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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안 한는 프로듀서-569화 (569/760)

569화

‘저는 이사님이 세이코 선배님이랑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나누는 게 싫어요.’

성필은 자꾸만 장하양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토모에가 떠나고 나서, 장하양은 흔들림 없는 어조로 그리 말했었다.

그리고 또 한마디를 덧붙였더랬다.

‘주제넘은 말이란 건 알아요. 그래도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성필도 안다.

소녀연맹이 세이코란 사람을 안 좋아한단 건 명백한 사실이다. 눈에 보이니까.

애초에 세이코와의 만남이 우호적인 것도 아니었다. 세이코는 소녀연맹의 적이었다.

밝은 미래만이 펼쳐져야 했을 소녀연맹의 일본 데뷔는, 세이코란 인물로 거하게 일그러졌으니까.

‘이제 우린 가족이니까요!’

동시에, 소녀연맹을 향해 가족이라고 선언했던 세이코의 모습도 떠오른다.

그 이후로 웨벡스는 소녀연맹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나갈 수 있을 만한 방송은 모두 잡아줬고, 큰 행사란 행사는 죄다 출연시켜주었다.

그럼 그걸로 소녀연맹이 지닌 원한이 풀렸을까?

‘아니.’

어찌 보면 그건 소녀연맹의 힘으로 얻어낸 지원이 아니었다.

성필이 몸을 던져 세이코를 구해내고서야 얻어낸, 이른바 등가교환으로 이루어진 가족관계였다.

‘발목이 아파요.’

성필이 권강철 트레이너에게 PT를 받다가, 발목이 아팠던 적이 있다.

권강철 트레이너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었다. 적어도 운동 때문은 아닐 거라고 한다.

‘옛날에 다치신 적이 있으십니까?’

성필은 세이코 사건 때를 떠올렸다.

아픈 발목은 그때 깁스를 했던 다리 쪽이다.

거기에 가로 엔터 사람들과 리조트를 갔을 때, 어처구니없는 일로 발목이 삐기까지 했었다.

고작 발 좀 헛디뎠다고 말이다.

그때부터 묘하게 걸음이 느려졌다.

‘손.’

웬만해선 떠올리려 하지 않지만, 성필은 왼손의 감각이 무뎌졌다.

이것도 최근의 일이었다.

병원에 가니 사고의 후유증이라고 한다.

성필은 주머니 안에 든 핸드폰을 만졌다. 압력만 느껴지지 재질은 어떤지, 혹은 온도가 어떤지는 알기 어려웠다.

신경이 망가졌나.

나중에 낫기는 하는 걸까.

“파쿠 이사.”

성필이 세이코를 보았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아니, 행복한 표정이다. 웬만큼 둔하지 않고서야 그녀가 내뿜는 사랑의 감정을 못 느끼는 사람은 없으리라.

“무슨 생각 하고 있어요?”

“딱히 생각이랄 건 아니고요.”

“거짓말. 몇 번이나 불렀다구요.”

“왜요?”

“추억의 장소가 있나요? 파쿠 이사가 소중히 여기는 장소요. 가보고 싶어요.”

“네?”

성필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세이코가 왜 이런 제안을 하는지 예상이 가서였다. 아마 인터넷에서 ‘연인과는 서로 추억이 있는 장소에 가보는 게 좋습니다. 인연이 깊어질 거예요’ 같은 글을 보지 않았을까.

그런데 세이코의 제안엔 문제가 있다.

“음, 추억의 장소라. 글쎄요, 웨벡스 사옥?”

“네? 농담하는 거예요? 추억의 장소가 회사란 건가요?”

“저는 한국인이니까요. 일본에서 지낸 날이라고 해봐야 전부 다 합쳐서 1년이 안 넘을 거예요.”

그제야 세이코가 낭패한 기색을 보였다.

성필은 한국인이다. 일본에 추억이 깃들 정도로 오래 산 것도 아니다. 아끼는 장소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아, 아, 그렇네요…….”

“그럼.”

성필이 왼손을 내밀었다.

“세이코 씨 추억의 장소에 갈래요?”

“저요? 어, 음, 제 추억의 장소…….”

“없나요?”

세이코는 골똘히 생각하다가 ‘아!’ 하며 미소 지었다.

“있어요.”

그러고선 성필이 내민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자, 잡으란 뜻인가요? 잡아도 되나요?”

“안 내키세요?”

세이코는 성필이 거두기라도 할까 다급하게 그의 손을 잡았다.

“따뜻하네요.”

“그래요?”

성필은 세이코의 손을 한 번 꼭 쥐었다.

압력만이 느껴졌다. 그녀의 손이 부드러운지 거친지, 따스한지 차가운지 알 수 없었다.

“세이코 씨 손도 따뜻하네요.”

“차, 차갑지 않나요……?”

“저한텐 따뜻해요.”

“……저, 파쿠 이사. 소, 소소, 손을 잡게 해준단 건 그러니까, 음, 그으, 그거, 그거 맞나요?”

“손잡고 싶으신 거 아니었어요?”

“……네?”

“보답이에요. 좋은 공연을 보여주신 보답이요. 보답을 손잡기로…… 몸으로 한단 건 이상한가요?”

“…….”

“마음이 없는 스킨십이란 건 천박한가요?”

“……아뇨.”

세이코는 성필의 손을 꼭 잡았다.

“좋아요.”

* * *

“여기는…….”

성필은 어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단 듯 곤란한 미소를 띠었다. 사실 미소를 짓는 수밖에 없었다.

세이코가 성필을 데려온 곳은 웨벡스의 옥상이었다.

“제 추억의 장소예요.”

세이코는 손을 놓고 앞서나갔다.

그녀는 난간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추억…….”

성필은 그 단어를 읊조리면서 세이코의 뒤를 따랐다. 세이코는 몇 걸음 가다가 하늘을 보았다.

“달이 예뻐요.”

“그러게요.”

“그 날 같아요.”

“제가 생각하는 그 날인가요?”

“맞아요.”

세이코는 난간을 보았다.

이젠 난간 수준이 아니었다.

미관을 해침에도 불구하고 철창을 해두었다.

세이코 사태 때문이었다.

“파쿠 이사, 그거 아나요? 기억은 두 종류래요. 언어와 이미지. 과거를 기억하면 언어로 떠올리는 사람이 있고, 이미지로 떠올리는 사람이 있대요. 생각도 마찬가지예요. 글로 생각하는 사람과 이미지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요. 저는 이미지예요. 그리고 그날은……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흐릿한 부분 없이 전부 기억나요.”

성필은 그녀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갔다.

발목이 욱신거렸다.

“미사토는 울었어요.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요. 히무라는 원래도 성격에 안 맞게 진지했는데, 그날따라 더 진지했어요. 그리고 파쿠 이사가 정말…… 이상했어요.”

“이상했어요?”

“네. 정말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저기 올라가서.”

세이코가 지면보다 높이 솟아 있는 옥상의 경계 지점을 가리켰다. 그날 세이코는 저곳까지 올라가 난간에 매달렸었다.

아래에서는 위가 잘 보이지 않는다.

“아니, 올라와서 저한테 다가왔어요. 당황했어요. 누가 가까이 다가오면 바로 떨어지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파쿠 이사는 제가 딱 ‘여기다’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멈췄어요. 그리고 말하는 거예요. 노래 불러달라고.”

“이상하긴 했네요. 이 사람 뭔가 싶으셨겠어요.”

“아뇨, 그때 깨달았지만, 저는 누가 그렇게 말해주길 기다렸어요. 노래를 부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그렇잖아요. 엄청 비장한 순간인데 갑자기 노래를 부르면 어떻겠어요. 그래서, 기뻤어요. 제 노래를 듣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게.”

“이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네요.”

“그렇겠네요.”

세이코가 웃었다.

“파쿠 이사에겐 추억이 아닐 테니까요. 미안해요.”

“아니에요.”

“……그럼 마지막으로, 그때 파쿠 이사가 저한테 했던 말 기억하세요?”

“언제요?”

“마지막에요.”

“정확하게는 기억 안 나요.”

“다시 말해줄 수 있나요? 마지막으로요. 이걸 마지막으로, 그때 일은 안 꺼낼게요.”

성필은 기억을 되짚었다.

왼손이 떨려왔다. 손에서 시작된 떨림은 팔을 타고 어깨까지 이어졌다.

“당신은 죽어선 안 돼.”

“그리고요?”

“인류의 손해야.”

세이코는 고개를 숙였다.

“삶은 아름다운 거 같아요.”

“그런 편이죠.”

“저에겐 노래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어줘요. 세상 대부분은 쓰레기 같은데, 가끔 좋은 것들이 생겨요. 그래서 세상을 사랑하게 돼요. 파쿠 이사에게도 그런 게 있죠?”

“네.”

“아이돌이요?”

“네.”

“왜 아이돌을 좋아하나요?”

성필은 세이코를 향해 또 다가갔다.

그가 대답하기 전에 세이코가 먼저 말했다.

“잠깐만요, 알겠어요. 젊고 예쁜 애들이 ‘나를 봐라!’란 기세로 춤추고 노래하는 건, 그야 당연히 좋겠죠. 저라도 좋아해요.”

“그것도 있겠지만, 사실 뭐라도 상관없었을 거예요. 그때의 저한테는요.”

“다른 이유가 있나요?”

“누가 말했는지는 잊어버렸는데, 이런 말이 있어요. 드뷔시는 30년만 늦게 태어났어도 재즈 아티스트가 됐을 거라고요. 그리고 레드 갈란드가 30년 늦게 태어났으면 록커가, 커트 코베인이 30년 늦게 태어났으면 팝 뮤지션이 됐을 거란…… 그런 이야기예요.”

“그럼 파쿠 이사가 아이돌을 좋아하는 건…… 그냥 아이돌이 유행이라서?”

“저는 문화를 사랑해요.”

“멋지네요.”

“문화 중에서 아이돌을 가장 사랑해요.”

“결국 아이돌을 좋아한단 거네요…….”

성필은 세이코에게 또 한 걸음 다가갔다. 이제 그녀의 옆모습이 보인다.

세이코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파쿠 이사, 만약 아이를 낳으면 이름은 뭘로 할 건가요?”

“딸만 정해뒀어요.”

“걸그룹을 좋아하는 파쿠 이사답네요. 뭔가요?”

“‘세인’이요.”

“예쁜 이름이에요.”

“제 동생 이름이에요.”

“동생이 있어요?! 처음 알았어요! 몇 살인가요?”

“음…….”

성필이 손가락을 하나둘씩 접자 세이코가 어처구니없단 듯 말했다.

“지금 동생 나이를 계산하는 거예요? 오빠로서 실격 아닌가요?”

“그러게요. 어디 보자, 대학에서 즐겁게 놀고 열심히 공부할 나이네요.”

“엄청난 늦둥이네요. 그런데 딸 이름을 동생 이름으로 한다니, 동생 나이도 바로 대답 못하는 것치곤 굉장히 아끼나 봐요?”

“아끼죠.”

“파쿠, 파, 바…….”

그녀는 그 이름을 조심스럽게 발음했다.

“박세인. 예쁜 이름이에요.”

“고마워요.”

“…….”

세이코는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리고 성필을 보곤 천천히 내밀었다.

“파쿠 이사, 앞으로 5년…… 아니, 4년간 연애 안 한다고 했죠?”

“네.”

“그럼 야, 약혼, 약혼은 가능한가요?”

“아니 진짜 상상도 못 했네. 뭔가 했는데 설마 반지예요? 저한테 반지를 주시는 거예요?”

“아, 아직 주는 거 아니에요! 약혼할 거냐고 묻잖아요! 대답해요!”

“미안해요.”

“즉답한다고요?!”

의외로 세이코는 울거나 주저앉지 않았다.

그녀는 상자를 다시 품 안에 넣었다.

성필은 한숨을 내쉬곤 세이코를 바라보았다.

“세이코 씨. 세이코 씨가 저를 좋아해주시는 건 기쁘지만, 그건…….”

“알아요. 저를 구해준 왕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란 거요. 저는 파쿠 이사란 사람을 잘 몰라요. 파쿠 이사란 사람이 아니라, 파쿠 이사가 벌인 사건 때문에 파쿠 이사를 좋아하는 거예요.”

“…….”

“어쩌면 파쿠 이사는 제가 싫어하는 모든 습관을 다 가지고 있을지도 몰라요. 얼굴만 좀 반반하고 몸만 좀 많이 좋지, 성격은 쓰레기일 수도 있어요. 여자를 별처럼 갈아치우는 말종일 수도 있고요. 사건 하나, 나를 구해줬단 이유 하나로 약혼을 입에 올리는 건 너무 순진하겠죠.”

“……제 생각이랑 많이 다르네요.”

“논리적인가요?”

세이코가 싱긋 웃었다.

“그런데, 원래 사랑은 순진한 거 아닌가요? 눈을 마주쳤단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도 널렸잖아요. 그런데 인생을 구해준 사람을 사랑한단 건, 그 사람과 약혼하고 싶단 건, 상식적이지 않나요?”

“하지만 4년 후엔…….”

“알아요 저도! 4년 후엔 저나 파쿠 이사나 마음이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단 거요! 그런데, 만약 파쿠 이사가 여기서 제 약속을 받아주면요. 그러면요.”

세이코가 꿈틀거렸다.

그녀가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그녀의 왼손이 성필의 오른손을 잡았다.

“4년이 지, 지나도 마음이 안 바뀔, 거거든, 요?”

성필은 그녀를 보았다. 흰 달빛도 그녀의 달아오른 얼굴을 숨겨주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아래로 눈을 돌렸다.

세이코가 잡은 그의 오른손으로.

그가 하 웃었다.

“세이코 씨.”

“뭐, 뭔가요.”

“세이코 씨 손은 차갑네요.”

“아깐 따뜻하다면서요?!”

“차가워요.”

“답이나 해요!”

“……모르겠어요.”

“제가 싫나요?”

“아니요.”

“제 말을 못 믿나요?”

“시간을 못 믿어요.”

“신고서를 쓰면?”

“그건 진짜 결혼이잖아요.”

“대체 어떡하면 파쿠 이사의 마음을 돌릴 수 있나요?”

“제가 전에 드렸던 말씀은 잊으셨어요?”

“기억해요. 소녀연맹이 영원히 머릿속에 떠돌 테니, 저랑 사귀는 건 실례니 뭐니……. 근데 그래도 괜찮아요. 얼마든지 생각해요. 저랑 만날 때도 생각하고, 아니 그냥 언제든지 소녀연맹을 떠올려요. 그래도 괜찮아요. 봐 드릴게요.”

“…….”

“아 이제 됐어요 진짜!”

세이코가 성필의 손을 거칠게 놓았다.

“파쿠 이사가 친절한 사람인 거 알아요. 저한테 상처 주기 싫어하는 것도 알아요. 그럼 저 혼자 상처 입을게요. 끝이에요 이제. 됐나요?”

“…….”

“아니 진짜 말이 없어요?!”

“오늘은.”

성필은 목도리를 풀었다.

날이 은근히 따스했다.

목도리를 헐렁하게 어깨에 둘렀다.

“두 번째 데이트로 해요. 한두 번 만나고 교제를 결정하는 사람은 없어요.”

“네? 하지만 미사토랑 유선은…….”

“그만.”

다키스트 서유선의 연애사는 듣고 싶지 않다. 그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주고 싶다.

그게 ‘장막’이니까.

“애초에 세이코 씨는 못 미더워요. 약속을 하나도 안 지키잖아요. 5년 후에 만나서 저녁 식사 한 번 하자더니, 벌써 몇 번이나 같이 만나서 술 먹고 밥 먹은 거예요.”

“세 번도 안 됐어요……. 그중 하나는 미사토네에서 소녀연맹이랑 유선이랑 같이 만난 건데에…….”

“우리 둘 다 좀 더 어른이 되어서 만나요. 4년 후에.”

세이코는 아쉬움을 지우려는 것처럼 성필의 손을 꼬옥꼬옥 마사지하듯 쥐었다 폈다.

“……보답, 있잖아요. 오늘 공연 보여준 거, 고맙다고 했잖아요. 그 고마움 아직 남았나요?”

“네?”

“몸으로 보답, 해주면, 안 돼요?”

성필의 표정이 썩어가자 세이코가 황급히 변명했다.

“아니, 손! 손처럼! 손잡는 거! 파쿠 이사가 했던 말이잖아요!”

“네, 뭐, 들어는 볼게요.”

“왜 뒷걸음질 치나요?! 이상한 말 안 해요! 그, 그게에, 노래 들어줄래요?”

“그게 보답이에요?”

“파쿠 이사가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여기서요.”

“그런데 노래를 듣는 게 왜 몸으로 보답하는 거예요?”

“…….”

“실은 다른 거 생각하셨던 거죠?”

“키, 키스으…… 작별의…….”

“혀 넣고, 아니면 입술만?”

“해주나요?! 넣고요!”

“아니, 그냥 물어봤어요.”

“죽어어엇!”

세이코가 성필의 이곳저곳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노래 들을게요.”

“재밌나요? 가지고 놀면 재밌나요?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면 재밌나요?!”

“세이코 씨랑 있으면 재밌어요.”

세이코는 모든 분노를 담아 성필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것도 순간이었다.

그녀는 숙련된 가수답게 금방 노래할 준비를 마쳤다.

그녀가 보답으로 노래를 들어달라고 했던 건 임기응변이 아닌 듯했다. 진지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제 이번 타이틀곡 ‘페이디드 러브’를 부르겠습니다. 이건 사실 파쿠 이사를 생각하면서 쓴 곡이에요.”

“그럴 거 같았어요.”

“감상은 그게 끝?”

“영광이에요. 가후의 뮤즈가 돼서요.”

“파쿠 이사에게 들려주고 싶었어요. 둘만 있는 곳에서요. 이왕이면 여기가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가후를 구해준 보답이에요.”

그리고 세이코가 노래하기 시작했다.

성필은 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았다.

오른손으로 왼손을 꾹 쥐었다.

왼손의 떨림이 억지로 멎는다.

달빛 아래에서 펼쳐지는 단독 콘서트다. 그것을 보고 들으면서, 성필의 입가엔 행복이 번졌다.

‘여긴 세이코 씨 추억의 장소.’

그리고 성필에게도 추억의 장소였다.

추억의 장소가 됐다.

그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세이코 씨 같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

성필은 생각했다.

그가 구한 게 세이코 같은 사람이라서 의미 있던 게 아니라, 세이코였기에 의미가 있던 거라고.

“어땠나요?”

“좋았어요.”

“고마워요.”

담백한 감상과 담백한 감사였다.

“추운데 이제 내려가요.”

“네.”

둘은 나란히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내려가던 중, 세이코가 물었다.

“지금 제 집에 올래요?”

“아니요.”

“제 고백을 전부 거절할 거면 오늘 왜 나온 건가요? 혹시 저는 시간 때우기용 여자 같은 건가요? 저도 자존심이 있다구요?!”

“세이코 씨가 보고 싶었어요.”

“저기, 파쿠 이사. 자꾸 여지를 주는 게 정말 나쁜 거예요. 알고 있어요? 확실하게 해주면 안 돼요?”

“아니 저는 정말 확실하게 했잖아요. 작년에 제가 했던 말 좀 제발 떠올려보세요. 여기서 뭘 더 어떻게 확실히 하면 될까요…….”

“다 잊어버렸어요. 뭐라고 했죠?”

“……됐어요.”

둘은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문이 열렸다. 성필은 타지 않았다.

“파쿠 이사?”

“저는 여기 일이 남았어요.”

“에? 아니 잠깐!”

세이코가 엘리베이터 문을 붙잡아 억지로 닫히는 것을 막았다.

“제, 제가 보고 싶었단 건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예요.”

“사랑인가요!”

“아니요. 우정이에요. 전우애거나.”

“말 정도는 꾸며서 해줄 수 있잖아요오…….”

“여지를 주는 게 나쁘다면서요…….”

“진짜, 진짜로 4년이나 기다려야 해요? 자그마한 일탈도 없나요? 계획 변경이라던가?”

“누가 기다리라고 했어요?”

“…….”

세이코는 문에서 손을 놓았다.

성필의 박정한 말에도 세이코는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파쿠 이사, 그때 구해줘서 고마워요.”

“살아줘서 고마워요.”

문이 닫혔다.

성필은 계단 쪽으로 향하며 폰을 보았다.

장하양에게 톡이 와 있었다. 아직 웨벡스 건물에 있다는 모양이다.

* * *

“온니 오늘 고마웠어요.”

“응.”

장하양은 토모에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작업실을 나왔다. 늦은 시간이라 복도는 한산하고 음산했다.

장하양은 중앙 계단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걸어갈 때마다 형광등이 차례로 켜졌다. 이윽고 중앙 계단에서 기다리는 성필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양아.”

“이사님.”

둘은 마주 보고 섰다.

“늦으셨네요.”

“응. 그렇게 됐네. 그리고 하양아. 네가 한 말 생각해봤는데, 안 되겠다.”

“……네?”

“너희가, 네가 세이코 씨한테 좋은 감정이 없단 건 알아. 하지만 그게 내가 세이코 씨와의 관계를 끊거나 세이코 씨를 무시할 이유가 되진 못할 거 같아. 네 말이 맞아. 주제넘은 말이야. 내 인간관계에 이래라저래라하는 건.”

둘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센서는 움직임을 인식하지 못하자 형광등 불을 꺼뜨렸다. 둘 사이에 어둠이 가라앉았다.

손만 한 번 저어도, 누군가 한 걸음만 움직여도 불이 다시 켜질 것이다.

하지만 둘 다 움직이지 않았다.

“하양아.”

어둠을 타고 성필의 목소리가 퍼졌다.

“난 세이코 씨가 좋아.”

그걸 들은 장하양은 작년에 있던 일이 떠올랐다.

세이코의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한 성필이 소녀연맹의 숙소로 치킨을 사왔었다. 멤버들이 성필과 함께 나눠 먹었다.

그리고 성필이 울었다.

그날 성필은 울었었다.

세이코와 저녁 식사를 하고, 그녀의 고백을 거절했을 성필은, 운 것이다.

‘아.’

수천 개의 화살이 날아온다.

과녁은 장하양의 심장이다.

곧 형체도 없이 찢기고 뭉개질 심장이, 단 하나의 과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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