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한는 프로듀서-533화 (533/760)

533화

“끝난 게 아닌가?”

진저가 걸음을 멈추자 브라이언도 억지로 멈춰야만 했다. 그는 진저를 따라 무대 쪽이 더 잘 보이는 위치로 이동했다.

조아라가 무대로 다가가고 있었다.

“더 한다고?”

“그런…… 모양입니다.”

“……하.”

브라이언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무대로 나아가는 조아라의 다리가 떨리고 있었다. 딱히 그녀의 결심이 어떻다기보다, 그녀의 행동 자체가 웃기게 보였다.

딱 봐도 두려움에 떠는 모습 아닌가.

“매니저의 요구인가? 꽤 불이 붙었나 보군.”

브라이언은 자랑스레 진저를 보았다.

“그렇지. 일개 매니저가 보아도 우리 내니…….”

“내니라고 부르지 마십쇼.”

“……차라리 난 진저보다 내니가 낫다만? 진저, 완전 할머니 이름이잖아. 친근감을 주려던 거면 작명 대성공이지만, 하하!”

“내니라고 한 번만 더 부르면 가만 안 둘 겁니다.”

“……응.”

브라이언은 쪼그라들어 답한 뒤, 다시 근엄한 얼굴로 조아라를 보았다.

“일개 매니저가 보아도 네 춤이 특별했던 거다. 그냥저냥 한 퍼포먼스론 우스꽝스러울 게 분명하니, 담당 아티스트를 몰아쳐서 다시 무대에 세운 걸 거야.”

미국에선 매니저와 아티스트를 두고 흔히 일심동체라고 한다.

아티스트의 성공이 매니저에게 달려 있으니 틀린 말이 아니다. 그리고 아티스트가 매니저에게 의지하는 만큼, 매니저도 아티스트에게 의지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매니저는 아티스트 수익의 10%가량을 받아 간다. 필사적으로 아티스트의 성공을 응원하고 지원한다.

브라이언이 생각하는 성필과 조아라의 관계가 그러했다.

“안타깝군.”

매니저의 강요에 오르고 싶지 않은 무대에 올라야 한다니. 다시 올라 봤자 진저와 더 비교될 뿐일 텐데.

단순히 KS 엔터가 돈을 퍼부어서 얻어낸 브라이언의 안무 때문은 아니다.

진저란 존재 자체가 넘을 수 없는 벽이다.

“진저, 차라리 안 보는 건 어때?”

“…….”

“저 아이돌, 네가 보고 있으면 굴욕적이기만 할 거야. 쟤를 괴롭히고 싶은 게 아니라면 신사적으로 자리를 뜨지.”

“볼 겁니다.”

브라이언은 여느 때처럼 능청스레 어깨를 으쓱했다.

“네가 바란다면.”

너의 우상이 망가지는 걸 얼마든지 보도록.

* * *

무대 중앙으로 걸어가는 찰나의 시간.

조아라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사고(思考)가 빨랐다. 가는 동안 언어로 표현하기 힘들 만큼 많은 생각을 했다.

먼저.

‘아저씨는 왜 다키스트와 케이어스를 좋아하지?’

성필이 멤버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단어 중 하나가 ‘아티스트십’일 것이다.

그는 항상 아이돌의 자발성과 자율성, 개성과 창조성을 강조했다. 그가 바라는 아이돌이란 자체 제작이 가능한, 멤버 전원이 프로듀싱에 가담하는 형태인 듯하다.

‘그건 알겠어.’

조아라도 동의한다.

연습생일 때부터 질리도록 들었던 말이 있다.

자신이 생각했기에 자신이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것.

그 때문에 ‘우리들의 프로듀싱’이라는 프로젝트까지 하고 있지 않던가.

‘그런데 왜?’

성필은 왜 다키스트와 케이어스를 가장 좋아하지? 자체 제작형 아이돌 그룹은 몇 개 있고, 그중에서 다키스트 못지 않은 성공을 구가한 그룹도 있을 텐데.

조아라가 항상 품고 있던 의문이었다.

그 의문이 이 순간 풀렸다.

민시화 덕분이었다.

‘변명이지.’

그녀의 병문안을 갔던 날, 그녀가 성필의 생각에 대해 그렇게 표현했었다.

‘결국 제작자의 머릿속에 든 이상향엔 닿을 수 없어. 원래 이상향이란 게 인간이 닿을 수 없는 거긴 하지만 말야. 그러니까, 자기가 생각했으니까 자기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건 일종의 변명으로 작용하는 거지.’

성필은 다키스트를 좋아한다.

사랑한다. 동경한다. 선망한다. 소망한다.

그가 입에 달고 다니던 아티스트십과 가장 멀리 떨어진 그룹을, 해체하고 난 뒤까지 그저 사랑한다.

그는 다키스트를 바란다.

동시에 그는 알고 있다. 그는 다키스트를 만들 수 없으리란 것을.

‘우리는…….’

소녀연맹은 그 대안이다.

박성필 프로듀서의 이상향을 멤버들이 따라올 수 없으니, 그는 최선 대신 차선(次善)을 택했다.

창조성이란 이름의 차선이다.

‘얘들아.’

성필이 옛날에 프로듀서의 종류에 대해 설명해준 적이 있었다.

감독형, 인재발굴형, 컨설턴트형, 서포터형.

마치 지도자를 여우형과 사자형으로 나누듯, 그는 프로듀서의 스타일에 대해 설명했다. 그리고 본인 입으로 이렇게 말했었다.

‘나? 감독형 아닐까? 카리스마로 아티스트와 스태프들을 지휘하는…….’

멤버들은 웃으면서 누가 봐도 서포터형 프로듀서일 거라고 했었다.

그런데, 성필은 진심으로 자신이 감독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 행하는 게 어떻든, 그가 타고난 성향은 감독형이다.

그는 소녀연맹에게 바라는 게 있을 것이다.

감독으로서 그녀들을 완전히 복종시켜 만들고픈 최상의 상태가 있을 테지만.

‘못 해. 아저씨는, 못 해.’

성품이 너무나 여려, 그는 멤버들에게 자신의 이상향을 강요할 수 없다.

학대에 가까운 트레이닝을 강요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멤버들의 자발성에 한해서만 퍼포먼스의 한계점을 규정짓는다.

‘남이 만든 걸 완벽하게 모방할 수 있는 재능이란 건…… 그러니까, 남의 이상향을 완벽히 재현할 수 있는 능력은 마이클 잭슨만큼 드물 거야.’

민시화의 말마따나 모방도 재능이 있다.

타인이 만든 안무를, 타인이 만든 노래를, 타인이 만든 컨셉을, 타인이 만든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완벽하게 재현해내는 것.

성필이 바라는 건 그런 그룹이었을 것이다.

다키스트처럼…….

하지만 성필은 모방 대신 창조를 택했다. 그쪽이, 멤버들이 훨씬 행복하리라 믿고서.

그는 자신의 꿈과 멤버들의 행복 속에서 타협점을 찾아냈다. 사실상, 자신의 꿈을 어느 정도 포기했다.

“준비되셨어요?”

PD가 묻는다.

조아라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손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녀의 손은 무언가를 기억하고 있다.

민시화나, 서유선이나, 릭 칼먼이나.

‘진저.’

춤.

춤은 단지 추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민시화에게 배웠다.

춤은.

‘감상하는 거고, 평가하는 거고, 만드는 거고, 상상하는 거고, 또,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출 수 있는 것.’

조아라는 이번 프로젝트로 수많은 분야의 안무가들을 만났다.

그들과의 만남이 이 기묘한 감각의 기반이 됐고, 민시화의 라스트 댄스는 화약이 됐고, 진저의 춤은 불꽃이 됐다.

조아라는 주먹을 꽉 쥐었다.

“네.”

분명 화약과 불꽃이 만났을 텐데, 조아라는 서늘함을 느꼈다.

피 대신 얼음이 흐르는 것만 같다.

이상하다.

‘춤을 추기 전엔 항상 흥분됐는데.’

속이 뒤틀릴 듯 전신이 싸늘하다. 척추를 얼음 송곳이 꿰뚫고 지나가는 것만 같다.

이런 감각은…….

‘영원히 좋아할 수 없을 거 같아.’

그렇지만 그녀의 몸과 머리는 전례 없이 냉정해져 있다. 열기가 감각을 교란하지 않아, 차가운 전신에 그녀의 의지가 전부 뻗어나간다.

피가 끓는다, 그 고루한 단어를 집어던지고.

피가 식었다.

“시작합니다.”

* * *

“안무가 바뀌었네요.”

백댄서 중 한 명, 이명철이 말했다.

그는 ‘아라베스크’ 당시 소녀연맹의 백댄서로 섰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때 이후 조아라와 친분을 다지게 되어 이번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버전을 두 개 준비하셨던 거예요?”

“버전이 두 개이긴 했어요.”

성필은 두 손을 모으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조아라를 지켜보았다. 그의 머릿속엔 방금 보았던 미래로 가득했다.

조아라의 아련한 목소리가 은은하게 울린다.

‘그때 춰볼걸.’

달빛으로 손을 뻗는 그녀가 아른거렸다.

‘그때 이걸 보여줬어야 했는데.’

성필을 바라보는, 아쉬움이 가득한 눈동자.

‘그쵸, 오빠?’

이날 이후 조아라는 달라진다.

그게 단순히 실력적인 면인지, 아니면 신념에 관련된 것인지, 성필은 몰랐다. 짧은 미래로 판단할 수 있을 만한 게 아니었다.

그렇지만 미래의 조아라는 분명히 지금과 달랐다. 그리고 미래의 조아라는 지금 이 순간, 다시 무대에 오르지 않은 것을 후회했었다.

성필은 아직도 충격이 잊히지 않았다.

미래에, 달빛 아래에서 추었던 조아라의 ‘배드’.

그 모습은 전생의 그녀와 맞닿아 있었다.

“스트릿 스타일이 아예 사라졌네요.”

이명철이 아쉽단 듯 말했다. 그리고 그는 말하지 않았지만, 솔직히 이전 버전이 훨씬 낫다고 여겼다.

그는 의자에 앉은 성필을 내려다보았다.

성필은 손을 모으고 입을 가린 채, 아무 말 없이 조아라의 춤을 보기만 했다.

‘아직은.’

성필이 보았던 미래가 어느 정도 후인지는 모르지만.

‘그 수준에 닿지 못한 건가?’

조아라의 춤은 별다를 게 없었다.

고작 수십 분, 한두 시간 내에 실력이 확연히 바뀔 리 없다.

테크닉 한두 개 숙달하는 거면 몰라도, 춤 전체의 흐름과 격을 바꾸긴 힘들다.

‘그럼 이건, 그저 아라의 한풀이인가.’

그것만으로도 성필은 만족한다.

“이전 버전으로 해야겠는데요.”

이명철이 말했다.

성필도 동감이다.

아직까지는 그렇다.

성필은 무언가 보고 있다.

조아라의 내부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려는 별빛을.

* * *

‘괴로워.’

본능이 아니라 이성으로 추는 춤.

신체의 말단 하나하나까지 신경 써야 한다.

괴롭다.

마치 HPT 뮤직 어워드에서 ‘아라베스크’를 출 때 같다. 초침을 밟고 걸음을 내딛는 기분. 거대한 규칙을 따라 손을 움직이는 느낌.

감당할 수 없는 파도를 따라 몸을 제어한다.

‘이 끝에 뭐가 있는 거야?’

이 괴로움 안에 뭔가를 찾아야 하는 건가?

전혀 즐겁지 않다.

분명 춤은 즐거운 것일 텐데.

즐기려고 시작한 게임을, 이기기 위해 사소한 것 하나까지 전부 공부하여 플레이하는 느낌이다. 즐긴단 생각을 모두 버리고, 오직 이기기 위해 집중하는 것이다.

‘여기에, 이 춤에, 대체 뭐가…….’

뭐가, 있다.

뭔가, 보인다.

아까 무대에서 보았던 검은 형체가 조아라의 눈앞에 선명히 나타났다. 그건 조아라가 그려낸 완벽한 형태였다.

또한, 조아라의 몸에 완벽히 알맞은 춤이었다.

조아라는 그 춤을 향해 나아간다.

매초 매분 그것에 가까워져 간다.

“……하.”

조아라는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아저씨, 이거 전 여친이 만들었단 거 거짓말 맞죠?’

조아라는 검은 형체, 상상 속의 자신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 머릿속으로 그린 게 현실로 펼쳐진다.

‘그렇다면, 말이 안 되잖아요.’

이 춤은 조아라에게 꼭 맞는다.

조아라를 위해서만 존재한다.

마치 그녀 자신이 만든 것처럼.

‘이렇게 편할 수가 없는데.’

성필이 조아라만을 떠올리고.

조아라만을 생각하고.

조아라만을 꿈꾸고.

나만을 위해서.

‘아저씨가 만들어낸 춤.’

소녀연맹의 안무를 받고 출 때마다 느꼈다.

자신은 100점이 될 수 없다.

하지만 될 방법이 있다.

‘이 춤은 나한테 안 어울려. 나한테 맞도록 고쳐서…….’

그럼 100점이든 120점이든 마음대로…….

‘아니야.’

이젠 안다.

그런 건 전부 변명이다.

어차피 자신은 90점짜리, 95점짜리에서 멈춰 설 수밖에 없다. 그랬기에 변명한 것이다. 그리고 그 변명에 만족했다.

왜냐하면, 100점이 되려면.

‘나를 버려야 하니까.’

자신을 버리고 아이돌로서 완벽해질 바에야, 불완전한 아이돌인 채 댄서로 남겠다.

남에게 개처럼 무릎 꿇고 꼬리를 흔들 바에야, 발로 차이고 욕을 먹더라도 나인 채로 살겠다.

100점을 맞으려고 타인의 기준에 굴복하여, 행복과 즐거움 없이 기계처럼 춤출 바에야, 그럴 바에야 차라리…….

그런데, 근데, 이젠…….

‘100점이 되고 싶어.’

당신이 바라보는 이상(理想)에 닿고 싶어.

조아라가 마지막 걸음을 내디뎠다.

그러자 보였다.

이 안무와 하나가 되고 나서야 보이는 풍경.

‘이게 아저씨가 나한테 바라던, 아저씨가 보던 풍경.’

성필이 프로듀서로서 조아라에게 원하던 모습.

동시에 조아라는 전신이 사라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몸의 무게가 사라진다. 불꽃이 되어 흩날리는 것처럼.

마치…….

‘스트릿 댄스를 출 때처럼.’

오직 즐거움에 빠져 본능대로, 마음껏, 원하는 만큼 원하는 동작만을 행할 때처럼.

조아라의 몸은 무게를 잃고 불꽃으로 화한다.

잊고 있던 감각이다.

아이돌 춤을 출 때면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에 억지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신체의 무게감을 견디며 억지로 그것에 맞춰져야만 했다.

자신의 개성을 억누르고.

이제까지 쌓아왔던 것을 내버리고.

오직 그룹에만 맞춰진 춤을 춘단 건, 조아라에겐 괴로운 일이었다.

그런데.

‘안 돼…….’

이런 감각을 느껴버리면.

‘옛날처럼 춤을 사랑할 수 없어.’

조아라는 춤에 복종했다.

억지로 정해진 안무를 입는 게 아니라, 황홀하게 기뻐하며 춤에 굴복했다.

성필의 이상향에 고개를 조아리고 발에 입을 맞추었다.

그래.

‘춤을 사랑할 순 없지만…….’

자아를 내던지고서야 얻어낸 행복.

신에게 모든 것을 바쳐 무소유를 이뤄낸 수도사의 지복(至福).

자신을 산산이 부수고.

불꽃이 되어.

마지막 하이라이트.

‘나는.’

그 몇 소절의.

이 몇십 초의.

단 한 순간의.

‘닿았다.’

무아일체(舞我一體).

* * *

성필은 눈이 충혈될 정도로 오래 뜨고 있었다. 그의 눈에 핏발이 섰다. 하지만 감으려 하지 않았다. 단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기에.

그의 눈앞에 조아라가 보였다.

현재의 조아라가 아니라.

‘전생의…….’

전생의 조아라가 보였다.

성필의 요동치는 마음과 달리, 촬영장은 정적에 잠겨 있었다. 노래가 끝나고도 꽤 오랫동안.

* * *

지유는 발레를 배웠다.

그래서 춤을 싫어했다.

발레란 건 정해진 과업을 쌓아가는 것과 같아서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지유와는 별개로 피아노를 배우던 그녀의 동생이 이런 말을 했었다.

‘클래식 피아노란 건 악보로 만들어진 계단을 밟고 올라가는 거래. 올라가고 또 올라가서 끝에 다다를 때까지.’

그때까진 개성이 허용되지 않는다.

발레와 맞닿아 있는 말이었다.

남이 정해둔 기준을 충족시키기만 하는 춤 따위에, 지유는 재미 같은 건 느끼지 못했었다.

그래서 관두었다.

그런데 연습생이 되고 나서 배운 춤은 재밌었다. 어반 댄스는 정해진 형식이나 규칙 없이, 실연자의 개성을 중시하는 장르였다.

처음으로 춤이 즐거웠다.

평생 이렇게 즐겁고 싶었다.

“에휴.”

지유는 조아라를 보고 안쓰럽단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저게 뭐야.’

절박함이 가득 담긴 춤이다.

다키스트가 떠오른다.

옛날에 보았던 영상이었는데, 아마 다키스트의 일본 데뷔 무대였을 것이다.

‘정말 열심히도 춘다. 대단하네.’

그땐 연습생이 아니었던 지유마저 그리 생각했다. 전원이 한 치의 오차도 없는 각을 지니고, 동선 이동은 체스판 배열하듯이 깔끔했으며, 동작은 아름답고 화려했으나, 전혀 즐거워 보이지 않았다. 발레를 배우는 자신처럼.

지금의 조아라가 그러했다.

‘그렇게까지 너 자신을 죽여서 잘 보이고 싶은 거야?’

지유는 절대 저런 꼴이 되고 싶지 않다.

윤상열을 상대하는 것만 해도 혀 깨물고 죽고 싶은데, 조아라처럼 춤에 목숨을 걸고픈 마음은 없다.

지유는 그저 춤이 즐거웠으면 한다.

즐거움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리고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즐거운 건 행복하니까.

‘성필 오빠가 옛날에 그랬었지.’

다른 방법으로 잘 먹고 잘살 방법이 치이도록 많은 재능 있는 사람이, 예술에 영혼을 바치는 건 너무나 아름답지 않냐고.

지유는 그에 이렇게 답했었다.

‘전혀요.’

적어도, 조아라 같은 모습은 되고 싶지 않다.

* * *

브라이언은 거의 숨을 멈추었다. 주변으로 숨소리 하나 삐져나오지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춤을 배우고, 만들고, 추어왔다. 춤을 보는 심미안은 일반인을 아득히 능가하는 수준이다.

그런 그는 눈앞에서 펼쳐진 일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하하!”

그가 짧게 웃었다. 그는 재능 있는 자를 사랑한다. 재능 있는 자는 신의 사랑을 받으니까.

브라이언은 만족감이 넘치는 표정으로 진저를 보았다.

“왜 네가 반했는지 알겠어! 저거였구나! 저런 모습이었구나!”

신난 브라이언과 달리 진저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이윽고, 진저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뭐야…….’

진저는 조아라를 좋아했다.

동경했다.

팬이다.

그런데 그건 인간을 사랑하는 올림포스의 신과 같은 마음가짐이었다.

구름 아래로 살짝 내려와 흡족하게 인간을 바라본다. 그 필멸성과 나약함과 오만함을 사랑한다. 알크메네를 사랑하여 지상으로 내려온 제우스처럼, 그 사랑은 돌보는 마음처럼 어여쁘다.

그걸, 진저는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저건…….’

지금에서야 조아라를 보곤 불쾌감밖에 생기지 않았다. 조아라는 진저의 세계로 발을 내밀었다.

춤으로 이루어진 그 세계는 순백이다.

그 세계로 들어왔던 건 미국 아카데미에서 만난 마스터 릭 칼먼, 지금 옆에 있는 브라이언, 혹은 회사에서 가끔 마주치던 다키스트 선배 중 한 명뿐이었다.

“더 찍으실래요?”

PD가 물었다.

조아라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답했다.

“아뇨.”

“알겠습니다. 그럼, 1시간 후에 회의실로 모여주세요.”

그때면 표결을 행한다.

조아라를 응시하던 진저는 곧 그녀와 눈이 맞았다. 진저의 피부로 소름이 돋았다.

귀여운 강아지나 고양이를 보곤 이런 감각이 찾아오지 않는다. 진저가 마주한 건 맹수였다. 자신을 물어뜯고 끝끝내 상처입힐 수 있는 맹수.

그런데, 그 맹수가 다가온다.

조아라는 이제껏 보여준 적 없던, 친밀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보이며 손을 내밀었다.

“수고했어.”

아.

진저는 목구멍에서 목소리가 나오려다 말았다.

가슴속에 든 감정은 스스로도 모를 만큼 복잡했다. 느껴본 적 없던 경쟁심이 화산처럼 뿜어져 나와, 조아라를 애정하는 마음과 뒤섞여 끝없이 불쾌하다.

“아라 씨도, 수고하셨슴미다…….”

“이봐, 아라!”

브라이언이 눈치 없게 조아라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품을 뒤지더니 명함을 꺼내어 그녀에게 주었다.

조아라는 생각했다.

‘어른이다!’

명함을 주다니, 브라이언은 어른이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연락해. 오케이? 영어 할 수 있어(Can you speak english)?”

“네, 네. 근데 누구세요?”

“나를 모른다고?!”

“브라이언, 갑시다.”

“응?”

브라이언은 당황했다. 진저가 한 번도 한 적 없던 짓을 하고 있었다. 그의 옷소매를 잡고 이끄는 것이다.

“갈 거면 너 먼저 가그엑!”

결국 억지로 끌려갔다.

그는 끌려가면서도 조아라를 향해 외쳤다.

“난 케이팝 코레오그래피도 꽤 만들어봤어! 도움이 될 거야아아아아……!”

“아라야, 저분 누구셔?”

“몰라요.”

“새로운 진저 씨 매니저인가? 확실히, 매니저랑 경호원 둘 다 하실 수 있을 거 같다. 효율적이야.”

“그럼 아저씨는 매니저, 프로듀서, 경호원 셋 다 할 수 있으니까 1.5배 더 효율적이네요?”

“그러게.”

성필과 조아라는 서로를 보았다.

그리고 서로 다른 의미로 미소 지었다.

“잘했어. 대단하다.”

“알아요.”

“뭐야.”

갑작스레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

“쌤쌤!”

조아라가 민시화에게로 달려갔다. 민시화는 서학준과 함께였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미안, 일이 있어서. 저녁이라도 같이 먹으려고 늦게 왔어. 다 끝난 모양이네?”

“끝난 지 한참이에요.”

“아쉽다.”

조아라는 민시화의 다리를 보았다. 아직도 깁스를 단 채 목발을 짚고 있었다.

그런데 별로 슬퍼 보이지 않는다. 남편에게 착 붙어서 손을 놀리는 모습을 보아하니…….

그때 성필과 서학준의 눈이 맞았다.

둘은 왠지 모르게 서로를 보자마자 하하 웃음이 나왔다. 동질감 때문인지, 정말 알 수 없었다.

“뭐.”

조아라는 씩 웃으면서 말했다.

“표결까지 시간도 있는데, 이왕 오셨으니까 춤 보여드릴까요?”

“얘는, 무대가 없는데 보여줘봤자 뭐하니.”

“그럼 출게요.”

“여기서?”

조아라가 민시화를 붙잡고 칭얼댔다.

민시화는 어쩔 수 없단 듯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행이네.’

잘 끝난 거 같아서.

조아라는 밝은 얼굴로 스승을 향해 춤을 추었다.

* * *

진저가 회사로 돌아왔다. 그는 매니지먼트 1팀 사무실을 찾았다.

케이어스의 컴백으로 다들 바쁜 나날을 보내던 터라, 사무실은 한산했다.

1팀장은 자리에 앉아 통화를 하다가 진저를 발견했다. 그러곤 다급히 전화를 끝내려 했다.

“아 네 쇼핑몰 잘되는 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상목이 네가 물었…….]

“상목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됐어 나 여기에 뼈 묻을 거니까 그딴 소리 할 거면 연락도 하지 마.”

[네가 걸었…….]

“끊어!”

1팀장은 생글생글 웃으면서 1.5급 경계 대상인 진저를 맞이했다.

“오우, 우리 진저 무슨 일이야? 촬영은 잘 끝났어? 어째 얼굴이 좀 우중충하다?”

진저는 1팀장 앞에 멈춰 섰다.

1팀장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왜 그래?”

“…….”

“져, 졌어?”

바쁘게 작업에 빠져 있던 몇몇 매니저가 경악했다. 진저가 ‘아오아’에서 패배했다고?

“사기예요!”

“브라이언 그 새끼한테 돈을 얼마나 가져다 부었는데 져?!”

“당장 잡아서 고소햇!”

“빨리 진저한테 음료랑 과자도 가져가!”

“더 스튜디오 이놈들이 미쳤나!”

매니저들이 부산스러워졌다.

1팀장은 올곧이 진저만을 바라보았다. 그가 자애로운 투로 다시 물었다.

“정말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응?”

“……비겼슴미다.”

“아!”

1팀장은 표정이 풀렸다.

“그거야 뭐 ‘아오아’ 전통이잖아. 표 갈라먹어서 서로 체면 세워주는 거. 으이그, 못 이겨서 속상했구나? 근데 최종적으론 네가 이기지. 몇 주 뒤에 올라올 영상 조회 수 비교하면 딱 나올걸? 그러니까 상심하지 말고…….”

“아라 씨가.”

“응?”

“아라 씨가 저한테 표를 줬슴미다.”

“아, 아아! 좋았겠네! 너 아라 좋아했잖아!”

“지유 씨는 아라 씨한테 표를 줬슴미다.”

“…….”

1팀장은 드디어 사건의 내막을 눈치챘다.

“저는, 저는…….”

진저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 아아, 아라 씨, 아라 씨한테, 표를, 줬어야, 주려고 했는데에…….”

그러면 진저, 자신이 져버린다.

진저는 커다란 울음을 토해냈다.

그녀가 악을 쓰며 외쳐댔다.

“지기 싫었슴미다! 지기 싫었슴미다! 지기 싫어서어! 지유 언니한테 투표했슴미다……!”

사무실 전체가 숙연한 분위기로 뒤덮였다.

진저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지기 싫슴미다……! 지고 싶지 않아, 지기 싫어, 싫어어어…….”

진저가 무릎을 꿇고 꺽꺽댔다.

그런 진저를 1팀장이 일으켜 세웠다. 그는 진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넌 안 져.”

케이어스는 지지 않는다.

“지지 않게 해줄게.”

승리를 주겠다.

영원한 승리를.

“앞으론, 누구에게도 지지 않게 해줄게.”

케이어스 컴백까지, 앞으로 10일.

* * *

“쌤 미쳤어요?!”

“오, 아라 왔어?”

백민정이 배시시 웃으면서 조아라를 반겨주었다. 그녀는 사무실 선반을 뒤지면서 말했다.

“간식 먹을래? 뭐 줄까?”

“그건 됐고 건물 바깥에 현수막 뭐냐고요!”

조아라는 오랜만에 ‘유 노 댄스 아카데미’로 왔다. 오자마자 충격을 먹곤 할 말을 잃었었다.

건물 현수막에 조아라의 얼굴이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던 것이다. 심지어 ‘제2의 조아라를 기다립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조아라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 발악하듯 외쳤다.

“저거 당장 철거해요 진짜 뭐 하는 거예요!”

“에이, 홍보도 되고 좋지 않아? 여기 근처에 은근히 사람들 많이 다녀. 네 얼굴 밑에 ‘유 노 댄스 아카데미의 자랑 소녀연맹 아라’라고 적어놨잖아. 홍보 효과가 엄청…….”

“회사에 말해서 지우게 할 거예요!”

“가로 엔터에 허락받았는데? 제대로 돈도 냈어.”

조아라는 절망했다.

“에휴.”

너무 절망한 나머지 항의할 기력을 잃고 그냥 자리에 앉아버렸다.

백민정의 사무실은 이전보다 넓어졌다. 원래 강사들 여럿이서 쓰는 곳에서, 그녀의 전용 집무실로 바뀐 것이다.

“쌤 잘나가네요.”

“내 인생의 전성기지. 다 네 덕분이야. 어디, 우리가 보낸 연습생들 잘하고 있어? 데뷔할 거 같아?”

“몰라요.”

“제2의 조아라는? 나왔어?”

“연생 애들 제대로 본 적 없어요.”

“제발 우리 애들 뽑아줘 건물 한 채 더 올리게!”

“청탁하려면 나 말고 아저씨한테 가서 해요!”

조아라는 스승의 구질구질한 애원을 겨우 쳐냈다.

“그리고 그냥 그룹으로 뽑히면 성공하나?”

조아라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 정도는 돼야 성공하죠.”

“우와, 재수 없어.”

“……진짜, 이제 나 이 학원 학생 아니란 거죠? 그러니까 막 대하는 거죠?”

“아냐 아냐. 우리 아라 사랑해. 그냥 보기 좋아서 그래. 예전보다 훨씬…….”

“자신감이 넘쳐요?”

“생각해보니까 똑같네. 옛날에도 막 선배들 무시하고 그랬잖아. 아, 오랜만에 그거 해줘.”

백민정이 조롱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우습게 조아라 성대모사를 했다.

“‘냬가 뎌 잘 쳐여. 꼬우면 나랑 뗘봐여.’ 아하하핰! 그때 나 웃겨 죽는 줄 알았잖아!”

“언제 얘기래…….”

조아라는 얼굴을 붉히며 백민정을 무시했다. 백민정은 친근감을 담아 그녀의 어깨를 쓸어주었다.

“밥 먹으러 가자.”

“뭐 먹어요? 맛집 알아뒀어요?”

“네가 사는 거 아녔어?”

“아니…… 뭔…… 그래도 쌤이 어른인데…….”

“네가 나보다 더 잘 벌잖아. 앨범 하나 내면 몇억씩 손에 쥐잖아. 아니야? 어? 아니야?”

“알겠어요 내가 살게요 내가 사. 여기 다신 오나 봐라.”

“농담이야. 가자, 내가 너 좋아할 만한 데로 다 예약해놨징.”

“쌤 사랑해요.”

“실례합니다아…….”

둘이 나서려던 때, 중학교 고학년쯤 되어 보이는 수강생이 집무실로 들어왔다.

“오늘 과제 말이끼으아아아아에에에엑?!”

수강생은 조아라를 보자마자 익룡 울음을 뱉었다. 그녀는 손발을 벌벌 떨더니 무릎을 꿇었다.

“아, 아라, 아라라라, 아라르라라라!”

“그게 누군데.”

“얘가 네 팬이야. 엄청난 팬. 현수막 걸자마자 등록하러 왔어. 제2의 조아라를 노리고 있대.”

“오, 진짜?”

“제가 어떻게 감히 아라, 아라 씨, 아라 님의 다음을 노리겠습니까아아! 아라 님, 아라 선배님!”

수강생은 비굴하기까지 한 태도였다.

조아라는 그녀를 직접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그녀는 황송하단 듯 바들바들 떨었다.

“그래서, 민정이 왜 왔어?”

“어? 얘 이름이 민정이에요?”

“응. 신기하지? 나랑 이름이 같아.”

“민정입니다!”

“어, 민정아.”

“……씁.”

백민정은 기분이 묘했다.

“과, 과제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서요.”

“음. 어떻게, 우리 대선배님이 과제 봐줄래?”

“그으 그렇게에 황송한 일이이이!”

조아라는 어이없단 듯 백민정을 보았다. 백민정은 딴청을 피웠다.

“그래, 뭐, 내가 봐줄까?”

“고, 고맙, 성은이 망극합니다아!”

민정이는 거의 실신 직전이었다. 실신 직전인데, 헤르메스보다 빠른 걸음으로 집무실을 뛰쳐나가면서 환호성을 내질렀다.

“내 인생 최고의 날이야앗!”

조아라는 크게 웃었다.

“쌤, 쟤 몇 살이에요? 16살? 17살?”

“13살.”

“……초6이라고요?!”

“요즘 애들 발육 좋아. 나 저번에 중학생들 하교하는 사이에 끼었거든? 아니 근데 전부 다 나보다 큰 거야. 잘 먹고 자라서 그런가.”

유례없이 대한민국이 풍요로울 때 태어난 세대.

그 평균 신장은 서양권에 근접한다!

어쩌면 미래의 아이돌들은 죄다 장신일 수도 있다. 굳이 장신을 뽑는 게 아니라, 평균적으로 장신인 것이다.

대한민국의 미래가 밝다.

주로 외모적으로 말이다.

“민정이는 유독 특이한 거긴 하지만.”

“그러게요. 민정이가 특이하네요.”

“…….”

“왜요 민정 쌤?”

“어, 아냐…….”

셋은 비어 있는 연습실로 왔다.

민정이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폰을 쥐었다. 그리고 과제곡을 찾았다.

댄스 연습 레퍼토리로 흔히 쓰이는 팝송이었다.

“제, 제, 감히 제가, 추, 춤을 춰보, 춰봅니다 아라 님 선배님!”

“같이 춰볼래?”

“느에?!”

“프리스타일로 해보자.”

곡이 재생되자 조아라가 여유롭게 골반을 까딱였다. 민정이가 느슨한 손으로 눈을 가리면서 말했다.

“세에, 세쿠시이(섹시)…….”

“너 진짜 인민이구나? 세쿠시(섹시) 챌린지도 알고.”

“아빠 엄마 손 잡고 콘서트도 갔어요!”

“……어, 너 13살이랬지. 암튼, 추자.”

“네엡!”

둘은 과제 따위 까맣게 잊고 프리스타일 댄스를 추었다. 민정이는 조아라와 달리 스트릿 댄스를 배우지 않은 것 같다.

철저하게 어반 댄스를 위해 단련한 테크닉만이 엿보인다. 아마 아이돌 연습생 지망생인 듯했다.

“오, 잘 추는데?”

“아라 님 선배님은 어나더 레벨이네요! 어낱 뤠블.”

“그런가?”

조아라는 슬슬 고난도의 기교를 보여주려 했다.

그러다가, 관두었다. 관두고, 그저 가슴이 시키는 대로 몸을 움직였다.

은은한 행복이 그녀를 감쌌다.

‘한의사님이 알려줬었나?’

피카소가 이런 말을 했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어른 같은 그림만 그렸다. 그런데 드디어 어린이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됐다.

‘피카소는 끝에 다다랐던 거겠지.’

끝에 다다르고 나서야, 어린아이처럼 마음껏 그리고픈 걸 그릴 수 있었다.

조아라는 이제야 끝에 다다르는 여정을 시작했다. 그러니까…….

‘춤으로 이렇게 행복한 건 이제 끝이겠다.’

춤의 끝에 도달하기까지, 그녀에게 춤이란 고통일 것이다. 영원토록 붙잡고 해결해야 할 숙제.

그럼에도 조아라는 춤을 놓지 못한다.

고통스럽지만, 또한 사랑하니까.

아니, 이젠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집착이지.’

그 집착의 시작점에서, 조아라는 청년기의 끝을 장식하듯 본능에서 우러나온 춤을 추었다.

마지막으로, 그저 즐겁도록.

* * *

가로 엔터 현관 밖의 테라스. 그곳에서 성필과 조아라는 마주 앉아 술을 마셨다.

“드디어 아저씨가 약속을 지키네.”

“겨우 이런 걸로 괜찮아?”

성필은 조아라와의 약속을 지켰다.

술을 사주기로 한 것 말이다.

그런데 조아라는 하필 술 마시는 장소로 가로 엔터 앞을 골랐다.

직원들이 모두 퇴근하여 눈치 볼 일은 없다. 그렇지만 회사 앞 테라스는 휴식용으로 쓰이는 곳이라, 술을 마시는 건 좀…….

“받아요.”

조아라가 성필의 잔에 소주를 채웠다.

성필도 조아라의 잔에 소주를 채워주었다.

“근데 너 맥주만 마신다지 않았어?”

“걍, 요즘 소주가 땡겨서요.”

“큰일이네.”

둘은 잔을 부딪치고 술을 입 안에 부어 넣었다.

“적적한데 노래 틀까요?”

“좋지.”

“아저씨가 좋아하는 거 틀게요.”

조아라가 다키스트의 ‘유어 스타’를 재생했다. 성필이 조아라의 선곡에 감탄했다.

“아저씨.”

“응? 안주가 부족해? 족발 대짜 시켜놓고 부족하단 건 좀…….”

“여친 있었단 거 거짓말이에요?”

성필은 무슨 뜻이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냥 내 춤이 못 봐줄 정도였으니까, 수정시키려고 거짓말한 거죠?”

“……뭔 소리야. 내가 그렇게까지 인정사정없는 거짓말까지 지어내는 사람 같아?”

“근데, ‘배드’ 안무가 말예요. 아무리 춰봐도 아저씨를 위해서 만들어진 건 아닌 거 같아서요.”

“그, 음, 그래?”

“나한테 딱 맞는 옷 같아요. 아저씨가 천장에 내 얼굴 그리면서 필사적으로 만든 거 아니에요?”

성필은 픽 웃었다.

“아라야, 내가 안무가도 아닌데 춤을 만든단 게 썩 그럴듯한 이야기는 아니잖아. 그래, 거짓말한 거 미안하다.”

“아이돌 덕질만 10년 넘게 했는데 왜 안 돼요?”

“덕질이랑 배우고 만드는 건 다르지.”

“그래요? 그럼 뭐, 그렇다 쳐요.”

둘은 또 잔을 비웠다.

“그럼 전 여친이란 사람이랑 왜 헤어졌어요? 구체적으로 말해봐요.”

“이게 어른을 의심해?”

“빨리요. 안 말하면 ‘네 춤 X나 구리니까 바꿔야겠어’라고 생각했던 걸로 이해할게요.”

“…….”

성필은 종이 잔을 손안에서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곤 조아라를 보았다. 그녀는 달빛을 역광으로 받았다. 마치 후광이 은은히 비치는 듯했다.

“나이 차이…… 때문에.”

“그 사람이 높았어요? 아님 아저씨가?”

“내가 연상이었어. 차이가 좀 많이 나서.”

“차였어요? 저런.”

“내가 찼어.”

조아라가 의외란 듯 웃었다.

“점점 거짓말 같네. 뭐 차이가 얼마나 났어요?”

“12살.”

“미친 거 아냐?! 아저씨 그 시기면 상대는 거의 뭐 20살이나 20대 극초반이잖아요!”

“그러니까!”

성필이 드물게도 쾌활하게, 낯가림 하나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조아라는 심각해졌다.

“설마 미성년자는 아니죠?”

“성인이었어. 응, 성인이었지. 안무가라니까?”

안무가라고 무조건 나이가 많지 않다.

현재 한국에도 스무 살이란 어린 나이에 히트 안무가로 활동하는 사람이 있다. 20대 초중반도 꽤 흔한 나이다.

재능이란 나이를 가리지 않고 피어나는 법이니.

“12살 차이면 뭐…….”

조아라는 뜸 들이더니 자신의 잔에 소주를 채웠다.

“많긴 한데, 그냥 나이 차란 이유로 헤어지는 건 뭔가, 음, 석연찮은데요. 아저씨가 차였죠? 아님 그 사람이 막 아저씨 돈 쪽쪽 빨아먹었어요?”

“12살 차이란 건…… 아라야.”

성필도 자신의 잔에 스스로 소주를 채웠다.

둘은 또 잔을 비웠다.

“세대가 다르단 거야. 서로 딛고 선 자리가, 보는 풍경이 달라.”

“왜 진지하대. 아니, 진짜 전 여친이 있었다고요? 지어낸 거 아니에요?”

“맘대로 생각해.”

“아 뭔데. 제대로 대답해줘요.”

조아라는 삐친 체하며 또 잔을 채웠다.

“그래서, 그 여친은 헤어지자니까 뭐래요?”

“싫댔어.”

“근데요?”

“뭐 어째.”

“질렸다거나…… 그랬어요?”

“그렇다기보다, 그 사람한텐 더 나은 미래가 있을 테니까. 나 같은 사람보다 훨씬 나은…….”

“진짜 못 들어주겠네. 로맨스 소설 써요? 그거 다 핑계잖아요.”

“맞아, 무서웠어.”

“무서워요?”

“난 한참 아저씨잖아. 버려질까 봐 무서웠어.”

“…….”

“그리고 그 사람 앞엔 더 나은 길이…….”

“지랄 No.”

조아라는 성필이 이야기를 지어낸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녀는 괜히 진지했다면서 툴툴거렸다.

“아저씨, 나중에 영화나 볼래요?”

“하아, 이건 진짜 꼬시는 거 맞다…….”

“지음 오빠 작업실에서요. DVD로. 다 같이 봐도 좋구요. 걍, 다 같이 영화 본 적이 없는 거 같아서.”

“그런 거면 뭐, 좋지. 너 보고 싶은 거 있어?”

“아뇨.”

“좋아하는 장르는?”

“액션! 인생 영화는 ‘올드 보이’예요.”

“웃어라, 온 세상이 너와 함께 웃을 것이다. 울어라, 너 혼자 울 것이다.”

“진짜 사람들 ‘올드 보이’라고 하면 다 그걸 명대사로 꼽더라. 지겨워요 지겨워.”

“너무하네…….”

“‘올드 보이’ 27번 재탕한 사람 입장에서, 그게 진짜 명대사가 아니거든요.”

“그럼?”

“아저씨 사랑해요.”

성필은 말 그대로 전신이 얼어붙었다.

잔을 채우느라 내린 시선을 겨우 위로 들었다. 조아라가 달빛 아래에서 배시시 웃고 있었다.

“아, 호칭이 헷갈릴 만하네. 아저씨 얘기 아녜요. 영화 대사예요.”

“뭔데…… 나 도망칠 뻔했잖아…….”

“호칭 바꿀까요? 오빠로?”

“뭐?”

“아저씨는 아저씨라고 불리는 거 싫댔잖아요. 이왕 말 나왔으니까…….”

조아라는 잔을 채웠다.

잔이 슬슬 넘치고 있다.

그런데도 계속 소주병을 기울인다.

“오빠로, 할까요?”

성필은 넘쳐흐르는 잔을 바라보다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계속 아저씨라고 불러줘.”

“……왜요?”

“지금의 네가 나를 부르는 이름이잖아. 너만이 나를 부르는 이름이야.”

조아라는 굳었던 표정이 무색하게, 성필의 답을 듣자마자 취한 웃음을 배시시 흘렸다.

“뭐래…….”

침묵 속에 술잔이 오갔다. 그 침묵을 채워주는 건 다키스트의 목소리였다.

[난 너의 별이야

날 빛나게 하는 한 사람

나를 태우는 단 한 사람……]

‘아티스트 오브 아티스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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