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한는 프로듀서-563화 (563/760)

563화

한구인은 앞자리의 남자를 주의 깊게 보았다.

초로의 남자였다. 나이가 63세라고 하니 초로(初老)란 수식어를 붙이는 게 옳은지는 모르겠다.

기대 수명이 높아진 세상이니 60대를 초로라 부르는 것도 이상하진 않겠지.

그것을 증명하듯 63세의 노인, 김덕팔은 허리를 꽂꽂히 펴곤 빛나는 눈으로 한구인을 바라보았다.

“반갑습니다 덕팔 님.”

“아닙니다. 이쪽이야말로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만남 장소는 한구인이 그를 배려하여 그의 집 근처 카페로 정했다.

아직 점심에 이르지 않은 시각. 카페도 막 영업을 개시한 상태라 분위기가 한적했다.

“먼저…….”

한구인은 그의 이력서를 훑는 척했다. 그의 눈동자는 바쁘게 김덕팔과 이력서를 오갔다.

‘커리어야 흠잡을 부분이 없군.’

말단 사원에서 임원까지 올랐다면 그건 이미 직장인의 신화이다.

대인관계 능력이든 업무력이든 보통 사람을 아득히 넘어서 있다고 봐야겠지.

‘중요한 건 이분의 마음가짐이야.’

임원직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예상컨대 회사가 사직을 권고한 건 아닐까 싶다.

아무리 임원이라도 영원토록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안 그래도 예민한 감각이 중요한 엔터테인먼트 분야 기업이니, 늙은 김덕팔은 계속 안고 있기 어려운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분은 손자들 재롱을 보아야 할 시기에, 어째서 다시 취직하려고 하는가?’

그것도 중소기업 가로 엔터에?

아니지, 그가 가로 엔터를 바란 게 아니다.

헤드헌팅 회사로부터 소개받은 것이다.

그는 어째서 재취직을 희망하는 걸까.

‘돈이 필요한가?’

돈이 필요하단 이유로, 본인의 화려한 젊은 시절을 팔고 다니며 직업을 얻을 셈일까.

그걸 알아내기 위해 한구인은 이 자리에 있다.

“아.”

그때 김덕팔이 씩 웃으면서 오른손으로 자신의 왼손을 더듬었다. 그곳엔 90년대에 생산됐던 구식 롤렉스 모델이 있었다.

“많이 낡았지요?”

그가 시계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었다. 수전증이 있는 듯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부장이 돼서 샀던 겁니다. 아내랑 부부 동반 모임을 여럿 갔었는데, 다른 남편들 손엔 멋들어진 시계가 있는 걸 부러워했어요. 자기 차림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남편 차림이 떨어지는 게 부끄럽다니. 참…… 그래서 산 겁니다.”

한구인은 당황했다.

나름 조심스럽게 그를 관찰하고 있다 여겼다. 그런데 김덕팔은 한구인의 시선을 알아챈 것이다.

“제가…… 사치스럽진 않습니다. 자식들한테 쓸 돈도 모자란데, 제 손목에 채울 시계들을 척척 살 순 없는 요량이지요. 이건 그래서 특별합니다.”

“저도 있습니다.”

한구인이 왼손목을 덮은 재킷 소매를 들었다.

10년대 초반에 생산됐던 롤렉스가 있었다.

김덕팔이 미소 짓자 한구인도 미소 지었다.

“일단 실례되는 질문일 수 있단 건 알지만, 꼭 여쭤보아야 할 게 있습니다.”

“무엇이든 물어보셔도 됩니다. 제가 아쉬운 처지인걸요.”

“컴퓨터를 쓰실 줄 아십니까?”

“예. 그으러언데, 요즘 젊은 애들처럼 확확 번쩍이는 피피티이는 못 만듭니다. 문서 서식도…… 시킬 때야 예쁘게 만들라고 했지만, 저는 그렇게 못 합니다. 정말 쓸 줄 아는 정도입니다, 하하.”

김덕팔이 부끄러운 듯 웃었다.

“문제가 될까요?”

“업무에 따라 다를 겁니다.”

이후로도 한구인은 집요하게 김덕팔의 커리어와 능력을 탐색했다.

“아, 그건 제가 할 말이 많습니다. 그때, 그러니까 90년대엔 소프트웨어란 걸 모르는 사람들도 차암 많았는데…….”

그 이야기를 듣는 한구인은 줄곧 미소를 띠었다. 하지만 속은 아쉬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분이 사업의 최전선에서 활동했던 건 90년대와 00년대 초반.’

너무 옛날이다.

이후 그의 행보는 관리자에 가까웠다. 주도적으로 일선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부하들의 설명을 듣고 허가를 내리는 사람이었단 뜻이다.

‘우리가 바라는 인간상은 딱…….’

한구인은 젊은 시절을 회고하는 김덕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의 황금기는 40대에 몰려 있었다.

‘그래, 이분이 전성기였던 30대 후반이나 40대의 직장인.’

가로 엔터가 바라는 인재는 숙련도와 안목, 추진력, 감각을 갖춘 사람이었다. 직장인의 그러한 능력은 40대에 이를 즈음 물이 오른다고 한다.

중소기업이자 스타트업이나 마찬가지인 가로 엔터의 정신을, 눈앞의 김덕팔이 소화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애초에 이 업계에 대한 지식이 있는가.

‘모르더라도 이분이 수십 년의 세월 간 쌓아둔 각국의 인적 네트워크와 경험은 돈 주고도 못 살 거긴 하다.’

그런데 그 경험을 아이돌과 접목시킬 수 있을까? 직접 시켜보기 전까진 알 수 없을 일이다.

나름대로 공부했다고 하긴 하지만…….

“다음으로는, 이 업계에 대한 이해도를 묻고 싶습니다. 아이돌에 관해 어느 정도로 아십니까?”

“아이돌이요. 일단 저는…….”

한구인은 그가 아이튜브로 아이돌 관련 영상 몇 개 정도 보았으리라 생각했다.

아이튜브란 걸 알지도 확실치 않지만.

“매년 산업백서를 모두 읽습니다.”

“……산업백서, 말입니까?”

한국 콘텐츠 진흥원에선 매년 산업백서란 것을 발간한다.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무료로 게시하는 것이다.

그해 업계에 관한 대략적인 정보를 수록해둔 이른바 정보집이다.

“콘텐츠 산업백서, 방송영상 산업백서, 애니메이션 산업백서, 캐릭터 산업백서, 만화 산업백서, 음악 산업백서, 게임백서, 모두 매년 빠짐없이 읽고 있지요.”

“잠시만요.”

한구인은 그가 거짓말한다고 생각했다.

산업백서는 분야마다 수백 페이지에 달한다. 한구인마저 음악 산업백서 중 중요한 통계자료를 훑어보는 선에서 그치곤 한다.

그런데 이 사람은, 김덕팔은.

“다 읽는단 말입니까? 그게…….”

“아.”

김덕팔은 한구인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차렸다.

“물론 피상적인 것만 다루지요. 그것만 읽어놓고 ‘안다’고 말하는 건 오만하겠습니다.”

“…….”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제가 가로 엔터에 들어오고 싶은 건, 당연히 아이돌에 흥미가 있어서입니다. 십수 년 동안 산업백서를 빠짐없이 읽고 있습니다만, 한국 음악 시장의 성장은 정말 경악할 정도더군요.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싶은 수준이라서…….”

김덕팔이 수줍게 웃었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그 일선을 보고 싶었습니다. 아, 단순한 흥미가 아닙니다. 제가 업계의 일부로서 대한민국 음악 산업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면 무엇보다 좋겠지요.”

“……그럼.”

한구인은 시험하듯이 물었다.

“아이돌에게 가장 중요한 시장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아, 그거야 두말할 나위 없이 일본이지요. 아이돌이 일본 음악 시장의 파이를 10% 아래로 점유한다지요. 그것만으로도 한국 음악 산업 50%를 차지할 때마저 있습니다. 정말 거대한 시장입니다. 다행히 일본은 한국과 문화적 유사성이 가장 높은 나라 아닙니까.”

놀랍게도 한국과 문화적 유사성이 가장 높은 나라는 언어가 같은 북한이 아니다.

일본이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일본이 유독 한국 문화에 관대한 건 말이다.

“그런 나라가 바로 옆에 있단 게 행운이지요. 게다가, 소녀연맹은 특히 일본에서 강세이니 아주 잘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미래가 아주 밝아요.”

“……그럼.”

한구인은 이번에 자그마한 기대를 담아 물었다.

“이후 소녀연맹은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김덕팔이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그걸 행동으로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가로 엔터에서 말입니다.”

한구인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대화를 이끌어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군.’

보통 사람이었으면 자신의 청사진을 자랑스럽게 떠벌렸을 텐데. 김덕팔은 자기 어필의 기회를 날려가면서까지 한구인의 흥미를 자극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전략은 성공했다.

한구인은 이 노인이 어떤 인물인지 궁금해졌다.

“금이군요.”

한구인이 말했다.

“말은 은이고 침묵은 금. 이 말을 이렇게 가까이서 느껴보긴 오랜만입니다.”

“그 말 저도 참 좋아합니다. Speech is silver, but silence is golden.”

“발음이 좋으시군요. 따로 공부하신 겁니까?”

“MBA를 미국에서 밟았습니다.”

“예? 저도 그렇습니다!”

“정말입니까? 혹시이…….”

둘은 동시에 대학의 이름을 말했다. 그러곤 서로 함박웃음을 지었다.

“선배님!”

“후배님!

가로 엔터, 학벌 카르텔 형성!

* * *

“가요대제전 다음 날이 콘서트라니, 실화임미까.”

진저는 텔레비전 위에 붙은 스케줄표를 보면서 자꾸만 한숨을 토했다.

케이어스의 숙소는 연말 청소로 한창이었다. 멤버들이 모두 합심하여 1년 동안 더럽혔던 숙소를 말끔하게 바꾸었다.

“기대 안 돼?”

김민주는 대걸레로 거실 바닥을 여기저기 닦으면서 대꾸했다.

“뭐가 말임미까?”

“KS 엔터 합동 콘서트.”

KS 엔터의 모든 소속 아티스트들은 매년 특별한 이벤트를 치러야 한다. 바로 합동 콘서트다.

모든 선후배가 한자리에 모여 콘서트를 펼친다는, KS 엔터의 팬으로선 꿈과 같은 이벤트가 아닐 수 없다.

“순서 어떻게 될지.”

합동 콘서트의 순서는 최대한 우열을 배제하려고 노력한다.

인기가 있어도 초반에 배치하고, 인기가 없어도 후반에 나올 수 있다. 아예 지그재그로 순서를 섞는 게 기본 방침이기도 하다.

괜히 같은 회사 가족들끼리 얼굴 붉힐 일 안 만들겠단 자애로운 의도가 엿보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초와 최후는 언제나 뜻깊은 것이다.

“우리를 개막이나 폐막 때 세워주지 않을까?”

“선배님들이 버티고 계신데 잘도 세워주겠슴미다.”

“야, 강동현 프로듀서님이 했던 말 못 들었어? 우리가 현시대 KS 엔터의 상징이라잖아!”

“민주야.”

어느샌가 다가온 에리카가 김민주의 정수리를 톡 손날로 쳤다.

“정호환 이사님이 항상 말씀하시잖아. KS 엔터의 모두는 한솥밥 먹는 식구니까 급도 뭣도 없다고. 누가 제일이라서 어디에 세우니, 그런 말 자체가 회사의 결속력을 저해하는 일이야.”

“누가 다 우리 발아래래? 그냥 좀 명예를 챙길 수 없겠냐는 거지. 넌 그 진지한 것 좀 어떻게 해봐.”

“생각은 말이 되고, 말은 습관이 돼. 난 그냥 우리 민주가 더 좋은 사람이 됐으면 해서 한 말이야. 우리 민주…….”

“아 다가오지 마!”

김민주는 포옹하려는 에리카에게로 손을 뻗어 제지시켰다.

에리카는 흰 앞치마 차림이었는데, 그곳에 기름때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녀의 주방 청소가 얼마나 전투적이었는지를 증명하는 듯했다.

“그런 꼴로 누굴 안으려고.”

“그럼 벗으면?”

에리카가 요염한 동작으로 앞치마의 끈을 풀었다. 앞치마 안엔 아까 세탁실 청소로 걸레짝이 되어버린 흰 티셔츠가 들어있었다.

“물비린내 돌았네. 옷이나 갈아입고 와.”

“뭠미까. 에리카 언니 바지 입었던 검미까.”

“응?”

“바지 안 입고 앞치마만 입은 줄 알았슴미다.”

에리카는 돌핀팬츠를 입고 있었다. 헐렁한 앞치마를 입고 있으니 아예 허벅지 윗부분이 전부 가려졌던 것이다.

“그럴 리가 없잖아.”

“조금 굉장하다고 생각했는데 아쉽슴미다.”

“뭐가 아쉬운데.”

“우리의 리더에 어울리는 과감함을 갖췄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슴미다.”

“내가 소유니?”

세 사람은 정해진 구역 청소를 모두 마쳤다.

진소유는 담당인 샤워실 청소를 덜 끝낸 듯…… 아니면 안 끝내고 있거나 다른 일을 하고 있거나, 아무튼 거실로 오지 않았다.

셋은 거실에 드러누워 노곤함을 느꼈다.

히터 바람이 적당히 따스했다.

“가요대제전이면…….”

김민주가 입을 열었다.

케이어스는 12월 31일, 한해의 끝을 장식하는 방송에 출연한다. 많은 아이돌들이 그러하지만, 올해는 더 특별할 것이다.

케이어스는 현세대 모든 걸그룹의 정상에 섰으니까.

올해 가요대제전은 그야말로 케이어스의 독무대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소녀연맹도 오겠지.”

그러곤 김민주는 풋 웃음을 터뜨렸다.

“시청률 내기할래? 우리랑 소녀연맹 둘 중 어느 타임 때 시청률 높을지? 아님 아이튜브 직캠이나?”

“그거야 뭐.”

에리카도 웃었다.

“우리지.”

이렇게 속 시원하게 승리를 장담해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IWY’는 케이어스의 위상을 완벽히 바꾸었다. 그녀들을 절대 무너지지 않을 왕좌에 올린 것이다.

‘타임’과 ‘넥타르’ 때는 불안했다.

조금만 삐끗해도 다른 그룹들에게 따라잡힐 것만 같았다.

실제로 우효민인지 우효인지 어쨌든 그런 애랑 글로브에게 패배하기도 했었다. 덕분에 명예의 전당 입성에 실패하고, 소녀연맹에게 3주 연속 얻어맞기까지 했었다.

“우리야, 우리밖에 없어.”

그런데 이젠 그런 걱정 따위 전부 사라졌다.

앨범 판매량, 음원 순위.

그 무엇도 향후 2, 3년간 깨질 일 없을 기록이다. KS 엔터가 괜히 모든 임직원들에게 인센티브를 뿌린 게 아니다.

KS 엔터는 케이어스로 증명해낸 것이다. 자신들이 여전히 케이팝의 아이콘이란 사실을 말이다.

“다행임미다. 이렇게 유종의 미를 거뒀으니 말임미다. 가요대제전이면 한국에서 제일 큰 무대 아님미까?”

“음, 그건 또 아니지. 애매해.”

일본인 에리카가 답했다.

김민주가 곧바로 어이없단 듯 말했다.

“너 뭔데. 너 뭐 알아?”

“나도 케이팝 아이돌 짬바 3년이야.”

한국의 가요대제전은 많은 인기 아티스트가 출연하긴 하지만, 그 위상이 그리 높진 않다.

오히려 HPT 뮤직 어워드가 낫다면 더 나을까.

가요대제전이 중요한 무대였던 건, 텔레비전이 레거시 미디어로 공고한 권력을 확립했던 시절이었다.

방송국의 힘이 절대적이었을 시절 말이다.

옛날엔 방송국이 기획사 상대로 갑질을 했다던가? 이젠 기획사가 방송국 상대로 갑질을 해도 될 수준이다.

실제로 그러면 둘 다 끝이 안 좋겠지만…… 아무튼 방송국의 힘은 많이 약화됐다. 매출이 KS 엔터의 1/20도 안 되니.

“실리보단 상징성만 남은 프로그램이잖아.”

상징성만 남았더라도, 그 상징성이 중요하다.

“올해의 마지막 무대에서, 증명해내자.”

케이어스가 부동의 정점에 올랐단 것을 모두에게 알린다.

“다른 그룹들한테도, 소녀연맹한테도…….”

“너 은근히 걔네들 신경 많이 썼구나?”

김민주의 물음에 에리카가 얼굴을 붉혔다.

“딱히.”

“소녀연맹 가요대제전 안 나와.”

거실문이 열리며 샤워가운을 두른 진소유가 나타났다. 그녀를 보고 김민주가 혀를 내둘렀다.

“독하다 독해. 청소하고 바로 샤워한 거야?”

“처음은 나로 정했으니까.”

“무슨 말임미까.”

진저가 뉘었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소녀연맹이 안 나온단 게?”

“트잇터에 있어. 소녀연맹 스케줄 계정.”

진저는 폰을 꺼내어 진소유가 말해준 계정으로 들어갔다. 소녀연맹의 스케줄이 월 단위로 질서정연하게 나와 있었다.

가로 엔터가 운영하는 계정이 아니라, 팬이 운영하는 계정인 듯했다.

[12월 31일

가요대제전 사전녹화]

“지, 진짜네?”

그리고 그 밑에 또 다른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걸 읽은 에리카는 눈이 번쩍 뜨였다.

“자, 잠시만 진저. 나 폰 좀.”

에리카는 폰을 받아 글자를 다시 읽었다.

“손나(그런)…….”

미국의 팝스타들이 가장 영광으로 생각하는 무대는 어디일까.

슈퍼볼 하프타임쇼다.

미국의 국민 스포츠인 미식축구 꿈의 경기. 그곳의 중간 휴식 시간 무대에 출연하는 것이 모든 팝스타의 꿈이다.

어느 팝스타는 무대 프로덕션 비용이 짜게 주어지자, 사비를 털어 70억짜리 무대를 꾸미기도 했었다.

미국의 아티스트들은 모두 하프타임쇼에 나오는 자신을 머릿속에 그려보곤 한다.

그렇다면, 일본 뮤지션들 꿈의 무대는 어디일까?

[12월 31일

홍백가합전 생방송]

홍백가합전(紅白歌合戦).

텔레비전 미디어의 영향이 대폭 약화된 일본에서조차 시청률 40%를 기록하는 국민 프로그램.

5,000만 명이 동시 시청하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의 프로그램.

그 별명은 ‘일본의 슈퍼볼 하프타임쇼’다.

‘홍백가합전 출장’ 자체가, 뮤지션의 인생에서 영원토록 지워지지 않을 커리어가 된다.

“우소데쇼(거짓말이지)…….”

세계 음악 산업 규모 2위 국가 일본.

그 일본에서 가장 거대한 축제에, 소녀연맹이 출연한다.

만약 소녀연맹이 정말 홍백가합전에 나온다면, 농담이 아니라 일본에서 소녀연맹을 모르는 사람은 사라진다.

모든 일본인이 소녀연맹이란 이름을 알게 된다.

“가요대제전을 버리고 홍백가합전을 나가? 이거 매국노 아님미까?”

일본인 에리카는 중국인 진저의 실없는 농담을 무시했다. 아마 홍백가합전이란 이름이 가지는 무게를 모르기에 농담할 수 있는 거겠지.

에리카는 충격에 빠져 뭐라 답할 수 없었다.

* * *

“이젠 일본이 부산이나 대구처럼 느껴져요.”

신아름이 일본의 풍경을 오랜만에 보고서 처음 한 말이었다.

이 공항, 이 공항의 분위기, 이 일본 공항의 분위기. 이젠 익숙해지다 못해 지방 행사를 뛰는 듯한 기분이다.

“비행기로 가면 부산 가는 기차랑 시간이 엇비슷하긴 하지. 그래도 해외잖아. 좀 설레거나 그런 거 없어?”

성필의 질문에도 신아름은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장하양마저 그러했다. 옛날 처음 일본 땅을 밟았을 땐, 해외에 가는 건 처음이라면서 굉장히 들떴었는데 말이다.

“다들 너무 긴장감 없는 거 아닌가요!”

보다 못한 리카는 뿔이 났다.

“저희가 왜 일본에 왔는지 잊으신 건가요! 쌤! 언니! 더 호들갑 떨어도 괜찮다구요!”

“일본판 가요대제전 찍으러 온 거 아니야?”

“겨우 그 정도가 아니란 말야!”

리카는 신아름의 답에 상처받곤 성필에게 매달렸다.

“이사님 아름이가 일부러 저를 상처 주려나 봐요! 혼내주세요!”

“야, 팀장님이 네 간악한 꾐에 넘어가서 나를 혼낼까 봐?”

“쓰읍, 아름아 말 예쁘게 해.”

“…….”

“바, 박 이사님 아름이 눈빛이 무서워요! 오늘 자다가 어떤 짓을 당할지 몰라요! 이사님 숙소로 대피해야 해요!”

“그래.”

“혼또(진짜)?!”

“그거 말고.”

입국장으로 나가기 직전, 성필은 뒤로 돌아 멤버들을 바라보았다.

“리카 말이 맞아. 더 호들갑 떨어야 해. 뭐니 뭐니 해도 너희가 나가는 건…….”

성필은 씩 미소를 짓곤 다시 돌아 앞으로 나아갔다. 자동문이 열렸다. 이윽고 그들을 덮친 건 눈이 멀 것만 같은 플래시 세례였다.

“쇼죠렌메다(소녀연맹이다)!”

커다란 카메라를 가져온 기자, 커다란 카메라를 가져온 팬, 아무튼 카메라를 가져온 사람들이 많았다.

그 외에도 사람들은 폰을 들어 성필의 뒤에 선 소녀연맹을 찍기에 바빴다.

이전보다 훨씬 환영이 거센 듯했다.

“너희는, 홍백가합전에 나가는 거니까.”

소녀연맹, 일본 입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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