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6화
성필, 리카, 장하양, 그리고 토모에까지.
네 사람은 나란히 웨벡스 건물을 나왔다.
놀랍게도 토모에는 소녀연맹의 팬이었다. 성필의 뒤에 리카와 장하양이 서 있는 것을 보곤 거의 까무러칠 뻔했었다.
“진짜 소녀연맹이다…….”
토모에는 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소녀연맹 멤버들은 거리를 다니다 보면 크게 구분하여 세 종류의 사람들을 마주한다.
멀리서 신기한 듯 바라보거나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도촬임) 사람.
‘팬이에요’라면서 다가와 사인이나 사진을 요구하는 사람.
그리고.
“저 인민이에요!”
자신이 인민이라고 밝히는 사람.
그냥 ‘팬이에요’라면서 다가오면 ‘감사합니다’란 답을 돌려준다. 하지만 ‘인민’이라고 하면…….
“정말인가요!”
리카가 토모에와 손깍지를 끼고 팔짝팔짝 뛰었다. 이렇듯, 아이돌에겐 자신의 팬덤이 더욱 가깝고 친근하게 느껴진다.
성필은 그런 토모에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원래 아이돌을 좋아하나?’
미래의 토모에는 굳이 따지자면 팝 뮤지션이라고 할 수 있으니, 아이돌을 좋아하는 것도 딱히 이상하진 않다.
하지만 그녀가 자랑스레 등에 멘 기타를 보면 아이돌을 좋아한다는 게 영 와닿진 않는다.
‘흔히 아이돌 싫어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한국으로 따지자면, 성필은 세 종류의 사람들이 떠오른다.
록 좋아하는 사람.
힙합 좋아하는 사람.
제이팝 좋아하는 사람.
한국 음악 산업백서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한국인 중 92%가 케이팝을 소비한다고 한다. 그리고 제이팝을 소비하는 사람이 약 8%다.
기묘하게 들어맞는 수치다.
당연히 제이팝을 소비하는 8%가 전부 케이팝을 안 듣는 건 아니겠지만, 왠지 제이팝을 좋아하는 사람은 케이팝을 안 좋아할 거 같긴 하다.
아무튼 성필의 머릿속엔 ‘이 세 장르를 좋아하는 사람 = 케이팝 잘 안 들음’이란 공식이 있다.
물론 한국에 한정해서라지만…….
‘토모에 씨는 록을 하고, 또 제이팝 아티스트고.’
그런데 케이팝 아이돌의 팬이라니, 그것도 인민이라니. 왠지 모르게 이상…….
‘아냐, 이상한 게 아니라.’
성필은 엄청 불안했다.
당연하게도 전생의 토모에는 소녀연맹을 몰랐을 것이다. 소녀연맹이란 그룹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현재의 토모에는 인민이라고 한다. 소녀연맹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녀의 음악적 취향에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전생과 달라지는 거 아니야……?’
일본 Z세대의 아이콘으로 군림하던 토모에는 사라지고, 갑자기 런치패드를 사서 EDM을 하겠다고 하는 거 아닐까?
아니면 남몰래 댄스 수업을 듣고 ‘아타시(저), 아이돌이 됩니다!’라고 하거나…….
“최애는 누구인가요!”
리카가 민감한 질문을 꺼냈다.
토모에는 망설일 만도 하건만 즉답했다.
“하양이요! 아니, 하양 온니요!”
“감사합니다.”
장하양이 리카를 향해 승자의 미소를 지었다. 리카는 시원하게 패배를 인정했다.
“하양 언니는 예쁘니까요!”
“예쁘고, 가사가 너무 좋아요.”
“가사요?”
토모에는 목청을 가다듬더니 장하양의 ‘에피타프’를 부르기 시작했다.
소녀연맹의 첫 번째 일본어판 앨범에 일본어 버전으로 수록된 것이었다.
“내가 죽으면…….”
묘비에 당신의 이름을 적어주세요.
그 한 소절만으로도 성필은 심장이 찌르르 울렸다. 토모에의 음색은 장하양과 비슷했다.
일부러 장하양을 따라 하려고 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그래서 더 듣기에 좋았다.
“‘에피타프’도 ‘도미노’도, 그리고 이번 앨범의 ‘솔트(Salt)’도 다 좋았어요!”
‘솔트’는 ‘애플 크러쉬’ 일본판에 추가 수록된 장하양의 곡이다.
장하양이 먼저 한글로 가사를 쓰고, 자신의 지식을 동원하여 일본어로 개사하고, 리카의 힘을 빌려 더 나은 어감의 단어들로 수정한 곡이었다.
일본어라서 그런지, 성필은 ‘솔트’를 잘 안 들었다.
“솔트 솔트 더 필요해, 네 상처가 더 벌어지게, 네가 더 괴롭게 부어서, 상처를 뭉개서 핥을래.”
“음…….”
다시 생각하니 일본어라서 안 들은 건 아닌 듯했다. 경쾌한 멜로디에 어울리지 않는 가사다.
요즘 제이팝의 유행이라고 해야 할까, 기류 같은 것을 짚어보자면 ‘이해할 수 없이 짧게 끊어지는 가사’라고 한다.
장하양의 ‘솔트’가 그렇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상황 설명이 아예 없으니. 아니면 성필이 이해하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하양 온니의 가사를 들으면서 생각했어요. 아, 이 사람은 정말 나랑 인간으로서의 레벨? 경험? 깊이가 다르구나. 대단해요. 그 나이에 벌써 이런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뇨. 동경해버려요.”
“아하하, 고마워요.”
장하양의 답은 그걸로 끝이었다.
성필은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장하양은 굳이 ‘경험이 아니라 상상이에요’라고 하지 않은 것이다. 팬의 환상을 지켜주기 위함인 듯했다.
장하다 하양아.
“온니는 가사를 어떻게 쓰세요? 얼마나 걸리세요?”
“저는 쓰는 거 자체는 1시간이 안 걸려요.”
“와, 천재네요.”
“그런데 그 1시간까지 몇 개월이 필요해요.”
“네?”
“제 감정을 응축하는 과정이라고 하면…… 이해가 될까요? 가사가 나오기까지, 매 순간 제 감정을 조금씩 언어화해 가는 거예요. 그렇게 몇 개월이에요.”
장하양은 그리 말하곤 성필을 보면서 싱긋 웃었다. 성필도 미소 지어주었다.
솔직히 성필은 감동했다. 장하양이 정말 아티스트 같은 말을 하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가 언젠가 성필의 손아귀를 나가 홀로 꿋꿋하게 설지도 모른다.
“공부가 되네요. 뮤즈라거나, 있나요? 이걸 하면 가사가 떠오른다. 이 사람을 보면 가사가 떠오른다.”
“제 모든 예술적 성취는 박 이사님 덕분이죠.”
“그렇게 나 포장 안 해줘도 돼.”
“정말인걸요. 제 프로듀서시잖아요.”
“부러워요.”
토모에의 목소리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제 프로듀서라고 해야 할까, 미사토 본부장님은 완전 방임주의시거든요. 그냥 저한테 냅다 100곡을 작곡하라지 뭐예요. 곡을 만들어서 가면 피드백을 조금 해주는 정도구요. 저도 도움을 주는 주변인이 있으면 좋겠어요.”
토모에가 성필을 힐끗거렸다.
“아주 사소한 거라도요.”
“음, 힘드시겠어요.”
“…….”
“…….”
“혹시 이사님, 뭔가 조언이라던가 주실 수 없으실까요?”
“네?”
“프로듀서시니까, 프로듀서만의 시야란 게 있지 않을까요?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그런 걸 느껴보고 싶어서요. 제 작업 잠시라도 봐주시면…….”
성필이 난색을 표하자 토모에는 곧바로 다른 미끼를 던졌다.
“사실 이사님을 생각하면서 쓴 곡이 있어요.”
장하양과 리카가 깜짝 놀랐다.
“네? 저를 생각하면서요? 오늘 처음 뵀잖아요.”
“처음 아니에요. 그 왜, 옛날에 히무라 실장님이 이사님을 찾으러 다닌 적 있지 않아요?”
“아, 네. 그랬었죠.”
성필이 리카의 매니지먼트 권한 위임 연장 계약을 파투 내고 도망갔을 때였다.
토모에는 당시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성필을 찾는 히무라에게 토모에가 거짓말을 했다는 모양이다.
“그게 뭔가 엄청 드라마틱해서 바로 가사로 적어 옮겼어요. 궁금하지 않으세요?”
“궁금하네요.”
자신을 소재로 쓴 음악이 있다는데 궁금하지 않은 인간이 있겠는가.
“시간 있으시면 들으러 오실래요? 그러는 김에 저한테 조언도 해주시면 좋구요, 헤헤.”
“저는 음악에 문외한이나 다름없는데…….”
“그래도요!”
토모에는 ‘악마잖아요!’란 말은 뺐다. 그녀는 오컬트나 괴담을 좋아한다.
초능력? 당연히 있다!
귀신? 반드시 존재한다!
외계인? 없을 수가 없지!
그녀는 우연에도 커다란 의미를 둔다. 그런 예민함이 그녀를 창작자로 만드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러면.”
그때 장하양이 둘 사이에 끼어들 듯 입을 열었다.
“제가 도와드리는 건 어떨까요?”
“……온니가요?!”
토모에는 그 제안에 거의 넋이 나갔다.
만약 그녀가 인민이라는 게 사실이라면, 이 순간 그녀는 성덕(성공한 덕후, 간단하게는 덕질하는 연예인과 사진을 찍는 것부터 크게는 그 연예인과 함께 일하는 사이가 된 것)이 된다.
게다가 최애라는 장하양과 함께다!
“저야 너무 좋죠 아니 꼭 같이 해주셨으면 해요!”
“알겠어요. 베이스 기타 들고 갈게요.”
“아, 아아, 나한테도 이런 날이……. 두 분이 함께 오면 엄청난 영광……!”
“아니요.”
장하양이 토모에의 기대를 단칼에 잘랐다.
“이사님은 안 오세요. 바쁘셔서요.”
“응?”
바쁘다면 성필보다 장하양이 수백 배는 바쁠 텐데.
“아…….”
성필이 ‘아니야 하양아 나 하나도 안 바빠’라고 말하려던 순간, 장하양이 길가를 지나는 택시를 향해 크게 외쳤다.
“택시─!”
그 때문에 성필은 화들짝 놀라 하려던 말도 하지 못했다.
택시는 장하양의 사자후를 들었는지 깔끔하게 그 앞에 멈춰 섰다. 장하양은 토모에를 돌아보곤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살펴 가세요. 연락은 제가 회사 통해서 드릴게요.”
“네, 넵, 감사합니다 온니! 리카 온니도 만나서 반가웠어요! 투쟁! 해방! 소녀! 연맹! 승리!”
“승리.”
장하양은 떠나가는 토모에를 향해 계속 손을 흔들었다.
“하양아, 웬일이야?”
성필은 막연히 토모에와 소녀연맹이 친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설마 장하양이 자발적으로 토모에와 작업하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삼국지에서처럼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것일까.
그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
“그냥.”
장하양은 어깨를 으쓱했다.
“변덕이에요. 갑자기 하고 싶어졌어요.”
“그렇지, 그런 마음이 중요하지.”
“충격이에요! 눈앞에서 다른 사람이 최애란 말을 들을 줄 몰랐어요! 아타시(저)의 매력을 더 갈고닦아야겠어요! 이사님, 답해주세요! 저한테 부족한 매력이 뭔가요!”
“더 귀여워지도록.”
“에에, 여기서 더 귀여워지면 이사님도 더는 자제할 수 없을걸요!”
“뭘.”
“이사님한테도 소녀연맹 중에서 최애가 생겨버릴 거예요! 저는 매력을 억제하는 중이라구요!”
“그렇구나. 빨리 편의점 가자.”
“무시?!”
성필과 리카가 걸음을 옮겼는데도 장하양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둘이 이상하게 여겨 돌아보았다.
“하양아?”
장하양은 토모에가 탄 택시가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택시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이사님.”
“응?”
“이건 주제넘는 말이지만요, 꼭 묻고 싶은 게 있어요.”
“하양이가 나한테 주제넘을 게 뭐 있어.”
“세이코 선배님이랑 언제까지 관계를 이어갈 생각이세요?”
“……어?”
장하양의 고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토모에가 사라진 곳으로부터 성필의 눈까지.
그녀가 성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저는 이사님이 세이코 선배님이랑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나누는 게 싫어요.”
* * *
12월 31일.
유우토는 본가로 돌아왔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눈물을 줄줄 흘리는 아버지였다.
“우리 리카가 테레비에 나와…….”
유우토의 아버지인 켄타로는 텔레비전을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얼마 전, 소녀연맹이 홍백가합전에 나온단 소식을 듣고 충동구매한 고가의 75인치 텔레비전이다.
“여보도 참, 리카는 항상 테레비에 나왔잖아요.”
어머니인 에미가 마지막 연말 요리를 식탁 위에 올렸다. 그녀의 말에 켄타로가 발끈했다.
“그냥 방송이 아니잖아! 홍백이야 홍백!”
일본인들은 거의 모두가 한 가지 추억을 공유한다고 한다.
연말에 가족들과 둘러앉아 함께 텔레비전을 본다. 그때 텔레비전으로 보는 게 바로 홍백가합전이다.
유우토의 부모님들도 우파루파가 사회적인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단 말을 들었을 땐.
‘음, 그렇군.’
이랬었다.
하지만 소녀연맹이 홍백가합전에 나온다고 하니.
“우리 리카가 홍백에 나온다고오오오오!”
이렇게 변해버렸다.
유우토 또한 선망을 담아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유명 예능인 MC가 홍백가합전의 개막을 선언하는 중이었다.
“언젠가 우리 유우토도 저기 설 날이 오겠지?”
“어, 응? 그으, 글쎄요.”
“얘는 대답이 시원치 않네. 일이 잘 안 풀려?”
유우토는 쉽게 답을 내놓지 못했다.
에미가 그의 손을 잡았다.
“힘들면 언제든지 돌아와도 괜찮아. 아무도 뭐라고 할 사람 없어.”
어머니의 따스한 위로에 유우토는 희미한 미소를 품었다. 그리고 그녀를 안심시키려는 듯 마주 손을 잡았다.
“아냐, 그게에, 조금 부끄러운 얘기인데요.”
“무슨 일인데?”
“그, 어쩌면 내가, 회사 연습생 중에서 노래를 제일 잘 부르는 거 같아요.”
“어머, 진짜?”
“응.”
유우토는 자기 자랑에 서툴다.
남에게 칭찬받는 것도 힘들어하는 편이다.
그렇기에 한국에 있을 때 부모님과 통화할 때도 평가를 잘 받았느니, 내 실력이 좋아졌니, 그런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에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자랑스러워 우리 아들.”
켄타로는 여전히 텔레비전만 보고 있었다. 유우토의 말은 못 들은 척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는 곧 고개를 돌렸다.
거실 바로 옆 통유리창으로 작은 마당이 보인다. 리카가 한국으로 떠나기 전, 장장 18시간 동안 드러누워 질질 짰던 장소였다.
리카가 떠났을 때 켄타로는 창자가 끊기는 심정이었지만, 결국엔…….
‘홍백에까지 나오는구나.’
리카는 성공했다.
하지만 유우토라고 그러리란 법은 없다.
켄타로는 괜히 호들갑 떨고 싶지 않았다. 그가 현재에 떤 호들갑은, 후일 유우토에게 상처로 다가올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켄타로는 마음속으로 유우토를 응원했다.
“아빠는 기대되는 가수 있어요?”
유우토가 물었다.
“아니다, 아빠는 음악을 듣긴 해요?”
“당연히 듣지. 나는 보자…… 세이코.”
“아빠도 세이코 좋아해요?”
“그럼. 너희 아빠 세이코 팬이야. 어찌 보면, 우리의 결혼 생활은 세이코와 함께 했다고 봐야지.”
“세이코가 그렇게 늙었어요?”
보기엔 젊은데, 설마 그렇게까지 나이가 들었다니.
“아니 아니, 리카가 10살 때쯤이었나. 그때부터 들었던 거 같아.”
“엄청 오래 활동했네.”
그런데도 아직까지 정상에 서 있는 건가.
유우토는 세이코의 노래를 몇 번 들어보긴 했지만, 간식 같은 느낌이었다. 그의 취향은 하드록 쪽이었으니, 세이코를 그다지 좋아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런 유우토마저 음악을 듣게 했단 것 자체가 세이코의 능력을 증명했다.
그녀의 음악엔 경계가 없다.
교묘하게 취향의 벽을 파고들어 단 한 번이라도 듣게 만든다.
“올해는 홍이랑 백 중 어느 팀이 이길까요?”
“세이코가 있는 팀.”
켄타로가 즉답했다.
“보통 그렇더라고.”
* * *
세이코는 백(白)팀 20번이다.
대기실의 그녀는 한눈에 보아도 까탈스러워 보였다. 메이크업과 스타일링 스태프는 가후를 향해 입도 뻥끗하지 못하고 제 할 일만 했다.
“끄, 끝났…….”
“나가.”
스태프들은 그 한마디에 후다닥 대기실을 나갔다. 이제 남은 건 그녀를 응원하러 온 미사토밖에 없었다.
“세이코쨩, 오늘 기분 안 좋아?”
“아니, 긴장돼서 그래.”
“네가?”
홍백 출전만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새삼스럽게 긴장한다고?
세이코는 그럴 레벨이 아니다.
원한다면 오늘 생방송에 출연할 필요도 없었다. 어디 콘서트 무대를 빌려서 그곳에 방송국 스태프들을 죄다 불러 원격 중계할 수도 있었다.
원한다면 모든 게 가능한 위치.
그게 바로 세이코였고, 그건 곧 그녀의 업적과 경험을 뜻했다.
“필요한 거 있어? 뭐 가져다줄까?”
“아니.”
세이코는 휴대용 산소호흡기를 썼다.
스읍, 하아. 그리고 버리듯이 호흡기를 테이블 어딘가에 던졌다.
“미사토, 나 이 싸움이 끝나면, 고백할 거야.”
“불길한 소리하지 마.”
“파쿠 이사한테 말할 거야.”
“그런데 세이코쨩, 이미 차였잖아.”
세이코는 눈을 감았다.
“파쿠 이사가 말했어. 5년 동안 연애하지 않는다고.”
“그…… 렇지?”
“그 말은, 약혼은 가능하단 거야.”
“세이코오…….”
미사토는 울고 싶었다.
세이코는 지금 10대 소녀도 하지 않을 발언을 하고 있었다.
제발 밖에 나가서 아무 남자나 붙잡고 연애해보라고 외치고 싶었다.
넌 지금 눈이 가려진 거라고.
그냥 경험이 없어서 그 사랑이 커 보이는 거라고.
굳이 성필에게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고.
무엇보다 이미 차였잖아!
‘왜 세이코가 그 말을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거지?’
만약 미사토가 어떤 남자에게 고백했다고 치자.
그런데 그 남자가 ‘나 5년간 연애 안 함ㅎㅎ’라고 하면, 미사토는 집으로 달려가 인터넷에 ‘어떡하면 고통 없이 죽을 수 있나요?’란 질문 글을 올릴 것이다.
‘기다리겠단 뜻이 아니잖아!’
미사토는 정말 울고 싶었다.
애지중지하면서 키운 세이코가 이런 여자로 성장하다니…….
“난, 해.”
세이코가 테이블에 올려둔 공연 티켓을 바라보았다. 특별히 성필을 배려해서 구한 티켓이었다.
“한국 전통 무용 공연으로 데이트하고, 고백할 거야.”
“…….”
미사토는 이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세이코의 사고방식이 이해가 가서, 그래서 너무 창피했다.
성필은 한국인임. 한국 전통 문화를 좋아함. 그러니까 한국 무용 공연을 좋아할 거임.
그런 너무나도 단순한 사고방식을 지니고, 세이코는 데이트 공연으로 한국 전통 무용을 골랐다.
“바로 여기, 무대에서 승리하고, 사랑에서도 성공할 거야.”
세이코가 일어나 문으로 나섰다.
“미사토, 축복해줘.”
세이코, 백팀 20번.
그리고 홍팀 20번은 소녀연맹이다.
* * *
“네!”
사회자는 무대에 선 세이코와 소녀연맹을 소개하곤 깜짝 이벤트를 선언했다.
“각 팀의 자존심을 건 댄스 배틀입니다!”
“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가후의 얼빵한 비명이 일본 전국에 생중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