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7화
진저는 질투심만 불사를 뿐 쉽사리 조아라와 지유 사이로 끼어들지 못했다.
KS 엔터의 사람들은 진저가 소심한 성격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이전엔 그랬더라도 이젠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성격으로 바뀌었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아라 씨 아직 나한테 화 많이 나 있으면 어떡하지…….’
진저가 자신감이 넘치는 건 회사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둥가둥가 떠받들어지는, 그러니까 KS 엔터 내부에서의 이야기일 뿐이다.
여전히 진저는 소심했다.
상대가 화났을 것을 걱정하여 함부로 사과 인사도 못 할 정도로.
조아라 혼자만 있으면 몰라도, 자꾸 지유와 붙어 있으니 말을 붙이기 어려웠다.
‘그냥 나중에 따로 찾아봬야 할까…….’
성필에게 사과하러 갔을 땐 그 혼자 마중하러 나왔기에 용기를 낼 수 있었었다. 옆에 신태웅도 있었고 말이다.
진저는 홀로 끙끙대기만 하다가 결국 인터뷰 시간을 맞았다.
“이번에 보여드리고 싶은 스타일, 분위기를 말씀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오늘 합동 인터뷰는 이른바 티저 영상과 같았다. ‘아오아’를 기다리는 팬들에게 ‘저는 이런 걸 할 예정입니다’라고 소개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조아라였다.
“제가 약간 멋진 모습으로 사랑받잖아요. 이번엔 그런 스타일을 극대화하려고 생각 중입니다.”
“조금 스포일러 해주실 수 있으세요?”
“으음, ‘롱 포’ 때랑 비슷해요.”
“기대할 수밖에 없네요.”
‘롱 포’는 인민이들 사이에서도 레전드로 불렸다. 스타일링부터 메이크업까지 팬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없던 것이다.
노래가 오랫동안 사랑받기도 하여서, 인민이들이 꼽은 소녀연맹 톱3 곡에 뽑힐 지경이다.
물론 소녀연맹은 아직 보유한 타이틀급 곡이 손에 꼽으니, 톱3라 하더라도 대단한 게 아닐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다음은 지유가 말했다.
“저는…… 글쎄요, 신나는 곡으로 정했어요. 많은 분들이 즐겁게 보실 수 있는 퍼포먼스가 됐으면 해서요.”
“스포일러하자면요?”
“저희 이번 컴백곡이랑 컨셉이 비슷해요. 아, 이건 너무 스포인가? 피디님한테 혼나겠다.”
글로브는 이미 티저 사진과 앨범 세트리스트가 공개되고 있다.
얼마 안 있어 컴백할 것이니, 팬들은 글로브의 컴백곡으로 지유의 퍼포먼스를 추측할 수도 있으리라.
“진저 씨는요?”
“……아.”
진저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촬영 중이잖아. 다른 생각하지 마!’
“진저 씨가 보여드리고 싶은 스타일은?”
“아, 으음.”
KS 엔터는 진즉 진저가 ‘아오아’에서 선보일 곡을 정해두고 안무가까지 섭외해두었다.
하지만 진저는 저 질문에 대답할 수 없었다.
진저가 할 일은 곡에 맞춰 안무가가 만든 춤을 추는 것뿐. 표현하고 싶은 게 뭐다, 그런 생각 자체를 한 적이 없었다.
“신비주의로 가시는 거예요?”
진저의 옆에 앉은 지유가 커버를 쳐주었다. 진저가 재빨리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 그렇슴미다. 엄청 대단한 퍼포먼스가 될 검미다. 팬분들에겐 죄송하지만 자그마한 스포일러도 할 수 없슴미다.”
“팬분들이 섭섭해하시겠어요.”
“어쩔 수 없슴미다. 충격적인 무대가 될 검미다. 아예 아무런 정보 없이 보는 게 훨씬 재밌을 검미다. 제가 보장함미다.”
아직 안무를 보지도 못했지만, 진저는 호언장담했다. 회사가 어련히 알아서 좋은 안무가를 섭외했으리라고 믿었으니까.
“저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겠슴미다.”
PD는 괜찮은 멘트를 건졌단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다음 주제로 넘어갔다.
“그러고 보니 아라 씨는 소녀연맹이 되기 전부터 춤을 배웠다고 하셨죠?”
“네, 스트리트 댄스 오래 배웠죠.”
“스트릿 스타일을 이번 퍼포먼스에 접목하셨나요?”
“으어…….”
조아라는 성필이 만든 ‘배드’ 안무를 떠올렸다. 기교를 겨루는 스트리트 댄스와는 꽤 거리가 있었다.
어반 댄스라고 칭해야 옳을 것이다.
“아니요. 저는 뭐든 잘하니까요. 곡에 가장 잘 맞는 장르를 썼어요.”
“지유 씨는 발레를 배우셨죠?”
“배우긴 했는데 큰 흥미는 못 느꼈어요. 아, 근데 아이돌 되고 나서 느끼는 건데요. 어릴 때부터 발레 했던 게 엄청 도움 됐어요. 안무 격렬한 거 처음 받고 연습하잖아요? 다른 애들 다음 날 근육통 시달리는데 저만 괜찮고 그런 적이 많거든요.”
“이번 퍼포먼스는 발레랑 상관이 없을까요?”
“없는 건 아니고요. 살짝? 제 우아함을 보여드릴 수 있는 기회가 있을 거예요.”
PD는 흡족해했다.
이번 ‘아오아’는 여러모로 대박이다.
현세대 가장 주목받는 걸그룹인 소녀연맹, 케이어스, 글로브를 한자리에 모아두었단 것부터.
그 멤버들 전원이 메인 댄서다. 게다가 어릴 적부터 춤을 배웠던 이들이니, 이번 ‘아오아’는 이전보다 훨씬 치열하고 볼거리가 많을 게 틀림없다.
“진저 씨는요?”
“저는…….”
진저는 창피한 기색으로 말끝을 끌었다.
“……슴미다.”
“네?”
“연습생이 되기 전엔, 춤춰본 적 없슴미다…….”
촬영장이 정적에 잠겼다.
진저가 농담하는 건가 싶은 것이다.
그녀는 명실상부 케이어스의 메인 댄서다. 그녀의 개인 댄스 커버 영상이 조회 수 1,000만을 넘겨 화제가 된 적이 있을 정도였다.
아이돌 춤을 리뷰하는 댄서들은 진저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곤 했다.
“어, 그러면…….”
PD가 진저에 대한 정보가 적힌 수첩을 팔랑팔랑 넘겼다.
“진저 씨는 연습생이 되고 1년이 안 돼서 데뷔조가 되셨잖아요. 케이어스로 데뷔하시고요. 그럼, 1년도 안 돼서 데뷔조로 뽑히고, 또 메인 댄서 포지션이 되셨다고요?”
진저는 조아라의 눈치를 살폈다.
너무 건방져 보이면 어떡하나 걱정했다.
그런데 조아라는 흥미 깊은 표정으로 쳐다보기만 했다.
‘아!’
조아라는 댄서다. 그러니 춤을 잘 추는 사람에게 호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진저의 사고회로는 그렇게 흘러갔다.
그럼 괜히 빼는 것보다 당당해지는 게 더 도움이 될 거다!
“네, 저는 천재임미다!”
조아라가 작게 감탄하면서 박수 쳤다.
진저는 더욱 기가 살았다.
“다른 분들한테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저는 춤으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검미다.”
조아라와 지유가 낮게 ‘오오’ 감탄했다.
진저의 어깨가 장백산(백두산의 중국 명칭)처럼 높아졌다.
그러나 조아라의 마음은 표정과 딴판이었다. 촬영 중이라 관리하는 것뿐이었다.
‘네네, 그러시겠죠. 천재니까요. 부럽습니다 참.’
조아라는 평범한 사람이다.
천재성을 가진 이들에게 감탄하기도 하고 질투하기도 한다.
만약 진저가 신체나 기술, 어느 한쪽만 뛰어났어도 이렇게나 반감이 생기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진저는 무용수로서 모든 장점을 타고난,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천재였다.
무용의 신이라는 니진스키는 키 작고 다리가 짧기라도 했지, 진저는 그만한 재능을 가지고서 팔다리도 길쭉하다.
게다가 성필이 유독 진저를 좋아하기도 하고…….
‘그래 넌 건방질 만하다, 인정할게.’
성필은 조아라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진저가 건방을 떤 건 조아라를 향한 애정 표현이자 친근감의 표현이라고.
하지만 오늘 진저가 하는 걸 보니, 그냥 성격 자체가 저렇게 변한 듯했다.
주변에서 떠받들어주면 오만해질 만하지. 그만한 재능까지 있으면 더 그렇겠고…….
“막내 온 탑(막내 on top)임미다!”
그 후로도 진저는 자신의 재능을 어필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지지 않으리라고 선언했다.
PD는 그런 진저를 보면서 입맛을 다졌다.
‘내가 케이블 서바이벌 프로 피디였으면 진저 씨 발언만으로 시청률 5%는 그냥 뽑았겠다.’
하지만 ‘아오아’는 그런 식으로 흥미를 끌어 조회 수를 확보하는 채널이 아니었다.
PD는 아쉬움만 삼켰다.
그리고 진저가 활개 칠수록 조아라와 지유의 맞장구는 점점 활기를 잃어갔다.
‘이 정도면 우리 맥이는 거 아니야?’
상대가 안 될 테니 미리 패배를 곱씹어라, 뭐 이런 의미인가?
* * *
촬영이 끝났다.
진저는 조아라의 동태를 살피면서 재빨리 매니저에게로 달려갔다.
“매니저님 빨리 제 선물 주십……!”
“진저 잠시만 이리 와봐.”
“예?”
매니저는 진저를 데리고 PD와 작가들에게로 갔다. 그리고 오늘 촬영분 중, 혹여나 진저가 영상으로 나가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이 없는지 확인했다.
“그, 그냥 다 내보내도 됨미다!”
“그러지 말고.”
매니저는 진저를 붙잡았다.
오늘 진저가 촬영에 임하는 태도는 좋았다. 매우 적극적이고 재밌기까지 했으니.
하지만 살짝 과한 부분이 있었다.
언제까지나 매니저가 촬영 태도를 고쳐주고, PD와 작가에게 말해서 과한 부분을 삭제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기회에 진저는 선이란 것을 배워야 했다.
“봐봐, 이 부분은…….”
진저는 매니저의 의도를 알았다.
매니지먼트란 건 단순히 스케줄을 조정하고 트레이닝 일정을 짜는 게 아니다.
아티스트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확실히 주지시키는 것도 매니지먼트다.
그래서 진저는 잠자코 매니저의 말을 들었다. 이런 부분은 좋았는데, 이런 부분은 좀 그런 거 같으니까 없애고, 이건 꽤 괜찮지만 긴가민가하고…….
진저는 그가 말할 때마다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러는 동안 조아라와 지유는 매니저와 함께 스튜디오를 나섰다.
‘아, 아직 괜찮아. 따라잡을 수 있어.’
조아라를 따라잡아서 선물과 함께 사과하는 거다.
약 10분, 진저에겐 억겁과 같은 시간이 지났다. 진저는 매니저에게 맡겨둔 선물을 품에 안고 스튜디오를 뛰쳐나갔다.
진저가 뛰쳐나가자 매니저도 덩달아 다급해졌다.
“진저! 회사로 바로 가야 하니까 짧게 끝내고 와!”
“알겠슴다!”
문을 나서자마자 진저가 좌우를 살폈다.
‘어디지?!’
모르겠다.
진저는 핸드폰을 꺼내다가, 복도 저편에서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조아라일까 싶어 재빨리 그곳으로 향했다.
모퉁이를 도니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엘리베이터 앞에 놓인 자판기와 간이 벤치 앞,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 있었다.
“진저 씨?”
성필이 지유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바, 박 이사님? 아라 씨 따라오신 검미까?”
“아뇨. 아라 데리고 갈 데가 있어서 촬영 중에 온 거예요.”
성필을 만나 기쁜 것도 잠시였다.
마음 같아선 담소를 나누고 싶었지만, 진저에겐 그보다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때 지유가 살갑게 말을 걸었다.
“안 그래도 오빠랑 진저 씨 얘기하고 있…….”
“그렇슴미까. 이사님 아라 씨 어디 있슴미까?”
“…….”
지유는 말문이 다 막혔다.
설마 말이 씹힐 줄은 몰랐다.
‘뭐 이런 애가 다 있…….’
“진저!”
복도 멀리서 매니저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진저는 더 다급해졌다.
“이사님 이거!”
진저가 성필의 품에 선물을 안겼다.
“아라 씨한테 미안하다고 전해주시겠슴미까?”
“네, 그럴게요.”
“감사함미다!”
진저는 얼굴이 밝아져선 급히 매니저에게로 떠나갔다.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지유가 작게 투덜거렸다.
“진저 씨 원래 저런 사람이에요?”
“저런 사람이라니?”
“전부터 계속 저를 무시하더라고요. 오늘도 봐요. 제 말 씹고 오빠한테만 아는 척하는 거요.”
“급한 일이 있으시겠지.”
“그럼 전에 저 무시했던 건요?”
지유는 진저가 단순히 소심한 성격이라고 생각했었지만, 보면 볼수록 아닌 듯했다.
진저와 친해져야 했건만, 점점 그럴 마음이 사라져간다. 차라리 조아라에게 호의를 얻어 표를 사는 게 더 빠르지 않을까 싶었다.
“…….”
성필은 침묵을 지켰다. 진저에 관해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았다.
좋은 말은 은이지만 침묵은 금이라고 한다.
성필은 혼자만의 생각을 속에 잘 넣어두었다.
‘아라도 진저 씨가 건방지다고 했었지.’
어쩌면 성필 자신이 진저에게 콩깍지가 씌인 게 아닐까? 조아라와 지유가 입을 모아 저렇게 말하는 걸 보니…….
‘하긴, 내가 진저 씨를 알아봤자 얼마나 안다고.’
미국에서 만났던 진저는 성필이 기억하는 전생과 달랐었다. 현재의 진저가 과거의 진저와 달라졌더라도 딱히 놀랄 일은 아니다.
‘그래도…….’
성필은 진저에게 받은 선물을 내려다보았다.
‘사과하려고 선물까지 준비하셨잖아.’
조아라와 지유가 오해하는 거겠지.
“아저씨 벌써 왔어요?”
화장실에 갔던 조아라가 돌아왔다. 컬러 렌즈를 빼고 더 간편한 복장으로 변해 있었다.
조아라는 성필의 앞에 선 지유를 보곤 반갑게 인사했다.
“아저씨랑 뭔 얘기했어요 언니?”
“너 예쁘다고. 오빠가 네 칭찬 얼마나 하는 줄 알아? 나 귀에서 피 났어.”
조아라가 흠칫했다.
그녀는 지유가 성필을 오빠라고 직접 부르는 것을 처음 들었다. 순간 지유가 오빠라고 하기에 대체 누굴 말하는 건지 고민까지 해야 했다.
“언니, 아저씨를 오빠라고 불러요?”
“내가 묻고 싶다 야. 넌 오빠를 아저씨라고 불러?”
둘 사이에 미묘한 공기가 흘렀다.
먼저 조아라가 물었다.
“왜요?”
“왜냐니.”
지유는 살짝 어이없단 듯 말했다.
“오빠잖아.”
“아저씨 34살이에요.”
“나랑 만났을 땐 20대 중반이었거든?”
그에 조아라가 또 흠칫했다.
성필과 지유의 인연이 그렇게 오래됐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20대 중반의 성필이라고? 그의 집에서 해병대 시절 사진을 보긴 했었지만,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오빠였어. 지금도 오빠고.”
지유가 장난스럽게 팔꿈치로 성필의 팔을 쳤다. 성필이 부끄럽단 듯 손을 내저었다.
“내가 오빠라고 불리기엔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다.”
“맞아요. 아저씨는 아저씨잖아요.”
“…….”
성필은 시무룩해져선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자 지유가 성필의 팔을 붙잡고 열정적으로 변호했다.
“오빠가 왜 아저씨야. 이런 아저씨가 어딨어? 너 오빠 만났을 때 오빠 몇 살이었는데?”
“오, 아니, 아저씨, 30살이었…… 는데 나는 그때 고2였어요! 나이 따져도 아저씨 맞잖아요!”
“아라야 왜 그렇게 화내……. 그렇게까지 나를 아저씨로 만들고 싶어……?”
성필은 정말 울적해졌다.
옛날에 조아라가 성필을 보고 ‘다 시들었다’고 할 때보다 더 울적했다.
전생에서도 그랬지만, 성필은 나이를 먹어가며 느낀 게 있다. 마음은 젊은데 몸만 늙어간단 것이다.
성필도 아저씨보단 오빠란 말을 듣고 싶었다.
그런 의미에서 전생이나 현재나 조아라가 성필을 부르는 호칭엔 장난기가 있었지만, 그래도 전생의 조아라가 오빠라고 불러주던 게 훨씬 나았다.
“그게 아니라…….”
성필이 정말 상처받은 듯 보이자 조아라는 당황했다. 그녀는 둘러싼 세상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목격한 아기 새처럼 눈동자만 열심히 굴렸다.
잠시 정적이 일자, 지유는 쾌활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알겠어. 아저씨란 건 그냥 친근감 표현이지? 그럼 넌 아저씨라고 부르고, 난 오빠라고 부르면 되겠네. 그치?”
“…….”
“그쵸, 오빠?”
“나 아라한테 가스라이팅 당했나 봐. 오빠랑 아저씨랑 비교하니까 아저씨가 더 익숙해.”
“그럼.”
지유는 떠나려는 듯 마지막으로 성필의 팔을 툭툭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이젠 오빠에 더 익숙해져요. 오빠란 소리 들은 게 인생에서 더 길잖아요? 아니 근데 팀장님 팔 왜 이렇게 굵어요? 무슨 운동해요?”
“운동하지.”
“오, 관리하는 남자.”
“늙어서 그래 늙어서……. 가만히 있으면 쪼그라들고 시들 뿐이니까…….”
“에휴. 아라야, 오빠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 기 다 죽은 거 봐. 내가 다 마음 아프다.”
지유는 둘에게 가벼운 인사를 남기고 떠나갔다.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성필은 우울함을 지우고 조아라에게 선물을 건넸다.
“아라야, 진저 씨가 죄송하시대.”
“…….”
“아직도 진저 씨한테 화났어? 엄청 미안해하셨어. 일이 있으셔서 먼저 가셨는데, 따로 선물까지 주셨으니까 나중에 연락…….”
“뭐, 오빠라고 불러줘요?”
“응?”
“아니 뭐…….”
조아라는 성필에게 등을 돌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팔짱을 낀 채 엘리베이터 층수만 보았다.
“아저씨가 싫으면, 그렇게 불러줄 수도 있고요.”
“에이, 무슨 오빠야. 나 아저씨 맞아. 아저씨라고 불러.”
“나한텐 오빠 소리 듣기 싫어요? 그래요, 그냥 글로브한테 많이 듣던가요. 오랜 인연 끊고 나서 많이 마음 아팠죠? 이제까지 글로브 애들한테 오빠 소리 듣고 싶어서 어떻게 참았나 몰라?”
“……헤헤.”
성필은 백설하에게 배운 법을 써먹었다.
곤란하면 어벙하게 웃는 것이다.
‘다음 그룹 애들 프로듀싱할 때는, 전생의 기억을 살려서 냉혹한 이미지로 가야겠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조아라는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빨리 들어와요. 늦으면 쌤쌤이 꼽 준단 말예요.”
“어.”
성필이 오늘 조아라를 데리러 온 건, 함께 민시화를 보러 가기 위해서다. 그가 만든 ‘배드’ 안무에 대한 의견을 얻을 생각이다.
‘긴장되네.’
이미 가로 엔터 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으나, 조아라는 마지막 시험으로 민시화에게 안무를 보여주려 했다.
성필은 왠지 모르게 답답해서 셔츠 목깃을 잡아 부채질했다.
‘전생에 아라 부모님 뵈러 갔을 때랑 비슷한 정로도 긴장된다…….’
“하아.”
조아라는 오빠―아저씨 이야기가 있고 나서 왠지 모르게 저기압이었다. 성필이 눈치를 볼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 그녀는 한숨을 쉬더니 격려하듯 성필의 어깨를 두드렸다.
“긴장하지 마요. 안무 좋아요. 쌤쌤이 꼽 줘도 내가 커버해줄게요.”
“……고맙다.”
성필이 긴장하는 건 조아라가 생각하는 이유와 달랐다. 왜냐하면, 그가 민시화에게 보여줄 ‘배드’ 안무는 전생의 조아라가 만든 거였으니까.
‘거의 완성에 오른 아라의 안무 실력이 평가받는 거나 마찬가지야.’
“근데 아저씨, 이 선물 갑자기 뭐예요? 나 오늘 생일 아닌데요. 이것도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거예요? 아 씨, 나 선물에 넘어가고 그런 사람 아닌데.”
“진저 씨 사과 선물이라고 했잖아. 내가 얘기할 때 무슨 생각 하고 있었어?”
“오, 빠, 생, 각.”
“으휴, 우리 아라 아주 능글맞은 거 봐? 귀엽다 귀여워.”
“능글맞은 건 아저씨겠죠. 내가 팬 앞에서 할 만한 애교까지 떨었는데 당황하는 척이라도 해주지…….”
조아라는 진짜 실망한 거 같았다.
성필은 괜히 잘못한 기분이 들어 그녀를 달래주었다.
* * *
성필의 춤을 본 민시화는 턱을 괴던 손을 들어 검지로 그를 가리켰다.
“그러니까 이게 이사 오빠가 만든 거라고?”
“저는 선생님의 오빠가 아닌데요.”
“오빠가 만든 거라고?”
민시화는 조아라나 지유와는 다른 의미로 강고하다.
성필은 잠시 고민했다.
그가 미래의 지식을 이용한 게 한두 번은 아니었다. 하지만 엄연히 저작권(실연권)이 존재했던 작품을 가져와 자신이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건 너무 양심에 찔렸다.
비유하자면, 미래에 히트할 노래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형태로 찍어내어 ‘내가 만들었어요, 난 천재 작곡가요’라고 하는 것과 비슷했다.
“사실…….”
성필은 그럴듯한 답을 만들어냈다.
“아라가 만든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아라를 생각하면서 춘 거니까요. 아라에게 헌정하는 춤입니다.”
“아저씨 미쳤어요?!”
“그러게, 젊음은 좋은 거라지만 내 앞에서 낯 뜨거운 말은 말아줬으면 하는데 말이야.”
성필은 변명하려다가, 이 이상으로 그럴듯한 말을 지어낼 자신이 없어 그만두었다.
성필이 침묵하자 조아라는 그를 괴상한 인간 보듯 쳐다보았다.
“진짜로……?”
“같이 일하는 사람이랑 자면 안 돼. 인생의 지혜니까 새겨들어.”
“그런 거 아니에요!”
민시화의 말재주는 성필마저 적극적으로 변명하게 만들었다. 그가 생사가 달린 듯 변명해대자 민시화는 질린 듯 손을 내저었다.
“알겠어. 이사 오빠가 만들었다 이거지. 저 애에 대한 존경심이나 사랑이나 기타 등등으로. 그냥 놀라서 물어본 거야. 춤이랑 관련 없는 사람이 만들 만한 게 아니거든.”
“그래서요? 쌤쌤, 이걸로 딴 애들 다 죽여버릴 수 있겠어요?”
“몰라.”
“쌤쌤이 모르면 누가 알아요?”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난 예언자가 아니란다. 네 머릿속의 내가 어떤 인간인지 모르겠네. 보는 재미가 있는 춤이란 건 알겠지만, 다른 애들이 어떤 걸 준비했는지 난 몰라. 결과는 모르지.”
“암튼, 괜찮단 거죠?”
“응.”
조아라와 성필이 하이파이브 했다.
“나도 이거 볼 때부터 괜찮다고 계속 생각했거든요. 아, 쌤쌤 이번에 촬영하는 거 보러 올래요? 본 퍼포먼스 찍기 전에 신경전 느낌으로 1분만 서로 퍼포먼스 간단하게 보여주는 날 있거든요. 보러 와요.”
“언제인데?”
“주말이에요. 쌤쌤 수업 없는 날.”
“나 대회에 나가는 주말이 있어. 언제인지 알아야 보러 갈지 정하지.”
“대회요?”
조아라는 흥미가 동했다.
민시화가 대회에 나간다고? 꼭 보고 싶다.
“너도 보러 올래?”
“네!”
둘은 서로의 일정을 교환했다.
수업을 받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둘은 꽤 친해져 있었다. 성필은 그걸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그날 와서 평가 좀 해줘요. 내가 이길 만한지 아닌지요.”
“네 춤은 이사 오빠가 만들어줬다 쳐도, 다른 애들은 어때?”
“뭐, 한국 무슨 안무가들한테 맡겼겠죠. 다 비슷비슷할 거예요. 근데 내 안무는 걔들이랑 하나가 달라요.”
“뭔데?”
“애정이 담겼잖아요. 그죠, 아저씨?”
“같이 일하는 사람이라면 자면 안…….”
“그 말 그만해주시면 안 될까요…….”
* * *
KS 엔터의 퍼포먼스 디렉팅팀은 공항으로 한 인물을 마중 나갔다.
상대는 그랜트 브라이언이란 이름의 미국인 안무가였다. 그의 뒤로는 제자 여러 명이 우르르 따라왔다.
직원이 능숙한 영어로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브라이언 씨! 먼 길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브라이언은 서글서글한 미소로 직원과 악수했다.
그랜트 브라이언.
조아라가 애청하는 미국의 춤 경연 프로그램인 댄싱 스타 시즌3 우승자.
그는 현대무용과 재즈 댄스 전공으로, 전 세계에 아카데미와 전문학교를 세워 수천 명에 이르는 수강생을 지니고 있다. 거기에 현재까지 배출한 제자들은 만 단위에 이른다.
미국에서 그의 전문학교가 가지는 위상은 대단해서, 학교에서 발행하는 자격증만으로도 업계에선 어엿한 한 명의 댄서로서 인정해준다.
댄스 플레이어로서, 교육자로서 유명한 그는 안무가로 훨씬 유명했다.
남자임에도 걸리쉬 댄스에 일가견이 있어, 수많은 여자 팝스타들의 퍼포먼스를 디렉팅한 경력이 있었다.
과거 케이팝 씬과도 몇 번 인연을 맺었기에 KS 엔터가 접촉할 수 있었다.
“아닙니다, 제가 감사하죠.”
KS 엔터는 바쁜 브라이언을 끌어오기 위해 막대한 자본과 인맥을 투사했다.
브라이언이 보내는 감사는 돈에 대한 감사였다.
“가시죠.”
KS 엔터의 인원들과 함께 가며, 브라이언은 초가 아깝단 듯 빠르게 말했다.
“간곡한 부탁에 오긴 했지만, 솔직히 시간이 촉박합니다. 귀사가 제안한 수준에 그 아이돌이 따라올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진저는 훌륭한 아이돌이자 댄서입니다.”
브라이언은 미소 지었다.
이미 안무는 곡에 맞춰 완성되어 있었다.
‘케이팝 아이돌이라면 그야 춤을 배웠겠지. 하지만 온전한 안무 작품을 소화하는 게 가능할지.’
브라이언이 만든 안무는 혼자 잘해서 되는 것도 아니었다. 군무이기에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 것.
물론 진저가 주인공이라지만, 어지간한 경험을 가지곤 시간 내에 소화할 수 없을 것이다.
‘그걸 대비해서 제자들과 다운그레이드 버전도 익혀두긴 했지만.’
아무래도 완성본을 열화시킨다는 게 영 내키지는 않았다. KS 엔터의 말대로 진저가 훌륭한 댄서였으면 좋겠지만, 브라이언은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브라이언과 제자들은 KS 엔터의 연습실로 안내됐다. 진저는 약속 시간에 10분 정도 늦었다.
직원이 대신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스케줄이 예상보다 살짝 길어져서.”
“괜찮습니다. 앞으로 십수 일간 제 시간은 온전히 귀사의 것이니까요.”
브라이언은 진저의 모습을 훑었다.
‘스케줄이라. 유명 아이돌이라고 했던가. 연습하는 시간보다 돈 벌러 상업 활동 뛰는 시간이 많겠군. 목표를 더 하향 조정해야 하나.’
진저의 몸은 댄서로서 타고났다.
브라이언마저 감탄할 정도였다.
하지만 실력은 별개다.
브라이언은 진저의 실력이 기초, 아니. 기초보다는 약간 높은 초급자라고 가정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게 브라이언의 안무 강습이 시작됐다.
약 3시간 후, 브라이언의 입가엔 놀라움과 희열이 함께 걸려 있었다.
“몸만이 아니라 능력도 타고났어…….”
감히 타인과 비할 바 없는 천재다.
브라이언의 눈동자에 비치는 진저의 붉은 머릿결이 불꽃처럼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