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4화
플레하노브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르른 동시에 햇볕이 쨍하다.
인상을 쓰며 손바닥을 이마에 붙여 빛을 막았다. 눈가에 그늘이 지고 나서야 눈을 제대로 뜰 수 있었다.
플레하노브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폐허였다.
“빨리 타 새끼들아.”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보았다.
동료들이 트럭 뒷좌석에 포로들을 태우고 있었다. 그들은 눈에 헝겊을 두르고 손이 묶인 채였다.
십수 명의 포로를 실은 트럭은 어딘지 모를 곳을 향해 내달렸다.
플레하노브는 괜스레 총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몇 걸음 걷다가 다시 하늘을 보았다.
폐허와 어울리지 않게 멀쩡한 모습의 이층집. 그곳의 2층 창에 늙은 여인이 기대어 앉아 있다. 그녀는 무력한 눈빛으로 아래를, 플레하노브를 바라보고 있었다.
플레하노브는 그녀와 눈싸움이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이윽고 그가 먼저 시선을 내리깔았다. 내리깔아서, 그녀의 눈이 향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플레하노브의 뒤, 더러운 천이 씌워진 시체 몇 구가 있었다. 시체들은 그 상태로 방치되는 중이었다.
“플레하노브.”
누군가 플레하노브의 어깨를 짚었다.
악셀로트 소령이었다. 그는 플레하노브의 시선을 따라갔다. 시체에 눈이 멈춘 그는 덤덤하게 말했다.
“조국을 위해서야, 민족을 위해서고.”
일반적인 상하 관계였다면 플레하노브는 짧게 수긍했을 것이다. 하지만 악셀로트는 그의 오랜 친구이기에, 평소였다면 하지 않을 이야기를 했다.
“내 조국과 내 민족이, 이런 일을 하는 건가.”
“그래, 우리가 한 거야.”
전쟁은 모두가 가해자다.
변명은 없다.
플레하노브의 부대는 탱크와 험비 몇 대를 노획한 후, 적군이 쓸 수 있을 만한 재원은 전부 태워버렸다.
부대는 떠나간다.
플레하노브는 수송차 뒤 차량에 앉아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무의식적으로 노랫말을 읊었다.
“불같이 불멸하고 돌처럼 평온한 우리…….”
근처의 동료들이 따라불렀다.
“각 소대와 중대마다 초소에 서 있다.
우리는 나라의 군대, 인민의 군대이다.
우리의 위대한 업적을…….”
플레하노브는 마지막 소절을 삼갔다.
하지만 동료들의 노래는 멈추지 않았다.
“역사가 보우한다.”
전쟁은 놀랄 만큼 짧았다.
전쟁은 러시아, 플레하노브의 자랑스러운 조국과 민족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 * *
플레하노브는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스트레칭했다.
CD플레이어로 다가가 선반을 바라보았다. 그래, 오늘은 이걸로 시작하자.
그가 CD를 집어넣자 스피커에서 경쾌한 사운드가 흘러나왔다.
“흐흐흠.”
플레하노브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커피를 내렸다. 소녀연맹 정규 1집 ‘걸스 유니온’ 첫 번째 트랙이자 타이틀인 ‘아라베스크’였다.
그가 지내는 공간은 주방과 침실이 일체형이라 보아도 좋았다.
커피를 받아 침대 옆 테이블에 둔 그는, 냉장고에서 먹다 남은 샌드위치를 꺼내와 아침을 즐겼다.
‘아라베스크’의 선율을 흥얼거리며 고개를 까딱이던 그는 한국어 비스름한 것을 발음했다.
자신이 생각하기엔 꽤 그럴듯한 한국어를.
“다쳐도 일어서, 우린 가시를 헤치고 나아가, 손을 묶고 기어서라도.”
음미할수록 가슴이 뜨거워지는 가사다.
심지어 이 가사를 말하는 게 소녀들(이제 소녀 아님)이라고 생각하니, 끝을 알 수 없는 용기가 마구마구 솟아난다.
뮤직비디오가 저절로 머릿속에 그려진다.
문화를 지키기 위해 혁명의 화마 속에서 목숨을 걸고 투쟁하는 무용수들…….
“읏차.”
식사를 마친 플레하노브는 아저씨 같은 신음을 흘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설거지, 샤워, 청소까지 마친 그는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자마자 보이는 건 그가 운영하는 카페의 바 테이블이었다.
집을 나서는 동시에 출근이다.
플레하노브는 컴퓨터를 켜서 카페 BGM을 켰다. 카페 곳곳에 설치된 쓸데없이 고가의 스피커로 소녀연맹의 음악이 흐른다.
그냥 소녀연맹 음악은 아니었다.
어느 능력자 인민이가 소녀연맹의 곡들을 재즈 버전으로 편곡한 플레이리스트였다.
‘자, 오늘도…….’
플레하노브는 한적한 카페의 풍경을 훑었다.
어느 것 하나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카페다.
굳이 특별한 점을 꼽자면, 알 듯 말 듯 인테리어 요소로 둔 소녀연맹 굿즈들 정도였다.
‘열심히 살아볼까.’
첫 번째 손님은 단골 노인이었다.
그는 간단한 아침 식사를 주문한 후 구석 자리에 앉아 신문을 읽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하릴없는 주부들이 모여 수다를 떨러 오거나, 시간을 때울 곳을 찾아 어슬렁거리는 학생들이 나타난다.
학생들은 자리를 오래 점거한다. 게다가 팁도 짜게 준다. 그렇지만 플레하노브는 관대하다.
대학생이 돈 없는 건, 우연찮게 사귄 인민이 친구 덕에 알고 있다.
주부들은 팁이 후한 편이다.
“플레하노브 씨 오늘은 더 멋지네요!”
메뉴를 내놓을 때마다 팔을 더듬거나 교태로운 눈웃음을 보내는 것만 빼면, 이들은 아주 좋은 고객이다.
3시에서 4시 사이가 되면 카페가 한적해진다.
플레하노브는 잠시 쉴 요량으로 빈 테이블에 가서 앉았다. 그는 눈을 감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소녀연맹의 곡에 귀를 기울였다.
흥얼거림이 입가에 맴돌려던 순간.
“플레하노브!”
카페 문이 벌컥 열리면서 로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대학생이란 사실을 자랑이라도 하려는 듯, 두꺼운 전공책을 한쪽 팔에 낀 채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엄청난 소식이 있어요!”
“또 파리 패션위크라도 나가나?”
로자가 용돈벌이로 시작했던 모델 일은 예상외로 커다란 수익을 올리고 있다. 무려 파리 패션위크 런웨이를 밟기까지 했으니, 대성공이라고 해도 좋다.
하지만 그녀의 인생 업적은 파리 패션위크가 아니었다. 소녀연맹의 콘서트 VCR에 등장했던 일이 그녀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이었다.
“흐흥.”
로자는 ‘언제까지 평정을 지킬 수 있을까?’란 듯 깔보는 시선을 던졌다.
플레하노브는 그녀의 천진난만함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그래, 뭐든 말해봐. 난 네가 미국의 테크 재벌이랑 사귄다고 해도 안 놀란다.”
“케이팝 댄스 커버 대회가 열려요. 같이 나가요.”
“뭐?”
플레하노브가 아무리 소녀연맹을 좋아한다지만, 커버 댄스 대회에 나갈 마음은 없었다.
아마 10대·20대의 천국일 텐데, 험상궂은 아저씨인 플레하노브가 나가서 뭐 어쩌란 건가? 애들이 겁먹고 도망이나 안 가면 다행이지.
“안 간다.”
“제발 가줘요! 아저씨들 아니면 같이 나갈 사람 없단 말예요!”
“넌 친구가 없나?”
“다 안 나간대요. 애초에 내 친구들은 케이팝 별로 관심 없고.”
“우린 갈 줄 알고?”
“우리는 인민이잖아요!”
플레하노브가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로자는 한 번 마음 먹은 일은 웬만해선 이룬다. 그녀는 정말 댄스 커버 대회에 나가고 싶어 하며, 이는 플레하노브와 다른 인민이들의 참가로 이루어질 것이다.
즉, 향후 며칠간 로자에게 시달릴 거란 뜻이다.
“투쟁! 해방! 소녀! 연맹! 승리! 저희의 인터내셔널은 어디로 갔어요!”
“그거랑 이건 다르다.”
“인터내셔널 정식 의제로 내주세요!”
인터내셔널은 이 카페에서 결성된 소녀연맹 팬클럽의 이름이다.
로자는 늦게 가입한 주제에 특유의 활기참과 실행력으로, 어느새 인터내셔널 간부 자리에 올랐다. 참고로 그녀 스스로 간부라고 부르는 거지, 따로 직책이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의미가 있겠다만, 우리 같은 아저씨들이 나갈 자리는 아니라고 본다만.”
“아뇨, 플레하노브는 나가게 될 거예요.”
로자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번졌다.
* * *
러시아에서 왔다는 일은, 러시아 정부에서 왔다기보다 한국 정부에게서 온 일이었다.
아니, 한국 정부에서 왔단 말도 애매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민간재단으로부터 온 제안이었으니까.
“타국으로 소녀연맹을 부르겠단 말인데…….”
한구인은 그쪽 재단에서 온 제안서를 읽으며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돈을…… 이거밖에 안 주는 겁니까?”
“정부가 직접 실행한 계획이 아니라서 그런 건가 봐요.”
성필의 생각으론, 만약 한국 정부가 직접 추진한 일이었다면 그래도 상도덕에 맞춰 비용을 지불했을 것이다.
하지만 문체부 산하 재단이 부른 돈은 민망하기 짝이 없을 정도였다.
성필이 담담하게 말했다.
“이건 거절해야죠.”
“그렇지만, 간접적이긴 해도 나라가 관련된 일인데…….”
한구인은 걱정을 드러냈다.
“물론 박 이사님의 말씀도 맞습니다. 하지만 이 나라는 제 돈 주고 안 쓰는 데 맛이 들어 있어서…….”
제 돈 주고 안 쓴단 건, 정부가 인력을 정당한 대가 없이,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징발한단 뜻이다.
공무원은 당연하고 의료인, 군인, 민간업체 등 종류를 가리지 않는다. UN 국제 노동 기구가 수십 년 전부터 지적하고 있지만, 딱히 바뀌는 건 없다.
아예 한국 고유 전통이 되어버렸으니까.
문화계까지 그 전통이 적용되는 건 딱히 이상한 일이 아니다.
“‘나라가 시키면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면요? 거절했다가 보복성 세무 조사가 들어오면 어떡합니까?”
한구인이 어두운 미래를 그리자 성필도 갑자기 걱정되기 시작했다.
성필은 제안서를 다시 뒤적였다.
“이게 그러니까, 정부를 뒤에 둔 문화교류 사업이라고 하네요. 먼저 발의된 건 러시아…… 모스크바시(市) 쪽 기관이고요. 그걸 문화교류원이랑 협의하에 진행하는 거고…….”
아무리 봐도 한국 정부가 직접적으로 연결된 일은 아닌 듯했다.
하지만 한구인의 말마따나, 이 일이 어떤 높은 분이 주시하던 일이라 거절했다가 미운털이 박히면?
“한 이사님. 혹시 사장님이 정계에 아시는 분은 없으세요?”
“지금 저에게 사장님의 집안이 정경유착되어 있느냐고 물으신 겁니까? 당연히 아니고, 맞더라도 말씀드리지 않을 겁니다.”
“그런 뜻은 아니고요…….”
“아마 아닐 겁니다.”
“왜 대답이 애매해져요?”
“두 분 다 뭐라고 하는 거예요!”
잠자코 듣고 있던 민경섭이 발끈했다. 아까부터 그는 불안한 눈초리로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만 있었는데, 드디어 폭발해버렸다.
“당연히 받아야죠! 간접적이든 직접적이든 정부가 얽혀 있잖아요!”
민경섭은 애국심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닌 듯했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경섭아, 설마 너 아직도…….”
성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민경섭은 소녀연맹이 지닌 컨셉 때문에 남몰래 두려워한 세월이 꽤 됐다.
소련이란 약칭과 인민이란 팬덤명은 소녀연맹에게 필요 이상의 논란을 달아주기도 했었다. 소녀연맹 데뷔 초의 일이었는데, 그 때문에 다들 마음고생이 심했었다.
그뿐이었다면 민경섭도 이러지 않았으리라.
“이념의 순수성을 증명해야 한다고요!”
웬 북한말을 쓰는 SNS가 소녀연맹을 찬양하는 걸 보곤, 민경섭은 이념의 순수성이란 것에 광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 SNS 계정이 컨셉에 잡아먹힌 한국인이 아니라, 진짜 외국 계정이란 것을 알곤 거의 기절할 뻔했었다.
그 때문에 데뷔 1년 차 때, 소녀연맹은 군부대 공연을 몇 번 가기도 했었다. 심지어 교통편이 마땅하지 않은 섬까지 갔었다.
전부 민경섭의 편집증적인 걱정 때문이었다.
“경섭아, 자꾸 그러지 말고 진지하게 생각해보자. 너 매니지먼트 총괄이잖아. 네 사적인 걱정으로 애들 스케줄을 막 결정하고 그러면 안 되지.”
“형은 안 무서워요? 이 일을 계기로 국정원 같은 데서 저희 전파 감시하거나 하면 어떡해요?”
“너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이 나라 정권들은 1대부터 지금까지 하나도 예외 없이 민간인 사찰을 했다고요! 우리라고 안 그러리란 법 없잖아요!”
“…….”
성필은 한구인과 민경섭을 번갈아 보았다.
둘이 지닌 공포가 성필에게까지 전염됐다.
성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진짜야? 진짜 모든 정권이 다 민간인 사찰하고 감시하고 그랬어?”
“……사실 잘 몰라요. 커뮤니티 같은 데서 옛날에 본 거라서.”
“한 이사님 진짜예요?”
“모르겠습니다.”
“그럼 정말 보복성 세무 조사 같은 게 있어요?”
“그건 없는 국가가 있을까 싶은 정도입니다.”
“아니, 겨우 이런 일로 그럴 리가…….”
케이팝 댄스 커버 대회 참여를 거절했다고 세무 조사를 받는 기업이 있다?
성필은 한숨을 푹 쉬었다.
한구인과 민경섭이 그린 불온한 미래들이 시너지를 일으켜 성필의 정신을 좀먹고 있었다.
“그냥 물어보면 되잖아.”
“어디에 말입니까?”
“여기요. 문화교류원. 계획을 진행하는 게 모스크바 쪽 기관이랑 이 문화교류원이란 데니까, 일단 여기에 연락해서 사정을 들어보죠.”
“그러다가 엄청 높으신 분이 행차해서 협박하면요?”
“경섭아 제발 좀 자중해.”
성필은 민경섭이 짜증 나면서도, 그가 진심으로 무서워하는 모습을 보니 불쌍했다.
매니지먼트 팀의 임무 중에는 리스크 관리도 있다. 민경섭은 리스크 관리를 하는 거긴 한데, 엄청 과하게 하고 있다.
성필은 서류에 적힌 교류원 담당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네, 가로 엔터테인먼트 박성필 이사입니다. 모스크바 케이팝 댄스 커버 대회 일 때문에 연락드렸는데요.”
민경섭과 한구인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성필을 응시했다.
“네, 알겠습니다. 담당자로 바꿔주신대.”
계획 담당자를 기다리는 10초.
민경섭은 그게 영겁처럼 느껴졌다.
곧 성필이 대화를 재개했다.
“가로 엔터테인먼트 박성필 이사입니다. 이 일로 여쭈고 싶은 게 있어서요. 네, 네, 아아, 네. 네? 아, 어, 네, 알겠습니다아…….”
전화는 생각보다 훨씬 빨리 끝났다.
성필은 얼떨떨하게 폰을 쳐다보았다.
“뭐, 뭐래요? 그쪽에서?”
“사람을…… 보내겠다는데?”
“협박이야앗!”
민경섭이 광란 상태에 빠졌다.
* * *
가로 엔터로 찾아온 건 놀랍게도 러시아의 공무원이었다.
30대쯤으로 보이는 그녀는 건물에 들어오자 불안한 듯 여기저기를 흘겼다. 이윽고 그게 실례될 수도 있단 것을 깨닫곤 재빨리 몸가짐을 바로 했다.
“즈, 즈드라스트부이쩨.”
성필은 손혜빈에게 주워들은 러시아어를 사용했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돌아온 건 한국어였다.
외국인 특유의 불안정한 억양이 있긴 했으나, 알아듣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모스크바 첸트랄니 행정구 소속 공무원 마이어 엑셀로트입니다.”
미리 외워 온 것같이 유려한 자기소개였다.
성필은 살짝 안심하여 물었다.
“통역은 필요 없으세요?”
가로 엔터에는 무려 2명의 러시아어 사용자가 있다. 바로 한구인과 손혜빈이다.
“괜찮습니다. 제 부전공이 한국어입니다.”
“아, 정말요?”
성필은 그녀를 2층 응접실로 안내했다.
응접실로 가는 중, 복도 모퉁이에 숨어 바라보는 한구인과 민경섭이 눈에 띄었다.
그들뿐 아니라 소식을 들은 가로 엔터의 전서구, 리카도 있었다.
“아.”
그들을 본 건 성필만이 아니었다.
마이어가 수상한 세 명을 보곤 잠시 멈췄다. 그 즉시 세 명이 복도 모퉁이로 쏙 들어가 모습을 감추었다.
“리카…….”
“리카 아세요?”
마이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압니다. 소녀연맹 좋아해요.”
“러시아에서도 소녀연맹이 유명해요?”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걸그룹 1위입니다.”
“러시아에서 그런 설문 조사를 해요?”
“트잇터에서 한 겁니다.”
“아…….”
그럼 신뢰성이 있다고 보기 뭐했다.
트잇터에서 한 거라면, 아는 사람끼리 리트잇하여 투표한 걸 텐데.
투표는 러시아의 케이팝 팬덤 전체를 돌았다기보다, 취향이 비슷한 이들 사이에서만 돌았을 것이다.
아마 러시아의 인민이들이 주요 대상이었겠지. 그래서 소녀연맹이 선정된 게 아닐까. 그리고 유의미한 수준의 투표자가 있었긴 할까 의심된다.
아마 아니겠지.
“드세요.”
성필은 그녀에게 차를 내주었다. 그리고 살짝 긴장하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협박이야앗!’
민경섭의 광기 맺힌 외침이 머릿속에서 맴돈다.
비록 가로 엔터로 찾아온 건 어딘가의 높으신 분이 아니었지만, 그보다 더 이질적인 인간이 찾아왔다.
러시아 공무원이라고 한다. 아마 한국의 문체부 비슷한 기관의 지방 조직 소속이지 싶었다.
아니면 아까 어디 어디 행정구 소속이라고 했는데, 그러면 시 공무원인가?
어쨌든.
“이야기 먼저 들을 수 있을까요?”
“예.”
마이어는 예의상 차로 입술을 적시곤 바르게 앉았다. 태도나 표정에서 정직함이란 글자가 읽히는 듯했다.
“모스크바에서 케이팝 댄스 커버 대회가 열릴 겁니다. 심사위원으로 소녀연맹을, 단체가 안 된다면 한 분이라도 모시길 희망합니다.”
아이돌을 커버 댄스 대회 심사위원으로 모신다…….
사례를 찾자면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해외 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으로 아이돌이 불리는 경우가 있다.
그걸 제외하고서 가장 직접적으로 이와 맞닿은 사례는…….
“WTP도 전에 간 적이 있었죠?”
“예.”
마이어의 얼굴이 밝아졌다.
WTP는 러시아에서 열린 케이팝 댄스 대회에 심사위원으로 불렸던 적이 있었다.
물론 그땐 WTP의 인지도가 지금처럼 대단하지 않았을 때다. 지금의 위상이라면, 고작 댄스 대회 심사위원으로 모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민경섭의 말마따나 정부의 직접적인 압박이 있다면 몰라도.
“모스크바의 정기적인 문화 행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례를 찾다가 WTP를 발견했던 건가.
하지만 현재의 WTP는 부르는 게 불가능하니 그 대체제로 소녀연맹을 골랐다.
맥락이 맞아들어갔다.
‘문제라고 한다면 역시 돈이네.’
자선하듯 훌쩍 나라를 건널 순 없는 노릇이다.
소녀연맹이 서울의 적당한 행사 하나만 골라 출연해도 수천만 원이 당장 들어온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못한 돈을 받고 국경을 넘어 일반인 댄스 대회의 심사위원 역을 맡는다?
수지타산이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다.
“이유는요?”
성필이 물었다.
돈이 이유가 될 수 없다면, 다른 이유를 찾아야만 한다.
팝스타나 록스타들이 참여하는 후원 콘서트나 자선 공연 등이 그 예시가 될 수 있겠지.
케이팝 아이돌들도 청소년 문화 축제나 공익사업 공연을 거의 무료나 다름없는 비용으로 뛰기도 한다. 기업들이 기부 재단을 설립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소녀연맹이 러시아로 가는 건 아예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다.
‘하지만.’
성필은 마이어를 꿰뚫어 보듯 했다.
‘그냥 공무원으로서 실적 좀 올리자고 우리 애들을 이용하려는 거라면…….’
절대 허락할 생각이 없다.
마이어도 성필의 눈빛이 더 날카로워지자 긴장한 기색을 보였다. 그녀는 답답한 듯 가장 위에 채워진 코드 단추를 만지작거렸다.
그러곤 흠칫하면서 정신 사납게 움직이던 손을 다시 무릎 위로 두었다.
“러시아는.”
마이어가 겨우 입을 열었다.
“정체되어 있습니다.”
“…….”
“……죄송합니다. 한국어로 이야기하려면 문장을 머릿속으로 가다듬어야 해서.”
“아, 괜찮습니다. 천천히 이야기해주세요.”
마이어는 단정한 태도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마음대로 안 되는지 자꾸만 손이 여기저기로 움직인다.
머리칼을 꼬았다가 시선을 돌렸다가 코트 끝자락을 만지작거렸다가.
성필은 그녀가 입을 열 때까지 침착하게 그녀를 응시했다.
‘의외로 피부가 그렇게 하얗진 않네.’
사진으로 보던 러시아 미녀들은 전부 피부가 도자기처럼 하얗었다. 아마 보정이 들어간 사진들이겠지.
가로 엔터의 폴란드 출신 연습생인 콜베르게르 쪽이 그녀보다 더 희다.
한국인과 비교하여 눈에 띄는 건 역시 그녀의 머리칼 색이었다. 염색이 아니라고 주장하듯 자연스럽고 눈이 편한 금색이다.
“러시아는 예술의 나라입니다.”
생각을 마쳤는지 드디어 마이어가 입을 열었다.
“많은 예술가들이 탄생했습니다. 역사를 장식한 별이 손에서 흘러넘칩니다. 러시아인 모두가 자랑스러워합니다. 고전 발레와 클래식이 유명해요.”
성필은 고개를 주억였다.
의외로 러시아는 세계 문화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 조상들이 이룩해낸 눈부신 업적인 고전 발레와 클래식 덕분이다.
러시아의 하이컬처(서브컬처와 대비되는 주류문화를 뜻한다. 하지만 우열을 뜻하는 단어는 아니다) 인프라는 다른 국가와 비교를 불허할 정도다.
“발레와 클래식은 황족과 귀족을 위한 것. 하지만 소련이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바뀌었습니다. 발레와 클래식은 인민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농민과 노동자, 직책의 고하를 막론하고 문화를 즐기게 된 건 소련의 업적입니다.”
러시아 황실의 전폭적인 후원을 등에 업고 세계를 호령했던 발레단과 오케스트라단은, 의외로 혁명 후에 사라지지 않았다.
그들은 소련의 인민을 위해 봉사하는 문화 영웅으로 이름을 바꾸어 존속할 수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현재 러시아에서 고전 예술 산업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소련부터 이어져 온 전통 덕이었다.
“그런데 그게 다입니다.”
“그게 다라고요?”
“러시아의 아이들은 피아니스트를 선망하고 발레리나가 되고 싶어 합니다. 피아노를 배우면 어른들이 칭찬합니다. 발레를 한다고 하면 미래의 누레예브라고 띄워줍니다. 그런데 노래를 배운다거나 거리춤(스트릿 댄스)을 배운다고 하면 이상하게 봅니다.”
이건…… 폴란드 연습생인 콜베르게르에게 들었던 이야기와 비슷하다.
“러시아는 팝 컬처가 생겨나기 힘든 환경입니다.”
그렇겠지. 요컨대 팝(POP)을 위한 유스 시스템이 부족하다.
유스 시스템이란 단순히 학원이나 학교를 뜻하는 게 아니다. 사회의 분위기도 포함된다.
한국에서도 노래를 배운다고 하면 그다지 좋은 시선이 돌아오진 않는다.
춤은 그보다 취급이 박하다. 학교 장기자랑 때 춤을 추는 게 대부분 좀 노는 아이들이기 때문인지, 춤을 배우는 애들은 양아치란 시선이 있기도 하다.
한국마저 이럴진대 러시아는 더하겠지.
그렇지만 한국엔 아이돌이 있다.
무대 위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우상은 아이들이 춤과 노래를 배우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유스 시스템은 훌륭하다.
“그걸 걱정하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이대로도 러시아는 위대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러시아의 문화가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대로는 발전이 없을 겁니다. 러시아는 옛날의 도전정신을 잃었습니다. 니진스키를 아십니까?”
“네. 춤의 신이요. 바슬라프 니진스키.”
“니진스키가 속했던 ‘발레 뤼스’는 혁신적인 예술가의 집단이었습니다. 고전 발레를 숙달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발전시켜 외국으로 수출하기까지 했어요. 우리는 열등감이 있었기에 외국의 것을 필사적으로 베끼고, 그 도움을 받아 러시아적인 문화를 탄생시키고, 오히려 그걸 외국에 유행시킨 겁니다.”
케이팝과도 통하는 이야기였다.
과거의 한국은 미국와 일본의 것을 베꼈다. 시간이 지나 한국적인 게 생겨났고, 케이팝이란 이름이 붙어, 이젠 글로벌화되어 세계를 누빈다.
과거엔 러시아의 발레가 그러했었다.
문화의 변방이자 야만인의 땅이라고 불렸던 러시아의 문화가 세계를 강타했었다.
“이제는…….”
마이어가 씁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게 없습니다.”
조상들이 세워둔 성이 너무나 찬란하고 거대하여, 러시아인들은 그 성을 지키고 자랑하는 것에 만족한다.
모두가 그 성에 들어가고 싶어 한다.
새로운 건 바라지 않는다. 바라더라도, 조상들이 이룩한 업적에 비하면 초라하기만 하다. 그렇기에 새로운 곳은 발걸음이 뜸하다.
소련은 하이컬처를 일반 대중의 뿌리 깊숙이 박아 넣었다. 모든 인민이 문화를 향유하게 만들겠단 집념이 이룬 업적이다.
동시에 소련은 새로운 문화를 탄압하고 억제했다. 소련에게 새로운 것이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기반한 예술뿐이었다.
그리고 정치적 목적에 기반한 예술은 전부 사라졌다. 소련이 해체되고 러시아인이 손에 쥔 건, 100년 전의 문화예술뿐이었다.
그것만이 자긍심이었다.
“러시아엔 피아니스트가 필요합니다. 발레리나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팝스타도 필요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건 사람들의 마음에 불꽃을 심는 겁니다. 그게 아무리 작더라도, 적은 사람들에게라도. 그리고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그 불꽃을 주고 싶습니다. 그러면 러시아는…….”
10년 뒤.
그것도 안 되면 20년 뒤.
그것마저도 안 되면 30년 뒤.
50년, 100년이 걸리더라도.
“그 불꽃을 일으키고, 당장 끊어질 듯 위태롭게 이어지더라도 불꽃을 미래로 전해서, 지금과 다른 미래를 만들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소녀연맹이 와주었으면 한다.
한 명이라도 더 현대적인 춤과 노래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물론 이건 작은 행사입니다.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억지란 것도 압니다. 하지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걸그룹 1위인 소녀연맹에게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러시아로 와주세요.
성필은 그녀의 얼굴을 깊이 응시했다.
마이어는 긴장하여 그와 눈을 맞추었다. 그러나 곧 자신감이 없어져 고개를 떨어뜨렸다.
“하.”
성필이 짧은 웃음을 토해냈다.
마이어는 흠칫 어깨를 떨었다. 그리고 불안하게 시선을 올렸다.
성필은 웃고 있었다.
소리처럼 비웃음은 아니었다.
“알렉산더 멜니코프가…….”
성필은 한구인에게 들었던 러시아 피아니스트의 일화를 이야기했다.
“한국 방송국 교향악단이랑 협연하러 왔었어요. 그랬다더라고요. 한 분이라도 더 이 음악을 듣게 되었다면 기쁠 거라고요. 그럴 수만 있다면, 전혀 먼 거리가 아니었다고…….”
마이어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성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시큰둥한 플레하노브를 향해 로자가 외쳤다.
“소녀연맹이 온다고요!”
“뭐?”
“댄스 커버 대회, 심사위원으로 소녀연맹이 와요!”
플레하노브가 벌떡 일어났다.
그가 앉았던 의자가 우당탕탕 바닥을 굴렀다.
“러시아 인터내셔널 연맹, 집합!”
“끼얏호!”
둘은 기쁨의 웃음을 터뜨리며 주먹을 높이 치켜들었다.
기뻐하는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러시아의 인민이들이 다 함께 열광했다. 트잇터 실시간 트렌드엔 오랫동안 소녀연맹의 이름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