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7화
[소녀연맹 사재기 논란]
소녀연맹이 때아닌 사재기 논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미니 3집 ‘오토마타’로 급격한 성장세와 인기를 증명한 소녀연맹이건만, 악재에 마주쳐버렸다.
물론 그 논란이란 건 커뮤니티나 SNS의 팬들 사이에서만 나돌았다.
공식 기사는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아이돌 팬들이 ‘이거 수상하지 않음?’이라면서 장작을 때우는 건 연례 행사 같은 것이다.
아무리 기레기라고 무시당하는 인터넷 미디어 기자들도, 심증뿐인 논란을 기사로 썼다고 고소당하고픈 마음 따윈 없었다.
하지만 인민이들의 마음은 타들어 갔다.
[증거도 없으면서 사재기라고 확정하는 거 역겹네]
소녀연맹은 너무 빠르게 몸집을 불렸다. 그게 다른 팬덤들 입장에선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 성적이 다른 모든 걸그룹을 위협할 수준이 되자 인터넷에서 얻어맞는 게 예사가 됐다.
극성 악질 팬들은 중소 기획사 소속 소녀연맹이 이렇게나 급격히 성장했단 걸 믿고 싶지 않았고, 어떻게든 흠집을 만들어 소녀연맹을 깎아내리고자 했다.
그게 자신이 파는 그룹이 소녀연맹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단 것을 증명할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이제 3년 차인데 초동 41만이 말이 되는 수치임? 부테스(KS 엔터의 3세대 초기 보이그룹)가 전성기 찍었을 때 40만이었는데?]
다른 그룹의 성적과 비교하여 타당성 지적하기.
[선주문 20만 장에 주중에 또 21만 장을 추가로 파는 게 정상적인 게 절대 아님. 하루에 5만 장씩 따박따박 팔리는 게 상식적으로 벌어질 일은 아니잖아?]
‘정상적인’이나 ‘상식적인’ 같은 말을 붙이면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의견인 양 포장하기. 당연히 심증밖에 없다.
[이렇게 많이 팔렸는데 공구(공동구매) 인증이 왜 안 올라옴? 미국 휩쓸었다면서 이게 말이 됨?]
한국, 좋게 봐줘도 아시아권 팬 문화를 세계 전체로 확대하여 이의 지적하기.
[‘애플 크러쉬’ 26만 장 팔렸는데, 제정신이면 초기 물량은 30만이나 35만 정도에서 컷 해야지 않겠냐? 어떻게 몇 주 넘어가도록 물량 부족이 안 일어남? 빼박 미리 사재기할 생각이었으니까 많이 찍은 거지.]
[애초에 소녀연맹 지금까지 성장세가 이상하긴 했음 ㅋㅋ. 1만 다음 2만 다음 12만으로 뛰었는데 어케 그걸 다 준비해놓냐고 직원들이 미래라도 보냐?]
앨범 물량이 딸리지 않는 것을 트집 잡기.
[일본판 ‘애플 크러쉬’ 50만 장 팔린 것도 이해가 안 됨. 일본에서 제일 잘나가는 레이어드가 3년 차에 20만 겨우 찍었었음]
그리고 또 빠지지 않는 다른 그룹과 비교.
이 비교란 것은 인민이들 입장에선 적을, 다른 팬덤 입장에선 아군을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우리 애들이 소녀연맹이랑 비교당한대’란 소식이 들리면, 어떻게든 자기 아이돌의 명예를 지켜주려 여기저기서 몰려드니까.
“정병들 개많이 몰려드네 씨…….”
김채현은 폰을 보면서 도저히 분노를 삭일 길이 없었다.
기사가 안 떴으니 괜찮다고? 그건 최악의 경우일 뿐, 기사가 안 떴다고 괜찮은 게 아니다.
트잇터 실시간 트렌드가 ‘소녀연맹 사재기’나 ‘Girl’s_League_OUT’ 같은 걸로 도배되고 있다.
아무 사정도 모르는 사람들이 저걸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그냥 믿는다. 인간은 대립하는 두 의견 중 하나의 정보만 얻으면, 그것을 정보가 아니라 진실로 생각해버리니까.
인민이들이 최대한 정화를 시도하고 있지만, 힘에 부친다 하다. 인민의 적이 너무 많다.
‘이거 백퍼 유스들이랑 KS 엔터 팬덤이다.’
인민이들이 국내 트렌드 정화 싸움에서 못 이기는 팬덤은 보이그룹이거나 탑티어 걸그룹, 그리고 케이어스뿐이다.
김채현은 무력감을 느꼈다.
저 쓰레기들의 목을 매달아줄 순 없지만, 적어도 소녀연맹의 눈을 가려주곤 싶었다. 그런데 그것조차 할 수 없다.
계속 보다 보니 분노를 넘어 눈물까지 나올 것만 같다.
‘이 새끼들이 오늘 시상식이라고 별 지랄을…….’
이건 그냥 두면 안 된다.
소녀연맹은 안 그래도 지금까지 수많은 증오의 표적이 되어왔다.
처음엔 그룹 이름과 팬덤 이름으로, 다음엔 소녀연맹을 견제하는 그룹의 팬덤들에게 온갖 루머로 얻어맞았다.
‘우리들의 프로듀싱’이 시작되곤 아예 대놓고 비웃기까지 했다. 프로듀서? 너희들이? 이미지 메이킹 역겹게도 하네.
‘쓰레기 같은 새끼들.’
김채현은 이를 갈면서 주요 아이돌 커뮤니티를 계속 확인했다. 그런데 모든 커뮤니티가 마치 소녀연맹 갤러리라도 된 것처럼 소녀연맹의 이름이 넘쳐났다.
“이 씨 정병년들…….”
“채현이 너!”
어머니가 김채현의 어깨를 찰싹 찰싹 때렸다.
“아, 악! 아 왜 때려!”
“너 욕하지 말랬지?”
“안 들리게 작게 했잖아…….”
김채현은 울상을 지으면서 폰을 소파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가족들은 거실에 모여 함께 텔레비전을 보는 중이었다.
아버지는 텔레비전 앞 테이블에 뚱하니 앉아 ‘HPT 뮤직 어워드’ 레드 카펫 영상을 보았다.
이 시간은 항상 아버지가 리모컨을 쥐었지만, 오늘만큼은 딸에게 빼앗겨버렸다. 리모컨을 안 주면 울고불고 난리 칠 분위기라,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양보할 수밖에 없었다.
HPT 뮤직 어워드는 인터넷에서도 생중계되지만, 김채현은 꼭 큰 화면으로 보고 싶었다.
“근데 채현이 너 입학식은 언제야?”
“합격 발표 2월이야. 지금은 12월이고.”
“그렇게 오래 걸려?”
“당연하지.”
“고등학생은 처음 키워 봤어서 엄마가 몰랐다 그래. 얘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까칠해?”
김채현은 어머니를 붙잡고 소녀연맹이 당하는 부당한 괴롭힘을 전부 털어놓았다.
어머니는 크게 웃었다.
“나 옛날에 아이돌들 좋아했을 땐 더했어. 있지도 않은 얘기 지어내는 건 예사였고, 무슨 마약을 한다 여친이 수십 명이다 그런 말까지 퍼뜨렸다니까.”
“그런 걸 믿어?”
“진위를 몰라도 그냥 말하고 다니는 거야.”
“왜?”
“그야, 재밌으니까?”
김채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녀의 어머니는 1세대 악플러였다. 아니, 그땐 인터넷이 활발하진 않았으니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걸로 끝냈겠지만.
팬 문화가 성숙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사실, 지금도 딱히 성숙하진 않은 듯했다.
누가 인터넷이 세계평화와 인류통합을 이룰 거라고 했던가? 인터넷은 전 인류의 증오가 모인 복마전이 되어버렸는데.
“앨범 사재기했단 거 정도는 귀여운데?”
“이게 어떻게 귀여워! 우리 애들이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어!”
“얘가 꼭 자기 배로 낳은 애인 거처럼 말한다?”
자기 배로 낳은 애.
김채현이 소녀연맹에게 지니는 애정은 물론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애정이 매우 크단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고등학교 생활 전체를 소녀연맹과 보냈다. 그녀의 청춘은 소녀연맹이란 이름으로 기억될 것이다.
영국인들도 역대 총리 이름은 드문드문 말하지만, 어느 시기에 어떤 록밴드가 흥했는가는 귀신처럼 대답한다고 하지 않은가.
60년대 총리나 유명했던 정치인 이름은 잘 몰라도 그때 비틀즈가 활동했단 건 안다.
“어, 나온다.”
소녀연맹이 레드카펫에 입장했다.
저마다 특징적인 옷을 입었다.
바지와 탱크톱, 혹은 드레스, 아니면 투피스, 미니스커트와 카디건 등등. 개성 강한 복장이지만 전체적인 컬러는 검은색과 붉은색의 배합으로 맞추었다.
김채현은 곧바로 색배합의 의미를 유추해냈다.
‘붉은색은 애플 크러쉬고 검은색은 오토마타를 상징하는 거구나!’
그리고 그것을 곧바로 트잇터에 썼다.
포토 라인에 선 멤버들이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아…….”
김채현은 힘이 탁 풀렸다.
세상에, 공부 걱정 안 하고 소녀연맹을 볼 수 있는 날이 오다니?
물론 아직 합격 여부를 모르기에 살짝 불안하긴 했지만, 합격한다고 거의 확신하다시피 했다.
학과 지원자 톡방에서도 김채현의 점수는 최상위권이었다.
“애네가 소녀연맹이야?”
아버지가 화면의 조아라를 가리켰다.
“얘가 제일 살쪘네.”
“아빠 저건 살찐 게 아니라 건강하다고 하는 거야! 직접 보면 나보다 더 말랐어!”
“텔레비전이랑 직접 보는 게 달라?”
“다르지! 텔레비전은 옆으로 뚱뚱하잖아!”
“그래……?”
아버지는 소녀연맹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딸이 입에 달고 사는 아이돌이니 관심이 갔다.
여자애가 여자애를 좋아한단 게 이해가 안 되긴 한다만, 그래서 더 관심이 생긴다.
[인민이들!]
“인민……?”
정훈장교 출신인 아버지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아, 우리 팬들 부르는 이름이야.”
“인민이?”
“영어로 팬덤 이름이 피플이거든.”
“요즘은 참…… 자유로워졌네.”
“못마땅해? 아빠도 월드컵 때 새빨간 옷 입고 그랬다면서.”
“야 이 그거랑 이건 살짝 달라.”
[한 해간 응원해줘서 고마워요. 오늘 이 자리에서 꼭 보답할 수 있도록 할게요!]
백설하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아버지의 날카로운 눈매가 김채현 대신 텔레비전으로 박혔다.
“여보.”
어머니의 말투가 싸늘해졌다.
“관심 없다더니 아주 열심히 보네?”
“아니, 내 마누라가 백배 천배 낫다 싶어서. 이야, 여봉봉이 조금만 더 늦게 태어났으면 저기 서 있을 텐데. 그치?”
“여보오…….”
김채현은 오늘 동생이 생기지 않길 바랐다.
두 분의 뜨거운 사랑은 제쳐두고, 김채현은 텔레비전에 집중했다.
케이어스는 소녀연맹보다 더 나중에 들어왔다. 그녀들은 한눈에 보아도 자신감이 넘쳤다.
김채현은 벌써부터 우울해졌다.
‘미안해.’
이번에도 케이어스를 이기게 해주지 못할 것 같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소련이들의 얼굴에도 그늘이 진 듯했었다.
* * *
가수 대기석은 편치 않다.
왠지는 모르지만 투명한 유리 재질이고 방석 하나만 덩그러니 놓여있을 뿐, 딱딱해서 오래 앉아 있으면 엉덩이가 아프다.
조아라는 그 의자를 보자마자 기분이 안 좋아졌다.
“아 또 저거야.”
“비주얼에만 너무 신경 써. 아예 소파를 가져다 두면 안 되나?”
신아름도 툴툴거리긴 마찬가지였다.
찌그러졌던 그녀들의 얼굴은 대기석으로 가자마자 활짝 펴졌다. 주변에 선배 후배 아이돌들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안녕하세요.”
백설하를 위시하여 소녀연맹 멤버들이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하자, 다른 그룹들도 일제히 일어나 인사를 주고받았다.
소녀연맹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대를 보기에 나쁜 자리는 아니었다. 왼편은 아직 비어 있었고 오른쪽엔…….
“선배님 안녕하세요.”
조아라는 오른편에 앉은 시에이스의 규영과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그런데 규영의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시에이스 멤버들 전체가 그러했다.
조아라는 그 이유를 알았다.
시에이스 멤버들은 내년 1월 다 함께 군대에 간다. 당장이라도 술 퍼마시면서 마지막 자유를 만끽하고 싶을 텐데, 연말 방송이며 시상식에 매일같이 불려 다니니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다.
“잘하실 거예요.”
조아라가 심심한 위로를 던지가 규영은 적당히 ‘네’라고 말했다. 거의 영혼이 사라진 모습이었다.
그때 규영이 잠시 영혼을 되찾았다.
“긴장 안 되세요?”
“긴장…… 뭐, 내가 프로듀싱한 거니까 긴장이야 되죠. 좀 신기하긴 하네요. 1년 차엔 막연하게 기대만 했고, 2년 차엔 파이팅 넘치는 기분이었는데, 3년 차가 되니까 긴장되는 게요.”
“아뇨, 케이어스요.”
“네?”
“케이어스랑 소련이랑 대립 구도잖아요. 이번에 노리는 상 있을 거 같은데.”
있긴 하다.
HPT 뮤직 어워드는 상의 이름을 자주 바꾸는 것으로 유명했다. 있던 게 없어지기도 했고, 없어졌던 게 이름만 바꾸어 나타나기도 한다.
지금까지 여러 이름을 가졌던 상이지만, 결국엔 이 단어로 통한다.
“올해의 퍼포먼스상이요.”
“베스트 퍼포먼스 그룹 여자상 말씀하는 거죠?”
“네, 뭐.”
조아라는 규영이 직접적으로 케이어스를 언급하자 불편했다. 케이어스는 떠올리지 않고 그저 시상식에 집중하고 싶었건만.
“소녀연맹 아니면 받을 그룹 없어요.”
규영이 그리 말했다.
조아라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저는…… 퍼포먼스로 따지면 케이어스의 ‘넥타르’보다 소녀연맹의 ‘오토마타’가 좋았어요.”
조아라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시에이스의 규영은 그녀가 연습생 때부터 이상향으로 잡았던 아이돌이었다. 시에이스란 그룹의 폭발적인 퍼포먼스를 좋아했고, 규영은 그룹의 메인 댄서였다.
아예 막 동경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조아라에게 규영은 따라잡아야 할 목표 중 하나였긴 했다.
그런데 그 목표가 자신을 인정했다.
“야, 그만하고 앞에 봐.”
시에이스의 리더가 규영을 툭툭 치면서 말했다. 규영은 그의 말을 따라 다시 앞을 보았다.
가끔씩 카메라가 대기석을 찍는다.
남녀 그룹이 대화 나누는 게 전광판에 띄워져봤자 좋은 이야기 안 나온다.
조아라도 규영에게서 정면으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옆에서 강한 눈빛이 느껴졌다.
장하양이었다. 그녀는 광대가 하늘 위로 날아갈 것처럼 올라가 있었다. 그녀가 응원한단 듯 두 주먹을 불끈 쥐었.
“언니, 내가 한 번만 더 그러면 가만 안 둔다고 했죠?”
“말은 안 했어, 말은…….”
“보면 쌤보다 언니가 더 이런 거에 관심 많은 거 같아요.”
“나도 별로 관심 없어.”
백설하가 말하자 멤버들은 못 들은 듯 가만히 있었다.
“이거 프레임이라구…….”
그때 소녀연맹의 옆자리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소녀연맹 멤버들은 거의 반사적으로 일어나 몸을 숙였다.
“안녕하세요.”
“네.”
짧은 답이었다.
가장 왼쪽 자리에 앉아 있던 백설하는 당황해서 고개를 들었다.
에리카였다.
“안녕하세요, 언니. 소녀연맹분들.”
에리카를 필두로 케이어스 멤버들도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때 카메라가 기다렸다는 것처럼 두 그룹을 잡았다.
전광판에 소녀연맹과 케이어스가 잡혔다.
아이돌의 레드 카펫 타임이지만 관객들은 이미 모두 들어차 있었다. 전광판에 두 그룹이 나오자 관객들은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환호를 보냈다.
“하하.”
에리카는 허리를 펴면서 웃었다.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해외 무대는 환호성이랑 박수가 후하대요. 자기가 응원하는 아이돌을 보러 오는 것도 있지만, 일반적으론 보기 힘든 케이팝 아이돌들을 볼 수 있는 기회니까요. 모든 그룹이 반가운 거예요. 아무리 그렇다지만…….”
지금의 환호와 박수는 상상을 초월했다.
대기석의 아이돌들이 당황하여 주변을 두리번거릴 정도였다.
“케이어스와 소녀연맹은 오랜 라이벌리가 있으니까요. 다들 기대하는 거겠죠.”
“아, 응…….”
백설하는 에리카가 소녀연맹을 라이벌이라고 선언하자 부끄러우면서도 기분이 좋았다.
백설하는 전광판에 잡힌 자신을 보다가 에리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백설하의 표정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오늘 서로 좋은 결과 있자.”
에리카는 백설하가 내민 손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손을 잡는 대신 백설하를 바라보며 빙긋 웃었다.
“소녀연맹은 케이어스의 라이벌로 주목과 인지도를 얻어갔죠. 그건 아직까지 유효하고요.”
“으, 응?”
“그게 계산된 마케팅 전략이든, 팬들이 재미로 만든 대립 구도이든, 저는 항상 생각했어요. 라이벌이라니…….”
라이벌이란 건.
“1위와 2위는, 이미 결과가 난 거잖아요. 라이벌은 대등한 관계를 이르는 거 아닐까요?”
백설하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그제야 에리카가 백설하의 손을 잡았다.
환호성이 더욱 강해졌다.
바로 앞에 있는 에리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백설하는 그녀의 입술을 보고, 그녀가 뭐라고 하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오늘로 끝이에요.’
애매한 라이벌 관계는 끝이다.
완벽한 상하관계가 들어설 것이다.
환호성이 줄어들자 에리카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렸다.
“저희는 오늘로써 최고가 될 거예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최고의 걸그룹 반열에 오를 거니까, 지켜봐 주세요.”
에리카와 백설하가 손을 놓았다.
두 그룹 멤버들은 각자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서로를 바라보지 않았다.
음악과 문화엔 우열이 없다. 승패가 없다. 그렇게들 말한다.
틀렸다.
우열과 승패는 엄연히 존재한다.
더 많은 사람을 매혹하는 쪽이 승리한다.
* * *
“확인 제대로 된 거 맞죠?”
[지금 상황에서 저한테 말씀하셔도…….]
전화 너머의 조진만은 난색을 표했다.
그는 콘서트 기획사의 사장으로, 이번 HPT 뮤직 어워드에선 가로 엔터의 공연 연출을 맡았다.
조진만의 아틀라스사(社)는 가로 엔터를 대신하여 콘서트의 전문가로 이번 작업에 임했다. HPT 뮤직 어워드의 공연 기획부와 직접적인 연을 맺은 건 그들이었단 뜻이다.
하지만.
[리허설도 전부 보셨잖아요. 완벽합니다.]
“마음 같아선 이 자리에서도 공연 쪽 사람이랑 얘기하고 싶은데 방법이 없어서…….”
[저라고 지금 당장 연락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변경점이 있더라도 변경해주지 않을 거고요.]
조진만은 성필을 이해한단 듯 가볍게 웃었다.
[원래 책임자는 몇 번이고 확인하고 싶어 하긴 하죠. 그런데 이 무대는 저희의 손을 떠났습니다. 실수는 저쪽 책임이고요.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미 루비콘강을 건넜어요. 편히 있으셔도 돼요.]
“……네. 혹시 지금 보고 계세요?”
[네,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보고 있습니다. 기대되네요. 이번엔 격이 다를 테니까요.]
국내에서 이뤄지는 시상식은 보통 푯값이 저렴한 편이다. 한국인 디스카운트라고 해야 할까, 2만 원 수준이다.
하지만 시상식 장소가 해외로 바뀌면 상황이 달라진다. 이번 HPT 뮤직 어워드의 푯값은 최소 15만 원에 최대 20만 원까지였다.
그게 무슨 뜻이냐면, 무대 연출에 훨씬 돈을 퍼부을 수 있단 것이다.
소녀연맹이 할당받은 프로덕션 비용은 이전과는 궤를 달리했다. 단순히 무대에 나와 춤추고 들어가는 수준이 아니다.
백댄서 수십 명이든 폭죽이든 화염방사기든 워터 커튼이든 전광판 분리든 합체든 뭐든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다른 그룹의 무대도 참고 삼을 수 있을 테니까, 보고 있습니다. 뭣보다 소련이들이 나오고요.]
“예, 갑자기 이렇게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불안해서.”
[아뇨, 이해합니다.]
조진만과의 통화를 마친 성필은 한숨을 푹 쉬고 복도를 걸었다.
작년엔 홍규헌의 언니인 홍연헌이 공연을 총괄하는 FOH(Front Of House)로 데려다주었었다.
만약 지금 홍연헌이 성필을 그곳으로 데려간다면, 성필은 연출팀장을 붙잡고 소녀연맹의 공연 요소를 처음부터 끝까지 점검하려 할 것이다.
바빠서 해주진 않겠지만.
‘음?’
복도 벽을 뚫고 우레와 같은 함성이 들렸다.
‘벌써 시작했나?’
아직 그런 시간은 아닌데. 아마 탑티어급 아이돌이라도 입장한 모양이다.
해외 팬들은 환호가 남다르다. 케이팝 아이돌을 볼 기회 자체가 흔치 않으니, 모든 힘을 불살라 환호를 보내준다.
성필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사람은 없었다. 하긴, 자리 잡으면 한순간이라도 놓치지 않으려 물조차 안 마시곤 한다. 물을 마셨다가 화장실을 가고 싶을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곧 시작이니 이 시간에 화장실을 올 사람은 없겠지.
성필은 세면대에서 손을 씻었다. 불안을 지우려는 듯 비누로 손을 박박 문질렀다.
‘애들한텐 긴장하고, 그 긴장을 힘으로 삼아 완벽한 무대를 보여주라고 하긴 했지만…….’
성필조차 긴장을 이겨낼 수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전력 달리기를 한 것처럼 심장이 쿵쾅거린다.
이번 시상식은 ‘우리들의 프로듀싱’이 평가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번 시상식에서 받는 상은 멤버들에게 훨씬 더 큰 의미를 가질 게 분명하다.
‘반드시 성과를 거둬야 해.’
작년엔 본상이었던가.
본상은 10개다. 소녀연맹은 그 10개 중 하나를 받은 것이다.
본상은 대상으로 가는 길이지만, 매년 본상만 따박 따박 챙기다가 대상 그림자도 못 보고 해체하는 아이돌이 부지기수다.
꿈이 ‘대상 받기’라고 했다가 조리돌림은 물론 비웃음까지 받았던 아이돌도 있었다.
‘소녀연맹은 명실상부 최상위에 올랐다. 걸그룹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 들 거야.’
그러니 이번엔 그만큼의 결과를 내야 한다.
성필은 수도를 잠그고 손을 털었다. 페이퍼 타올로 손을 닦으면서 계속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 속의 그는 멋들어진 양복을 입고, 오랜 시간 공들인 헤어스타일을 뽐내고 있었다.
하지만 표정에선 숨길 수 없는 불안이 드러났다. 성필은 이 불안이 곧 환희로 바뀌리라 믿었다.
타올을 쓰레기통에 버린 그는 뒤로 돌아 나가려 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어?”
성필은 당황해서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성필이?”
윤상열이었다. 그도 당황한 건 매한가지인 듯 안쪽으로 더 들어오려하지 않았다.
“……어.”
성필이 겨우 말을 이었다.
“형…….”
이제 형이라고 부르지 않기로 다짐했건만, 성필은 그를 보자마자 절로 형이란 호칭이 나왔다. 그와 함께 보낸 세월 탓일까.
그 순간 사회자가 HPT 뮤직 어워드의 개막을 선언했다.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위를 바라보았다.
박수와 환호가 벽을 뚫고 성필과 윤상열 주변을 가득 메웠다.
벽이 떨릴 듯한, 동시에 희미한 환호 속에서 이윽고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여러 감정을 담아서.
HPT 뮤직 어워드, 개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