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6화
러시아 음악 시장 규모는 세계 10위 초반이다. 10위 초반이라지만, 겨우 1조에 닿을까 말까 한 수준.
그런데 이건 한국도 마찬가지다.
괜히 KS 엔터가 창사 초기 일본 진출에 사활을 걸었던 게 아니다.
‘한국에서 성공해봤자 대기업이 될 수 없다.’
정호환이 십수 년 전에 회장에게 한 말이라고 했던가. 정말 그러하다.
확실히 경제적으로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는 지금도 시장이 작은데, 과거엔 오죽했을까.
그렇더라도 한국 시장이 결코 무시해도 될 수준이란 건 아니다.
세계 10위권 시장인데 어떻게 무시할까.
러시아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진 방도가 없었어.’
러시아는 인구 1.5억이 잠자는 시장이다.
하지만 뚫을 방법이 없다.
그나마 뚫는 이들이라면 유럽권 록스타나, 과거 제이팝의 황금기를 장식했던 뮤지션들 정도일까.
이른바 음악 산업의 기득권층이다.
‘우리가 러시아 땅을 밟으려면 정부 도움을 받는 정도가 최선이었지.’
대한민국 정부가 주최하는 뮤직 산업 페어에 이름을 끼워 넣거나, 한러수교 00주년 기념행사로 파고 들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해외 팬덤이 굉장하다는 소녀연맹이 러시아 땅을 밟겠다고 한다.
이는 역사적이었던 KS 엔터의 일본 진출과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적어도 1팀장은 그리 판단했다.
1팀장은 KS 엔터에 몸담은 관리자 직급으로서, 회사의 연혁과 업적을 모두 꿰뚫고 있다.
‘KS 엔터가 일본에 진출할 거라고 했을 때 전부 다 미친놈 취급했다지.’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시 한국은 일본 문화가 죄악처럼 취급되던 시기였다.
새천년에 이르러 일본 문화 개방이 2차, 3차, 4차를 거치고 나서야 제이팝 앨범 판매가 허락될 정도였으니.
게다가 당시 일본은 명백히 한국보다 문화적으로 선진화되어 있었다. 일본은 당시에도 음악 산업 규모 2위였으며, 규모에서 나오는 세련됨은 한국이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본에 진출하겠단 말은 헛소리처럼 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헛소리와 미친 짓은 실현되었다.
KS 엔터는 신화가 되었다.
현재의 러시아라고 그러지 말란 법이 있을까?
‘안 될 거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전부 보통 사람에 불과하다.
보통 사람들은 앞을 볼 수 없다.
특히 문화는 다수결로 길이 열리지 않는다.
1팀장이 체득한 KS 엔터의 기풍이었다.
그런 그가 판단하기에…….
‘소녀연맹의 행보엔 분명 뭔가 있다.’
1팀장은 탁자에 둘러앉은 다른 매니지먼트 팀장들을 흘겼다.
그들도 1팀장과 같은 마음일 것이다.
‘소녀연맹은 일본을 제패했어.’
말 그대로다.
향후 몇 년간 소녀연맹이 일본에서 지니는 위상을 따라잡을 걸그룹이 나올까 싶을 정도다.
신화라고 불려야 마땅한 성공이다.
중소 기획사 소속인 소녀연맹은 그야말로 맨땅에서 일어나 일본을 제패했다.
그건 업계인들에게 감탄보다 차라리 경악에 가까운 감정을 품게 했다.
‘어차피 일본에서 수금하듯이 팬덤 돈이나 빨아먹고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소녀연맹은 일본에 또 다른 본진을 차렸다.
그만한 신화를 이뤘다.
‘러시아라고 안 될까?’
정리하자면, 팀장들이 어떻게 해서든 이 행사에 얼굴을 들이밀고 싶어 하는 이유는 두 개다.
첫째, 소녀연맹의 이름값을 빨아먹으려고.
둘째, 만약 소녀연맹이 일본에 이어 러시아에서도 자생적인 팬덤을 구축하는 데 성공해냈다면…….
‘러시아의 케이팝 시장 자체가 유의미한 규모를 이뤘을 가능성이 있다.’
소녀연맹이 개척할지도 모를, 그리고 개척했을지도 모를 그 시장을, 다른 이들도 받아먹길 바란다.
미국에선 WTP가 케이팝 입덕 담당이라고 하던가? WTP 노래를 들어보다가 케이팝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러시아에선 소녀연맹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반드시 우리 애들이, 케이어스가 가야 한다.’
얘들아, 응원해줘.
1팀장은 눈을 질끈 감고 사랑스러운 우리 애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에리카, 민주, 소유…… 진저는 나가 있어.
“아니 팀장님들 진짜 너무하네! 내가 먼저 물어온 건데……!”
약 30분에 이르는 개싸움 후, 1팀장은 아무런 소득 없이 회의실을 나왔다.
그리고 곧바로 연습실의 진저를 찾았다.
“진저, 일이다.”
“휴식 기간임미다.”
“휴식인데 회사엔 왜 나왔어.”
“제 개인 시간에 어디에 있든 무슨 상관임미까.”
“네 말이 옳다.”
1팀장은 반드시 말싸움에서 승리하는 법을 안다. 말이 안 통하는 사람에게 ‘네가 옳다’라고 말한 뒤 신경 끄는 것이다.
“아무튼 일이 있어.”
“뭠미까.”
1팀장이 사정을 설명했다.
“알겠지? 너 박 이사님이랑 소녀연맹 아라랑 친하잖아. 가서 좀 구슬려 봐.”
1팀장은 진저에게 특기를 발휘할 것을 요청했다. 그물처럼 얽힌 꽌시의 망을 활용하란 것이었다.
“…….”
그런데 진저의 표정이 안 좋았다.
“그건…… 사적인 청탁 아님미까?”
“아니 너 지금까지 이사님들한텐 청탁 많이 해놓고 왜 이것만 망설이는데! 박 이사님한테 부탁하는 건 진짜 청탁이 맞지. 근데 아라는 아니잖아? 둘이 친구잖아? 그리고 너도 가로 엔터 신규 채용 홍보 영상에 출연해줬잖아? 이건 청탁이 아니라 주고받기 아닐까?”
사실, 1팀장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소녀연맹에게 해준 게 얼마인데!’
해주려고 마음먹고 해준 게 아니긴 하다.
가로 엔터는 소녀연맹의 마케팅 전략에 케이어스를 이용해왔다. 바로 소녀연맹과 케이어스의 라이벌 구도다.
맨바닥에서 일어난 중소 출신 소녀연맹.
태어날 때부터 귀족, 대형 기획사 출신 케이어스.
사람들은 언더독 소녀연맹을 응원하였고, 그 결과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팬덤 응집력을 획득했다.
물론 가로 엔터가 이를 전략적으로, 주도적으로 사용했는지는 모르겠다만.
‘분명 그랬을 거야.’
1팀장은 확신을 담아 추측했다.
가로 엔터는 소녀연맹과 케이어스의 라이벌 구도를 부각하는 데 큰돈을 썼을 것이다.
바이럴 회사에 돈을 억 단위로 가져다 바쳤겠지. 아니면 회사 차원에서 댓글 부대를 운용할 수도 있겠고.
물론 망상이다.
1팀장의 추론은 어느 정도 억울함이 배어 있었다.
소녀연맹이 케이어스 덕을 봐서 성장했다고 생각하기에, 가로 엔터가 부채감을 느끼길 바랐다.
에리카가 도망갔을 때, 성필이 에리카를 찾으러 갔던 건 그러한 부채감의 발로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마 그래서 에리카의 믹스테입에 프로듀서로 참여했던 거겠지.
“…….”
진저는 한숨을 내쉬고 떨떠름하게 답했다.
“박 이사님께 말해보겠슴미다.”
“어, 박 이사님한테? 괜찮겠어?”
“네. 오히려 박 이사님이 편함미다.”
하지만 진저는 폰을 손에 쥐곤 한동안 ‘통화’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왜 그래? 손가락에 쥐 났어?”
“전에, 박 이사님과 마지막 연락한 게, 좀 무례했슴미다…….”
“뭐? 중국어로 욕이라도 했어?”
진저가 성필과의 문자 내역을 보여주었다.
마지막이 ‘아오아’ 영상 게시일이었다.
[성필: 아오아 봤어요]
[성필: 진저 씨 너무 멋져요]
[진저: 그렇습니까.]
“아니 미친, 개무섭네. ‘그렇습니까’는 뭐야?”
“…….”
1팀장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박 이사님이 너한테 뭐 나쁜 짓이라도 했어? 나쁜 말이나?”
1팀장은 이런 인간들을 많이 보아왔다.
돈 좀 있다고 어린 연예인들에게 찝쩍거리는 인간들. 남녀를 가리지 않고 추악함이 얼굴 모공에서부터 번들거리는 인간들이었다.
성필도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나?
“저 혼자 박 이사님한테 화난 상태였슴미다.”
“뭐?”
“그, 아오아에서…….”
진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님미다. 잊으십쇼.”
화가 났다고?
1팀장은 다시 문자 내역을 보았다.
[진저: 그렇습니까.]
마침표가 찍힌 게 특히 더 무서웠다.
성필도 겁을 먹었는지 답장이 없었다.
1팀장이라도 겁먹었을 것이다.
“왜 화났는데? 이유가 정확히 뭔데?”
“아 왜 이렇게 끈질김미까! 잊으라고 하지 않았슴미까!”
“뭐, 설마 이런 건 아니지? 박 이사님은 케이어스 팬이어야 하는데, 촬영 때 아라 무대를 더 좋아했다던가? 알지 알지. 팬 뺏긴 기분, 나도 알지. 난 아이돌이었던 적이 없긴 한데 알아.”
“알긴 뭘 암미까! 됐슴미다. 1팀장님한테 얘기한 제가 바보임미다.”
진저는 부끄러움을 숨기려는 듯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질끈 감은 눈에선 낭패감이 엿보였다.
‘에휴, 진짜.’
1팀장은 헛웃음을 뱉었다.
‘애다 애.’
* * *
“이 새끼 우리 말 쓰는데?”
플레하노브는 임시 병영을 거닐던 중, 병사가 유쾌한 어투로 말하는 것을 들었다.
병사는 동료와 함께 방금 이송된 포로들의 근처에 있었다. 그중에서도 한 남자의 앞에 서선 위협하듯 발을 까딱이는 중이다.
“이 마을에서 잡은 놈들은 다 다른 말 하던데.”
“여기 원래 우리말도 쓴다더라.”
“그래?”
병사가 포로를 향해 위협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근데 존나 건방지네? 다시 말해봐, 뭐라고 했냐?”
포로는 불쌍할 정도로 떨고 있었다. 사람이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저렇게나 떨 수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포로가 눈물을 글썽이면서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담배…… 한 개비만…….”
“이 미친놈이…….”
“그만.”
병사가 포로를 구타하려던 것을 플레하노브가 멈춰 세웠다.
병사들은 플레하노브를 보곤 경례했다.
“뭐 하는 거냐?”
“이 새끼가 담배를 달라지 않습니까.”
플레하노브는 포로를 흘겼다.
군복을 입었다. 그는 숨을 쉴 때마다 몸을 움츠렸다. 아마 몸쪽 어디 뼈가 부러진 듯했다.
고통스럽고,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런데도 병사들에게 담배를 달라고 한다.
본인이 어떤 꼴을 당할지 예감한 듯하다.
“다른 놈들 끌고 가라. 이놈은 내가 데려가겠다.”
“설마, 진짜 주시려는 겁니까?”
병사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이놈이 이반을 쐈습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라.”
“…….”
병사들은 약 3초, 플레하노브를 노려보다가 경례했다. 플레하노브는 그것을 대충 받아주었다.
포로는 여전히 두려움에 차서, 또한 희망을 품고 플레하노브를 바라보았다.
플레하노브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 그의 입에 물려주었다. 불도 함께였다.
그는 담배를 빨아들였다.
입술로 담배를 필사적으로 붙잡고, 숨을 몇 번이고 깊게 들이켰다.
연기가 나풀나풀 날아간다.
이윽고 그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꿈은.”
플레하노브가 물었다.
악셀로트 소령이 보았다면 물리력을 써서라도 그를 제지했을 것이다.
군인은 적을 인간으로 인식해선 안 된다. 그러는 순간 누구보다 빨리 무너지기에.
베트남 전쟁 때, 적이 숨어있던 민가를 수색하던 어느 미군이 울면서 기절한 적이 있다. 그 집에 엘비스 프레슬리의 앨범이 있었기 때문이다.
적이 자신과 같은 노래를 듣는 인간이란 사실이, 그에겐 견딜 수 없는 충격이었던 것이다.
“꿈은, 있나?”
플레하노브는 포로에게 꿈을 물었다.
인간의 기본조건이다.
포로가 여전히 흐느끼면서 답했다.
“바리스타…….”
플레하노브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까진 묻지 않았다.
* * *
플레하노브는 신경안정제를 물과 삼켰다.
선전관이 그걸 보면서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걸 아직도 드십니까?”
“건강하단 증거지.”
플레하노브가 활기차게 답했다. 그는 입꼬리를 올렸다.
“PTSD를 안 겪는 군인은 인격적인 기형이라지 않나. 나는 지극히 정상적인 인간이란 뜻이지. 건강하단 거야.”
“그럼 저는 인격적 기형입니까? 제정신이 아니라고?”
“어쩌면.”
선전관은 ‘하, 하’ 웃곤 주변을 둘러보았다.
플레하노브의 카페였다.
장사를 마친 후, 테이블을 전부 구석으로 밀어버리고 연습실로 삼고 있다.
결국 로자와 인민이들은 케이팝 댄스 커버 대회에 나가기로 했다. 당연히 주모자가 로자였으므로, 연습 또한 그녀가 감독했다.
“자자, 다들 일어나세요!”
로자가 박수를 치자 지친 인민이들이 하나둘씩 일어났다. 다들 피로한 낯빛이었다.
당연하다.
생업을 마치고 와서 또 춤을 연습하는 것이니. 게다가 로자가 워낙 엄한 선생인지라, 다들 땀을 흠뻑 흘렸다.
로자는 근육질인 인민이들이 힘들어할 춤도 곧잘 추었다.
“다시 처음부터 맞춰볼게요! 우리 소련이들한테 부족한 모습을 보일 순 없잖아요! 소련이들을 감동시키는 거예요!”
로자가 중앙에 서고 인민이들이 대열을 맞췄다.
“그럼, 시작합니다.”
로자의 눈에 불꽃이 맺혔다.
“‘아라베스크’.”
* * *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성필은 수화기 너머 마이어의 목소리에서 불안과 피로를 느꼈다.
[일이 이렇게 커질 거라고 누구도, 심지어 저조차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케이팝 스타들이 줄줄이 참여 요청을 보내올 줄은…….]
그건 성필도 예상하지 못했다.
[상부에서도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나온다고 한 아이돌이 전부 나온다면, 행사 당일을 포함하여 앞뒤로 모스크바의 숙박 시설이 전부 만원이 될 겁니다.]
행사에 모일 수백 명.
아니, 수백 명이 무엇인가.
수천, 수만 명을 위한 교통편은?
그로써 발생할 교통 대란은?
또한 이 대회와 관련없는 다른 관광객들의 숙소는?
원래라면 주목받지 않았을 문화 행사 하나가, 며칠간 모스크바 시민들의 불편을 초래할 수도 없다.
시민뿐 아니라 관광객들도 불편한 교통과 만원인 숙박 시설 때문에 고통을 겪겠지.
[너무, 너무 갑작스럽습니다. 벌써 낌새를 눈치챈 숙박업소들이 프리미엄을 끼얹기 시작했습니다.]
“많이 피곤하신가 보네요.”
마이어의 목소리에 담긴 피로는 갑자기 밀려든 행정 업무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이 일을 대충 진행했을 경우 마이어는 물론 마이어 위로 몇 줄이 된통 깨질 것이다.
[아.]
마이어는 자신의 잘못을 깨달은 듯 다급히 말했다.
[죄송합니다. 신세 한탄을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저한테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으셨던 거죠?”
[예, 염치없지만 심사위원이 될 아이돌을 골라주셨으면 합니다. 저는 소녀연맹에만 관심이 있을 뿐, 다른 아이돌들이 지니는 위상을 모릅니다. 유명한 그룹만 고르면 곤란합니다.]
그럴 것이다.
예를 들어 소녀연맹, 케이어스, PTR―17이 한자리에 모이면 모스크바가 케이팝 관광객들로 가득 찰 것이다.
특히 케이팝 아이돌을 직접 접하기 어려운 동유럽권 팬들이 잔뜩 몰려들겠지. 심지어 서유럽권 팬들도 몰려들 것이다.
웬만해선 만나기 어려운 스타가 그나마 가까운 나라에 온다고 하니, 당연히 만나고 싶을 터다.
‘나도 곤란한데.’
성필의 선택이 모스크바의 행정 피로를 유발할 수 있다는 거 아닌가.
어쩌면, 이 순간이 성필이란 인간의 절정기일지도 모른다. 그의 선택이 수백만 명의 일상에 영향을 끼칠지도 모르지 않는가.
앞으로 이만한 영향력을 발휘할 일이 또 생기기나 할까.
‘이건 더 이상 우리가 어찌할 일이 아닌 거 아니야?’
다른 곳이라고도 뾰족한 수가 있겠냐마는.
[박 이사님을 탓하지 않을 겁니다. 그냥, 소녀연맹보다 인지도가 적은 그룹 멤버들로 골라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음, 그렇다면,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마이어가 진심에서 우러나온 감사를 전했다.
애초에 이 기획을 집행하는 것부터 마이어에겐 큰 부담이었을 터다.
심사위원을 고르는 걸 그녀 혼자, 혹은 다른 팀원들끼리 했다면 며칠이 걸렸을 수도 있다.
팬덤과 영향력이란 건 단순히 앨범 판매량 같은 걸로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아마 맹인이 코끼리 다리를 더듬듯이, 혹은 살얼음판을 걷듯이 조심조심 업무가 진행됐겠지. 그 결과는 당연히 원활할 리 없고.
“그런데 대회 참여자들은 어떻게 뽑나요?”
[저희가 일차적으로 심사합니다. 벌써 참가 의향을 나타낸 팀이 굉장히 많아서…….]
“설마 해외도 있어요?”
[실은, 프로젝트 기획 초기에 해외 케이팝 댄스 커버팀 몇 개를 섭외했었습니다.]
케이팝 커버 댄스만으로 수십, 수백만 구독자를 유지하는 채널들도 있다.
마이어는 그런 팀들도 참여하면 인지도 향상에 도움이 되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대회의 질도 보장되고 말이다.
[그런데 그 외에도 해외의 여러 팀이 참가 의사를 보내왔습니다. 소녀연맹 덕분이겠죠. 아마 대회의 질은 기대 이상일 겁니다.]
일반인들이 참여한다는 의미는 퇴색되겠지만, 보는 맛이 있을 것이다.
[하양 씨도 지루하진 않으실 겁니다.]
통화를 끝낸 성필은 심사위원 참여 희망 의사를 드러낸 그룹들을 확인했다.
‘정말 많네.’
유명한 그룹도 많지만, 아닌 그룹이 더 많다.
어떻게든 기사에 소녀연맹과 함께 이름이 적히고 싶은 그룹들 말이다.
벌써 성필은 사적으로 연락을 많이 받았다. 몇몇은 울기까지 할 기세였다. 오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성필은 그들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
‘사소한 일 하나라도 그룹의 인지도를 높이는 데 도움이 되니까.’
그리고 그런 일 하나도 목마른 그룹들은 널렸다. 만약 성필도 그런 처지였다면, 우는 건 당연하고 직접 찾아가 무릎 꿇고 매달렸을 것이다.
그렇기에 더 고민된다.
‘소녀연맹보다 인지도는 낮지만 심사위원의 자격을 갖춘 그룹 멤버?’
……잠깐.
‘이거 설마, 마이어 씨가 배려해준 건가?’
어찌 보면 이건 커다란 이권 경쟁이다.
그 이권을 분배할 권한이 성필에게 있다.
‘마이어 씨한텐 곤란한 문제일 뿐이지만, 우리는 이걸 무기로 쓸 수 있으니까?’
과연 마이어가 거기까지 생각하고 권한을 성필에게 준 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성필은 이 권한을 아니, 특권을 쓸 수 있게 됐다.
애초에 공정한 선발이란 게 불가능하다.
심사위원의 자격 같은 걸 어떻게 따진단 말인가? 아이돌들로 오디션 프로그램을 열 수도 없고.
‘마이어 씨가 제시한 조건은 하나뿐이야.’
소녀연맹보다 인지도가 낮을 것.
그럼 나머지는 성필의 자의적인 판단이다.
‘이걸로 뭘 얻을 수 있지?’
…….
없다.
성필은 김이 팍 샜다.
‘소녀연맹보다 인지도가 낮은 아이돌……. 그런 아이돌의 회사에서 소녀연맹이 얻어낼 게 뭐 있겠냐.’
그나마 지인들에게 기회를 주어서 체면을 높이는 거 정도일까.
안 그래도 유하음이 맡은 보이그룹인 ‘웨이퍼센트’의 이름이 있다.
그들은 아직도 통한의 앨범 판매량 10만 장 선을 못 벗어나고 있다. 1, 2년 전에도 이랬던 거 같은데.
10만 장 선을 지키는 그들도 대단하고, 끊임없이 뒤에서 서포트해주는 팬들도 대단하다.
탈덕이 거의 없단 뜻인데, 비결이라도 있나.
“……잠깐.”
이거,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홍규헌은 가로 엔터에 두세 개의 그룹을 가져올 거라고 선언했었다. 그중 하나로 점쳐지고 있는 게 우효민이 속한 이음 엔터다.
‘어차피 한 식구가 될 거라면, 효민이한테 주는 게 낫잖아.’
성필은 재빨리 우효민의 이름을 메모했다.
그리고 다음.
‘웨이퍼센트.’
통한의 10만 장벽이라고 불리는 그룹이다.
탈덕도 입덕도 거의 없는 그룹.
그 회사는 지금 망해가고 있다. 옛날부터 낌새가 안 좋긴 했다.
‘하음이가 자주 매니저 대타를 뛰어달라고 했었지. 자꾸 매니저들이 도망간다고. 게다가 민정이한테 안무 시안비도 안 줬었지. 그거 때문에 민정이가 나한테 대신 돈 받아달라고도 하고.’
그럴 이유가 있다. 회사를 양아치들이나 다름없는 인간들이 굴리고 있으니까.
유하음이 말하길, 웨이퍼센트의 성공은 기적이라고 불러야 할 지경이다.
그런데 그 기적을 자신의 능력이라고 믿은 대표와 그 하수인들이 걸그룹을 론칭했었다.
망했다.
그리고 그 회사는 웨이퍼센트를 ATM으로 써서 겨우겨우 연명 중이고.
“팔 거야…….”
만약 가로 엔터가 그 회사를 사겠다고 하면, 그 회사는 팔 거다. 아니, 팔게 해야 한다.
생각해보면 이득이 많다.
‘보이그룹 매니지먼트 노하우를 가져올 수 있으니까.’
프로듀싱 노하우는 필요 없다.
그 인간들의 프로듀싱이 성공한 건 기적이니까. 기적을 다시 만들어내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다.
유하음, 그 친구의 한탄이 자꾸만 들린다.
‘나도 애들 때문에 붙어 있지. 애들도 가지 말라고 붙잡고. 나 없으면 자기들 죽는다고. 진짜 그럴 거 같아서 무서워.’
안 그래도 계약에 묶여 잠도 못 자고 스케줄만 돈다고 한다.
성필은 소녀연맹이 데뷔하기도 전, 웨이퍼센트의 로드매니저 대타를 뛰었을 때가 떠올랐다.
‘다들 날이 서 있었지.’
막내인 유빈은 대놓고 성필에게 시비를 걸기까지 했었다. 성필이 1일 대타란 것을 밝히자 바로 사과하긴 했다만.
그들에겐 회사도 집이 아닌 것이다.
유하음과 멤버들만이 유일한 동료이자 믿을 만한 친구이기에, 자연스럽게 외부를 향해 가시를 세운다.
‘회사에서 어떤 대우를 받는지 알 만해.’
그 회사는 웨이퍼센트의 성공을 지속, 발전시킬 생각이 없다. 그냥 돈 나오는 구멍으로만 본다.
가로 엔터가 가져올 수 있으면…….
‘근데 인수합병이나 지분 구매가 그렇게 빠르게 가능한가?’
성필은 한구인에게 호다닥 달려가서 물어보았다.
“가능합니다. 합의만 한다면요. 당장 내일이라도 가능합니다.”
“아, 그래요?”
성필은 홍규헌에게 호다닥 달려갔다.
“웨이퍼센트? 10만 장벽?”
“네, 지금이 적기 같아요. 그러니까, 만약 2, 3주 내에 인수할 수 있으면요.”
“박 이사, 거래란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니거든. 상대는 물건을 비싸게 팔고 싶겠지? 그럼 간을 볼 거 아니야. 회사라면 더 그럴 거고. 간 보는 기간이 당연히 몇 주는 넘을 거야.”
“웨이퍼센트 2년 뒤면 재계약 시즌이에요. 재계약할 리 없어요! 회사는 망하기 직전이고. 그럼 웨이퍼센트의 2년 순익보다 높게 부르면 받아들이지 않을까요?”
“걔네 2년 순익을 우리가 어떻게 알고?”
성필은 유하음에게 전화해서 물어보았다.
유하음은 너무나 쉽게 답변해주었다.
의외로 적었다.
“아니, 그거밖에 못 벌어? 보이그룹은 그보다 훨씬 잘 버는 거 아니었어?”
“A&R 시스템이 제대로 돼먹질 못했으니까요. 옛날에 막무가내로 앨범 찍어냈다가 팬들이 소속사 창문에 계란 던지고 페인트칠하고 그랬거든요. 그래서 없는 실력으로나마 조심조심하면서 앨범 발매하고, 활동 이어가고 그래요. 그러다 보니 자금 낭비가 심할 수밖에요.”
“걔네는 진짜 소년가장들이네.”
“그리고 수익 사업을 우리만큼 체계적으로 못 해요. 주먹구구식 회사의 한계라고 할까요.”
“회사가 그럴 수도 있구나.”
그리 말한 홍규헌은 잠시 뜸을 들였다.
“그럴 수도 있지…….”
아마 과거의 실패를 반추했던 듯하다.
아무리 돈이 많거나 그룹의 인지도가 높더라도, 그 성공을 지속하고 발전시키는 건 아예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근데 박 이사, 아무리 상황이 맞아떨어져도 회사를 산다는 건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내가 아까 말했지? 간을 볼 거라고. 누가 칼 들고 회사 팔라고 협박하는 게 아닌 이상에야, 몇 주 만에 선뜻 ‘팔겠습니다’ 하질 않을 거라고.”
“음…… 예를 들어 대표 집이 불타서 빨리 새집을 장만해야 한다던가요?”
“아니 무슨 비유를 그렇게 무섭게 들어. 그쪽 대표 집에 방화라도 하게?”
“그냥 생각나는 말 한 건데요. 방화를 직접적으로 떠올리는 사장님이 더 무서워요. 근데, 웨이퍼센트는 진짜 가망 있는 그룹이에요. 10만 장벽도 그렇잖아요. 회사가 더럽게 일 못 해도, 그룹의 힘만으로 팬덤을 유지하는 거예요. 진짜 드문 일이라고 봐요.”
그 정도면 웨이퍼센트 멤버들에게 팬을 홀리는 페로몬이 있다고 봐야 한다. 한 번 맛보면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페로몬 말이다.
“……박 이사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네?”
“뭔가를 사려면, 상대가 팔려고 해야겠지?”
“그으, 그렇죠?”
“그리고 회사란 물건은, 상대가 팔려고 하지 않는 이상에야 사양을 알기 어려워. 재정 상태나 직원 수, 관리 시스템 같은 게 회사의 사양이잖아. 그러니까 박 이사가 하는 말은, 컴퓨터를 사려는데 그 컴퓨터의 사양이 정확히 어떤지 모르고 사겠단 말이야.”
“저, 회사는 IR(Investor relations)을 게시하지 않나요?”
IR은 투자자들을 대상으로 한 기업 홍보 자료 같은 것이다. 가로 엔터도 소녀연맹 이전부터 가로 엔터 홈페이지에 IR을 게시하고 있다.
가로 엔터에서 이는 한구인의 담당이다.
임원과 주주의 증권 소유 현황.
회사의 주식 보유 보고.
계약에 의한 회사 자산 취득 보고.
주주총회소집 공고, 주주총회 결과.
루머에 대한 회사 차원의 해명 등.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분기보고서가 있다.
성필도 보고서란에 ‘회사 임원의 향후 전망 예상’ 같은 곳에 몇 글자 적어넣기에, 가로 엔터의 IR을 대략적으로 파악하고 있다.
‘전생에서 내가 깊이 개입하진 않았지만, 석세스 엔터도 했던 거고.’
가로 엔터도 하니, 웨이퍼센트의 소속사도 IR을 올릴 것이다. 회사의 내밀한 속사정은 모르더라도, 홍규헌이 말한 ‘기본적인 상품의 사양’ 정도는 알 수 있을 터.
“우리가 특이한 거야.”
홍규헌이 말했다.
“한 이사가 있어서 체계적으로 할 수 있던 거고. 모르긴 몰라도, 우리가 상장할 때 신뢰성을 꽤 담보할 수 있을 거야. 몇 년이나 체계적으로 정리되어온 IR이 있으니까. 웨이퍼센트 쪽은 이런 거 없을걸?”
성필은 폰을 꺼내어 웨이퍼세트의 소속사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홍규헌의 말대로, IR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알림 페이지가 있긴 했는데, 정말 기본적인 알림이 전부였다.
누구의 계약이 연장된다, 누구의 앨범이 발매됐다, 허위사실 유포 고소가 진행 중이다…….
새삼 한구인의 대단함이 느껴진다.
웬만한 기업은 생각지도 못하는 걸, 옛날부터 홀로 관리해오고 있었다니.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렇겠네요. 저희는 그쪽 회사의 사정을 거의 모를 테니…….”
“막말로, 그쪽 멤버 한 명이 극심한 정신적 이상을 호소해서 곧 빠져야 한다면? 아니면 다들 재계약 의사가 없다면? 그것도 아니면 회사 부채가 커서 매각이 불가능한 상황이라면? 우린 그 회사가 어떤 상태인지 아무것도 모르잖아.”
성필은 시무룩해졌다.
홍규헌은 그를 위로하듯 그의 상박을 두드려주었다.
“박 이사 말은 알겠어. 웨이퍼센트란 그룹만 보면, 어떻게든 가져오고 싶은 인재들이란 거지? 뭐어, 우리 가로 엔터의 목적에도 부합하고. 그럼 전문가들이 나서야겠네.”
“전문가요?”
“응.”
얼마 전에 결성된 가로 엔터의 학벌 카르텔.
그중 한 명.
“김덕팔 부장님이요?”
“아니? 한 이사인데?”
“왜 굳이 학벌 카르텔을 들먹이신 거예요.”
“재밌잖아. 회사에 사조직이 생기다니. 즐겁네. 무슨 비밀조직 같아서.”
그리 말하는 홍규헌은 정말 즐거워 보였다.
“한 이사한테 한번 접촉해보라고 할게. 박 이사는 박 이사 나름대로 그쪽 정보 수집해줘. 거기에 친구 있댔나?”
“네, 유하음이요.”
“그럼 쉽겠네.”
“근데 회의 한번 없이 바로 결정하셔도 돼요?”
“알아보기만 하는 건데 뭐. 어차피 쇼핑은 해야 해. 쇼핑 목록을 업데이트하긴 해야 하잖아.”
쇼핑 목록 업데이트라.
상황에 들어맞는 말이다.
홍규헌은 우효민이 속한 이음 엔터처럼, 앞으로 한두 개 그룹과 회사를 쇼핑해야 한다.
그러려면 쇼핑 목록을 업데이트해야겠지.
“근데, 이음 엔터는 한식구 되는 거 확정이에요?”
“내가 직접 가서 확인해보게. 대략적인 사정은 봤는데, 뭐어, 그럭저럭이더라고. 그래서, 더 할 말은?”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박 이사를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성필은 사장실을 나오면서 생각을 가다듬었다.
‘효민이는…… 명운이 형이랑의 인연을 봐서 심사위원에 넣도록 하고. 웨이퍼센트는 아직 보류.’
소녀연맹 장하양.
사랑의 응급 구조요원 우효민.
그리고 웨이퍼센트 멤버 한 명.
이렇게 하면 심사위원 구색이 맞겠지.
웨이퍼센트가 안 되면 그때 다른 이를 구해도 될 것이고.
‘앞으로 여기저기서 연락 많이 오겠네.’
성필의 마음이 이미 정해진 줄도 모르고.
그때 기다렸단 듯 성필의 폰이 울렸다.
“음?”
전혀 예상치 못한 이름이다.
“진저 씨?”
[안녕하심미까, 이사님. 오랜만임미다.]
정말 오랜만이다.
케이어스가 컴백하고 ‘박 이사님 저희 컴백곡 어땠슴미까? 눈물 흘렸슴미까?’란 연락을 보낸 이후로 거의 처음이다.
거의 처음이라고 한 이유는, 바로 직전의 연락이 그다지 안 좋았기 때문이다.
[성필: 아오아 봤어요]
[성필: 진저 씨 너무 멋져요]
[진저: 그렇습니까.]
마지막에 찍힌 마침표가 너무 무서웠다.
성필은 ‘진저 씨가 이젠 나랑 친구하기 싫구나……’라 생각하면서 시무룩했었다.
그렇겠지.
35살 아저씨랑 친구하고 싶진 않겠지.
작년엔 ‘박 이사님은 제 은인임미다. 진심임미다. 이 관계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슴미다’라고 했으면서…….
그래도 먼저 연락을 주니 기쁘긴 하다.
아마 저번에는 모종의 이유로 기분이 안 좋거나, 뭔가 바쁜 일이 있던 거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겁먹어서 물러나지 말고 계속 연락을 주고받았으면 좋았을…….
[러시아 대회 주최 측에 케이어스 이름 넣어달라고 해주시면 안 됨미까?]
청탁이었나.
성필은 슬퍼졌다.
진저가 성필의 팬심을 도구로 이용하는 거 같아서. 아니, 실제로 그렇겠지…….
[박 이사님?]
진저의 목소리에선 마지못해서 한다는 느낌이 풀풀 풍겼다.
‘진저 씨, 어쩌다가 이렇게…….’
이제 정말 ‘유스’이길 포기하고 ‘썸이 1호’로만 살아야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