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5화
요즘 진저가 이상하다.
아무런 움직임 없이 창문 밖을 바라본다거나, 소파에 가만히 누워 한숨만 푹푹 내쉬는 일이 잦았다.
“쟤 왜 저런대.”
김민주는 거실 한복판에서 ab슬라이드를 하며 에리카에게 물었다.
에리카는 소파에 앉아 ‘빛이 나는 솔로는 그만’ 재방송을 보고 있었다. 한창 집중한 참이지만, 김민주가 묻기에 진저를 흘끗 보았다.
진저는 식탁 자리에서 발코니 창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마지막 잎새’의 주인공처럼 말이다. ‘마지막 잎새’와 다른 건 창 너머로 서울의 회색 풍경밖에 보이지 않는단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생겼나 보지.”
“그렇게 생각해?”
“그럴 수도 있단 얘기야.”
“근데 왜 개지랄 안 함?”
에리카는 상스럽단 듯 김민주를 흘겼다.
“아니…….”
김민주는 ab슬라이드 한 세트를 마치자마자 복부를 부여잡으며 바닥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복근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몇 초간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너.”
기분 좋은 통증을 이겨낸 김민주는 땀을 닦으면서 이야기를 이었다.
“우리 그런 낌새만 보여도 가만 안 두잖아.”
“내가 언제.”
“언제는. 직성 풀릴 때까지 사람 쪼으면서.”
“우리 곧 연애 금지 끝나.”
김민주의 표현에 따르면, 에리카가 멤버들에게 ‘개지랄’한 건 어디까지나 계약 때문이었다.
3년이란 기한을 지키지 않고 일탈을 저지르는 멤버가 있으면 안 됐기에 ‘개지랄’한 것이다.
‘내가 그렇게 티를 냈었나.’
나름 부드러운 방법을 사용했다고 여겼었는데.
하긴, 김민주가 과장에 능숙하긴 하다. 별것 아닌 일에도 ‘개’라는 접두사를 붙이곤 하니.
일본어로 따지면 쿠소(똥) 정도의 단어일까. ‘쿠소우메(개맛있어)’ 같은…….
진짜 상스러워서 상종을 못 할 말투다.
“네 말대로라면 내가 ‘개지랄’할 이유가 없지.”
“넌 쟤 걱정되지도 않아?”
“누구나 자아의 무게를 홀로 견뎌내야 할 시기가 있는 거야. 우리 나이에 드문 일은 아니잖아.”
“자아의 무게를 견딘단 게 뭔데?”
“그건 내가 아니라 네가 생각할 일이지.”
“말을 말자.”
김민주는 직접 궁금증을 해결할 요량으로 진저에게 다가갔다.
“진저, 뭔 일 있어? 내가 들어줄까?”
진저는 멍한 눈으로 김민주를 보았다.
“아님미다. 그냥, 제가 곧 22살이 된단 게 안 믿겨져서 그럼미다.”
“……그래?”
얼마 전은 진저의 생일이었다. 그때 새삼 나이를 먹는단 것의 의미를 깨닫기라도 한 걸까.
22살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이상하긴 하다만, 못 이해할 정도는 아니…….
“몸도 옛날 같지 않슴미다. 점점 늙어가는 게 느껴짐미다. 저도 나중엔 소유 언니처럼 될 거라고 생각하니 슬픔미다.”
김민주는 에리카에게로 돌아와 말했다.
“쟤 제정신이 아니야.”
김민주는 에리카에게 말하면서도 거실 한구석에 엎어져 책을 읽는 진소유를 신경 썼다.
진소유는 진저가 한 이야기를 들었을 텐데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솔직히, 진저가 나이 이야기를 꺼냈을 때 김민주는 간담이 서늘했었다.
‘소유 쟤한텐 진짜 민감한 문제야.’
진소유는 내년에 27세다.
정말로 나이가 신경 쓰일 시기가 되어버린다.
진저와는 고뇌의 차원이 다를 것이다.
“제정신 아니니까 그냥 놔두자.”
김민주는 진저의 안위와 그룹의 평화를 위하여 그녀를 정신이상자로 몰아갔다.
다행히 진소유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 책만 읽었다.
* * *
“메이.”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진소유가 진저의 방으로 찾아왔다. 진저는 겨우 일어나 눈만 비비고 있건만, 진소유는 메이크업에 착장까지 끝내곤 문 앞에 서 있었다.
“너 오늘 내일 모레 시간 되지?”
“왜 그러심미까…….”
진저는 찌뿌둥한 몸을 깨우기 위해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고양이 자세로 허리를 자극하자니 점점 잠이 깨는 게 느껴진다.
“따로 약속은 없슴미다…….”
“나와.”
진저는 고양이 자세 그대로 굳었다. 진소유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왜 그러는 검미까.”
“놀러 가게.”
“어, 어딜 감미까. 저 아직 씻지도 않았슴미다.”
“거기 가서 씻으면 돼.”
“그러니까 어디…….”
“호텔.”
진저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아직 안 씻었다 - 거기 가서 씻으면 된다 - 어디 가냐 - 호텔에 간다.
나와 함께 호텔에 가서 씻어라.
진저의 머리카락이 삐쭉 솟아올랐다.
“싫슴미다! 안 됨미다! 도와줘어어엇!”
에리카의 방 문이 벌컥 열렸다. 그녀는 날 듯이 달려와 진소유의 곁에 서서 진저의 방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바퀴벌레라도 나왔어?”
“소유 언니가 저를 호텔에 끌고 가서 씻기려고 함미다!”
“…….”
에리카는 고민에 들어갔다.
연애 금지가 끝났는데, 그룹 내 연애는 허용되는 건가? 이런 사례가 있나?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에리카가 진소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소유야, 현실은 미국 드라마가 아니야. 주변인한테 가볍게 ‘콜?’해서 ‘콜’이란 답이 돌아오진 않아. 무엇보다 분위기가 하나도 안 잡혀 있잖아.”
“호캉스 가려는 거야.”
“호캉스?”
“메이가 요즘 계속 우울해했잖아.”
진저는 깜짝 놀랐다. 진소유가 자신을 먼지 한 톨만큼이라도 신경 쓰고 있을 줄 몰랐다.
“휴가받고도 이런 방 안에만 갇혀 있어서 그런 거야.”
“……소유 네가, 그러니까, 진저랑 호캉스를 간다고? 소유 네가? 왜?”
에리카는 진소유의 말을 믿지 못했다. 그녀가 이렇게나 동료를 생각하는 사람일 줄은 몰랐다.
아니, 그런 사람이 아니라서 의심부터 들었다.
진저의 의심이 맞을지도 모른다.
“왜냐고?”
진소유가 싸늘하게 답했다.
“아무도 쟤 언니 노릇을 안 하니까.”
“……뭐?”
“보다 못해 내가 나서는 거야, 왜?”
진소유는 화살을 겨누듯 한순간도 에리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안 하는 걸 넘어서, 아예 남이 하는 것도 막게?”
* * *
진소유의 BMW X3 시리즈 최신 모델이 서울의 도로를 막힘 없이 질주했다.
진저는 조수석에 앉아 기대감과 불안함이 뒤섞인 얼굴로 진소유의 기색을 살폈다.
차 안은 진저가 들어보지 못한 팝송들이 줄줄이 나오는 중이었다.
‘놀러 가는 거라고 했으면서…….’
전혀 놀러 가는 분위기가 아니다.
게다가 진소유의 말마따나 정말 씻지도 못하고 나와 얼굴과 몸이 찝찝했다.
진소유와 함께 있으면 분위기가 어색해지는 게 일상다반사이지만, 밀폐된 차 안에 함께 있으니 그 강도가 훨씬 강했다.
결국 진저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 음악 뭠미까?”
“아울 시티(Owl city).”
“곡 이름이 부엉이 도시임미까? 확실히 야경 같은 느낌이 있슴미다.”
“아니, 아티스트 이름이 아울 시티야. 곡명은 ‘굿 타임’이고. 나랑 같은 세대는 다 안다고 생각하는데, 몰라?”
모른다.
애초에 진저의 어린 시절은 문화와 단절되어 있었으니까.
“모름미다.”
“그래.”
또 침묵이 찾아왔다.
진소유는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어릴 때는 음악 스트리밍 플랫폼이 접근성이 떨어졌어. 폰으로 음악을 재생한단 건 상상도 못 했고.”
“폰이 없으면 뭘로 음악을 듣슴미까?”
“MP3.”
“MP3가 뭠미까?”
“넌 정말 문명과 단절된 삶을 살았구나.”
진소유가 픽 웃자 진저는 괜히 뿔이 나 톡 쏘아붙였다.
“언니가 나이 든 검미다.”
“그럴 수도.”
의외로 진소유는 나이 관련 주제를 가볍게 넘겼다.
“내 취미가 빌보드 차트 보는 거였어.”
“의외임미다.”
“확인하고, 괜찮다 싶은 건 전부 불법 다운로드해서 MP3에 넣었어.”
“불법……?”
“그땐 도둑질한다는 생각 자체가 없었어. 한국 자체가 저작권 개념이 희박했고. 디지털 야만 시대라고 해야 하나.”
“한국은 처음부터 이런 줄 알았슴미다. 그럼 언니는 그때부터 팝송을 좋아했던 검미까?”
“좋아한다기보다, 남들과 달라지는 방법 중 하나였지.”
“달라지는 법 말임미까?”
“그런 사람들 있잖아. ‘대중이 듣는 음악은 저급해’라고 말하는 사람들. 그러니까, 팝송은 내 자아를 두르는 갑옷 중 하나였던 거야.”
“요즘도 그렇게 생각함미까?”
“장난해?”
진소유가 드물게도, 아주 드물게도 밝게 웃었다.
“내 직업이 아이돌인데 그러겠어? 사람은 익숙함을 사랑하게 돼 있어. 계속 들으면 싫은 것도 좋아져.”
진소유가 웃으니, 진저도 웃었다.
“그럼 저한테 옛날처럼 ‘너도 꺼져 짱깨년아’라고 안 하는 건, 계속 보니 정이 들어서 그런 검미까?”
“익숙해진 거지 정이 든 건 아니야.”
“…….”
진저는 이대로 사고가 나서 자신만 무사하고 진소유는 어딘가 한 군데 부러지길 바랐다.
* * *
호텔 측에 발렛 파킹을 맡긴 둘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붉은색과 금색을 베이스로 한 거대한 1층 홀이 둘을 반겨주었다.
진저는 이렇게나 본격적인 호텔은 처음이어서 괜히 주눅 들었다.
이른 시각인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저긴 뭠미까?”
“호텔 용품을 팔아.”
“비누나 샴푸 말임미까?”
“……설마 하는데 너 어메니티(amenity)를 말하는 거야?”
“어메니티가 뭠미까?”
진소유는 눈을 가늘게 뜨곤 그냥 진저의 말을 무시했다. 진저는 그녀가 답 없이 먼저 걸어가도 뭐라 하지 못하고 따라가기만 해야 했다.
진소유가 데스크에 이름을 말하고 폰을 보여주니, 벨보이가 나타나 진소유의 짐을 들어주었다.
“안내하겠습니다.”
둘은 벨보이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탔다.
벨보이는 최상층을 뜻하는 가장 커다란 층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능숙한 손길로 품에서 카드를 꺼내어 층에 가져다 댔다.
“최상층은 센서에 카드를 인식시켜야 이동합니다.”
진저는 그것을 보고 문화 충격을 받…….
‘우리 숙소랑 비슷하네?’
충격을 받지 않았다.
최상층 투숙객은 체크인 자체를 최상층 데스크에서 했다. 진소유는 다시 몇 가지 절차를 거치고 방으로 안내받았다.
“그럼.”
벨보이는 방으로 들어가 몇 가지 사항을 설명해주곤,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예의 바른 태도로 인사한 후 떠나갔다.
진소유는 객실 카드를 문 옆의 센서에 가져갔다. 그러자 방이 밝아지면서 정면 창문 블라인드가 올라갔다.
진저가 살짝 놀랐다.
“와, 신기함미다.”
진저는 신발을 벗자마자 창문으로 다가가 풍경을 감상했다.
“…….”
실망스러웠다.
회색의 정글 숲밖에 안 보인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기대한 것보다 방이 작았다. 적어도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방은 아니었다.
가장 높은 방이라도 값이 싼 곳인 모양이다.
“여기 얼마임미까?”
“1박 300만 원.”
“이런 방이 말임미까?!”
“여기가 어때서?”
“저, 저희 숙소랑 비슷한 크기 같슴미다. 아니, 저희 숙소가 더 큰 거 같슴미다. 그런데 300만 원이라니…….”
진저가 생각하기에 엄청난 돈 낭비다.
“여기 몇 박으로 잡았슴미까?”
“2박 3일.”
“돈 많이 번다고 미친 검미까?! 저, 저는 한 푼도 안 낼 검미다!”
“원래 그럴 생각이었어. 돈 낭비처럼 느껴져?”
“낭비 수준이 아님미다!”
“이걸 보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진소유가 진저를 욕실로 안내했다.
두 명이 들어가도 괜찮을 크기의 욕조가 보였다.
진소유는 물을 조금 채우더니 욕조에 달린 버튼 중 하나를 눌렀다. 보글보글 거품이 나오며 욕조에 형형색색 조명이 밝혀졌다.
“어때?”
“뭘 ‘어때’임미까?! 이게 300만 원의 가치란 말임미까!”
“싫으면 나 혼자 쓸게.”
진저가 퍼뜩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지?”
진저는 황홀한 눈길로 욕조를 채운 거품을 바라보았다. 이런 건 해본 적 없다.
게다가 물이 욕조를 점점 채우니 조명과 시너지를 발휘하여 몽환적인 분위기까지 풍겼다.
“……저 씻어야 함미다. 그냥 씻는 김에 쓸 검미다.”
“그래.”
“언니는 이런 거에 익숙한 거 같슴미다. 저는 발렛 파킹이란 걸 생각해본 적도 없슴미다. 근데 언니는 엄청 자연스러웠슴미다…….”
솔직히 살짝 동경하게 되어버렸다.
“음.”
진소유는 검지로 턱을 두세 번 두드리더니 빙긋 웃었다.
“실은, 나도 이런 데는 처음이야. 발렛은 빼고.”
“네?”
“나도 여기 올라오는데 떨렸어. 처음이니까.”
“……뭠미까!”
진저가 억울하단 듯 진소유를 타박했다.
“저는 언니만 의지했는데 언니도 처음이었슴미까!”
“긴장한 거 티 안 내느라 고생 좀 했지.”
진소유를 타박하면서도, 진저는 밝게 웃었다.
* * *
“언니가 입욕제를 왜 쓰는가 했는데.”
진저는 샤워 가운의 매듭을 매면서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녀는 코에 팔을 가져가 피부의 향을 맡았다.
“그럴 만함미다. 저는 지금 장미 인간임미다. 몸에서 장미 향이 남미다.”
“장미 향은 싼 티가 나서 싫어.”
“맘대로 생각하시는 검미다. 저는 지금 자신감이 넘침미다. 풀메이크업 상태보다 더 자신감 있슴미다. 누가 갑자기 제 목덜미 냄새를 맡으려고 달려와도 당당히 목덜미를 내밀 수 있슴미다.”
“그러면 신고를 해야지.”
“스파 기능은 의외로 별거 없었슴미다. 아, 그리고 안에 비싼 화장품들이 많슴미다. 돈값을 함미다.”
“그거 다 가져가도 돼.”
“진짜임미까?!”
“300만 원에 포함된 거야.”
“그럼 이것도?!”
진저가 냉장고 안에 가득 찬 물과 음료를 가리켰다.
“그건 돈 내야 해.”
“이해가 안 됨미다. 자본주의는 어렵슴미다. 근데 언니는 왜 옷을 안 갈아입슴미까?”
“다 씻었으면 옷 입어. 나가게.”
“밥 먹는 검미까? 호텔 레스토랑에서?”
“아니, 백화점 갈 거야.”
“저, 저, 사주시는 검미까? 백화점에서? 언니는 최고임미다!”
“아니, 내 거 사러 가는 거야.”
“그럼 혼자 가지 왜 저를 데리고 가는 검미까. 그냥 혼자 가십쇼.”
* * *
따라왔다.
진저는 백화점에 쇼핑하러 오는 건 처음이었다.
진소유는 익숙한 걸음으로 엘리베이터에 올라 명품 매장이 들어선 층에 도착했다.
진소유는 한 유명 매장 앞으로 가 안내판의 코드를 찍었다. 그러자마자 직원이 진소유의 옆에 붙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도와드릴 게 있으실까요?”
“볼게요.”
직원은 진소유와 진저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진저는 불안하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보니, 모든 손님마다 직원이 한 명씩 붙어 있었다.
‘응?’
매장 입구에 또 손님이 왔다.
그런데 안 들어오고 기다리는 중이다.
‘……가게에 웨이팅이 있어?’
설마, 안내할 직원이 없어서 기다리게 하는 건가? 이 무슨…….
“이거.”
진소유는 갑자기 멈춰선 어느 지갑을 가리켰다.
“이거.”
그리고 또 어느 가방을 가리켰다.
“이거.”
그리고 또다시 어느 벨트를 가리켰다.
“이거, 이거, 이거, 이거, 이거, 이거, 이거요.”
“아,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직원이 다른 곳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진저는 충격받아서 조용하게 외쳤다.
“가격도 안 보고 정하는 검미까? 진짜 미친 검미까?! 얼마 나올 줄 알고 이러는 검미까! 제대로 보지도 않았잖슴미까!”
“돈 쓰러 온 거야.”
“뭐, 뭘 사러 온 게 아니라?”
“응. 돈을 쓰러 온 거야.”
“…….”
미친 게 확실했다.
진소유는 쇼핑백을 든 채 위풍당당한 걸음걸이로 매장을 나왔다.
그녀의 뒤론 모든 매장 직원이 도열한 채 ‘감사합니다 고객님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해서 죽을 지경입니다!’라는 태도로 허리를 깊숙이 숙인 채였다.
진저는 얼이 빠졌다.
직원들은 진소유가 구국의 영웅이라도 된 것처럼 응접했다. 돈을 그만큼 썼으니 저들 입장에선 구국의 영웅이긴 할 것이다.
“너도 구경 좀 할래? 사고 싶은 건 없어?”
진저는 위축되어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옷소매를 만지작거리면서 답했다.
“없슴미다.”
진저는 정산금 대부분은 본국으로, 부모님에게로 보낸다. 딱히 한국에서 쓸 돈이 없으니 그렇게 해도 괜찮았다.
아무튼 그녀는 진소유처럼 미친 짓을 할 여윳돈은 없었다.
“자.”
진소유가 진저에게 쇼핑백 여러 개를 한 번에 넘겼다.
진저의 눈빛이 차게 식었다.
“짐꾼이 필요했던 검미까…….”
“너 가져.”
“내일 죽기라도 함미까?! 언니 이상함미다! 그, 그리고 이렇게 비싼 건 못 받슴미다!”
“네가 안 가지면 뿌릴 거야. 필요 없으니까.”
“언니 진짜 돌아버렸슴미까?”
“너도 필요 없으면 선물로 뿌려. 박 이사님이라던가.”
진저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쇼핑백을 열어 뭐가 들었는지 확인했다.
브랜드 특유의 모노그램 무늬 상자가 들어 있었다. 그냥 보면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다.
“목말라, 카페 가자.”
진저는 더 이상 진소유에게 ‘미친 검미까?’라고 하지 않았다.
* * *
“언니.”
백화점 내의 어느 카페로 들어가려던 순간, 진저가 진소유의 옷깃을 잡아 멈춰 세웠다.
“여기 입장 제한이 있는 곳 같슴미다.”
카페 앞의 안내판엔 백화점 등급 규정이 적혀 있었다. 다이아몬드 이상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데, 다이아몬드는 연간 6,000만 원 이상 구매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그게 왜.”
진소유가 아무것도 아니란 듯 안내판의 코드를 폰으로 찍은 후 카페로 들어갔다.
“…….”
진저는 이젠 뭐라 하는 것도 지쳐서 조용히 그녀를 따라 들어갔다.
인테리어를 제외하곤 보통 카페였다. 디저트가 3층짜리 디저트 테이블에 담겨 나온다거나, 컵이 진짜 크리스탈이란 것을 또 제외하곤 말이다.
진저는 오렌지 주스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너무 놀라기만 해서 그런지 입 안이 바싹 말랐다.
“돈을 쓰면 기분이 좋슴미까?”
“어느 정도는.”
“쓰지도 않을 걸 사는 건 정상이 아님미다. 언니가 준 선물은 고맙게 받겠지만, 좋은 습관은 아닌 거 같슴미다.”
“습관이 아니야. 목표가 있어.”
무슨 목표.
백화점 다이아몬드 등급 되기?
다이아몬드 이상 등급도 있던데, 그걸 노리는 건가?
“이 브랜드.”
진소유가 쇼핑백을 가리켰다.
“지속적으로 일정 금액 이상을 소비해야 구매할 수 있는 상품이 있어.”
“정말 자본주의는 상상을 초월함미다. 그냥 비싸게 파는 게 아니라 돈을 더 써야 살 수 있는 상품이 있단 검미까?”
궁금하긴 하다.
“그게 뭠미까?”
“악어가죽 가방이야.”
“가방을 무더기로 사놓고 또 사고 싶은 게 가방임미까?”
“아름다워.”
진소유는 폰으로 가방의 이미지를 찾아 보여주었다. 주황색 손가방인데, 아담하니 귀엽긴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 가방은 보통 가방이 아니야.”
“불쌍한 악어를 잡아다 만든 거니까 보통 가방은 아니지 않겠슴미까.”
“장인이 만들어. 수십 년간 교육받고 수습, 조수 과정을 거친 장인이 손으로 직접.”
“그건 명품이 다 그렇지 않슴미까?”
“그리고 그 가방을 만드는 데 사용된 악어가죽은 회사에서 영원히 보관해. 언젠가 가방이 닳아서 내가 수선을 맡길 수도 있으니까. 가죽을 창고에 걸어두고 내 이름을 적어두는 거야.”
“그건 좀 대단하긴 함미다…….”
“그리고 만들었던 장인에게 직접 보내서 수선해. 반드시.”
거기까지 가니 진저는 반박하지도 못했다.
가치가 있는 가방이 확실했다.
“수백 수천 개를 만들고 싶어도 만들 수 없는 가방이야. 장인의 수는 한정적이니까. 장인이 되려고 노력하다가 도중에 포기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야. 재능을 타고난 이들 가운데서도 집념과 노력을 겸비한 사람만이 만들 수 있는 가방. 그런 가방이야. 사고 싶대도, 조건이 되어도, 바로 살 순 없어. 재고가 생길 때까지 언제까지고 기다려야 하니까.”
“그런데.”
가방의 가치는 인정하겠지만, 진저는 의문이 들었다.
“그게 아름다움과 상관이 있슴미까? 그냥 눈에 예쁜 게 아니라, 만들어지는 과정까지 고려한 가치 아님미까. 언니는 아름다운 걸 좋아하는 거 아님미까?”
“아름다움엔 당연히 노력이 포함되는 거야.”
“무슨 뜻인지 모르겠슴미다.”
“아름다움은 누군가의 시간과 노력, 재능을 쏟아부어야 만들어지는 가치니까. 강함…… 과 비슷하다고 하면 알아듣겠어?”
격투기 선수를 예로 들자면, 격투기 선수 또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 강해진다. 그리고 모든 이들에게 강함을 보여 인정받고 증명받는다.
아름다움도 같다.
“아름다움, 지혜, 힘, 권력, 체제, 전부 같은 맥락의 가치를 지녀. 시간과 노력, 재능을 지닌 이들이 만들어낸 거야. 그런 의미에서 난 아름다움을 사랑해.”
진소유의 눈동자가 살짝 흐려졌다. 눈앞의 진저가 아니라 상상 속의 누군가를 보듯이.
“그리고 아름다움이란 다른 가치들과 마찬가지로 손에 넣기 어렵지. 그래서 가지고 싶어.”
“언니는 이미 아름답잖슴미까. 그런데도 다른 아름다운 게 필요함미까? 발가벗고 다녀도 명품 둘둘 두른 사람 따위 그냥 압도할 검미다.”
“인간이니까.”
진소유는 과자에 입도 대지 않았다.
칼로리가 거의 없다시피 한 커피만 몇 모금 마셨을 뿐이다.
“필요(必要)하지 않은 것도 바라지. 설령 이미 가졌더래도, 더 많이 바라.”
진저는 이해가 가면서도 이해되지 않았다.
그냥 진소유의 취미 중 하나라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가자, 아직 할 게 많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