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한는 프로듀서-577화 (577/760)

577화

[박 이사님?]

진저가 답을 재촉해왔다.

성필은 두괄식으로 답을 제시했다.

“죄송한데, 부탁하신 일은 많이 힘들어요.”

마이어의 조건을 듣기 전이라면 얼마든지 받아들였을 것이다.

대회 심사위원으로 유명 그룹 멤버가 나오면 주최 측뿐 아니라 장하양에게도 도움이 될 테니까.

화제성이 보장될 것이다.

[왜 안 됨미까?]

진저가 이유를 물었다.

‘아마 내가 거절한 걸 납득하지 못하시는 거겠지.’

어쩌면 ‘케이어스랑 파이 나눠 먹기 싫은 거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케이팝 커버 댄스 대회가 뭐라고 파이까지 따지겠냐 싶긴 하다. 하지만 진저의 목소리에 밴 조급함은 성필에게 추궁받는 기분이 들게 했다.

그렇다. 진저는 성필을 추궁하고 있다.

‘뭔가 숨긴 게 있지 않아?’란 생각인 듯하다.

‘아니면 옛날에 가로 엔터 신규 채용 홍보 영상에 출연해줬는데, 이건 왜 안 해주냐고 항의하는 걸 수도 있고.’

타당한 불만이다.

옛날, 성필이 에리카를 도와줄 때 들먹였던 이유 중 그게 포함되기도 했었다.

소녀연맹과 가로 엔터는 알게 모르게 케이어스와 KS 엔터로부터 도움을 받아왔다.

그런데 그건 성필 혼자만이 느낀 짐이었다. 에리카 사태가 터지기 전까지, 가로 엔터의 누구도 그 빚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배은망덕하다기보다, 케이어스와 라이벌로 지낸 기간이 많아 생각이 미치지 않은 것이겠지.

가로 엔터 입장에선 중요한 순간마다 케이어스에게 얻어맞아 왔으니까.

‘나로선 에리카 씨 도와드리는 걸로 심적인 빚은 다 갚았단 느낌이지만…….’

진저가 느끼기엔 아닐 수도 있다.

에리카를 도와준 게 뭐? 그게 내 일이냐?

이런 식의 사고방식이 정상적이…….

[이제 제가 싫으신 검미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물음이 돌아왔다.

마치 애인의 사랑을 재확인하는 듯한 질문이라, 성필은 아주 잠깐 혼란스러웠다.

[전에 연락을 이상하게 끝내서 그런 검미까? 그건…… 그, 일이 있었슴미다. 박 이사님이랑 관계된 게 아님미다. 기분 나쁘셨으면 사과하겠슴미다…….]

추궁하는 듯 날카로웠던 진저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그녀는 죄를 뉘우치듯 한껏 우울해졌다.

성필은 재빨리 부정했다.

“아뇨, 아니에요. 진저 씨 개인에 대한 감정 때문에 거절하는 게 아니라요…….”

성필은 마이어가 걸었던 조건을 말해주었다.

교통대란, 숙박 대란, 행정 피로가 예상되니 심사위원으로 부를 아이돌은 인지도가 소녀연맹보다 낮길 바란다고.

과연 진저는 납득했다.

[하긴, 저희가 가면 반응이 엄청날 검미다. 근데 러시아에도 케이팝이 유명함미까?]

“러시아에서 유명해서…… 그런 건 아니고요. 다른 나라에서 많이 올 거예요 아마. 특히 동유럽권 사람들이요. 아이돌들이 갈 기회가 많이 없잖아요.”

러시아를 포함하여 동유럽 전체 케이팝 팬을 전부 끌어모아야, 각 케이팝 그룹들이 단독 콘서트를 열 수 있을 수준일 것이다.

하지만 이건 추정에 불과하다.

앨범 판매량이 팬덤의 크기를 평가하는 기준이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선진국 기준이다.

한국보다 국민 소득이 낮은 국가에게 아이돌 앨범은 상당한 사치품이다. 팬이더라도 앨범을 살 생각은 못 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래서 케이팝 앨범 판매가 주로 미국과 서유럽권, 일본에서 이뤄지는 거고.’

옛날에 한구인이 러시아에서 소녀연맹의 앨범이 팔리는 게 신기하다고 했던 적이 있었다. 한국보다 국민 소득이 3배가량 낮은 국가이니.

게다가 가로 엔터가 따로 판로를 개척하지 않은 시절의 이야기다.

러시아인에게 아이돌 앨범은 체감상 60,000원 이상일 것이다. 제대로 된 루트를 거치지 않고 수출된 것일 테니, 웃돈이 붙어 그보다 더 비쌌을 테고.

만약 한국인에게 앨범을 60,000원에 팔려면 팔 수 있을까? 없다.

‘그래서 신기한 거지.’

어쩌면, 의외로 동유럽에서 케이팝 콘서트를 개최한다면 관객이 많을 수도 있다.

없을 수도 있고.

수십억을 바쳐 실험적인 콘서트를 개최할 회사는 없을 테니, 향후 몇 년은 동유럽권 케이팝 팬 규모를 확인할 순 없을 것이다.

[저희가 못 가는 이유가 저희가 유명해서라면, 겸허히 받아들이겠슴미다.]

“말투가 완전히 바뀌셨네요.”

[박 이사님이 저한테 화나서 거절하시는 줄 알았슴미다.]

“제가 어떻게 그래요. 그럼 진저 씨는 저한테 ‘그렇습니까.’라고 보낼 정도로 기분 상했던 일이 뭔데요?”

[기분 상한 일이라고 한 적 없슴미다. 일이 있다고 했지.]

“그래요? 뭐, 지금은 잘 해결됐어요?”

진저는 답이 없었다.

대신 다른 걸 물었다.

[이사님, 저희 이번 앨범이랑 곡은 어땠슴미까? 팬의 의견을 듣고 싶슴미다.]

“좋았죠. 너무 좋았어요.”

[정말임미까? 이번 ‘IWY’는 케이어스가 구축한 이미지와 많이 다르지 않슴미까. 케이어스는 고아한 이미지였는데, 이번엔 가벼, 가볍슴미다. 반응이 좋긴 하지만…… 정말 좋아하는 건지 확신이 안 섬미다.]

하기야, ‘IWY’는 지금까지의 케이어스와 전혀 다르다. 음악적인 색깔도, 그룹의 컨셉도.

갑자기 프로듀서가 교체된 게 아닌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으니.

그렇지만 케이어스의 변신은 성공적이었다.

“좋았어요.”

[그게 끝임미까?]

“구체적으로 말씀드려야 해요?”

[네, 참고가 될 검미다.]

“뮤비에서…… 진저 씨가 했던 트윈테일 좋았어요. 항상 생머리셨잖아요.”

[……트윈테일?]

“옷도 하늘하늘하고, 원색이고, 머리에 별가루? 같은 것도 귀여웠고.”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잖슴미까!]

“아니, 팬한테 뭘 더 바라시는 거예요?”

[……아직도 제 팬이심미까?]

“네, 그럼요.”

약 3분 전에 ‘유스’를 그만두고 ‘썸이 1호’로 살아야만 하나 고민했지만, 다시 생각을 고쳐먹었다.

진저는 낮게 웃다가 망설이며 물었다.

[트윈테일 좋았슴미까? 민주 언니는 그거 보고 계속 비웃었슴미다.]

“아, 그거…… 뷔라이브요?”

그다지 놀라운 사실이 아니겠지만, 성필은 케이어스의 뷔라이브를 챙겨본다.

어느 날 김민주가 케이어스 멤버들의 앨범 컨셉 포토를 차례로 보는 방송을 했었다.

김민주는 다른 멤버들이 각 잡고 찍은 사진을 볼 때마다 정말 시원하게도 웃었었다.

특히 진저의 트윈테일 사진을 보곤 1분 동안 웃었다. 도중에 물 마시다가 사레까지 들렸고 말이다.

같은 집에서 사는 동료들이 진지하게 멋지고 귀여운 모습을 보이는 게, 김민주에겐 웃기기만 한 일인 것이다.

[촬영장에서도 계속 비웃었슴미다…….]

이런 거 알고 싶지 않았다.

성필은 살짝 우울해졌다.

케이어스는 서로 지탱하고 서로 의지하는, 서로가 없으면 못 사는 최고의 팀 아니었냐구…….

“칭찬하고 싶은데 할 말이 없어서 괜히 웃으신 걸 거예요. 저는 물론이고 6,000만 유스 모두 귀엽다고 생각해요.”

[유스가 6,000만이나 됨미까?!]

“……아, 아니요. 그냥 한 말이에요.”

성필은 식은땀을 흘렸다.

‘6,000만 유스’ 드립은 인민이들이 쓰는 밈이다.

유스에게 처맞아온 세월이 3년이 넘는 인민이들은, 케이어스는 물론 KS 엔터도 싫어하는 경향을 보인다.

아주 옛날에 트잇터에 케이어스 팬으로 보이는 사람이 ‘KS 엔터 팬덤한테 짓밟히기 싫으면 나대지 말고 꺼져’ 같은 식의 글을 올렸었다.

그게 인민이들 사이에 박제됐다.

그리고 인민이들의 커뮤니티에 케이어스를 까는 글이 올라오면 장난식으로 ‘6,000만 유스와 KS 엔터 팬덤이 두렵지 않느냐!!!’란 댓글을 다는 것이다.

팬덤의 힘이 자기 힘인 줄 알고 나대는 인간을 조롱하는 드립이다.

어찌 보면 인민이들 대장인 성필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드립을 체화해버렸다.

아니면 인터넷 밈 박사(인터넷 지박령)인 조아라와 자주 대화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뭠미까. 농담임미까.]

다행히 진저는 성필이 친 드립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정말 다행이다.

그녀의 근처에 이 드립을 아는 사람이 있었다면 ‘대놓고 조롱하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진저도 성필을 좋게 보진 않았겠지.

[알겠슴미다. 박 이사님을 믿겠슴미다.]

“네. 더 용무 있으세요?”

[마음 같아서는 이사님과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지만, 저는 바쁨미다. 유명한 아이돌임미다.]

성필은 유명한 아이돌인 진저와의 통화를 끝냈다. 그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닦아냈다.

‘SNS 적당히 해야겠다.’

현실 세계에서도 밈 같은 걸 입에 담다니.

점점 조아라와 비슷해지는 것 같아서 무섭다.

* * *

“들으셨겠지만, 안 된다고 하심미다.”

진저는 스피커 모드로 통화하고 있었다. 그래서 옆에 있던 1팀장도 대화를 모두 들었다.

“팀장님?”

그런데 1팀장의 표정이 안 좋았다.

“왜 그러심미까?”

“……아니야.”

1팀장은 속으로 화를 삼켰다.

아까 성필이 쓴 ‘6,000만 유스’란 발언 때문이었다. 그건 인민이들이 유스를 대놓고 조롱할 때 쓰는 밈 중 하나였다.

그걸 케이어스의 진저에게 사용했다.

‘이건 대놓고 멕이는 거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눈을 뚫고 튀어나올 것 같다. SNS에서만 볼 때는 몰랐는데, 직접 그 말을 들으니 어지간히 화나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 진저에게 그걸 써?!

‘이 인간, 케이어스 안 끼워준단 것도 그냥 우리를 싫어해서 그런 거 아니야?’

박성필, 개인적으로 존경했다.

하지만 이젠 그것도 끝이다.

넌 이제 ‘우리’ ‘케이어스’와 ‘유스’의 ‘적’이다.

“팀장님 화나서 부들부들 떠는 치와와 같슴미다.”

진저는 전동 안마기로 변해버린 1팀장을 놔두고 연습실을 나섰다. 찾아야 할 사람이 있었다.

“소유 언니.”

아티스트 라운지에서 일본판 ‘보그’를 읽고 있던 진소유는 진저의 출현이 달갑지 않았다.

“지금 바빠. 잡지 읽고 있어.”

“하양 언니 나온 거 아님미까. 벌써 100번 넘게 읽은 거 같은데 언제까지 읽을 검미까. 그런 비생산적인 일…….”

“비생산적이지 않아. 아름다움은 존재만으로 가치가 있어. 그 아름다움을 눈에 담는단 행위는 행위만으로 가치를 창출해. 내가 보는 세상을 더 아름답게 하니까.”

“……잠시 시간 내주시면 안 됨미까?”

진소유는 잡지를 고이 접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말해보란 듯 진저를 응시했다.

진저는 그녀의 옆에 앉아 등을 돌렸다.

“머리 트윈테일로 땋아주시는 검미다.”

“돌았니? 너 22살이야.”

“27살이 할 말은 아님미다.”

진소유는 말은 그렇게 해도, 별다른 불평 없이 진저의 머리를 땋아주었다. 그리고 휴게실에 상비된 고데기와 빗으로 모양을 냈다.

진저는 거울을 보면서 양쪽으로 늘어진 머리칼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어떻슴미까?”

“네가 지금까지 한 헤어스타일 워스트3 안에 들어.”

“…….”

진저의 눈꼬리가 우울하게 떨어졌다.

“하지만, 네 워스트는 일반 사람의 베스트보다 훨씬 나아. 얼굴이 받쳐주니까. 현재를 즐기렴. 그 나이에 해도 눈살이 찌푸려지는데, 나이를 먹을수록 더 안 어울릴 테니.”

“어울린단 검미까 안 어울린단 검미까?”

“어울려.”

진저의 입가에 행복이 번졌다.

* * *

서울에서 러시아 모스크바까지는 약 10시간이 걸린다.

5시간 경과.

성필은 폰에 받아온 아이돌 무대 영상과 뮤직비디오도 볼 만큼 봤다.

잠은 딱히 안 오지만, 눈이라도 붙여 볼까 생각하던 순간.

“한 이사님, 러시아 음악 시장 규모는 인구수 때문에 큰 건가요?”

옆자리에 앉은 장하양이 한구인에게 물었다.

성필은 한구인의 ‘알아두면 쓸모없지만 재미있는 지식’ 시간이 되리란 걸 예감했다. 눈을 붙이는 대신 한구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물론 인구의 영향도 받지만, 인구만이 모든 이유는 아닙니다. 예시를 들자면, 중국은 압도적인 인구수가 있음에도 러시아보다 음악 시장 규모가 작잖습니까. 러시아의 음악 시장은 흔히 클래식이라고 불리는 오케스트라 음악 덕입니다.”

“음…….”

장하양은 고민하듯 팔짱을 꼈다.

“그럼 러시아는 젊은 사람이나 늙은 사람 구별 없이 모두 클래식을 듣나요?”

“아닙니다. 그러니까, 음…….”

한구인은 이곳에 오기 전, 해외사업부의 김덕팔이 정리한 러시아 음악 시장 보고서를 읽었다.

그 내용을 떠올리느라 기억을 뒤지던 중, 성필이 먼저 답했다.

“클래식 음악 산업 규모가 크다는 게, 다들 클래식만 듣는단 뜻이 아니야.”

“그럼요?”

“음악 산업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어느 분야라고 했는지 기억나?”

“콘서트요.”

세계 평균 70%의 수익이 공연에서 나온다고 한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보다 훨씬 극단적이다.

“90% 이상의 수익이 공연에서 나와. 주로 오케스트라 공연이래. 클래식의 나라라고 불릴 만하지? 그렇지만 스트리밍 플랫폼 순위를 보면 다른 나라들이랑 비슷해. 팝, 록, 일렉트로닉을 많이 들어. 클래식도 당연히 있고.”

“뭔가 잘…… 와닿지가 않네요. 그럼 나머지 10%가 앨범이랑 스트리밍 수익이란 거잖아요.”

“스트리밍이 거의 9%.”

“앨범은 거의 안 팔린단 뜻이네요…….”

아이돌의 주요 수익원 중 하나가 앨범이란 점을 감안할 때, 러시아는 그리 매력적인 시장이 아닐지도 모른다.

장하양은 그걸 바로 간파한 듯했다.

“그런데 스트리밍 시장이 커. 러시아는 세계에서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의 비율이 가장 높거든.”

“아하하, 왜 저희가 앨범 판매랑 콘서트에 사활을 거는지 알겠네요.”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의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인데도, 스트리밍 수익은 전체의 9%에 불과하다니.

“그렇기도 한데, 러시아는 스트리밍 가격이 싸. 글로벌 기준의 1/3 정도밖에 안 해.”

“국민소득이 낮아서요?”

“경쟁 때문에. 스트리밍 플랫폼들이 적자를 감수하고 이용료를 싸게 책정하거든. 그렇잖아? 1.5억 명이 사는 나라야.”

한 번 주도권을 잡으면, 그 이익은 수십 년을 갈 것이다.

다른 경쟁자들을 전부 괴사시키고, 러시아에서 내쫓기만 하면, 독점적으로 이익을 창출할 수 있다.

무려 1.5억 명에게 말이다. 게다가 그중 70% 이상이 스트리밍 서비스를 숨 쉬듯이 이용하니, 잠재 가치가 높다.

“제가 설명드리고 싶었는데, 박 이사님이 이미 다 하셨군요.”

한구인은 아쉽단 투로 말했다.

장하양은 그를 향해 싱긋 웃고는 또 다른 질문을 꺼냈다. 한구인을 기쁘게 하는 법은 아주 간단하다. 무언가 물어보는 것이다.

“전에 혜빈 언니가 러시아로 유학 갔을 수도 있다고 하셨잖아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떻게 생각하냐뇨?”

“살기 좋은 곳인가요?”

“글쎄요, 유학이나 여행하긴 그럭저럭 괜찮은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러시아인으로 산다는 건, 그다지 좋진 않을 거 같습니다.”

“네?”

“어느 러시아 석학이 한 이야기입니다만. 러시아는 10년에 한 번 나올 재능이나 부자와의 연줄이 없고선, 성공할 수 없는 나라라고 하더군요. 객관적으로, 별로 행복한 나라는 아닐 겁니다. 계층 이동이 거의 차단되어 있단 뜻이니 말입니다.”

“……그런가요?”

장하양은 주변의 눈치를 보았다.

러시아인이 있나 살피는 것이었다. 러시아인이 있더라도 한국어를 알아들을 확률은 적겠지만.

“복지라던가, 그런 게 잘 없나요? 장학금이나…….”

“부분적으로는 그게 이유가 될 수 있겠습니다. 교육제도나 연금제도, 의료제도, 사회 인프라의 부족 말입니다. 어쩔 수 없는 게, 러시아는 가난하니까요.”

“한국보다 경제가 크지 않나요? 아, 사람이 많아서…….”

한국보다 경제 규모가 크더라도, 인구수가 많으니 제도적으로 커버가 안 될 것이다.

장하양은 그렇게 판단했다.

그러나 한구인은 또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부분적으로 맞는 이야기입니다. 러시아 정부가 가난한 건 조세제도 때문입니다. 러시아엔 상속세와 누진소득세가 없으니까요. 소득세는 13% 고정입니다. 주요 세원이 그러하니,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가난할 수밖에 없습니다.”

거둬들이는 세수에 따라 국가의 형태가 나뉜다.

국민총소득의 1~3%를 징수하는 국가는 전근대 국가다. 조선이나 청나라 같은 나라들 말이다.

국민총소득의 10% 이상을 징수하는 국가는 군사―재정 국가. 1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존재했던 유럽 근대 국가들이다.

그리고 국민총소득의 25%가량을 징세하면 복지국가다.

실제 복지제도가 있느냐는 차치하고, 복지제도를 시행할 수 있을 만한 재정적 능력이 있음을 뜻한다.

“부의 재분배가 거의 작동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러시아는…… 21세기에 존재하는 19세기 국가라고 할 수 있겠군요. 물론 그보다는 상황이 훨씬 낫지만요.”

국가로서 최소한의 역할만이 존재한다.

모두가 평등해지자는 이상을 추구했던 소련이 멸망하고 나타난 건, 아이러니하게도 세계에서 가장 불평등한 형태의 국가였다.

“아마 민주 정부가 들어서고도, 러시아는 복지국가가 되지 못할 확률이 높습니다. 세금을 더 내고 싶은 사람은, 설령 가난한 사람이더라도 없으니까요. 누진소득세는 서유럽도 1차 세계대전, 대공황, 2차 세계대전, 냉전이란 전대미문의 악재를 만나고서야 점진적으로 도입, 확대할 수 있던 조세제도입니다.”

나라가 망할 위기에 있거나, 망해야만 도입할 수 있는 제도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들이 반대하여 실현되지 않는다.

“러시아 사람들이 스트리밍 플랫폼을 많이 이용하는 건, 그리고 음악을 많이 듣는 건, 어쩌면 현실에서 즐길 행복이 많지 않아서가 아닐는지 모르겠습니다.”

장하양은 대답하는 대신 창밖을 보았다.

비행기는 구름 위를 가로지르고 있다.

음악을 많이 듣는 건, 현실에서 즐길 행복이 많지 않기 때문…….

장하양도 그러했었다.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이어폰을 끼고 죽은 듯이 침대에 누워 음악만 들었었다.

현실의 어떤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아서.

“설하 언니가 그러셨어요.”

왜 애 심란해할 이야기를 하냐고 성필에게 타박받던 한구인, 그리고 그를 타박하던 성필이 동시에 장하양을 보았다.

“언니의 스승님, 이인성 선생님이 하셨던 말씀이래요. ‘더 언노운 싱어’가 끝나고서요.”

성필도 백설하와 함께 있던 때였다.

아마,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난 세계를 바쁘게도 돌아다녔지.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은 걸 들었으며, 많은 걸 봤어. 세계에선 전쟁이 일어나고, 어린아이가 총을 쥐고, 노인은 굶주리며, 젊은이는 죽어가. 그런 모습을 듣고 보아왔던 거야.’

‘그런데도 난 노래 부를 뿐이었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어 나가며 고통받는 마당에, 내 노래엔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오랜 시간 괴로워하고 고민하면서도 노래를 놓지 못했어.’

‘그런데 이제 알았어.’

‘미래가, 우리 후손들이 현재를 어둡게만 기억하지 않도록. 우리는 음악을 해야 하는 거야. 우리의 시대에 상처만이 새겨지지 않게…….’

“역사에 새겨진 상처가 별자리로 기억되도록, 우리는 노래를 불러야 해.”

그리 말한 장하양은 한 호흡, 깊이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여느 때와 다름없는 미소를 보였다.

“저는 정치인이 아니고, 기업가도 아니고, 시민단체 회원도 아니라서, 세계를 바꾸거나 치유하겠단 거창한 말은 할 수 없어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춤추고 노래하는 게 전부라서, 거대한 문제들 앞에선 무력하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세상을 더 행복하게 만들 순 있을까요? 최소한, 단 몇 명의 상처이나마 별자리로 바꿀 수 있을까요?

“…….”

성필과 한구인은 서로를 보았다. 그리고 웃었다.

성필이 말했다.

“하양아, 넌 최소한 두 명은 행복하게 만들었어.”

“네? 누구요?”

“나랑 한 이사님.”

“그렇습니다. 하양 씨의 말씀을 들으니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하양이 얼굴만 봐도 그래요.”

이윽고 둘은 주접 대회를 시작했다. 장하양은 그걸 들으며 얼굴을 붉혔으나, 입가엔 창피함보다는 행복이 깃들었다.

몇 시간 후 비행기가 공항에 도착했다.

차가운 북풍이 세 사람을 반겼다.

장하양은 바람결에 흩날리는 머리칼을 붙잡으며 풍경을 훑었다.

‘러시아.’

케이팝에겐 미지의 땅.

그곳에 소녀연맹이 발을 디뎠다.

* * *

모스크바 케이팝 커버 댄스 대회 참가자 예선.

“하나, 둘, 셋, 힘내자!”

어느 고등학교의 케이팝 커버 댄스 동아리.

그곳에 소속된 네 명의 소녀들은 손을 모으고 파이팅을 외쳤다.

케이팝 아이돌 백댄서들이 주로 입는 디스코 팬츠와 탱크톱 차림인 그녀들은 자꾸만 코를 훌쩍였다.

코트와 패딩을 걸쳤더라도, 이 겨울에 입을 만한 옷은 아니었다. 건물 난방이 시원치 않아 더 추웠다.

“으으, 우리 차례가 언제지?”

“아직 한참 남았어.”

어느 학생은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이들이 모였다.

다들 복도에 돗자리나 천을 깔아놓고 하염없이 자신의 차례가 오길 기다리는 중이다.

“아 제발 빨리! 죽겠어!”

한 학생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제자리에서 뛰었다. 몸에서 열을 내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뛰다가 순간적으로 균형이 흔들렸다.

“아.”

겨우 균형을 잡았지만 엉거주춤한 자세 그대로 몇 걸음 밀려나듯이 움직였다.

툭.

학생은 등에 저항감을 느꼈다. 누군가와 부딪친 것이다. 분명 사람일 텐데, 그는 놀랍도록 요지부동이었다. 마치 벽 같았다.

“죄, 죄송합니.”

학생은 곧바로 그를 보며 사과했.

“뭐지?”

학생이 얼음처럼 굳었다.

그와 부딪친 인물은, 전신이 근육질인 험악한 인상의 남자였다. 위장무늬 바지에, 날씨를 신경 쓰지 않은 나시 티가 시선을 강탈했다.

그의 팔뚝에 울룩불룩 돋아난 힘줄이 마치 채찍 같아서, 언제라도 상대를 후려칠 듯 위압감을 보냈다.

“무슨 일이야? 뭔데?”

그의 동료로 보이는, 마찬가지로 근육질인 남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얼마 안 가 험상궂은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학생은.

“어?!”

기절해버렸다.

부딪친 남자가 기절한 학생을 부축했다.

그 모습을 보고, 학생의 동아리 동료들은 감히 다가가지도 움직이지도 못했다.

“위생벼어어엉!”

친구를 부축한 남자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서였다. 다가갔다간 무슨 짓을 당할지 모른다.

그때였다.

“플레하노브, 뭐 해요?”

모델 같은 여자가 남자들 사이로 다가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남자들이 그녀에게 복종하듯이 1자로 갈라진 것이다. 확실하게 나뉜 서열이었다.

그걸 본 학생들은 확신했다.

‘마피아다…….’

그리고 저 여자는 마피아 두목의 딸이다.

왜 마피아들이 케이팝 커버 댄스 대회 예선 심사장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위험하다.

‘친구야아…….’

케이팝 커버 댄스 동아리 학생들은 친구를 애도하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