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한는 프로듀서-556화 (556/760)

556화

저녁은 호텔 뷔페를 먹었다.

KS 엔터의 구내식당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곳이라고 생각했건만, 호텔은 차원이 달랐다.

게다가 일정 시간 동안 주류가 무료였다.

원래 진저는 술을 마실 생각은 없었지만.

“이거 마셔봐.”

진소유가 투명한 잔에 어떤 술을 담아서 가져왔다. 한 모금 마시니 눈이 번쩍 뜨였다.

“맛있슴미다!”

그렇게 진저는 몇 번이나 술을 잔에 담으러 왔다 갔다 했다. 얼음이 가득 찬 버킷에 담긴 진저의 최애주(最愛酒)는 그녀 때문에 금방 동이 났다.

“리필해달라고 하면 리필해줌미까? 제가 다 마셔버렸슴미다.”

“그러지 말고 이번엔 저거 어때.”

진소유가 다른 술을 추천해주었다.

그건 달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괜찮아서 몇 번 채워 마셨다.

“이건?”

또 마셨다.

1시간 30분 후 진저는 사물과 사람을 구분할 수 없을 지경에 빠졌다.

“언니는 술을 잘 압니다. 마시는 거 별로 본 적 없는데, 취미입니까?”

“그냥 병이 예뻐 보이는 걸 추천한 거야.”

“저를 실험체로 쓴 겁니까? 뭐, 괜찮습니다.”

“술을 마시니까 발음이 괜찮아지네.”

“음식을 더 먹고 싶은데 못 먹겠습니다. 술 좀 더 가져오겠습니다.”

“그만 마셔.”

“저를 막지 마십시오. 저는 무적입니다.”

“아니, 내가 술 가져왔어서 그래.”

진소유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행동 하나하나에 품위가 넘쳤다.

진저는 동경 어린 눈빛으로 진소유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자신도 저렇게 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인성 말고 행동거지 말이다.

“가자.”

* * *

진소유가 호텔에 들고 온 커다란 가방.

그 안엔 온갖 것들이 가득했다.

비싼 술 몇 병과 게임기 두 개, 책, 왠지는 모르겠지만 소녀연맹 퍼스트 콘서트 DVD도 있었다.

가장 충격적인 물건은.

“담배가 왜 있습니까?! 언니 담배 피웁니까!”

“네가 피우고 싶을 수도 있을 거 같아서.”

“안 피웁니다!”

“흡연 구역은 1층이야. 아니면 수영장 공원 쪽.”

“케이어스 나락으로 보낼 일 있습니까? 여기서 피우라고 해도 안 피울 건데 외부에선 절대 안 합니다!”

“싫으면 말고.”

둘은 마주 보고 술을 마셨다.

진저는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셔본 적은 처음이었다. 시야와 정신이 점점 흐려져 갔다.

진소유와 많은 이야기를 나눈 듯하다.

그런데 방금 나눈 대화도 금방 잊어버리곤 했다. 진저는 기절하기 직전 했던 대화만을 기억했다.

“왜 저한테 즈알…… 잘…… 대해줍니까아?”

“넌 나랑 닮았어.”

진저가 픽 웃었다.

“즈에가 언니 같았으면…… 이런 식으로 힘들진 않았을 겁니다…….”

그게 진저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내일이면 흐려질 마지막 기억.

* * *

진저는 눈을 떴다.

침대의 보드라운 감촉이 전신을 감쌌다. 그녀는 눈을 뜨자마자 죽을 듯한 두통과 복통을 느꼈다.

위장의 가죽이 거꾸로 뒤집힌 듯하다.

진저는 배를 부여잡고 ‘꺼윽, 어흑, 아흑’ 같은 신음만 흘렸다. 너무 괴로워서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도와달란 말조차 내뱉을 수 없었다.

너무 괴로워서 눈물까지 흘렸다.

“괜찮아?”

잠시 후 멀쩡하기 그지없는 모습의 진소유가 방으로 들어왔다. 방금 씻은 모양이다.

진저는 애벌레처럼 웅크린 채 흐느꼈다.

“너무 아픔미다…… 진짜, 진짜 죽을 거 같슴미다, 병원에…….”

진소유는 진저를 데리고 화장실로 왔다.

진저는 너무 고통스러워서 계속 울었다.

이윽고 진소유가 진저의 입 안에 손가락을 넣었다. 진저는 눈을 번쩍 뜨더니.

“우엑……!”

한바탕 속을 게워냈다.

그게 몇 분이나 이어졌다.

진저는 변기를 붙잡고 한동안 입만 뻐끔거렸다. 그리고 그 과정이 전부 지나자 속이 깔끔해졌다.

뱃속이 텅 빈 느낌만 있을 뿐 더는 고통스럽지 않았다. 마치 몸 안의 독을 전부 몸 밖으로 배출한 듯했다.

“무, 물…….”

“기다려.”

진소유는 종이컵에 담긴 인스턴트 콩나물국을 준비했다. 그리고 포트에 안친 물이 끓을 때까지 기다렸다.

진저는 그걸 기다릴 수 없었다. 속을 게워내고 나니 입 안이 사막처럼 말랐다.

냉장고 안에서 찬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잠시 후.

“죽을 거 같슴미다아, 병원……!”

결국 또 게워냈다.

진저는 숙취가 있을 땐 찬물을 마시면 안 된단 것을 알게 됐다. 진소유가 끓여준 인스턴트 콩나물국만 찔끔 마셨다.

“이젠 절대 술 안 먹슴미다. 다시 술 마시면 저는 개임미다.”

“개가 되야겠네.”

진소유는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맥주를 꺼내어 테이블에 두었다. 진저는 그걸 보자마자 토할 것 같았다.

“지금 먹는 검미까? 절대 안 먹슴미다.”

“오늘은 혼자 취하는 법을 배울 거야.”

“혼자 취하는 법…… 을 알아야 함미까?”

“평생 모르는 사람도 있어. 혼자 취하는 법이란 건, 술을 즐기는 법을 안단 거야. 절제하는 방법이지. 네가 원할 때만 마셔.”

진저는 절대 안 먹겠다고 다짐했다.

둘은 호텔 조식을 먹진 않았다.

대신 한 상에 70,000원짜리 룸서비스 식사를 주문했다. 거기에 60,000원짜리 짬뽕도 시켰다.

이곳의 물가는 바깥과 단절된 모양이다.

“이제 뭐 함미까?”

진저는 진소유가 여행 가이드라도 된 것처럼 말했다. 그리고 진소유는 능숙한 여행 가이드처럼 다음 할 것을 추천했다.

“게임 할래?”

진소유는 휴대용 게임기 두 개와 키보드를 꺼냈다. 진저는 그다지 좋은 반응을 보여주지 않았다.

“게임은 애들이 하는 거 아님미까.”

잠시 후.

“아, 소유 언니 이번엔 저희들이 임포스터임미다. 꼭 이겨야 함미다.”

“응.”

[긴급 소집! 살인 현장 발견!]

[프론트 포워드: ‘생강’이 죽이는 거 봤음]

[생강: ㅈㄹㄴ]

[소유: 나도 봄]

“왜 같은 편인데 배신하는 검미까?!”

“너무 눈에 띄잖아. 생각 좀 하고 죽여.”

“변호하는 낌새라도 보여야 하지 않슴미까! 이게 저희의 3년이 가진 무게임미까!”

“응.”

[생강: 니들 진짜 못한다 ㅋㅋㅋㅋㅋㅋㅋ]

[소유: 네 다음 임포스터]

[생강: 말을 말자]

[소유: 네다임]

[‘생강’은 임포스터였습니다]

“한 판 더 하는 검미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게임을 했다.

하는 동안 진저는 자연스럽게 맥주를 마셨다. 적당히 절제하면서 마시니 기분 좋은 상태가 쭉 이어졌다.

어제처럼 정신이 무뎌지는 일은 없었다.

“피곤함미다. 이제 그만하겠슴미다.”

“그래.”

진저는 눈을 비비면서 침대로 갔다. 그리고 기분 좋게 잠들었다.

일어나니 저녁이었다.

이렇게 편안히 잠잔 건 오랜만이었다. 애초에 낮잠이란 게 생소한 개념이었으니.

“언니, 배고픔미다. 식당 열었슴미까?”

“응, 아마. 근데 그냥 룸서비스로 시켜 먹자.”

진소유는 거실 탁자에 앉아 태블릿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진저는 그녀의 뒤로 가서 그것을 보았다.

“이게 뭠미까?”

“심심풀이. 내가 앨범을 만들면 무대는 어떻게 할까, 옷은 어떤 스타일일까 상상해보는 거.”

“그림 못 그림미다.”

“그런 편이지.”

“이건 예쁜 거 같슴미다.”

진저는 그나마 진소유가 잘 디자인한 옷을 검지로 쿡 가리켰다.

진소유는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고마워.”

진저는 그 반응이 뜻밖이라 바로 답하지 못했다.

“아, 아님미다.”

둘은 룸서비스로 저녁을 시켜 먹으면서 또 술을 마셨다. 진소유는 비싼 양주들을 많이 가져왔다. 오늘이 아니면 이런 날이 다시 없을 텐데, 남기는 건 아까웠다.

진저는 저녁을 먹던 중 놀랐다.

자신이 이런 생각을 할 줄은 정말 몰랐는데.

‘아쉬워.’

내일이면 이 유희가 막을 내린다.

진저는 방을 둘러보았다. 처음 봤을 때의 실망은 온데간데없었다. 이 방이 썩 괜찮게 느껴졌다.

두 명이 지낸다고 생각하면 케이어스의 숙소보다는 넓은 느낌이다. 애초에 프리미엄 스위트룸이라고 하니, 이 호텔에서 가장 좋은 방이다.

“저 때문에 1,000만 원도 넘게 썼는데 안 아까우심미까?”

“안 아까워.”

“……저는.”

음식을 먹으려 바쁘게 움직이던 진저의 손이 멈췄다.

“가끔 믿기지 않슴미다. 저희가 이렇게 큰돈을 버는 게 말임미다. 소유 언니처럼 아무렇지 않게 명품을 사고, 이런 방에 묵을 수 있게 됐단 게 안 믿김미다. 저희가 그렇게 큰돈을 벌 일을 하는 건지…….”

“당연하지.”

“당연함미까?”

진소유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식사가 끝났단 듯 냅킨으로 입가를 닦았다. 여전히 품위 있게 느껴지는 제스처였다.

“공부에서 100명 중 11위 안에 들면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어…… 모범생?”

“2등급이야. 4위 안에 들면 1등급이고. 1위라면 서울대에 갈 수 있어. 공부로 상위 1%면 모두가 우러러보는 서울대에 가는 거지. 정확히는 평균적으로 0.5%라고 해. 그리고 100명 중 상위 10명을, 우리는 비범하다고 부르기로 했어. 100명 중 1명, 1등을 우리는 굉장하다고 부르기로 했지. 그럼 우리는?”

“저희 말임미까? 저희가 무슨…….”

“비범, 굉장 이상이지. 연습생 100만 명 시대라고 하잖아. 과장이라고 생각하면 50만 명, 아니 10만 명이라고 하자.”

진소유가 손가락을 열 개 모두 펼쳤다.

“우린 10만 명 중 4명이야. 케이어스는 아이돌의 최상층이니까. 자, 이제.”

진소유는 싱긋 미소 지었다.

“아직도 이상하게 느껴져?”

10만 명 중 4명.

상위 0.004%.

그건 이미 서울대 같은 게 문제가 아닌 비율이다.

“심지어 공부는 억지로 하는 허수가 포함돼 있지만, 연습생은 보통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잖아. 본격적으로 마음먹은 10만 명 중 4명이야. 우린 엄청난 확률을 뚫고 이 자리에 선 거야.”

기분 좋은 해석이었다.

진저가 경쟁자로 여겼던 이들은 KS 엔터의 연습생 수십 명이 고작이었다.

고작 그 정도의 경쟁률만 이겨내고 데뷔했는데, 이만한 보상을 받는 게 맞는가 고민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KS 엔터의 연습생이 된단 것 자체가 이미 엄청난 경쟁의 결과였다.

둘은 식사 자리를 정리한 후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 또 술잔을 나누었다. 오늘이 마지막이었다.

“그래서 어때? 여러 가지 놀이를 즐겨본 감상은.”

“즐거웠슴미다. 실외 수영장을 못 즐겨본 게 좀 한임미다.”

“여름에 다시 와.”

“다시 와주시는 검미까……?”

“내 마음이 내키면.”

살짝 취기가 오른 참이라 기분이 좋았었다.

그런데 그 답을 들은 진저는 살짝 풀이 죽었다.

“언니는 안 즐거웠슴미까?”

“난 질리는 게 빠른 편이야. 이미 해본 건 다시 하고 싶지 않아. 여긴 다시 안 와.”

진저가 시무룩해졌다.

그에 진소유는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다음은 캠핑이라도 갈까.”

진저가 금방 활기를 되찾았다.

“약속한 검미다!”

술자리는 느리게, 천천히 이어졌다.

둘은 한 그룹으로 묶인 이후 나누었던 대화보다 더 많은 대화를 오늘 이 자리에서 나누었다.

“왜 하필 호캉스입니까?”

“네가 못 해봤을 것, 안 가봤을 곳으로 오고 싶었어.”

“언니 역할이란 게 그런 겁니까? 동생이 안 해본 걸 하게 해주는 거?”

“맞아. 자유를 주는 거지.”

“자유?”

진소유는 오늘따라 술을 마시는 게 빨랐다. 진저는 그게 진소유가 느끼는 아쉬움의 양이길 바랐다.

그녀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자유롭지 않아. 공포에 갇혀 있거든. 그 공포를 깨고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게 용기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내가 아니었으면, 네가 혼자 여길 왔을까?”

“……아뇨.”

“백화점 명품매장은?”

“……안 갔을 겁니다.”

“룸서비스를 시켜봤을까? 그만큼 숙취를 느껴봤을까? 지금처럼 절제하면서 술 마시는 법을 배웠을까?”

진저는 진소유의 이야기가 이해 갔다.

“누가 못하게 막는 게 부자유가 아니야. 스스로의 공포가 부자유인 거야. 용기를 내서 깨부수면, 삶이 훨씬 즐거워.”

“어, 음, 가, 감사함미다.”

진저가 쑥스러운 투로 말했다. 진소유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건 왠지 모르게 창피한 일이었다.

“그래, 고마워해야지. 나 아니었으면 넌 휴일에 숙소에만 박혀 있었을 테니까. 여러 가지 해봐. 격투기를 배운다거나.”

“그게 뭡니까!”

“살면서 전혀 해보지 않을 법한 일은, 의외로 하면 재밌을 수도 있잖아.”

진저는 해맑게 웃었다.

“근데 해보고 싶은 게 있긴 있습니다.”

“뭔데?”

“사랑.”

진소유는 픽 웃었다.

“언니는 사랑해본 적 있습니까?”

“섹스해봤냐고?”

“아, 아니 그냥 사랑을 말하는 겁니다…….”

“짝사랑은 해봤어.”

“…….”

진저의 기색이 조심스러워졌다.

“언니는, 여자를…… 좋아합니까?”

“남자한테 가슴이 뛰어본 적은 없어.”

“서, 설, 호, 혹시 케이어스 멤버들한테도…….”

“그렇게나 자신이 있어? 자의식이 굉장한걸.”

진저는 장하양과 자신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비교해보았다.

그래, 뭐, 그렇겠네.

“너는? 사랑이야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잖아. DM으로 아이돌들한테 연락 안 와?”

“인스턴트 같아서 싫습니다. 나 말고 다른 애들한테도 그랬을 거 아닙니까.”

“연락처 물어보는 아이돌들도 많았지?”

“왠지 능숙해 보여서 싫습니다. 내가 아니라도 다른 애들이 산더미처럼 있을 거 아닙니까.”

“모쏠답네.”

“언니는 아닙니까?”

“난 나를 사랑해. 나도 나를 사랑하고. 영혼과 육체가 애인 사이지.”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이 안 나옵니다. 혼자 많이 하십쇼.”

“그럼 박 이사님은?”

진저는 취한 상태에서도 정신이 번쩍 들 지경이었다. 갑자기 진소유가 성필을 언급하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야?”

진저는 크리스탈 잔을 꽉 쥐었다. 그리고 뱃속에서 쥐어짜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사람은 말 안 하면 몰라. 마음을 전해야지.”

“제가 박 이사님을 좋아할 일 따위 없습니다! 나이도 많고, 또, 나이가 많습니다! 안 좋아합니다!”

“그래, 알겠어.”

진소유는 헤실헤실 웃으면서 술을 마셨다.

진저는 뚱하니 그녀를 바라보다가, 진소유처럼 취한 웃음을 보였다.

“그치만, 박 이사님이 간절히 부탁하면 못 이기는 척 데이트 한 번 정도는 해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까다로운 여자라 간단히 안 넘어갑니다.”

“만약 그런 일이 있고, 네가 박 이사님이 마음에 들면 말야. 마법의 단어를 가르쳐줄게. 이 한마디로 바로 넘어올 거야.”

“뭡니까?”

“‘나 오늘 가드 안 해요’…… 어때?”

“제가 들어본 말 중 천박한 말 베스트 파이브에 오를 말입니다.”

“베스트 1은 뭐야?”

“방금 베스트1로 올랐습니다. 축하합니다.”

“박 이사님의 매력이 뭐야?”

“매력…… 이랄 건 딱히 없습니다.”

“뭐야.”

“그냥, 박 이사님은 제 팬입니다. 팬의 마음을 알려줬습니다. 팬들이 저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저처럼 부족한 사람을…… 팬들이 사랑해준다는 게…….”

진저는 술을 마시려 잔을 입에 가져갔다. 하지만 마시지 않았다.

술의 단내가 거북했다.

팬들을 생각하자마자 그렇게 됐다.

“그걸 몰랐으면, 저는 지금보다 불행했을 겁니다. 소유 언니, 아십니까? 저희는 투사입니다.”

“투사? 싸우는 사람?”

“네.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행합니다. 그래서 저마다 좋아하는 걸 찾습니다. 그중엔 저를 선택해주신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분들을 대신해서 험난한 세상과 싸워 이기는 겁니다. 팬들을 위해서 저는 질 수 없습니다.”

진저는 미소를 지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이,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지켜주는 겁니다.”

진소유가 어릴 때 팝송을 좋아했던 것처럼.

그녀는 팝송을 들었기에 남들과 달랐고, 그 우월감을 마음의 갑옷으로 삼았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세상으로부터 자기를 지켜준다. 진소유는 그 말을 듣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세상 대부분은 쓰레기 같지만, 그중엔 보석이 있다. 그게 있기에 세상을 사랑하게 된다.

“저는 팬분들을 지키는 방패가 될 겁니다. 저를 좋아한 걸 후회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그걸 알려준 박성필 이사님한테 준다는 게, 기껏해야 ‘간절히 부탁하면 데이트 한 번’이야?”

“안 좋아한다고 했잖습니까! 자꾸 엮으면 화낼 겁니다!”

“그래. 그…… 메이.”

진소유는 손바닥으로 눈가를 비볐다.

“미안한데 나 침대까지 옮겨줄래? 좀 어지러워.”

“이게 ‘가드 안 하는 거’ 입니까?”

“아니, 나 진짜 피곤해서 그래. 미안해.”

“미, 미안할 거까진…….”

진저는 진소유를 침대까지 옮겨주었다. 진소유는 엎드린 채 거칠게 숨을 몇 번 들이쉬더니, 곧이어 잠에 빠져들었다.

진저는 침대의 가장자리에 앉아 술기운을 가라앉혔다. 그러곤 진소유를 돌아보았다.

‘언니, 고맙습니다.’

진저는 고작 이틀 만에 많은 것을 배웠다.

진소유는 10년 전쯤의 팝송을 좋아한다.

낭비가 심하다.

의외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본다.

자신이 무엇을 모른다거나, 무엇을 못 한다는 것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

쉴 때는 혼자 무대 의상이나 무대 구성을 노트에 그려보곤 한다.

모쏠이다.

‘그리고.’

호텔의 소비 용품은 어메니티라고 부른다.

술은 너무 많이 마시면 다음 날 죽도록 아프다.

숙취가 있을 때는 찬물을 마시면 안 된다.

백화점에는 등급제가 있다.

세상엔 60,000원짜리 빙수가 있다.

게임은 재밌다.

술은 천천히 마시면 기분 좋게 취한다.

‘또…….’

세상엔 춤 말고도 재밌는 게 산더미처럼 많다.

진소유의 말대로 두려움과 편견만 극복한다면 즐길 거리가 넘쳐날 것이다.

어제, 오늘만 해도 그러했다.

진저는 매 순간 새로운 것을 겪었으며, 새로움을 느낄 때마다 즐겁고 행복했다.

그녀는 춤과 노래를 연습하지 않을 땐 불안했다. 그래서 휴가를 받아놓고도 압박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지만 진소유와 지내는 동안은 압박감이 없었다. 정확하게는, 실시간으로 인생이 망가지는데 그게 재밌는 감각이었다.

안전장치가 풀린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했다.

‘고마워요 언니.’

진저는 씻으려고 하다가, 그냥 진소유의 옆에 누워 잠을 청했다. 곧 진저도 잠이 들었다.

잠시 후 진소유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진저가 누우느라 흔들린 매트릭스 때문에 잠시 깨어난 것이다.

진소유는 자는 진저의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진저는 과거의 자신과 닮았다.

삶부터 사고방식까지.

그러니 옛날의 자신처럼 사방이 막힌 가운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진소유는 그걸 스스로 깨달아야 했었다. 스스로 깨닫고 부수고 나와야만 했다.

그래서 불행했다.

‘너는 나보다 일찍 자유로워져야 해, 메이.’

진소유는 오늘이 그 시작이길 바랐다.

* * *

진소유는 숙취 속에서 눈을 떴다.

아침이다.

옆자리에 진저는 없었다.

거실로 나가니, 진저는 텔레비전 모니터로 소녀연맹의 퍼포먼스 비디오를 틀어놓곤 춤을 추고 있었다.

꽤 오래 추었는지 티셔츠에 땀이 흥건히 배어 있었다.

“메이.”

“일어났슴미까?”

진저는 춤을 멈추고 호흡을 골랐다.

“연습하는 거야?”

“그렇슴미다.”

“오늘까지는 쉬지.”

진저가 고개를 저었다.

“연습이 하고 싶었슴미다.”

“아침은?”

“시킴미까?”

“오늘은 조식을 먹자.”

둘은 함께 샤워했다.

씻은 후 호텔의 마지막 콘텐츠인 조식을 먹었다. 사실 조식 이후 카페테리아에서 디저트를 즐기는 코스가 남았지만, 그건 하지 않기로 했다.

음식을 먹던 중 진저가 말했다.

“언니, 고맙슴미다.”

“뭘. 앞으로 이런 일 없을 텐데.”

“쌀쌀맞슴미다.”

진소유는 웃는 듯 마는 듯했다.

“사흘 동안 재밌었슴미다. 즐거웠슴미다. 어쩌면 올해 중 가장 즐거웠을지도 모름미다.”

“다행이네. 근데 너무 노는 것만 좋아하면 안 돼. 연습도 해야지.”

“네, 열심히 할 검미다. 아니, 하고 싶은 검미다.”

진저는 포크를 내려두고 손을 허벅지 위에 가지런히 모았다. 그리고 진소유를 향해 활짝 웃었다.

“언니 덕분에 알게 됐어요. 게임도, 술도, 디저트를 즐기면서 담소를 나누는 것도 좋지만, 저는 역시 무대에 서는 게 가장 즐거워요. 그러니까 연습하고 싶어요. 팬들에게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요.”

진저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고마워요, 언니.”

진소유가 들고 있던 수저를 떨어뜨렸다.

“너 말을…… 아니, 짐작은 했는데…….”

직접 보니 어지간히 충격적인 게 아니다.

진저는 헤헤 웃으면서 볼을 긁적였다.

“당연하죠. 몇 년을 살고 공부했는데……. 아무튼,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진저가 진소유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진소유는 그 손을 맞잡았다.

“정상에 오를 때까지요.”

“우린 이미 정상이야.”

“아니요. 인정받기 전까진 아니에요.”

“인정?”

“네.”

* * *

진저는 비행기에서 내렸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그녀를 맞아주었다. 공항 청사로 들어가 입국 수속을 하는 동안, 어마어마한 함성이 그녀의 귀를 가득 메웠다.

홍콩의 공항은 케이팝 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오늘만 아이돌 수십 팀이 입국하니 당연한 일이다.

진저는 ‘케이어스’를 연호하는 팬들을 바라보면서 미소 지었다.

‘고맙습니다, 저를 사랑해주셔서.’

그리고 그 사랑에 반드시 보답해줄 것이다.

HPT 뮤직 어워드. 한국에서 가장 큰 대중음악 시상식에서, 케이어스는 마침내 정상에 오를 것이다.

‘여러분들이 있어서.’

행복할 수 있다.

‘저는 아이돌입니다.’

행복할 것이다.

영원토록 지워지지 않을 행복을 손에 넣고, 그 행복을 팬들의 가슴에 새겨줄 것이다.

그게 아이돌인 자신이 해야만 하는 일이다.

“에리카 언니.”

밖으로 나가며 진저가 말했다.

“인터뷰에서 했던 말 진심임미까?”

얼마 전, 에리카는 잡지 인터뷰에서 ‘대상이 목표다’라고 했었다.

아이돌이 그토록 겸손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당연히 화제가 되었다. 좋은 반응도 나쁜 반응도 있었다.

의외로 KS 엔터는 그런 에리카의 행동을 호의적으로 해석했다. 강동현과 1팀장이 주도한 아티스트십 계획은 진행중이었고, 앞으로도 이어질 거니까.

강한 자의식은 아티스트의 첫 번째 조건이다.

“응, 진심이야.”

“그렇슴미까.”

다행이다.

“한마음이라서 다행임미다.”

케이어스는 소녀연맹을 꺾는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하게 세상으로부터 우위를 인정받을 것이다.

그리고 대상을 받는다.

‘아니.’

그 상은 케이어스의 것이 아니다.

‘유스’들에게 주는 것이다.

‘저희들을 응원해주세요, 유스.’

* * *

성필은 홍콩 공항 청사를 나왔다. 그는 멤버들보다 늦게 홍콩에 도착했다.

택시를 잡고 목적지인 호텔로 향했다. 호텔 앞과 근처는 아이돌 팬들로 가득했다. 좋아하는 아이돌의 머리카락 끝이라도 보려는 팬들이었다.

성필이 택시에서 내리자 팬들은 실망하면서 다시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체크인한 후 목적지인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왤케 늦었어요.”

다섯 명의 멤버들은 커다란 테이블을 중심으로 둘러앉아 있었다.

조아라는 성필을 보자마자 타박을 주었다. 목소리에서부터 긴장이 느껴졌다.

“미안.”

성필은 빈자리에 앉고 그녀들의 면면을 확인했다. 벌써 3년 차의 막바지에 이른 만큼, 옛날처럼 큰 긴장은 없었…….

“긴장 많이 했네.”

긴장이 없긴커녕 긴장되어 죽으려고 한다.

특히 백설하와 조아라가 그러했다.

두 사람의 프로듀싱이 올해 소녀연맹의 성과를 결정하니 당연했다.

게다가 올해 최대 규모로 진행되는 시상식에 불려왔으니, 긴장을 안 하려야 안 할 수 없을 것이다.

“뭐…….”

성필은 새삼 그녀들에게 부담을 얹어주고 싶지 않…….

“당연하지.”

성필은 그녀들에게 부담감을 왕창 끼얹었다.

“이런 무대에 서게 될 텐데 긴장이 안 될 수 없지. 그게 맞아. 마음껏 긴장해. 죽도록 불안해해. 그만큼 정신을 바짝 가다듬고.”

성필이 백설하와 조아라를 한 번씩 보았다.

“이번 무대에서 최고가 아니면 죽는단 마음가짐으로 임해.”

HPT 뮤직 어워드.

한국 최대 규모의 대중음악 시상식.

세계의 케이팝 팬들이 지켜본다. 즉, 케이팝 시장 전체가 이 시상식에 주목하고 있다.

그 어느 마케팅보다 훨씬 효율적이고 파급력이 큰 무대이다. 일반 음악 방송 무대보다 10배, 100배 잘해야만 한다.

“합법적으로 다른 그룹 팬을 빼앗아 올 기회야.”

성필이 그리 말하자 멤버들이 가볍게 웃었다.

“우리가 왜 최고인지 보여주자. 우리가 왜 최고여야 하는지, 세계에 선포하는 거야. 그리고 증명하자.”

소녀연맹이 최고가 될 자격이 있다는 것을.

만약 소녀연맹이 제대로 된 상을 못 받는다면, 심사위원들이 그녀들에게 수상하지 않을 것을 땅 치고 후회하도록.

팬들이 ‘왜 저런 그룹에 지금 반했지?’라면서 아쉬움에 몸부림치도록.

세계가 ‘왜 소녀연맹이 대상이 아니지?’라고 의문을 가지도록.

그리고.

“너희를 이 자리까지 올려준 인민이들에게 자부심을 새겨주자. 너희의 팬이 된 게 최고의 선택 중 하나였단 걸, 이 자리에서 다시금 알려주자. 인민이들이 부끄럽지 않도록, 아쉬워하지 않도록, 슬퍼하지 않도록.”

성필이 손을 앞으로 뻗었다.

멤버들이 그 위에 손을 겹쳤다.

소녀연맹, 역대 최대성적.

세계의 케이팝 팬덤이 소녀연맹을 주목한다.

작년엔 본상(本賞)이었다.

올해는 본상 이상을 노린다.

“우리들의 연맹.”

성필이 말했다.

“소녀연맹.”

멤버들이 답했다.

HPT 뮤직 어워드, D―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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