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한는 프로듀서-531화 (531/760)

531화

“마지막 춤이라고요……?”

평생 제대로 된 춤을 출 수 없게 된다고?

조아라는 점점 창백해졌다. 그녀는 아킬레스건 파열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던 제자를 향해 절박하게 호소했다.

“말려야 하잖아요!”

“선생님이 결정하신 건데 어떻게 말리니.”

“춤을 못 춘다는 건, 그러니까, 못 걷는단 거 아니에요? 그런 꼴로 평생을 살아간단 게 정상적인 결정이에요?!”

조아라의 외침은 주변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민시화와 서학준의 제자들이 안절부절못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니야.”

제자가 부정했다.

“오늘이 지나면, 아마 심하면 깁스나 부목을 대고 생활하시겠지만 원래대로 돌아오셔.”

“아, 그래요……?”

“지금보다 더 불편해지시겠지만, 일상생활은 가능해. 발목에 힘을 못 실으니까…… 거친 달리기 같은 건 못 하게 되시겠지.”

그러니 당연히 춤도 못 춘다.

민시화는 현재도 심각한 상태다.

처음 아킬레스건 파열이 왔을 땐 수술과 재활로 이겨냈다. 그러고서 계속 춤을 추고, 다시 파열됐다.

여기서 더 무리하면 큰일이다. 의사는 그리 말했었다. 제자의 말마따나 달리기는커녕 간단한 스텝조차 제대로 밟지 못하게 된다.

“왜…….”

조아라가 망연자실히 읊조렸다. 그녀가 비틀거리자 성필이 뒤에서 받쳐주었다.

“선생님의 마지막 춤이야. 제자로서 끝까지 지켜보는 게 예의라고 생각해.”

그리 말한 제자는 조아라 대신 민시화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조아라 또한 미세하게 떨며 민시화를 보았다.

‘아.’

그때 조아라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민시화의 아카데미로 갈 때마다 항상 위화감이 들었었다.

‘다른 학생들은 어딨지?’

조아라 개인 교습이니 다른 학생들이 안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게 몇 주나 이어지니 이상했다.

다음 수강생이 먼저 와서 기다리거나, 이전 수강생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조아라가 오면 민시화는 항상 의자에 앉아 커피만 홀짝이고 있더랬다.

조아라의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춤을 가르쳐줄 때 짧게 동작만 보여준 것도, 영상 자료를 많이 보여줬던 것도…….’

민시화가 춤을 출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가르침은 직접적인 시연이 없더라도 가치 있었기에, 조아라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런 부조리를 받아들였었다.

혹은 시간이 지나면 민시화가 직접 지도해주리라고 막연히 기대를 품었었다.

조아라는 민시화를 바라보다가 깨달았다.

‘상처…….’

평소 민시화는 항상 긴바지를 입고 있어 볼 수 없던 상처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그녀의 구두 뒷굽 위, 아킬레스건에 세로로 새겨진 붉은 상처였다. 보자마자 속이 안 좋아질 정도로 커다란 상처다.

‘저런 상태로…….’

춤을 추고 있는 건가?

신아름이 춤을 연습하다 허리를 삐었던 적이 있다. 고통을 호소하기에 병원으로 데려가 무통 주사를 맞추고 무대에 섰었다.

그러고도 신아름은 몇 주간 고통스러워했다.

그 강인한 신아름이 무대 위에서 표정을 찡그릴 정도로.

‘그런데…….’

민시화는 웃고 있었다.

더없이 밝고 아름다운 웃음이었다.

* * *

‘아, 이거야.’

민시화는 황홀경 속에서 춤을 추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무대를 누비며 세상을 향해 말한다.

‘나를 봐.’

댄서는 자기현시욕의 화신이다.

누구에게든 자신을 보여주지 못해 안달이다.

세상에 댄서만큼 자신의 몸을 생각하며, 이야기하고, 꿈꾸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민시화가 머릿속에 그리는 움직임은 곧 현실에 펼쳐져 춤이란 형태로 쓰인다.

이데아의 발현.

이데아 속에서 민시화는 천상에 접했다.

‘학준아.’

그런데 파트너인 서학준은 슬퍼했다.

입가는 미소를 머금고 있지만 눈동자 안에선 끔찍한 슬픔이 소용돌이쳤다.

“왜 그래.”

민시화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말했다.

“행복하지 않아?”

“행복해…….”

민시화는 서학준에게 몸을 맡기며 스텝을 밟았다. 공기를 가로지르며 다리를 뻗는 감각. 마치 땅을 접어 달리는…….

“뭐 하는 거야?”

서학준이 맞춰주지 않았다.

그는 리더로서 팔로워를 제대로 이끌지 않았다. 최소한의 베이식(기본 동작)으로만 춤을 추고 있다.

서학준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민시화는 그의 마음을 읽었다.

“마음껏 해.”

마음대로, 리더로서, 나를 써.

서학준은 입매를 일그러뜨리면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민시화의 등을 단단히 받치곤 발을 길게 뻗었다.

순식간에 관객석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둘은 돌고 또 돈다. 회전판 위에 놓인 꽃이 회전하며 꽃잎을 흩뿌리듯이, 그들은 꽃의 폭풍이 되어 무대를 누볐다.

심사위원 전원이 펜을 움직였다.

“아…….”

민시화가 들뜬 숨을 내쉬었다.

“사랑해…….”

서학준은 미소 지었다. 그 사랑이 자신을 향하지 않는단 걸 알아서였다.

민시화는 춤을 사랑했다.

“나도.”

서학준의 눈동자 속에서 슬픔이 걷혔다.

그와 동시에 그녀는 춤의 애무 속에 빠져들었다. 이윽고 녹아내린 그녀는 완전히 세상과 하나가 되었다.

무아일체(舞我一體).

공기가 되어, 불꽃이 되어, 무게 하나 남기지 않고 허공을 걷는다.

* * *

왈츠가 끝나고 두 번째 무대.

슬로우 폭스트롯.

민시화와 서학준의 춤사위는 중후하고 매끄럽도록 변화했다.

끝도 없이 정적인 춤이다. 하지만 민시화의 안에선 숨길 수 없는 역동성이 요동쳤다.

무겁게 내리깔린 사람들 사이에서 그녀 주위의 공간만 일그러지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정중동 동중정(靜中動 動中靜).’

조아라는 민시화의 춤을 보며 그 단어를 떠올렸다. 가로 엔터가 섭외한 안무가 중 한 명, 한국전통무용가가 알려준 개념이다.

멈춤 속에 움직임이 있고, 움직임 안에 멈춤이 있다.

멈추라는 건지 움직이란 건지도 모를, 테크닉을 일컫는 게 아닌 춤의 분위기를 뜻하는 말이다.

움직임으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진리는 관객들이 분위기로 느낄 수밖에 없다. 즉, 댄서 개인이 가진 아우라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표현법이다.

‘저거야.’

조아라는 그 무용가의 춤을 보고도 느낄 수 없던 개념을, 민시화를 보고 이해하게 됐다.

움직임이, 테크닉이 전부가 아니다.

댄서가 지닌 아우라가 춤을 완성한다.

조아라는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울음이 나올 것 같아서였다.

‘저 춤은 선생님이…….’

생명을 태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울어서, 감정에 휩쓸려 눈물을 흘리는 일 따위 하고 싶지 않다. 한순간이라도 민시화의 춤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주는 가르침.’

완성에 이른 댄서가 펼치는 최후의 춤이다.

슬로우 폭스트롯이 끝나고 세 번째 무대.

탱고.

민시화의 의상이 빛을 발했다. 그녀의 정열적인 붉은 드레스는 무대 위의 어느 댄서들보다 확연히 눈에 띄었다.

“아라야, 괜찮아?”

옆에 있던 성필이 물었다.

조아라는 대답하지 않고 민시화만 바라보았다. 성필도 더는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민시화의 제자들은 벌써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조아라는 그들과 같은 마음이었으나,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보아야 한다.

민시화의 가르침을 사소한 것 하나 빼지 않고 모두 보아야만 한다.

그리고, 보인다.

‘달라.’

민시화와 서학준은 다른 이들과 확연히 다르다.

조아라가 댄서이기 때문에, 일반인과 남다른 심미안으로 볼 수 있는 차이일까?

‘아니야.’

일반인이라도 느낀다.

저건 다른 댄서들과 명백히 다른 생물이다. 그 정도로 거대한 차이점이다.

조아라는 다른 커플을 흘끗 보았다.

‘저쪽은 리더가 팔로워를 거의 끌고 가듯이 하고 있어.’

팔로워를 복종시키고 본인의 스텝을 억지로 따르게 한다. 팔로워가 벅차하는 게 느껴진다.

그들의 춤은 역동적이고 정열적이었지만, 둘 사이로 공간이 점점 벌려지는 듯했다.

‘저쪽은.’

조아라는 또 다른 커플을 보았다.

‘리더가 팔로워를 배려하고 있어.’

너무 배려한 나머지 움직임이 굼뜨다.

둘은 사이가 좋아 보인다.

움직임에서도 신중함과 배려, 애정이 돋보인다.

하지만 그게 한계다.

배려란 상대를 모르기에 하는 것이다. 상대가 어떨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내놓는 타협책이다.

그에 비해 민시화와 서학준은.

‘하나야.’

마치 둘의 몸이 하나인 것처럼 움직인다.

심사위원과 관객들도 민시화만 보고 있다.

‘얘.’

민시화의 목소리가 아른거린다.

‘스포츠댄스란 건 불공평한 종목이야. 사람들은 거의 리더만 보고 평가하거든. 번호도 리더의 등 뒤에만 붙여. 팔로워를 도구처럼 취급하는 사람도 많아. 무조건 따르란 거지.’

그런데, 그런 인간들은 절대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스포츠댄스는 리더와 팔로워란 명확한 역할 구분이 있지만, 엄연히 페어 댄스니까.

‘한 명이 상대를 굴복시켜서도, 상대에게 복종해서도 안 돼.’

서로가 서로가 된 것처럼, 상대의 생각을 손바닥에 쥔 듯이 알아야만 한다.

‘그 정도가 되면, 사람들도 리더만이 아니라 팔로워를 봐줘. 그제야 동등한 위치에 오르는 거야. 아니, 나중엔 아예 넘어설 수 있지.’

리더를 액자 취급하고, 팔로워 자신이 액자 안의 그림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액자 따위 보지 않는다.

그림을 본다.

그걸 민시화가 직접 보여주고 있었다.

고상한 심미안 따위 없어도 알 수 있다. 그녀의 춤이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

‘따르기만 하는 팔로워는 매력도 없고 한계가 명확하거든. 둘이 하나가 된단 건, 단순히 어느 한쪽에게 복종하거나 어느 한쪽을 지배하는 게 아니야. 너처럼.’

조아라는 코끝이 찡했다.

그 말을 들었던 날, 민시화가 그녀의 코끝을 검지로 톡 건드렸을 때처럼.

‘복종하기만 하는 건 매력 없어.’

민시화는 웃으면서 그리 말했었다. 그리고 또, 댄서니까 춤으로 말해주겠다고 했었다.

조아라는 입술을 꽉 물었다.

‘이게 춤으로 말한다는 거구나.’

춤이 언어란 말은 질리도록 들었다.

무언가를 표현한단 점에서 언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진짜 언어처럼 명확성은 없다.

춤이 언어란 건 그저 아름다운 미사여구와 비유일 뿐이다. 그리 생각했던 조아라지만 이젠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이 나한테 말하고 있구나.’

춤이 공기 위에 쓰인다.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증발하듯 사라지는, 참으로 방탕한 예술. 글처럼, 그림처럼, 형태를 남기지 않고 매 순간을 태워 발하는 영혼의 반짝임.

하지만 그 순간의 반짝임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는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는 무언가, 사람들은 그런 것을 걸작이라고 부른다.

몇분 후 세상에서 사라질 인류의 걸작.

탱고가 끝나고 다음, 네 번째 무대.

퀵스텝.

굉장한 땀이다.

무대에 오른 이들 모두 비 오듯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들은 다음 무대가 시작되기 전 자리로 대기실로 돌아가 옷을 벗고 땀을 말리며 베이비 파우더 같은 것을 몸에 발랐다.

민시화와 서학준도 예외가 아니었다.

서학준의 제자들은 그의 바지를 드라이기로 말려주고 등과 팔을 수건으로 닦아주었다.

민시화는 얼굴을 닦아내고 메이크업을 수정했다.

조아라가 민시화 앞에 섰다.

“내가 해줄까요?”

민시화는 미소 지었다.

“부탁해도 될까?”

“네.”

“아이돌한테 받는 화장이라니, 호강하네.”

“…….”

조아라는 발목이 괜찮은가 물어보려다가 관두었다.

네 번째 무대, 퀵스텝.

서학준과 민시화가 무대로 나섰다. 그들이 자리를 잡으려 나오자마자 관객석에서 유례없는 환성이 터져 나왔다.

스포츠 기자들이 전설의 마지막 무대를 사진으로 여러 차례 찍었다.

곡이 흘러나왔다.

민시화와 서학준은 경쾌한 스텝을 밟았다. 단순했던 스텝은 복잡한 바리에이션으로 바뀌고, 이윽고 모두가 본 적 없던 아말가메이션으로 변화했다.

무대 위에서 춤추던 이들조차 민시화가 시야에 들어오면 멍해져서 움직이는 것을 잊었다.

환호로 가득했던 관객석이 조용해졌다.

몇몇 심사위원이 서류철과 펜을 떨어뜨렸다.

“이런 건 세계무대에서 해야지…….”

누군가 작게 읊조렸다.

조아라는 손과 입술을 미세하게 떨었다. 시야가 새하얗게 변하는 기분이다.

스탕달 신드롬이 찾아온다.

세상 모든 게 무너지고, 흐려지고, 민시화만이 남는 것 같다.

사람들은 흐려지더니 검은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흩날려 사라졌다.

무대는 땅으로 꺼져 무형의 발판만 남겼다.

세상 모든 게 사라진 가운데 민시화만이 남아 춤을 추었다. 아니, 춤만이 남았다.

춤이 조아라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조아라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아, 아…….”

그런 의미 없는 말만이 튀어나왔다.

스승이 생명을 불살라 만들어 낸, 그녀가 죽는 순간까지 볼 수 없을 완성에 닿은 춤.

옛사람들이 엘비스 프레슬리의 ‘Jailhouse Rock’을 처음 봤을 때처럼.

마일스 데이비스의 ‘So what’을 처음 들었을 때처럼.

비틀즈의 ‘Hey jude’를 처음 들었을 때처럼.

마이클 잭슨의 ‘Thriller’를 처음 봤을 때처럼.

조아라는 느꼈다.

이건 내 삶에 다신 찾아오지 않을 감상이다. 이 새로움은 다신 내 삶으로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영원토록 내 안에 남아, 나의 일부를 이룰 것이다.

“그렇게나 멋졌니?”

춤이 조아라에게 물었다.

조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한 건, 이해했고?”

조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춤이 조아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다행이네.”

조아라는 눈물을 닦고 앞을 바라보았다.

불꽃이었다.

불꽃이 걷히고 민시화가 드러났다. 그녀는 땀으로 흥건해진 얼굴로 조아라를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더니 쓰러지려 했다.

서학준이 그녀를 받았다.

* * *

“자기가 생각하고 만들었으니까 자기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다, 라…….”

민시화는 병실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깁스를 찬 오른 다리를 휘적이면서 목발로 땅을 툭툭 두드렸다.

“옳은 말이야.”

“뭐, 그렇겠죠.”

조아라는 민시화의 병문안을 왔다.

방금 대화 주제는 성필이 해준 아티스트십에 관한 것이었다.

“자기가 생각했으니까 자기가 잘할 수 있단 건 뭐, 너무 당연한 이야기거든. 예외는 능력이 안 따라줄 때지. 능력이 받쳐준다면 본인이 짠 안무로…… 아이돌이면 곡인가? 컨셉이나?”

“대강 그래요.”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해. 그런데 사실 변명 같은 거지.”

“네?”

민시화는 목발로 깁스를 톡톡 쳤다. 가려운 모양이다.

조아라는 기겁하면서 그녀의 목발을 뺏었다.

“남이 열심히 생각해서 만든 걸 완전히 소화할 수 있는 인간이란 게, 생각보다 그리 흔하지 않아. 결국 원본을 카피하는 거니까.”

“그으…… 그런 거예요?”

민시화가 설명했다.

춤이란 세상에 하나뿐인 고유한 신체를 활용하는 예술이다. 노래도 고유한 목소리를 쓴단 점에서 춤과 같다.

그런 고유의 예술이, 타인이 정교하게 제작한 작품을 모방하는 것으로 변한다면 역시 아우라가 퇴색될 수밖에 없다.

아티스트의 고유성, 자발성, 개성을 억압하고 반복과 재생에만 몰두하는 건, 당연히 한계가 있다.

한계가 있기에, 차라리 미숙하더라도 본인이 창작하는 쪽이 표현력에 있어선 우위를 점한다.

“결국 실연자는 제작자의 머릿속에 든 이상향엔 닿을 수 없어. 원래 이상향이란 게 인간이 닿을 수 없는 거긴 하지만 말야. 그러니까, ‘자기가 생각했으니까 자기가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건 일종의 변명으로 작용하는 거지.”

정말 끝내주는 아이디어가 있다. 근데 넌 시켜도 못할 테니까, 그냥 네가 생각한 걸로 하자.

아티스트십을 강조하는 건 그런 의미의 변명이 될 수 있다.

“물론 능력과 의지가 합쳐지면 본인이 본인이 할 걸 만드는 게 가장 좋아. 마이클 잭슨이 제일 적합한 예시일까.”

“쌤쌤 마이클 잭슨도 알아요?”

“얘는 날 뭘로 아는 거니. 당연히 알지. 빌리 진스 낫 마이 러버―.”

민시화는 노래를 못 불렀다.

“근데, 마이클 잭슨은 말 그대로 최상의 예시야. 그 사람 같은 아티스트는 앞으로 절대 안 나올걸?”

“인류를 너무 얕보는 거 아녜요? 곧 지구 인구 80억 찍을 거라잖아요. 그중에 마이클 잭슨 한 명 없겠어요?”

“그만한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야 모래알처럼 많겠지.”

“……모래알은 좀 과장인 거 같은데요.”

“마이클 잭슨은 모래알들이랑 달라. 재능을 가지고, 어릴 때부터, 야망을 품고 평생 음악만 한 사람이야. 그래, 재능 빼고 나머지 두 조건이 문제지.”

재능은 인간이 타고난다 치고.

‘어릴 때부터(환경)’와 ‘야망을 가진(의지)’은 어떻게 채울 것인가. 그런 인간이 앞으로 인류 역사상 태어나기나 할까?

“남이 만든 걸 완벽하게 모방할 수 있는 재능이란 건…… 그러니까, 남의 이상향을 완벽히 재현할 수 있는 능력은 마이클 잭슨의 아티스트십만큼 드물 거야. 결국 그 이사 오빠가 말한 창조적 아티스트십이든, 아이돌로서의 재현 능력이든, 어느 쪽이 우월하다곤 말할 수 없어.”

“……그럼 난 어떡하는 게 나을까요?”

“남한테 자기 길을 묻는 건 안 좋은 버릇이야.”

민시화는 친근한 손길로 조아라의 미간에 딱밤을 날렸다. 조아라가 인상을 찌푸리자 민시화는 애정이 담긴 미소를 보였다.

“근데 넌 남이 한 걸 시키기보다, 본인이 생각한 걸 하는 쪽이 훨씬 어울려. 태생부터가 남을 따를 상이 아니야.”

“골상학 그거 유사과학이에요.”

“그래, 넌 그냥 그런 인간이 아니야. 만족하니?”

“……나 촬영하러 오는 거 보러 올 수 있어요?”

“갈까?”

“오고 싶으면 와요.”

조아라는 민시화의 깁스를 바라보았다.

“후회는…….”

“너무 많아.”

조아라가 울상을 짓자 민시화가 그녀의 머리를 자신의 가슴에 품어주었다.

“아라야.”

민시화가 조아라의 이름을 불렀다. 조아라는 생소한 호칭에 놀랐고, 왠지 모르게 눈물마저 나올 듯했다.

“하고 싶은 건 뭐든 하고 살아. 정신이 낡고, 육체가 늙기 전에, 하고 싶은 건 뭐든 하는 거야. 춤추고 싶은 만큼 추고, 사랑하고 싶은 만큼 하고, 놀러 가고 싶은 곳은 모두 가고, 섹…….”

“거기까지 해요.”

민시화는 미소와 함께 조아라를 품에서 떼어냈다.

“후회하지, 당연히. 그런데, 춤을 추는 그 순간은 너무 황홀하고 행복했어. 그러니까 그 순간만은 후회하지 않아. 난 그 순간을 기억하고 양식으로 삼아 평생을 살아갈 거니까. 살아갈 힘을 얻었으니까.”

“…….”

그때 병실 문이 열리고 서학준이 들어왔다. 그는 품에 꽃을 품고 있었다.

조아라는 그를 보곤 공손히 인사한 뒤 가방을 챙겼다.

“가볼게요.”

“좀 있다…….”

서학준이 뭐라 말하기 전에 조아라는 재빠르게 병실을 나섰다. 부부의 단란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학준은 픽 웃고는 민시화의 곁에 와 앉았다.

“선물.”

“고마워라.”

민시화는 꽃다발을 받아 향기를 맡았다. 그리고 꽃다발은 선반 위에 두고 서학준에게 기댔다.

“이제 어떡하나, 춤을 못 춰서.”

“다른 일 찾는 건 어때?”

“뭘 해볼까.”

“악기라도 배워봐. 그나마 너한테 잘 어울릴 거 같은…….”

민시화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려왔다. 서학준은 그녀 쪽을 보지 않고 천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서 그가 경쾌하게 말했다.

“춤출까?”

민시화가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서학준이 그녀의 손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민시화를 깊이 기대게 했다.

“자, 목발.”

“……뭐야.”

민시화가 픽 웃으면서 목발을 짚었다.

“이러면 그냥 손잡고 걷는 거잖아.”

“그것도 춤이지.”

서학준이 폰으로 곡을 재생했다.

“피아졸라? 다리가 이런 사람한테 탱고를 시킬 셈이야?”

“네가 좋아하잖아.”

“하여튼.”

서학준은 왼손으로, 민시화는 오른손으로 서로를 붙잡고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민시화는 목발을 짚고 있어 둘의 스텝은 느리기 그지없었다. 대회 때 보였던 모습이 모두 거짓말 같았다.

얼마 후 민시화가 서학준의 어깨에 눈을 묻었다.

“이제 어떡해.”

민시화는 웃음기와 울음기가 동시에 섞인 떨리는 목소리였다.

“자기가 나한테 반한 거, 춤을 잘 춰서라면서. 근데 이제 춤 못 추니까…….”

“아, 그거?”

서학준이 부드럽게 아내를 안았다.

“거짓말이야.”

“어……?”

“사실, 첫눈에 반했어.”

민시화는 울음과 함께 웃음을 토해냈다.

* * *

“추워 죽을 거 같아…….”

신아름이 연신 재채기를 터뜨렸다. 그러고선 반팔 아래로 드러난 맨살을 손으로 빠르게 쓸었다.

그녀는 훌쩍이곤 백설하를 보았다.

“쌤은 안 추워요?”

“응? 아, 응.”

백설하는 신아름과 같은 반팔 차림이다.

10월의 가을 아침은 추웠다.

고작 며칠 만에 날씨가 극적으로 바뀌었다.

이러다가 곧 눈도 올 듯했다.

“프로듀싱 일로 호출받은 건 오랜만 아녜요?”

“그러게.”

신아름은 서유선에게, 백설하는 정지음과 리카에게 호출받았다.

서유선은 ‘시켜보고 싶은 게 있다’는 이유를 들먹이면서 신아름을 불렀다. 듣자 하니 성필과 조아라의 요구를 완성시킬 엄청난 작품을 만들었다는 모양이다.

‘날 부르는 것부터 예상이 딱 가네…….’

기괴할 정도로 어려운 안무일 게 분명하다.

신아름은 걱정에 한숨을 푹 뱉었다. 그에 비해 백설하는 천진난만했다.

“쌤 진짜 안 추워요?”

신아름이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

“아님 언니라서 가오 잡는 거예요?”

“가, 가오라니……. 정말 안 추운데 어떡해…….”

“하긴, 지방 많은 사람들은 추위 덜 탄대요.”

“어?!”

“근데 겨울은 편하지 않아요? 가만히만 있어도 살 빠지잖아요.”

“……그만큼 많이 먹는 걸 경계해야지.”

백설하는 신아름을 흘기면서 말했다.

지방이 많아서 추위를 덜 탄다니…….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쉽게 하기 힘든 발언이다.

‘내가 요즘 너무 풀어줬나?’

냉혹한 소녀연맹의 독재자인 백설하로 돌아가야 할 시간인지도 몰랐다.

그녀는 팔짱을 끼면서 신아름을 어떻게 감복시킬까 고민했다. 그러다가 문득 느꼈다. 본인의 팔에 닿은 지방을…….

“너 내 가슴 보고 한 말이었어?!”

“그럼 뭐 다른 거 있어요?”

신아름이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단 듯 백설하를 보았다. 백설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어버버거렸다.

그러는 사이 둘은 어느새 회사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 출근 시각 전이라 기분 좋은 정적이 회사를 채우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왜 히터 안 틀죠? 추운데…….”

“한 이사님 지금 계시는 거 아니야? 한번 말씀드려 볼래?”

히터를 틀자고 하는 순간 한구인은 방긋 웃으면서 ‘그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라며 되물을 것이다.

한구인은 어떤 사유든 돈을 더 쓰자는 말에 민감했다. 신아름이 설전(舌戰)을 걸어도, 한구인의 말솜씨엔 이길 수 없으리라.

‘최후의 방법은 내 권위로 한 이사님을 누르는 건데…….’

감히 유일한 가로 엔터의 아티스트가 부탁하는 걸 안 들어줘? 이러다 몸 상하면 어쩌려고요!

이러면 한구인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들어주리라.

‘……그런 건 안 보고 싶어.’

어차피 낮엔 또 더워지니, 참아야지 뭐.

성필이 출근하면 그의 윗도리나 가져다 입어야겠다.

신아름은 시답잖은 농담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리고 약속한 연습실로 향했다.

“끼아아아악!”

신아름은 문을 열자마자 귀신을 목격했다.

온몸에서 음산한 연기를 풀풀 내뿜는 귀신이었다. 머리는 산발에 몸은 명계의 한기를 품은 듯 물기가 가득했…….

“조아라?”

귀신의 정체는 조아라였다.

온몸이 땀에 젖어 춤을 추는 중이었다. 연습실 또한 바깥처럼 추웠다. 그 때문에 조아라의 가열된 피부로부터 증발한 수증기가 주변을 채우고 있었다.

무슨 만화 캐릭터가 각성한 모습 같았다.

“너 설마…….”

숙소에 안 들어오고 계속 여기서 춤췄단 건가?

신아름은 조아라의 이런 행동을 일탈로 봐야 하나 고민했다. 조아라는 자주 ‘춤이 남자고 유흥이고 쾌락이고 이하 생략’이라고 자주 말했으니.

비유하자면 그녀는 밤새도록 남자와 뒹굴었다.

“…….”

그런 농담을 생각할 새도 없이, 신아름은 조아라의 춤에 정신을 빼앗겼다.

조아라도 신아름이 없단 듯 춤을 이어갔다.

덴마크 가수 크리스토퍼의 목소리가 연습실을 꿍꿍 울렸다. ‘배드’의 경쾌하고 어딘가 음울한 감성이 조아라의 몸을 휘감고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곧이어 곡이 끝났다.

춤도 끝났다.

조아라는 숨을 헐떡이며 신아름을 바라보았다.

“왔냐?”

“너…… 춤 바꿨어?”

“어. 뭐, 어때?”

“갑자기 왜?”

“걍.”

조아라가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켜곤 무심하게 말했다.

“복종하기만 하는 건 내 취향 아닌 거 같아서.”

“뭐래.”

“그래서 어떤데?”

“네가 창작한 거야?”

“어.”

“에휴…….”

언젠 성필의 춤을 토씨 하나 안 바꾸고 춰서, 성필의 콧대를 납작하게 해주겠다니 뭐니 아주 말만 잘해놓고서.

결국 바꾼 건가?

이럴 거면 그날 술 마시고 하소연은 왜 했는지.

“아 어떠냐고.”

조아라가 칭얼거렸다.

그에 신아름은 ‘하’ 비웃음을 날렸다. 그 비웃음은 곧 순수한 미소로 바뀌었다.

“멋지네.”

* * *

에리카는 현관으로 직접 나와 진저를 마중했다. 그녀는 진저가 반팔 차림인 것을 보곤, 방으로 들어가 카디건을 하나 가지고 나와 입혔다.

“오늘 추워.”

“어젠 더웠슴미다. 날씨가 하루 만에 바뀔 리 없잖슴미까.”

“쓰읍, 내 말 들어. 넌 한국을 몰라.”

“알겠슴미다.”

에리카는 그녀의 차림을 꼼꼼히 정돈해주었다.

카디건의 주름진 부분을 손으로 펴주고, 진저의 삐져나온 앞머리를 정돈해주고, 가방에 물건은 다 챙겼는지 직접 확인했다.

진저는 배시시 웃으면서 마음껏 에리카에게 어리광을 부렸다.

“피곤함미다.”

“그럴 거 같아. 많이 힘들면 가는 길에 커피라도 사 마셔. 잠시라도 좋으니까 꼭 눈 붙이고.”

에리카는 안쓰럽게 진저를 보았다.

하필 ‘아오아’라는 기념비적인 이벤트 촬영을 컴백과 동시기에 하게 됐으니.

당장 컴백이 며칠 뒤인데, ‘아오아’도 같이 준비하느라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케이어스 모두와 유스들과 KS 엔터 직원분들과 은인분을 위해서 힘내겠슴미다.”

“응, 고마워 진저.”

에리카는 마지막으로 진저의 어깨를 털어주었다. 그러자 진저는 누구한테 배웠는지 모를 경례를 취했다.

“다녀오겠슴미다!”

“응.”

진저가 등을 돌리자, 에리카가 ‘아’ 소리를 내며 그녀를 다시 불렀다.

“아라 씨랑 화해는 한 거지?”

“아, 아마도 했슴미다.”

“전에 확실히 말씀드렸어?”

“그게, 바빠서 박 이사님한테 대신 부탁드렸슴미다…….”

“그러면 안 되지. 오늘 확실하게 다시 전달하는 거야.”

“아, 알겠슴미다!”

진저가 두 주먹을 꼭 쥐었다.

“아라 씨와 함께 멋지게 춤추고 오겠슴미다!”

“글로브 지유 씨는?”

“그분이랑도 즐겁게 춤추고 오겠슴미다!”

“그래.”

에리카는 진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때, 이길 순 있을 거 같아?”

진저는 일순 표정이 굳었다. 그러더니 눈치 보듯 헤실헤실 웃었다.

“열심히 하겠슴미다.”

“열심히?”

“반드시 이기도록 최선을 다하겠슴미다!”

“최선을 다해?”

“최고의 결과를 냄미다!”

에리카는 진저의 자신감을 보곤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래, 이래야지.

‘아오아’는 케이어스 활동이 막바지에 접어들었을 시점이나, 활동이 끝나고 나올 것이다.

유스들이 유종의 미를 거두며 여운에 빠져있을 때, 진저의 패배 소식이라도 들려오면 어떡하는가. 유스들이 많이 슬퍼할 것이다.

에리카와 진저는 팬을 실망시키는 일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반드시 이겨.”

“알겠슴니다. 다녀오겠슴미다.”

“상대가 동경하는 아라 씨더라도, 이길 수 있지?”

“…….”

진저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오아’ 촬영 당일.

촬영까지 앞으로 5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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