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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 안 한는 프로듀서-544화 (544/760)

544화

“역시.”

성필은 일렬로 늘어선 멤버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이게 제일 낫다.”

멤버들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이게 정말 좋은 건지 확신이 안 서는 눈빛이었다.

“오케이, ‘잔상’ 파트 순서는 이대로 정한다.”

‘오토마타’의 백미라 할 수 있는 부분은 뭐니 뭐니 해도 마지막 하이라이트로 이어지는 브릿지다.

그 부분에서 멤버들은 서유선의 역작인 ‘잔상’을 춰야만 한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 한 사람처럼 보이도록 일렬로 선 후, 춤을 추면서 가장 뒤의 사람부터 차례대로 멈추는 것이다.

“저, 그런데요.”

백설하가 성필의 눈치를 보면서 손을 들었다.

“이건 거의 키의 역순…… 이잖아요?”

멤버들이 선 순서는 이러했다.

가장 앞에서부터 조아라, 신아름, 장하양, 백설하, 리카. 즉, 리카가 가장 뒤에 선다.

“가장 앞에 서는 사람이 가장 커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뒷사람이 다 가려지니까…….”

물론 잔상 파트는 이미 수많은 경우의 수가 고려되었다. 키의 정순부터 역순, 섞어 서기까지 모두 말이다.

그런데 키의 역순은 무조건 안 될 거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가장 앞에 최단신인 조아라가 서면 뒷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잔상과 같은 효과를 주고 싶다면, 뒷사람이 보이지 않도록 서는 게 자연스럽다.

“음.”

성필은 총괄 프로듀서답게 근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보기에, 최단신이 가장 앞에 서는 쪽이 오히려 더 잔상 같다. 더 보는 맛이 있어.”

“‘보는 맛’은 엣찌(음란)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아름다워.”

리카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필이 아름답다고 하니 반론을 펼쳤던 백설하도 수긍하게 됐다.

어차피 잔상 파트의 멤버 순서는 수많은 갑론을박이 오갔었고, 명확한 답이 존재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러니 성필의 말을 따르는 쪽이 옳을 것이다.

“그럼 아타시(제)가 한국 무용이네요!”

잔상 파트의 의미는, 멤버가 잔상으로서 멈췄을 때 드러난다. 각 정지 포즈가 각기 다른 장르의 테크닉 포즈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가장 뒤에 선 리카는 한국 무용을 맡게 됐다.

“그럼 나는…….”

백설하가 잔상 파트의 순서를 되짚어보았다.

“발레?”

뒤에서 두 번째 멤버는 발레 포즈로 멈춘다.

사실 어떤 포즈로 멈추냐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긴 하다. 중요한 건 몇 번째 순서냐는 것이다.

앞일수록 힘들다.

왜냐하면, 가장 앞의 사람은 잔상 파트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추어야 하니까.

“내가 앞이네.”

조아라가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아니, 담담하기보다는 어딘지 들뜬 눈초리였다.

신아름이 툭 던지듯이 그녀를 걱정했다.

“힘들다 싶으면 나한테 넘겨.”

“너 개뻣뻣해서 맨 앞에 서면 절대 안 돼.”

“응 꺼져. 나중에 바꿔 달라고 해도 절대 안 바꿔줘.”

“바꾸겠냐? 아저씨가 한 말 못 들었어? 내가 보는 맛이 있다잖아.”

“아름이로 바꿀까?”

“아저씨 작작 해요. 한 번만 더 편애로 위화감 조성해봐요.”

“오케이.”

“팀장님 이제 나 편애 안 해줘요?”

“그런 뜻 아냐.”

“계속 편애하겠단 뜻?”

조아라와 신아름의 사이에 끼인 성필은 능수능란하게 빠져나왔다.

“이제 진짜 이 버전이 끝이다? 더는 안 바꿔.”

“팀장님 그 말 아홉 번째인 거 알죠?”

“알아.”

원래 기획 최종본 같은 건 수십 번도 더 바뀌고 그런다. 아홉 번째에 마무리된다면 오히려 빨리 끝난 편이라고 해야 하겠지.

성필은 멤버들에게 파트 선정 끝을 선언한 후 연습실을 나왔다.

‘더는 못 미뤄.’

성필은 조정훈 감독에게 전화했다.

조정훈은 기다렸단 듯 전화를 받았다.

“이제 들어가도 될 거 같습니다.”

[드디어 끝났나 보네요. 알겠습니다. 저희도 그럼 마무리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오토마타’는 유독 안무 조정이 오래 걸렸다.

이전 프로젝트는 두세 달 정도 안무를 가다듬을 시간이 있었지만, 이번엔 두 달 안 되는 시간이 주어졌을 뿐이었다.

자연스레 뮤직비디오 촬영도 밀리게 됐다.

‘조금만 더 밀리면 아예 컴백 일이 주 전에 촬영을 들어가겠어.’

그보다 더 늦어질 수도 있고 말이다.

욕심이 있더라도 이쯤에서 끊어야 한다. 정 안무를 수정해야겠으면, 조정훈에게 재촬영을 요구하면 될 것이다.

돈이 또 깨지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건 안무가 또 바뀌었을 때 얘기고.’

성필은 이번이 안무 최종 버전일 것이라고 굳게 다짐했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잔상 파트도 이제 더는 바꾸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단순 변심으로는 바꿀 수 없다.

‘정말 컴백이 지척이야.’

멤버들이 안무에 숙달되기 위해서라도 이 이상의 수정은 피해야만 한다.

‘이제 기획으로 할 수 있을 만한 건 다 했어. 남은 건 기획을 실행으로 옮기는 것뿐.’

이대로 남은 컴백까지 모든 기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길, 성필은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일주일 후 소녀연맹 퍼포먼스 주간 평가.

“…….”

A&R팀과 함께 자리한 성필.

그들의 눈앞엔 방금 퍼포먼스를 마친 소녀연맹 멤버들이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성필은 의미 없이 ‘아……’란 소리를 낸 후, A&R팀원들을 한 번씩 쳐다보았다. 그들도 성필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일단 영상으로…….”

이재호가 녹화한 영상을 팀원들과 공유했다.

그것을 보자 문제점이 더욱 확연히 들어왔다.

성필은 화면으로부터 앞으로 시선을 올렸다.

“설하, 야…….”

제 잘못을 알고 있는지, 백설하는 줄곧 고개를 숙인 채였다. 그녀는 성필의 부름을 듣고 겨우겨우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 연습할 시간이 부족…… 하지는 않았지?”

잔상 파트.

백설하가 눈에 들어온다.

잘해서 눈에 들어온다는 게 아니다.

거의 구멍 수준으로 안 어울린다.

* * *

서유선은 안무를 완성한 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는 더 남아 있고 싶어 했으나.

‘죄송합니다, 이젠 정말 한계라서, 고향이 그리워서…….’

그리 말하며 일본으로 향했다.

사실 죄송할 건 없었다.

안무가 완성되고, 가로 엔터가 컨펌했으며, 멤버들에게 안무 전수도 마쳤다. 그 시점에서 그는 디렉터로서의 임무를 마친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에게 연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음.]

성필은 그와 화상통화로 연락했다.

백설하의 영상을 확인한 그는 난색을 표했다.

[모르겠어요.]

“네?”

[이상하게 보인단 건 아는데요, 정확하게 뭐가 문제인지는 딱 잡아서 말하기 힘들어요.]

댄서, 안무가, 트레이너는 각기 다른 직업이다.

댄서는 춤을 추는 직업이고, 안무가는 춤을 만드는 직업이며, 트레이너는 춤을 가르치는 직업이다.

백설하의 문제점을 짚고 고치는 건 트레이너에게 알맞은 일이리라.

[음, 아! 희진 님한테 봐달라고 하는 건 어떨까요? 그 파트는 희진님의 전문이거든요.]

“하희진 안무가님이요?”

[네.]

이 잔상 파트는 서유선이 만들었지만, 결국 여러 장르의 춤을 섞은 것이다.

백설하가 정지 포즈를 취하는 건 발레이니, 그 전문가인 하희진에게 봐달라고 하는 게 옳으리라.

성필은 곧장 하희진에게 연락했다. 고맙게도 그녀는 오늘 저녁 이후 시간을 내주기로 했다.

‘이유가 뭐지?’

춤을 평가하는 요소엔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한다. 동작이나 자세의 완성도 같은 객관적인 기준부터, 감정이나 표현력과 같은 주관적인 기준까지.

백설하에게 부족한 건 뭘까?

‘다른 멤버들과 비교하면…… 완성도인가?’

객관적인 기준은 지적하고 고치는 게 쉽다. 하지만 성필은 물론 A&R팀도 명백한 문제점을 제시하지 못했었다.

아마 댄서만이 알 수 있는 뭔가가 일그러졌거나, 표현력이 부족한 듯했다.

‘설하는 뭔가…….’

성필은 백설하에게 느꼈던 인상을 언어화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러다가 답이 안 나오겠다 싶어 연습실로 향했다.

1번 연습실엔 백설하와 리카를 제외한 이들이 모여 있었다. 성필은 그곳을 지나쳐 2번 연습실로 향했다.

문에 난 작은 창으로 들여다보니 백설하가 있었다.

‘한다.’

백설하는 땀을 뻘뻘 흘리면서 본인의 잔상 파트를 연습하는 중이었다.

먼저 1번, 한국 무용. 느린 듯 빠른 듯한 스텝, 마치 풀이 바람에 쓸리듯 좌우로 일렁인다.

‘여기까진 괜찮아.’

오히려 다른 멤버들보다 나은 느낌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접어든다.

발레.

일렁이던 백설하는 순간적으로 무릎을 굽힌 후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다. 그리고 스프링처럼 튀어 올라 회전한다.

‘저 상태를 턱(Tuck)이라고 하던가.’

공중에서 무릎을 엉덩이보다 위로 오게 들어 올린 상태다.

그러려면 공중에서 무릎을 굽혀야 하니, 엄밀히 말하면 발레 동작과는 거리가 멀었다. 발레는 기본적으로 점프 상태에서도 다리가 곧게 뻗어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도 2번 잔상 동작이 저런 모습이 된 이유는…….

‘사람의 발아래에 큰 공간이 생기면 진짜 나는 거 같잖아요! 무릎을 굽히는 편이 더 멋질 거예요! 다섯 명 동시에 겹쳐서 하면 얼마나 멋지겠어요!’

취한 퍼포먼스 디렉터 서유선이 그리 주장했기 때문이다.

리카가 1번 동작에서 멈추니 점프는 남은 네 명만 하는 것이지만, 그의 말마따나 넷이 동시에 턱 상태가 되도록 점프하는 건 꽤 멋졌다.

‘공중에서 한 번 턱 상태를 만들고, 그다음은 팔을 펼쳐서…….’

자세히 보니, 텔레비전에서 몇 번 보았던 피겨 스케이팅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착지한 백설하는 고아하게 움직이더니 나비와 같은 자세로 멈춰 섰다. 이건 발레의 모습과 닮았다.

이게 백설하에게 맡겨진 잔상 파트다.

성필은 주간 평가 때 백설하에게 느꼈던 인상을 다시금 느꼈다.

‘역시 뭔가 이상해.’

백설하에겐 상처가 될 말이겠지만, 멤버들과 비교하면 못하게 보인다.

‘문제가 있는 부분은 점프하는 순간부터 착지할 때까지인가.’

착지한 후 포즈를 펼칠 때는 백설하다운 고아함이 느껴진다.

백설하는 성필이 문 쪽에서 지켜보는 것을 모르는지, 계속해서 연습에 매진했다. 같은 동작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아!”

그걸 보고 있자니 성필은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때였다.

“아, 진짜요? 일본에선 그래요?”

“하이(네)! 아타시(저)도 겪은 건 아니지만 다큐멘터리에서 그랬어요! 배역을 정할 때 혈통을 고려한대요!”

“일본 전통 예술의 세계는 험난하네요.”

“가문과 피로 기술이 이어지는 걸 ‘이에모토’라고 하는데…….”

저편에서 한국 전통 무용가 허수인과 리카가 나란히 걸어왔다. 그 둘은 성필을 보곤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리카, 잠시만.”

“갑니닷!”

리카가 스프링처럼 튀어나와 성필에게로 달려갔다. 그리고 거의 부딪히기 직전 멈췄다. 당연히 관성에 따라 몸이 성필 쪽으로 휘청 기울었다.

성필이 깜짝 놀라 그녀를 받아냈다.

“위험하잖아!”

“그치만 제가 안 멈추고 달리면 이사님이 피하잖아요!”

“달려오면 당연히 피하지!”

“이제야 저를 받아주시는 거네요! 앞으로도 자주 써야겠어요! 그래서 무슨 일이신가요!”

성필은 누가 들을까 봐 겁이 나 그녀의 귓가에 입을 가져갔다.

“설하한테 말 좀 전해줘.”

“에?”

성필이 리카를 통해서 전해야 할 말이라니, 얼마나 보안이 중요하기에?

리카의 눈에 사명감이 나타났다.

가로 엔터의 전서구가 마침내 본격적인 임무에 들어선 것이다.

“프러포즈만 아니면 뭐든지 가능해요!”

“설하한테 보정 기능 있는 속옷 입으라고 말해주라. 스포츠 브래지어 같은 거.”

“시네엣(죽어엇)!”

리카가 성필의 옆구리를 애교스러운 주먹으로 마구마구 가격했다. 성필이 ‘아 아’ 소리를 내면서 변명했다.

“이유가 있어!”

“그런 이유는 듣고 싶지도 않아요! 보나 마나 ‘이렇게 만든 설하 네가 나쁜 거야!’라고 말할 거잖아요! 아무리 머릿속이 꽃밭인 쌤이라도 그런 변명엔 안 넘어가요!”

“일단 들어봐.”

리조트에서 장하양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런웨이에선 누구도 흔들리는 가슴(직접적으로 표현한 적 없음)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런 식의 신체 과시가 이루어지면 옷보다 그쪽으로 눈길이 갈 게 당연하다. 그 때문인지 상업 모델이라면 몰라도, 런웨이 모델들은 전부 슬랜더 체형이다.

“그게 춤에도 적용되는 거 같아.”

성필은 화를 냈던 말이지만, 민시화가 그러지 않았는가. 조아라의 신체는 천성적으로 무용에 적합하지 않다고 말이다.

성필은 방금 백설하의 춤을 보고 그 말을 이해하게 된 기분이었다.

“설하가 잔상에서 맡은 파트는 발레잖아. 그러고 보면, 발레리나도 전부 슬렌더 체형이야.”

“음, 요컨대 매력덩어리 쌤 때문에 춤의 매력이 깎인단 거네요?”

“……덩어리라고 부르지 마.”

발레리나는 나비처럼 나풀나풀 날아 다시 나비처럼 나풀나풀 떨어진다.

그런데 백설하가 그런 동작을 하자니, 날아오를 때는 나풀나풀거리다가도 떨어질 때는…….

“쿵! 이해했어?”

“출렁! 아닌가요?”

“리카야 제발 쫌 좀 제발 쫌 제발! 내가 순화하려고 노력하면 좀 맞춰줘!”

“와카리마시타(알겠습니다)!”

한구인이 보면 인상을 찌푸릴 경례와 함께 리카는 뒤로 돌아보았다.

“먼저 가 계세요!”

소외되어 있던 허수인은 잘됐단 듯 머쓱한 태도로 사라졌다.

“그런데 안무가님은 왜 계셔?”

“제 춤을 가르쳐주고 계세요! 제가 잔상에서 한국 무용 파트를 맡았잖아요!”

“와, 너 때문에 직접 여기까지 오신 거야? 정말 고마우신 분이네.”

“돈을 드렸으니까 오시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돈을 준 거였구나.

“잠깐, 그럼 트레이닝비란 거잖아?”

그렇다면 가로 엔터가 지불해야 하는 게……?

“아타시(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개인 레슨을 받는 거예요! 게다가 트레이닝비는 회사가 내주더라도 결국 저희한테 회수하지 않나요!”

“아냐, 잠시만, 트레이닝비가 아니야. 제작비야. 엄밀히 말해서 트레이닝이라기보다, 프로듀싱의 완성을 위해 쓰이는 돈이잖아? 그럼 비율에 따라 나눠서 가로 엔터가…….”

“그런 얘긴 됐어요!”

결국 성필이 한구인에게 이 사항을 전달하기로 했다. 리카는 왠지 정 없게 느껴진다면서 질색했다.

“그럼, 다녀올게요!”

”응, 부탁할게.

성필은 리카가 잘하는지, 문에 난 창으로 지켜보기로 했다.

리카는 연습실로 들어가 백설하와 마주 보았다. 그리고 검지로 문 쪽을 가리켰다. 문 쪽에 있는 성필을.

‘나를 가리키면 어떡해?!’

성필이 낸 아이디어란 걸 들키지 않기 위해 리카한테 부탁한 건데!

리카는 계속 문을 가리키면서 백설하에게 무어라 말했다. 백설하의 얼굴이 점점 붉어지더니, 이윽고 그녀는 고개만 끄덕이게 됐다.

리카는 해맑은 얼굴로 연습실 밖으로 나와 위풍당당히 가슴을 펼쳤다.

“이사님이 하신 말씀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해드렸어요!”

“죽어엇(시네엣)!”

성필의 공격에 리카가 ‘끼에에에에에에엑!’ 비명을 질렀다.

“저기…….”

조금만 더 있으면 그래플링 상태로 몰고 갈 수 있었을 텐데,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성필은 공격을 중단했다.

겨우 조이기에서 풀려난 리카가 거칠게 호흡을 내뱉었다.

연습실의 열린 문 안쪽으로 백설하가 서 있었다.

“이사님 혹시 안 바쁘시면 시간 좀…….”

“시간? 당연히 있지. 리카는 다른 데 가서 놀아.”

“너무해…… 저는 이사님의 말을 착실하게 들은 죄밖에 없는데에…….”

리카는 씁쓸히 등을 보이며 사라졌다.

성필과 백설하는 연습실로 들어왔다. 마주 보고 서자마자 그녀가 말했다.

“저, 이사님이 그러셨잖아요. 속옷…….”

여기서 애매한 말투를 쓰거나 당황하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성필은 중세기 이단심문관처럼 단호하고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응.”

“옳은 말씀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군.”

“……?”

“그렇구나.”

“아, 네. 확실히 그게…….”

백설하는 자기도 이런 주제를 꺼내는 게 부끄러운지 민망한 웃음을 보였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너무 제…… 그런 데만 관심이 있는 거 같아서 좀 그랬거든요. 그런데 이젠 제 몸을 사랑하게 됐다고 해야 할까, 이인성 선생님과 언노운 싱어에서 붙은 이후로…… 음…….”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

“네, 네에. 오히려 좋은? 그런, 그, 자신감이 생겨서…… 이후로는 조금 어…… 일부러 드러내려는? 그런 느낌이, 없잖아 있다고 해야 할까요…….”

성필은 가타부타 덧붙이지 않고 그냥 ‘응’이라고 답했다.

“그래서 뭐랄까, 춤을 출 땐 도리어, 음…… 드러내는 쪽이, 제 매력이라고 생각, 이런 말 들으면 기분 나쁘시겠지만…….”

“기분이 나쁘긴 왜 나빠. 다 맞는 말이야.”

“너무, 제가 노력해서 이뤄낸 것도 아닌데, 그걸로 자랑하는 것처럼 들리니까…….”

“에이, 뭘. 역으로 말하면 누구한테 훔쳐서 얻은 것도 아니잖아.”

성필은 얼굴에 서서히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 이야기를 길게 끄는 게 거북했다.

사람의 신체 부위를 가지고 본인 앞에서 이렇게 말해본 적이 있었나?

이건 연습생을 뽑을 때 신인개발팀과 이야기하거나, 의상과 같은 요소로 프로듀싱 회의를 할 때와 전혀 다른 상황이다.

무려 당사자가 앞에 있고, 당사자가 그 주제를 말하고 있으니.

“저는 그, 이번 ‘오토마타’ 의상은 아라나 다른 애들처럼 가슴이 파여 있는 버전이 없고…….”

“어, 그렇지.”

“이사님이 리카 통해서 전해준 말 듣고 ‘아’ 싶었어요.”

백설하는 가슴 앞에 양손을 모은 채 불안한 듯 꼼지락댔다. 그러면서도 성필을 올려다보는 표정만큼은 환했다.

환한 얼굴이지만, 성필은 백설하가 언제 저런 표정을 짓는지 알았다.

“역시, 춤이란 분야에선 도움이 되지 않는구나 싶어서…….”

백설하는 성필의 비위를 맞추려 하고 있다.

“눈에 안 띄게 하는 편이 좋겠죠?”

“…….”

이건 어쩌면, 그런 이야기일 수도 있다.

누군가가 자랑스러워하는 것을, 누군가가 ‘보기 싫다’면서 치워버리라고 하는 것.

사람들은 마음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신체 또한 마음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든 자신의 몸에 애착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가 ‘네 성격 X같다’라고 하는 것보다, ‘네 몸 X같다’라고 하는 게 상처인 인간들이 훨씬 많을 것이다.

그보다 더 직접적으로는, ‘네 얼굴 X같다’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인간에게 신체란 그만큼이나 소중한 것일 텐데, 그걸 숨기라는 말을 들으면…….

“이사님 말씀대로 보정 속옷 같은 걸 써서…….”

“아니.”

성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희망을 외쳤다.

“마음껏 드러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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