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한는 프로듀서-538화 (538/760)

538화

암스테르담.

네덜란드의 수도, 전통과 현대성이 공존하는 아름다운 도시이다.

암스테르담의 어느 광장 공터.

세계에서 생활체육인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답게, 이곳저곳에서 달리거나 자전거를 타는 이들이 쉽게 눈에 띄었다.

‘밝게만 보이는데.’

한 동양인 남자가 광장 계단에 앉아 광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노트북을 무릎 위에 올려놓은 채 눈 위로 손을 드리워 햇볕을 막았다.

전체적으로 채도가 높은 도시다. 외국이라서 더 개성적이고 강렬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이런 곳이 환락의 도시라고 불리는 건가.’

마약 합법화.

거대한 성매매 사업.

환하게 빛나는 암스테르담의 이면엔 환락의 도시란 이명이 붙어 있다. 매년 엄청난 관광객을 불러들이는 원동력이라고도 한다.

남자는 빛 안에 숨어든 어둠을 떠올리다, 저 앞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언어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PTR―17이다.’

그, 남 교수는 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유심히 바라보면서 키보드를 두드렸다.

광장엔 100명 정도 되어 보이는 젊은이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중앙이 빈 원형을 이루어 서 있다가, 음악이 재생되면 일부가 중앙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케이팝 랜덤 플레이 댄스.

이젠 세계 각국의 대도시에서 흔한 광경이 된 놀이 문화이다.

[‘케이팝 랜덤 플레이 댄스’란 공터에 모여 케이팝을 랜덤으로 재생하여, 그 춤을 출 줄 아는 이들이 중앙으로 와 춤을 추는 놀이 문화이다. 세계적인 대도시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이 문화는, 지금까지 존재했던 댄스 문화와 비교하여 매우 독특한 특징을 지닌다. 일단 커뮤니티의 거대함이다. 뉴미디어 시대에 걸맞은…….]

남 교수는 비교 대상을 고민했다.

영국의 레이브 문화? 아니면 90년대의 흑인 볼룸 문화?

남 교수가 신음을 흘렸다.

이번 칼럼의 주제는 ‘케이팝 랜덤 플레이 댄스’였다. 처음 주제를 듣곤 ‘쉽겠네’ 싶었는데, 의외로 가닥을 잡기 어려웠다.

그는 전문가로서 어느 현상을 진단하고 해석해야 한다.

‘그런데 그게 어렵단 말이지.’

케이팝 랜덤 플레이 댄스란 건 스마트폰이 등장한 이후의 문화다.

과거에 존재했던 댄스 문화와 쉬이 비교할 수 없다. 비교할 수 없단 건 분석하기 힘들단 것이다.

그때 생소한 음악이 그의 귀로 들어왔다.

‘프로젝트 포유?’

프로젝트 그룹인 ‘포유’가 해체된 지 벌써 1년이 훨씬 지나갔다. 그다지 큰 족적을 남긴 그룹도 아니라 금방 사람들 머릿속에서 잊혀질 줄 알았건만.

남 교수는 노트북에서 광장으로 눈을 돌렸다.

“아, 저런.”

100명은 될 법한 이들 중 나온 건 고작 세 명이었다. 저 곡의 춤을 외우는 게 고작 셋뿐인 것이다.

보통은 20명, 30명 정도가 나온다.

정말 인기 있는 곡은 절반 이상이 나오기도 한다.

그런데 고작 세 명이라니.

저 셋은 엄청 부끄러울 게 분명하다. 전체에 섞여 춤을 추다가 갑자기 주목받는 처지가 되었으니.

그때였다.

“――!”

세 명을 둘러싼 수십 명이 환호를 보냈다. 셋은 부끄러워하다 환호에 힘입어 안무를 선보였다.

동작이 하나씩 이어질 때마다 환성과 박수는 더더욱 강해졌다.

그걸 보며 남 교수는 어렴풋이 미소 지었다.

[……특징 중 하나는 커뮤니티의 결속력과 공동체 의식이다. 춤을 외우고, 연습하고, 공공장소에서 만인에게 선보인다는 과정 자체가 하나의 의식으로 작용한다. 그럼으로써 커뮤니티에 소속감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속감은 경쟁을 배제한 스포츠와 비슷할 것…….]

전화가 울렸다.

손가락에 전기가 짜릿하게 울릴 정도로 필이 왔건만, 이렇게 허무하게 맥이 끊어지다니.

남 교수는 짜증스럽게 폰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곧 얼굴이 펴졌다.

“자네, 오랜만이네!”

[잘 지내셨어요 교수님. 연구년은 잘 보내고 계시죠?]

상대는 석세스 엔터의 팀장…… 에서 가로 엔터테인먼트의 이사가 된 사내다.

박성필.

옛날에 책을 쓸 때 그에게 도움을 받았던 적이 있다.

“나야 항상 잘 지내고 있지. 자네는 인생의 최전성기를 달리는 거 같던데?”

[아직 멀었습니다.]

“꿈이 커.”

[교수님, 글로브 신곡 들어보셨습니까?]

“아, 그게 오늘이었나.”

[뮤비는요?]

“곡을 안 들어봤는데 뮤비를 봤을 리가.”

[교수님 생각을 듣고 싶어서요.]

“성질 참 급하군. 나중…….”

[지금요.]

남 교수는 낮은 웃음을 흘리면서 아이튜브에 접속했다. 그리고 글로브의 신곡 뮤비를 재생했다.

‘제목은 후 어(Who uh)인가? 직관적이지 않군. 한 단어가 아니야. 아마 훅 가사인 거 같은데.’

남 교수는 차분히 ‘후 어’를 보았다.

뮤비가 끝나자 그는 또 웃음을 흘렸다.

[어떠세요?]

“왜 그렇게 급했는지 알겠어. 이건 뭐…….”

[엄청나게…….]

성필은 말을 끌었다.

남 교수는 성필과 윤상열의 이야기를 안다. 글로브를 프로듀싱하는 게 윤상열이니, 성필은 그의 칭찬을 입 밖으로 꺼내고 싶지 않으리라.

게다가 그는 확신조차 꺼렸을 것이다. 분명 이 곡으로부터 굉장한 영감을 받았겠지만, 그게 자기 혼자만의 것일까 의심했겠지.

남 교수는 그가 바라는 답을 꺼냈다.

“이게 향수에 기댄 일차적인 전략이 아니라면, 씬을 바꿀 수도 있겠어.”

[……!]

“새로운 문법이 쓰이는 거야.”

2세대 걸그룹을 양분했던 ‘섹시’와 ‘청순’이란 컨셉은 3세대에 이르러 거의 사멸했다.

어느 한 걸그룹이 시발점이었다.

분홍빛으로 대변되는 여성성을 갖추면서도, 검은색으로 대변되는 강인함을 뽐내는.

“걸크러시가 주류로 올라왔을 때처럼.”

그 그룹은 아이돌의 문법을 새로 썼다.

개척자였으며 선두였고 정점이다.

“해외의 기류와 유행을 가져온 거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건 발상의 전환이었네.”

2세대가 내세웠던 ‘섹시’와 ‘청순’이란 이분법은 근본적으로 한 가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 컨셉엔 남자가 여자를 바라보는 시선밖에 없다.

여자가 바라보는 여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프로듀서가 남자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한국은 서구보다 일본의 영향을 짙게 받았으니, 주류가 그런 식으로 형성된 것 또한 당연했다.

그리고 그 당연하지 않은 생각, ‘여자는 어떤 여자를 바라지?’란 생각을 한 프로듀서가 시장의 주도권을 가져갔다.

이전에도 그런 도전을 한 이들이 있긴 했지만, 기술적으로도 아이디어적으로도 부족함이 있었다.

3세대의 시작은 그런 실패를 딛고, 발상의 전환을 통해 이뤄졌다.

그런 전환이.

“그때의 신기함이, 글로브에게서 보이네. 물론 섣부른 판단일 수도 있어. 평범하다고 하면 평범하군. 그 표현법이 새롭…….”

[먹힐까요?]

성필은 뜸을 들이곤 다시금 물었다.

[시장이 움직일까요?]

“모르겠네. 두고 봐야지. 아마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 컨셉은 반드시 반향을 얻어. 그런 기분이 들어.”

남 교수는 글로브가 보여주는 이 색을 정의할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대중음악의 전문가로서 불확실한 개념을 남겨둔단 건 영 찝찝한 일이었다. 그래서 과거에 전성기를 누렸던, 현재엔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는, 그런 단어를 가져왔다.

“청순…… 이라고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군.”

글로브가 보여주는 젊음과 사랑이었다.

고리타분한 주제다.

하지만 그걸 보여주는 방식에 차별점이 있다.

키워드는 ‘미국 문화’와 ‘십 대 문화(Teen culture)’다. 대놓고 서양권을 노린다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그걸 표현하는 방법이 구식이 아니다.

“순수함과 젊음에 깃댄 사랑을 이 시대에 그대로 보여주면 먹힐 리 만무하지. 그렇지만, 아, 하고픈 말이 정말 많아.”

수십 번 정도 돌려보고 성필과 대화를 나눴으면 좋았을 것을.

“옛날의 청순이란 컨셉을 현대로 가져오면 그냥 무시당한 채 잊혀질 거야. 이걸 현대적으로 해석하려면 곡에 자아가 필요해. 그걸 잘 녹여냈어. 누군가가 바라보는 이 아이들이 아니라, 아이들 본인의 마음이 있어. 세밀하군.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컨셉을 만들어내기 위해 필요한 게…….”

[곡의 세련됨.]

“그래. 이거 아무리 들어도 한국인이 만든 게 아니야.”

[윤상열이랑 스웨덴 분이 공동 작곡가시더라고요.]

“또 스웨덴이야? 그 인간들 음악은 참 잘 만들어.”

세계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음악 장르라고 하면, 미국의 팝을 제외하곤 스웨디시와 라틴 계열이다.

스웨덴은 대중음악 교육 시스템이 매우 광범위하고 정교하게 확립되어 있다. 즉, 뛰어난 음악가가 그만큼 많이 배출되는 구조란 것이다.

스웨덴 작곡가들은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며, 그들의 스타일을 스웨디시팝이란 이름으로 부른다.

이전엔 빌보드 TOP10에 오른 곡 중 무려 절반이나 스웨덴 작곡가가 만들었던 것인 적도 있었다.

케이팝도 그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이거 곡이 너무 좋아…….”

남 교수는 황홀하여 말하다가 퍼뜩 미소를 지웠다.

“혹시 이거 나만 좋은 건 아니겠지? 평론가 픽인가? 평론가들만 좋아하는 스타일인 건…….”

[전 처음 들었을 땐 ‘신기하다’는 느낌이었어요. 계속 듣다 보니 괜찮고. 그런데 확실히 귀를 잡아끄는 힘이 있어요. 한 번도 케이팝에서 못 겪어봤던 스타일이에요.]

“자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안심이 돼.”

진심이었다.

소녀연맹이란 그룹을 프로듀싱하는 사람이 바로 성필 아닌가. 그의 감각은 유행의 최전선에 서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분명 그럴 텐데, 남 교수는 그의 목소리에서 불안함을 느꼈다.

“스웨덴 애들이 글로벌한 음악을 지향하긴 하지. 케이팝이 거의 서구화됐다지만, 국내 정서에 즉각적으로 받아들여지긴 힘들어 보이기도 해. 그런데, 자네가 시대에 뒤처지기라도 할까 봐?”

남 교수가 성필의 심정을 지적했다.

성필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아직은 멀었지 않은가. 키를 손에 넣은 지 5년도 안 됐어.”

이제 보니 성필은 강박이 있는 듯했다.

지금까지 소녀연맹이 일궈낸 성과만 보아도 그는 전설적인 프로듀서이다. 그리 불려도 부족함 하나 없다.

‘그런데 이보다 더 위를 보는 건가?’

만족을 모르는 인간이다.

역으로 말하면, 향상심이 비상하게 높다.

만약 남 교수가 성필 입장에 있었으면 금방 교만해져서 사방팔방 자기 자랑을 퍼뜨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에 반박하는 인간은 없었겠지.

왜냐하면 성필은 그만한 교만을 부려도 되는 인물이니까.

‘정말 대형 기획사를 이기겠단 마음가짐인가?’

아이돌 역사상 손에 꼽는 횟수밖에 일어난 적 없는 역전 현상.

그건 중소기업이 대기업을 앞지르는 것과 비슷한 소리다. 실리콘 밸리에서 가끔 탄생하는 유니콘 IT 기업만큼이나 희소한 사례다.

‘대형 기획사를 신경 쓰는 것도 모자라 중견 기획사까지 걱정하다니.’

하긴, 석세스 엔터니까.

‘게다가 이 업계 인간들은 자기가 유행에 뒤떨어진단 소리에 과민 반응하곤 하지.’

성필은 유행에 뒤떨어지기도 전에 지레짐작 걱정하는 듯했지만, 그것도 야망의 일면이 아니겠는가?

단 한 순간도 늙지 않겠다. 성필에게선 그런 의지가 돋보인다.

[이게 시작점이 될까요?]

갑자기 성필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시작점이라니?”

[4세대를 규정짓는 시작점이요.]

“아, 세대.”

아이돌 업계는 시대의 특징적인 부분을 따와 세대를 구분한다.

아이돌의 태동기 1세대.

아이돌의 확립기 2세대.

아이돌의 흥성기 3세대.

이제 사람들은 4세대를 바라본다. 하지만 그 특징을 무엇으로 정해야 할지 모른다. 아직 마주하지 않았으니 당연하다.

글로벌화를 이뤄낸 3세대 다음으론 무엇이 기다릴까?

“만약 4세대란 게 아직 오지 않았다면, 소녀연맹은 3.5세대 정도로 불리겠군. 벌써부터 뒤처질까 걱정하는 건 너무 섣부른…….”

[‘라나 델 레이’가 떠올라서 그래요.]

남 교수는 헛웃음을 뱉었다.

이건 또 상상하지 못한 비유다.

“글로브의 이번 곡이 그 정도인가?”

라나 델 레이.

팝 시장의 판도를 바꾼 팝스타다.

걸그룹 ‘스파이스 걸스’가 내세운 걸스 파워를 시작으로, 서양권은 약 15년에 이르는 파티 음악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여성 아티스트들은 긍정적이고 강인하며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걸크러시란 단어로 축약되는 컨셉이 주류를 지배했다.

그에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 게 ‘라나 델 레이’다.

“그만한 파급력이 있을 거라고?”

라나 델 레이는 우울하고도 아름다운, 슬프고도 찬란한 음악을 하였다.

그녀는 강인한 모습보다 나약한 모습을 사랑했고, 반항적이기보다 순종적이었다.

권력자에게 붙어 기생하는 사랑.

나를 버리려는 남자에게 키스를 애걸하고.

나쁜 남자를 위해 봉사하는.

시대의 조류를 거스르는 음악을 했다. 그런 만큼 수많은 비판에 직면했다. 그녀가 여성 인권을 백 년 전으로 퇴보시켰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라나 델 레이는 단칼에 이를 부정했다.

‘궁극적으로 내가 바라는 일이 어떻게 내 인권을 퇴보시키지?’

그녀는 걸크러쉬라는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전복시켰다. 그리고 다른 조류, 팝의 얼터너티브를 부상시켰다.

라나 델 레이 이전과 이후의 팝 시장은 전혀 달라졌다. 긍정적이기만 한 음악의 전성기는 끝을 고했다.

그리고 그녀가 만든 새로운 조류는 ‘빌리 아일리시’라는 과감한 얼터너티브(대안)를 출현시킴으로써, 마침내 하나의 문화로서 꽃을 피웠다.

라나 델 레이의 업적.

여성 아티스트들에게 강요되다시피 했던 걸크러시를, 단순히 하나의 선택지 중 하나로 만들었다.

덕분에 팝은 이전보다 훨씬 다양해졌다.

“그러니까 자네가 하는 말은…….”

글로브의 곡으로 인해, 현재 케이팝에서 주류인 컨셉.

“걸크러시가 생명을 잃을 거라고?”

한국의 현재는 일본의 10년 전이란 말이 있다. 문화에 한정해선 그런 말이 통하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그 사용구를 한국과 미국의 예시로 적용한다면, 한국의 문화가 미국의 10년 전이라면.

‘라나 델 레이 같은, 씬의 판도를 바꾸는 사람이 나올 타이밍이라는 건가?’

그건 너무 비교적인 설명이다.

세계 문화에서 시차는 없어진 지 오래다.

일본에서 유행하던 게 몇 년을 지나 한국으로 들어오고, 미국의 유행이 10년을 지나 한국에 흥성하는 일은 더는 벌어지지 않는다.

인터넷과 세계화는 문화 시차를 거의 완벽히 없앴다.

“자네, 외국의 예로 한국 문화계를 예측하는 건 너무 고루한 방법이야.”

[아뇨, 그런 말은 아니에요. 그냥 시대가 앞당겨지는 게 아닌가 해서.]

남 교수는 의아했다.

성필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시대가 앞당겨지다니?

성필의 말투는 이상했다.

‘미래를 알고 있단 거 같잖아.’

걸크러시가 생명을 잃는 건 아닌데, 시대는 앞당겨진다?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은 그 경계점이 필요하다. 그런데 성필은 막연히 시대가 당겨진다고만 말하고 있었다.

‘글로브 신곡에 너무 충격받아서 머리가 잘 안 돌아가나?’

아마 그럴 것이다.

그리고 소녀연맹이 뒤처질지 모른단 압박감 때문에 초조해하고 있겠지.

“너무 걱…….”

남 교수는 그를 위로해주려다가 퍼뜩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랜덤 플레이 댄스는 슬슬 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아마 마지막일 곡이 나온다.

소녀연맹의 ‘애플 크러쉬’.

[교수님?]

남 교수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아, 자네가 이걸 봤어야 하는데.”

[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너무 걱정하지 말란 거야. 자넨 조금 쉬어야 할 필요가 있어. 그럼 끊겠네. 집필해야 할 원고가 있어.”

[아, 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남 교수는 전화를 끊고 앞에서 펼쳐지는 장관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소녀연맹의 ‘애플 크러쉬’.

무려 100명 중 80% 이상이 나와서 춤을 춘다.

이렇게나 많은 이들이 나와 한꺼번에 춤을 춘 건 처음이다. 그들도 놀란 것처럼 서로를 보면서 웃는다.

수십 명이 한 번에 같은 춤을 추는 건 신성하게까지 보였다.

남 교수는 그걸 보면서 만족스러운 한숨을 흘렸다. 그리고 다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댄스가 이토록 활발하게 진행되는 이유가 있다. 각자도생의 경쟁적인 사회 속에서, 이러한 집단 무용은 청소년들이 타인과 연결되어 있단 감각을 느끼는 몇 안 되는 경험 중 하나일 것이다.]

“누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겠어.”

이 먼 외국에서 소년·소녀들이 한국어로 된 노래로 춤을 추게 될 날이 오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심지어 그 곡 중 하나가, 그 어린 청년이 프로듀싱한 그룹의 거라니.’

항상 프로듀서가 되고 싶다면서 수줍게 이야기하던 청년은, 이젠 자신의 꿈을 세상에 마음껏 전하고 있다.

그 꿈은 보기 아름다워서, 항상 다음을 기대하게 된다.

남 교수는 집필을 마쳤다.

[서로가 좋아하는 것을 누구도 해치지 않고, 누구도 쓰러뜨리지 않고, 그저 즐기기만 할 뿐. 케이팝 댄스가 가지는 생명력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 교수 남태섭]

* * *

남 교수와의 통화는 성필을 진정시키진 못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성필은 자신에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성필은 컴퓨터 옆에 세워진 캘린더를 확인했다. 연도와 날짜를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당연하게도 바뀌지 않았다.

“이런 게 지금 나오면…….”

갑자기 윤상열의 천재성이 발휘되어 그가 시간을 뛰어넘은 곡을 만들어낸 걸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정호환의 예시만 보아도, 미래가 바뀌는 건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니까.

하지만 이건 정호환 때와는 다르다.

윤상열은 미래를 끌어왔다.

아니, 어쩌면.

‘미래가 다가왔다? 예정보다 더 빨리?’

있어선 안 되는 일이다.

적어도 ‘지금’ 벌어져선 안 된다.

성필은 다시 캘린더를 확인했다.

몇 번을 확인해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타임 리미트가 깨진다.’

진정한 아이돌 4세대가 시작된다.

4세대를 결정짓는 한 가지 요소는 케이팝 시장의 막대한 양적성장이다. 소녀연맹이 여태껏 받아먹었던 수혜를 아득히 능가할 정도의 시장 팽창.

그리고 그 양적성장은 아이러니하게도, 이미 존재했던 선발주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만약 이게 글로브의 곡 하나에 한정된 현상이 아니라, 문화계의 전체적인 동향이라면…….’

성필의 행동이 나비효과가 되어 문화발전을, 문화변동을 더 빠르게 이끌었다면.

만약 그 시대가 예정보다 일찍 열린다면.

‘소녀연맹은, 우리 애들은…….’

정점에 설 수 없다.

흔히 4세대 걸그룹이라고 불리는 선이 있다.

그 선을 나누는 건 곡의 세련됨이나 안무 구성의 변화, 뮤직비디오 어필 방식의 진보, 컨셉의 다양화 등등 여러 가지가 있다.

하지만 세대라고까지 불리는 만큼 가장 중요한 건 시간이다. 정확히는 시기이자 연도이다.

4세대 아이돌은 이전에 존재했던 3세대, 3.5세대 아이돌들보다 확연히 거대한 팬덤을 구가한다. 선배들이 만든 수혜를 더 직접적으로 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혜를 받을 수 있는 건 시간의 축복을 받은 이들뿐.’

직설적으로, ‘4세대 준비, 시작!’이란 선 뒤에 서야만 그 수혜를 받아먹을 수 있다.

단적인 예로 3세대의 탑티어 중 하나로 불렸던 KS 엔터의 걸그룹, 븨이에스는 현재 최대 초동판매량이 10만도 넘지 못한다. 다른 탑티어 그룹 중 하나는 현재 초동판매량 20만 장이 최고 기록이다.

그런데 올해 데뷔한 걸그룹 중 하나는 데뷔하자마자 초동 10만 장을 가뿐히 넘겼다.

내년엔 20만 장, 내후년엔 30만 장, 또 나중에 ‘이게 기본 아니야?’란 분위기마저 생긴다.

앨범 판매량은 곧 팬덤의 크기를 의미한다. 많은 팬을 거느린다는 건 즉 아이돌로서의 가치를 뜻한다.

4세대 걸그룹, 시장 팽창의 가장 직접적인 수혜자들.

그리고 소녀연맹은 그 선에 끼지 못한다. 시간상 3세대와 4세대 사이에 애매하게 끼어 있으니까.

‘케이팝 시장에 새로 유입된 팬들은, 아무래도 원래 존재하던 그룹보다 새 그룹을 파길 좋아하니까.’

아이돌에게 주어진 7년의 기한.

그 시작부터 함께하고픈 마음은 너무 당연하다.

이왕 팬이 될 거면 그룹과 쓴맛 단맛 다 보면서 함께 나아가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3세대가 이룩한 시장 팽창으로 유입된 이들은, 이미 존재했던 그룹이 아니라 새 그룹들의 팬이 되길 선택한다.

‘지금의 케이어스 같은 그룹이 두세 개씩 더 생기는 건데…….’

그 와중에 최고의 아이돌을 노리라고?

엄청나게 힘들 것이다.

‘지금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는데!’

사람들이 나누는 4세대의 본격적인 선은 소녀연맹이 입지를 다잡은 후에 다가올 것이었다.

그때쯤이면 팬덤 성장과 공고화를 마쳤을 테니, 4세대 그룹의 등장으로 잃어버릴 성장성 따위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애초에 생각이란 게 ‘시대를 앞서간 노래가 나왔네’ 정도에서 머무르지, 어떻게 ‘시대가 앞당겨졌어!’로 생각이 흘러가겠는가.

‘……아니, 호들갑 떨지 말고 잘 생각해보자.’

성필은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케이어스의 성장세는 전생보다 가파르다.’

이전 앨범 초동 판매량은 60만 장.

케이팝 걸그룹 역대 기록 2위.

‘말이 안 되는 기록이야. 적어도 이 시기에 세워질 수 없는 기록.’

역대 기록 1위는, 현대 케이팝의 문법을 바꿔버린 3세대의 정점이 차지하고 있다.

그들로 인해 3세대가 열렸다고 할 정도로 문화적 영향력이 거대한 그룹이다. 소녀연맹이 받아먹었던 낙수(落水)의 장본인들.

그런 그룹 바로 아래에 케이어스가 있다.

‘글로브만 봐도 그래. 전생보다 성장이 빨라.’

어쩌면, 세계는 계속 성필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필은 그것을 단순한 변화로만 받아들였다. ‘시대가 앞당겨지고 있다’는 거대한 발상까지 닿지 못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성필 자신이 발전을 앞당겼단 뜻이 된다. 성필은 그 정도로 자의식이 강한 인간이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성필은 멈칫하곤 수첩과 펜을 들었다.

‘당황하고만 있어서 어쩌자는 거야.’

4세대의 시작은 선발주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어떤 이유로든, 3세대와 4세대에 걸쳐 데뷔한 그룹들은 마땅한 반짝임 없이 천천히 가라앉는다.

4세대로 이르는 필터를 통과하지 못하고 그저 그런 그룹으로 끝난 이들 말이다.

하지만 예외는 있다.

3.5세대로부터 4세대에 이르는 길.

그 필터를 통과한 그룹들이 존재한다. 필터를 통과하여 4세대 그룹들과 같은 선상에서 경쟁했던 이들은, 분명히 있었다.

‘당연히 케이어스는 그 안에 포함돼.’

그리고 손가락 한두 개로 꼽을 수 있는 그룹이 더 있다. 굉장히 적은 사례라 참고조차 하기 힘들다.

소녀연맹 정도면 이미 필터를 통과한 게 아니냐, 그리 낙관적으로 생각할 순 없다.

‘대형 기획사의 3.5세대 그룹마저 본격적으로 등장한 4세대에 비비지 못하고, 별다른 성과 없이 애매하게 사라져갔었으니까.’

성필은 필터를 통과한 그룹들의 특징을 정리해갔다. 그리고 역시 너무나 당연한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혁신성.”

고루함을 깨부수는 혁명성.

성필은 다시 모니터를 보았다. 글로브의 뮤비가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만약 소녀연맹과 같은 세대 중 가장 먼저 필터를 뚫는 이들이 있다면, 그건 글로브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성필도 그래야만 한다.

‘소녀연맹이 최고의 아이돌에 닿으려면, 이 위기를 뚫고 나가야만 해.’

최대한 빠르게 팬덤의 규모를 키우고 그들을 결집시켜야 한다.

‘한 명에게라도 더 소녀연맹의 노래를 전해야 해.’

케이팝에 유입된 이들이 4세대 그룹들에 붙기 전, 한 명이라도 더 소녀연맹의 팬으로 만들어야만 한다.

거대한 성공이 필요하다.

팬이 되진 않고는 못 배길 성공이.

그럼 여기서 또 의문이 생긴다.

‘이번 아라의 노래는 그 목적에 적합한가?’

필터를 부수는 창이 될 수 있나?

소녀연맹 데뷔 앨범 초동 판매량 1만.

다음 앨범 2만.

다음 앨범 12만. 타이틀곡 최고 순위 1위.

다음 앨범 26만. 타이틀곡 최고 순위 2위.

그리고 그다음.

‘아라의 프로듀싱은…….’

소녀연맹에게 이보다 더한 성공을 가져올 수 있는가?

‘아냐, 아라가 가져오는 게 아니야.’

조아라의 프로듀싱은 그 자체로 존재할 뿐이다. 그걸 세상에 알리고 빛을 보여주는 역할은 성필의 것이다.

‘내가 성공시킨다.’

혹은, 조금만 낙관적으로 생각하자면.

‘그냥 내가 호들갑 떠는 걸 수도 있어.’

이 위기감은 미래를 본 성필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글로브의 신곡을 보곤 ‘특이하네’라거나 ‘이상하네’ 같은 감상밖에 없을 것이다.

‘나 혼자 호들갑만 안 떨면 돼. 특히 애들한텐 영향이 안 가도록 하자.’

어차피 성필의 목표는 최고의 아이돌을 프로듀싱하는 것이었다.

4세대가 한발 빠르게 다가온다 하더라도, 목표가 살짝 더 어려워질 뿐 아예 불가능하게 보이진 않는다.

‘난 애들을 믿어. 애들이 지닌 빛을 믿어.’

언제까지나 믿으니까…….

믿으니까…….

“일을 더 많이 해야 해.”

* * *

‘오토마타’ 가이드 보컬 녹음 현장.

백설하는 녹음 부스 안에 들어가 바들바들 떨었다. 부스 바깥에는 정지음과 리카가 쉴 새 없이 백설하를 몰아치고 있었다.

리카가 토크백을 눌렀다. 그녀의 목소리가 부스 안에 울려 퍼졌다.

[인간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함을 표현하세요! 그렇게 부끄러워하면 분노도 쏙 들어갈 거라구요!]

백설하는 침을 꼴깍 삼킨 후 마이크에 입을 가져갔다.

그리고 노래했다.

흉부공명(胸部共鳴).

“워우 워 워 워우 워 워 워어!”

비강공명(鼻腔共鳴).

“뜨르르 따따따!”

두성공명(頭聲共鳴).

“쓰아! 쁘르르르르 쓰아!”

전신공명(全身共鳴).

“승리! 투쟁! 해방! 이야아악―!”

‘오토마타’의 하이라이트 파트 보컬 녹음.

보컬이라기도 뭐했다. 그냥 함성이었으니까.

‘오토마타’ 하이라이트는 춤에 집중했다. 무슨 게임 보스전도 아니고 춤에 1페이즈, 2페이즈까지 나누어 퍼포먼스를 구성하기까지 했으니.

절대 노래 부르면서 출 수 없다. 만약 추겠다면, 노랫말 대신 거친 헐떡임만 들려주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조아라가 낸 아이디어가 이것이었다.

노랫말이 안 되면 함성으로 하자!

“설하야!”

부스를 나가자마자 정지음이 눈물을 글썽이며 맞아주었다.

“넌 할 수 있을 줄 알았어…….”

“정말이에요…….”

리카가 코를 훌쩍이면서 백설하에게 안겨 왔다.

“소녀연맹의 메인 보컬은 쌤밖에 없어요! 다른 누구도 차지하지 못해요! 영원히 쌤의 자리예요!”

백설하는 외치고 싶었다.

이 순간만, 제발 다른 누가 소녀연맹의 메인 보컬 자리를 가져가 달라고.

무대 위에서

‘워우 워 워 워우 워 워 워어! 뜨르르 따따따! 쓰아! 쁘르르르르 쓰아! 승리! 투쟁! 해방! 이야아악!’

이라고 외칠 걸 생각하니 당장 눈을 감고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심지어 이 가사, 작사가가 쓴 것도 아니다.

리카가 멜로디를 떠올리면서 흥얼거리던 것을 그냥 가사로 받아적었을 뿐이다.

이런 것을 실라블이라고 하는데, 물론 실라블을 가사에 그대로 싣는 경우가 있긴 하다. 그런데 ‘뜨르르 따따따’ 같은 실라블을 가사에 그대로 실을 줄은 몰랐다.

백설하는 정지음과 리카의 칭찬 세례를 받으면서 살포시 눈을 감았다.

그녀의 눈가에 희미한 눈물이 반짝였다.

‘이사님, 이건 분명 아라의 복수예요.’

‘애플 크러쉬’ 때 죽어라고 보컬 트레이닝만 시켰던 복수가 틀림없어…….

“설하 너도 기쁘구나!”

“쌤 울지 마요오! 아타시(저)도 울 거 같아요오……!”

“기념으로 다 같이 외칠까?”

뜨르르 따따따!

그렇게 백설하에게 괴로웠던 가이드 보컬 녹음은 무려 3회차 만에 성공했다.

정지음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회사로 가는 길. 백설하는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리카의 손길을 무시하면서 생각에 잠겼다.

‘일본에서 돌아오고 나서 뭔가…… 하루하루가 너무 평화로운 거 같아.’

‘우리들의 프로듀싱’을 하고 있는 조아라는 매우 바쁠 것이다.

물론 백설하가 여유롭단 뜻은 아니다.

안무가 완성됐으니 매일 트레이닝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으니까.

‘이 평화로움은 아마…….’

권태감이다.

나른한 권태감.

더는 옛날처럼 망할 걱정은 안 해도 된다. 소녀연맹은 인기 그룹이니, 팬들에게 보여주고픈 모습만 생각하면 된다.

‘온전한 평온 속에 있단 건 이런 기분이구나.’

조아라는 평온하긴커녕 매일 골머리를 썩이고 있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조아라의 고민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을지도 모른다.

‘아라가 싸우는 건 내 성적일 거야.’

백설하가 ‘애플 크러쉬’로 거두었던 것보다 더 나아야만 한다. 조아라는 그런 압박감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을 것이다.

백설하는 문득 나른함에서 깨어났다.

‘아라랑 같이 고민해도 모자랄 판에 난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른함? 권태감?

그런 것을 느낄 틈은 없다.

사랑하는 동생이 심혈을 기울여 일하고 있다. 언니로서, 리더로서 놀 시간 따위 있어선 안 된다.

‘회사로 돌아가자마자 아라한테 도와줄 건 없냐고 물어보자.’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될 것이다. 그건 ‘우리들의 프로듀싱’을 먼저 해보았던 백설하가 인정한다.

‘아라의 부담감을 조금이라도 덜어줄 거야.’

반드시.

“프라이빗 리조트 갈 사람? 1박 2일이야.”

회사로 가자마자 민경섭이 멤버 전원을 불러놓고 그렇게 물었다.

“저, 저요!”

백설하가 손을 번쩍 들었다.

“프라이빗 리조트면 그런 거죠? 풀장 있고, 바비큐도 구워 먹고, 엄청 큰 건물 안에! 그런 거 맞죠?! 아, 꿈이었어요. 어릴 때부터 그런 곳에 꼭 가보고 싶었어요.”

“이 날씨에 풀에 들어가면 추울 거 같은데.”

감히 백설하에게 반론한 신아름은 조용히 책상에 이마를 박고 잠들었다.

“다들 갈 거지?”

백설하가 눈을 빛내자 다들 설렁설렁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리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아타시(저) 질문 그렇게 보지 마세요?! 쌤 말에 토 달려는 게 아니에요!”

“어, 리카. 무슨 질문인데?”

“저희만 가나요!”

“응.”

“다른 분들은요? 이거 야유회 아닌가요!”

“맞는데, 약간 포상 개념이거든. 사장님이 주는 포상. 임원들은 임원들끼리 가고, 너희들은 너희끼리 가고, 일반 직원들은 야유회 갈 거 그냥 돈으로 받고. 하하, 난 안 가. 사장님한텐 비밀이지만, 난 돈이 더 좋거든.”

“사장님의 포상이라…….”

사장님의 포상에 대한 심도 깊은 고민에 빠졌던 리카. 그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즉시 반박했다.

“왜 따로 가야 하나요! 이왕 갈 거면 다 같이 가는 게 좋지 않나요! 다 같이 수영복 입고 노는 거예요!”

“난 모르겠다. 사장님이나 이사님들한테 여쭤봐. 근데 아름이 말엔 동의해. 이 날씨에 수영복 입고 풀에 들어가면 춥…….”

백설하가 노려보자 민경섭은 쭈그러들어 슬금슬금 물러났다.

리조트. 백설하의 어릴 적 꿈이었다.

어릴 때 애니메이션 티비 채널에서 나오는 아동용 만화에서 자주 나오던 에피소드가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즐기는 리조트 파티 말이다.

그 광경은 백설하의 머릿속 깊이 남아 있었다. 어른이 되고 나서도 말이다.

돈도 벌었으니 친구들이랑 가도 되련만.

“바로 물어보러 가요!”

리카가 말했지만 아무도 답하지 않았다.

“쌤!”

“으응? 나, 나?”

“다 같이 가는 걸 바라시지 않나요!”

“어, 음…….”

성필, 한구인, 홍규헌, 손혜빈, 아마 정지음도 끼어 있겠지. 이 다섯과 소녀연맹이 함께 놀러 간다, 라…….

그때 백설하는 불가항력으로 어느 이미지를 떠올렸다. 옛날에 리카의 보드게임 박스 안에서 발견했던 성필의 바디프로필 사진이었다.

“…….”

“부끄러우면 됐어요!”

“나 아무것도 상상 안 했어?!”

“……?”

“아, 아니야.”

“다들 싫은 거예요? 싫어?”

리카가 장하양과 동갑들을 번갈아 보았다.

장하양은 어쩔 수 없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리카가 바라면 그렇게 하자.”

“에에, 안 내키시나요? 언니가 싫으면 안 할게요.”

“…….”

“…….”

“……아하하, 난 리카가 하고 싶은 대로 했으면 좋겠어.”

“똑바로 말하세요!”

“다 같이 가고 싶어!”

장하양이 모두를 향해 연극하듯 큰 제스처를 펼쳤다.

“우린 동료잖아! 함께가 아니면 의미가 없어!”

“오, 언니 진짜 연기력 물올랐네요.”

“아라쨩도 갈 거지?”

“나야 뭐, 아무래도 상관없어.”

“조아라 너 그래도 돼? 하루하루가 아까운 거 아니야?”

“회사에서 보내준다는 데 안 가면 바보지. 아, 근데 난 다 같이 놀러 가고 그러는 거 좀 피곤하…… 쌤 그 손 치워요! 안 간단 뜻이 아니잖아요?!”

“요시(좋아).”

리카는 더 할 말 없냔 듯 좌중을 둘러보았다.

“진짜 끝난 거지? 다들 결정한 거지? 이제 말해도 되는 거지?!”

리카는 주먹을 꼭 쥐고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우미다(바다다)!”

* * *

[임원 참석자 목록

홍규헌

박성필(취소)

한구인(고민 중)

손혜빈

정지음(취소, 박 이사님이 저를 협박했습니다. 사실은 저도 가고 싶었어요.)

민경섭(결혼 축하합니다)]

“…….”

리카는 참석자 목록을 받아들곤 황망히 성필을 바라보았다.

“박 이사님…… 왜 안 가시나요……?”

“일하고 싶어서.”

성필의 눈엔 일을 향한 열망이 아른거리고 있었다. 그에겐 반드시 소녀연맹을 성공시키겠단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일, 이요.”

리카는 허망한 목소리였다.

마치 결혼기념일에 남편에게 ‘일 때문에 늦어’란 문자를 받은 아내와 같은 얼굴이었다.

리카가 그런 아내와 다른 점은, 남편이 오길 마냥 기다리지 않는단 것이다.

“쉬는 것도 일이에요!”

실버타운 메이트, 필사의 설득 시작!

“쉬는 건 그냥 노는 거야!”

“손나(그런)!”

필사의 설득, 시작하자마자 끝나다!

“말이 안 되면 몸의 설득이에요!”

“설득의 ‘설’은 말하다의 설(說)이…… 어? 어? 너 내 몸에 손 하나라도 대 봐라? 너 그 팔 치워. 치우라고 했다. 야, 다가오지 마. 내 팔에 들이대지 마아아아앗!”

그 광경을 보면서 이재호와 강지혜가 수군거렸다.

“박 이사님 간다에 만 원.”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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