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8화
어쩌면 올해 마지막일지 모를 ‘아오아’ 예고편이 떴다. 그와 동시에 돌판이 들썩였다.
소녀연맹, 케이어스, 글로브라는 그야말로 꿈의 조합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현세대를 이끌어가는 걸그룹 멤버들이 춤으로 붙는단 소식은 재빠르게 퍼져나갔다.
순수하게 기대된단 의견도 많았지만, 역시 돌판의 민속놀이인 헐뜯기도 빠지지 않았다.
[제목: 이번 글로브 앨범 꼭 사라
(글로브 티저 짤 모음)
ㄹㅇ 레전드임
특히 우리 지유 ㅜㅜ]
흔하디흔한 주접 글이 올라오면.
[제목: 지유 이거 뭐야?
(지유가 이상하게 춤추는 움짤)
뚝딱이? 같아! 나이가 들어서 관절이 안 좋은 걸까? 나 너무 걱정돼 ㅜㅜ]
└ 글로브 컴백하는 거 체감되네 이런 글 올라오고
└ 춤 잘 추는 판녀보다? 춤 못 추는 지유가? 인기 많지 않을? 까? 잘 모르겠어!
└ 이딴 게 메인댄서 비주얼 ㅋㅋㅋ 석세스 엔터 역량 알만하다
└ 아주머니 울지 말고 말해봐요
글로브의 팬덤인 ‘어스’는 순하기로 유명했다.
석세스 엔터는 글로브에 상당히 신경을 쏟아, 팬덤의 불만 사항이 들어오면 피드백을 빠르고 정확하게 해주었다.
글로브 멤버들도 다 같이 화목하게 지내며 팬들에 대한 사랑을 자주, 강하게 어필해왔다.
그 때문일까, ‘어스’는 유독 유순한 팬덤 문화를 가졌다. 굳이 악독하고 악랄해질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제목: 진저 눈빛 봐라
(진저가 ‘아오아’ 예고 인터뷰에서 지유 죽일 듯이 노려보는 짤)
뭔 일 있었는지는 모르겠는데 퇴근길에 지유 명치 개팼을 듯 ㄷㄷ]
문제는 ‘어스’ 팬덤에 엡실론 팬들이 유입된 것이었다.
라희가 이전 컴백 때 벌인 ‘승리를 주세요’ 사태 이후, 엡실론 팬들은 글로브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 결과 글로브 팬덤이 양적으로 성장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엡실론 팬들은 까는 글이 올라오면, 유순한 ‘어스’처럼 ‘그래도 우리 애들 예쁘죠……?’ 정도로 끝내지 않았다.
글로브를 시기, 질투, 견제하는 케이어스 팬덤 ‘유스’(엡실론 팬들의 추측)를 징벌하기 위해 까는 글을 조자룡 헌 창 쓰듯 생산해냈다.
[제목: 망스들아, 이제 인정해라
(워터멜론 차트
케이어스 - 넥타르
어제의 차트 순위: 191위)
대한민국 사람들 케이어스가 누군지도 모르고 노래도 안 들음. 심지어 너희들도 안 듣는 듯. 제발 너희들끼리 세계관 해석하고 노래 듣고 좋아하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실망하면 안 되겠니?]
차트 순위는 유스의 역린이었다.
케이어스는 어마어마한 앨범 판매량이나 음방 1위 횟수, 수상 실적과는 별개로 컴백할 때마다 차트 순위가 내려가기만 했다.
울며 겨자 먹기로 커버치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그리고 사람은 한계가 오면 방어하는 대신 공격적으로 변하게 되는 법이다.
‘인민 이 새끼들이 아오아 나간다고 우리 애들을 벌써부터 견제해?’
유스는 이런 소행을 인민이들의 짓으로 보았다. 그래서 엡실론 팬들이 만들어내는 어마어마한 공세에 대한 반격으로 소녀연맹을 까 내렸다.
[제목: 소련 아라 좀 심각하지 않냐
(조아라의 뷔라이브 움짤)
팬들 보는 자리인데 코르셋 좀 조이면 안 됨? 위풍당당하게 쌩얼로 나오는 건 뭔 자신감임?]
└ 저게 어딜 봐서 쌩얼임?
└ 아, 미안;; 화장해도 저따구로 생긴거임?(추천 351개 비추 219개)
└ 뒈질래 ㅆ발새끼야
인민이들은 엡실론 팬들 못지않게 힘든 세월을 보냈다.
중소 그룹 팬이 된단 건 그런 의미다.
강한 자만 살아남는다.
[제목: 케이어스 패배 선언
(케이어스 티저 사진)
(몽환적이고 청순한 느낌의 멤버별 사진)
X 같은 세계관 포기하고 소녀연맹 따라 하기로 결정! 지금이라도 정신 차려서 다행이다 케이어스!]
└ 인기견(인민+유기견)들 또 ㅈㄹ이네
그렇게 민속놀이는 벌판에 쥐불놀이하는 것처럼 불타오르는 분위기로 진행됐다.
하지만 민속놀이와 별개로 순수하게 ‘아오아’에 관심을 보이는 이들 또한 적지 않았다.
그도 그럴게, 탑티어 걸그룹들 간의 메인 댄서가 나와서 대결을 펼치는 엄청난 이벤트 아닌가.
애초에 눈에 불을 켜고 땔감을 넣는 쪽이 제정신이 아닌 것이다.
“넌 누가 이길 거 같아?”
저녁 시간, 야자가 시작되기 전.
김채현과 이선주는 운동장을 뱅글뱅글 돌았다.
요즘 김채현은 아이돌 덕질에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고3인데다가, 수능이 2달이 채 남지 않아서 커뮤니티를 볼 시간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이선주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그녀는 김채현과 다르게 ‘아오아’라는 이벤트를 실시간으로 즐겼다.
“‘아오아’ 전통상 1대 1대 1로 결판나지 않을까? 서로 체면 살려주려고 일부러 표 나누는 거 같던데.”
“그래도 팬들이 보는 우승자는 있잖아. 네가 보기엔 어때?”
“음,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역시 아라가 이기겠지?”
“나 인민이면서 유스잖아.”
“그래, 팔은 두 개니까. 그럼 아라랑 진저랑 막상막하야?”
“전성기로 비교하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소녀연맹의 레전드 퍼포먼스인 ‘아라베스크.’ 그중에서도 레전드는 HTP 뮤직 어워드 퍼포먼스였다.
당시의 조아라는 굉장했었다.
어째서 그녀가 소녀연맹의 메인 댄서인지 만천하에 증명하였으니 말이다. 오죽하면 침묵시위를 벌이던 KS 엔터 팬덤들마저 박수를 쳐주었겠는가.
“까들도 인정 안 하곤 못 배기는 수준이었지.”
“진저는?”
“케이어스는 걍 올타임 레전드라서 모르겠어.”
“…….”
“다 비슷비슷하다고. 그럼 넌 어떤데?”
“몰라.”
김채현은 진짜 몰랐다.
진저의 춤 실력이 어떤지 알 게 뭔가?
김채현은 인민이다. 소녀연맹 영상을 볼 때야 ‘우리 애기들 춤 선 좀 봐 ㅜㅜ’라며 주접떨지, 다른 아이돌 영상 볼 땐 ‘잘하네’ 정도의 감상이 전부였다.
애초에 아이돌의 춤 실력이란 게, 비교하려고 작정하지 않고서야 확실히 판단하기 어렵다.
“글로브는?”
“걔는 진짜 몰라.”
글로브…… 누가 나온다고 했더라. 차라리 우효민이 나왔다면 더 흥미가 갔을 것이다.
야간 자율학습 5분 전, 종이 울렸다.
김채현과 이선주는 뱅뱅 돌기를 멈추고 학교 현관으로 향했다.
“근데, 아라가 춤으로 지는 건 진짜 상상이 안 돼. 내가 아는 사람 중 아라가 제일 춤 잘 출걸?”
“네가 아라를 알아?”
“아라 우리 학교 선배님이잖아. 그럼 아는 거지 뭐. 실물 보기도 했고.”
김채현은 조아라가 지는 게 상상 안 된다고 했지만, 이선주는 상상이 갔다.
인민이면서 유스이기도 한 이선주는 소녀연맹 영상만큼 케이어스 영상도 자주 찾아보았다.
‘진저는 아이돌 중에서 진짜 어나더 레벨인데.’
오죽 잘 추면 단순한 댄스 커버 영상이 올라올 때마다 수백만 조회 수, 잘하면 천만도 넘겠는가.
사람들이 진저의 댄스 영상을 많이 찾아보는 건, 단순히 진저가 케이어스 멤버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의 춤엔 사람들을 이끄는 아우라가 있다.
‘솔직히 춤으로만 붙는다 치면…….’
이선주는 진저가 이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일단 비율부터가…….
“갑자기 왜 조용해?”
“으, 응?”
김채현이 묻자 이선주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걍, 야자하기 싫어서.”
이선주가 속내를 그대로 말했다간 김채현에게 어떤 짓을 당할지 몰랐다. 안 그래도 공부 때문에 독기가 바짝 오른 애인데 말이다.
* * *
“아저씨, 여기 디테일은 어떻게 해요?”
성필은 요즘 매우 당황스러웠다.
그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 조아라에게 ‘배드’ 안무를 전수해주었다. 한 번으로 끝나겠지 싶었는데, 아니었다.
“여긴 다리를…….”
조아라가 땅을 박차듯이 다리를 뒤로 휙 뺐다.
“얼마나 접어요? 아저씨가 할 땐 좀 괜찮았는데, 내가 이 동작 그대로 하니까 살짝 우스꽝스럽다고 해야 하나.”
성필은 조아라가 말하는 문제점을 이해했다. 하지만 그 해결책을 내어줄 순 없었다.
어떤 식으로 동작을 바꾸어야 하냐고? 성필이 알 리 만무했다. 그는 안무가가 아니라, 전생의 조아라에게 춤을 배웠을 뿐이니까.
“아…….”
성필은 시간을 벌려고 생각하는 척했다.
그러는 동안 전생의 조아라를 필사적으로 떠올렸다. 웬만해선 그녀 앞에서 전생을 떠올리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이젠 그럴 수가 없었다.
먼지 덮인 기억의 책장을 넘기고 넘겨, 마침내 성필은 전생의 조아라를 손에 닿을 듯 그려내는 데 성공했다.
“아마…….”
전생의 조아라는 이렇게 움직였던 것 같다.
성필보다 10cm는 더 작은 조아라는, 그보다 훨씬 동작을 과격하고 크게 썼었다.
“이렇게 다리를 더 벌리고 상체를 기울이는 쪽으로 하는 거였나?”
“아저씨가 만든 건데 ‘거였나’는 뭐예요.”
“아, 아, 그렇네. 이렇게 하면 될 거야.”
조아라는 성필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러자 아까보다 훨씬 보기에 좋았다.
문제점을 해결한 조아라는 다시 안무 연습에 집중했다. 그녀의 눈은 집요하게 거울 속의 자신을 쫓았다.
성필은 새삼 전생의 조아라가 얼마나 관대했는지 깨달았다.
‘전생의 아라는 내 춤 보고 이렇게 세세하게 지적하지 않았었지.’
당연했다.
지금의 조아라는 이 춤을 가지고 경연에 나가야 하는 거였으니, 훨씬 깐깐하게 동작을 집어낼 수밖에 없었다.
성필은 창피했다.
영상으로 찍은 자신의 춤을 본 뒤, ‘어떻게 이런 실력으로 아라한테 안무를 가르쳐주겠다고 했지?’라며 베개에 머리를 쾅쾅 박기까지 했으니.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전생에 춤을 가르쳐준 조아라는 지적하긴커녕 칭찬만 잔뜩 해주었었으니까.
‘하아, 오빠, 지인짜 잘한다아……. 그래, 거기서 더어…….’
인정해야 했다.
성필 자신이 너무 오만했노라고.
부모의 칭찬을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자식이 없듯, 성필은 조아라의 칭찬에 어깨가 으쓱해선 안 됐다.
“아저씨, 처음부터 춰볼게요.”
조아라가 처음부터 ‘배드’를 추었다.
그동안 성필은 조아라의 춤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다. 아니, 집중하고 싶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문제점은 두 개.’
첫째, 성필은 조아라가 피드백을 요구할 때마다 완벽한 해답을 내놓을 수 없다. 그는 ‘배드’ 안무를 만든 게 아니라 카피했을 뿐이니까.
그리고 둘째.
‘어쩐지…….’
조아라가 빛나지 않는다.
분명 그녀는 ‘배드’ 안무를 완벽하게 해내고 있었으나, 성필이 기억하는 전생보다 빛이 바랬다.
모든 동작은 같을 텐데.
적어도 차이는 크게 없을 텐데.
‘만약 차이가 있다면 그건 아주 사소한 부분들일 거야.’
그런데 그런 사소한 차이로 이렇게나 달라진다고? 전생과 비교하면 조아라는 밋밋하기까지 했다.
“어때요?”
조아라가 미약하게 흐트러진 호흡으로 물었다.
성필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네.”
어쩌면, 객관적으로 조아라가 추는 춤이 별로인 걸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한테도 물어볼까?”
성필은 손혜빈과 서유선을 불러 평가를 부탁했다.
손혜빈과 서유선은 가요계 선후배 사이다. 한창 활동할 때 간간이 얼굴을 마주쳤었다.
“대후배님, 우리 아라 잘 좀 봐줘요.”
손혜빈이 장난스러운 존댓말과 함께 서유선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선배의 애정 어린 손길에 서유선은 뻣뻣하게 굳어선 희미한 미소만 지었다.
“네, 넵, 선배님.”
“선배님?”
“대선배님!”
옛날 가요계의 엄격한 선후배 관계를 생각하면, 서유선이 손혜빈을 어색해하는 게 이해가 갔다.
손혜빈은 최대한 편하게 대해주려는 것 같지만, 서유선이 편하게 느끼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둘은 조아라의 춤을 보곤 입을 모아 칭찬했다.
“이거 진짜 아라가 우승하는 거 아니야?”
손혜빈은 벌써부터 조아라가 ‘아오아’에서 트로피를 차지한 양 들떴다.
서유선도 연신 엄지를 치켜들었다.
조아라는 쑥스러워했으나, 대선배와 선배의 칭찬을 기껍게 들었다.
“우승하면 좋긴 하겠네요.”
조아라가 성필을 흘끔거리면서 말했다.
“아저씨가 만들어준 거니까, 뭐, 그럼 공동 우승이고, 더 기쁘겠죠 뭐…….”
“성필아, 아라 말하는 거 들었냐? 진짜 너무 대견하고 귀엽다, 그치?”
성필은 손혜빈과 서유선의 반응을 주도면밀하게 관찰했다. 아무리 봐도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았다.
그들은 진심으로 조아라의 춤과 성필의 안무를 고평가하고 있었다.
그럼 문제는 조아라에게 있는 게 아니다.
‘나한테 있어.’
조아라의 춤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성필 본인에게 문제가 있다.
성필은 그 문제의 원인을 알았다.
전생의 조아라를 알고 있는 것 자체가 문제다.
‘아라가 전생에 이 안무를 만들고 췄을 땐, 지금의 아라보다 나이가 많았지.’
세월의 격차가 만들어 낸 기량 차이인가?
성필은 다시 조아라를 보았다. 조아라는 드물게도 부끄러워했다. 그녀는 부끄러우면 화를 내기에, 이번에도 화를 냈다.
“나도 이런 오글거리는 말 하기 싫거든요? 씨, 사람이 기껏 신경 써서 말해줬더니 꼽이나 주고…….”
세월의 격차가 만들어 낸 기량 차이…….
하지만 성필은 그 결론이 석연찮았다.
“아 왜 자꾸 그렇게 보냐고요!”
* * *
‘아오아’ 1분 퍼포먼스 촬영 당일.
브라이언은 진저를 따라 촬영장까지 왔다.
그는 그녀를 가르치며 더욱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이윽고 단순한 클라이언트라고 생각하기 힘들 만큼 그녀를 신경 쓰게 됐다.
브라이언은 재능을 사랑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재능을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브라이언이 보기에 진저는 신의 사랑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는 이들 중 하나였다.
‘진저의 상대는…….’
당연히 아이돌들이었다.
겉보기론 실력을 파악할 수 없었으나, KS 엔터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보니 춤으로 인정받는 이들이라고 한다.
그는 촬영장 구석에서 팔짱을 끼고 진저의 적들, 즉 자신의 적들을 자세히 관찰했다.
“저 사람은 뭐예요?”
“진저 씨 트레이너라던데요.”
“저거 노려보는 거예요?”
“눈 마주치지 마요.”
스태프들은 브라이언이 뿜어내는 기묘한 분위기 때문에 쉽사리 다가가지 못했다.
진저의 안무 스승이라고 하면 한 번쯤 접촉해볼 만도 한데, 도저히 말을 걸 용기가 안 났다.
1분 퍼포먼스 차례는 지유, 조아라, 진저 순이었다. 브라이언은 지유와 조아라의 퍼포먼스를 차례대로 감상하곤 흡족하게 웃었다.
‘이건 뭐, 개미를 뭉개 죽이는 것보다 쉽군.’
그리 생각하던 브라이언은 갑자기 표정을 굳혔다.
‘아니, 이 경연은 참가자들끼리 투표하는 방식이야. 게다가 경연 주제 자체가 상업적인 면을 담고 있어. 즉물적인 즐거움을 고려하자면, 진저가 반드시 이길 거라고 생각하는 건 경솔할지도…….’
물론 예술성을 판단 기준으로 두자면 반드시 진저가 이긴다. 이겨야만 한다. 물론 판단 기준이 대중성이어도 진저가 이길 것이다.
브라이언은 그만큼 자신의 안무와 진저의 재능을 신뢰했다.
“오, 내니(Nanny)!”
진저가 근처로 다가오자 브라이언이 그녀를 친근하게 불렀다.
진저가 표정을 팍 굳히곤 유창한 영어로 답했다.
“내니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잖습니까.”
브라이언은 진저와 친해지고 나선 그녀를 진저가 아닌 내니라고 불렀다.
그는 어렸을 적 할머니를 애칭으로 ‘내니’라고 불렀었다. 공교롭게도 그의 할머니 이름이 진저였다.
내니는 브라이언 나름 진저를 친근하게 부르는 애칭인 것이다. 물론 진저는 그게 할머니 이름이란 것을 알곤 마음에 안 들어 했지만.
“뭐 어때. 암튼 네 경쟁자들이 몸을 허우적이는 걸 봤나? 네 승리는 확정적이야.”
“저는 지유 씨와 아라 씨의 춤이 더 멋졌다고 생각했습니다.”
“……뭐? 왜?”
브라이언은 진심으로 몰라서 물었다.
“개성이 드러나잖습니까.”
진저는 고갯짓으로 멀리 떨어진 지유와 조아라를 번갈아 가리켰다.
“지유 씨는 건강하고 쾌활합니다. 아라 씨는 두말할 나위 없이 세상의 모든 멋짐을 모아 발산하는 듯 강렬했습니다.”
이상하게 조아라 칭찬만 영어로 비문이 될 정도로 길었다.
브라이언은 그녀를 멍하니 보더니 ‘하’ 웃었다.
“참으로 겸손하군!”
재능 있는 데다가 노력파이고 겸손하기까지!
이러니 어떻게 그녀를 아끼지 않을까?
분명 신께서도 그녀의 겸손함을 미리 알아보고 이러한 축복을 내렸으리라. 뭐, 미리 알아보았단 표현은 어폐가 있을까.
“조물주께는 미래가 곧 과거이고 현재이니.”
“브라이언은 혼잣말하는 버릇을 고쳐야 합니다. 어쨌거나, 제 춤은 누구나 출 수 있는 겁니다.”
“무슨 말을!”
“아닙니까?”
“……내니, 너를 떠올리고 만든 안무가 아니긴 해. 하지만 지금에 이르러선 너 이외의 누구도 출 수 없으리라고 확신해!”
“내니라고 부르지 마십쇼.”
“겸손은 좋지만, 과하면 보기 껄끄러워지는 법이지. 개성이라, 압도적인 형식미 앞에서 개성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발란신을 아나? 그는…….”
브라이언은 쫓겨나다시피 촬영장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진저가 촬영을 위해 집중해야 한다면서 그를 밀어냈던 것이다.
“굉장한 프로 의식이군!”
이 정도면 거의 콩깍지였다.
브라이언은 진저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주었다.
‘스승 앞에서 춤을 펼치는 건 부끄러운 일이겠지. 제자가 된 지 얼마 안 됐다면 더욱 부끄럽고.’
참고로, 진저는 제자가 된 적이 없다.
브라이언은 진저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 밖에서 적당히 시간을 때우려 했다. 그는 목이 말라 스튜디오에 들어올 때 보았던 자판기 쪽으로 향했다.
그곳에 한 여자가 먼저 와 있었다. 그녀는 벤치에 앉아 폰을 만지다가 브라이언을 흘끔 보곤, 다시 폰에 집중했다.
“…….”
브라이언은 그 여자가 왠지 낯익었다. 자판기를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아!’ 소리를 냈다.
“밍!”
여자가 흠칫하면서 브라이언을 보았다.
브라이언이 영어로 물었다.
“밍 아닙니까?”
“나를 알아요?”
민시화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그녀는 그를 몰랐으니.
“아시안게임 댄스스포츠 메달리스트 아닙니까?”
민시화는 놀랐다. 미국인 입에서 아시안게임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으니.
브라이언은 자신의 기억력이 쓸만하단 데서 만족감을 느끼곤 자연스레 그녀의 옆에 앉았다.
“‘댄싱 스타’란 프로그램을 아십니까?”
“네.”
“제가 거기 시즌3 우승자입니다.”
“그런가요.”
“……거기서 겨루었던 댄서 중 라틴 댄스 세계 랭커가 있었습니다. 밍, 당신의 이야기를 하더군요. 당신의 영상도 보았어요. 감명 깊었습니다. 당신의 영상 때문은 아니지만, 그 후로 라틴 댄스에도 관심을 가지게 됐어요. 이거 보세요, 지금도 제 플레이리스트에 탱고가 있습니다.”
민시화는 대강 ‘으흠’이라고 답했다. 그녀는 옆에 앉은 브라이언보다 폰으로 문자를 나누는 상대가 훨씬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브라이언은 그녀의 용무를 존중하는 대신 그녀의 관심을 더 끌려고 했다.
그는 재능을 사랑해서, 재능 있는 이와 대화 나눌 기회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밍이 여긴 어떻게?”
“제자가, 수강생이 촬영을 해서요.”
“아, 지유? 과연, 그 격정적임과 건강미, 섹슈얼리티는 밍의 머리에서 나온 거였군요.”
“아라인데요.”
“아…….”
브라이언은 당황해서 순간 말이 헛나왔다.
“어울리지 않네요.”
문자를 치던 민시화의 엄지가 멈췄다.
“어울리지 않는다뇨?”
“밍에게 배웠다기엔…… 물론 제가 당신을 잘 알지는 못합니다만, 그 아이에겐 기본적인 요소가 빠져있지 않나요?”
브라이언은 정확한 단어를 꽤 오래 고심했다. 그러곤 그가 경쾌하게 손가락을 튕겼다.
“뮤지컬리티!”
“뮤지컬리티.”
민시화가 동시에 같은 단어를 말하자 브라이언은 놀랐다. 그러면서도 기쁘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뮤지컬리티.”
음악을 듣고, 음악을 알며, 음악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음악에 감동하며, 음악으로 느끼는 그러한 감정을 표현하는 능력.
쉽게 풀어 춤에 필요한 음악성, 음악적 능력이다. 음악을 표현하는 법이라고 말해도 된다.
“무언가를 빼다 박은 느낌밖에 들지 않더군요.”
“반복 재생과 신체 과시가 너무 도드라지긴 하죠. 단순 입력과 반복 훈련의 결과물처럼 느껴지기도 해요.”
“알고 계시군요?”
브라이언은 의아해했다.
“그럼 왜 고쳐주지 않는 겁니까? 아, 실례했습니다. 춤을 추고 만드는 재능과 가르치는 재능은 엄연히 별개이건만.”
“…….”
민시화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가 조아라의 문제점을 고쳐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게다가 그런 문제점을 알려준단 것 자체가 껄끄러웠다.
‘그 애가 불쾌해할 거야.’
조아라는 성필이 만들어준 ‘배드’ 안무에 비상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민시화가 ‘이러이러해서 별로야’라고 한다면, 조아라는 받아들이는 대신 화를 낼 듯했다.
‘그 애의 표현력이 문제가 아니야.’
안무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정확하게는, 그 안무를 만든 사람이 가르치는 방식에 문제가 있는 거겠지.
성필이 만들었다고 하던가. 그가 가르치는 걸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무언가 잘못됐다.
“그런 식이면 저희 내니, 가 아니라, 진저와 너무 비교될 겁니다.”
무언가 잘못됐지만, 브라이언의 주장은 너무 앞서 있었다.
성필의 ‘배드’ 안무는 모든 문제점을 고려하고서라도 상당히 미려하고 잘 구성되어 있다.
적어도 아이돌들끼리 겨루는 장소에서 확연히 뒤떨어져 보일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조아라에게 매우 잘 어울리기까지 한다.
민시화와 브라이언이 보는 문제점은 엄연히 전문적인 무용수의 의견일 뿐. 대중들은 ‘셋 다 멋지다’ 정도의 감상만 가질 것이다.
“아, 곧 진저의 차례군요. 같이 보러 가시겠습니까?”
“어차피 보러 가야 했어요.”
민시화도 조아라의 상대들에게 흥미가 있었다.
그리고 스튜디오로 가 진저의 1분 퍼포먼스를 보았을 때, 민시화는 어째서 브라이언이 그토록 자신만만했는지 알 수 있었다.
‘대단하네.’
진저는 말 그대로 대단했다.
심지어 저게 끝이 아니다.
‘저건 군무야.’
군무를 진저 혼자 추고 있는데도 존재감이 엄청났다. 완성본이라면 더욱 엄청날 것이다.
민시화의 옆에 선 브라이언은 절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걸 보면서 민시화는 고민했다.
‘그 애한테 부족한 점을 말해줘야 하나. 아냐, 말해줘야 할 사람은 이사 오빠인데. 제대로 알아들을까? 알려준다고 해도 안무를 적절히 바꿀 역량은 있나?’
안 그래도 일 때문에 심경이 복잡한 민시화다. 괜히 브라이언 때문에 마음만 더 불편해졌다.
‘말해봤자 긁어 부스럼일 거 같은데…….’
* * *
“‘배드’ 안무 있잖습니까, 뭔가 부족하지 않아요? 선생님이 보기엔 어떠세요?”
“…….”
촬영이 끝나자마자 성필이 독대를 청해왔다.
민시화는 그의 말을 듣곤 얼떨떨했다.
“왜 그러세요?”
“아니야.”
성필은 춤을 배운 적이 없다고 했으나, 민시화가 생각하기엔 말도 안 됐다.
‘배드’ 안무를 만들었단 시점부터 의심했지만, 문제점을 바로 캐치하는 것을 보니 춤에 일가견 있음이 틀림없다.
“먼저 이사 오빠가 생각하는 문제점을 듣고 싶은데.”
“아, 네.”
성필이 먼저 말해오니, 민시화는 짐을 덜게 됐다. 문제점을 안다는 건 바꿀 마음이 있단 것과 일맥상통하니까.
하지만 성필의 감상이 ‘뭔가 부족하다’ 수준에 그쳐 있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구체적인 문제점을 모른다면…….
“저, 선생님께만 말씀드리는 건데요. 사실은요…….”
민시화는 성필의 이야기를 다 듣고, 정말 오랜만에 어처구니없다는 감정을 느꼈다.
“잠깐만, 내가 이해한 게 맞는지 확인해줘.”
민시화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면서 말했다.
딱히 복잡한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민시화의 마음이 복잡하여 이렇게 해야만 했다.
“그 ‘배드’ 안무는 이사 오빠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만든 거라고?”
“네.”
“그 사람은 이사 오빠의 전 여자친구고?”
“……네.”
“이사 오빠한테 준 헌정 안무라고?”
“네, 뭐, 네. 그러니까 저작권 관련해선…….”
“이사 오빠는 ‘배드’ 안무의 원본 영상 같은 거 없이, 그냥 몸으로만 기억하고 있고?”
“저, 선생님. 죄송한데 자꾸 오빠라고 부르는 거 그만해주시면…….”
“그래서 아라한테 온전히 가르쳐줄 수 없어서, 아라가 원본의 아우라를 못 내는 거 같다고?”
“……네.”
“이해했어.”
민시화가 깔끔하게 받아들였다.
“쉽게 요약하자면 이런 거네. 이사 오빠의 전 여자친구가 그린 그림을 이사 오빠가 그리고, 아라가 그 그림을 또 베껴 그린 거네?”
아름답기 그지없던 원본 그림은 복사를 거듭할 때마다 열화될 수밖에 없다.
이데아의 그림자인 현실.
그 현실을 그린 그림.
그 그림을 묘사한 글.
이런 식으로 자꾸만 원본과 멀어지는 셈이다.
“어쩐지, 중간중간 뭔가 부자연스럽던 게 다 이해가 되네. 그럼 해결법은 간단해. 다른 안무가를 데려와서 각색을 맡기면 그만이야. 원본을 열화시키는 게 아니라, 새로운 색을 더하는 거지.”
“그게 또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
“지금 아라한테 춤을 바꾸자고 하면 화낼 거예요.”
“왜?”
“……아라가 ‘배드’ 안무를 굉장히 마음에 들어하거든요. 아마 제가 만들어서 그런 거 같아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성필은 본인의 발언이 도끼병 초기 증상으로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제가 지금 아라한테 그 안무를 바꾸자고 하면요, 아라가 이렇게 반응할 거예요.”
아저씨, 진저 춤 보고 나서 이러는 거예요?
왜, 못 이길 거 같아요? 나 못 믿어요?
“아라가 진저한테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음, 안 그래도 그 중국인의 퍼포먼스를 본 직후이니 그렇게 생각할 만하네. 그 애는 자존심이 강하니까.”
“그래서 말인데요…….”
성필은 본론을 꺼내려 했다.
조아라는 성필 말은 안 듣겠지만, 민시화 말은 들을 확률이 높다.
민시화는 직접 진저의 안무를 보기까지 했으니 설득력이 더해지겠지.
적어도 오랫동안 유스임을 드러냈던 성필이 말하는 것보다, 민시화의 말이 조아라에겐 더 편견 없이 닿을 것이다.
“선생님이…….”
“간단하네.”
민시화가 호쾌하게 답했다.
“이사 오빠가 그 애한테 사정을 설명하면 돼.”
“네?”
“전 애인이 만든 거라고 말하라고.”
“얘기가 왜 그렇게 돼요?”
“아마 그 애, 경기를 일으키면서 ‘배드’ 안무 가져다 버리라고 할걸? 그렇게 되면 새 안무를 받으면 돼. 자, 해결이야. 어때?”
전혀 해결이 안 됐는데요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