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7화
“어, 어떤 부분이요?”
서유선이 다급하게, 동시에 조심스레 물었다.
“아뇨, 안무는 괜찮아요. 기대 이상으로 좋게 뽑혔어요. 전문가분들이 추셔서 그런 감도 있겠지만, 정말 마음에 들어요.”
서유선과 안무가들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마음이 아예 편해지진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조아라에게로 향했다.
조아라는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매우 안쓰럽게 보였다.
‘박 이사님이 말씀하셨지. 부족하다고.’
안무가 괜찮다면, 부족한 건…….
“나요?”
조아라가 묻자 성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분명 ‘닿았다’고 느꼈다. 스스로 시원스레 만족할 수 있을 만한 퍼포먼스였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고?
“뭔데요.”
조아라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녀는 순순히 성필의 평가를 받아들였다. 받아들인 후, 성필의 지시에 따라 동작을 수정할 셈이었다.
춤을 평가하는 기준엔 여러 가지가 있다.
개성, 마음, 표현력, 이런 뜬구름 잡는 소리에서부터 완성도, 신체, 포즈 등의 객관적인 기준까지.
예전의 조아라는 개성을 1순위로 두었다.
그렇지만 현재는 형태의 완성도를 1순위로 둔다. 그리고 그보다 높은 0순위는 성필의 평가다.
‘100점에 닿을 때까지…….’
조아라는 스스로를 깎고 또 깎을 것이다.
“뭐가 부족해요?”
“춤의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
안무가들이 침을 꼴깍 삼켰다.
성필이 씩 웃었다.
“의상!”
성필은 발에 날개가 달린 것처럼 쌩하니 연습실을 나섰다. 그리고 이유이를 붙잡아 돌아왔다.
“아, 히카리가(빛이)…….”
이유이는 어디 어두운 곳에 있다 왔는지, 빛이 쨍하니 내리쬐는 연습실로 들어오자마자 눈 위에 손을 얹었다.
그녀의 손에는 막 리폼한 듯한 의상이 들려 있었다. 오늘 검사받을 ‘오토마타’ 컨셉 의상이었다.
“옛날에 아라가 그랬지? 춤은 의상이 반의 반은 된다고.”
“어, 뭐…….”
가로 엔터의 연습생이 되기 전.
조아라는 댄스 대회에 나갈 때 입을 의상을 직접 수선하여 만들곤 했다. 학원 언니들과 밤이 새도록 바느질했던 건 그녀에게도 소중한 추억이다.
그렇게 고생해서 신경 쓸 만큼, 의상이란 춤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25%가 부족한 춤만 보고 평가할 순 없지. 아라야, 이거 입고 춰줘.”
“……하하.”
조아라는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잔뜩 긴장했더니, 결국 성필의 주접일 뿐이었다. 화를 낼까 했지만, 봐주기로 했다.
조아라가 이유이에게서 의상을 받아들었다.
“알겠어요. 100%로 춰줄게요.”
잠시 후, 조아라가 옷을 갈아입고 연습실로 들어왔다.
“……워우.”
주킨 댄서 신지욱이 낮은 목소리로 감탄했다.
조아라의 의상은 맨살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상의는 검은 면 재질에 목부터 손목까지 모두 덮었다.
하의는 고급스러운 빛깔을 내는 검은 디스코 팬츠였다. 상의를 팬츠 안에 넣어 입으니, 두 옷의 색이 일치하여 마치 같은 옷 같았다.
그 위, 복부를 거의 다 가리는 커다란 벨트를 걸쳤다. 쇠로 된 부분은 금색이었다.
신발까지 검은 워커인, 그야말로 흑일색(黑一色)이었다.
“대담하네요?”
하지만 단 한 부분, 맨살이 보이는 곳이 있었다. 바로 가슴이었다.
가슴 위만이 뚫려 선명한 살구색을 드러냈다. 어깨를 드러낸 옷을 오프 숄더라고 한다면, 이 옷은 오프(오픈) 바스트라고 해야 하리라.
쉽게 말해 가슴이 파여 있다.
“…….”
조아라는 시선을 내려 물끄러미 자신의 흉부를 내려다보았다. 분명 보정 효과가 있는 옷일 텐데…… 보정이 의미가 없어 보인다.
조아라가 설명을 요하듯 이유이를 노려보았다.
“언니, 제대로 설명해야 해요. 나 꼽 주려는 거 아니면 명명백백한 이유가 있죠?”
“당연히 있지!”
이유이는 많은 사람 앞에서 옷을 설명할 기회가 오자 기뻤다. 뺨을 살짝 붉힌 그녀는 전문가답게 당당한 태도로 설명을 시작했다.
“‘오토마타’란 컨셉에 착안해서 비주얼팀 사람들이랑 회의를 했어. 가장 먼저 나온 건 아라 네가 예시로 들었던 호프만 이야기의 ‘올림피아’였어.”
오페레타 ‘호프만 이야기’.
그 오페레타엔 올림피아라는 자동인형이 나온다. 올림피아의 발명자는 호프만에게 그녀가 인형이라고 말하지만, 호프만은 믿지 않고 올림피아에게 반한다.
결국 올림피아는 인형답게 망가져 고장 나고, 호프만이 실망한다는 이야기다.
한국에선 유명 성악가가 올림피아의 ‘인형의 노래’를 부른 것으로 조금 인지도가 있는 이야기다.
“그래서 올림피아 역을 맡았던 사람들의 의상을 쭉 훑어봤지. 그런데 웬 로맨스 판타지에나 나올 법한 드레스밖에 없던 거야.”
“그것도 아이돌리시하게 바꾸면 나쁘진 않을 거 같긴 했어요.”
“박 이사님 말씀도 맞긴 한데…… 모티프를 너무 신경 쓴 게 보였잖아요.”
사실 이유이는 드레스 타입의 의상도 여러 개 디자인했었다. 하지만 계속 뭔가가 걸렸다.
“자동인형이 아니라 그냥 인형으로 주제를 넓히면…… 모티프의 범위가 훨씬 넓어진다! 내 천재적인 두뇌가 거기까지 생각한 거야!”
이유이는 들떠선 그리 말했다.
성필은 말을 아꼈다. 사실 저 아이디어는 한구인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계속 고민을 거듭했지.”
자동인형이 아니라 인형이라면…….
그리고 마침내 찾아냈다(한구인이).
“‘블레이드 러너 2049’! 거기에 조이라는 로봇이 나오거든? 로봇도 인형이잖아? 설계된 대로 움직이는 인형. 아라 네가 제시했던 컨셉이랑 정확하게 일치하는 모티프야. 그렇지?”
“아, 그거 한의사님이 추천해줘서 봤는데.”
“그, 그, 그래? 아, 한 이사님이…….”
“좀 지겹지 않아요? 난 지겹던데. 개인적으로 1982년 블레이드 러너가 더 나았어요.”
“어…… 응!”
이유이는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보지 않았다. 단지 한구인의 조언을 듣곤 여배우의 이미지를 찾아보았고, ‘이거다!’ 싶어서 의상에 차용한 것일 뿐.
“드니 빌뇌브는 인간 심연을 들여다보는 건 좋은데, 거기 너무 심취해서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힘이…….”
조아라는 한구인에게 배웠던 영화 지식을 마음껏 피로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듣는 사람이 놀랄 정도로 심도 깊었다.
어쩔 수 없는 게, 한구인이 드니 빌뇌브의 팬이라 조아라에게 이 이야기를 많이 해주었기 때문이다.
이유이는 그 이야기를 듣는 내내 땀을 삐질삐질 흘렸다. 자존감에 취해 ‘내가 생각했어!’라고 말했는데, 조아라가 계속 한구인 이야기를 하니 양심에 찔렸던 것이다.
그래도 계속 입 다물고 있는 것도 뭐하니.
“나는 여주인공 이름이 마음에 들었어! 조이는 조아라랑 비슷하잖아? 헤헤…….”
이유이의 답변은 그 정도가 전부였다.
“아, 아무튼 주제가 자동인형인데 시대상을 미래로, 사이버펑크로 가져올 거라곤 아무도 생각 못 했을걸?(이유이도 생각 못 했었음) 엄청난 발상의 역전 아니야? KS 엔터 비주얼팀도 이런 건 생각 못 해! 자, 그래서…….”
이유이가 자신만만하게 조아라를 가리켰다.
“사이버펑크 시대의 자동인형, 조이입니다!”
“근데 조이는 로봇이 아니라 홀로그램이잖아요. 홀로그램 AI인데요.”
“어? 그, 그런……?”
“이상하…….”
“아라야.”
성필이 조아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조아라가 그를 보자, 성필이 고개를 저었다.
“그만하고, 유이 씨 이야기를 듣자.”
이유이는 지식의 밑천이 드러나자 울먹거리면서 땅만 보았다. 조아라는 그녀를 보고, 또 성필을 보고, 다시 그녀를 보고, 인심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유이 씨, 부탁해요’라고 성필이 말하자, 이유이는 겨우 기력을 회복했다. 그리고 다시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미래의 자동, 자동 홀로그램? A, AI? 어……?”
“넵!”
곤란해하는 이유이 대신 성필이 나섰다.
성필이 조아라의 어깨에 손을 얹고 모두가 있는 방향으로 그녀를 돌렸다. 마치 물건을 소개하는 모양새였다.
“미래 시대의 자동인형, 아라입니다! 오직 인간을 위해 만들어지고 인간을 위해 설계된 인형!”
안무가들이 박수를 쳤다.
그중 ‘블레이드 러너’를 알고 있는 이들은 의미심장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과연, 의상 자체를 사이버펑크에서 따온 거군.
“여기에 피어싱이나 금속 귀걸이를 하면 더 좋…….”
성필이 조아라의 귀를 가리키려다가, 그녀의 귓바퀴를 검지로 살짝 건드렸다. 그러자 조아라가 기겁하면서 성필을 밀쳐냈다.
“아, 아, 미안…….”
성필이 사과하자 조아라는 눈을 크게 뜬 채로 자신의 귓불을 꾹꾹 만졌다.
“아, 아녜요. 가, 갑자기 만지면 어떡해요…….”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남 눈치 보는 것에 도가 튼 서유선이 마구마구 박수를 쳤다.
“확실히 컨셉이 잘 맞네요! 아라 씨가 보여주고픈 게 이런 거였잖아요! 아이돌을 인형이라고 보는 사람에게 당당히 ‘그래 우린 인형 맞아! 근데 X나 쩌는 인형이야!’라고 선언하는 퍼포먼스! 그 의상으로 딱이네요! 자동인형이란 테마가 이런 식으로 뻗어나갈 줄 몰랐어요!”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러자 서유선은 자신이 말을 안 더듬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자기도 모르게 입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어떻게 한 거지……?
“어쨌거나, 컨셉을 알고 보니 납득이 되지?”
“네. 듣고 보니까 조이 같네요.”
“그리고 아라를 위해 준비한 특별한 소품이 있지. 잘 봐.”
이유이가 조아라의 목에 무언가를 채웠다.
“개 목걸이?!”
“초, 초커야 초커!”
조아라는 떨떠름하게 거울을 살폈다.
복부에 찬 벨트와 초커 때문에 머리, 상체, 하체가 확연히 분리되어 보인다. 확실히 딱딱한 느낌, 인형이란 분위기가 살아난다.
개 목걸이를 차고 춤추는 건 좀 그렇지만…….
“초커라니까?!”
“그럼 뭐, 이제 25% 채워졌으니까 다시 춤춰 볼까요?”
“그러자.”
성필은 눈을 빛내며 춤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앉았다. 이유이도 그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조아라와 안무가들은 두 명의 관객을 앞에 두고 퍼포먼스를 준비했다. 아까와 다른 점은, 의상이 다른 만큼 조아라가 명확한 주인공이 되었단 것이다.
‘오토마타’가 시작됐다.
그것을 보며 이유이는 입을 막았다. 그녀가 감동한 목소리를 냈다.
“제가 디자인한 옷으로 애들이 춤추는 걸 보는 건…… 정말 몇 번을 봐도…….”
“멋지죠?”
“네……. 특히 이번 춤은 더 멋져요…….”
걸작.
이유이는 감히 그리 표현하고 싶었다.
퍼포먼스가 끝났다. 조아라는 이전보다 활동성이 제한되는 옷을 입어서인지 땀을 훨씬 많이 흘렸다.
“어때요? 100점?”
성필이 엄지를 치켜올렸다.
이유이는 팔을 허우적거리면서 ‘아라쨩 최고얏!’을 연신 외쳤다.
그에 조아라는 만족하면서도 툴툴댔다.
“아저씨, 좀 성의 있게 말해봐요. 진짜 100점인 거예요? 이대로 무대 위에 올라도 될 정도로?”
“당연하지. 못 믿겠어?”
“아저씨는 내가 여기서 앞구르기만 해도 잘했다고 할 거잖아요.”
“어쩔 수 없네.”
성필은 연습실을 나갔다. 그리고 한구인을 데려왔다.
“다시 해볼래?”
다시 했다.
한구인이 입을 틀어막곤 떨리는 목소리로 띄엄띄엄 말했다.
“저는…… 루브르 박물관에 간 적이 있습니다……. 모나리자를 가장 앞자리에서 보려고 몇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정말 몇 시간이나, 앞의 관객이 빠질 때까지, 계속……. 그리고 마침내 모나리자를 보았습니다. 그 모나리자를 보고…….”
“보고?”
한구인, 행복해서 기절.
* * *
‘오토마타’ 안무 시안이 확정됐다.
하지만 이게 완성본이란 뜻은 아니다.
앞으로 약 한 달 하고도 20일 동안, 소녀연맹은 ‘오토마타’를 숙달하면서 문제점을 찾아 수정해야 할 것이다.
더 낫게 바꿀 수 있으면 바꾸고, 할 수 없는 부분은 쳐내고, 별로인 듯싶으면 아예 없애고 새로 만든다.
“이 춤 엄청 멋지지 않아?”
조아라의 멍한 정신을 장하양의 목소리가 뚫고 들어왔다. 가만히 앉아 혼자 귓불을 만지고 있던 조아라는 이야기가 들리는 방향을 보았다.
리카와 장하양이 연인처럼 꼭 붙어 쉬는 중이었다. 주로 꼭 붙는 건 리카였지만.
“언니 그 말 엄청 자주 하는 거 아시나요!”
“아하하, 그래?”
“마음에 드셨나 봐요!”
“응.”
그 말을 듣자 조아라는 괜히 뿌듯했다.
장하양이 ‘오토마타’를 마음에 들어하는 것과 별개로 백설하는 기분이 안 좋은 듯했다.
백설하는 ‘오토마타’의 가이드 보컬 녹음을 맡았다. 그러나 아직도 가이드 보컬이 완성되지 못했다.
‘설하야 더 힘차게!’
‘겨우 그 정도로 네 에너지가 전해지겠어?!’
‘네가 원본이야! 이 원본으로 애들이 레코딩에 들어가는 거야!’
‘더 힘을 내!’
벌써 두 차례나 레코딩 스튜디오에 들렀건만, 정지음은 쉽게 OK 사인을 내리지 않았다.
심지어 그만 이러는 것도 아니었다.
‘쌤은 더 하실 수 있어요! 가슴 속에 품은 태양 같은 에너지를 발산할 때예요!’
보컬 디렉터를 맡은 리카마저 백설하에게 ‘더 더 더’를 요구했다.
리카는 ‘오토마타’의 공동 작곡가이니, 그녀가 디렉팅을 맡는 게 이상하진 않았다.
백설하는 두 번의 녹음이 모두 수포로 돌아가자 은근히 기가 꺾였다. 아니, 실은 ‘오토마타’의 보컬 파트 자체가 좀…….
‘내가 아닌 편이 더 잘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오토마타’는 보컬보다 랩 파트가 많다. 순수한 랩이 아닌 싱잉랩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백설하는 어떤 곡이든 유려하게 소화할 자신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오토마타’는 힘들었다.
“하아…….”
백설하가 한숨을 쉬자 모든 멤버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백설하는 당황하다가 아무 일도 없단 듯 헤헤 웃었다.
“여, 연습할까?”
백설하는 실수했다고 느꼈다.
‘제일 고민이랑 걱정이 많은 건 아라일 텐데…….’
괜히 힘들어하는 티를 냈다가 조아라에게 더 큰 짐을 지워주고 싶진 않았다.
‘우리들의 프로듀싱 시즌1’의 당사자로서, 백설하는 조아라가 가질 어마어마한 고민의 크기를 이해했다.
보아라.
지금도 하릴없이 귀나 만지작거리면서 수심 가득한 눈빛을 하고 있지 않은가.
저렇게 둘 바에야 정신없이 연습이나 하는 게 낫다.
“자, 다 쉬었지? 시작하자!”
연습은 순조로웠다.
아무렴, 4년 가까이 합을 맞춰왔으니 척하면 척이었다. 더는 옛날처럼 서로를 이해하지 못해 충돌하는 일도 없었다.
누구보다 서로의 마음을, 기량을, 장점을 잘 알고 있다.
그렇게 연습은 물 흐르듯 밤늦게까지 이어졌다.
“얘들아, 집에 가자.”
오늘 당번인 매니저 김수희가 연습실로 들어왔다. 벌써 12시가 넘었다.
“얏타(해냈다)! 오늘도 아타시(나) 자신한테 이긴 거야!”
리카는 땀을 뻘뻘 흘리며 주먹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오토마타’는 체력 소모가 매우 큰 안무다. 대충 스텝과 간단한 제스처만 맞춰 보아도 체력이 금방 거덜 난다.
거기에 노래까지 부르려니 신체의 내구도 자체를 깎아 먹는 고행이나 다름없어진다.
‘이건 휴식 시간을 훨씬 늘려야겠어.’
백설하는 턱에 맺힌 땀을 닦으면서 생각했다. 내일부터 트레이닝 스케줄을 잘 조율해야겠다.
‘이대로 계속하면 한 명 병 걸려도 안 이상해.’
멤버들은 현장학습을 나온 유치원생처럼 김수희의 인도를 받아 쪼르르 연습실을 나섰다.
그때였다.
“언니.”
조아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백설하가 돌아보니, 조아라와 장하양이 마주 보고 서 있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요. 내 눈치 보지 말고요.”
“어……?”
백설하는 물론 다른 멤버 모두 당황했다.
언뜻 보아도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장하양은 오늘따라 조아라를 곁눈질하는 일이 많았다.
백설하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아, 혹시.’
안무에 대해 하고픈 말이 있는 걸까? 그게 부정적인 의견이어서, 조아라에게 말해도 좋을지 모를지 모르겠는 걸까?
긴 연습 때문에 지친 건지, 아니면 부정적인 말을 들을 걸 대비해 미리 갑옷을 걸친 건지, 조아라는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이해해.’
백설하는 조아라의 마음을 십분 이해했다.
그녀가 프로듀서를 맡았을 때도 겪었던 일이다. 자꾸 멤버들의 눈치를 보게 되는 것 말이다.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닐까?
하고픈 말이 있는 게 아닐까?
억지로 따르는 게 아닐까?
그 불안감은 나날이 쌓여, 결국 거대한 스트레스가 된다. 평범한 눈길 한 번이 바늘처럼 다가와 피부를 콕콕 찌른다.
“빨리요.”
조아라가 장하양을 재촉했다.
“일에 관한 건 직장에서 끝내요. 숙소 가서까지…….”
분위기 안 좋고 싶진 않으니까.
백설하는 둘 사이를 중재해야 하나 고민했다. 아니, 이왕 터질 거면 여기서 터뜨리는 게…….
“그럼, 아라야. 나 연습하는 거 봐줄 수 있어?”
장하양이 미안한 기색이 역력한 투로 말했다.
심각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말랑하게 변했다.
“……연습이요?”
“응. 나 혼자선 잘 안 될 거 같아서. 네가 봐줬으면 해.”
조아라는 시계를 보았다.
“이제 곧 1시잖아요.”
“아하하, 그렇지……. 미안, 당연히 안 되는 건…….”
“아니, 내 말은.”
조아라가 바깥의 쌀쌀한 날씨에 대비해 입었던 카디건을 벗어젖혔다.
“언니가 버틸 수 있겠냐고요.”
조아라에게서 희열이 흘러나왔다.
* * *
새벽 2시 30분.
“언니 요즘 기초 연습은 안 하죠?”
“아하하…….”
장하양이 머쓱하게 웃었다.
조아라의 말마따나, 장하양은 옛날만큼 기초를 연습하지 않았다. 딱히 그녀의 문제라기보다, 어떤 분야든 숙련 수준에 오르고 나면 기초에 소홀해지곤 한다.
당장 뛰어넘어야 할 허들이 눈앞에 보이는데, 이미 넘은 과제를 신경 쓸 이들이 얼마나 있겠는가.
“보니까 냅다 가르치는 것보다 기본부터 설명하는 게 낫겠어요.”
그게 약 1시간 30분 동안 장하양을 가르치면서 얻은 결론이었다.
“신경 쓰이는 부분이 어디예요?”
“박자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모르겠어. 분명 정박으로 따라가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놓치곤 해.”
“알죠 그거.”
춤을 추다가 리듬에서 벗어나는 것을 ‘오프 비트’라고 부른다.
분명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데 어딘가 어색하게 보인다면, 그 사람은 리듬과 박자에서 벗어난 것. 즉, ‘오프 비트’ 상태에 빠진 것이다.
아무리 기교가 현란하고 정교해도, 박자에 엇나가는 춤을 춘다면 문외한에게라도 이상하게 보인다.
그러니 댄서에게 가장 중요한 능력 중 하나는 음악을 듣는 것, 그 음악에서 리듬을 찾아내는 것이다.
“특히 ‘오토마타’는 힘드니까.”
사용되는 악기에 통일성을 찾기 힘들 정도로, 그야말로 십수 초 단위로 무드가 휙휙 바뀐다.
컴플렉스트로.
변화무쌍이란 단어를 음악으로 만든 것만 같은 장르다. 조아라도 처음 듣곤 리듬을 잡아내는 데 고생했으니, 장하양이 난항을 겪는 건 당연했다.
“그럼 입으로 박자 세면서 춤춰 봐요. 0.5배로.”
“응.”
장하양은 처음부터 춤을 추었다.
“원, 투, 쓰리, 포, 파이브, 식스…….”
‘언니가 투에잇(댄스의 시간 단위, 원에잇은 8카운트이고 노래로는 2소절)을 잡는 감각은…… 한 묶음에 16단계.’
조아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춤을 멈췄다.
“정박으로만 나누니까 힘든 거예요. 언니, 일단 음악을 들으면서 내가 기준으로 삼을 음을 골라요. 예를 들어 난…… 이거…….”
찌이이이잉.
귀를 잡아 뜯는 것 같은, 대체 무슨 악기인지도 모를 일렉트로닉 사운드.
거기에 맞춰 조아라가 춤을 추었다.
“엇박을 추가해요. 원, 투, 쓰리가 아니라 원 앤 투 앤 쓰리 앤 포.”
장하양이 춤을 16단계로 나누었다면, 조아라는 춤을 32단계로 나누었다.
장하양은 눈이 뜨였다.
“그렇구나.”
정해진 안무를 춘다는 건, 점과 점을 이어 선을 만드는 행위다. 점이 많을수록 선이 그리는 면이 더욱 정교해지는 건 당연하다.
“여기서 더 정확하게 들어가려면 원 앤 투 투 앤 투 쓰리 앤 투 포.”
박자를 더 빠르게 나눌 수도 있다.
그쯤 되니 장하양은 그녀의 이야기를 귀로도, 눈으로도 쫓기 힘들었다. 박자를 속으로 세는 것만으로도 한계에 이르렀다.
“여기서 더 나누려면…….”
“아, 아니야. 이제 괜찮아.”
“다시 해볼래요?”
엇박을 추가한다.
엇박은 정박처럼 완벽한 간격을 두고 놓지 않아도 된다. 정박 속에 자기만의 감각으로 이정표를 세워둔다는 식으로…….
“아, 됐다. 이제 알겠어.”
“잘됐네요. 미안해요.”
“응?”
“연습할 때, 너무 당연하게 ‘원 투 쓰리 포’로만 해서요.”
“아니야. 그게 어떻게 아라 잘못이야.”
조아라는 셔츠 밑단을 잡아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장하양은 거칠게 숨을 쉬다, 조아라의 모습을 보곤 말했다.
“그러고 보면, 아라는 중요한 소리를 가슴으로 캐치하네.”
“네? 아, 네. 이상해요? 뭐, 특이하긴 하죠. 보통은.”
조아라가 골반을 한 번 튕겼다.
“여자는 골반으로 하는 쪽이 편하긴 하죠.”
“아라는 가슴으로 하는 게 편해?”
“아…… 나 처음 춤 배울 때 얘긴데요. 내가 동경하는 댄서가 남자였어서, 그 사람 영상 보고 배웠어요. 그리고 나 처음 춤 배울 때는 2차 성징이 안 와서 골반도 안 나왔었고. 좋다고 그 남자 댄서 하는 대로 췄어요.”
“2차 성징 오고 나선?”
“그땐 좀 혼란스러웠죠. 그래도 ‘이 사람만이 정답이야!’ 같은 생각으로, 계속 추던 대로 췄어요. 그래서 뭐, 지금 이러고 있네요.”
조아라가 가슴을 쿵 튕기자 장하양이 풋 웃었다.
“어? 비웃음?”
“비웃음은 무슨. 귀여워서 그래.”
“내 가슴이? 귀여워? 그래서 비웃음?”
“너 자꾸 언니한테 이럴래?”
“언니가 먼저 했잖아요.”
둘이 서로를 어깨로 밀쳐댔다. 그러고선, 둘 다 숨이 차서 한동안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언니. 내가 언니 부탁 들어줬으니까, 언니도 부탁 들어줄래요?”
“우리 아라 부탁이면 뭐든지 들어주지.”
“씁, 언니 말투가 아저씨랑 비슷한데.”
“오래 보니까 닮은 거겠지. 근데 부탁이라니?”
“상담이에요.”
조아라가 선 자리에 철퍼덕 앉았다. 장하양도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아저씨요.”
“박 이사님?”
“뭔가, 나 하는 거 보면 계속 ‘좋다 좋다’고는 하는데요. 진짜일까요?”
“음, 춤이? 아니면 노래가?”
“우리들의 프로듀싱이요. 실은…….”
조아라가 무릎을 팔로 감쌌다. 그리고 턱을 무릎 위에 괴었다.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 하고 싶은 게 따로 있는데, 내가 하고 싶어 하는 거니까…….”
맞춰주는 게 아닐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든다.
“일에 관련된 거잖아. 박 이사님이 그렇게 대충 결정하실 리 없어.”
“……A&R팀에서 반대하는 사람들 의견 들었어요?”
“응. 서유선 선배님이 멋지게 받아치셨다면서?”
“근데, 그거 아저씨가 들었을 땐 아무 말도 없었어요.”
“…….”
“논의하다 보면 결과가 나올 거라면서……. 뭐, 내가 생각이 없던 것도 맞는데. 사실 아저씨는 재호 오빠네가 이기길 바라지 않았을까요? 그런 거면 어떡…….”
장하양이 조아라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아라야, 박 이사님은 억지로 너한테 맞춰주는 게 아니야. 네가 옳다고 생각하시고, 또 너를 믿는 거야.”
“나를 믿어서, 내가 부족해도…….”
“믿음은 전적인 거야. 절반의 믿음이라거나, 70%의 믿음이란 건 없어. 믿으면, 그저 믿는 거야.”
“…….”
조아라가 장하양에게로 더 기댔다.
“내가 뭐라고 그렇게 믿는 걸까요? 아저씨가 믿어준단 게 기쁠 때도 있는데, 가끔은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나한테 그만한 가치가 있는지도 모르겠고. 차라리…….”
성필이 모든 걸 가르쳐준다면…….
“아라야.”
장하양이 조아라를 꼭 감쌌다.
“피터 그랜트 알아?”
“진짜 머리털 나고 처음 들어봐요.”
“레드 제플린의 매니저야.”
“레드 제플린은…….”
들어본 적 있다.
성필의 음악사 시간 때 배운 록밴드다.
하드 록의 대중화, 수억 장의 앨범 판매, 2차 브리티시 인베이전의 주역, 록 음악 그 자체인 밴드 중 하나.
이렇듯 어마어마한 수식어가 붙은 밴드다.
“그랜트는 주변 사람들이나 업계인이 뭐라고 하든, 예술적인 영역 내에선 레드 제플린의 판단을 전적으로 신용했어. 예를 들어 그땐 요즘처럼 싱글만 발매하는 게 대세였는데, 그랜트는 반대로 시켰어.”
“반대요?”
“레드 제플린이 온 신경을 집중해서 예술성을 발휘할 수 있게 음반 작업에만 몰두하도록 해줬어. 뮤지션으로서 경험을 쌓을 수 있게, 미디어 출연보다 라이브 공연을 주로 돌게 했고. 또 재밌는 점은 작사, 작곡 전부 레드 제플린이 하도록 독려했단 거야.”
“원래 록밴드는 다 작사, 작곡 자기들끼리 하는 거 아녜요?”
“음, 그건 편견이야. 내가 알기로 당시에도 곡이랑 가사를 다른 사람에게서 받는 일이 흔했어. 우리랑 같지? 아마, 그랜트는 레드 제플린 멤버들한테서 어떤 빛을 봤을 거야.”
“……아저씨가 우리한테 본 거 같은 빛요?”
“아하하, 아마 레드 제플린분들은 우리랑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빛났겠지만. 그랜트가 대세에 따르지 않고 레드 제플린을 믿었던 것처럼, 박 이사님도 우릴 믿는 거 아닐까?”
장하양이 애정이 가득 담긴 눈으로 조아라를 응시했다.
“아라 너를 믿는 거야. 그걸 ‘억지로’라느니, ‘참는다’라느니, 그런 말로 깎아내리는 건 박 이사님한테 실례라고 생각해.”
“까, 깎아내리는 게 아니라…….”
조아라는 부끄러워져서 고개를 돌렸다.
“언니는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진짜 뮤지션 같네. 나중에 대중음악으로 학위도 받겠어요.”
“박 이사님 책에서 읽었어.”
“……아저씨 책?”
“정확히는 박 이사님 책이 아니긴 해. ‘연예 비즈니스 경영론’이라고, 박 이사님이 공동 저자 중 한 분으로 속해계셔.”
“아, 한의사님이 아저씨 찾게 됐다던 그 책이요?”
“응. 거기 나와 있던 이야기야.”
“…….”
“읏차.”
장하양은 오래 쉬었단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조아라에게 손을 뻗은 순간.
“언니, 그 책 있어요?”
“빌려줄까?”
“네.”
* * *
새벽 4시.
“아라쨩, 영원히 함께하쟈…….”
리카의 잠꼬대를 들으며, 조아라는 책을 읽었다.
‘연예 비즈니스 경영론’에는 엔터 업계에 관한 여러 내용이 적혀 있었다. 지금 시대상과는 맞지 않았으나 한 번쯤 읽어볼 만했다.
하지만 조아라는 그 모든 부분을 스킵하고 성필이 쓴 부분만 읽었다.
“여기다.”
[유능한 매니저란 어떤 사람을 뜻할까. 바로 자신의 아티스트를 세상 누구보다 깊이 신뢰하는 사람이다. 매니저의 믿음은, 매니저가 아티스트를 대리하여 내리는 모든 결정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아티스트가 바라는 행복이 무엇인지, 아티스트가 표현하고픈 것은 무엇인지, 그 표현 방식은 무엇인지, 이런 것을 알아갈수록 신뢰는 함께 깊어진다.
피터 그랜트와 레드 제플린의 관계는 이에 가장 합당한 예시이다.]
‘이건 하양 언니가 말해줬던 거고…….’
[그랜트는 자신의 아티스트에 대해 완전무결한 믿음을 주었다. 때론 비판적이었지만, 근본적으로 그들이 지닌 빛나는 예술성을 신뢰했다.
서구권의 매니저는 담당 아티스트의 수익에서 일반적으로 10%~20%의 수수료를 취한다. 따라서 매니저들은 아티스트의 수익 활동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며, 때론 아티스트를 착취하기도 한다.
아티스트 착취는 현행 보호법이 없는 과거에 훨씬 심했고, 그랜트가 살던 시대 또한 그러했다. 하지만 그랜트는 그 시대의 여타 매니저들과 전혀 달랐다.
단기적인 이익을 위해 트렌드에만 매몰된 마케팅, 프로듀싱 전략을 펼치지 않았다. 팬들의 마음을 이용하여 갈취에 가까운 상업성 전략을 택하지도 않았다.
그랜트가 최우선으로 한 건 돈이 아니었다. 레드 제플린의 이익이었다. 그 이익이란 그들이 실현하고픈 아티스트십이었다.
레드 제플린은 이에 보답했다. 그들은 모든 매니지먼트적 결단을 그랜트에게 위임했다. 어떤 이례적인 결정일지라도, 레드 제플린은 놀랄 뿐 그대로 따랐다.
그 결과라고 해야 할까, 이 둘의 관계는 매니지먼트사(史)에 가장 빛나는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된다.]
‘대단한 사람이네.’
조아라는 레드 제플린과 피터 그랜트의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우정 이야기를 대강대강 읽었다.
그러던 도중 어느 대목에 눈에 꽂혔다.
[아티스트에게 가장 달콤한 건, 그 자신의 예술에 대한 믿음이 아닐까? 물론 전적인 믿음을 준단 건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여러분, 매니저분들에겐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여러분이 매니저가 됐다면, 분명 담당한 아티스트로부터 어떠한 빛을 보았을 것이다. 그 빛을 세상에 보여주고픈 마음이 샘솟을 것이다. 그건 나만 보고 꺼져서 좋을 빛이 아니니, 혼신을 다하여 세상에 퍼뜨려야만 한다.
그 마음이 믿음이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아티스트의 성공은 내 성공이 아니라 타인의 성공이다. 타인의 성공이지만, 그래도 그 성공은 내 꿈을 담고 있다.
아티스트가 성공한단 건 내 꿈이 보답받는단 뜻이다. 내가 보았던 빛이 틀리지 않았단 뜻이다. 어떻게 그게 기쁘지 않을까.
(여담: 담당 아티스트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악으로 깡으로 버텨라. 다른 아티스트를 맡을 때까지)]
“……크흨.”
조아라는 책에 머리를 박고 웃었다. 웃음이 그친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음, 그래요?”
나한테 빛을 봤다 이거죠?
항상 성필에게 듣는 말이었는데, 이렇게 활자로 쓰인 것을 읽으니 감상이 전혀 다르다.
마치 성필의 속마음을 본 것만 같다.
조아라는 인쇄된 잉크를 손으로 부드럽게 쓸었다. 잉크로부터 온기가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
조아라는 폰을 들어 메신저 앱을 열었다.
앱을 켜자 야자수 프렌즈 캐릭터들이 맞아주었다. 성필에게 톡을 보내려다가, 조아라는 쓴 지 굉장히 오래된 메시지 앱을 열었다.
왠지 톡이나 DM으로 보내면 의미가 반감될 것 같았다.
조아라는 메시지를 쓰기 시작했다.
새벽 4시 30분.
새벽 감성이 가장 충만한 시각이었다.
* * *
휴일.
침대에서 눈을 뜨자마자 이상하게 긴 메일이 와 있었다.
[아저씨 평소에 내가 툴툴대고 그러는데 실은 아저씨한테 되게 고마워하고 있…….]
“그에엑 이게 뭐야아…….”
성필은 잠에 취한 상태로 폰을 침대 위에 툭 두었다. 그리고 몸을 구부린 채 10분을 보냈다.
그렇게 가만히 있자니 잠이 서서히 깼다.
잠이 깬 상태로 조아라가 보낸 문자를 읽었다. 다 읽는 데 3분 정도 걸렸다. 읽는 데 3분이 걸린단 건, 엄청 길단 뜻이다.
“……얘가 술이라도 마셨나?”
성필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술 마시고 보낸 거라도, 이런 문자를 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음음, 아라가 나를 많이 의지하는구나? 그래 그래 나도 알아.’
귀여워 죽겠네.
성필은 샤워한 후 아침을 먹은 뒤 상쾌한 기분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오늘은 중요한 날이다.
‘글로브 컴백날이야.’
성필은 아침부터 커뮤니티와 SNS에 접속했다. 글로브 관련 커뮤니티였고, 글로브 덕질 전용 SNS 계정이었다.
이 순간 성필은 ‘어스’가 되어 온갖 떡밥과 기대감을 탐식했다. 그러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권강철 트레이너님
안녕하세요 회원님^^ 휴일이지만 운동하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저는 지방 커팅 기간이라 등산을 왔…….]
어쩔 티비 저쩔 티비~
오늘 난 아이돌 덕질만 할 거야~
[아라
아저씨 내가 새벽에 보낸 문자 우리집 리카가 멋대로 보낸 거니까 이상한 생각하지 말…….]
응 알겠어~
성필은 오랜만에 마음껏 취미활동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오후 6시가 됐다.
음원 공개와 동시에, 음악방송 측이 아이튜브 채널을 통해 글로브의 사전녹화 무대 영상을 푼다.
‘자, 어떤지 한 번 볼까.’
무대 보고, 뮤비 보고, 뮤비 비하인드 보고, 멤버들 개인 SNS 보고, 팬들이랑 이야기 나누다 보면 금세 밤이…….
“…….”
성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꽃밭이었던 머리가 차가워질 정도로 뮤비에 집중했다. 다 보고 나선 다시 보고, 또 보고, 계속 보았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났다.
뮤비를 보고, 곡을 듣는 데만 한 시간을 썼다.
성필의 입가가 파들파들 떨었다.
“어떻게…….”
이 곡.
이 노래.
이 컨셉.
“시대를…… 넘어섰어…….”
몇 년 후에나 나올 법한 곡이 현재에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