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4화
가후 세이코.
현재 뮤지션 인생의 절정기를 경신 중이다.
그녀의 신보인 ‘페이디드 러브’는 판매량 200만을 돌파했다.
앨범이 많이 팔린다는 일본도 디지털 음원이 강세를 보이는 게 현재이다. 그런 와중 200만이란 판매량은 경이적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후나비키 세이코는 진실로 일본의 가후였다.
헤이세이(일본의 연호 1989~2019)의 끝을 장식한 최고의 가수이자, 레이와(2019~)의 시작을 알린 최고의 가수.
그녀의 이름은 일본 대중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할 게 틀림없다.
그런 뮤지션답게, 세이코는 올해 홍백가합전에도 출장이 확정됐다.
“음.”
세이코는 가수관리본부 사무실의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벽에 붙은 ‘웨벡스 소속 홍백가합전 출장 뮤지션 목록’을 보았다.
그중엔 소녀연맹의 이름이 당당히 박혀 있었다.
세이코가 미소를 띠었다.
“오는가, 소녀연맹이.”
세이코는 팔짱을 낀 채 목록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입가엔 최종 보스와 같은 오만한 미소가 떠돌았다.
“마침내 홍백까지…….”
그 말은.
“미사토 미사토!”
세이코는 가장 상석에 앉은 미사토에게로 헐레벌떡 달려갔다. 직원들은 그녀와 부딪치기라도 할까 봐 진즉 복도 쪽에서 도망쳤다.
“소녀연맹이 오면 파쿠 이사도 오는 거지?”
세이코가 소녀연맹을 기다리는 건 새삼스럽게 그녀들에게 복수하겠단 마음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냥 성필이 와서 기대하는 것이었다.
“응, 박 이사님도 오셔. 아무렴, 홍백에 나가는 거잖아.”
미사토는 본부장이 된 이후 더 날카롭게 변했다. 예전보다 더 많은 이들을 관리해야 하니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세이코를 대할 때만큼은 옛날처럼 따스하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보였다.
“그럼 있잖아.”
세이코는 어린아이처럼 밝은 얼굴이었다.
미사토가 세이코의 앞에서만 옛날처럼 돌아가는 건, 세이코의 이러한 천진난만함이 한몫했다.
“소녀연맹이 며칠 동안 웨벡스 연습실 쓰는 거지? 응? 올해 왔을 때처럼.”
“아니. 소녀연맹은 숙소 근처에 연습실 잡고 거기 쓴다던데?”
“…….”
세이코는 사무실을 탈출하여 히무라가 맡은 아이돌 관리 2실로 쳐들어갔다. 그리고 계속 그를 촉새처럼 쪼아댔다.
“뭐 하러 돈을 버리려는 거야! 안 그래도 웨벡스엔 남는 방도 많잖아! 히무라 너 남의 돈이라고 너무 막 쓰는 거 아니야?!”
참고로, 남의 돈 아니다.
히무라는 웨벡스 회장의 아들이니까.
“따로 연습실을 잡긴 뭘 잡아! 그런 데가 보안이 될 거 같아? 스토커라도 따라붙으면 어쩌려고 그래! 히무라 네가 경호원 열 명, 백 명 고용해줄 거야? 아니잖아!”
세이코의 이야기를 다 들은 히무라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타국에서 온 후배 그룹을 걱정하는 세이코의 마음에 감동해서, 는 아니었다.
‘왜 나한테 이러는 거야…….’
본인들한테 직접 말할 것이지…….
히무라는 감히 가후에게 입도 뻥끗하지 못하고 마음의 눈물만 흘렸다.
헤이세이의 끝을 장식한 최고의 가수이자 레이와의 시작을 알린 최고의 가수. 설령 회장의 아들이라도 그녀에겐 모질 수 없었다.
“이러면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 없잖아!”
어쩌라고 대체…….
* * *
왠지는 모르겠지만 히무라는 소녀연맹이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당초 계획을 수정해달라고 요청했다.
‘아무래도 보안이 걱정됩니다. 지금까진 웨벡스 내부에서만 연습하셨지 않습니까. 갑자기 외부 연습실을 잡는 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성필은 히무라의 제안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외부 연습실은 숙소와 가깝긴 하지만, 건물에 다른 사람들도 많다.
가로 엔터와 웨벡스의 매니저들이 소녀연맹과 함께 있다지만, 그것도 웨벡스 내부만큼 안전하진 않으리라.
히무라가 걱정하는 것도 당연했다.
‘일본에 와서 계획을 바꾸자는 게 당황스럽긴 하지만, 맞는 말이니까.’
성필은 이 소식을 멤버들에게 알렸다.
“에엑!”
가장 먼저 실망을 표현한 리카였다. 그녀는 성필의 손목을 흔들면서 칭얼거렸다.
“이사님 제 요청을 잊으셨나요! 숙소랑 가까운 곳이어야 한다고 했잖아요!”
“알아, 기억해.”
리카는 이번 홍백가합전 출장을 굉장히 기대하고 있다.
숙소에서 웨벡스까지 왔다 갔다 하는 시간마저 아까워해서, 숙소 근처에 연습실을 잡아달라고 할 정도였다.
밥만 먹고 연습만 하겠단 의지가 돋보였다.
“그런데 히무라 실장님 제안이었어.”
성필은 히무라가 했던 말을 앵무새처럼 되풀이했다.
“그런가요…….”
리카는 실망하긴 했지만 히무라의 논리에 설득당했다.
그때 장하양이 손을 들며 의문을 제기했다.
“이렇게 갑자기요? 그런 사항이라면 저희가 도착하기 전에 연락이 왔어야 하지 않나요?”
“그렇지. 보안 문제는 매니지먼트를 계획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하는 건데 말야.”
“뭐예요.”
신아름이 툴툴댔다.
“우리 잡은 물고기라고 계획 검토하는 거 뒤로 미뤄두는 거 아녜요? 그래서 전달이 늦은 거고? 쫌 기분 나쁜데.”
“듣고 보니까 그러네.”
조아라가 맞장구쳤다.
“우리 올해가 웨벡스랑 재계약 아냐? 이렇게 허술하면 다시 검토해야지. 아저씨 다른 데로 알아보는 거 어때요?”
“……너희들 웨벡스 싫어해?”
죽이 잘 맞았던 신아름과 조아라는 짜기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앗! 이사님의 눈빛이 날카로워졌어! 아타시타치(우리들)의 마음을 꿰뚫어 볼 때의 눈빛이야!”
“설마 너희들…… 아직도 세이코 씨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지?”
“아하하, 아니에요.”
“그치?”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니고 안 마주치길 바라요.”
“싫어하는 거 맞잖아?!”
성필은 호소하듯 백설하를 보았다.
그러자 백설하는 애매하게 미소 지었다.
마치 ‘그런 일이 있었는데 어쩔 수 없죠’라고 하는 듯했다. 백설하마저 멤버들과 같은 마음이니, 성필을 무어라 할 수도 없었다.
‘벌써 2년이나 지났는데.’
그 일이 아직도 멤버들의 마음속에 남아있을 줄이야. 비록 장난이라지만, 웨벡스와의 재계약을 재고해달란 말까지 할 줄은…….
“그래서 우리 다음 매니지먼트사는 어디로 해요?”
농담이 아니었다?
진짜 세이코가 있단 이유 하나만으로?!
1억 엔을 주었던 히무라가 통곡하는 게 머릿속으로 선명하게 그려진다.
아무튼 소녀연맹은 숙소에서 바로 웨벡스로 향했다. 히무라가 입구에서부터 반겨주었다.
“공항으로 마중 못 가드려서 죄송합니다.”
“이렇게 건물 밖에서 마중해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걸요.”
“갑작스러운 예정 변경 죄송합니다. 사과의 의미라기엔 뭐하지만, 홍백가합전까지 최선을 다해 서포트…….”
갑자기 히무라의 표정이 굳었다. 그의 시선은 성필의 어깨 너머로 가 있었다.
성필도 뒤를 보았다.
장하양이 리카에게 10,000엔짜리 지폐를 건네고 있었다.
“……너희 뭐 해?”
“하양 언니랑 내기했어요!”
리카는 10,000엔을 손에 들고 쾌재를 불렀다.
“현관에 세이코 선배님이 ‘있다, 없다’로요! 저(아타시)의 승리예요! 승리의 대가는 유키치(후쿠자와 유키치, 일본의 10,000엔권에 그려진 인물)예요!”
10,000엔.
대강 한국 돈으로 100,000원이다.
그 옛날 장하양은 베갯속에 용돈을 차곡차곡 모아두었다고 하던가. 그랬던 아이가 시답잖은 내기에 스스럼없이 10,000엔을 걸게 되다니.
성필은 그녀가 금전 감각이 이상해진 게 아닌가 걱정…….
“제길(쿳소)……!”
장하양이 피눈물을 흘릴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금전 감각이 이상해진 건 아닌 듯했다.
그녀는 분명 세이코가 웨벡스 현관에 있으리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론 없었지만 말이다.
“하양아, 너 유독 일본어 쓸 땐 입이 걸걸한 거 같아.”
“하양 언니는 일본어 뉘앙스를 잘 몰라요! 옛날의 아라쨩 같은 상태예요!”
리카에게 일본어를 잘못 배워 양아치 말투를 썼던 조아라. 그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일본어 어투를 완전 수정했다.
하지만 장하양에겐 아직 리카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래 뭐, 그렇구나.”
성필은 그녀들에게서 신경을 껐다.
“들어가실까요?”
“예, 예…….”
히무라는 왠지 뻣뻣해져선 성필과 소녀연맹, 그리고 가로 엔터의 스태프들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때였다.
현관문에서부터 기다렸단 듯 세이코가 나왔다.
“파쿠 이사, 우연이네요. 거기 소녀연맹도요.”
“…….”
리카가 장하양에게 10,000엔을 돌려주었다. 장하양이 방긋 웃었다.
세이코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성필 쪽으로 다가갔.
다가가다가 장하양을 보곤 그냥 성필을 지나쳐갔다.
“일이 있어요.”
그녀는 쭉 앞으로 나아갔다.
“지, 진짜예요! 진짜 일이 있다구요!”
그렇게 세이코는 되지도 않는 변명과 함께 사라졌다.
“……가실까요?”
히무라는 자기가 다 부끄럽단 듯 재빨리 가로 엔터 사람들을 건물 안쪽으로 안내했다.
‘이건 뭐.’
히무라는 앞장서 나아가면서 한숨을 쉬었다.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이번에 세이코는 대담한 계획을 가지고 있다.
연말은 커플이 가장 많이 탄생하는 시기라고 한다. 그때를 노려 성필에게 데이트를 신청하고, 마침내 약혼에 골인한다는 목표다.
뭔가 많이 생략됐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한다.
세이코의 주머니 안에는 무슨 공연 티켓이 들어있을 텐데, 지금쯤 좌절한 세이코의 손에 구겨졌을 것이다.
‘소녀연맹분들이 곁에 있는 한 불가능할 거 같은데.’
뭐, 힘내라 세이코.
* * *
‘미국 시장은 어떻게 공략하는 거지?’
웨벡스 연습실 한구석에 자리 잡은 성필은 고민에 잠겼다.
소녀연맹이 정상에 오르기 위해 해외시장, 특히 미국 시장을 뚫어야 한단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을 전혀 떠올릴 수 없다.
‘가로 엔터가 미국에 줄을 가진 것도 아니고.’
뚫어볼 방법이란 게 존재할까?
능동적으로 미국 시장을 공략한 사례는 SMS 엔터가 유일하다시피 하다. 실패했기에 따라할 순 없다.
WTP는 기적이 겹쳐 발생한 것이니, 그들을 벤치마킹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다른 그룹의 사례를 보아야 하는데…….
‘전부 다 미국에서 불러줘서 갔던 거지.’
미국에서 인기 있는 토크쇼나 음악 프로그램, 주요 행사 출연.
대부분은 미국에서 먼저 불렀기에 간 것이다. 물론 성필이 그 속사정을 알진 못한다.
기획사의 체계적인 로비나 접촉이 있었을 수도 있다. 다만 성필이 모를 뿐이다.
‘우리도 기다리는 수밖엔 없나.’
아니면 영어로 된 곡이나 앨범을 발표한다거나…….
그 생각이 떠오르자 성필은 고개를 저었다.
‘미국과 세계시장을 겨냥하여 완벽한 글로벌성.’
이건 스웨디시팝의 주요 전략이었다. 그건 매우 성공적이어서, 스웨덴에선 주기적으로 영미권에서 인기를 얻는 가수들이 배출된다.
‘하지만 케이팝 아이돌이 각 잡고 시도할 만한 건 아니야.’
해외의 케이팝 팬이 케이팝을 좋아하는 건, 굳이 말하자면 ‘다르기에’ 좋아하는 것이다.
본국의 주류 음악이 마음에 들지 않기에 그 대안으로 케이팝을 찾는 것. 그렇기에 아예 영미권을 노리고 만든다면 케이팝의 매력이 사라지게 된다.
‘적어도 지금 할 만한 건 아니야.’
만약 타국 시장을 능동적으로 타겟팅하고 성공시킨 프로듀서가 있다면, 그는 천재라고 불려야 마땅하리라.
성필의 고민은 이번에도 도돌이표가 찍힌 듯 처음으로 돌아왔다.
방법은 하나뿐이다. 추상적이면서도 방도가 하나뿐이라 현실적인 것.
‘케이팝 시장에서의 위상 강화.’
다른 나라의 시장을 공략하는 게 아니라, 이미 글로벌화된 케이팝 시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한다.
‘케이팝 시장에서의 압도적인 우위’란 것도 꿈속의 꿈이지만, 성필은 이번에 가능성을 보았다.
조아라의 오토마타가 가져다준 성공이었다.
‘빌보드 200 차트 14위란 건, 미국 케이팝 시장에서 소녀연맹이 차지하는 비율이 상당하단 거지.’
적어도 소녀연맹의 위상을 따라올 걸그룹은 한두 개뿐일 것이다.
소녀연맹이 이만큼 올라온 것도 기적이다.
그리고 성필이 생각하기에 이 기적의 이유는 하나뿐이다.
‘아티스트십.’
미국의 아이돌 팬들은 아이돌이 인공적인 존재란 데 일정 수준의 거부감을 가진다고 한다.
아이돌을 좋아하고 싶지만, 연습생이 받는 강압적인 처사나 아이돌의 비자율성이 덕질하는 데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소녀연맹은 그런 걸림돌이 거의 사라졌다. ‘우리들의 프로듀싱’이 그녀들에게 자율성이란 이름을, 아티스트란 호칭을 달아주었으니까.
미국 팬들은 강압적인 환경에서 태어난 아이돌을 소비하는 데 거부감이 있지만, 소녀연맹을 덕질하는 덴 그런 거부감이 없다.
어찌 보면 그들의 죄책감을 없애준다고 보아도 좋다.
‘친환경 전략…… 이라고 하면 좀 그러려나.’
좁은 우리에 갇혀 폐사 직전인 닭을 먹기보다, 그래도 넓은 목장에서 자유롭게 자란 닭을 먹는 게 심리적 죄책감을 줄여준다고 하면…….
‘애들한텐 실례겠지.’
“이사님.”
성필은 바로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장하양의 얼굴이 아주 가까이 있었다.
장하양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깊이 하세요?”
“너희들이 어떡하면 최고의 아이돌이 될 수 있을까.”
“항상 그런 생각을 하세요?”
“아니, 평소엔 그냥 너희들이 무대에서 빛나는 상상을 많이 하는 편이지.”
“제가 눈앞에 있잖아요. 상상만 하실 필요 없어요. 직접 볼 수 있고 만질 수도 있어요.”
“그래, 되게 생생하네. 너무 가까워서.”
장하양이 성필에게로 기울였던 상체를 뒤로 당겼다. 그녀는 물병을 흔들었다.
“물 받아올게요.”
“그래.”
장하양이 나가고, 연습실엔 이젠 성필과 리카밖에 나가지 않았다.
리카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연습 중이다. 거울을 보는 눈에선 투지가 느껴진다.
밤이 되고 다른 멤버들은 모두 숙소로 돌아갔다. 하지만 리카와 장하양은 남아서 더 연습하기로 했다.
“리카.”
“하이(네).”
평소 같았으면 성필이 부르자마자 쪼르르 달려왔을 리카. 그녀는 거울을 보면서 ‘애플 크러쉬’의 자세를 점검하기만 했다.
소녀연맹이 홍백가합전에서 선보이는 곡은 ‘애플 크러쉬’와 ‘우파루파’다.
“안 힘들어?”
“힘들어요!”
“조금 쉬지.”
“조금이라도 더 연습해야 해요! 홍백에 나가잖아요! 세상에 다시 없을 최고의 무대로 만들 거예요!”
“그렇게 좋아?”
“‘그렇게 좋아’라구요?!”
리카가 성필에게로 쏜살같이 달려왔다. 그리고 날다람쥐처럼 점프하여 안기려는 것을 성필이 재빠르게 굴러서 피했다.
리카는 성필이 있던 허공만 안았다. 성필이 가만히 있었다면, 리카에게 몰려 그녀의 사지에 갇혔을 것이다.
리카는 짚었던 벽에서 손을 떼고 성필을 보았다.
“좋은 정도가 아니에요! 아드레날린이 미친 듯이 분비돼서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잘 거 같아요!”
그러곤 리카는 홍백가합전이 얼마나 대단한 프로그램인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벌써 몇 번이나 이런 일이 있었다.
그녀는 일본인으로서 자신이 느꼈던 홍백가합전의 위상을 회사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열정적으로 설명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게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성필이 쓴웃음을 지었기 때문이다.
리카는 곧바로 입을 다물곤 머쓱하니 말했다.
“고멘나사이(죄송합니다)……. 너무 많이 말해서 지겹죠?”
리카가 트레이닝복 옷깃 안에 턱을 파묻었다. 그리고 성필의 기색을 살피려는 듯 눈을 치켜올렸다.
“아냐. 리카.”
그에 성필이 다정한 어투로 말했다.
“네가 굳이 그렇게 말 안 해도, 난 네가 충분히 자랑스러워.”
“……자랑스럽나요?”
“그럼. 나도 홍백가합전이 얼마나 대단한 프로그램인지 알아.”
성필은 전생에 지금보다 훨씬 거대화한 석세스 엔터의 매니지먼트 총괄이었다.
석세스 엔터의 아티스트들은 일본에서도 많이 활동했었고, 자연스레 일본 시장에도 나름 빠삭했다. 그러니 홍백가합전의 위상을 모르려야 모를 수 없다.
“대단한 프로그램인 만큼 네가 평소보다 무리하는 거 같아서.”
오늘만 보아도 그러하다.
노력 천재 장하양이야 그렇다 쳐도, 리카는 모든 휴일과 휴식 시간을 반납하고 연습하겠다고 선언했다.
“너 무리하다가 감기 걸렸을 때 있잖아.”
“이사님이 숙소에 아타시(저)를 간병하러 오셨을 때 말인가요!”
“응, 네가 성인영화 보다가 걸렸을 때.”
“그건 이상한 영화가 아니라니까요!”
“그때가 생각나서 자꾸 걱정돼. 또 네가 아프거나 할까 봐.”
그래서 성필은 매우 들떴음에도 리카 앞에선 들뜬 티를 내지 못했다.
성필이 기대한다는 티를 팍 내면 리카가 지금보다 훨씬 무리할까 봐 말이다.
“나는 리카가 적당히 쉬면서 해줬으면 좋겠어.”
“……뭔가요!”
리카는 언제 쭈그러들었냐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얼굴에서 기쁜 빛이 만연했다.
“그렇게 걱정 안 해도 괜찮다구요! 마아(뭐어), 어쩔 수 없나요! 외로움쟁이 이사님은 제가 없으면 못 사니까요! 하루라도 저를 안 보면 안 되니까요!”
“그 정도는 아닌데.”
“에에, 부끄럼 타시는 건가요?”
리카가 은근한 투로 성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공항에서, 저한테, 뭐라고, 하셨죠?”
“…….”
그 말을 듣자 성필은 정말 부끄러워졌다.
리카의 일본 솔로 활동이 결정되고 그녀를 두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을 때.
성필은 로맨스 영화의 주인공처럼 리카에게 달려가 온갖 부끄러운 말을 퍼부었었다.
“기억 안 나시는 거 같네요! 제가 다시 떠올리게 해드릴게요!”
“아냐 안 해도 괜찮……!”
제가 소중하세요?
“소중해…….”
고작 몇 주도 못 떨어질 정도로요?
“어…….”
그렇게 저와 함께 있고 싶으신 거예요?
“응…….”
“그만해애애애애애!”
성필은 리카의 형편없는 성대모사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정말 혀를 깨물고 잠시 기절하고 싶은 창피함이었다.
성필이 바닥을 이리저리 굴러다녀도 리카는 성대모사를 멈추지 않았다.
“내 옆에 있어줘…… 리카…… 키미가 스키다(네가 좋아)…….”
“제발, 제발 그만해애애…….”
그때 성필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한 말을 제정신인 상태에서 듣게 하다니. 고문도 이런 고문이 없다.
“뭔가요! 설마 그때 하신 말씀은 전부 거짓말이었나요!”
“진심이야, 진심이긴 한데에…….”
“그럼 부끄러워하시면 안 되죠! 이사님의 진심이 뭐가 되나요!”
성필은 몇 번이고 마른세수를 한 뒤 리카를 보았다. 그런데 리카도 얼굴이 붉었다.
“정정당당히 자신과 마주하세요!”
리카는 성필을 향해 당당히 가슴을 폈다. 하지만 곧 그녀 특유의 과장된 기색은 사라지고, 소탈한 웃음만이 남았다.
“이사님, 저는 꿈속에 있어요. 과거의 제가 봤다면 ‘꿈이지?’라고 말할 만한 꿈이에요. 그러니까, 그때의 저한테 부끄럽고 싶진 않은 거예요. 그리고.”
리카는 다시 거울 앞에 섰다.
“이사님의 앞에서도 부끄럽고 싶지 않아요. 영원히요.”
“영원히?”
“앞으로도 이사님은 많은 아이돌을 프로듀싱할 거예요. 저는 그중에서 저를, 소녀연맹을 뛰어넘는 아이돌이 없길 바라요.”
“…….”
“이기적인가요?”
“아니야.”
성필은 부정했다.
“너무 멋져서 동경해버릴 거 같아. 리카처럼 되고 싶어…….”
“최고의 칭찬이네요!”
리카는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사실 제가 연습에 몰두하는 건, 조금 분해서예요. 하양 언니한테…….”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3’의 프로듀서 자리를 빼앗겼다는 게.
“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