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1화
백설하가 수영장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살려줘엇!”
그런데 아무도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조아라는 백설하 바로 곁에 서서 수영장에 발을 살짝살짝 담궈 보는 중이었다. 그리고 또 그 옆엔 튜브에 바람을 넣는 장하양이 보였다.
왠지 모르게 장하양은 성필 쪽을 빤히 바라만 볼 뿐, 생사의 기로에 놓인 백설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성필은 벌벌 떨리는 손으로 백설하를 가리켰다.
“설하가 빠졌잖아!”
“아, 저거 말인가요!”
“리카 씨, 리더를 ‘저거’라고 표현하신 겁니까?”
한구인의 태클에도 아랑곳않고 리카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수영장은 얕아요! 발이 닿는다구요! 쌤이 계속 겁먹어서 극약처방을 쓴 거예요! 저대로 30초만 놔두면 곧 창피해서 얼굴이 붉어지실 거예요!”
“하지만 설하가 출렁이잖아!”
“표현이 이상하시군요.”
“설하가 흔들리고 있다고!”
“설하 씨의 전체가 아니라 부분을 보고 계신 겁니까. 통탄을 금할 수가 없군요.”
리카의 예언은 맞아들어갔다.
백설하는 얼마간 더 물 위에서 출렁거리더니, 곧 바닥에 발을 딛곤 창피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주변을 휙휙 둘러보곤 아무 일 없단 것처럼 물장구를 치기 시작했다.
개헤엄을 치는 모습이 처량해 보였다.
“근데 물 안 차가워?”
“살짝만 차가워요! 관리인분이 날씨를 생각해서 온도를 맞춰두신 거 같아요!”
“그렇구만. 한 이사님, 갈까요?”
“예.”
성필과 한구인이 선배드로 향했다. 그때 리카가 둘의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 사람이 새 옷을 입었으면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지 않나요!”
리카는 얼마 전 뉴욕에 속옷 광고가 걸린 한 유명 아이돌처럼 고혹적인 표정을 지어 보였다.
소름 끼칠 만큼 완벽하고 빠른 페이스 체인지였다. 과연, 한때 한류 배우를 꿈꾸었던 리카답다.
“나를 추항해요!”
“……추행?”
성필이 인상을 찌푸리자 리카가 당황했다.
“추, 추항해요! 추항 모르시나요? 한 이사님은 아시죠? 추항이요 추항!”
“혹시 추앙(推仰)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하! 아타시(저)를 추앙해요!”
성필은 리카를 추앙하기 위해 시각적 정보를 수집했다.
“음, 예쁘네.”
“뭔가 반응이 맥 빠지네요…….”
“나는…… 뭔가…… 아이돌리시한 복장이 훨씬…… 느낌이 좋은 거 같아……. 이왕이면 무대에 오른…….”
“왜 흉측한 걸 묘사하듯이 말을 끄나요?!”
당황해서다.
수영복엔 당연히 나름의 매력이 있다. 그런데 리카의 수영복 차림을 보자니 놀랄 정도로 ‘이게 뭐야?’ 싶은 마음이 든다.
리카의 뒤로 드리우던 후광의 강도가 한두 단계쯤 감소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왜지? 리카는 아무 일상복이나 걸쳐도 되게 매력적으로 보이는데…….’
어쩌면, 아이돌은 수영복을 입지 않기 때문에?
성필의 머릿속엔 ‘수영복 = 아이돌 아님’이란 공식이 성립되어 있는 것일까. 그래서 수영복을 입으면 매력이 줄어들었다고 인식하는 걸까?
‘내 미(美)의 기준은 아이돌인가? 아이돌다운 게 곧 아름다움일까?’
성필은 스스로도 몰랐던 자신의 인식 체계를 알게 되어 상당히 놀랐다.
그럼 보통 사람에게 아이돌리시한 복장을 입히면 매력이 더 돋보일까?
성필은 선배드 한쪽을 차지한 손혜빈과 홍규헌을 바라보았다. 둘은 선배드에 누워 에이드를 마시면서 허허롭게 수다를 떠는 중이었다.
‘사장님이 아이돌 같은 옷을 입으면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되는 걸까?’
성필은 프로이트가 된 기분이었다.
인간 심성 밑바닥에 존재하는 호오(好惡)를 탐구하는 정신분석자…….
“됐어요! 추앙은 한 이사님도 하실 수 있으시니까요!”
“잘 어울리십니다.”
“맥 빠지는 건 한 이사님이 더하시네요! 지음 오빠도 같이 오셨어야 하는데!”
정지음은 배신자다.
꼭 따라오고 싶다고 한 주제에.
성필이 주말에 업무로 잡아둬서 못 온다고 했으면서.
정작 정지음은 성필이 야유회에 가겠다고 결정해도 오지 않았다. 이유는 이수연 작사가와 약속을 잡았단 것이었다.
‘지음이 이 자식…….’
정지음은 야유회를 가지 않는 핑계로 성필을 들먹였던 것뿐이었다.
‘응원한다.’
성필은 정지음의 승리를 기원하면서 이번에야말로 선배드로 향했다.
“뭐 하시는 건가요?”
리카는 성필과 한구인의 행동을 보곤 고개를 갸웃했다. 성필이 선배드의 각도를 조절하여 눕고, 한구인이 그 근처로 다가가 섰기 때문이다.
“스포츠 마사지라도 하시는 건가요?”
“태닝크림을 발라 드리려고 합니다.”
“에에, 남자끼리요? 이상해요!”
“리카 넌 만화를 너무 많이 봤어.”
“아타시(제)가 해드릴게요!”
“거기서 멈춰. 징계건의서 받고 싶지 않으면.”
“히도이(너무해)!”
성필은 선배드에 엎드렸다.
각도를 조절할 수 있다지만 엎드리라고 만든 물건이 아닌 터라 불편했다.
돗자리가 없나 싶었으나, 등만 하는 거라면 일찍 끝나니까 참으려고 했다.
그런데 기다려도 손길이 느껴지지 않았다.
“한 이사님?”
“설명서를 읽고 있습니다.”
“아, 네.”
한구인이 설명서를 읽는 데는 약 30초가 걸렸다. 곧 크림을 짜는 소리가 들리고, 등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느껴졌다.
‘한 이사님은 의외로 손이 작으시네.’
손가락도 가늘다.
옛날에 피아노를 쳤다고 하던가. 리카에게 피아노를 처음 가르쳐준 것도 한구인이었다.
피아노라고 하니, 백설하를 처음 보았을 때가 떠올랐다.
‘설하 손가락이 가늘고 길었지.’
인간의 첫인상이란 건 의외의 부분으로 정해지는 듯하다. 성필이 처음 백설하를 보고 주목한 부분이 손가락이었으니.
당시엔 성필이 리카에게 손가락 뭐라 뭐라 했다가 이상한 취급을 당하기도 했었다.
그때를 떠올리자 절로 웃음이 떠올랐다. 등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권강철 트레이너의 마사지처럼 부드러워 기분이 좋았다.
“한 이사님 되게 섬세하게 바르시네요.”
“음, 그렇습니까?”
그때 크림을 바르는 그의 손길이 성필의 광배근을 미묘한 힘으로 꽉 쥐었다.
이틀 전에 등 운동을 한 성필은 근육통 때문에 ‘읍’ 소리를 내버렸다. 자기가 생각해도 웃긴 신음이어서 괜히 변명했다.
“아니 손짓이 너무 노골…….”
성필이 웃으면서 뒤로 돌아보자.
“아앗!”
리카가 보였다.
리카가 손에 크림을 두르고 성필의 등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한구인은 리카의 뒤에 서서 웃음을 참는 중이었다.
한구인이 웃음 반 목소리 반으로 말했다.
“손짓이 노골적입니까? 섬세하고?”
“…….”
성필은 리카를 노려보았다.
리카는 움찔 굳었다가 헤헤 웃으면서 다시 손을 움직였다.
“어떤가요! 아타시(저)의 섬세하고 노골적인 솜씨는!”
“아니…….”
성필은 적잖이 당황했다.
연습생 시절부터 리카의 스킨십은 어린아이처럼 과감한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 어지간히 그녀가 달라붙는 데는 면역이 있었는데, 설마 그녀에게 맨살을 만지게 할 줄은 몰랐다.
심지어 등을. 긴밀한 사이가 아니고선 피부와 피부의 접촉이 허락되지 않는 부위를.
긴밀한 사이가 아니라면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감촉이 등을 훑자 성필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그만.”
“맡겨두세요! 이왕 시작한 거 끝까지 할게요!”
리카의 손길이 활배근을 넘어 아래로 내려온다.
성필이 비명을 질렀다.
“척추기립근은 안 됏!”
“어이어이, 의외로 옆구리 근육은 단련하지 않았잖아! 왜 이렇게 말랑한 상태로 둔 거냐!”
“권강철 트레이너님이 옆구리 근육이 발달하면 미적으로 보기 안 좋댔어! 일부러 운동 안 한 거야!”
“이렇게 운동해서 누구 보기 좋으라고? 응? 사실 봐주길 바랐던 거 아니야? 이런 일을 기대했던 거 아니냐구!”
“그으, 그마안!”
이윽고 크림 바르기가 끝났다.
성필은 선배드에 엎드려서 흐느꼈다.
“이제 장가 못 가아…….”
“스읍, 후우.”
리카가 담배를 태우는 시늉을 했다.
“흥, 걱정 마. 책임은 질 테니까. 실버타운 입주서다. 사인해라.”
“나쁜 년…….”
상황극이 끝나자 성필과 리카가 큭큭 웃었다.
한구인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80년대 일본 극도(極道, 야쿠자) 영화 같군요.”
“이 클리셰가 그 시대에 나온 건가요? 처음 알았어요!”
“한 이사님 너무하신 거 아녜요? 리카한테 저를 팔면 어떡해요?”
“죄송합니다. 리카 씨의 표정이 너무 애절해서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에휴, 됐어요.”
성필은 기운이 다 빠진 채 선배드에 정자세로 누웠다.
“대신 정면은 한 이사님이 해주시는 거죠?”
“……예?”
“한 이사님 부러워요!”
“자, 빨리요.”
“…….”
한구인은 아무 말 없이 자리를 떴다. 그리고 홍규헌과 손혜빈의 근처로 다가가 새롭게 자리를 잡았다.
“한 이사님은 의외로 이런 농담에 면역이 없으시네요!”
“그러게.”
“그럼 정면도 맡겨주세요!”
“그건 진짜 안 돼.”
성필은 크림을 몸에 치덕치덕 바르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리카가 덜 바른 곳이 있다면서 삼각근이나 옆구리를 짚어주었다. 그럴 때마다 성필은 그녀의 손등을 찰싹찰싹 쳐냈다.
그때 성필의 눈에 신아름이 보였다. 그녀는 남자 숙소와 여자 숙소 사이, 건물 중앙부에서 나오는 중이었다.
그녀는 유리잔에 담긴 푸른색 에이드를 들고 있었다.
“그런데 저 음료수는 어디서 가져오는 거야? 근처에 카페가 있어?”
“중앙에 관리인이랑 직원분들이 계세요! 가면 음식이나 음료를 내주세요! 말만 하면 된다구요!”
“아, 그냥 홀인 줄 알았는데 그런 시스템이었구나.”
비싼 이유가 있었다.
이 건물과 부지 전체가 하나의 리조트였다.
오직 가로 엔터 사람들을 위한 단체 리조트다.
한국에 이런 곳이 있을 줄 상상도 못 했다.
이런 건물이 전체 부지 안에 대여섯 개씩 있으니, 꽤 규모가 크다고 할 수도 있겠다.
“꼭 미국 같네. 보통은 고층 리조트를 세울 텐데, 이런 저층 건물을 여러 개 둘 생각을 하고. 근데 비싸도 올 만한 거 같아.”
“그러게요! 프라이버시에 민감한 연예인들이 많이 올 거 같아요!”
주변 시야가 건물과 벽으로 차단되어 있으니, 프라이버시 보장은 확실할 듯하다.
물장구를 치던 멤버들은 고작 십수 분만에 지쳤는지 다른 이들처럼 선배드 위로 올라와 쉬기를 택했다.
하긴, 신아름과 리카를 제외하곤 수영 자체를 못 하니 물에 흥미가 적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장하양이 이쪽으로 손을 흔들었다. 성필도 손을 흔들어주었다.
“박 이사님은 물에 안 들어가시나요!”
“별로. 그냥 살이나 태우게.”
“아타시(저)는 태우면 안 되나요?”
“절대 안 돼.”
“에에, 크림 발라지는 것도 재밌을 거 같았는데 아쉽네요! 나중에 휴가받으면 해보고 싶어요!”
“리카, 근데 왜 여깄어. 멤버들 있는 데로 가. 굳이 나랑 안 놀아줘도 돼.”
“섭섭한 말씀 하지 마세요! 놀아준다니요!”
“나 장가 못 가게 해놓고서, 아직도 만족 못 했어?”
리카가 크게 웃었다.
“즐기고 계시는 거 같아서 다행이에요!”
“나?”
“하이(네)! 보세요, 회사만 벗어나도 이렇게나 즐겁게 이야기할 게 많잖아요!”
그 이야기를 듣고 성필은 깨닫는 게 있었다.
회사에선 리카와 이렇게 농담 따먹기를 해도, 머릿속 한편에선 일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회사란 공간, 서울이란 지역을 벗어나자마자 머릿속이 깔끔하게 비었다.
아까 전엔 정말 진심으로 웃고 떠들었다.
“쉬는 것도 중요해요!”
리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비켜드릴게요!”
“비켜? 누구한테?”
“어이, 그림 좋은데.”
손혜빈과 홍규헌이 껄렁거리면서 성필에게 다가왔다. 그 뒤엔 사라졌던 한구인이 따라오고 있었다.
“우리도 좀 껴주라.”
“하이(네)! 마음껏 끼세요!”
리카가 멤버들에게로 줄행랑쳤다.
그녀가 사라진 선배드에 손혜빈이 털썩 앉았다. 그리고 또 그 옆으로 홍규헌과 한구인이 나란히 자리를 잡았다.
가로 엔터의 사장과 임원들이 나란히 한 방향을 보고 누웠다.
“박 이사, 리카랑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나눠?”
“그냥요. 평소에 하는 농담 따먹기였어요.”
“그래.”
홍규헌이 성필에게 음료가 담긴 잔을 내밀었다. 싸한 향으로 예상하건대, 술이었다.
얼음과 토닉, 양주를 섞은 것이다.
“으아, 어제도 술 마셨는데.”
“그래서 너 일찍 갔구나?”
“아니 누나, 일찍 간 건 수영복 사려고 그랬고. 뭐, 술도 마시긴 했지.”
“암튼.”
홍규헌이 나른한 신음과 함께 말했다.
“오늘은 다들 푹 쉬어.”
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야말로 휴양지 분위기다.
“그런데, 다들 푹 쉬기 전에.”
그 휴양지 분위기를 홍규헌이 끊었다.
“간단하게 일 이야기 하나만 해볼까?”
“이런 곳까지 와서 말입니까?”
“입이 근질거려서 못 참겠어서 그래. 진짜 딱 몇 분만 이야기하자. 그 뒤론 일 얘긴 조금도 안 꺼낼게.”
다들 홍규헌에게 집중했다.
일이라면, 차기 그룹에 관한 것일까?
홍규헌이 이렇게나 조급히 논하고 싶은 문제라면 내년에 발표할 보이그룹 정도일 텐데.
“뭐어, 소녀연맹에 관한 거야.”
홍규헌은 술로 차분하게 입술을 적셨다.
“회사를 더 확장하고 싶어.”
“지, 지금보다 더 말입니까?”
한구인은 어찌나 당황했는지 말까지 더듬었다. 그에 비해 성필과 손혜빈은 평정을 유지했다.
홍규헌이 검지, 중지, 약지를 폈다.
“생각하고 있는 건 아티스트 IP 사업부, 해외사업부, 공연사업부야.”
홍규헌은 하나씩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티스트 IP 사업부란 건 소련이들이랑 관련된 파생 상품을 관리하는 부서. 관리……를 맡으면서 개발과 판매를 담당하기도 하지. 아티스트 간접 참여 상품, 즉.”
굿즈.
굿즈 수익은 케이팝 그룹에게 매우 중요하다. 앨범까지 포함한다면, 어느 그룹은 굿즈 판매 수익이 총매출의 50%를 상회하기도 한다.
아티스트 파생 상품, 간접 참여 상품은 잘만 기획하면 콘서트 수익을 압도하는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다.
“해외사업부는 해외와 관련된 일을 전담하는 부서야. 일본에선 웨벡스와 협업하고 있지만, 솔직히 다른 나라는 오리무중이나 다름없어. 소련이들 인기가 한국과 일본에만 한정된 건 아니잖아?”
그렇다.
케이팝의 글로벌화는 이름답게 몇몇 국가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일본, 중국, 베트남, 태국, 미국, 브라질.
굳이 국가가 아니라 동남아권, 유럽권, 영미권, 남미권, 이렇게 큰 단위로 분할해도 된다.
“그런데 우리 인력으로 신경 쓸 수 있는 건 고작해야 한두 국가가 전부야. 심지어 해외 인기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일본은, 웨벡스의 도움이 없다면 손도 제대로 쓸 수 없는 수준이고.”
만약 이게 전략 게임이라면, 가로 엔터의 시야는 한국과 일본으로만 국한된다.
다른 나라는 전부 검게 칠해져 있다. 가로 엔터도 모르는 이유로 수익이 들어오지만, 그 경로와 위세를 실감할 수는 없는 수준.
“그러니 불을 밝혀야 해. 해외사업을 총괄하고, 탐색하고, 진행할 부서가 필요하단 게 내 판단이야.”
임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으로 공연사업부. 박 이사, 그러니까 A&R팀이 언제까지나 공연까지 담당할 순 없어. 음반 작업만 해도 바쁠 텐데 공연 미팅까진 선을 넘었지. 이건 소녀연맹을 넘어 추후의 그룹을 위해서도 전담하는 부서가 필요해.”
콘서트, 행사, 페스티벌 등 공연만을 전담하는 부서의 존재.
세계 음악 업계의 수익 대부분은 음반이 아니라 콘서트로 이루어진다. 그걸 담당하는 부서는 A&R보다 크면 컸지, 작을 수는 없다.
물론 가로 엔터는 조진만의 ‘아틀라스’에게 외주를 주고 있기에 본격적인 콘서트사업부까진 만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전문적인 공연기획 인력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야. 자, 이게 내 비전이야. 나는 말야, 최근 들어 이런 생각을 계속하고 있거든.”
소녀연맹은 현재의 가로 엔터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큰 그룹이다.
석유가 펑펑 나오는데, 그걸 제대로 쓸 시설이 없어 그냥 공중에 흩뿌리는 중이다.
“아까워. 너무 아까워. 그래서, 더 커져야 해.”
가로 엔터는 소녀연맹을 감당하기 위해 이보다 더 커져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 임원들 생각은 어떨까?”
한구인은 손등으로 턱을 괴곤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제시했다.
“자본에 여유가 있는 건 사실입니다. 소녀연맹의 매출이 이대로 이어지기만 한다면, 동시에 두 그룹도 런칭 준비에 돌입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회사 보유금이 많은 건 좋은 일이지만, 아깝단 생각을 많이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내 비전이 명확한 수익으로 돌아올지 모르겠다, 는 건가?”
“그렇습니다.”
한구인이 시원하게 인정했다.
“이런 말씀이 어떻게 들리실지 모르겠지만, 사장님께서 제시하신 일은 주먹구구식으로 어떻게든 돌아가고 있습니다. 더 정교화된 조직이 수익을 향상시킬 수도 있겠지만, 확정된 게 아니잖습니까.”
“그렇지. 애초에 우리는…….”
“그쪽 방면의 노하우가 없어요.”
성필이 홍규헌이 꺼낼 말을 대신 답했다. 홍규헌이 더 말해보란 듯 그에게로 고갯짓했다.
“가장 중요한 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인력, 우두머리겠네요.”
“그렇지.”
아티스트 IP 사업 전문가.
해외사업 전문가.
공연사업 전문가.
“전부 다 찾기 어려운 인간들이야. 능력이 있으면 진즉 큰 회사에서 일하고 있을 테고. 우리가 미래를 바라본다면 바닥에서 키워도 되겠지만, 그럼 소련이들을 커버하는 게 늦어.”
소녀연맹의 성장이라는 단물을 받아먹지 못하고 바닥에 줄줄 흘리는 꼴이 된다.
홍규헌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선 노하우가 필요하다. 그 노하우는 인간에게, 혹은 회사에게 깃들어 있다.
회사라면 대형 기획사나 중견 기획사 수준은 되어야 할 것이다.
인간이라면…….
“그 부서를 맡는 사람들은 부장급, 임원급일 거예요.”
어디에서든 회사 계급제의 상층까지 올라 본 인간 정도나 되어야, 홍규헌의 비전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어디 보자…….”
손혜빈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더니 난해한 미소를 띠었다.
“헤드헌팅밖에 답이 없겠는데요?”
다른 회사에서 인력을 유출시켜야 한다.
가로 엔터에 노하우가 없다면, 훔치는 수밖에 없다.
“미인계라도 써볼…….”
“그런 분들을 데려오려면 인건비가 무지막지하겠군요.”
손혜빈의 농담을 한구인이 막아섰다. 손혜빈이 삐친 티를 냈다.
“보장된 회사를 버려야 하니, 눈이 돌아갈 돈을 주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러게요.”
성필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뭐, 저보다 연봉이 높아도 참을게요. 저희는 회사 주식 받았잖아요. 차별받는다고 생각 안 할 테니까, 그분들한테 마음껏 퍼주세요.”
“이건 부서 전체를 만드는 것보다, 책임자급 한 분을 모시는 데 훨씬 돈이 더 들겠군요. 아예 한 사업을 바닥부터 기획하고 총괄해야 하니 연봉이 1억을 넘겠습니다.”
한구인이 허허 웃었다.
손혜빈은 왠지 아쉬운 투로 투정했다.
“저희 사이에 임원들이 더 늘어나는 거예요? 지금 분위기가 좋은데.”
“잠깐.”
홍규헌이 당황하여 대화를 중지시켰다.
“해야 한다, 아님 말아야 한다, 그런 것부터 논의해야 하는 거 아니야? 바로 방법을 논의해?”
“네?”
성필이 무슨 뜻이냔 듯 홍규헌을 바라보았다.
“사장님이 내리신 사업적 결단이잖아요. 그럼 당연히 따라야죠?”
홍규헌은 얼떨떨했다. 그리고 아주 옛날이 떠오르기도 했다.
홍규헌이 소녀연맹의 데뷔를 앞당기라는 지시를 내렸을 때 성필이 한 말.
자신은 근본적으로 홍규헌을 위해 일한다. 그러니 그녀가 시키면 한다.
그때가 재현되는 듯했다.
“뭐, 성필이 같은 충성심도 있겠고요.”
손혜빈이 성필의 말을 받았다.
“그럴듯하지 않아요 일단은? 사장님이 갑자기 생각나서 하신 말씀도 아니실 테고.”
그야 갑작스러운 결정이 아니긴 하다.
몇 달을 고민해서 자료를 찾아보고, 조사하고, 홀로 고민하여 마침내 꺼내는 말이었다.
그리고 모든 구상이 끝난 최근, 드디어 임원들에게 전달할 결심이 섰다.
홍규헌은 이 일의 첫 번째 고난이 바로 임원들의 반대나 저항을 이겨내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오빠야들이나 언니야가 사업하는 건…….’
이렇게 화기애애하게 ‘할게요’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기획 제출과 피드백과 반려와 논의와 논쟁과 강압과 저항과 정치의 장이었다.
그런 것을 이겨내는 게 위에 선 자의 자질이라 여겼고,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이렇게 쉽게……?’
솔직히 말하자면, 홍규헌은 얼이 다 빠질 지경이었다.
그러자 한구인이 홍규헌을 달래듯 말했다.
“이렇게 의사결정이 빠른 게 중소의 장점 아니겠습니까? 후일 가로 엔터가 거대해지면 느끼지 못할 스릴이니, 지금 마음껏 즐겨두십시오.”
“……한 이사도 동의하는 거야?”
“그렇습니다.”
홍규헌은 순식간에 임원 셋의 동의를 얻어냈다.
회사 규모를 지금보다 몇 배로 키우자는 과감한 주장이 순식간에 받아들여졌다.
“동의라기보다는…….”
성필이 말했다.
“사장님을 믿으니까요.”
가로 엔터는 삼각형을 이룬다.
콘텐츠를 만드는 이들.
돈을 관리하는 이들.
그리고 사업하는 이들.
홍규헌은 사업하는 쪽이다. 사장이다. 그녀가 내렸던 사업적 결단은 가로 엔터의 세 축 중 하나였고, 지금까지 성공적으로 작동해왔다.
홍규헌과 한구인이 콘텐츠 생산자인 성필과 손혜빈의 결단을 존중했던 것처럼, 한구인, 성필, 손혜빈은 홍규헌의 사업적 결단을 신뢰한다.
“애초에 뭐, 사업은 저희 전문이 아니기도 하고요.”
성필이 쑥스러운 태도로 웃었다.
그는 전생에 석세스 엔터의 매니지먼트만을 담당하는 부대표였었다. 매니지먼트의 전문가이지 사업의 전문가는 아니다.
손혜빈은 과거의 스타이자 대기업 디자인 파트에서 근무했었다. 그녀 역시 사업을 잘 모른다.
한구인은 돈에 관한 전문가다. 돈을 다루는 건 잘하지만, 사업적인 면에선 이론적이며 보수적이고 수동적이다.
이중 사업의 전문가는 홍규헌이 유일했다.
소녀연맹 이전의 과거엔 콘텐츠 생산, 즉 프로듀싱부터 실패하여 사업적 재능을 발휘할 길이 없었지만.
이젠 다르다.
그녀의 손엔 소녀연맹이 있다.
지금까지 가로 엔터의 성장은 소녀연맹을 서포트하는 부서, 즉 콘텐츠 생산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젠 그 힘을 밖으로 표출할 사업부의 확장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이 시점에선 과감할 수 있는 확장이지만, 홍규헌은 그리 판단했고 임원들은 그 판단을 믿었다.
“아…….”
홍규헌은 그런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임원들의 신뢰 어린 눈길이 부끄러운지 고개를 돌렸다.
“알겠어, 그럼. 이 얘기는 이걸로 끝내자.”
“어, 사장님 우시는 거예요?”
“손 이사, 놀리지 마. 안 울거든?”
“사장님 카와이이(귀여워어).”
“박 이사 그딴 말투 한 번만 더 써봐.”
성필은 헤실헤실 웃었다. 그도 누군가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기분을 알고 있다.
그건 뭐라 말하기 힘든 행복이다.
홍규헌이 성필을 믿고 프로듀싱 권한을 주었을 때와 같이, 그녀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감동하고 있지 않을까.
성필은 이왕 홍규헌을 기분 좋게 해주려는 거, 칭찬을 더 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사장님 수영복 멋져요. 올 블랙 대담…… 왜 때려요?!”
“성희롱이라서.”
“알겠어요……. 사장님이 외적 미모 찬사를 안 좋아하시는 줄 몰랐어요…….”
“……아니다, 한 번 해봐.”
홍규헌은 아까의 부끄러움을 없애려는 듯 일부러 더 과감하게 행동했다. 그녀는 양손을 머리 뒤로 가져가 받쳤다. 그리고 다리를 꼬았다.
“자, 나를 추앙해.”
“오, 겨드랑이.”
“박 이사 진심으로 기분 나쁜 거 알아?!”
“오, 사장님 장골(腸骨) 라인.”
“손 이사 미쳤어?!”
“…….”
“한 이사는 아무 말 없는 게 더 기분 나빠!”
“히잉…….”
홍규헌은 부글부글 끓는 주전자처럼 뺨이 붉어졌다. 그리고 삐친 듯 옆으로 돌아누웠다.
“오, 뒷…….”
“손 이사님, 이제 그만두시는 게 좋겠습니다.”
“알았어요.”
손혜빈은 홍규헌이 귀엽단 듯 그녀의 귓가를 톡톡 두드렸다. 실제로 홍규헌이 동생이니 귀엽게 보일 것이다.
그때 멤버들 쪽에서 소란이 일었다.
성필은 상체를 일으켜 그쪽을 보았다.
장하양과 백설하가 마주 보고 서서 대치하고 있었다. 그걸 동생 라인이 팝콘을 먹으면서 구경하는 중이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성필이 큰소리로 외쳤다.
“얘들아 무슨 일이야!”
“댄스 배틀이에요!”
리카가 흥분되는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소녀연맹의 춤 최약체를 가리기로 했어요!”
그래서 저렇게 살벌하구나.
“오늘 한 명은 나락으로 가는 거예요!”
“……리카 씨 말투가 너무 심하시지 않습니까?”
한구인이 수군거렸다. 손혜빈도 동의했다.
“춤 못 춘다고 대놓고 무시하는 거 같아서 좀 그러네요.”
“어쩌면, 리카 씨가 숙소에서도 저런 식으로 살살 긁어서 댄스 배틀 같은 걸 하게 된 거 아닐까요?”
“그럴듯하네요.”
모처럼 재미난 구경거리가 생겼다.
성필은 멤버들에게로 다가갔다. 다가가자 조아라가 자신의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성필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아저씨 여기가 1등석 그거 전거근이에요?”
“한 이사님도 그렇고 다들 내 전거근에 관심이 많네.”
“만져봐도 돼요?”
“안 돼.”
“2라운드.”
백설하가 호승심 넘치는 목소리로 장하양에게 선언했다.
“2라운드로 끝내는 거다.”
“…….”
“하양아, 이쪽 안 보고 어디 봐?”
“네? 아, 뭐라고 하셨어요?”
“2라운드로 끝내자고.”
“아, 네. 뭐.”
장하양이 비웃음을 머금었다.
“1라운드도 괜찮은데요?”
“하…….”
정말 살벌한 분위기다.
성필이 조아라에게 속삭이듯 물었다.
“둘이 왜 저래?”
“리카가 심심하다면서 둘 사이 이간질했어요.”
리카, 무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