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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안 한는 프로듀서-547화 (547/760)

547화

‘앗, 이런 걸 고민할 때가 아니야.’

퇴근 시각 10분 경과.

리카는 한구인에게 춤 연습을 봐달라고 하려 한다. 한국 전통 무용가 허수인 때문이다.

리카가 생각하기로, 허수인은 한구인에게 관심이 있다. 전에 떠보듯이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허수인은 은근히 대답을 피했었다.

그건 사실상 고백이나 다름없다.

그러니 가로 엔터의 큐피트인 자신이 도와줘야만 한다.

‘퇴근 시각에 같은 장소에 있다 보면 자연스럽게 같이 나가게 될 거야!’

자연스럽게 같이 나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밥도 먹을 것이다. 그게 인연이 되어 마침내 사랑으로 이뤄지지 않을까…… 리카는 그리 여겼다.

리카는 조심조심 사무실 문을 열었다.

한구인과 권아인이 보였다. 권아인이 책상 앞에 앉은 가운데, 한구인이 그녀의 뒤에 서서 무언가를 가르쳐주고 있었다.

“만약 박 이사님이 유럽 투어 단체 논의를 위해 런던으로 출장을 갔다고 합시다. 출장 이틀간 숙박비와 식사, 접대로 1만 달러를 지출했다면 어떻게 계산해야 할까요?”

‘박 이사님 완전 쓰레기잖아?!’

회의를 하러 가서 약 1,000만 원이나 쓰는 사람이 어딨는가? 무지막지하게 비싼 호텔을 잡지 않는 이상 절대 나가지 않을 돈이다.

권아인은 잠시 고민하다가 자신감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매니지먼트 업무 지출 비용이니까, 출장비로 소련이들 제작비에서 제해야 하지 않나요……?”

‘가로 엔터가 그런 시스템이었어?!’

리카는 경악하고 절망했다. 이래서 팝스타들이 따로 회계사를 두는구나 깨달았다.

뉴스에 아이돌과 기획사가 정산 문제로 다투는 걸 보면 이해가 안 가곤 했었는데, 이제 확실히 이해가 간다.

“아닙니다.”

한구인이 부정했다. 그는 탓하는 분위기가 전혀 없이, 인자하고 친절한 어조로 설명을 시작했다.

“멤버분들의 계약서엔 가로 엔터가 사용하는 지출 비용(아티스트를 대신하여 매니지먼트 담당자가 지출하는 비용을 뜻함)의 규모와 한계를 정해둔 조항이 있습니다.”

권아인은 소녀연맹의 계약서를 찾아 해당 항목을 찾았다.

“아, 정말이네요…….”

“여길 보면 출장에서 각 항목 1회당 담당자가 사용할 수 있는 최대 금액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걸로 계산하면, 1만 달러를 사용한 박 이사님이 자비로 부담해야 하는 금액이 얼마가 됩니까?”

“음…….”

리카는 둘 사이에 끼어드는 게 꺼림칙했다. 저렇게나 다정하고 열정적으로 공부하는데, 어떻게 끼어들겠는가.

그런데 한구인이 먼저 리카가 온 것을 눈치챘다.

“리카 씨? 뭔가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에…….”

리카는 권아인을 흘끗 보았다. 그러자 한구인이 미소를 지으며 권아인에게 말했다.

“오늘은 이 정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다시 하도록 하죠.”

“넵, 고생하셨습니다.”

한구인은 가방을 들고 리카에게 다가왔다.

“왜 그러십니까?”

“바쁘신 거 아니었나요!”

“괜찮습니다. 그냥 평소에 하던 공부였습니다.”

“개인과외네요!”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군요.”

“제 춤을 봐주셨으면 해요!”

“제가 말입니까? 박 이사님은 어디 가셨습니까?”

“박 이사님은 쌤을 보느라 바쁘다구요! 옛날처럼 한 이사님이 평가를 해주셨으면 해서요! 바쁘시면 안 오셔도 돼요!”

“가겠습니다.”

한구인은 살짝 감동한 눈치였다.

예전, 가로 엔터가 작았을 땐 한구인도 멤버들과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하지만 가로 엔터가 커지고 나서는 본업에 집중하느라 그녀들을 볼 일이 적어졌다.

그런데 리카가 먼저 이런 권유를 해오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구인을 데리고 연습실로 향하는 리카는 ‘또 한 건 해냈어!’란 뿌듯함을 품었다. 이제 적절한 순간 빠져주면 알아서 허수인과 한구인이 엮일 것이다.

힘차게 연습실 문을 여니, 허수인 외에 두 사람이 더 있었다.

성필과 조아라였다.

“에? 아라쨩이랑 이사님이 왜 여기 있나요!”

“너 연습한다기에 보러 왔지.”

“그런가요!”

성필과 사랑하는 아라쨩이 와준 건 기쁘다. 게다가 둘이 있더라도 리카의 계획이 틀어지진 않는다.

한구인과 허수인이 간단한 눈인사를 나누었다. 오늘따라 허수인의 개량 한복이 더 화려하고 고왔다.

“한 이사님, 박 이사님, 사랑하는 아라쨩! 다들 잘 봐요!”

리카는 비장의 무기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문구매장에서 산 만 원짜리 부채였다.

리카가 유려한 손길로 부채를 펼쳤다. 부채엔 벚꽃이 새겨져 있었다.

“제 비장의 무기예요!”

리카는 부채를 들고 잔상 파트를 펼쳤다. 그녀는 첫 번째 잔상이라 고작 3초 남짓 춤을 추었으나, 충분히 감탄하고도 남았다.

그녀의 손에 들린 부채는 한국 무용과 섞여 고즈넉한 미(美)를 연출했다.

춤을 마친 리카가 부채를 촥 접으며 오만한 미소를 띠었다.

“어떤가요!”

“괜찮은데?”

“그게 다인가요!”

성필의 평가가 애매하자 리카가 인상을 팍 썼다.

“더 칭찬하세요! 칭찬하지 않으면 큰일이 일어나요!”

아무도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리카는 한구인에게 도도도 달려가서 소곤소곤 무어라 말했다. 그리고 다시 성필의 앞으로 도도도 달려왔다.

그 순간 한구인이 말했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겁니까?”

“아타시(나), 조금 삐뚤어집니다!”

“우와, 리카 대단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어?”

성필이 과장된 칭찬을 퍼부었다. 리카의 어깨가 후지산처럼 높아졌다.

“더 칭찬하세요!”

“근데 부채를 드는 건 진짜 좋은 아이디어 같아. 아예 리카 의상에 두루마기를 추가해볼까?”

이번 건 과장이 아니었다.

리카가 부채를 들고 한국 무용을 추는 건 확실히 분위기가 살았다. 고작 3초지만, 고작 3초이기에 임팩트가 중요하다.

“잔상 들어가기 전에 부채 꺼낼 수 있어?”

“할 수 있어요! 아타시(저)는…….”

리카가 바지춤에 꽂고 있던 장난감 리볼버를 순식간에 꺼내어 성필을 가리켰다.

“시세리와 일심동체니까요!”

“시세리?”

허수인은 시세리가 무엇인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에 한구인이 대답해주었다.

“일본 만화 ‘웨스턴 불렛’의 주인공입니다. 애니메이션에선 소녀연맹분들이 오프닝 OST를 맡았습니다.”

“아, 아, 그래요? 브, 봐야겠네요.”

허수인은 한구인의 미모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흔히 어른들이 ‘그 인간 얼굴 뜯어먹고 살 거냐?’란 말을 하곤 한다. 얼굴 잘생기고 예쁜 거 필요 없단 소리다.

그런데 한구인과 결혼하는 사람은 정말 그의 얼굴만 뜯어먹고 살 수 있을 듯하다.

“부채 들 생각은 어떻게 했어? 안무가님이 추천해주셨나?”

“후후, 듣고 싶으신가요?”

“응, 듣고 싶어.”

“어쩔 수 없네요! 한국 전통춤이라고 하면 부채춤이 떠오르지 않나요! 그래서 부채를 들어봤어요! 자, 제 천재적인 발상을 마음껏 칭찬하세요!”

“생각보다 간단하네.”

“부채춤은 전통춤이 아니에요.”

한구인의 얼굴에 정신 못 차리던 허수인이 순식간에 돌변했다. 그녀는 한 치의 양보도 없단 듯 굳은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부채춤은 전통춤 아니에요.”

“에, 그런가요……?”

성필과 한구인, 조아라도 모르던 사실이었다.

허수인은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했다.

“부채춤은 최승희가 창작한 춤이에요. 부채춤은 전통춤이 아니라…… 신무용(모더니즘 전, 춤의 과도기적 양식)이죠. 관객 설정도 한국 전통 무용이랑 달라요. 프로시니움 무대, 즉 극장에서 상연될 걸 목적으로 만들어졌거든요.”

“헤에, 신기하네요! 최승희란 분은 어떤 분인가요! 아직 살아계시나요!”

“죽은 지 꽤 됐죠. 아, 그러고 보면 최승희는 여러분이랑 관련 있을 수도 있겠어요. 별명이 제국의 아이돌이거든요.”

“과거의 아이돌인가요! 왠지 애착이 가요! 제국이라면 대한제국인가 보네요!”

“일본 제국이에요.”

리카가 순식간에 입을 다물었다.

“일제시대에 태어나서 제국 전역에서 유명세를 얻었던…… 네, 제국의 아이돌이었죠.”

아까부터 허수인은 최승희를 지칭하거나 서술어를 쓸 때 거침이 없었다.

춤이 지금 시대까지 전승될 정도라면 엄청난 대가일 텐데, 이름을 그대로 부르거나 ‘죽었다’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허수인은 아마 최승희의 그런 면모를 안 좋아할지도 몰랐다.

갑자기 분위기가 가라앉자 허수인은 당황했다. 그리고 곧 자신이 한 말이 어떻게 들렸을지 알게 됐다. 그녀의 앞에 선 일본인, 리카 덕분이었다.

“아, 아니 최승희가 일제 때 활동했다고 뭐 악감정 있는 거 전혀 아니에요! 그냥 그런 사람이 있었다, 그런 얘기였는데…….”

허수인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그녀가 더 곤란해지기 전에 리카가 끼어들었다.

“지금은 좋은 시대예요! 여러 복잡한 문제가 있지만, 두 나라가 같은 음악을 듣고 즐긴다는 건요!”

리카는 딱 거기까지만 말했다. 이 정도면 불편한 주제를 잘 마무리했다고 할 만했다.

허수인은 리카가 잘 받아들여 줘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고마움을 담아 미소 지었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저도 춤 보여드릴까요?”

“하이(네)!”

허수인이 부채를 받았다. 그리고 그녀가 낮은 보폭으로 움직이며 부채를 살랑이기 시작했다.

“춤은 좋죠. 언어를 뛰어넘어 말할 수 있으니까요. 춤의 ‘좋다, 아니다’, 그런 건 나라가 달라도 이해할 수 있어요. 저 사실 춤을 배우게 된 게, 일본 전통 무용을 보고 난 후였어요.”

허수인의 춤엔 현대적인 특징이 거의 없었다.

아이돌의 춤은 서양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서양 춤은 신체 한계를 극복하는 데 초점을 두고 발전해왔다.

그에 비해 허수인의 춤은 느긋하기까지 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동작이다, 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멋지다’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역으로 ‘우리나라 건 뭐가 있지?’ 싶었어요. 그대로 빠졌죠. 근데, 처음엔 엄청 힘들었어요. 한국 전통 무용은 표준화된 기준이랄 게 없거든요. ‘멋’을 살려야 한대요.”

푸에테 연속 32회.

다리 180도로 찢기.

땅을 짚고 거꾸로 서서 다리 꼬기.

이런 현란한 기교 없이 손짓, 발짓 한 번으로 희로애락을 표현하라고 한다. 고요함 속에 현란함이 있어야 한다고 한다. 무엇보다 ‘멋있어야’ 한다고 한다.

전통 무용은 감정과 표현력에 집중되어 있다. 명백한 기준이 없기에, 어떤 테크닉에 도달하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근데 하다 보니까 어찌어찌 ‘멋’이 있어지더라고요. 그러다가 느꼈어요, ‘아 이거 내가 어릴 때 봤던 일본 무용이랑 비슷하다’라고요. 왜, 노가쿠나 가부키는 극(劇)이잖아요? 춤에 등장인물의 감정이 들어가요. 내가 배우는 춤도 감정이 중요하고, 또…….”

허수인은 느렸다.

그 느림 사이를 무언가 채우고 있다.

분위기다.

인간의 향이 동작 사이사이를 메우는 듯했다.

이윽고 허수인이 부채를 접는 것과 동시에 몸을 앞으로 툭 구부렸다. 그게, 달이 비친 연못에 떨어지는 물 한 방울 같았다.

춤을 마친 그녀는 접은 부채를 쥐고 곧게 섰다.

“최근 프로젝트로 많은 안무가분들을 뵙고 확실히 알게 됐어요. 춤이란 건 뿌리가 같더라고요. 우리 같이 좋은 시대를 만들어봐요.”

허수인이 부채를 리카에게 내밀었다.

“춤으로요. 최승희가 무용가 이시이 바쿠에게 사사(師事)했던 것처럼, 지금 한국 아이돌이 일본 아이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처럼.”

춤으로, 예술로, 문화로 사람들이 서로를 더 잘 이해하고 관심을 가지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

리카는 그녀에게서 다시 부채를 받았다. 그리고 홀린 듯 허수인이 한 것처럼 춤을 춰 보았다.

그녀는 거울을 보곤 허수인에게 말했다.

“아까 그거 가르쳐주세요!”

“네? 그냥 막 춘 건데요?”

“그래도요! 엄청 멋졌어요! 박 이사님, 한 이사님 그렇죠?”

성필과 한구인이 동의했다.

허수인은 부끄러워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돌한테 멋지단 말 들으니까 부끄럽네요.”

부끄러운 허수인은 리카에게 간단히 춤을 전수해주었다.

리카는 허수인과 같은 분위기를 낼 순 없었으나, 동작 자체는 빠르게 따냈다. 그녀는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언니한테 사사했다고 말하고 다녀도 되나요!”

“리카, ‘사사받았다’ 아니야?”

“‘사사했다’가 맞는 표현입니다. ‘사사’ 자체에 가르침을 받다란 뜻이 포함되어 있으니까요.”

“그래요? 처음 알았네.”

“이사님은 아타시(저)보다 한국어를 모르시네요!”

“사사까지는…….”

허수인은 그 단어에 부담감을 느끼는 듯했다. 하지만 리카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보곤 금세 장난기를 발산했다.

허수인이 리카의 양쪽 어깨를 부채로 가볍게 두드렸다.

“하산하거라.”

“하이(네)!”

리카는 신이 나서 또 부채를 들고 춤을 추었다.

그것을 보자 프로듀서로서 성필의 감이 말외쳤다.

리카의 저 춤은 반응이 온다. 사람들이, 대중이, 시장이 반응할 것이다.

성필은 벌써부터 아이튜브와 클락, 커뮤니티를 장식한 리카가 떠돌아다녔다. 꽃부채를 쥔 채 연못에 비친 달처럼 희미하고도 밝게 빛나는 리카…….

‘나중에 따로 영상 찍어야겠다.’

허수인이 돌아갈 때가 왔다.

리카는 한구인에게 눈치를 주었다.

“한 이사님은 퇴근 안 하시나요!”

“저는 아직 일이 남았습니다.”

리카가 실망했다.

결국 허수인 홀로 돌아가게 됐다.

다음엔 꼭 성공하리라.

“근데.”

조아라는 신기하단 듯 감탄한 어조로 말했다.

“아까 안무가님이 춤의 뿌리가 같은 거 같다고 했잖아요. 나도 이번 프로젝트하면서 느꼈는데, 춤이 꼭 공유하는 느낌? 테크닉 같은 게 있더라고요. 신기하다.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거 아니었구나.”

“집단무의식.”

한구인이 말했다.

“아니겠습니까?”

“집단무의식이 뭔데요. 제발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해요 제발.”

“……아라 씨, 제가 아라 씨의 심기를 거슬렀습니까?”

“걍 한의사님 놀리는 거 재밌어서요. 계속 말해줘요.”

“크흠, 아라 씨는 부모님을 닮았습니까? 습관이나 행동거지 말입니다.”

“내 부모님이니까 닮았겠죠. 십몇 년을 같이 살았잖아요.”

“그럼 아라 씨의 부모님들은, 할아버님과 할머님을 닮았지 않겠습니까?”

“뭐…… 그렇겠죠.”

“그럼 아라 씨한테도 할아버님과 할머님 습관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겠군요. 부모님을 닮았다면 말입니다.”

그렇게 가지의 끝까지 올라가면 인류의 원형이 나올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인류는 그 원형으로부터 전해 받은 사고 체계, 행동 원리 등을 보존하고 있다.

모든 인류 혹은 집단이 공유하는 무의식, 이게 바로 집단무의식이다.

“신화가 이 원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겠군요. 이자나미와 이자나기의 신화는 그리스 신화 중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이야기를 닮지 않았습니까?”

둘 다 남편이 아내를 구하러 저승으로 갔다가, 저승의 규칙을 어기고 아내를 되찾지 못하는 이야기다. 우연의 일치라고 해도 놀라울 정도로 서사 구조가 비슷하다.

혹은 세계 곳곳에 퍼져 있는 대홍수 신화도 이런 예시에 부합한다.

신화와 종교는 과거로부터 전해 내려온 인류의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가장 직접적인 자료이니.

이렇듯 세계에선 어마어마한 지리적 거리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이야기나 신화가 발견되곤 한다.

“춤에도 그런 게 있지 않겠습니까. 모든 춤의 뿌리를 찾아보면 결국 하나에 이를 테니까요.”

“오, 그럴듯하네요. 근데 진짜 너무 거창해서 하나도 안 와 닿아요.”

“아깐 공감된다고 하셨으면서…….”

“농담이에요. 걍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뭔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재밌네요.”

“도움이 됐다니 다행입니다.”

한구인은 못다 한 일을 하러 사라졌다.

“아저씨는 안 가도 돼요?”

“나? 가야지.”

“쌤 보러요?”

“그것도 있고.”

조아라는 백설하가 연습하고 있을 옆 방을 바라보았다. 벽에 막혀 보이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구슬땀을 흘리면서 노력하고 있으리라.

“아저씨, 쌤 할 수 있을까요? 이제 한 달 하고 조금 남았잖아요. 데뷔할 때 하양 언니 기다려줬던 시간보다 더 조금밖에 안 남았어요.”

“바꾸자고 하게?”

“꼭 그렇다기보다는…….”

“할 수 있을 거야. 아니다, 할 수 있어.”

조아라는 합동 연습 때를 제외하곤 일부러 백설하를 보지 않았다. 초조해질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번 프로젝트의 프로듀서다. 그런 상황에 놓이니 성필의 고생을 알게 됐다.

프로듀서란 건 심적인 압박이 엄청난 직책이다. 자신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다. 멤버들, 직원들의 진척도도 항상 신경 써야 한다.

“아직도 설하 못 믿어?”

“……그렇게 물으면 내가 뭐라고 대답해요?”

당연히 믿는다고 해야지.

성필은 걱정하지 말란 뜻으로 그녀의 등을 팡팡 두드려주었다.

“리더를 믿어. 뭣하면 지금 보러 갈래?”

“됐어요. 곧 같이 연습하면 볼 텐데 왜요.”

적어도 이번 주 안엔 백설하의 완성도가 보장되어야 마음을 놓을 텐데.

성필은 조아라의 걱정을 십분 이해했다.

“아저씨 근데 오늘도 계속 있는 거죠?”

“어. 설하랑 약속했으니까.”

“우리 끝나고 아저씨 자고 있으면 깨울까요?”

“이번엔 안 자. 저번엔 너무 피곤해서 눈만 붙인 거야. 그래도 뭐, 자고 있으면 깨워. 너희 데려다줘야 하니까.”

“이번에도 주무시면 일어날 때까지 여기저기 만질 거예요!”

“리카 넌 진짜 징계건의서 받아라.”

* * *

“아저씨!”

성필은 몽롱한 가운데 조아라의 목소리를 들었다. 천근만근인 눈꺼풀을 위로 올리니, 거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조아라의 얼굴이 보였다.

‘뭐야 이거, 꿈인가?’

피로가 뇌 구석구석까지 차 있었다.

성필은 손을 흐느적거리면서 움직였다.

“뭐야, 아라야……?”

어둠 속에서 연인의 얼굴을 더듬는 사람처럼, 성필은 몽롱함 속에서 눈앞의 조아라를 더듬었다. 그녀의 뺨에 부드럽게 손을 대고 엄지를 움직였다.

보드랍고 끈적하다.

끈적……?

“어?”

땀이다.

그리고 이건 땀 냄새다.

성필은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경멸하듯 쳐다보는 조아라가 명확한 시야 속에 비쳤다.

하지만 조아라는 곧 입꼬리를 올렸다.

“뭘 자연스럽게 만지고 있어요?”

“어, 으……?”

성필은 너무 황당해서 계속 조아라의 뺨에 손을 대고 있었다. 손가락도 계속 움직이면서.

그리고 천천히 손을 떼고, 손을 바라보았다. 땀이 묻어 있다.

그는 땀을 덮고 자던 모포에 슥슥 비볐다.

“아니 씨 먼저 만져놓고 사람 기분 더럽게 하네. 일어나요!”

조아라가 성필의 모포를 걷어내고 일으켜 세웠다. 그제야 성필은 완전히 정신이 돌아왔다.

그렇지만 늙고 시들어 빠진 성필의 몸은 정신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는 소파에서 겨우 상체를 일으킨 채 마른세수를 했다.

“아라야, 어우, 그, 미안하다, 나 지금 정신이…….”

“지금 내 땀 얼굴에 문지르는 거예요?!”

“아아아아아아악!”

성필도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비명을 질렀다.

잠시 후, 조아라는 정신을 차린 성필을 연습실로 데려왔다.

피곤한 눈의 리카가 성필을 반겼다.

“박 이사님한테서 아라쨩 냄새가 나네요. 늦는다고 했더니 같이 뒹군 건가요…….”

“리카 왜 그래. 묘하게 힘이 없네. 농담도 재미없고.”

“시간을 보세요!”

시각, 5시 38분.

성필이 화들짝 놀랐다.

“너, 너희 지금까지 연습했어? 왜? 아니, 것보다 난 집에 어떻게 가지? 아 샤워해야 하는데! 지금 출발하면 차 밀리나? 아 어쩌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완성했다구요!”

“완성?”

리카가 연습실 한쪽을 가리켰다.

백설하가 등을 돌린 채 양반다리로 앉아 있었다. 추운 날씨 탓인지, 그녀의 몸에 맺힌 땀은 체온을 이기지 못하고 수증기가 되어 일렁였다.

마치 도인(道人)과 같은 엄숙함이다.

성필은 감히 그녀를 부르지도 못했다.

“오셨어요?”

백설하가 앉은 자세 그대로 다리만 펴서 일어났다. 그리고 날카로운 눈으로 성필을 쳐다보았다.

잠을 못 자서 그런 건가? 아예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근데, 완성했다고? 안무?”

성필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새벽 1시 21분까지만 해도, 백설하는 미흡한 부분이 많았다.

그런데 고작 몇 시간 만에?

성필은 리카가 과장한 것이구나, 그리 생각했다.

“보여드릴게요.”

그리고 그 생각이 바뀌는 건 단 3분이면 충분했다. 백설하는 정말로 완성했다. 완성해버린 것이다.

“아…….”

그날 리조트 해변에서 보았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정교한 춤.

성필은 그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다.

그런 성필의 반응을 보고 백설하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제가 해낼 거라고 했죠? 이사님이 저를 믿어주신 값, 치렀어요. 아, 이사님한테는 포상이었나요?”

“어떻게 몇 시간 만에…… 아니다. 장하다 설하야, 장해.”

“이사님…….”

둘은 피로와 잠기운에 절어, 거대한 성취감을 품고 가볍게 포옹했다.

“장하다…….”

“네, 저 해냈어요 마침내…….”

포옹 후 떨어진 성필은 또 손에서 끈적함을 느꼈다. 이번엔 조아라 때처럼 손바닥을 바라보는 실례를 저지르지 않았다.

‘어떻게 했는지 알 만하네.’

이런 식으로 며칠 연달아 연습하는데, 그야 노력이 보답해줄 만도 하다.

이 추운 날에 땀에 흠뻑 젖을 정도로 연습한 건가. 백설하의 노력엔 경의를 표하고 싶다.

꼭 과거의 장하양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이사님 왜 자꾸 손을 꼼지락거리시나요! 손에 뭐 묻었나요!”

“그러게, 팀장님 꼭 1시간 전에 리카 같다.”

“에에엑?!”

“리카가 뭐 했어?”

“팀장님 안 깨우고 만지기 챌린지 했어요.”

“모함이얏!”

“하하, 그래?”

“믿어주시는 건가요! 아름이 봤지? 이사님이랑 아타시(나)는 철의 인연으로 묶여 있다구! 실버타운 메이트니까!”

[징계 건의서]

[건명: 성추행]

[건의일시: 20XX.XX.XX]

[징계안건 및 요구양정: 감봉, 접근금지]

[징계 대상자

소속: 소녀연맹

직명: 멤버

성명: 이시카와 리카]

“손나(그런)!”

“좋아, 네 명 모두 정말 고생 많았어.”

“아타시(저)를 아예 기억에서 지운 건가요?! 히도이(너무해)!”

리카는 앙탈 부리듯 성필의 등을 마구마구 마사지하려 했지만, 할 수 없었다.

장하양이 리카의 징계 내용을 철저하게 지키도록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리카를 붙잡아 성필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특히 설하. 노력해줘서 고마워.”

“아니에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그래, 그럼 드디어…….”

성필은 멤버의 면면을 바라보았다.

리카만 빼고.

“정말 모함이에요! 억울해요!”

“그래?”

[사무실 CCTV]

[성필의 머리맡에 쭈그리고 앉아 얼굴 여기저기를 검지로 찌르는 리카의 모습. 옆에서 장하양과 조아라가 지켜보고 있음. 도중에 신아름이 달려와 세 사람을 쫓아냄.]

“리카, 너 1시간 나랑 대화 금지야.”

“어째서어어어어어―!”

성필은 헛기침으로 분위기를 원래대로 되돌렸다.

“드디어 컴백이 코앞이야. 남은 시간은 칼을 가는 것과 같아. 최초의 무대에서 세상을 바꾸자. 다들 감탄해서 입을 쩍 벌리도록.”

성필은 은근한 분위기로 조아라를 바라보았다.

“뭐요.”

“세상을 바꾸자. 마이클 잭슨이랑 마돈나처럼.”

“그걸 아직도 기억하네.”

“기억하지. 프로듀서 아라님이 제시하신 목표인데.”

조아라가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럼 오랜만에 갈까?”

성필과 멤버들이 손을 겹쳤다.

그리고 외쳤다.

“투쟁!”

“해방!”

“소녀!”

“연맹!”

“승리!”

다 함께 손을 위로 들었다.

“올해의 퍼포먼스상!”

소녀연맹, 컴백까지…….

* * *

김채현은 하얀 입김을 뱉으며 교문 앞에 섰다. 교문 앞은 수능을 응원하러 나온 각 학교의 학생들로 북적였다.

김채현은 롱패딩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곤 천천히 학교 안으로 발을 들였다. 가방 안에 들어간 각종 정리 노트와 도시락의 무게가, 오늘따라 느껴지지 않는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할 수 있어.’

김채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하던 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고3, 김채현, 수능 당일.

그녀는 수험표를 들고 정해진 교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정리 노트를 보면서 심신을 다스렸다.

노트를 보는 덴 수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이때까지 수백 번은 읽어서, 노트의 어디에 무엇이 적혔는지까지 기억났다.

‘목표는 상위 6% 이내. 거기까지 들면 안전빵이야. 할 수 있다. 모의고사에서 몇 번이고 도달했던 점수니까. 할 수 있다, 난 할 수 있다.’

시험 시작종이 울렸다.

김채현은 컴퓨터용 사인펜과 볼펜을 들고 조용히 기도했다. 시험지를 받고, 펼쳤다.

1교시 국어 영역, 시작.

‘쉽다.’

1번부터 15번, 흐르는 강물보다 쉽게 풀린다.

어차피 다 먹고 가야 하는 문제였지만.

이윽고 비문학, 진입.

‘이건 내 싸움이야. 이겨야 해.’

이곳에서 이겨서, 목표로 하는 학교의 공연예술학과에 진학하고, 엔터테인먼트 업계에 취직한다.

그게 김채현의 꿈이다.

‘이길 수 있어.’

이건 꿈으로 가는 계단.

‘이길 수 있어.’

첫 번째 단계.

‘이길 수 있어.’

이날을 위해 매일 5시에 일어나고 1시에 잤다.

‘이길 수 있어.’

피를 토하는 노력을 해왔다.

‘이길 수 있…….’

노력을.

‘이길 수…….

노력을, 해왔는데…….

“…….”

비문학.

문제가, 지문이 읽히지 않는다.

몇 번이나 다시 읽어도, 이해가 안 된다.

‘이게 뭐야?’

행성의 궤도? 주기? 혜성? 각도? 속도?

이게 대체…….

‘무, 무슨 소리가 적혀 있는 거야? 한국어야? 국어 영역 맞아?’

김채현은 지문을 읽고 또 읽었다.

읽을수록 눈이 뜨거워진다.

눈가에 눈물이 핑 돈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어려, 워…….’

김채현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지문에 줄을 긋고 또 그었다. 그었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다.

김채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왜, 왜 이렇게…….’

작은 방울 하나가 그녀의 뺨을 타고 떨어졌다.

* * *

김채현은 롱패딩 주머니에 손을 넣고 터덜터덜 교문을 나섰다.

친구들의 알림은 모두 꺼놓았다. 놀 기분이 아니다. 일단 집에 가서 가채점해야 한다.

그녀는 영혼이 빠져나간 눈동자로 걷고 또 걸었다. 그때 폰이 울렸다. 분명 알림을 다 꺼놓았을 텐데.

[언니 저 오늘 수능이에요 ㅠㅠ. 너무 떨리지만 언니랑 소련이들 생각해서 힘낼게요. 저도 소련이들처럼 고난을 꺾고 성장할 거예요! 이미 수능생 응원 영상에서 응원해주셨지만, 응원 부탁드려요! 마음속으로라도 괜찮아요 :)]

어제 새벽 장하양의 개인 스타그래프 계정으로 보냈던 DM.

[지금쯤이면 수능이 끝났겠네요.]

답장이 와 있었다.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채현 님 기억하고 있어요. 첫 번째 팬미팅에 와주셨죠? 저희를 보고 용기를 얻으셨다니 다행이에요. 좋은 결과가 있으셨기를 바랄게요. 항상 응원을 받기만 했는데, 이렇게 응원하게 되니 기분이 좋네요. 우리 채현 님, 사랑하는 인민이, 고생 너무너무 많았어요. 오늘은 맛있는 거 먹고 푹 쉬세요]

“…….”

김채현은 멍하니 그것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또 알람이 떴다.

소녀연맹의 아이튜브 채널.

소녀연맹 공식 컴백 티저 영상이 올라왔다.

“하하…….”

김채현은 힘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지인짜…….”

최고의 타이밍이다.

김채현은 폰을 양손으로 붙잡고 가만히 서서 끅끅 울었다. 방금 수능을 마친 이들은 그런 김채현을 한 번 쳐다볼 뿐, 아무 일 없단 듯 지나쳤다.

곧이어 흐린 하늘에서 얇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소녀연맹, 컴백까지 3주.

컴백 프로모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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