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한는 프로듀서-548화 (548/760)

548화

어둑한 보라색의 조명 아래로 사람들이 춤을…….

‘4시다.’

케빈은 손목시계를 보면서 양손을 꼭 모았다. 오늘도 일을 무사히 끝난 것을 감사하며 신에게 찬양을 바쳤다.

4시가 지난 클럽의 풍경은 당장 몇 시간 전과 비교하면 천양지차였다. 활기찼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분위기는 술에 젖어 눅눅했다.

이전 타임보다는 확연히 활기가 떨어졌지만, 그래도 춤추고 싶은 사람들은 있다.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케빈.”

교대 DJ가 부스 쪽으로 올라왔다.

케빈은 그를 보자마자 반갑게 웃으면서 개인 물품을 챙겼다.

“잘 부탁해.”

“그래, 수고했어.”

교대로 부스로 들어온 DJ는 힘이 없어 보였다. 클럽이 가장 핫한 타임을 지나 DJ석에 서 봤자 재미고 뭐고 있을 리 없다.

케빈은 자리를 빠져나가면서 그의 어깨를 몇 번 두드렸다.

“너도 열심히 하면 헤드라이너로 설 수 있어.”

“고맙네 참.”

케빈은 직원실로 들어와 라커에서 물건을 빼냈다. 그때 클럽 매니저가 방으로 들어왔다.

“야, 케빈. 이제 끝났어?”

“응.”

“얘기 들었어. 메이저 레이블이랑 계약했다면서? 이제 우리 클럽 안 와?”

“가끔 올게.”

케빈이 라커 문을 부드럽게 닫으면서 의기양양한 미소를 보였다.

“공연하러!”

“자식, 어깨가 하늘까지 뚫겠다. 그래, 그럼 코첼라나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에서 볼 수 있나?”

“내 에이전트 역량이지.”

“허름한 무대로 배정받아도 보러 갈게. 같은 타임에 내가 좋아하는 싱어가 없으면.”

“안 오겠단 뜻이잖아!”

케빈은 실실 웃으면서 매니저와 악수했다.

오늘, 케빈은 이 클럽의 메인 DJ 자리를 내려놓는다. 매니저의 말마따나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하여 메이저 씬에서 활동하기 때문이다.

물론 계약한다고 바로 활동하는 것도 아니고, 돈을 곧장 쓸어 담는 것도 아니니 일 자체는 계속할 수 있다.

단지 케빈은 음악 활동에 집중하고 싶었다.

“근데.”

매니저는 케빈의 배럴 백을 보곤 쓴웃음을 머금었다. 케빈의 배럴 백엔 액세서리가 몇 개 붙어 있었는데, 그 모양새가 케빈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메이저 아티스트가 돼도 계속 그거 붙이고 있을 거야?”

“그거?”

케빈이 자신의 가방을 보았다. 열쇠고리나 배지가 가방끈에 줄줄이 달려 있었다.

“아, 이거?”

“그거 그거지? 케이팝 아이돌 머천다이즈.”

“힙하지 않아?”

“힙하다면 엄청 힙하지. 안 좋은 느낌으로.”

케빈은 30줄에 들어선 남자다.

사람 좋아 보이는 순한 눈망울을 지니고 있지만, 곱슬거리는 노란 머리와 수염은 남성미를 뿜어낸다.

그리고 그 남성미 넘치는 남자의 가방에 케이팝 아이돌 굿즈가 걸려 있다.

“너도 좀 힙해지는 거 어때? 이름 알려줄 테니까 뮤비나 음악 보고 들어봐. 그거 알아? 케이팝은 기본적으로 EDM 기반이라…….”

“됐어. 걔들 너무 어리잖아.”

“다 성인이야.”

“어리게 보인다고. 내가 그런 애들 좋아해 봐.”

매니저가 불룩한 자신의 배를 통통 두드렸다.

“바로 소아성애자 딱지 붙겠지. 그리고 난 아시안한텐 관심 없어.”

“안타깝네. 우리의 관계가 지속적으로 이어질 고리가 없다니. 그럼, 안녕.”

케빈은 가볍게 대기실을 떠났다.

매니저는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면서 어처구니없단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상한 새끼.”

미국 사람들은 대부분 케이팝이란 것을 안다. 알 수밖에 없는 게, WTP란 그룹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등장한 그 이방인들은 미국에 신기한 가십거리를 제공한다.

사람들은 케이팝을 알지만, 그건 듣는 것과 다르다.

그냥 ‘그런 게 있다더라’ 수준에서 멈춘다.

게다가 WTP에 대한 인식도 ‘대단해서 대단한, 유명해서 유명한 그룹’이다. 관심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그들이 정확히 어떤 이들인지 모른다.

어린애들이 목매는 보이밴드래.

그리고 그 보이밴드가 케이팝이란 걸 한다더라.

딱 그 정도.

WTP를 좋아한다고 하더라도 ‘너 신기하네’란 말을 들을 텐데, 케빈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누굴 좋아한댔더라.”

매니저는 ‘소녀, 소녀……’란 말을 되뇌다가 그냥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자신과는 영원히 관련이 없을 이름이기에.

* * *

케빈은 계약한 레이블 근처 카페테리아에서 담당 매니저와 만남을 가졌다.

그의 매니저는 30대 여성이었다. 그녀는 금발을 손으로 쓸며, 오랫동안 비즈니스 업계에 몸담았단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무적인 태도로 자리에 앉았다.

“케빈, 일찍 왔네요? 저도 약속보다 빨리 오는 편인데 더 빠르다뇨. 역시 기대되죠?”

“사실 일 마치고 여기서 계속 시간 때웠어요.”

매니저는 케빈의 앞을 보았다.

커피잔이 하나 놓여 있었다. 아마 몇 번이나 리필받았을 것이다.

매니저가 씩 웃었다.

“아침 드실래요?”

“아, 좋죠.”

매니저는 커피를, 케빈은 간단한 브렉퍼스트를 먹었다. 매니저는 시간을 아낄 요량으로 그가 밥을 먹는 동안 일 이야기를 했다.

“레이블이 케빈 씨에게 음반 제작비로 제공할 수 있는 금액은 5만 달러예요.”

“많네요.”

“케빈 씨의 능력을 보자면, 저는 짠 편이라고 생각하지만요.”

“정식 음반 작업에 그렇게 큰돈이 드나요?”

“홍보비는요? 팀원에게 줄 돈은? 뮤직비디오는?”

“아하.”

케빈은 곧바로 이해했다.

미국은 한국과 같은 거대 기획사 시스템이 없다. 만약 한국의 기획사가 미국에 등장한다면, 당장 반독점법 위반으로 갈가리 해체당할 것이다.

연습생 아동학대 논란은 덤이다.

어쨌든 미국의 뮤직 비즈니스 업계는 세 개의 축으로 작동한다.

아티스트를 관리하는 매니지먼트.

아티스트의 음악을 발매하는 레이블.

아티스트에게 일을 가져다주는 에이전시.

한국에선 하나의 회사에서 모두 담당하는 일을, 미국은 여러 갈래로 찢어놓는다.

현재 케빈이 마주한 매니저는 매니지먼트 쪽 인물이었다.

“이 계약금은 레이블에서 케빈 씨에게 주는 시험이에요. 일단 그럴듯한 결과물을 만들어보라는 거죠. 레이블이 제공하는 홍보는 상식선을 밑돌 거예요.”

“정말 시험이네요.”

케빈은 프라이를 집어 먹느라 손에 묻은 소금을 티슈로 닦아냈다. 그에겐 부담감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케빈 씨, 기한은 3개월이에요. 그 안에 만들어주세요. 그게 케빈 씨의 에이전트가 제시한 기준이에요.”

“페스티벌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음반을 만들란 소리네요.”

“그렇죠. 하실 수 있으시죠? 곤란한 게 있으시다면 저에게 말씀해주세요. 모든 힘을 다해서 도울게요. 저를 믿으셔야 해요.”

“당연히 믿죠.”

케빈이 밝게 웃었다.

“제 수익에서 20%를 가져가시니 당연히 제가 성공하길 비시겠죠. 그리고 또, 에이전트가 20%였나요? 레이블이랑도 수익을 분할하니까, 아, 저한텐 정말 조금밖에 안 떨어지네요.”

“다음 재계약을 노려요. 케빈 씨가 안정적으로 성공하면 저는 딱 10%만 받을게요.”

“올리비아, 그거 말해주면 안 돼요?”

“어떤 거요?”

“저 말고 아티스트를 몇 명이나 담당하고 있나요?”

매니저 올리비아는 미소만 지었다.

“제가 몇 명을 맡는진 상관없어요. 저는 모든 담당 아티스트에게 성심성의껏 대하니까요.”

“믿음이 가네요.”

“질투하진 마요. 저는 케빈 씨의 가능성을 봐서 계약한 거니까요. 믿고 있어요. 그리고 혹시 알아요? 나중엔 케빈 씨가 제 첫 번째가 될지.”

올리비아는 매혹적인 여성이었다. 그녀가 암시를 주는 것만으로도 그녀와 마주한 남자들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펼치는 건 그녀가 단련한 비즈니스 기술 중 하나였다.

‘그래, 열심히 해.’

아티스트의 성공은 곧 매니저의 성공.

그건 미국에서 문자 그대로의 의미다.

올리비아는 케빈의 수익에서 20%를 받는다. 물론 회사와 나누니 전부 받진 못하지만, 케빈이 톱에 오르면 올리비아의 수익도 덩달아 상승한다.

‘열심히 해서 나를 성공시켜.’

올리비아는 마치 유혹하는 듯 고혹적인 미소를 케빈에게 던졌다. 그에게 동기를 유발하기 위해.

그때 케빈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그는 재빨리 폰을 집어 들었다.

‘뭐야.’

올리비아는 그것을 보고 생각했다.

‘여자친구인가?’

케빈의 표정이 극도의 설렘과 행복으로 물드는 것을 보니, 만난 지 얼마 안 된 듯했다.

그럼 올리비아의 기술도 색이 바랠 수밖에 없…….

“제가 좋아하는 그룹이 컴백한대요. 티저가 올라왔어요.”

“그룹?”

최근 미국에선 듣기 어려운 단어다.

여럿이서 활동하는 뮤지션이라면 ‘밴드’란 단어를 쓸 것이다. 그룹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있나?

“보실래요? 아니다, 여기 일단 얼굴부터.”

케빈은 가방에서 색색의 열쇠고리를 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것을 보자 올리비아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소녀 같은 얼굴의 동양인 여자들이 열쇠고리마다 프린트되어 있었다.

뮤직 비즈니스 업계에서 일하는 올리비아는 보자마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케이팝 아이돌?”

굉장히 딥한 취향이다.

올리비아는 당혹을 숨기지 못했다. 케빈의 취향으로 봐서, 그녀가 은밀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게 전혀 먹히지 않을 듯했다.

“예쁘죠?”

“아, 네, 예쁘네요……. 케빈 씨가 케이팝을 좋아하실 줄은 몰랐어요.”

올리비아가 생각하는 케이팝의 이미지는 이러했다. 소녀들이 좋아하는 것 말이다.

미국엔 10대 소녀들이 덕질할 만한 남자 뮤지션들이 얼마 없다. 메이저에서 유명한 이들이라면 양손으로 꼽을 정도일까.

그 틈새시장을 비집고 들어온 게 WTP라고 생각했다. 올리비아도 WTP를 보았을 때 과거 좋아했던 보이밴드의 향수를 느꼈으니, 요즘 애들은 어떻겠는가.

‘그런데 이렇게 다 큰 남자가…….’

케이팝을 저토록 진심으로 좋아할 줄은 몰랐다.

자기보다 20살은 어릴 법한 애들을…….

‘옐로우 페티시(동양인을 좋아하는 성벽)인가?’

미국에서 이성에게 어필하는 스타들은 모두 섹시어필을 기본으로 깔고 있다.

그러니 올리비아도 케빈이 아이돌의 섹슈얼리티에 끌렸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옛날에 직접 만난 적이 있어요.”

“한국에 갔던 적이 있나요?”

“아뇨, 미국에서요. ‘아라’가.”

케빈이 조아라가 프린트된 열쇠고리를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춤을 배우러 미국에 왔었거든요. 제가 통역이었어요. 그때 춤추는 걸 봤었어요.”

“춤이요…….”

“같이 보실래요? 티저 영상이에요. 20초밖에 안 돼요. 그리고 혹시 알아요? 나중에 올리비아가 이 그룹을 매니지할지도?”

“제가 말인가요?”

올리비아는 픽 웃었다. 케빈은 마주 웃으면서 폰을 테이블의 중앙에 두었다.

곧 영상이 재생됐다.

“현실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어요. 작년에 이 그룹이 미국에서 투어했거든요. 네 개 도시 1만 명의 관객을 모았어요.”

“그건 놀랍…….”

올리비아가 귀를 쫑긋 세웠다.

그녀는 뮤직 비즈니스 업계에서 오래 일해왔다. 뮤직 비즈니스로 학위까지 땄다.

즉, 음악에 조예가 깊다.

티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엔 가사가 없었다. 티저 영상이니 보컬을 제외한 것이겠지.

올리비아는 그 음악에 집중했다.

‘본격적인 일렉트로닉이야.’

음악 다음은 비주얼이었다.

거의 초 단위로 바뀌는 장면 전환. 소품이나 배경은 색색이 덧입혀져 아름다웠다.

이윽고 멤버들의 모습이 비친다.

흑일색(黑一色)의 옷을 입은 그녀들은, 열쇠고리에 비친 것만큼 어려 보이지 않았다.

특히 중앙에 선 여자는 한눈에 보아도 섹슈얼리티가 넘쳤다. 가슴이 크다.

티저 영상은 10초를 남았다.

그리고 그녀들이 춤추기 시작했다.

보기만 해도 숨이 차오르는 격한 춤을.

그녀들이 밟은 바닥에서 물방울이 튀고, 때로는 흰 연기가 흩날리고, 총천연색 가루가 스텝 한 번에 사방으로 날아올랐다.

티저는 단 10초의 춤만으로 올리비아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화면에 메인 타이틀이 떠오른다.

[Automata]

방금의 티저 20초는 올리비아의 머리를 충격으로 물들였다. 어릴 때 MTV 채널에서 보이밴드의 댄스 퍼포먼스를 처음 보았을 적 같다.

잘생긴 오빠들이 춤추고 노래한다.

그러니 신기하다.

물론 이건 정반대의 상황이다.

예쁜 동생들이 춤추고 노래한다. 10대 입장에선 예쁜 언니들이겠지.

“어때요?”

케빈이 물었다.

올리비아는 진지한 눈빛이 되었다.

“이 그룹 이름이 뭐라고요?”

“소녀연맹이요. 포토 카드 드릴까요?”

올리비아는 포토 카드를 받았다. 그것을 보자마자 가능성을 느꼈다.

‘이건 돈이 된다.’

“케빈, 미국에 케이팝 팬이 몇 명이나 있을까요?”

“네? 글쎄요, 생각해본 적 없어서. 몇백만…… 명이라고 하면 너무 많을까요? 아님 보수적으로 잡은 건가?”

“그래요, 몇백만…….”

미국인의 1%라고 해도 300만 명이다. 보수적으로 생각한다면 한 학교에 5명, 많이 잡으면 20명 정도가 케이팝을 소비하는 거겠지. 확실히 적은 숫자긴 하다. 그렇지만, 그건 상대적으로 적단 뜻이다.

미국에서 케이팝은 마이너 문화다. 하지만 케빈의 말을 들어보니 나름 팬덤이 잡힌 듯했다.

‘굳이 미국인 전부에게 소개할 필요는 없어.’

미국의 케이팝 팬덤에게만 유명해지면 된다.

‘미국 밖에만 있어도 팬덤이 만들어지는데, 아예 미국에서 활동하면 어떨까?’

미국에 존재하는 케이팝 팬들, 그중 수십만 명만 사로잡아도…….

‘정말 돈이 돼.’

올리비아는 조아라의 포토 카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뻣뻣한 용지에 인쇄된 사진.

‘이런 걸 사는 팬덤이잖아!’

“언젠가 콜라보했으면 좋겠어요. 할 수 있을까요? 이번 앨범으로 뜨면 가능하겠죠?”

저기 저기 봐라, 케빈의 표정을.

방의 벽에 ‘백스트리트 보이즈’ 포스터를 붙여두던 올리비아의 언니와 판박이다.

물론, 케빈 같은 남자가 또 있겠냐마는.

* * *

직장인 유용태, 대리가 되다!

그 말은?

‘시발.’

유용태는 밤 9시의 지하철에 몸을 싣고 집으로 향했다. 회사에서 직급이 올라갔단 건 일을 많이 한단 뜻이다. 일을 많이 하라고 직급을 올려주는 거니까.

지하철엔 그와 비슷한 죽은 눈의 직장인들이 자주 보였다.

‘그나마 다행이다.’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서 타면, 젊음을 즐기느라 몸을 좌우로 뒤흔드는 애들 사이에 껴서 가야 했을 테니까.

유용태는 요즘 술 냄새만 맡아도 토가 나올 것 같았다. 일을 많이 해서일까, 아니면 늙어서 술 냄새도 몸에 안 받게 된 것일까.

그는 환승역에서 내려 터덜터덜 다음 지하철을 타러 향했다. 그때 그의 머리가 퍼뜩 깨어났다.

‘아, 맞다.’

유용태는 발걸음을 돌렸다.

그가 도착한 곳은 벽에 디지털 전광판이 가득 채워져 있는 통행로였다.

유용태는 하나씩 유심히 살피다가 원하던 것을 찾았다. 한 전광판에 신아름의 ‘오토마타’ 개인 티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제대로 걸렸네.’

이 전광판은 인민이들이 총대를 구해서 진행하는 홍보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유용태도 약소하게나마 프로젝트에 자금을 제공했다.

특히, 이 전광판이란 물건은 유용태에게도 특별한 의미를 지녔다.

‘내가 이거 덕분에 입덕하게 됐으니.’

소녀연맹 데뷔 전, 전광판에 걸린 신아름의 얼굴을 보고 입덕하게 됐다. 그때 제일 처음 든 생각이 ‘진짜 어른 말 안 듣게 생겼다’였었나.

유용태가 큭큭 웃었다.

‘아름이는 지금도 그렇네.’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사선을 내려다보는 그녀는, ‘말 안 듣는다’ 수준을 넘어서 상대를 복종시키려는 듯 강렬한 눈빛이었다.

유용태는 그것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하아.”

만족스러운 한숨을 흘린 그는 다시 지하철을 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을 보면 기운이 생긴다. 유용태에겐 아이돌이 그런 사람이었다.

자기보다 어린 아이들이 매일 땀을 흘려가며 연습하고, 무대에서 보답받는 모습은 볼 때마다 기분이 좋다.

저 아이들도 저렇게나 열심히 하는데, 나도 조금 더 노력해보자. 그런 마음이 들게 한다.

이 마음은 특히 유용태에게 각별했다.

‘소련이들도 이제 많이 컸어.’

그 성공엔 유용태가 작게나마 일조했다.

아무렴, 소녀연맹의 시작부터 팬이었으니.

지하철에 탄 유용태는 운 좋게 자리를 구했다. 곧바로 폰을 꺼내어 소녀연맹에 관한 정보를 서치했다.

[제목: 소녀연맹 컴백 티저 보니까 심장 떨린다]

이건 추천.

[제목: 소녀연맹 이번엔 칼 제대로 갈아서 나와야지]

[아니면 케이어스한테 바로 먹힐 듯. 케이어스 역대급 타이틀인데 이번엔 적당한 걸로 컴백하면 라이벌 기믹으로 비비지도 못한다. 근데 글로브는 건들기도 전에 목 따 버렸으니 라이벌 하나 보내고 시작하긴 했네.]

[댓글

이간질 개못하넼ㅋㅋㅋㅋㅋㅋ]

이건…… 애매하니까 가만히 두고.

[제목: 소녀연맹 티저 보니까 불안함]

[가로 엔터가 ‘우리들의 프로듀싱’으로 멤버들 방패막이로 쓴단 건 당연하고. 애플 크러쉬는 좋게 됐는데 오토마타는 잘 모르겠음. 이번에 조지면 아라 욕먹을 텐데 불안해…….]

이건 비추천.

그리고.

[댓글]

[방패막이는 ㅈㄹ하네. ‘우리들의 프로듀싱’ 영상 보기는 했음? 멤버들 직접 프로듀싱하는 건데 억까 오지네]

댓글까지 달아줘야 한다.

딱 봐도 인민이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다른 팬덤이 쓴 것이다.

불안하다, 어떤 멤버가 걱정된다, 이렇게 하는 게 맞을까, 이따위 글은 걱정을 가장한 팬덤 분열 술책이다.

이런 건 가만히 두면 안 된다. 여론을 모아서 못 기어 나오게 해야 한다.

그렇지만 이 글에서 공감 가는 건 하나 있었다.

‘실패하면 아라가 욕먹는단 거…….’

인민이들은 조아라를 옹호할 것이다. 어떤 결과물이 나와도 ‘이게 아라가 하고 싶던 거였구나’라면서 흐린 눈으로 보아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돌판의 다른 서식자들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탑티어 걸그룹이 역대급 기록을 세워도 욕하는 인간들인데, 조아라의 프로듀싱이 망한다?

상상만 해도 두렵다.

‘티저 보니까 곡은 잘 뽑힌 느낌이긴 한데.’

유용태는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1’ 마지막 영상을 기억한다.

백설하의 솔로 인터뷰였었다. 백설하는 처음에 후련한 듯 말하다가 기어코 눈물을 흘렸었다.

정말 걱정했다고.

실패하면 어떻게 될까 고민하며 한숨도 못 잤었다고. 멤버들에게, 회사에, 인민이들에게 너무 미안했을 거라고.

유용태는 그걸 보면서 안타까움을 느꼈었다.

‘아마 아라도 그렇겠지.’

“…….”

유용태는 멍하니 있다가, 아까 이간질하던 글에 댓글을 더 적었다.

[애들 노력한 걸 왜 깎아내리는지 모르겠네]

정보에 의하면, 조아라는 커뮤니티나 SNS를 자주 본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글을 볼 가능성이 없진 않다.

그때를 대비해서 유용태는 비추천과 추천을 오가면서 게시판을 정화하려 노력했다. 그리고 그런 일을 하는 건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많은 인민이들이 게시판을 헤엄치면서 소녀연맹을 응원했다.

* * *

“저기요.”

이선주는 직원을 불렀다. 곧 직원이 그녀의 앞으로 왔다.

“이거 재고 있나요?”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직원이 화장품 재고를 찾으려 가판대 아래의 서랍을 열어보았다. 없었다. 직원은 2층에 갔다 오겠다며 기다려달라고 했다.

이선주는 제자리에 서서 수많은 종류의 화장품이 놓인 매대를 보았다. 각 화장품 브랜드마다 작게 홍보 모델의 사진이 인쇄되어 있었다.

그중 소녀연맹도 있었다.

이제 보니 세로 한 줄이 전부 소녀연맹이었다. 비록 줄이 세 칸밖에 없어 멤버 전원은 들어오지 못했지만.

‘하양이랑 설하랑 리카네.’

어른스러운 느낌의 세 명이 뽑혔다.

특히 장하양이 대박이다. 제대로 배우 메이크업을 받고 찍은 사진이라 풍기는 아우라가 장난이 아니었다.

‘아니다, 리카도…….’

리카는 예로부터 장하양을 위협하는 비주얼 다크호스였다. 과연, 이렇게 나란히 세우고 보니 우열을 가리기 힘든 미(美)를 지니고 있었다.

객관적으로 누가 위라고 말하기 힘들었다. 이선주는 개인적으로 장하양을 선호했으나, 취향 차이인 듯했다.

‘이거 사볼까…….’

이선주는 화장품 구경에 집중했다.

아니, 집중하는 척했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무시하기 위해서.

“음, 뭐, 사실 별로 안 어려웠어.”

김채현은 아까부터 계속 자신의 수능 가채점 성적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미 톡으로 질리도록 자랑을 들었건만, 만나서도 이러고 있다.

“나한텐 쉬운 수준이었달까? 뭐, 노력해온 게 있으니까? 노력의 승리? 그런 느낌? 손나 칸지(그런 느낌)?”

“네에, 정말 잘나셨어요. 합격 미리 축하드립니다.”

김채현은 수능 당일 질질 짰던 게 부끄러울 정도로 좋은 점수를 받았다.

알고 보니, 김채현이 혼란에 빠졌었던 국어 영역은 사상 최악의 난이도였다고 한다.

수능 커뮤니티에선 국어 영역 출제자들의 목을 매달기에 바빴다. 그 와중에 김채현은 무려 90점, 1등급이 확정된 점수를 받아 어깨가 한껏 올라가 있었다.

덕분에 수능을 포기한 자유로운 영혼인 이선주와도 가벼운 마음으로 쇼핑하러 나왔다.

“당연하지. 공부한다. 그게 학생이라는 거니까. 난 학생의 본분에 충실했어. 왜냐면, 그게 학생이라는 거니까.”

“너 수능 공부할 때 인터넷 안 한다고 했지 않아? 그 밈은 어떻게 알아?”

“수능 끝나고 인터넷 역사 1년 전체를 복습했지. 아, 맞다. 나 수현이가 맨날 ‘오우 퍽’이라고 하는 거 어디서 나오는 건지 알았어. 스트리머가 쓴 거래.”

“걔 인방 같은 거 안 볼 거 같이 생겨 가지고 의외네. 아, 감사합니다.”

직원에게 재고를 받은 이선주는 다음 코너로 넘어갔다.

“야 잠만.”

김채현이 그런 이선주를 불러 세웠다. 김채현은 소녀연맹이 홍보 모델을 맡은 퍼프를 하나 구매했다.

이선주가 의문을 드러냈다.

“너 그 호수 안 쓰잖아.”

“에이, 소련이들이 광고했잖아. 뭐 하면 마리아한테 줘도 되고.”

김마리아는 김사무엘의 동생이다.

과거 김마리아와 함께 소녀연맹의 콘서트를 간 이후, 그들은 나이를 뛰어넘은 우정을 구가하는 중이었다.

오늘도 저녁에 마리아를 만나기로 했다.

“근데 아쉽다. 오늘 오랜만에 다 모이나 했는데.”

수능이 끝났다.

김채현, 이선주, 백수현, 김사무엘은 응당 주인공이 되어 자유를 만끽해야만 한다.

김채현은 아쉽단 듯 말했다.

“어쩔 수 없잖아. 회사가 이성 친구끼리 사적인 곳에서 만나지 말랬다고 하니까.”

백수현과 김사무엘은 수능 쫑파티에 참석하지 못했다. 연습생이란 신분이 친구와의 우정을 막아버린 것이다.

대신 김마리아가 직접 와서 축하해주기로 했다.

유용태는 톡방에 치킨 기프티콘을 뿌림으로써 축하를 대신했다. 백수현과 김사무엘은 치킨 같은 걸 먹으면 안 됐기에 기프티콘을 김마리아에게 선물했다.

덕분에 김마리아만 포식하게 생겼다.

“걔네 데뷔하기 전에 한 번은 만날 수 있으려나 모르겠네.”

“근데 채현이 넌 공적인 데서 만날 수 있잖아.”

“내가?”

“나중에 가로 엔터 취직하면.”

“아, 그렇지. 그땐 수현이랑 사무엘한테 존댓말해야 하나?”

“비즈니스잖아. 그래야지.”

“글쿤.”

둘은 백수현과 김사무엘이 이미 데뷔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수험생 할인으로 알차게 쇼핑한 둘은 약속한 노래방 앞으로 향했다. 일단 노래방에서 힘을 마구마구 쓴 다음 저녁을 먹을 셈이었다.

“마리아!”

“언니!”

잠시 기다리니 김마리아가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김마리아와 김채현은 헤어진 자매가 다시 만난 듯 찐한 포옹을 나누었다.

“잘 지냈지?”

“네!”

“춥지? 들어가자.”

세 사람은 노래방 안으로 들어갔다.

상당히 널찍한 사이즈였다.

셋은 들어오자마자 외투를 벗곤 몸을 풀었다.

“오늘은 소녀연맹이 케이어스 꺾길 바라는 의식을 치르자. 소녀연맹 노래 릴레이…….”

그때 김채현의 눈에 김마리아가 들어왔다. 김마리아는 굉장히 열중한 채 폰을 보고 있었다.

이선주가 은근슬쩍 물었다.

“남자친구야?”

“네?! 아, 아뇨! 없어요 남자친구!”

“에이, 언니한테까지 거짓말하게? 말해줘. 보여줘. 소개시켜줘.”

“없어요오……!”

“그럼 누구랑 얘기하는데 그렇게 열중할까? 이 언니는 마리아의 남자친구 보고 싶은데?”

“그게 아니라아…….”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면서 두 남자가 등장했다.

“이리 오너라!”

백수현과 김사무엘이 촛불이 꽂힌 케이크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활짝 웃는 백수현과 다르게 김사무엘의 표정은 거의 썩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동생인 김마리아를 보더니 금방 활짝 펴졌다.

“어, 너희 어떻게……?”

“우리 수험생들, 고생했어. 자, 축하의 케이크.”

백수현이 케이크를 테이블 위에 두었다.

김채현은 얼이 빠져서 그 케이크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알고 있었냐고 묻는 듯했다.

이선주와 김마리아가 기다렸단 듯이 주머니에서 폭죽을 꺼냈다.

“이 방의 유일한 수험생 채현이, 수고했어!”

“선주 너는…….”

“난 공부 손 놨으니까 수험생 아니지.”

“너 수험생 할인까지 받았으면서어…….”

김채현은 눈물을 글썽였다.

친구들의 깜짝 이벤트는 기쁘지 그지없었다.

곧이어 모두 폭죽을 팡팡 터뜨렸다. 김채현은 폭죽에서 튀어나온 색종이를 머리에 걸치곤 해맑게 웃었다.

“아니 진짜 뭔데에. 너희 둘 안 오는 거 아니었어?”

“너 놀라게 하려고 거짓말한 거지. 회사가 친구 만나는 것까지 어떻게 막아?”

“연습은?”

“하하.”

이제야 표정이 썩어 있던 김사무엘의 사정이 밝혀졌다. 둘은 연습을 하루 째고 온 것이다.

“마 친구 아이가! 촛불 불어.”

김채현은 둘에게 미안함을 느끼면서도 고마웠다. 그녀는 있는 힘껏 입바람으로 불을 꺼뜨렸다.

그에 김사무엘이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지듯 말했다.

“나중에 같은 회사에서 보자.”

그 말이 김채현의 가슴에 사무치듯이 들어왔다. 그녀가 은은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응, 꼭 같이 일하자.”

같은 회사에서.

한쪽은 직원으로, 한쪽은 아이돌로.

“자, 그럼.”

이선주가 마이크를 집어들었다.

“소녀연맹 승리 기원 릴레이 갑니다!”

이선주가 손을 위로 치켜올리자 다들 짜기라도 한 듯 외쳤다.

“투쟁!”

“해방!”

“소녀!”

“연맹!”

“승리.”

“사무엘, 분위기 안 맞춰?”

“승리이!”

소녀연맹, 컴백까지 3일.

‘오토마타’ 앨범 선주문량 20만 장 돌파.

* * *

망했다.

소녀연맹이 망했다.

앨범 판매량은 ‘애플 크러쉬’도 뚫지 못했다. 음원 차트에선 하루 만에 광탈했다.

‘오토마타’는 실패했다.

조아라는 하루하루 지옥 속에 사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숙소에 박혀 나오지 않았다.

조아라는 침대에 누워 이불만 덮어쓴 채 무의미한 시간을 보냈다. 회사와, 멤버들과, 그리고 성필에 대한 죄악감을 곱씹으며.

‘그냥 내가 맡으면 안 됐는데.’

바보처럼 자신감에 들떠선…….

“아라야.”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그리운 목소리가 들렸다. 성필이다.

조아라는 조심스럽게 얼굴을 덮은 이불을 끌어 내렸다. 문 쪽에 성필이 서 있었다.

“아저씨…….”

“아라야…….”

성필이 비척비척 걸어 조아라의 침대 앞으로 다가왔다. 조아라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저씨 우리 어떡해요…….”

“……미안. 내 잘못이야.”

“아저씬 잘못 없어요!”

조아라가 발작적으로 외쳤다.

그의 얼굴을 보니 눈물과 죄책감이 솟아오르는 게 멈추지 않는다.

그때 성필이 조아라를 부드럽게 안았다. 조아라는 그의 품에서 흐느꼈다.

성필은 그녀의 눈물이 멎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몇 시간이나. 이윽고 조아라는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결심했단 듯 말했다.

“너무 미안해요, 인민이들한테, 회사 사람들한테…….”

“나도 그래…….”

“이젠, 죽는 수밖에 없어요…….”

성필은 말없이 가방에서 수면제를 꺼냈다. 그리고 수십 알을 한 번에 손바닥에 놓고 조아라에게 내밀었다.

조아라는 그 절반을 받아 갔다.

“아저씨.”

“아라야.”

둘은 눈물과 미소를 동시에 품었다.

“저세상에선, 같이 행복해져요.”

* * *

조아라는 눈을 떴다.

눈가가 젖어 있었다.

“……이 뭔 씨.”

별 희한한 꿈이 다 있다.

그녀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눈을 비비니, 꽤 오랫동안 울었단 걸 알 수 있었다. 눈가가 부어 있었으니.

“아라쨩 일어나, 일어났네?”

열린 문으로 리카가 보였다. 그녀는 막 씻고 왔는지 머리가 물기로 가득했다.

“에, 아라쨩 울었어?”

“방이 건조해서. 신아름은?”

“지금 씻는 중.”

소녀연맹 멤버들은 차례로 씻고 저마다 준비를 마쳤다. 날이 추워 다들 패딩을 걸쳤다.

숙소 밖으로 나가니 밴이 도착해 있었다. 멤버들은 쪼르르 그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매니저가 각자의 자리에 아침으로 먹을 샌드위치와 음료를 두었다. 매니저는 말없이 샵으로 차를 몰았다.

샵엔 성필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샵은 어두운 새벽에 어울리지 않게도 휘황찬란했다. 조아라는 그 빛 안으로 들어가 성필과 마주 섰다.

“잘 잤어?”

“네, 아저씨는요?”

“난 한숨도 못 잤어. 너라도 자서 다행이네.”

“오늘 느낌이 좋아요.”

“그래?”

“안 좋은 꿈을 꿨거든요.”

“……그럼 안 좋은 거 아냐?”

“꿈은 현실과 반대예요. 그러니까, 오늘 나는 엄청 느낌이 좋아요.”

“얼마나 안 좋은 꿈이길래?”

“나중에 말해줄게요.”

둘은 대화를 끝냈음에도 한동안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조아라가 입을 열었다.

“아저씨.”

“응.”

“갔다 올게요.”

“응.”

조아라는 성필을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갔다.

‘케이어스는 없다. 글로브도 없어. 다른 선배 걸그룹도, 같은 세대 아이돌들도 없다.’

소녀연맹의 독무대.

음방 1위는 따 놓은 당상.

하지만 소녀연맹의 전장은 그곳에 없다.

‘케이어스의 이번 초동 판매량은 88만 장.’

걸그룹 역대 1위 기록.

마침내 케이어스는 모든 선배들을 제쳤다.

‘월간 차트 1위.’

음원으로도 따라잡을 상대가 없을 수준이다.

그렇다면, 소녀연맹의 전장이 그곳인가?

‘아니.’

소녀연맹의 전장은.

‘시상식.’

올해의 퍼포먼스상.

참가할 수 있는 모든 시상식에서 퍼포먼스로 왕좌를 따낸다. 그걸 위한 프로듀싱이었고, 그걸 위한 노력이었다.

‘우린 댄스 퍼포먼스로 정점에 오른다.’

기분 좋게 피가 끓는다. 아마 무대 위로 올라가면 차갑게 식겠지.

지금 정도의 흥분이 딱 알맞다.

‘목표는 비교 불가능한, 압도적인 퍼포먼스. 걸그룹의 역사에 다시 없을 퀄리티로…….’

케이팝 씬을 바꾼다. 이제부터 퍼포먼스의 기준이 소녀연맹이 되도록.

‘오늘만을 위해 노력해왔다.’

서유선 디렉터.

프로젝트 안무가들.

정지음 뮤직 프로듀서.

박성필 총괄 프로듀서.

가로 엔터의 모든 프로듀싱 파트 직원들.

잘 따라와 준 멤버들.

그리고, 민시화 선생님.

그 모든 사람들에 대한 감사와 존경을 품고, 승리를 향하여.

‘간다.’

소녀연맹, 컴백 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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