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한는 프로듀서-529화 (529/760)

529화

“아저씨 나 끝날 때까지 기다리게요?”

조아라는 성필이 같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곤 의아해했다.

그녀는 ‘아오아’ 촬영 때는 매니저와 함께 왔다. 하지만 민시화의 스튜디오로 갈 때는 민시화와 같이 성필의 차에 타고 왔다. 매니저는 회사로 먼저 보내고 말이다.

민시화가 ‘아오아’를 보러 와준 것에 감사하여, 존중하는 뜻에서 성필이 직접 태워줬다고 생각했건만.

“웬일이래.”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거짓말하지 마요.”

성필은 깜짝 놀랐다. 조아라의 말마따나 근처에 볼일이 있단 건 거짓말이었으니까.

민시화는 성필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조아라가 안무를 각색하도록 설득해주겠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만약 민시화가 설득에 실패하면 성필이 합세하기로 했다.

‘선생님이 아라한테 무슨 말씀을 하실지 걱정되기도 하고.’

‘아라베스크’ 사태 때 민시화가 하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물론 성필이 민시화에게 조아라를 설득해달라고 부탁하긴 했지만, 민시화의 한마디 한마디는 마치 바늘 같아 듣기만 해도 심장이 따끔거렸었다.

‘만약 그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아라가 선생님 멱살 잡기 전에 말려야 해.’

멱살 잡는단 건 과장이더라도, 민시화의 직설적인 성격을 고려하면 걱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저씨 거짓말 진짜 못하는 거 알아요?”

조아라가 그 거짓말을 단숨에 파악했다.

성필은 간신히 놀란 기색을 숨겼다.

“걍 내가 춤추는 거 보고 싶은 거죠?”

성필은 안심했다.

평소대로 조아라가 자기애에 취한 것일 뿐이었다. 아니면 평소대로 성필을 놀리는 거거나.

“괜히 튕기지 말고 들어와서 당당하게 봐요.”

“나도 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정말 근처에 볼일이 있어. 간단한 거라서 오래 걸리진 않을 거긴 해.”

“그럼 수업 중간에 올 수도 있는 거네요?”

“그런데 너 나한테 선생님 강의받는 거 보여주기 싫어했잖아.”

조아라는 민시화의 강의 때는 무용복을 입었다. 그리고 조아라는 무용복을 싫어했다. 몸매가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이유였다.

“것도 옛날얘기예요. 이젠 아저씨한테 보여주는 거 안 창피해요.”

“아…… 그래?”

“근데.”

조아라가 천진난만한 미소를 띠었다.

“아저씨 기대에 찬물 끼얹어서 미안한데 이젠 무용복 안 입어요.”

“왜?”

“쌤쌤이랑 합의 봐서 크롭에 레깅스 입기로 했어요. 뭔데, 진짜 기대했나 봐요? 내 무용복 차림 보고 싶었어요?”

성필 입장에선 무용복이나 크롭, 레깅스나 뭐가 다른가 싶었다. 둘 다 몸매가 드러나는 건 똑같은데 말이다.

오히려 크롭에 레깅스는 맨살을 노출하니, 창피하다면 그쪽이 더 창피한 게 아닐까.

‘하긴, 춤추는 사람이 더 잘 알겠지.’

창작 무용을 최초로 예술의 경지까지 끌어올린, 모든 댄서의 스승이나 다름없는 이사도라 덩컨이 말했었다.

발레복이야말로 온갖 도착적인 성애의 상징이라고 말이다. 집요할 정도로 몸을 가린 그 옷에선 광기마저 느껴진다고 했었다.

그러면서 이사도라 덩컨은 피부가 비칠 정도로 얇은 튜닉만 입고 춤을 추었었다.

어쩌면 조아라는 모든 댄서의 스승인 이사도라의 사상을 저절로 체득한 것일지도 모른다.

“거기.”

뚱하니 기다리던 민시화가 조아라를 불렀다.

“시답잖은 이야기는 그만두고 빨리 올라와. 더워.”

“네넵. 아저씨, 볼일 끝나고 시간 남으면 보러 와요.”

“응.”

성필은 조아라와 민시화가 건물 계단을 따라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시간을 두고 근처를 서성이다가 다시 건물 앞으로 왔다.

‘수업 시작했겠지?’

성필은 건물 계단을 올라 민시화의 스튜디오 앞으로 왔다.

‘이야기가 잘 안 풀리면 선생님이 나오시기로 하셨지.’

성필은 문 근처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문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는 주변에 누가 있나 확인한 후 수상한 발걸음으로 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천천히 문에 귀를 가져갔다.

‘안 들리나?’

놀랍게도, 들렸다.

신경을 집중하니 둘의 대화 소리가 드문드문 들려왔다.

* * *

조아라는 간이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들뜬 목소리로 민시화에게 물었다.

“쌤쌤, 오늘 나 어땠어요? 쌤쌤이 보기에 내가 이길 거 같아요?”

“글쎄.”

민시화는 모호하게 답했다.

조아라는 내심 실망했다. 그래도 제자이니 좋은 말을 듣길 바랐다.

물론 그건 조아라만의 바람일 뿐이다. 올곧은 민시화라면 입에 발린 말을 해주진 않으리란 것쯤 예상할 수 있다.

애초에 지유, 진저, 조아라의 춤은 우열을 가릴 수 없었다.

모두 다 다른 장르에 기반을 둔 데다가, 서로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개성적이었으니까.

“이긴다는 건 어떤 뜻이지?”

“네?”

“네가 말하는 ‘이긴다’는 무슨 뜻이냐고 묻는 거야.”

조아라는 역으로 무슨 뜻이냐고 묻고 싶었다.

“이긴단 건 그냥…… 뭐…….”

민시화는 답답하단 듯 한숨을 쉬었다.

“‘아오아’의 표결 방식으로 따지자면, 누가 이길지 몰라. 대중들의 판단 방식, 즉물적인 즐거움으로 따지자면, 그것도 몰라.”

“그냥 다 모른단 거잖아요.”

민시화는 더 들어보란 듯 날카로운 눈매를 유지했다. 조아라도 구시렁거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네가 질 거야.”

“쌤쌤이 보기에요?”

“그리고 네가 보기에도 네가 질 거야. 그러니까, 춤으로서 ‘누가 더 매혹적이냐’를 따지자면 네가 패배한단 뜻이지. 아니, 네가 이미 졌어.”

조아라는 생기가 빠져나간 것처럼 축 늘어졌다. 그러나 그건 잠시였다.

곧 그녀는 머리카락이 곤두설 정도로 날카로운 기세를 벼려냈다. 그녀가 시비 거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맹렬한 눈빛으로 민시화를 응시했다.

“쌤쌤은 원래 팔다리 길고 날씬한 애 좋아하잖아요. 당연히 진저랑 나랑 비교하면 바탕부터 차이가 있죠.”

민시화가 수업마다 강조하는 게 바로 ‘형식미(形式美)’다. 춤이 지닌 형식을 온전히 재현함으로써 얻어내는 아름다움.

형식미는 춤의 거대한 두 조류 중 하나를 뜻하기도 한다.

댄서라면 누구나 고민할 수밖에 없는 주제.

형식주의와 표현주의의 갈등.

민시화는 그중 형식주의의 손을 들어준다. 무언가를 표현하려는 마음을 먹기 전에 형태부터 제대로 다잡아라.

“내가 그런 걸 비교해달라는 게 아니잖아요.”

형식주의는 춤 자체의 완전성을 신봉한다. 그 완전성을 위해선 춤을 드러내는 춤꾼의 신체가 중요하다.

그러니, 민시화가 보기엔 춤이란 춤을 추기 전부터 잘하는 쪽과 못하는 쪽이 정해져 있다.

조아라는 그런 얘기를 듣고 싶은 게 아니었다.

“내 몸이 무용수로서 안 적합한 건 이미 알아요. 여기 오기 전에 쌤이 준 과제 하면서 지겹도록 느꼈어요. 당연히 진저랑 내 몸이 거의 뭐 1억 광년 떨어져 있단 것도 알고요.”

“내가 말하는 건 몸이 아니야.”

“그럼 실력이에요?”

“내가 말하는 건 춤이야.”

“……춤?”

“춤이 너한테 안 어울…….”

민시화는 본인이 한 말이 사리에 안 맞는다고 생각했는지 잠시 이야기를 멈추었다.

“너한테 안 어울린다기보다, 안무가가 너한테 알맞도록 못 짠 느낌이야. 너도 알잖니, 안무엔 주인이 있어.”

어떤 안무든 어울리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아이돌이 어느 곡에 맞춘 춤을 선보인다면, 그 춤은 그 아이돌의 것이 된다. 어찌 됐든 그 아이돌의 퍼포먼스가 원본으로 불리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원본의 아우라가 생긴다.

원본의 아우라는 다른 커버 퍼포먼스를 열화판으로 만드는 힘을 가진다. 하지만,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다.

춤이 춤추는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 설령 그 사람이 원본이더라도.

“‘배드’ 춤은 너한테 안 어울려.”

“뭔 소리예요. 아저씨가 날 생각해서 만든 안무인데. 쌤쌤도 들었잖아요.”

그리 말하는 조아라에겐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아마 성필이 ‘아라를 생각하면서 만들었다’고 했던 때를 생각하는 것이리라.

민시화는 그걸 보자 가슴이 답답해졌다.

확실히, 성필이 조아라에게 ‘안무의 원저작자가 있다’고 말하길 꺼렸던 이유를 알겠다.

“나한테 안 맞으면 누구한테 맞는단 건데요?”

“내가 너무 성급했네. 완전히 안 맞는단 게 아니라, 안 맞는 부분 부분이 존재한다는 거야. 너한테 더 어울리도록…….”

디자이너가 모델에 알맞도록 옷 사이즈를 조금씩 다듬듯이.

“춤을 부분적으로 수정해야 해. 네가 그 춤에 애착을 가진단 건 알아. 그럴수록 더 냉정하게 생각해야지.”

민시화의 목소리가 누그러졌다. 그러자 당황한 건 민시화였다.

그녀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조아라를 아끼게 된 것 같았다. 이렇게나 친절한 말투라니.

‘그 이사 오빠한테 전염이라도 된 건가?’

‘아오아’ 촬영을 보러 오라기에 아무런 생각 없이 갔었다. 그런데, 이젠 조아라가 꼭 그 중국인을 이겼으면 하고 바라게 됐다.

어쩌면 브라이언이 내비친 과도한 자신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혹은 브라이언이 조아라를 무시한 것 때문일지도.

아무튼 민시화는 조아라를 향해 사근사근 이야기를 이어갔다.

“더 나아질 방법이 있어. 그럼 해야지. 그 중국인을 이기길 바라지 않아?”

그렇게까지 말했음에도 조아라는 무표정만 유지했다. 그러자 민시화는 더 적극적으로 나섰다.

“난 너를 제자라고 생각한 적 없어. 수강생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너를 제자라고 생각해. 스승으로서 말할게. 네가 바라는 승리가 그 중국인보다 뛰어난 거라면, 춤을 바꿔야 해. 완전히 뜯어고치란 게 아니야. 중간중간 녹이 슨 부분만 갈아서…….”

“선생님.”

민시화가 두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눈꺼풀은 녹슬어 삐걱거리는 기계 같았다.

“뭐?”

방금 조아라가 자신을 선생님이라고 부른 건가?

“내가 진저를 얼마나, 얼마나 이기고 싶은지…….”

조아라는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억지로 만들어낸 게 분명했다. 미소란 게 저토록 어색할 수는 없으니.

아마 그녀의 마음속엔 온갖 감정들이 복잡하게 요동치고 있을 것이다.

“얼마나 이기고 싶다고 생각해왔는지, 모르죠? 미국에서 만났을 때부터…….”

뭐 저런 인간이 다 있나 싶었다.

조아라보다 춤춘 경력이 압도적으로 부족함에도, 진저는 조아라를 넘어섰다.

아카데미 마지막 평가에선 두말할 나위 없이 진저가 승리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진저가 가로 엔터를 찾았었다. 그녀는 듀오 댄스를 제안했고, 조아라는 받아들였었다.

그때 알았다.

자신은 댄서로서 진저를 넘어설 수 없으리라고. 설령 그럴 수 있더라도, 그건 미래이리라고.

성필이 조아라를 위로해주고, 조아라도 ‘아이돌로서 이기겠다’고 했었지만 그건 값싼 동정과 얄팍한 자기 위로일 따름이었다.

“춤은 거의 내 인생의 절반이었어요. 그 절반에서 영원히 이길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드는, 나보다 나이가 어린 애를 만나서…….”

그건 조아라가 댄서로서 처음 겪은 좌절이었다. 민시화는 동정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춤은 정직한 분야가 아니다.

들인 시간은 같더라도 결과는 천차만별이다.

누군가의 1년은 누군가의 10년일 수 있다.

민시화는 누구보다 그걸 잘 알았다.

‘어릴 때부터 댄스스포츠를 배워도 프로 언저리에 못 가는 인간이 있는 반면,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때 취미로 배웠는데도 프로가 돼서 유명 무대를 누비는 인간도 있어.’

당장 민시화부터가 그런 인간이었다.

원래 대학 전공이 무용이었고, 댄스스포츠는 취미일 뿐이었다. 그 취미로 한국을 제패하고 세계로 나아갔었다.

민시화의 동료, 라이벌들은 ‘이 춤에 인생을 걸었다’라고 말했었다. 하지만 민시화가 댄스스포츠를 시작했던 건, 짝사랑하던 사람이 댄스스포츠를 해서였다.

값싸고 얄팍한 민시화의 의지가, 누군가의 인생을 건 결심을 산산이 조각내고 다녔었다.

“선생님, 나는 아저씨가 짜준 ‘배드’ 안무가 좋아요. 그런데, 단순히 그 안무가 좋단 이유만으로 진저를 이길 기회를 버리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만약 선생님이 내가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문제는 춤이 아니라 나한테 있으니까.”

조아라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선생님은 프로듀서랑 아이돌이 어떤 관계인지 모르죠? 그러니까, 프로듀서 머리에 든 완벽한 이상형을 아이돌이 따라가는 거예요. 춤으로 치면 프로듀서가 안무가고 아이돌이 댄서. 그 일체감이란 게 엄청 커요. 그리고 ‘배드’ 안무는 그런 프로듀서가, 아저씨가…….”

조아라가 눈을 빛냈다.

“나를 생각해서, 아니, 나만 생각해서, 나한테 제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서, 오직 나만을 위해 만들어준 춤이에요. 그 춤은 나한테 어울리고, 어울릴 수밖에 없고, 어울려야만 해요.”

성필이란 프로듀서의 머릿속엔 최고가 된 소녀연맹이 들어 있다. 그 소녀연맹 안에 최고가 된 조아라도 있을 것이다.

즉, ‘배드’란 춤은 성필이 그려낸 이상향과 맞닿아 있다.

이 세상 누구보다 조아라의 아이돌리시한 면모를 잘 아는 성필이 만들어낸 안무다.

“알겠어요? ‘배드’ 안무는 아저씨가 나한테 준 무기라고요. 진저를 박살 내라고 내 손에 직접 쥐여준 무기요!”

조아라는 흥분했다.

그걸 보고, 민시화는 조아라가 옛날에 해주었던 이야기를 얼핏 떠올렸다. 성필이 케이어스의 팬이라고 했던가.

지금까지 조아라가 얼마나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런 거구나.’

조아라가 ‘배드’ 안무를 포기 못 하는 이유.

프로듀서인 성필이 조아라만을 위해 만든 특별한 안무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 안무는 성필이 진저를 박살 내라고 조아라의 손에 직접 쥐여준 것이기 때문에.

요약하면.

‘그 이사 오빠가 이 애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증명하는 물건이란 거네. 케이어스 팬을 자처하는 이사 오빠가, 그 중국인보다 이 애를 더 사랑한다는 증거.’

그야 집착이 생길 만도 하다.

“선생님도 그냥 보면 알잖아요. ‘배드’가 얼마나 뛰어난 안무인지, 그냥 막 느낌이 오잖아요.”

“알지. 문외한인 이사 오빠가 만들었단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진실임).”

“그러니까, 만약 내 춤이 부족해 보이면 문제는 나한테 있어요. 이 안무는 토씨 하나도 안 바꿔요. 아저씨가 직접 바꾸지 않는 한은요. 나는 이 춤을 가지고, 아저씨랑 같이 이길 거예요.”

조아라는 너무 빠르게 말하느라 목이 건조해졌다. 그녀는 침을 꼴깍 삼키더니 결연히 말했다.

“아저씨가 내 아우라예요. 그 아우라를 버리진 않아요. 당당하게 아저씨랑 같이 이길 거예요.”

“…….”

민시화는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눈은 문으로 향해 있었다. 문 너머엔 성필이 있을 터였다.

“음.”

민시화는 땅을 발끝으로 톡톡 차더니, 다시 조아라를 바라보았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의지가 그녀의 눈동자에 깃들어 있었다.

“그게, 있어.”

“뭐가요?”

“춤추는 사람 중에, 막 반짝이는 느낌이 드는 사람이 있다고.”

왜 민시화가 딴청 피우듯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렸는지, 조아라는 알 수 있었다.

민시화는 하고픈 말이 있지만, 본인조차 그 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었다.

“댄스스포츠란 건 스퀀스 무용이라서, 창작 안무가 거의 등장하지 않아. 정해진 동작들을 순서만 바꿔서 배열할 뿐이지. 그런데도 바리에이션이 굉장히 많아. 몇 번을 봐도 새롭지. 그리고 자신에게 맞는 무용을 펼치는 무용수들에게선 보여, 영혼의 반짝임이. 그런데.”

민시화가 조아라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너한테선 안 보여.”

“……!”

“남이 쓴 자기소개서를 자기 거라고 들이미는 느낌이야. 그 소개를 쓴 사람은 물론 너를 알겠지. 그렇지만, 네가 보기에 군데군데 틀리고 안 맞는 부분이 있잖아. 그럼 어떡해야 해? 그걸 고쳐야지. 내가 보기엔, 넌 이미 그 방법을 알아. 그런데 그 이사 오빠가 널 생각해서 안무를 만들어줬단 게 너무너무 기쁜 나머지 무시하는 거지.”

“영혼의 반짝임?”

조아라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냥 내가 안무 숙달이 덜 된 거예요. 뭘 거창하게 영혼까지 꺼내요.”

“그 안무 숙달이란 건, 네가 무대에 설 때까지 절대 안 될 거야. 이사 오빠는 널 제대로 가르쳐줄 역량이 없으니까.”

“아니 다른 사람들 다 좋다고 난리인데 쌤쌤만 왜 그래요!”

그랬다.

조아라는 ‘배드’ 안무가 안 좋단 말을 들은 적이 없다. 가로 엔터에서 불러 모은 안무가들도 입을 모아 좋다고 했다. 서유선과 손혜빈마저 그러했다.

성필이, 문외한이 만들었단 게 믿기 어려울 만큼 세련되고 아름다운 춤이다.

“삐걱이니, 녹슬었니, 안 어울리니, 바꿔야 하니 뭐니! 그냥 시원하게 진저보다 내가 못하다고 말해요! 춤을 걸고넘어지지 말고요!”

조아라가 보기에 민시화는 생트집을 잡는 것일 뿐이었다.

민시화는 기가 막혔다.

‘네 프로듀서가 부족하다고 한 거거든?’

그 부족함은 분명 보통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 것이리라. 민시화 정도 되는 댄서가 아니고서야 어색함을 알아채는 것조차 불가능한 부족함이다.

그걸 성필이 알아차렸다.

조아라가 말한 아이돌과 프로듀서의 일체감이란 게 확실히 존재하긴 하는 모양이다.

“됐어.”

민시화는 한숨과 함께 등을 돌렸다.

그 등을 보고 조아라는 승부에서 이기기라도 한 듯한 쾌감을 느꼈다.

민시화를 향해 ‘내가 이겼쥬? 개빡치쥬? 아무 말도 못 하쥬?’라며 놀리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만큼 기뻤다.

“춤으로 말할게.”

그런데 민시화는 포기한 게 아니었다.

“댄서니까, 춤으로 말할게.”

“……뭐 어쩌게요?”

“영혼의 반짝임이란 거 보여준다고.”

“여, 여기서요?”

민시화는 조아라에게 제대로 된 춤을 보여준 적이 없다. 가르쳐줄 땐 최소한의 동작만 보여주고, 그게 아니면 의자에 앉아 말이나 영상 자료로만 설명해왔다.

조아라는 아까까지 민시화와 다퉜다는 것도 잊고 흥분했다. 그녀는 쇳소리까지 내며 가열하게 말했다.

“뭐 출 건데요?!”

“아까 프로듀서와 아이돌의 일체감을 얘기했었지.”

민시화는 방금까지 보여주었던 연민과 애정을 전부 버린 듯, 다시금 평소대로의 차가운 이미지로 돌아왔다.

그녀는 조아라의 질문을 말끔하게 무시했다.

“댄스스포츠도 일체감이 중요하거든. 리더와 팔로워의 일체감이. 리더가 이끌면 팔로워가 따르는 거야. 하지만, 따르기만 하는 팔로워는 매력도 없고 한계가 명확하거든. 둘이 하나가 된단 건, 단순히 어느 한쪽에게 복종하거나 어느 한쪽을 지배하는 게 아니야. 너처럼.”

민시화가 놀리듯이 조아라의 코를 검지로 톡 건드렸다. 조아라는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민시화는 가학적인 미소를 띠었다.

“복종하기만 하는 건 매력 없어.”

“뭐, 뭐요? 내가 복종해요? 누구? 아저씨한테?!”

“자기만의 걸음과 간격을 만들어야만, 팔로워에게도 아우라가 생기는 거야. 지금의 넌 반짝임은 물론이거니와 매력의 조각조차 없어. 빠르게 질리는 타입이지.”

조아라는 왠지 모르게 속이 답답하고 무겁고 뜨거웠다. 당장이라도 민시화를 향해 반박하고 싶었지만, 뭘 어떻게 반박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이해해. 맹목적인 인간은 그런 법이지. 빛이 사라진다고 해야 하나. 너, 여기 처음 왔을 때 너를 댄서라고 소개했었지. 그럼 자기현시욕이 있어야지. 그걸 잊어버리면…….”

“춤으로 말한다면서요? 언제까지 입으로 말하시게요?”

참으로 당돌한 발언이었다.

민시화는 픽 웃었다.

“보여주는 건 지금 여기서가 아니야. 내 대회, 보러 오기로 했었잖아. 그때 보여줄게. 다행히 조만간이니까. 아마 그게 내가 스승으로서 너한테 보여줄 마지막 춤이고, 가장 중요한 가르침일 거야. 어쩌면 네가 아이돌이기에 가장 중요할 가르침. 최선을 다해 배우고 느끼렴.”

그러고서 민시화는 문 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바라보기만 할 뿐, 성필과의 약속대로 나서진 않았다.

“수업 시작하자.”

* * *

“그랬더니 쌤쌤이 뭐라는 줄 알아요? 춤이 문제래요. 그래서 바꾸라는데…….”

조수석에 탄 조아라는 한시도 입을 가만히 두지 않고 조잘거렸다.

성필은 마치 리카를 태운 것 같다고 생각했다. 조아라는 어지간히도 억울했었나 보다.

“아저씨, 듣고 있어요?”

“응. 듣고 있어.”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다 좋다고 하는데 쌤쌤 혼자 안 좋다고 하잖아요. 그럼 세상 사람들이 이상한 거예요 쌤쌤이 이상한 거예요? 그냥 쌤쌤이 트집 잡는 거잖아요.”

이상한 사람 중 한 명인 성필은 입을 꾹 다물었다. 민시화는 나름의 근거를 들어 조아라를 설득하려고 했지, 성필은 그녀를 설득할 근거조차 없었다.

정확히는, 근거를 조아라에게 말할 수 없었다.

‘전생의 너보다 못한 거 같아, 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성필이 기대한 건 전생의 조아라가 보여주었던 반짝임이었다. 춤을 그대로 알려주면 현재의 조아라도 그리될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럴 바에는, 현재의 그녀가 더욱 빛나도록 춤을 수정하거나 아예 갈아엎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럴 텐데, 어디서부터 말을 꺼내야 할까.

‘아냐,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는 알잖아.’

민시화가 말했던 대로, 성필은 ‘배드’를 만든 게 자신이 아니라고 밝히면 된다.

사실 성필이 할 말은 그 정도가 다였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그의 영역 밖이었다.

‘원저작자를 언급하지 않고 그냥 안무가 별로인 거 같다고 하면 아라가 또 어떤 오해를 할지 모르니.’

진저 춤 보고 그러냐고.

내가 진저보다 못하냐고.

조아라가 그런 식으로 성필을 옥죄여 올 게 눈에 선하다.

‘좋아.’

성필은 깊이 심호흡하고 신호가 멈추는 타이밍에 조아라를 보았다.

“아라…….”

말을 꺼내려던 순간, 성필은 다시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조아라를 보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왜요?”

조아라는 한없는 신뢰를 담아 성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뺨은 생기 넘치는 어린아이처럼 발그레 붉은 빛을 띠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배드’ 안무에 대해 열띤 애정을 표출했던 조아라다.

그녀는 성필이 만든 춤과 함께 ‘아오아’에서 우승할 생각으로 가득했다.

조아라가 말했던가. 성필의 춤과 함께, 성필과 함께 승리를 얻어내리라고.

만약 그녀의 춤이 부족하게 보인다면, 그건 춤의 잘못이 아니라 춤추는 본인의 잘못이라고.

진정한 성녀를 마주한 피에 미친 광전사처럼, 성필은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신성하기까지 한 아우라에 고개를 푹 숙였다.

“……아니야.”

“뭐예요, 싱겁게.”

신호가 바뀌었다.

성필은 액셀을 밟았다.

차가 부드럽게 나아갔다.

“그래서요…….”

“아, 아라야!”

갑자기 성필이 조아라를 크게 불렀다. 그녀는 놀라서 어깨를 들썩였다.

“아 뭔데요 사람 놀라게!”

“너, 있잖아. 저, 정말 그 안무 괜찮다고 생각해?”

“네?”

“쌤쌤…… 선생님 말씀대로 부족함이 있을 수도 있잖아. 아니, 부족함은 느끼는데, 그 춤을 만든 게 나라서 말 못 하는 건 아니야?”

조아라가 지겹단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아저씨까지 그러기예요? 난 좋아요. 다른 사람들도 다 좋다고 그래요. 그럼 됐잖아요.”

“춤추는 넌 다르게 느낄 거 아니야. 조금이라도, 정말 자그마한 부족함이라도 안 느껴져?”

“아저씨 설마 진…….”

성필은 진저라는 이름이 등장하기 전에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너 ‘아오아’ 곡 정할 때도, 그냥 내가 하자고 하니까 ‘배드’로 정했었잖아.”

“…….”

“춤도 그런 거 아니야?”

조아라는 성필에게서 정면으로, 그리고 자신의 다리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손을 꼼지락거렸다.

“뭐, 곡 정한 건 좀 경솔할 수도 있겠는데…….”

“봐봐. 곡도 그랬는데, 춤도 그런 거면 별로 안 좋잖아. 중요한 무대야. 댄서인 너한테는 특히 중요하잖아. 그런데 내 눈치 보면서 정하는 건 아깝지 않아?”

“그럼 안 돼요?”

“으어?”

조아라가 고개를 내리깔면서도 성필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면 안 되냐고요……. 아저씨가 하자는 거 하고 싶은 게…… 나빠요?”

성필은 말을 꺼내려 숨을 들이마셨다. 그 숨은 오랫동안 성필의 폐가 갇혀 나오지 못했다.

둘의 눈이 맞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성필은 기어코 말을 꺼냈다.

“그 안무는 내가 만든 게 아니야.”

“……네?”

조아라가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반문했다.

성필은 거의 반쯤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그렇지? 당황스럽지? 그, 내가 만든 거 아니니까, 그렇게 내 눈치 보면서 고수하지 않아도 괜찮아. 애초에…… 문제가 있었지. 내가 만든 게 아니니까, 난 너한테 그 안무를 온전히 전수할 수 없어.”

전생의 조아라가 만들었다.

그러니 현재의 조아라가 추어도 전생과 같은 빛을 발할 것이다…….

그 생각 자체가 안일했다.

전생과 현재는 비교가 힘들 정도로 많이 바뀌었다. 당장 케이어스만 보아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엇나간 것을 되돌리려면, 최소한 되돌려진 것처럼 보이게 만들려면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바닷가로 한걸음에 달려가 에리카의 첫 번째 팬이라고 선언하는 정도의 노력은 필요하다.

그걸 알고 있는데도, 성필은 막연히 조아라의 능력에 기대어버렸다.

“그런 상황이라, 이 안무를 너한테 완전히 맞게 못 짜줄 거 같아. 다른 사람한테 각색을 맡기…….”

“아, 그래요. 아저씨가 만든 게 아니구나.”

의외로 조아라가 선선히 인정했다.

“그럼 누가 만들었는데요?”

성필은 이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

“내가 아는 사람.”

“그 안무 걸리쉬하던데, 그럼 여자가 만든 거겠네요?”

“어? 어…….”

그야 그렇다.

‘배드’는 여성용 춤이다.

아무 것이든 좋으니, 남자 아이돌과 여자 아이돌의 춤을 비교하면 성별에 따라 춤이 얼마나 다른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여자는 하체에, 남자는 상체에 중점을 둔다.

당연히 형태와 전개가 다를 수밖에 없다.

“아니, 근데.”

조아라가 헛웃음을 뱉었다.

성필은 긴장했다.

이런 웃음은 조아라가 화내기 직전 보이는 마지막 자비와 같았다. 폭풍전야라고 해야 할까.

“내가 별로…… 란 거죠?”

성필은 침묵을 지켰다.

“근데 별로라는 감상은 비교 대상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다른 사람 다 좋다는데, 아저씨는 ‘별로니까 각색해야 해’라고 말하고 있잖아요.”

조아라는 인생을 살면서 쌓은 모든 논리력을 쏟아붓는 것만 같았다.

무슨 뜻이냐고?

반박할 수가 없다.

실제로 성필이 춤을 각색하자고 주장하는 이유가 바로 비교였으니.

성필은 전생의 조아라와 현재의 조아라를 비교해버렸다.

“누구랑 비교하는 거예요? 아, 괜히 물었네. 그 안무를 만든 사람이죠? 누구예요? 아저씨한테 춤을 가르쳐줄 정도면 엄청 가깝나 보네요. 내가 아는 사람인가? 소녀연맹 안무 받으러 다니면서 가까워졌다던가, 누구예요? 근처 사람이면 가르쳐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다행히 말미에 성필이 미리 준비한 질문이 나왔다. ‘누구냐’고 물으면…….

“지금은 못 만나. 멀리…… 미국에 갔어.”

“아, 그래요. 그럼 영상 찍어서 피드백해 달라고 하면 되겠네요. 아님 영통으로 강의받아도 되고요. 그렇게 배우면 되는데 뭘 각색까지 해요?”

“연락이 안 돼.”

“아저씨.”

조아라가 마지막이란 듯 한 음절씩 끊어서, 매우 선명한 발음으로 말했다.

“그게 말이 돼요? 갑자기 훌쩍 떠나서 연락이 안 된다고요? 아저씨 그냥 진저랑 비교해서 별로인 거 같으니까 춤 바꾸려고 하는 거 아녜요?”

“…….”

성필은 핸들을 꽉 잡으면서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 이야기를 정말 조아라 앞에서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 안 좋게 헤어진 전 여자친구가 만든 거야. 나한테 준 헌정 안무 같은 거라고 생각하면 돼. 안 좋게 헤어져서, 연락이 안 돼.”

“…….”

“이제 이유 알겠지?”

이러면 최소한 조아라가 납득은 할 것이다.

적어도 진저 때문에 성필이 춤을 각색하자고 하는 게 아니란 사실은 알아주…….

“크리스토퍼 ‘배드’는 2018년 4월에 나온 노래잖아요.”

“……아.”

성필은 회귀한 후 신기한 감각을 가지게 됐다. 최신곡이 나와도 ‘옛날 노래’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입장에선 현재에 등장하는 모든 노래가 옛날 노래였다. 그래서 곡이 나와도 ‘이게 이제 나오네’ 정도의 감상에서 그친다.

좋아하는 아이돌의 곡이 아니고서야 언제 나왔는지 명확하게 기억하지 않는다. 애초에, 전부 단순한 ‘옛날 노래’니까.

성필은 식은땀을 흘렸다.

“그땐 우리가 활동할 때고…… 아저씨 여친 안 사귀었다면서요?”

“…….”

정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반박당했다.

성필의 머리가 하얗게 비었다.

조아라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목소리가 커진 만큼 감정도 많이 들어갔다. 주로 성필을 탓하는 것 같은 감정들이.

“내가 춤춰달라고 할 땐 기겁하면서 도망가더니…….”

그녀는 점점 격앙되어갔다.

“우리밖에 없달 땐 언제고, 우리 속이면서 여친 만나고. 아예 여친 앞에서 춤까지 췄어요? 심지어 여친이 만든 춤을?”

“…….”

화내는 지점이 거기야?

“그런 춤을 나한테 줬다고?!”

“아, 아라야 일단 들어봐!”

성필은 흉하게 일그러졌을 게 분명한 자신의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신뢰감 가득한 프로듀서의 표정을 되찾았단 생각이 들 때쯤, 목소리를 한껏 내리깔고 말했다.

“‘배드’ 안무가 내 예상보다 너한테 적합하지 않은 거 같아. 옷으로 비유하면 사이즈가 안 맞는 거야. 그러니까 너한테 더 어울리도록…….”

“내가 그 여자보다 못하단 거예요?!”

민시화 말이 맞았다.

조아라는 거의 경기를 일으켰다.

하지만 성필은 조아라가 화내는 것을 보자, 스스로 놀랄 정도로 평온해졌다.

조아라의 감정이 격해졌을 때 똑같이 격정적으로 반응해선 안 된다. 그런 본능이 이미 성필의 머릿속 깊이 새겨졌기 때문이리라.

‘이겨야 해.’

지금 이 자리에서, 회사로 돌아가기 전까지, 성필은 조아라를 꺾어야만 한다.

‘이게 아라를 위한 길이야.’

조아라는 진저를 이기길 바란다.

성필이 본 진저는, 조아라 앞에서 말할 순 없지만, 전신에 피가 안 통해 손이 벌벌 떨릴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녀가 보여준 춤이 미완성이란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성도 높았다.

그런 진저를 이기려면.

‘나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는 춤이어선 안 될 거야.’

지금 조아라가 진저와 붙으면 질 거다.

표결이나 대중의 반응으로 정해지는 승패는 모르겠지만, 댄서인 조아라는 결과가 나온 후 패배감을 가질 것이다.

그래, 지금 상황에서 붙으면 지지만.

조아라의 안무를 바꾸면 또 모른다.

‘최소한 전생에 내가 아라에게서 보았던 빛을, 아주 조금이라도 좋으니 되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해.’

성필은 표정을 굳혔다.

“아라야.”

그리고 그는 프로듀서로서의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조아라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 * *

서유선이 연습실로 들어왔다.

안무가들은 그가 성필, 조아라와 함께 오지 않자 의문을 드러냈다.

“이사님이랑 아라 씨는요?”

“어……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왜 그러시는데요?”

“무서워서 말 못 걸고 그냥 왔어요.”

“네?”

“음, 아! 가정 법원에서 ‘4주 후에 뵙겠습니다’란 말 듣고 나오는 부부 같다고 하면 알아들으시겠어요?”

전혀 모르겠다.

“제 예상인데 남편이 불리한 조건으로 이혼하는 거 같아요. 얼굴이 우중충하더라고요.”

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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