”
큰 효과는 없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오히려 좋은 일입니다.]
“네?”
[상부에서 긍정적으로 이 축제를 검토하겠답니다.]
“정말요?”
[예. 안건이 관광청까지 올라갔습니다. 어쩌면 한국 관광공사와 합작 프로젝트가 이뤄질지도 모릅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소녀연맹이 이 일을 받아주시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겁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마이어의 목소리엔 옅은 물기가 서려 있었다.
“아뇨…….”
성필은 마이어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황홀한 투로 말했다.
“감사는 제가 드려야죠…….”
큰 생각 없이 받아들인 일이, 양국의 합작 행사까지 발전하다니.
감격스럽다.
* * *
“그렇다니까요!”
우효민은 손을 씻으며 김명운과 통화했다.
“박 이사님 저한테 완전 홀딱 반했죠. 그럼요. 사랑의 응급 구조 요원 효민이잖아요. 제가 아주 이사님 혼을 빼놨어요. 네, 이음 엔터한테 투자 안 하곤 못 배길걸요?”
우효민은 헤실헤실 웃었다.
가로 엔터가 이음 엔터에 지분 투자를 결정하면, 김명운의 꿈인 그룹 프로듀싱이 첫발을 내디딜 수 있게 된다.
그 일환으로 우효민은 성필의 호감을 얻으려 노력했다. 이번 러시아 일정은 ‘성필 홀리기 여행’이라 이름 붙여도 무방했다.
“대표님은 오늘 가로 엔터 쪽 사장님 뵀다면서요. 어땠어요?”
[나도 잘 끝났어. 사장님이 내 계획을 아주 마음에 들어하시더라.]
“잘됐네요! 이거 그냥 끝난 거 아녜요?”
[그랬으면 좋겠지만…….]
“뭘 ‘좋겠지만’이에요! 된 거예요! 저랑 대표님의 승리라구요! 들어봐요, 박 이사님이 저 보는데 눈에서 꿀이 떨어즈끼아야아아아악!]
우효민은 기겁하면서 몸을 떨었다. 그녀의 어깨와 볼 사이에 끼어 있던 폰이 바닥을 우당탕탕 굴렀다.
[효민아? 효민아?! 우효민! 대답해!]
김명운의 다급한 목소리가 화장실에 울려 퍼졌다.
우효민은 떨리는 손으로 폰을 집었다.
[효민아 괜찮아?]
“네, 네.”
[왜 그래?]
“아니…… 거, 거울에 여자…… 귀신 같은 게…… 보여서…….”
[귀신? 너 기가 허한 거 아니야? 돌아오면 한약이라도 먹을래?]
“아뇨, 어, 착각이겠죠 뭐…….”
우효민은 떨떠름한 심정으로 화장실을 나섰다. 그녀가 찾은 곳은 장하양의 객실이었다.
가로 엔터가 신경을 쓴 듯, 그녀의 방이 가장 넓었기 때문이다.
우효민이 들어오자마자 본 건, 왠지 모르게 기가 죽어 있는 유빈이었다. 그는 창 쪽에 놓인 의자에 앉아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유빈 선배? 하양 언니는…….”
“나 여깄어.”
우효민은 또 기겁하여 몸을 화들짝 떨었다.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기 때문이다. 홱 돌아보니, 언제 서 있었는지 미소 짓는 장하양이 보였다.
“어, 언니이. 간 떨어질 뻔했잖아요…….”
“아하하, 그래?”
장하양이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럼 연습 시작할까? 내가 커리큘럼을 짰거든. 들어봐. 유빈 선배님은 먼저 들으셨어.”
장하양이 커리큘럼이란 이름의 시간표를 줄줄 읊었다.
우효민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고등학생 시간표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빡빡했다.
“쉬, 쉬는 시간이 이렇게 적어도 괜찮…….”
“으응?”
장하양이 의아하단 듯 목을 살짝 옆으로 기울였다. 그녀의 머리칼이 비단처럼, 강처럼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왜일까, 우효민은 그녀의 머리칼에서 마을을 휩쓰는 강줄기를 보았다.
“무슨 소리야 효민아. 우린 시간이 정말 없잖아? 팬들한테 부족한 모습을 보여줄 생각이야?”
“그런 건 아닌데에……. 이 시간표대로 하면 체력이…….”
“책임질 수 있어?”
“……네?”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조금이라도 부족한 영상이 아이튜브를 떠돌면, 그로 인해 우리의 평판이 깎이면, 우리의 팬들을 실망시키면, 팬들의 꿈을 부수면.”
순식간이었다.
장하양의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우효민은 감히 움직일 수 없었다. 장하양의 비현실적으로 뚜렷한 얼굴은, 이 순간만큼은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았다.
자연에서 발견한 인공적인 구조물처럼, 자연을 배반한 인위적인 아름다움. 그래서 느껴지는 부자연스러움에 소름이 돋았다.
아니, 물리적인 뭔가를 초월하는 의지가 우효민의 피부를 가시처럼 찌른다.
“책임질 수 있어?”
“……아, 아.”
그래, 이 느낌.
우효민은 이 느낌을 안다.
“아니, 아니요…….”
진소유다.
옛날에 우효민과 글로브의 라희, 장하양, 진소유가 음방 합동 무대를 꾸렸을 때.
그때의 진소유와 비슷한 아우라가 느껴진다. 개구리 앞에 선 뱀처럼 상대를 깔아뭉개고 압도하는 기운.
이런 거창한 비유도 필요 없다.
초등학교 시절 길거리를 거닐다가 담배 피우는 중학생 선배들과 마주친 기분이다. 오금이 저리고 턱이 덜덜 떨린다.
과거, 어릴 적에 품었던 막연하면서도 직접적인 공포를 떠올려야만 비유할 수 있는 이 압박감.
“할게, 요…….”
또 순간이었다.
어느새 장하양은 우효민의 몇 걸음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는 특유의 아름다움을 흠뻑 풍기는 자연스러운 미소와 함께였다.
“음, 좋아. 효민이는 아이돌이네. 그럼 유빈 선배님? 시작할까요?”
“으, 으응…….”
셋은 나란히 섰다.
가장 먼저 나온 곡은 소녀연맹의 ‘아니’였다.
“하나, 둘.”
독재 ON.
연습하면서, 우효민은 속으로 김명운에게 말했다.
‘대표님, 어쩌면 가로 엔터와 한 식구가 되는 건…….’
성급한 결정이었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우효민은 장하양의 독재를 따랐다.
김명운을 위해.
그가 가로 엔터에게 투자받기 위해.
이음 엔터의 성공을 위해.
장하양의 눈 밖에 나선 안 된다.
* * *
[네, 다음은!]
로자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대회 무대의 백스테이지.
스태프들이 분주한 가운데 로자와 플레하노브, 선전관, 그리고 가위바위보에서 져서 참가하게 된 두 명의 인민이들은 침묵을 지켰다.
[’러시아 인터내셔널 연맹‘ 팀입니다!]
환호와 박수 소리가 들렸다.
로자는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인민이들이 기계처럼 그녀의 손 위에 손을 겹쳤다.
“투쟁.”
로자가 말하자 플레하노브가 후창했다.
“해방.”
이어서 선전관이.
“소녀.”
그리고 인민 모두가.
“연맹.”
다섯 사람이 무대로 걸음을 옮겼다.
“승리―!”
내리쬐는 스포트라이트.
수백, 어쩌면 수천 명의 눈길.
차가운 겨울의 한기.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열기.
‘소녀연맹은.’
로자는 그 모든 부담을 이겨내며 무대를 가로질러 중앙으로 나갔다.
‘항상 이런 압박감을 이겨내고.’
로자는 정면에서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대에 섰던 거구나.’
옆엔 관객이 아닌 이들이 있었다.
심사위원석에 앉은 세 명의 아이돌.
그중 한 명.
로자의 우상.
로자의 아이돌.
장하양.
그녀가 익숙한 미소와 함께 마이크를 들었다. SNS에서 건진 사진으로 수천수만 번 보았지만, 실제로 보니 격이 다르다.
격이 다른, 아우라.
그 아우라가 로자를 전율시켰다.
“즈드라스트부이쩨(안녕하세요).”
다섯 인민이 소련 앞에 섰다.
로자는 입만 뻐끔거릴 뿐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그때 오른손에서 압박감이 느껴졌다.
플레하노브가 그녀의 손을 잡아준 것이다.
로자가 홱 그를 돌아보니, 그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안심이 됐다.
로자는 다시 장하양을 보고 답했다.
“안녕하세요.”
한국어였다.
장하양의 눈이 놀라움을 담아 살짝 커졌다. 그러곤, 아까보다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했다.
“하나, 둘.”
셋.
아라베스크.
원본의 아우라 앞에서, 원본을 재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