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3화
“이사님을 뵐 면목이 없어요.”
기절했다가 깨어난 장하양은 차분했다.
“저, 본격적으로 일본에서 데뷔할게요.”
그런데 하는 말은 전부 나사가 빠져 있었다.
김수희 매니저는 평범한 사람이라서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엔 반응할 수 없었다.
‘건물 되게 좋네. 가로 엔터도 언젠가 이런 데로 갈 수 있을까?’
그래서 김수희는 차나 마셨다.
“한국에 돌아가는 건 조금 나중으로 미뤄주세요.”
“네가 이번 프로젝트 프로듀서잖아. 네가 없으면 시작이 안 돼. 돌아가야지 뭐 어쩌겠어.”
“제가 한 말 들으셨어요?”
장하양이 조용한 분노를 드러냈다. ‘어째서 너는 나에게 공감 못 하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김수희는 역으로 묻고 싶었다. 네 감정에 누가 공감하겠느냐고.
‘얘가 상심이 큰가 보네.’
매니저들 사이에서 장하양은 천사의 재림 비슷한 이미지였다.
항상 사근사근한 미소와 예의 바른 태도는 그녀를 아이돌 중의 아이돌로 만들기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천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 악녀 캐릭터 같다고 해야 할까.
김수희가 조금만 말을 잘못해도 경호원을 들여 쫓아낼 것만 같다.
‘뭐, 얘도 아이돌이니까.’
김수희가 이 바닥에 약 3년 있으면서 알게 된 사실은, 연예인들이 그다지 행복하지 않단 것이다.
항상 이런 생각이 든다.
화려한 빛을 먹고 사는 별들 중, 진정으로 행복한 이는 몇이나 될까?
그들에겐 안정성이 없다. 그들이 밟은 높은 발판은 언제든지 무너지고 깨질 수 있어, 그들을 편집증으로 몰아넣는다.
장하양도 그런 법칙에서 빠져나가진 못한 모양이다.
‘음, 팀장님이 이럴 땐 어떡하라고 하셨지.’
김수희는 생각을 정리한 후, 눈앞의 장하양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은 미(美)를 지닌 아이돌이다. 언제나 천사 같은 사람.
이 천사가 마음먹고 김수희를 갈구려고 하면, 김수희는 눈물 펑펑 흩뿌리면서 회사를 나가는 수밖에 없다.
둘 사이에 갈등이 있다면 가로 엔터는 무조건 장하양의 편을 들 테니까. 아니, 편드는 것을 넘어 장하양을 만족시키기 위해 김수희에게 필요 이상의 제재를 가할 수도 있다.
소녀연맹 장하양. 가로 엔터의 다섯 기둥 중 하나다.
그러니 빈말이라도 그녀의 비위를 맞춰주어야겠지만…….
“들었어. 그래도 돌아가야 해. 여기서 할 일이 끝났으면 일분일초가 중요해. 빨리 돌아가서 다음 프로젝트 진행하자.”
김수희가 단호하게 말하자 드디어 장하양의 표정에서 감정다운 감정이 드러났다.
사람이 보통 어처구니없는 말을 한다면, 그건 ‘논리적으로 지적해서 내 약점을 파훼해줘’란 뜻이 아니다.
‘나도 내가 바보 같은 거 아는데 공감 좀 해줘’란 뜻이다.
그런데 김수희는 너무나 상식적인 발언을 해버렸다. 안 그래도 정신적으로 몰려 있을 장하양을 더 몰아붙인 것이다.
“박 이사님은 너한테 화 안 내실 거야.”
“매니저님이 그걸 어떻게 아세요?”
발작적인 반문이 돌아왔다.
“알지. 내 상사시잖아.”
“제 프로듀서기도 해요.”
그 말 안엔 ‘내가 이사님을 가장 잘 알아요’란 마음이 숨겨져 있었다.
“하양아, 이사님이 네 앞에서 본심을 드러낼 때가 많을까 내 앞에서 본심을 드러낼 때가 많을까? 그러니까, 인간성의 껍질을 제외한 내면 말이야.”
“그거야 당연히……!”
…….
만약 바닥을 드러내는 일이 있다면, 그건 장하양보다 김수희 앞일 때겠지.
성필은 장하양 앞이라면 태도가 거의 무조건 플러스에 가 있을 것이다. 그녀의 심기를 최대한 거스르려 하지 않을 테니까.
화가 나더라도 미소 지으면서, 당혹스럽더라도 달래면서, 그렇게 장하양을 대하겠지.
왜냐하면 성필은 장하양을 아끼고, 장하양은 가로 엔터의 기둥이며, 그녀에게 바닥을 드러내봤자 좋을 게 전혀 없으니까.
이번 일이 이례적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이사님은 잘못한 사람을 봤을 때 무시하는 분이 아니셔. 네가 싫어서, 네가 보기 싫어서, 그냥 널 일본에 두고 갔다고? 전혀 아니지.”
김수희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그녀는 성필의 인간성을 믿었다.
앞으로 사회생활을 하며 그를 넘어서는 인격자를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할 정도로, 김수희는 물론 가로 엔터의 직원 모두 성필을 신뢰했다.
“그럼, 왜요……?”
장하양이 절박하게 물었다. 지금 그녀가 의지할 건 김수희밖에 없었다.
“이사님도 사람이니까.”
김수희가 담담하게 말했다.
“너처럼, 무서우셨던 거겠지.”
장하양이 성필을 향해 직접적인 혐오를 드러낸 건 이번이 최초였다.
“그렇지 않아? 부모가 가장 당황하는 순간이 사춘기에 들어선 자식이 반항할 때라잖아. 자식에게 부모는 엄청 큰 존재겠지만, 부모도 부모로 사는 게 처음이잖아. 처음이니까 서툴러. 놀라고 고민하고 슬퍼하고 화내기도 하겠지. 그게 항상 옳을 순 없고. 부모도 도망가고 싶은 순간이 있는 거야.”
“…….”
장하양은 성필과의 추억을 떠올렸다. 그는 자신을 가족으로 생각해달라고 했었다.
장하양이 떠올린 가족이란 아버지였다.
누구도 그녀에게 진정한 의미를 알려주지 않았던 존재인 아버지.
장하양에게 성필은 언제나 의지할 수 있는 초인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그런 성필도 서투른 부분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어떡하면 될까요……?”
장하양이 묻자, 이번에도 김수희가 담담하게 답했다.
“포옹하고 미안하다고 하면, 용서하지 않는 부모는 없어. 그리고 아마 바로 이렇게 말씀하실걸?”
내가 더 미안했어.
장하양이 흐느꼈다.
그걸 보면서 김수희는 한시름 놓았다.
‘나도 이런 거 할 수 있구나…….’
성필과 민경섭을 3년이나 쫓아다니다 보니, 김수희의 말문도 트였다.
항상 옆에서 지켜보기만 했던 자신에게 이런 능력이 생겼을 줄이야.
* * *
성필이 가로 엔터로 돌아왔다.
일본에 있은 지 일주일도 안 됐지만 다들 그의 빈자리를 느끼고 있던 참이었다. 기쁘게 그의 귀국을 환영했다.
그런데.
“장하양은?”
아침 회의.
홍규헌은 장하양이 아직 일본에 남아 있단 이야기를 듣고 의아해했다.
성필이 일본에 계속 있던 건 장하양 때문이었다. 그녀가 이번 프로젝트의 프로듀서이기에, 총괄 프로듀서인 성필과 함께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둘 사이에 튀는 사소한 영감의 스파크조차 놓칠 순 없으니까.
“일이 있잖아요.”
“일?”
“김덕팔 님이요.”
“아.”
오늘 드디어 가로 엔터 최초의 부장급 인사가 탄생한다.
지금껏 가로 엔터의 모든 부서는 팀으로 불렸다. 하지만 이젠 부(部)라고 이름 붙인 부서가 생기는 것이다.
바로 임원직을 내놓기엔 해외사업부란 게 애매하긴 했다.
어느 정도로 인원이 충원될지도 모르고, 부서별 협력 수준도 모르니, 일단은 부장이란 직함을 만들어낸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김덕팔이란 인물과 해외사업부의 특별함이 강조됐다.
“중요한 일원이 오는 자리인데 제가 빠지는 것도 그렇잖아요.”
“뭐어, 박 이사가 그렇다면야.”
‘우리들의 프로듀싱’ 프로젝트는 이전보다 훨씬 여유가 있었다. 프로젝트를 두 번이나 진행했으니 노하우가 생겼기 때문이다.
백설하는 곡부터 시작했었고 조아라는 컨셉부터 시작했었다.
이 두 사례를 참고하면, 설령 장하양이 없더라도 프로젝트를 조기에 준비하는 게 가능하다. 실제로 시즌3의 전체적인 맥락은 이미 조아라 시기부터 차근차근 준비되고 있었다.
“올해의 대업은 차기 그룹 런칭이랑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4까지 마무리인가…….”
“드디어 저희도 그룹을 두 개 굴리겠네요.”
민경섭은 굉장히 들떠 있었다.
새신랑이라서 그런 건 아니었다.
“어, 민 팀장도 이사 이름 붙는 거지.”
“고작 그룹 두 개로 이사로 불리는 게 면목 없긴 하네요.”
“그럼 박 이사랑 손 이사는 뭐야?”
“그것도 그렇네요.”
사실 민경섭이 이사직을 늦게 받은 건 직함이 주는 효과도 있었다.
그는 소녀연맹 멤버들과 함께 밖으로 다닐 때가 많았다. 성필은 굵직한 일에만 따라간다지만, 민경섭은 그 외에도 수많은 일에 함께한다.
그런데 그가 큰 스케줄도 아닌 곳에서.
‘민경섭 이사입니다.’
라고 소개하면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이 회사는 이사가 이런 데까지 따라오네?’란 시선이 박힐 것이다.
이 때문에 성필도 소녀연맹 데뷔 전과 데뷔 초기엔 여러 번 곤혹스러웠었다. 이사라고 소개할 때마다 비웃던 옛 지인들 때문에 더더욱.
참고로 손혜빈도 그중 하나였었다.
“뭐어, 정해진 대업은 그 두 개고. 내가 개인적으로 목표로 하는 게 있지.”
“부서 확장 말고요?”
해외사업부.
아티스트 IP사업부.
공연사업부.
이 세 부서의 설립은 홍규헌의 당찬 포부를 드러낸다. 그런데 이거 말고 다른 목표도 있다고?
“몸집을 불리는 만큼 더 공격적으로 확장해보려고.”
다들 홍규헌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깨달았다.
외부 아티스트를 영입하겠단 뜻이다.
아이돌 육성은 시간과 비용이 너무 크다. 공격적으로 확장하고 싶어도, 아이돌로는 한계가 있다.
“알아봐 두신 뮤지션이라도 있으세요?”
“회사가 있는데.”
다들 충격받았다.
외부 아티스트를 영입하겠단 뜻이 아니다. 그룹을 사겠단 뜻이다!
“뭘 놀라고 그래. 가로 엔터는 아이돌 기획사잖아? 그럼 솔로 아티스트가 아니라…….”
홍규헌은 일부러 무뚝뚝하게 말했다. 속에 담은 기대감을 숨기기 위해.
“아이돌을 굴려야지. 그게 우리 전문 분야고.”
“너무 갑작스럽지 않아요?”
손혜빈이 걱정을 드러냈다.
“갑작스럽긴. 내가 소녀연맹 하나에게 쏟기엔 과분한 팀 규모를 유지하는 게, 그냥 우리 애들 예뻐서 하는 과투자인 줄 알았어?”
“아니었어요?”
“……아니야.”
“그렇구나.”
손혜빈은 홍규헌이 ‘우리 애들 부족한 거 없이 자라야 해!’라면서 온갖 거 다 사들이는 부모인 줄 알았다.
“올해와 내년은 기적의 해가 될 거야. 소녀연맹과 차기 그룹의 눈부신 성공 외에도.”
“한 이사님은 알고 계셨어요?”
한구인이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뭐야, 성필이 너는?”
“몰랐는데, 이제 알았어.”
“몰랐단 거잖아.”
아니, 아예 모르던 건 아니다.
홍규헌이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성필은 그녀가 이렇게 행동해야 할 이유를 알았다.
‘석세스 엔터 인수.’
홍규헌은 성필에게 그걸 약속해주었다.
글로브가 7년 계약을 마치기 전에 석세스 엔터를 인수하기 위해선, 단순히 회사가 번창하는 것을 목표로 해선 안 된다.
목숨을 걸고 전쟁터를 누벼야만 한다.
홍규헌은 목숨을 걸고 그 약속을 실현시키려는 것이다.
“내년까지 우린 소녀연맹을 제외하고 최소 두세 그룹을 손에 넣을 거야. 그리고 내년까지 그 그룹 전부 일차적인 성공을 안겨준다. 일차적인 성공이란 건 앨범 하나. 우리 회사로 들어와서 앨범 하나씩만 성공해도 돼. 마케팅에 돈을 얼마나 때려 박든, A&R에 돈을 얼마만큼이나 부어 넣든, 딱 그 앨범 하나씩만 성공하면 된단 거야.”
그 정도가 되면 엔터계는 눈이 돌아갈 것이다.
가로 엔터는 손대는 것마다 성공한다고 말이다.
물론 그게 장기적이지 않을 순 있다.
가로 엔터는 겉으로만 화려하지, 속으론 깊은 상처를 머금고 억지 미소를 띨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거면 족하다.
엔터테인먼트 기업은 이미지가 전부다.
SMS 엔터는 이미지 하나로 KS 엔터의 시가총액을 따라잡은 적도 있으니까. 언제나 KS 엔터보다 순이익이 절반 이하인데도 말이다.
‘3대 대형 기획사’라는 이미지 하나가, SMS 엔터에게 분에 겨운 힘을 선물해주었다.
“……그리고요?”
남들이 경탄에 마지않을, 하지만 회사 내부는 피를 철철 흘릴지도 모르는 위험한 성공 전략.
그것을 달성한 다음에는?
“상장한다.”
좌중이 술렁였다.
상장.
가로 엔터의 주식을 시장에 내놓는단 뜻이다. 그리고 상장을 하는 이유라 하면, 현금을 확보하기 위함.
“사, 상장해서요……?”
“또 회사를 살 거야.”
“뭐예요 그게?!”
성필과 홍규헌의 약속을 모르는 손혜빈이 역정을 냈다.
회사와 그룹을 사들여서 성공시키고, 상장시켜서 한다는 게 또 회사를 사는 거라고?
“그런데 그 회사는 아예 지배하지 않아도 돼. 이사회에 우리 사람을 밀어 넣는 걸로 만족해.”
“뭐, 복수라도 하실 거예요? 의결권을 얻어서 싫어하는 사람을 쫓아낸다던가?”
“오, 손 이사 눈치가 좀 있네.”
“네? 진짜요? 와 무슨 기업 드라마 같네. 그런데 그런 이유로 이렇게 무모한…….”
그때 손혜빈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녀의 고개가 천천히 성필에게로 향했다.
“아니, 진짜, 설마, 어?”
“맞아, 목표는.”
홍규헌이 선언했다.
가로 엔터의 새해 목표이자, 향후 3년 안에 이룰 절대적인 목적.
“석세스 엔터다.”
홍규헌이 성필을 보았다.
“만약 이 계획이 실패하면 박 이사 소원은 물 건너가는 거야. 영원히 들어줄 수 없어.”
“아니, 사장님.”
성필이 웃으면서 말했다.
“꼭 사장님이 불리하고 저한테만 좋은 이야기처럼 말씀하시는데, 이게 성공하면 제가 좋은 게 아니잖아요.”
“그렇지. 박 이사보다 내가 더 기쁘겠지.”
왜냐하면,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우리는 대형 기획사라고 불릴 테니까.”
일시적인 명성으로나마, 가로 엔터는 정상에서 빛나는 거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다.
대형 기획사가 대형 기획사인 이유는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1세대부터 경쟁해왔던 모든 기획사를 역사의 저편으로 보내버리고 지금까지 버텼기 때문에 대형 기획사이다.
즉, 그들을 키운 건 시간이며 전통이다.
그 예시가 깨진 건 단 한 번. 그것도 극히 최근에 벌어졌던 단 한 번의 기적뿐이다.
가로 엔터는 그들이 밟았던 길을 어설프게나마 따라가고자 한다. 그들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그럼 다르게 말할게, 박 이사. 우리 둘 다 꼭 성공해야만 해. 이 계획의 키포인트는 박 이사야.”
“네, 그렇겠네요.”
가로 엔터란 이름을 별로 만드는 건, 몇 개나 되는 그룹을 동시에 성공시킬 총괄 프로듀서.
성필의 존재다.
“미리 스티브 잡스 영상 좀 봐. 몇 년 후, 가로 엔터 기업 설명회 때 박 이사가 나갈 테니까.”
실패하지 않는 프로듀서인 성필의 이름이 가로 엔터를 반석에 올릴 것이다.
지금부터, 가로 엔터의 모든 프로젝트엔 성필이 참여하든 하지 않든 그의 이름이 박힌다.
가로 엔터의 모든 성공은 그의 것이 된다.
그의 것이어야만 한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KS 엔터처럼 될 거야.”
가로 엔터라는 이름이.
그에 속한 모든 아이돌이.
하나의 브랜드로 묶여 시너지를 낸다.
그리고 마침내.
“가로 엔터도 문화선도자의 지위에 오른다.”
성필은 홍규헌과 맺었던 약속, 양소민과 맺었던 약속, 그리고 소녀연맹과 맺었던 약속을 차례로 떠올렸다.
가로 엔터는 최고가 된다.
석세스 엔터를 인수한다.
그리고.
‘나는 최고의 프로듀서가 된다.’
자신을 믿어주는 소녀연맹을 위해서라도, 성필은 최고의 총괄 프로듀서가 되어야만 한다.
이 계획이 성공한다면 머지않은 미래에 그리될 것이다.
* * *
가로 엔터의 모든 성공을 등에 업어야 할 최고의 총괄 프로듀서 박성필.
“설하야 나 어떡해…….”
회의실에서의 진중한 모습은 아예 사라져선 백설하에게 상담하고 있었다.
백설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축 늘어진 그의 등을 인자하게 쓸어주었다. 마치 어머니가 아이를 달래는 모양새였다.
‘큰일은 아니라 다행이다.’
밤에 성필이 ‘도와줘 설하야’라고 보내기에 큰일이 난 줄 알았다.
백설하는 그가 범죄조직에 납치라도 당한 줄 알았다.
범죄조직은 그를 풀어주는 대가로 5억을 요구했고, 백설하는 가진 현금을 모두 뽑고 가족 친지에게 빌려 약속 장소로 나아갔다.
돈을 확인한 조직은 만신창이가 된 성필을 버려두고 부둣가를 떠났다.
백설하는 대경실색하여 성필의 머리를 덮은 헝겊을 벗겨낸다. 성필은 울고 있었다.
‘설하야, 돈은…….’
‘그깟 돈이 중요해요?!’
백설하는 성필의 손을 묶은 끈을 풀어낸다.
‘하지만, 고작 나 따위 때문에…….’
‘이사님 따위 때문이 아니에요. 이사님이니까 한 거예요.’
‘설하야…….’
배경으로 세이코의 ‘페이디드 러브’가 흐른다.
성필은 상처 입은 얼굴로 가냘픈 미소를 짓는다. 언제든지 부서지고 망가질 듯하여, 백설하는 그를…….
“설하야?”
“아.”
백설하는 망상에서 벗어났다.
“너도…… 방법이 없는 거야……?”
백설하에게 상담을 요청한 성필은 이제까지 본 적 없을 정도로 피폐해 보였다.
그가 이전에 이랬던 적이 있었나.
떠올려보면 작년, 리카가 일본에 남기로 했을 때 정도였던 듯하다. 성필은 넋 나간 사람처럼 리카에게 뛰어가 울면서 뭐라고 했었다.
결국 리카는 한국으로 돌아왔었지.
성필은 꼭 그때의 모습 같았다.
‘큰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성필 입장에선 큰일일 것이다.
만약 백설하도 성필에게 미움받는다면 그처럼 되지 싶었다.
예를 들어, 뭔진 몰라도 백설하가 성필의 역린을 건들였다던가.
어느 날부터 쌀쌀맞아진 성필. 백설하가 말을 걸어도, 선물을 주어도, 상담을 요청해도, 그는 무시로 일관한다.
그리고 용기를 낸 백설하가 울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돌아오는 건 혐오를 가득 담은 눈빛뿐.
백설하의 심장이 싸늘하게 식어간.
‘망상 그만해!’
“하양이가 그렇게 단호한 건 저도 처음 들어요.”
세상에, 성필에게 필요 없으니 오지 말라고 하다니. 평소의 장하양을 떠올리면, 그녀가 그랬으리라곤 생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장하양이 세이코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는 백설하이기에 그녀가 이해 가기도 했다.
무려 장하양은 과도를 쥐고 세이코에게 달려들었던 아이다. 사람이 아무리 흥분해도 그럴 수 있을까?
아마 장하양이 세이코에게 지닌 감정은 일반인이 상상할 범위를 아득히 뛰어넘었으리라.
“하지만 전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 정말? 어떻게?”
“일단 만나서 이야기해보세요. 그 일 이후로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한 적 있으세요?”
“없어. 하지만…….”
“쓰읍!”
백설하는 성필을 따라 했다.
성필은 백설하가 자신감이 없거나 자기 자신을 탓할 때마다 ‘쓰읍!’하면서 혼내곤 한다.
이번엔 백설하가 그렇게 했다.
“제 말 들으세요. 언제나 진심은 전해지는 법이에요. 박 이사님은 항상 그래오셨잖아요.”
“…….”
백설하는 한숨을 쉬고 성필의 손을 잡았다.
연습생 시절, 백설하는 지금보다 훨씬 소심한 성격이었다.
그럴 때 가끔, 성필은 백설하의 손을 잡으며 온기와 용기를 전해주곤 했었다.
“제가 보증할게요. 하양이와 짧게 대화만 나눠도, 이사님은 지금 이렇게 속앓이를 했던 게 부끄러워지실 거예요.”
“만약…….”
“만약 그래도 잘 안 풀리면.”
백설하가 배시시 웃었다.
“제가 위로해드릴게요.”
“…….”
“왜 ‘그런 건 필요 없는데’란 표정 지으세요?! 제, 제가 위로해드리는 게 싫으세요?”
“…….”
“다, 당연히 위로로 안 끝나요! 이사님이랑 하양이 사이가 좋아질 수 있게 최선을 다할 거예요! 저는 리더니까요!”
“아니…… 내가 알던 설하가 맞나 싶어서. 되게 능글맞아졌어 너.”
“26살이니까요. 그런 건 됐고, 곧 하양이 온다니까 이사님도 빨리 준비하셔서…….”
응접실 문이 열리고 신아름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하양 언니 왔.”
신아름의 날카로운 눈이 보름달처럼 크게 뜨였다.
“쌤 뭐해요!”
“으, 응?”
“왜 팀장님 손 맘대로 잡고 있어요!”
신아름이 쏜살처럼 달려와 둘이 맞잡은 손을 풀어냈다.
백설하는 당황스러웠다. 아니, 왜? 이런 적이 처음도 아닌데 왜 이렇게 과민 반응하는 거지?
“팀장님 조심해요.”
신아름은 성필을 보호하듯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웠다.
성필도 당황스럽긴 매한가지였다.
“쌤 연애 금지 풀렸다고 신났으니까요. 쌤은 지금 한 마리의 맹수라서 눈에 보이는 건 죄다 먹어 치우려고 할걸요? 팀장님도 예외가 아닐 테니까 몸가짐 조신하게 있어요. 알았어요?”
성필과 백설하는 말문이 턱 막혔다.
백설하는 어찌나 충격받았는지 바들바들 떨면서 입술을 뻐끔댔다. 그녀가 화내기 전에 성필이 신아름에게 꿀밤을 먹였다.
“아야!”
“언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아니 팀장님 모르겠어요?!”
신아름이 연극하듯 손바닥을 펼쳐 백설하를 가리켰다.
“26살이 내뿜는 이 페로몬을?! 이 생물학적인 아우라가?! 진짜 안 맡아즈크엑!”
“내 나이를 일컫는 이는 죽음을 면치 못한다.”
“죄송! 장난! 목! 놔즈어여……!”
“그래 아름아, 아무리 장난이라도 설하 기분 많이 나쁘겠다. 그만해 알겠지?”
“왜, 팀즈앙님, 보고므안, 있는 그어……!”
백설하는 신아름에게 가하던 물리적 압박을 멈추었다.
“이사님, 가보세요.”
성필은 백설하에게 당해 널브러진 신아름을 바라보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백설하는 한숨을 쉬면서 그의 등을 떠밀었다.
성필은 어쩔 수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는 문을 나서고, 난간을 따라, 1층으로 가는 계단에 이르렀다.
계단 아래로 장하양이 서 있었다.
“…….”
“…….”
대치는 한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둘은 동시에 서로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장하양은 올라가고 성필은 내려갔다.
이윽고 중간에서 둘이 마주했다.
둘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기만 한다.
“…….”
그걸 2층에서 지켜보는 백설하와 신아름은 침을 꼴깍 삼켰다. 과연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쌤, 어떻게 될까요?”
“모르겠어.”
장하양은 어지간히 화난 게 아닌 듯하다. 설령 상대가 성필이더라도 순순히 고개를 조아릴지는 아무도 모른다.
백설하는 어떻게 성필을 위로할지 미리 계획을 짜두기로 했다. 그가 좋아하는 아이돌 콘서트 DVD를 함께 봐주는 정도면 괜찮을까?
그때였다.
“이사님, 죄송해요오…….”
“아니야 내가 더 미안해애애…….”
성필과 장하양이 울면서 서로 부둥켜안았다.
“……?”
“……?”
백설하와 신아름의 머리 위에 커다란 물음표가 떴다.
마치 미리 대본을 적어둔 연극 같았다.
성필과 장하양은 서로의 눈을 보자마자 알아차린 듯하다. 서로가 서로를 갈망하고 있었단 것을.
“제가 주제넘었어요……. 제가 어떻든 이사님한테 이래라저래라할 권리는 없는 건데에…….”
“아니야 내가 너무 눈치가 없었어어……. 네가 기분 안 좋을 거 뻔한데에…….”
“이사님이 저 싫어하게 된 줄 알고 너무 많이 무서웠어요오…….”
“나도 너한테 미움받는 줄 알고 죽을 거 같았어 숨도 못 쉴 거 같았어어…….”
그걸 지켜보는 백설하와 신아름은 이제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이게 뭔데 대체.
작년에 정호환과 KS 엔터의 회장이 가로 엔터 홀에서 부둥켜안고 울었던 때 같다. 서로 보자마자 고해성사를 해대면서 우정을 나누었던 그때처럼.
아니, 그보다 더 심했다.
“이사니이이임…….”
장하양이 눈물범벅인 얼굴을 성필의 뺨에 문질러댔다. 성필은 살짝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분위기의 마력에 집어삼켜져 가만히 있었다.
“저 미친……!”
신아름이 발끈하여 뛰쳐나가려던 것을 백설하가 겨우 붙잡아놓았다.
그렇게 두 사람의 감동적인 재회는 오래도록 이어졌.
“여기가 가로 엔터입니다.”
현관문이 열리고 한구인과 김덕팔이 들어왔다.
“가로 엔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예, 한구인 이사님. 감사합니…….”
김덕팔의 눈이 계단으로 향했다. 한구인도 그러했다. 보지 않을 수 없었다.
남녀의 오열이 가로 엔터의 홀을 울리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곳에 존재하는 건 소리에 걸맞은 광경이었다. 성필과 장하양이 소라와 소라껍데기처럼 달라붙어 눈물을 펑펑 흘려대고 있다.
김덕팔이 아연한 투로 말했다.
“그으, 한구인 이사님, 이게 무슨 상황인지…….”
“…….”
한구인은 김덕팔을 다시 밖으로 안내했다.
가로 엔터의 문이 닫히고, 홀엔 다시 남녀의 오열만이 울려 퍼졌다.
가로 엔터, 김덕팔 영입!
* * *
총괄 프로듀서 성필과 이번 프로젝트의 메인 프로듀서 장하양. 둘은 향후 몇 달간 함께 있는 시간이 굉장히 많을 것이다.
오늘만 해도 그러했다.
아이디어 회의를 마치고선 자연스럽게 같은 방에서 식사했다. 방이라고 해봤자 빈 연습실이지만 말이다.
메뉴는 샐러드 도시락이었다.
“주제는 사랑이라고 했지?”
장하양은 이번 앨범의 주제로 사랑을 꼽았다.
그걸 들은 직원들은 ‘또?’란 반응을 보였었다.
사랑은 백설하의 ‘애플 크러쉬’ 때 이미 선보였던 주제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장하양은 다른 의미의 사랑이라고 했다.
“네. 최대한 언니랑 겹치는 건 피해야겠죠.”
사랑의 종류는 여러 가지다.
우정도 크게 보자면 사랑이고,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것도 사랑이다.
종류가 아니라 재질로 따지자면 질척한 사랑, 순수한 사랑, 밝은 사랑, 어두운 사랑.
이렇듯 사랑은 인류의 영원한 테마인 만큼 표현법이 무궁무진하다.
솔직히 성필은 그녀가 사랑이란 주제를 꺼냈을 때 은근히 기대됐다. 과연 장하양이 그리는 사랑의 색깔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가장 쉽게 고민할 수 있는 건.”
장하양은 포크로 샐러드를 짚어 성필의 입가로 가져갔다.
“사랑의 대상이겠네요.”
“아 뭐 해.”
“부끄러우세요?”
장하양이 눈웃음을 보였다.
“가족인데요?”
또다.
또 사람 마음을 가지고 노는 듯, 혹은 유혹하는 듯한 제스처와 말투다.
옛날의 성필은 이럴 때마다 장난스럽게 빠져나가거나, 혹은 당혹감을 표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진지하게 하지 말라고 했었다.
그런데 이젠 그러지 않는다.
“가족이라도 부끄러워.”
성필은 장하양이 내민 포크에서 고개를 돌렸다.
장하양이 씁쓸함을 연기했다.
“여보, 저희가 정말 가족이 맞나요?”
“다시 한번 그 호칭을 올리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고 했을 텐데? 심지어 벌써 세 번째인데?”
“그래요?”
장하양이 성필에게 내밀었던 포크를 자기 쪽으로 돌렸다. 그리고 포크에 꽂힌 고기를 부드럽게 입 안에 넣었다.
“어떻게 죽이실 건데요?”
그녀의 눈가가 숨길 수 없는 장난기를 담아 부드럽게 휘어졌다.
“……하아.”
내가 졌다.
성필은 웃으면서 식사를 이어갔다.
장하양이 그리게 될 사랑의 색깔이 어떤지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렇지만 만약 그 색이 유혹의 빛을 띠고 있다면, 굉장한 작품이 나올 것 같다.
장하양. 존재 자체가 유혹이다.
경국지색, 경성경국이란 말은 그녀를 위해 존재하는 거겠지.
성필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가 사랑 아닌 애정에서 비롯되었단 것을 알게 된 지금에도, 성필은 적응하기 어려웠다.
‘그렇기에 아이돌인 거겠지.’
장하양에겐 만인을 매혹하는 힘이 있다.
이번 일로 경계심을 한 꺼풀 벗겨내고 바라보니, 진실로 그러했다.
이는 장하양의 태도 변화도 한몫했다.
이 사건 이후로, 장하양은 미묘하게 성필과 거리를 두었다. 예전처럼 성필의 프라이빗 라인 안으로 훅 들어오는 일은 없다.
성필은 물리적이든 심리적이든, 강제로 그녀를 약간 더 멀리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매력이 더 눈에 잘 들어온다.
익숙함과 친밀함의 베일이 벗겨진 것이다.
화단에 심어진 꽃보다 절벽 위에 피어 바라보기만 하는 꽃이 더 아름다운 법이라고 하지 않은가.
예를 들어 지금.
“많은 걸 생각해봤어요.”
옛날의 장하양은 성필과 식사할 때 보이던 습관이 있다. 음식을 씹을 때는 반드시 손으로 입을 가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젠 그러지 않았다.
이게 장하양이 벌린 거리감 중 하나였다. 옛날의 성필은 자꾸만 그렇게 행동하는 장하양을 보고 ‘나한테 잘 보이려고 그러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편하게 대하는 게 서로의 거리감을 늘리는 법이라니.
성필은 장하양과 자신의 관계가 참으로 미묘하다고 생각했다.
“이번 일로요.”
“이번 일? 아…….”
하긴 성필만 해도 평소엔 하지 않을 온갖 상념에 사로잡혔었다. 장하양도 그랬을 것이다.
“저라는 사람을 이루는 근본적인 기저에 무엇이 있는지요. 무엇이 저를 저답게 만드는지. 그리고 저다운 저란 건 어떤 건지요.”
“그래? 뭐가 널 너답게 만드는데?”
장하양은 배시시 웃으면서 부끄러운 듯 입을 열었다.
“그…….”
“형!”
그때 연습실 문이 열리면서 민경섭이 쳐들어왔다. 그는 잔뜩 흥분했는지 얼굴이 매우 붉었다.
“왜?”
“일이 들어왔는데, 그게, 해외 일이에요!”
“뭐?!”
성필은 거칠게 샐러드 용기를 내려놓고 그와 마주 보면서 일어났다.
“서, 설마 미국이야?!”
미국 유명 프로그램에서 섭외 요청이라도 온 건가? 아니면 뮤직 페스티벌? 어느 쪽이든 반드시 간다!
‘세상이 내 기도를 들어줬구……!’
“러시아예요!”
“……뭐?”
“러시아요 러시아!”
……러시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