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7화
“홍백가합전이란 거 알아?”
아주 옛날, 소녀연맹이 데뷔한 지 얼마 안 됐던 시절. 성필이 멤버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
“당연히 알죠!”
그리 답한 건 리카뿐이었다. 다른 멤버들은 그게 뭐냐는 듯 눈만 껌뻑일 뿐이었다.
리카는 굉장히 충격받아 말까지 더듬었었다.
“일본에서 인기 많은 사람들만 나갈 수 있는 음악 프로그램이래.”
성필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희들도 언젠가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성필이 조심스러웠던 건 아마 멤버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리라.
“일본 프로그램에요? 거길 우리가 어떻게 나가는데요?”
조아라가 여느 때와 같이 초를 쳤다. 그녀는 성필이 무슨 말을 하면 반박하는 습성이 있었다.
평소의 성필이었다면 어린애 보듯 조아라를 흘겼겠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그는 머쓱하게 웃으면서 읊조렸다.
“그렇지…….”
씁쓸한 답이었다.
그걸 보자 조아라는 당황하여 성필을 위로하기까지 했었다.
소녀연맹 멤버들은 말을 맞춘 것도 아니건만, 다 함께 이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홍백가합전 무대에 오르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멤버들은 또 다른 기억을 떠올렸다. 저마다 다른 기억들을.
* * *
중학생.
리카는 공부가 싫다.
이런 걸 왜 배우는지 모르겠다.
흥미가 전혀 없다.
그럴수록 아버지는 리카를 엄하게 대했다. 온갖 학원에 보내면서 억지로라도 공부를 강요했다.
그때 리카가 찾아낸 탈출구가 하나 있다.
‘엄청 재밌어!’
한류 드라마였다.
리카는 학원을 마치고 녹초가 되어선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한류 방송 채널을 틀어 나오는 드라마는 전부 보았다.
몇 개월 후 그녀는 한국어를 들을 수 있게 됐다. 게다가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했다.
그녀는 몇 없는 친구들에게 자신의 한국어 실력을 자랑하고 싶었다. 그녀가 처음 입 밖으로 꺼낸 한국어는 이것이었다.
“내가 이 나라의 여왕이다!”
때마침 사극 붐이어서, 리카는 한국어 회화와 하등 쓸모없는 대사를 많이 외워버렸다.
한류 드라마와 영화는 리카의 해방구였다.
그와는 별개로 성적은 그다지 좋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는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사춘기라 부모님과 서먹해졌다.
동아리 일로 교사인 아버지와 상담하고 싶었다. 껄끄러움을 참고 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 책이 놓여 있고 스탠드가 켜져 있었다.
‘헤에, 선생님도 공부를 하는구나.’
리카는 교사는 뭘 공부할까 궁금해서 책상으로 다가갔다.
아마 교육학과 관련된 것이었을 터다.
그리고 그곳에서 본 문장은 영원토록 리카의 인생을 바꾸어놓았다.
‘교육제도 비판이론. ……이러한 교육제도는 인간을 주체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현실에 적응하는 객체적 존재로 전락시킨다. 교육제도는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로서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 국민을 일률화하는 억압적 역할을 수행한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감각이었다.
‘그래!’
학교란 건 감옥이다!
개성을 죽이는 교도소다!
인간이 아니라 국민을 만드는 곳이다!
그러니까 탈출해야 해!
사실, 그건 계기에 불과했다. 리카는 어떤 계기로든 이러한 소망을 품었을 것이다. 다만 이번엔 그 원인이 교육학 글귀 몇 줄이었을 따름이다.
리카는 한류 배우가 되기로 했다.
본격적으로 한국어를 배웠다.
대본을 뽑아 연기를 연습했다.
독학으로 할 수 있을 만큼 노력했다. 준비 없는 소망은 힘없는 정의와 다를 바 없다.
부모님을 설득해야 한다.
“안 된다!”
당연히 아버지는 기를 쓰고 반대했다.
그에 리카는 2페이즈로 넘어갔다.
집 마당으로 뛰쳐나가 아기처럼 울부짖었다. 부모님은 리카가 곧 그만둘 줄 알았지만, 그 울부짖음은 18시간 동안 그치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가 리카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그리고.
“해봐라.”
그리 말하는 아버지의 얼굴은 절대 좋지 않았다. 마치 창자가 끊어지는 사람 같았다.
리카도 아버지의 그런 얼굴을 보자 괴로웠다.
앞으로 그녀는 응원 없이 먼 타국에서 홀로 살아야 했으니까.
“갈게.”
하지만 리카는 한국으로 떠났다.
혈혈단신으로 황야에 서기로 결심했다.
“꼭 테레비에 나올 테니까, 지켜봐 줘.”
그렇게 리카는 외로운 여정을 시작했다.
누가 보면 미쳤다고, 제정신이 아니라고 할 법한 짓이었다.
하지만 리카는 그렇게 태어났다. 천성적으로 만인의 관심과 빛을 갈구하도록 태어난 것이다.
만약 1,000년 전쯤에 태어났다면 적당히 집안일을 배우고, 적당한 농부를 만나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적당한 농부의 아내가 되어, 목매달아 죽었을 것이다.
“그럼 진짜, 갈게.”
부모님의 눈물과 걱정을 뒤로하고, 리카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미래를 향해 나아갔다.
쉽지 않았다.
6개월 동안 오디션을 전전하며 쓰디쓴 좌절과 실패만 맛보았다.
그러다가 어느 남자와 만났다.
“넌 아이돌 하는 편이 낫겠다.”
그는 그리 말했다.
그리고 그와 다시 만난 날부터, 모든 순간 모든 시간 모든 날과 모든 계절이 축제였다.
* * *
조아라는 집이 싫었다.
집으로 가면 부모님이 못마땅하단 눈빛을 보낸다. 그리고 자꾸만 한숨을 쉰다.
그래서 조아라는 최대한 집에 늦게 들어갔다.
학원에서 달이 머리끝을 지나도록 춤을 추었다. 부모님이 잘 시간이 되어서야 집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당신이 이 모양이니까 애가 저러지!”
부모님은 가끔 조아라를 두고 싸우기도 했다.
그들도 아이를 낳고 기르는 게 처음이었다. 처음이기에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이, 공부는 팽개치고 춤만 추러 다니는 게 너무나도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아라야, 언제까지 이럴 거니? 응?”
학원비를 끊겠다며 협박하고, 그만하라고 윽박지르고, 혹은 타이르고, 그것도 안 되면 부모님은 애원했다.
“대체 왜…….”
조아라는 부모님이 우는 것을 보아도 아무렇지 않았다.
처음부터 이랬던 건 아니었다.
집이 휴식처라기보다 가시방석이었던 그녀의 마음은 갑옷이 되었다.
자기 자신만이 유일한 가치가 되어 타인에게 공감하지 못하는 인간으로 자라났다.
부모님이 화내는 것, 소리치는 것, 그런 걸 너무 많이 보아왔던 조아라다. 아주 어릴 적부터 너무 많이 보아와서, 이젠 아무런 감정도 없다.
그녀가 퉁명스럽게 답했다.
“재밌어.”
춤은 재밌다.
그녀의 영혼은 춤으로만 열려 있다.
“춤추는 게 재밌어.”
“너는, 넌…….”
어머니가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엄마가 우는 걸 보는데, 아무렇지도 않니?”
그러면 엄마는, 딸이 몇 년 동안 춤에 매달리는 것을 보고도 아무런 생각이 안 들어?
춤은 재밌어.
그런데 그것뿐만이 아니야.
춤은 내 모든 거야.
아무것과도 바꿀 수 없는 내…….
“나가―!”
조아라는 집을 나섰다.
어차피 나갈 생각이었다.
보육원에 봉사활동으로 댄스 공연을 해야 했다.
공연을 마치곤 학원으로 갔다.
이번 달에 있을 댄스 대회에서 언니들과 입을 의상. 아직 바느질을 덜 끝냈다.
조아라는 연습실에 홀로 앉아 바느질했다.
그때 연습실 문이 열렸다. 언니들인가 싶었다. 그런데 돌아보니 웬 남자가 있었다.
“저, 저기. 저 이런 사람입니다.”
그가 준 명함엔 ‘가로 엔터테이먼트’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아이돌 연습생이 되어보라고 했다.
그때 아마 이렇게 말했던가.
“필요 없어요. 나가요.”
그랬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그녀는 연습생이 되기로 했다.
부모님께 말했다.
“……그래.”
부모님은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그게 낫겠지.
부모님이 시원하게 계약서에 사인했다.
“해봐, 뭐든, 해봐…….”
마침내 부모님이 포기했다.
응원은 없었다.
조아라는 계약서를 받아들고 회사로 갔다. 그리고 그것을 회사에 제출했다.
그녀는 결심했다.
‘난 할 수 있어.’
조아라의 사명.
그녀를 만든 이들에게, 부모님에게, 그들이 틀렸다고 똑똑히 말해줄 것이다.
부모님이 과거의 자신들을 부끄러워할 만큼.
‘성공할 거야.’
부모님이 화내고 슬퍼하는 걸 보는 건, 당연히 조아라도 괴롭다.
하지만 그녀는 부모님이 바라는 대로 살기 위해, 부모님이 기뻐할 삶을 위해 태어난 게 아니다.
나는 나로서 태어났다.
내가 되기 위해 살아간다.
* * *
장하양은 과거를 떠올린다.
흐릿하다.
기억이라고 해야 할까, 떠올리면 전신을 불쾌한 감각이 휘감는다.
아르바이트 장소까지 걸어가느라 녹초가 된 몸. 저린 다리. 습한 공기. 따가운 햇볕.
여름.
그녀에게 과거는 여름이다.
불쾌한 계절이다.
“너는 정말.”
그리 과거로 침전하면 들려오는 건 부모님의 목소리다.
“하나부터 열까지.”
낮잠을 자다가 별안간 신경 쓰게 된 주변 공사장의 소음처럼.
“쓸모가 없구나.”
전신에 불쾌감이 휘몰아친다.
세상은 정글이다. 승패가 명확히 나뉘는 게임이다. 사람들은 그리 말하곤 한다.
장하양도 동감한다.
그리고 장하양은 그 게임에서 단 한 판도 이기지 못해왔다. 그럼에도 빛을 갈구해왔다.
‘언젠가 이곳에서 나갈 거야.’
세상의 밑바닥에서 절망을 퍼먹고 사는 그녀이지만, 언젠가 찾아올 빛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기 위한 연기였다.
빛을 쫓는 노력이었다.
그러나 그마저 할 수 없게 됐다.
“내가 너 키우느라 들인 돈이 얼만데 고작 몇백만 원이 아까워? 자식이면 부모한테 빚 갚을 생각을 해야지, 쯧.”
학원에 다닐 돈마저 부모에게 빼앗겼다.
무저갱의 바닥이다.
아무런 빛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습하고 덥고 땀 때문에 불쾌하고, 절대 나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그때 어느 남자를 만났다.
“꿈을 접어주세요.”
그리고 장하양은 연기를 그만두었다.
아이돌이 되기로 했다.
그건 장하양에겐 너무나도 당연하게 되어버린 패배 중 하나였다. 동시에 인생에서 첫 번째로 따낸 승리이기도 했다.
그에게 물었다.
꿈이 무엇이냐고.
“최고의 아이돌이요.”
장하양은 최고의 아이돌이 되기로 했다.
오직 그것만을 위해 살아가기로 했다.
이제 여름이 불쾌하지 않다.
새하얀 빛만이 느껴진다.
* * *
“아, 넌 뭐 할 때 재밌어? 이거 할 땐 진짜 행복하다거나.”
없다.
신아름은 그런 건 없다.
하루하루 죽어가며 살아가는 기분이다.
“이제 생기겠네.”
그 남자는 신아름에게 연습생이 되어보라고 하며, 그녀가 행복할 걸 찾아주겠다고 했다.
정말이었다.
연습생 생활은 행복했다.
그가 있어서.
“나 여기 나갈 거야.”
그런 그가 회사를 나가겠다고 한다.
“너도 같이 가자.”
그가 권해주었다.
신아름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그에게 가지는 감정은 일반적인 게 아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그에게 언제까지나 의존할 수는 없다.
그 또한 이 관계가 길어질수록 귀찮아할 것이다.
남자는 슬픈 얼굴이었지만, 신아름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신아름은 데뷔가 확정되다시피 했으니.
어쩌면 그는 배신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알겠어.”
남자가 말했다.
신아름은 울고 싶지 않았다.
그가 보고 싶지 않다.
괜찮다.
안 괜찮아.
보고 싶어.
울고 싶어.
데뷔조에서 탈락하고, 신아름은 그를 불렀다. 그의 회사로 데려가달라고 했다.
그가 조건을 달았다.
“첫째, 내 말에 절대복종.”
네, 뭐든지.
“둘째는.”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최고의 아이돌이 되겠다고 약속해줘. 최선을 다해 노력하겠다고.”
네, 반드시.
그런데 그건.
“이미 옛날에 약속했던 거잖아요.”
“그래도, 다시.”
신아름은 약속했다.
그녀는 예나 지금이나 최고의 아이돌이 되길 바랐다. 끝없는 승리를 쌓아나가 반드시 그 자리에 오를 것이다.
멤버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최고의 아이돌이 될 거다’라고 말하길 꺼렸다.
하지만 신아름은 거리낌 없이 ‘최고가 목표다’라고 말하고 다녔다. 모든 그룹을 꺾고, 대상도 받고, 최고가 될 거다.
그 말을 들은 동료 아이돌이나 스태프들은 웃었다. 아마 비웃음일 것이다.
마음껏 비웃으라지.
비웃음당한다고 꿈이 멀어지는 건 아니니까.
비웃음당하는 게 창피하지 않으니까.
다른 사람에겐 우스운 말일지라도, 신아름에겐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며 더없이 진지한 말이다.
자신의 꿈을, 그의 꿈을 비웃는 이들을 신경 쓸 필요는 없다.
신아름이 신경 써야 할 건 오직.
“잘했어, 아름아.”
그, 꿈뿐이다.
* * *
뺨이 얼얼하다.
백설하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뺨을 쓸었다. 그리고 돌아간 고개를 정면으로 향했다.
어머니가 분노에 차서, 또한 당황하면서 백설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가 이쪽으로 손을 뻗어왔다.
“서, 설하야…….”
그리고 백설하의 뺨을 쓰다듬었다.
어머니가 울었다.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으니까, 이제 그만하면 안 되겠니?”
가족들에게 다시 연습생이 되겠다고 말했다.
그러니 이제 숙소에 들어가겠노라고.
그랬더니 뺨을 맞았다.
“설하야, 설하 너는, 충분히 힘들었잖아. 실패하고 매일을 울었잖아. 그런데 왜 다시…….”
괴로운 길로 들어가려는 거니?
“엄마가 못 보겠어. 너 그러는 거, 힘들어하고 실망하는 거, 이제 내가 못 보겠어. 난 네가 행복하길 바라는데, 어떡하면 좋니 대체…….”
어머니가 무릎을 꿇고 흐느꼈다.
“네가 행복하길 바라서 그대로 놔뒀어. 학원에 보내고, 연습생으로 생활할 수 있게 하고, 아이돌이 되고도 응원했는데, 그랬는데에…… 엄마는 네가 행복하길 바랐던 건데…….”
돌아온 건 절망뿐이었다.
백설하는 한 번 아이돌로서 실패했다.
그런데 다시 아이돌이 되겠다고 한다.
21살에 연습생부터 다시 시작하겠다고 한다.
무릎 꿇은 어머니가 백설하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행복하기 위해 하는 일이, 나중에 고통으로 돌아올 게 뻔하면, 엄마는 어떡하면 좋니? 내가 설하 너를…… 어떻게 해야 좋겠니?”
백설하는 멍하니 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돌이 실패하고 나서, 백설하는 한 달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살았다.
눈물만이 그녀가 살아있단 증거였다.
그리고 어머니는 그보다 많은 눈물을 흘렸고, 그보다 많은 슬픔을 머금었다.
그게 반복되려 한다.
“설하야!”
백설하는 뒤로 돌아 자신의 방으로 갔다.
캐리어를 꺼내 마구잡이로 옷을 주워 담았다. 그리고 대충 지퍼를 잠그곤 집을 나섰다.
“설하야, 설하야! 백설하―!”
어머니의 절규를 뒤로하고 백설하는 집을 나섰다. 추운 바람이 얇은 차림을 뚫고 피부를 때렸다.
어머니의 말이 맞다.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다.
백설하는 또다시 슬픔에 빠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더 괴로운 일이 있다.
시간을 후회와 함께 보내는 것이다.
‘이때 한 번 더 해볼걸’이란 후회를 지니고 남은 평생을 살아가고 싶지 않다.
‘확신이라도 있어? 성공할 확신이?’
백설하가 자문(自問)했다.
답은 빠르게 나왔다.
‘없어.’
그럼에도 나아가는 것이다.
이건 조건 없는 믿음이다.
아무런 근거 없이, 믿음만 있다.
그거면 충분하다.
* * *
“홍백가합전이란 거 알아?”
백설하가 말했다.
무대에 나가기 직전이었다.
그 말을 듣자 멤버들이 큭큭 웃었다.
성필이 옛날에 한 말이 떠올라서였다.
“일본판 가요대제전 아니에요?”
조아라가 장난스럽게 그리 말했다.
멤버들은 웃기만 했다.
굳이 그녀에게 태클을 거는 이는 없었다.
“아하하, 저희가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어요.”
“뭐예요. 언니는 팀장님 못 믿었어요?”
“아니, 그런 뜻이 아니야. 이렇게 빨리 이 지점까지 올 줄 몰랐다는 거야.”
장하양은 신아름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웬일이래. 언니 떠는 거예요?”
“너도 똑같잖아.”
“당연히 떨죠. 이렇게 큰 무대인데.”
“모두가 없었으면.”
그때 리카가 멍한 어투로 말했다.
“모두가 없었으면, 저 혼자였으면, 못 왔을 거예요.”
“그건 또…….”
조아라가 픽 웃었다.
“엄청 새삼스럽네.”
[다음은 홍백가합전 첫 출장인 케이팝 아이돌 그룹!]
문이 열렸다.
계단이 보인다. 그리고 무대가, 또 그 너머로는 관객석과 카메라가 있다.
십수 개의 카메라가 소녀연맹을 비춘다.
5,000만 명의 눈이다.
[소녀연맹입니다!]
백설하가 걸음을 내디뎠다.
계단을 따라 내려와 무대에 섰다.
일본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보는 무대다. 아니,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보는 무대일지도 모른다.
앞으로 다시 이 정도 규모의 무대에 서는 일은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거대한 스테이지.
소녀연맹은 무대의 중앙으로 나아간다. 먼저 나와 있던 수많은 가수와 예능인을 뒤로하고, 그녀들은 가장 앞에 나와 섰다.
백설하는 좌우를 보았다.
왼쪽으로 장하양과 신아름이, 오른쪽으로 리카와 조아라가 있었다.
“둘, 셋.”
5,000만 명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우리들의 연맹.”
허리를 펴고, 카메라와 똑바로 눈을 맞추었다.
“소녀연맹입니다!”
환호와 박수가 돌아온다.
저 카메라 너머로는 수십만 명의 인민이들이 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소녀연맹의 노래를 들어본 이들과, 소녀연맹의 이름만 들어본 이들과, 또 소녀연맹을 아예 모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5,000만 명이다.
한국 인구와 맞먹는 숫자가 소녀연맹을 본다.
조명이 밝다. 백설하는 위에서 내리쬐는 조명을 바라보았다. 겨울을 뚫고 비치는 햇빛처럼 상쾌하다.
‘엄마, 보고 있어?’
백설하는 미소 지었다.
‘나, 이렇게 큰 무대에 섰어.’
* * *
일본의 밤하늘로 소녀연맹의 노래를 담은 전파가 유유히 흘러내린다.
집집마다 소녀연맹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소녀연맹 ‘애플 크러쉬’ 일본판 앨범.
올해 총판매량 610,000장.
일본 레코드 협회 인증 ‘더블 플래티넘 앨범’.
올해 오리콘 TOP100 앨범 차트 4위.
역대 케이팝 걸그룹 중 최대 최고 성적.
소녀연맹, 일본제패.
* * *
[가후 세이코www(일본의 ㅋㅋㅋ) 귀여운wwwwwww]
세이코는 ‘클락’에 우후죽순 올라오는 영상을 보면서 좌절했다. 절망했다.
그녀가 소녀연맹과의 댄스 배틀에서 선보인 댄스, 아니 추태는 금세 SNS 곳곳으로 퍼졌다.
영상 속의 세이코는 절망적인 춤을 선보였다.
가슴으로 딱 붙인 팔, 고양이처럼 앞으로 구부린 손, 그리고 몸을 좌우로 박자에 맞춰 흔든다.
얼굴은 물론 어깨까지 붉어져 눈을 질끈 감고서, 그저 몸을 흔든다.
만약 세이코가 부끄러움이란 감정을 춤이란 언어로 쓴 것이라면 대성공이었다.
[아이돌로 데뷔하는 게 더 인기 있을 듯한 wwwwwwww]
[이건 30대의 귀여움이 아니다]
[레이와 최고의 가수가 아니라 레이와 최고의 아이돌인 www]
[소녀연맹과도 좋은 승부였다]
[AKH48에 들어가 줘. 총선 때 꼭 뽑을게. 벌써 앨범도 주문했어.]
[세이코 그녀는 신인가? 세이코 그녀는 신인가? 세이코 그녀는 신인가?]
[이게 가후? 내가 알던 가후는 대체?]
“세이코쨩 대단해! SNS를 점령하다시피 했어! 트잇터 실트(실시간 트렌드)도 전부 세이코쨩 이야기뿐이야! 올해 홍백가합전은 세이코쨩의 독무대였네!”
미사토가 흥분해서 그리 외쳤다.
세이코는 죽고 싶었다.
진짜 죽고 싶단 게 아니라, 그만큼 창피하단 뜻이었다.
“……이럴 때가 아니야.”
세이코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공연 티켓이 잘 들어있나 확인했다.
“미사토, 나 파쿠 이사한테 다녀올게.”
이제 소녀연맹은 일본에서 할 일을 전부 끝냈다. 내일이나 모레에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러면 기회를 잃게 된다.
성필은 소녀연맹에게 껌딱지처럼 붙어 있다. 그나마 오늘은 소녀연맹이 바쁠 테니, 성필에게 접근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세이코는 복도로 나섰다.
온갖 가수와 예능인들은 그녀를 향해 존경과 인사를 바쳤다. 세이코는 그 모든 것에 대강 반응해주면서 소녀연맹의 대기실을 향해 갔다.
소녀연맹의 대기실 문은 열려 있었다.
세이코는 문 쪽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파쿠 이사는 없어.’
소녀연맹은 스태프나 웨벡스 소속 탤런트들에게 둘러싸여 온갖 덕담을 듣는 중이었다.
세이코는 재빨리 문을 지나쳤다.
‘파쿠 이사는 어딨지?’
세이코는 복도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리고 저 멀리에 등을 돌린 성필을 발견했다.
세이코의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는 성필을 향해 달려갔다.
“파쿠 이사!”
세이코는 그를 불렀다. 그러자 그는 화들짝 놀라며 세이코를 돌아보았다.
“잠시마…… 안?”
성필의 눈가가 붉었다.
그는 세이코를 보자마자 손으로 눈가를 황급히 문지르며 웃어 보였다.
“네, 세이코 씨.”
“…….”
성필이 울었다.
세이코는 절로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니, 그게에…….”
분위기가 안 좋은 듯하다.
그렇지만 아예 말을 안 꺼낼 순 없다.
이왕이면 그의 기분이 좋을 때 신청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실패를 감안하고 데이트를 신청할 수밖에 없다.
세이코는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힌 티켓을 꺼냈다. 긴장해서 자기도 모르게 티켓을 꽉 쥐었던 모양이다.
“파, 파쿠 이사, 그으…….”
세이코가 두 눈을 딱 감고 말했다.
“공연 봐요 나랑!”
강압조였다.
세이코는 멍청한 자신을 탓했다.
성필이 기분 좋을 때 좋은 말로 권해도 모자랄 판이다. 그런데 그가 운 게 분명한 상황에서 강압조로 말해버렸다.
세이코는 그가 왜 울었을지 예상이 됐다.
‘내가 이겨서…….’
홍팀 20번 소녀연맹은 백팀 20번 세이코에게 패배했다.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무리 소녀연맹이 일본에서 잘 나간다지만 그거야 케이팝 그룹 한정이다.
세이코는 소녀연맹을 아득히 앞지르는 일본의 국민 가수이다. 케이팝 팬이라고 해봐야 한 줌뿐일 터인 시청자 투표에서 압도적으로 이길 수밖에 없다.
즉, 세이코는 성필이 운 원인이었다. 그런데 그 원인이 데이트를 신청하니.
‘될 리가 없지이…….’
거절당할 생각에 세이코는 벌써부터 눈물이 나올 듯했다. 세상에게 버림받은 기분이…….
“네.”
성필이 답했다.
세이코는 감았던 눈을 떴다.
성필이, 이전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래요, 얼마든지.”
“……에?”
세이코, 데이트 신청 성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