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한는 프로듀서-568화 (568/760)

568화

홍백가합전이 끝나고, 세이코는 미사토의 집에서 조촐한 송년회를 가졌다.

참석자는 세이코와 미사토, 그리고 당연하게도 서유선이었다.

셋은 테이블에 둘러앉아 서유선이 준비한 음식과 와인을 음미했다.

“맞아.”

어느 순간 세이코는 목소리를 높였다.

미사토와 서유선은 기다렸단 듯 그녀에게 집중했다. 아까부터 세이코는 나사 하나 빠진 사람처럼 실실 웃기만 했다.

둘은 세이코가 언제 이야기를 꺼낼까 계속 기다리고 있었다.

“파쿠 이사랑 데이트하기로 했어.”

“응?”

서유선이 의아해했다.

“세이코 너 차였잖아.”

“차였지만, 데이트하는 거야. 이거야말로 어느 것보다 명확한 승리 사인이 아니겠어?”

“아니, 확실하게 끊어내려는 거 같아악!”

미사토가 테이블 아래로 서유선의 발가락을 꾸욱 꾸욱 밟았다. 서유선이 괴로움에 몸부림치면서 고개를 뚝 떨어뜨렸다.

“그, 그런, 그런 거, 그런 건, 그러 그럴 리가?!”

세이코가 고장 났다.

미사토는 그녀를 위로해주고 싶었지만, 서유선의 해석은 타당했다. 다른 경우의 수를 떠올려보려 해도, 행복회로에서 비롯된 것밖에 없었다.

‘그렇겠지.’

어찌 보면 성필은 명확하게 세이코의 고백을 거절한 것이다. ‘5년간 연애 안 해요’ 선언은 그런 의미였을 터다.

그런데 세이코는 그걸 다르게 해석했다.

‘5년 후에 만나요’로 이해한 것이다. 분명 처음 들었을 땐 아니었겠지만, 성필을 그리워하는 시간이 길어지더니 기억을 미화해버린 듯했다.

“아아아악!”

서유선이 다시 비명을 질렀다.

미사토는 깜짝 놀라 테이블 아래를 보았다. 세이코가 서유선의 발을 잘근잘근 밟고 있었다.

“유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아아아악!”

세이코가 비명을 내질렀다.

서유선이 세이코의 발을 지근지근 밟은 것이다. 세이코는 곧바로 뿌에에엥 울음을 터뜨렸다.

“미사토오 유선이 괴롭혀어어어……!”

“네가 먼저 했잖아! 미사토 세이코가 먼저 한 거야!”

미사토는 애를 둘 키우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아이를 키울 땐 편애해선 안 되는 법이다.

미사토는 능숙하게 둘을 달랬다.

세이코와 서유선은 미사토의 중재로 화해했다. 서로의 손을 잡고 위아래로 적당히 흔들었다. 그리고 몇 초간 노려보았다.

“아무튼.”

세이코는 와인을 한 모금 마셨다.

“확실하게 끊어낸다? 말이 안 돼. 끊어내려면 데이트를 거절했겠지. 굳이 받아줄 건 뭐야?”

서유선은 뭔가 말하려 했으나, 미사토에게 발이 밟혔던 게 떠올라 그만두었다.

“흐흥, 당연한 일 아니겠어? 모든 걸 다 갖춘 최고의 신붓감이 있잖아? 노골적으로 대시하잖아? 이걸 버티는 남자가 있겠어? 없지, 난 가후 세이코인걸!”

미사토와 서유선은 말을 줄였다.

긍정적인 미래를 말해주든 부정적인 미래를 말해주든, 모두 다 세이코에게 상처가 될 듯했다.

아무래도 세이코의 첫사랑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가혹할 것 같다.

* * *

리카와 장하양만 일본에 남고 다른 멤버들은 모두 한국으로 돌아갔다.

리카는 신정(新正)을 가족들과 보내기 위해, 장하양은 토모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남았다.

성필은 숙소를 깨끗하게 정리했다. 보일러는 껐는지, 가스 밸브는 잠갔는지, 모두 확인한 후 숙소를 나섰다.

차를 몰고 소녀연맹 멤버들이 쓰던, 앞으로 이틀 혹은 사흘간은 장하양만이 쓸 숙소로 갔다.

장하양은 맨션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조수석에 타자마자 빙긋 웃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고마워. 너도 새해 복 많이 받아.”

“이사님도 이제 35살이시네요.”

“늙었지.”

“사회인으로선 한창인 나이 아닌가요?”

“진짜 한창인 너한테 그런 말 들으면 내가 뭐가 되냐.”

장하양은 올해로 25살이 됐다.

그리고 1월 1일, 고대하던 소녀연맹의 연애 금지 조항이 풀렸다.

사실 정확히 날짜를 따지면 이보다 수십 일 전에 풀렸지만, 1월 1일은 새로운 시작이기도 하니 1월 1일로 정했다.

“아하하.”

장하양은 여느 때처럼 밝게 웃었다.

성필은 차를 몰며 웨벡스로 가는 도중, 다시금 장하양에게 주의사항을 말해주었다.

“비계(비밀 계정)랑 공식 계정 헷갈리지 마. 웬만하면 SNS는 아이디 비밀번호 저장해두지 말고.”

연예인들은 SNS를 사적으로 이용하지 않을까? 한다.

비밀 계정이란 것을 만드는데, 이 계정은 일반적으로 비공개처리 되어 보통 사람들은 게시물을 볼 수 없다.

게시물을 볼 수 있는 건 팔로우를 받아준 이들 뿐이다. 그리고 이 팔로워들은 똑같은 연예인들의 비밀 계정이다.

이로써 아이돌들도 현대인에게 필수라는 SNS 생활을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비계를 통해 연인과 여행 간 사진, 속마음 쓰기, 혹은 사적인 축하를 할 수 있게 된다.

소녀연맹 멤버들도 일찍이 비계를 만들어두어 다른 아이돌 동료들과 친분을 다지고 있다. 활발하게 쓰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리고 연애 시작하면 꼭 알려주기. 우리가 도와줘야 하니까. 또 스탭들은 입이 무겁다지만, 웬만해선 남들 보이는 데는…….”

장하양은 성필이 하는 말을 대강 듣는 듯했다. 그녀의 시선은 창밖에만 머물렀다.

“아예 폰을 따로 만드는 것도 추천할게. 그리고 상대의 숙소는 언제나 조심해야 하고…….”

“이사님.”

“응?”

“저 소녀연맹 활동 끝낼 때까지 연애 안 한다고 말씀드렸잖아요. 몇 번이나.”

장하양의 목소리는 평탄했다. 그게 성필에겐 낯설었다.

“아…… 그랬지. 나도 기억하고 있어. 잊은 거 아니야. 그래도…….”

“그래도, 란 건 없어요.”

드디어 장하양이 창밖에서 성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무미건조한 목소리와 달리 미소를 띠고 있었다.

“한 번 한 약속은 꼭 지켜요. 이사님이랑 한 약속이고, 이사님도 하신 약속이잖아요.”

성필이 세이코 앞에서 선언했던 ‘5년간 연애 안 함’이란 건 적어도 지금까진 지켜지고 있었다.

당시 장하양은 감동한 나머지 눈물까지 흘렸고, 성필의 뜻을 따르기로 약속했었다.

그런데도 성필은 장하양에게 몇 번이나 연애에 관한 주의를 주었다. 그녀가 지키지 않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에?

아니었다.

이 시간, 이 나이에만 느낄 수 있는 감정이 있다. 그걸 놓치는 건 안타깝지 않은가.

“……응.”

하지만 성필은 그런 말을 꺼내지 않았다.

이미 몇 번이나 장하양과 되풀이한 이야기였다. 결론은 똑같았다.

장하양은 최고의 아이돌이 되기 전까지는, 소녀연맹의 7년 계약이 끝나기 전까진 연애하지 않겠다고 말할 것이다.

“오늘.”

장하양이 아무것도 아니란 듯 말했다.

“세이코 선배님을 만나시는 거죠?”

“응.”

“전에 제가 드린 말씀은…… 생각해보셨어요?”

토모에를 떠나보내던 때, 장하양은 직설적으로 말했었다. 성필이 세이코와 관계를 이어 나가는 게 싫다고 말이다.

이건 그녀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소녀연맹 멤버들 모두 정도의 차이만 있지 세이코를 좋게 보지 않는다. 어찌 보면 장하양은 총대를 메고 멤버들의 생각을 전한 것일 수도 있다.

“…….”

성필은 대답하지 않고 운전에 몰두했다. 아니, 아마 운전에 집중하는 척일 것이다.

장하양은 알 수 있었다.

“이사님이 왜 세이코 선배님을 신경 써주시는지는 알겠어요. 이사님은 선하시니까요. 자신을 향해 손을 뻗는 사람을 가만히 두지 못하시는 걸 거예요. 그런 거겠죠. 그런데 세이코 선배님은…….”

장하양은 급히 입을 닫았다.

이 이상 말하는 건 성필에게든 세이코에게든 실례가 되리란 걸 눈치챘다.

그 내용이 무엇이든 자신이 좋게 보일 리 만무하다. 그걸 알곤 가만히 있었다.

“도착했다.”

성필이 웨벡스 앞에 차를 댔다.

“가볼게요.”

장하양이 조수석에서 나왔다. 성필도 그녀와 함께 내렸다.

“문 앞까지 배웅할게.”

“오늘따라 서비스가 좋네요?”

“당연하지, 가로 엔터의 기둥인 소녀연맹 멤버님이시잖아.”

장하양은 걸음을 멈추고 성필과 마주 보고 섰다. 그리고 그가 멘 목도리로 손을 가져갔다.

안 흘러내릴 정도로 두르기만 한 목도리를, 장하양이 바로 매주었다. 목도리가 예쁜 매듭을 그렸다.

목도리를 만지던 장하양은 목도리 안으로 손을 넣었다.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하고 계시네요.”

“항상 하고 있어.”

장하양이 선물로 준 목걸이.

장하양이 선물로 준 목도리.

“하양이가 준 거잖아.”

“감사합니다. 소중하게 여겨주셔서. 배웅은 여기까지면 괜찮아요. 춥잖아요.”

“응.”

장하양이 웨벡스 건물로 들어갔다.

성필은 그녀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다가 차 안으로 들어갔다.

* * *

세이코는 약속 1시간 전부터 와서 기다렸다.

장소는 예술극장 앞이었다.

그녀는 몇 번이고 시계를 확인했다. 이제 20분 남았다.

‘너무 빨리 왔나.’

기다리는 시간이 지겹진 않았다. 그녀가 자발적으로 일찍 나온 거기도 하고, 기다리는 시간 또한 행복했다.

동시에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오기도 했다.

갑자기 성필이 안 오겠다고 하거나, 그녀가 날짜를 착각했거나, 아예 성필이 바람맞히거나, 아무튼 부정적인 미래들이 자꾸만 그려졌다.

그런가 하면 성필과 보낼 오늘 하루가 상상되어 행복하기도 했다. 함께 공연을 보고, 밥을 먹고, 거리를 걷고, 마침내 관계가 더 진전될 수도 있다.

아니다.

안 오면 어떡하지?

사실 이게 전부 환상이면?

“세이코 씨.”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세이코는 그쪽으로 홱 돌아보았다.

“아…….”

세이코는 말문이 턱 막혔다.

정말 성필이 왔다.

데이트 신청을 받은 성필이 왔다.

데이트를 하러 성필이 이곳에, 자신의 앞까지 왔다.

멀리 있던 터라 흐릿하던 그의 얼굴이 점점 선명해진다. 그가 다가온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바로 앞에 서기 전, 마침내 4K 화질처럼 선명해진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농담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세상이 정지했다.

‘정말로 왔어, 파쿠 이사가 나 때문에 왔어…….’

믿을 수가 없다.

그가 자신을 보러 왔단 게 믿기지 않는다.

행복했다.

그가 ‘여기’ 있다.

믿을 수 없었음에도, 세이코는 그가 실존함을 인식했다.

흑백 배경처럼 의미 없이 지나가던 인파가 생명을 부여받아 꿈틀거리고, 지금까지 아무런 의미 없이 휘날리던 바람 한 줄기가 세상의 주인공처럼 요동쳤다.

“일찍 오셨네요.”

그가 미소 지었다.

혁명의 순간이다.

0도에서 1도로 넘어가 마침내 녹기 시작하는 얼음처럼.

99도에서 100도로 넘어가 증발하는 물처럼.

그건 모든 걸 뒤바꾸는 변화였다.

그의 얼굴이 무표정에서 미소로 바뀐 것. 그건 하나의 변화였으나 동시에 세상 모든 것의 변화였다.

우주의 시작이 빅뱅이라면, 세이코란 인간의 시작은 지금 여기서부터였다.

성필이 데이트를 받아들이고 데이트 장소에 나타난 지금 이 순간이, 세이코의 심장이 처음으로 뛰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세이코 씨?”

“네!”

“네?”

“아.”

세이코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붉혔다. 자기도 모르게 군기가 바짝 든 군인처럼 대답해버렸다.

그가 이상하게 보진 않을까?

“들어갈까요?”

그는 여전히 자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걱정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세이코는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네…….”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 인간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게 사랑이라고 한다. 그 흔해 빠진 말이 오늘처럼 마음에 와닿긴 처음이다.

사랑.

자기 자신을 혁명하는 유일한 감정.

“가, 가요…….”

세상이 행복으로 물든다.

* * *

극장 자리에 앉았다.

둘은 어색하게 앉아 무대의 막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

“…….”

세이코는 절망했다.

그가 지루해하면 어떡하지?

‘괘, 괜찮아.’

오늘을 위해 그와 나눌 대화 목록을 작성했다. 그리고 그 대화 주제는 자신의 매력을 한껏 어필해줄 것이다.

무려 오늘 볼 공연에 관한 것이니까!

“파쿠 이사, 오늘 볼 공연에 대해 얼마나 아나요?”

“그냥 한국 무용이란 것밖에 몰라요. 그런데 어떻게 한국 무용을 고르셨어요? 원래 흥미가 있으셨나요?”

“파쿠 이사랑 보면 의미가 더 있을 거 같아서요.”

“그래요? 어떤 공연인데요?”

세이코의 어깨가 으쓱했다.

‘오늘 공연에 관한 모든 걸 조사해왔어.’

평소의 띨빵한 이미지를 벗고 지적인 도시여성으로서의 매력을 보여줄 때다!

“원본은 조태쿠온(조택원)의 ‘학’이에요.”

“네, 공연 제목도 ‘학’이더라고요.”

“이 ‘학’은 일본 제국 시대에 만들어졌어요.”

“아…….”

“그런데 무려, 한일합작이에요! 작곡가 다카키 도로쿠가 곡을 썼는데, 라벨의 볼레로풍 곡에 아리랑 선율을 더했어요. 안무는 당연히 조태쿠온이고, 무라야마 토모요시가 연출, 이토 키사쿠가 무대 장치를 맡았고, 키무 저한(김정환)이 의상, 키무 혼스(김헌수)는 매니저로 참여했어요.”

말했다!

이름 전부 헷갈리지 않고 전부 다 말했다!

세이코는 ‘어때 나 똑똑하지?’란 눈빛으로 성필을 보았다. 예상대로 성필은 감탄한 듯했다.

“게다가 현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까지 맡았어요. 오늘 연주도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하구요. 초호화 캐스팅이었어요! 그러니까 이 작품은 한국과 일본의 화합을 상징하는 거나 마찬가지죠!”

“일본 제국 시대에 그렇게 문화적 교류가 있었는지는 몰랐네요. 문화계엔 서로 꺼리는 기류가 없었던 걸까요? 대단하네요.”

“근데 조태쿠온은 나중에 일본과 친했던 행적? 으로 논란이 됐었대요.”

“아, 친일…….”

“그리고 이…… 승, 승, 어…….”

“이승만?”

“네! 이승만이란 사람을 비판해서 십 년 넘게 귀국을 금지당했다고 해요.”

세이코는 ‘어때 신기하지? 난 이런 것도 알아!’란 눈빛으로 성필을 보았다.

왠지 모르지만 성필은 아까처럼 대단하다고 느끼는 기색은 아니었다. 씁쓸한 표정이었다.

‘이거 혹시 민감한 내용인가……?’

세이코는 다급히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근데 이 춤이 소실됐다가 몇 년 전에 일본에서 악보가 발견됐대요. 그,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한일화합이에요! 한일 무용가들이 합심해서 춤을 복원했어요!”

“그건 정말 화합이 맞네요. 근데 악보까지 없어질 정도면 춤도 없어진 거 아닌가요? 어떻게 복원했대요?”

“…….”

모른다.

사라진 춤을 어떻게 복원하냐고?

100시간을 그 문제만 고민하라고 해도 답을 못 낼 것이다.

그 시대에도 아이튜브가 있었나?

“어, 그, 어어…… 구, 구전설화?”

“그런 방법도 있겠네요.”

“아, 그쵸? 그렇죠!”

세이코는 한시름 놓았다.

“대단하시네요. 그런 것도 아시고.”

“별거 아니에요. 저는 가후니까요.”

세이코가 으쓱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멋졌다.

얼마 안 가 막이 열리고 학창의를 입은 무용수가 나타났다. 그가 춤을 추었다. 정말 학 같았다.

그리고 그게 세이코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세이코 씨.”

“으어?”

세이코는 눈을 떴다.

주변이 시끄러웠다.

둘러보니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나가고 있었다. 공연이 끝난 듯했다.

“어, 아?”

잠들었나?

말도 안 돼.

‘자, 잤다고? 공연을 보다가?’

세이코는 성필을 보았다.

웃고 있었다.

‘웃기겠지 당연히?!’

온갖 지식을 피로해 놓고서 정작 공연이 시작되자마자 잠들었으니 당연히 웃기겠지!

“나갈까요?”

“고…….”

“고?”

“공연, 좋았죠?”

세이코, 필사적인 변명!

“음악이 너무 좋아서 눈 감고 들어버렸네요. 역시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예요. 세금을 내는 보람이 있네요.”

“하하, 그러게요.”

“…….”

세이코, 1차 자살 충동.

그녀는 극장을 나가기까지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아니, 꺼내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하든 성필이 비웃을 듯했다.

성필은 여러 이야기를 하다가, 극장을 나와서도 입을 꾹 닫은 세이코를 보곤 걸음을 멈추었다.

세이코도 당황하여 멈췄다.

“파, 파쿠 이사?”

세이코의 불행회로가 돌아갔다.

‘세이코 씨 정말 교양이 없네요. 당신 같은 분과는 1분도 같이 못 있겠습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니면.

‘공연 중에 자는 사람은 난생처음이네요. 아니 뭐 딱히 세이코 씨에게 일반적인 예절을 기다린 건 아니지만요.’

혹은.

‘오늘 재밌었어요. 가볼게요.’

세이코의 눈꼬리가 우울하게 늘어졌다.

“공연 재밌었어요. 저를 배려해주신 거죠? 세이코 씨가 좋아하는 종류도 아닌데, 절 위해 이 공연을 골라주셔서 감사해요. 고맙고도 죄송하네요.”

이 사람은 천사인가?

“배고프시죠? 보답이라긴 뭐하지만, 제가 좋은 가게를 알아뒀거든요. 이후로 시간 괜찮으시면, 가실래요?”

천사가 맞다.

“네, 다, 당연하죠. 가, 가요, 갈게요.”

성필이 미소 지었다.

오늘, 세이코는 지금까지 보았던 그의 미소보다 더 많은 미소를 보았다.

이러다가 미소 과다섭취 때문에 심장이 멈춰서 쓰러질 것 같다.

세이코는 저 미소가 좋다.

평소의 그는 조각 같다. 조각이 미소 짓는단 건 상상해보면 오싹한 일이다. 사람처럼 부드럽지 않으니 얼굴 여기저기가 갈라질 것이다.

그렇지만 성필은 조각이면서도 미소 짓고, 미소를 지음에도 갈라지고 무너지지 않는다.

아, 진짜, 저 미소를 볼 때마다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게 자신을 향하는 것이라면, 백 번 중 99번은 죽어도 된다.

나머지 한 번, 그 한 번으로 죽어선 안 되는 이유는, 다음 미소를 보고 싶기 때문이다.

‘잘생겼어.’

그렇게 말하고 싶다.

그런데 그 말은 세이코의 행복이 샘솟는 원인을 묘사하기엔 너무 닳은 말인 듯하다.

아니, 세상 그 어떤 말도 그를 묘사할 순 없다. 언어란 불완전한 것이고, 언젠간 사라지기에, 불완전하고 사라지는 것으로 그를 표현하기 싫다.

그렇기에 그녀가 그에게 가지는 감상은, 언제나 그녀가 느끼는 감상에서 머문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말한다. 그가 자신에게 미소 지어줄 때마다, 그에겐 절대 하지 못할 말을 마음속으로 외친다.

‘씨발 좋아 죽어어…….’

세이코는 그와 나란히 걸었다. 앞을 보지 않았다. 옆으로 눈동자를 돌려 그를 보았다.

“파쿠 이사.”

사실은 그를 ‘성필’이라고 부르고 싶다.

완벽한 한국어 발음으로, ‘센피루’가 아니라 ‘성필’로 부르고 싶다.

이 얼마나 멋진 발음인가.

그 발음을 상상하면 황홀해지고, 마음속으로 되뇌면 침이 고이며, 집에서 남몰래 발음하면 심장이 흉곽을 뚫고 폭발할 듯하다.

“네, 세이코 씨.”

세이코 씨…….

세이코는 그가 한국인이라 좋았다. 아니었다면 그녀를 ‘후나비키 씨’라고 불렀을 테니까.

그녀는 ‘세이코 씨’란 호칭이 좋았다.

거기서 더 나아가자면 ‘세이코’라고 불러줬으면 한다. 아니면 ‘파쿠’라고 불러줬으면 한다. 언젠가 ‘파쿠 세이코’가 될지도 모르니까.

“오늘, 몇 시까지 시간 있나요?”

세이코는 상상한다.

그가 이렇게 말해주길.

‘오늘이 아니라 내일까지 세야 해요.’

그의 입이 열린다.

그의 입 안은 붉다.

저 붉음이 자신의 피부를 하나도 남김없이 물들여 흐물흐물 녹여줬으면 한다.

“음.”

그가 고민한다.

고민한단 게 마음 아프다.

이왕 고민할 거라면 영원히 해주길.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영원했으면 하니까.

그렇지만 세이코는 그가 무엇이라고 말할지 알았다. 잘해봐야 저녁까지겠지.

오늘 그와의 만남이 끝나면, 다시 그를 만나기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세이코 씨는.”

그가 세이코를 향해 또 미소를 지었다.

죽어도 좋겠다고 생각한 미소를.

“언제까지 있었으면 좋으시겠어요?”

당신이 나를 사랑할 때까지.

그게 안 된다면, 당신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지라도, 영원히 함께 있고 싶어…….

* * *

장하양은 창밖을 보았다.

해가 정점에서 2/3를 지났다.

창을 때리는 바람이 세다.

곧이어 창에 흰 것이 달라붙었다.

눈이다.

“온니.”

토모에의 부름에 장하양은 그녀를 본다.

“방금 리프 어땠어요?”

“음.”

장하양은 베이스 기타를 퉁겼다.

“모르겠어.”

“역시 느낌이 없나요. 아, 밥 먹을 시간이네. 밥 먹고 해요!”

“그래.”

장하양은 기타를 허벅지 위에 올려두곤 창밖만 바라보았다. 저 빌딩 숲 어딘가에 성필과 세이코가 있을 것이다.

장하양은 기타 줄로 손을 가져갔다.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낯설었다. 감각이 익지 않는다.

아니, 기타에 집중할 수가 없다.

‘아마…….’

장하양은 기타를 내려두었다.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시겠지.’

먼지 같던 눈발은 완연한 함박눈이 되어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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