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525화 (525/760)

525화

서유선보다 한발 늦게 연습실로 온 성필과 조아라. 둘은 감히 끼어들 생각도 하지 못하고 서유선의 대환장 파티를 관람했다.

“한별 님의 방안을 따르겠습니다!”

서유선은 대뜸 그렇게 선언했다.

“한 계단씩 쌓아가는, 동작을 하나씩 만들어가는 방법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요! 다른 협업이 그러하듯 개개인이 안무를 만들도록 합시다! 아시겠죠?!”

성필이 조아라에게 속삭였다.

“아라야, 유선 씨…….”

“취했어요.”

“네가 봐도 그래?”

“지금 봐서 아는 게 아니라, 선배님 진짜 술 먹고 왔어요.”

“뭐?!”

“레드 와인 한 병 전부요.”

조아라는 서유선이 마신 와인의 알코올 도수를 확인했는데, 무려 14.5도였다.

와인 한 병이 700mL 정도이니, 서유선은 소주 두 병을 몇 분 만에 다 마시고 회의에 참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취해서 회의에 참석했단 전대미문의 사태.

당장 말려야 했지만, 성필은 두고 보기로 했다. 그야…….

“자, 그럼 시작합시다!”

서유선은 굉장히 추진력이 있었다.

그냥 취해서 아무렇게나 하는 건지, 아니면 명확한 생각을 지닌 채 술의 힘을 빌려 용기를 낸 건지.

성필은 조금 더 두고 보기로 했다.

하희진은 얼이 빠져 가만히 있다가, 곧 눈썹을 도끼처럼 세우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 의견을 피력하시는 거예요 명령하시는 거예요? 어제 박 이사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합의로 결론을 도출…….”

“명령입니다!”

“어?!”

“명령이요! 따르세요!”

하희진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서유선은 어제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건가?(맞음)

하희진과 그녀의 그룹은 서유선의 강압을 따를 이유가 없었다. 서유선이 갑자기 쳐들어와 ‘이렇게 해라’라고 하면 따라야 하는가?

“유선 님이 뭔데 그걸 마음대로 결정…….”

“저는 퍼포먼스 디렉터잖아요!”

곧바로 하희진이 입을 다물었다.

그건 그랬다.

어제 서유선이 보여준 모습이 너무 꼴사나워서 그렇지, 그는 퍼포먼스 디렉터였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이렇게 갑자기 결정하는 게 어디 있……!”

“시간 싸움이란 말입니다 아이돌 안무란 건!”

서유선이 소리치자 하희진은 어깨를 움찔 떨었다. 그녀만이 아니라 모두가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것을 들은 듯이 멈칫했다.

서유선의 외침은 음향 기기로 증폭된 것처럼 커다랬다. 목소리가 성대에서 발생한 후 수십 번이나 공명을 거듭하여 증폭된 것처럼.

“한 달도 깁니다! 너무 깁니다! 최대 10일 이내에 결판을 내야 다음 일정이 원활하게 돌아가요! 완성도, 예술성, 작품성 이런 걸 붙잡고 있다간 죽도 밥도 안 된단 말입니다!”

“하지만…….”

“시간을 더 들인다고 더 나은 작품이 나온단 보장은 없어요! 일단 빠르게 진행합시다!”

“아니…….”

“스케줄이 밀리면 책임지실 수 있으십니까?”

“…….”

“책임지는 건 디렉터인 저예요! 레코딩, 뮤직비디오, 프로모션, 공연, 콘서트, 방송! 이 모든 스케줄이 밀리면 책임을 지는 건 저란 말입니다! 책임을 지니 제가 이끌겠습니다! 한별 님의 방안을 따르는 쪽으로요! 어차피 안무란 건 한 번 완성본이 나오면 방송 전까지 몇 번이나 수정할 수 있어요! 부담가지지 말고 최대한 빨리 결과물을 내세요! 그럼……!”

서유선이 손뼉을 쳤다.

“시작합시다!”

하희진은 어버버하면서 성필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어제 성필은 합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안무가들끼리 의견을 맞추길 요구했었다.

성필도 한 말이 있으니 하희진에게 도움을 주어야 했다.

“어, 옳은 말이네요.”

조아라가 나섰다.

“선배님 말씀대로 하죠. 아저씨, 시간 촉박하잖아요. 그죠?”

조아라가 성필에게 윙크했다.

성필은 오만상 다 찌푸렸다.

조아라는 내심 상처받곤 안무가들에게 설명을 이어갔다.

“안무가마다 다르긴 한데, 보통 며칠 내에 시안을 줘요. 길어도 10일이요. 동작 하나씩 만들어가는 게 일반적인 방법은 아니니까, 일단 일반적인 방법부터 해보는 거 어때요?”

조아라는 이번 프로젝트의 프로듀서였다.

그녀의 말엔 무게가 있다.

애초에 안무가들이 안무 방식을 논의한 것도, 성필과 조아라가 명확한 방법을 알려주지 않아서였다.

조아라가 이렇게 나온다면 하희진도 토를 달 생각은 없었다. 불만을 삼키고 조아라와 디렉터 서유선의 방침을 따를 뿐.

“그럼 이렇게 하죠.”

성필은 하희진에게도 기회를 주려 했다.

“희진 님 말씀대로 여러 장르가 독립적으로 작업하면 조화를 해칠 수도 있잖아요. 만약 서유선 디렉터님이 제대로 종합 작업을 해내지 못하면, 그때라도 희진 님 말씀대로 해보는 거예요.”

리더로서 이런 의사 결정 방식은 도박수였다.

두 의견이 대립할 때, 어느 의견이 실패하면 다른 의견을 기용하겠다고 말하는 것 말이다.

이러면 다른 의견을 지닌 이들이 일부러 태업할 가능성이 있다.

‘그걸 조율하는 게 내 역할이고, 유선 씨의 임무지.’

성필은 서유선은 이번 한 번만 기용하는 게 아니라, 아예 가로 엔터 전속 퍼포먼스 디렉터로 쓸 생각도 하고 있었다.

이건 성필이 서유선에게 주는 시험이기도 했다. 그가 이 일을 잘 해낸다면, 가로 엔터는 유능한 퍼포먼스 디렉터를 얻을 것이다.

“끼얏호우!”

서유선이 앞 텀블링 후 즉시 백 텀블링까지 했다. 깃털처럼 가벼워서 순간 중력이 없어졌나 싶었다.

“…….”

성필은 말문이 다 막혔다.

누가 보아도 서유선은 정상이 아니었는데, 성필이 그의 편을 든 거나 마찬가지가 되었으니.

하희진은 정말 저 인간이 멋대로 하게 둘 거냔 듯 성필을 보았다.

“맡겨만 주세요!”

“……그, 그렇다시네요.”

취한 서유선은 사회성을 회복하지만, 그 부작용으로 매우 천진난만하고 독선적으로 변한다.

“다들 그럼 거울 앞에 한 자리씩 차지하고 안무 들어갑시다!”

서유선은 굉장히 진취적이었다.

성필은 왠지 모르게 그가 어째서 다키스트의 리더 자리에 올랐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모습은 썩 나쁘지 않았다.

“자자 빨리 빨리!”

다키스트의 리더.

독재 ON.

* * *

서유선이 독재를 펼치는 동안 조아라도 노는 건 아니었다.

이 순간 조아라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아오아’에서 선보일 안무를 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먼저 곡이 필요했다.

“준비됐어 왓슨?”

“내가 왜 왓슨이야.”

“아저씨, 좀 맞춰줘요.”

“네가 왓슨 해. 내가 홈즈 할래.”

성필과 조아라는 ‘아오아’에서 선보일 곡을 정해야 했다.

성필은 조아라가 미리 생각해둔 곡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그녀는 머리가 텅텅 비어 있었다.

“나가고 싶다고 생각만 했지, 곡은 생각 안 해뒀어요.”

“너 평소에 팝송으로 춤 많이 추잖아. 그중에서 쓸 만한 거 없어?”

“관성에 따르기 싫어요.”

“그럼 어쩌게?”

“내가 괜히 아저씨 왓슨으로 정했겠어요? 다른 사람들한테 탐문 조사해요.”

“오, 꽤 괜찮은데?”

‘아오아’는 아이돌의 개성을 보여주는 자리다.

물론 조아라가 좋아하는 장르의 스타일로 무대를 꾸미면 잘 어울릴 것이다.

하지만 조아라는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자신이 생각하는 자신의 이미지가 아니라, 타인이 자신을 바라보는 이미지를 고려하는 것.

“아이돌 생활 오래 하다 보니 저절로 이미지를 생각하게 됐구나. 장하네.”

“……맞아요.”

대책 없이 탐문하자고 한 거구만.

성필과 조아라는 먼저 A&R팀 이재호를 찾았다.

손혜빈에게 직접 사사한 그는 매주 세계 각국의 음원 차트를 핥듯이 살핀다.

자연스레 팝송 트렌드도 꿰고 있을 터.

그라면 조아라에게 적합한 곡을 알 것이다.

“아라 씨한테 어울릴 곡이요?”

이재호는 잠시 고민하더니 곧바로 곡명을 댔다.

“도자캣의 ‘보스 비치’ 어떨까요? 아라 씨 이미지에 어울릴 것 같은데요.”

“곡 이름이 보스의 해변이에요? 오, 뭔가 느낌 있는데.”

“아, 비이치(Beach)이 아니라 빗치(Bitch), 비 아이 티 씨 에이치입니다.”

“내가 빗치 같다고요?”

“네? 아니요!”

“당장 우리 아라한테 사과해요!”

“이사님까지?!”

사과했다.

두 사람은 이재호의 모니터로 ‘보스 비치’의 자막 뮤직비디오를 보았다.

사실 둘도 이 곡을 알았다.

한 유명 프랜차이즈 영화 시리즈 OST여서 간간히 들렸기 때문이다.

[난 기회 잡고 죽어라 달리지

난 이겨서 그 위에 올랐지

우리가 춤출 때 바닥엔 돈이 깔려

너무 하얗잖아 좀 더럽혀 봐

난 쌍년이야, 난 보스야

난 쌍년이고 보스라서 유리처럼 빛나

난 쌍년이야, 난 보스야

난 쌍년이고 보스라서 유리처럼 빛나]

“사람 총으로 쏴 죽여야 할 거 같은 노래네요.”

“예, 빌런 주제곡이니까 그런 분위기가 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싶네요.”

“내가 나쁜 년이라고요?”

“네? 아니요!”

“…….”

“아저씨, 왜 안 맞춰줘요?”

“재호 씨 불쌍하잖아, 그만하자.”

“진짜 나만 나쁜 년 됐네.”

첫 번째 후보, 도자캣의 ‘보스 비치’.

다음으로 조아라가 찾은 건 하릴없이 소파에 앉아 멍때리던 장하양이었다.

성필이 마트에서 산 30,000원짜리 블루투스 마이크를 장하양에게 가져갔다.

장하양은 곧바로 용모를 정돈했다.

“아하하, 소녀연맹 자체 예능이에요?”

“그냥 기분 내려고 가져왔어. 하양아, 아라 ‘아오아’ 나가는 거 알지? 팝송 추천해 줄 수 있어?”

“제가요? 글쎄요, 제가 잘 할 수 있을지…….”

“그냥 좋아하는 노래 말해도 돼.”

“음, 그럼 코난 그레이의 ‘매니악’ 추천할게요. 제가 좋아해서 요즘 매일 듣고 있어요.”

장하양은 한 노래에 꽂히면 그것만 며칠 동안 계속 듣는 타입이었다. 이 노래도 7일째 매일 듣고 있다는 모양이다.

성필과 조아라는 폰으로 ‘매니악’ 자막 뮤직비디오를 보았다.

[그러니 네 친구들에게 돌아가서

내가 쓰레기라고 말해

내가 미쳤고 널 화나게 한다고

아주 다 말해버려

내가 널 스토킹하고 훔쳐보는

사이코패스라고

싫은데 억지로 사귄 관계라고

어디 한번 말해보라니까?]

“되게 노래가 진득하네요. 와, 근데 컨셉 되게 좋은데?”

“아하하, 그렇지? 언젠가 해보고 싶어.”

“언니는 잘할 거 같아요.”

장하양이 장난스럽게 머리카락 몇 가닥을 입에 물었다. 즉시 그녀의 눈빛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장하양이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말했다.

“이사님, 어제 그 여자 누구예요?”

“아라야 이거 봐. 나 소름 돋았어.”

“이거 진심 아녜요? 연기가 아닌데.”

“아하하, 여우주연상감이지? 그래서 노래는 어때?”

“노래도 좋고 베이스도 빵빵해서 마음에 드는데, 어떤 춤이 어울릴지 확 안 떠올라요.”

“그럼 하나 더 추천해줄까? 핑크팬서레스의 ‘저스트 포 미’라는 곡이야.”

검색하니 뮤직비디오 조회 수가 고작 수백만이었다. 이 정도면 빌보드 차트에도 안 올랐을 텐데, 장하양은 어떻게 이런 곡을 알고 있을까?

“하양이 진짜 팝송 좋아하는구나. 안 유명한 곡까지 찾아보고.”

“아하하.”

둘은 자막 영상을 찾아보았다.

[네 집으로 가는 길을 찾아냈어

내 다이어리 모든 페이지엔 네 이름뿐이야

네가 나랑 사랑에 빠질 거란 글을 어디에서 읽었거든

난 계속할 거고 그럼 너도 언젠가 내 마음을 알겠지?

네 머리카락이 내 베개 밑에 있어야 난 잠들어

그럼 네가 내 발밑에 장미를 두고 가는 꿈을 꾸거든

난 나조차 못 믿을 정도로 너에게 빠져 있어

네가 눈물을 닦은 땐, 오직 날 위해서만이지?

(나, 나, 나, 나, 나)

날 위해서만 우는 거지?

(날, 날, 날, 날, 날)

내가 무릎 꿇고 빌잖아

(무릎을, 무릎을, 무릎을, 무릎을)]

“…….”

“…….”

성필과 조아라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장하양이 어떻게 새롭고 신선한 가사를 계속 써내는가 싶었는데, 이런 식으로 머릿속에 정보를 인풋하고 있는 듯했다.

항상 새로움과 접하려는 강렬한 열망이 느껴진다.

“어, 언니. 그게, 좋긴 한데 분위기도 그렇고 좀 부담스러워요.”

“아하하, 그래? 로맨틱하지 않아? 이사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이렇게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나 진짜 공포영화 웃으면서 보는데, 이런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면 매일 비명 지를 자신 있어.”

“……아하하, 좀 과하긴 하죠?”

장하양과의 만남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다음은 정지음과 ‘오토마타’ 편곡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리카였다. 정지음은 과로로 소파에서 기절해 있었다.

“엄마, 추워요, 언제 와요…….”

정지음의 잠꼬대는 심상치 않았다.

아무튼 성필과 조아라가 조언을 구하자 리카는 순식간에 답변을 내놓았다.

“‘오네가이 달링’!”

[お願いダリン 見て聞いて

오네가이 다링 미테 키이테

부탁해 달링 보고 들어줘

欲しいのは 形のないもの

호시이노와 카타치노 나이모노

바라는 것은 형태가 없는 것

馬鹿にしないわ 見て聞いて

바카니시나이와 미테키이테

바보 취급하지 않을게 보고 들어줘

覗いてよ 瞳の奥の方

노조이테요 히토미노 오쿠노 호

들여다 봐줘 눈동자의 안쪽을]

“진짜 뒈지고 싶냐?”

“히도이(너무해)! 문화차별이야!”

“팝송이라고 팝송!”

“제이팝송이잖아! 봐봐, 이사님도 벌써 춤추고 있어!”

“어? 진짜?”

“아닌데.”

조아라가 리카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리카는 ‘오네가이 달링(부탁해 달링)!’이라며 성필에게 도움의 손을 내밀었다.

“…….”

“카무쿠나 달링(과묵한 달링)!”

별다른 성과가 없자, 과묵한 달링은 조아라를 데리고 작업실을 빠져나갔다.

그 후로도 성필과 조아라 콤비는 회사를 돌아다니면서 팝송을 수집했다.

“백스트리트 보이즈가 어때서! 나 어릴 땐 팝송하면 백스트리트 보이즈였다고! 아이돌이라고! 우상이라고! 나 늙었단 거야?! 백스트리트 보이즈가 어때서……!”

도중 손혜빈이 예상치 못하게 분노하는 사태가 있었지만, 어떻게든 무마할 수 있었다.

보다 못한 이재호가 A&R팀의 추천 목록을 추려 조아라에게 주었다.

목록을 받은 조아라는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하, 노는 것도 끝이네.”

“너 놀려고 나 데리고 다녔냐?!”

“아니면 내가 왜 귀찮게 돌아다녔겠어요? 좋은 시절 다 갔네.”

“나 프로듀서야! 바쁜 사람이야!”

“나도 프로듀서예요.”

조아라는 소파에 앉아 나른한 눈으로 추천 팝송 목록을 훑었다. 댄스에 적합한 곡들만 있어서, 웬만해선 이 안에서 후보를 선정해도 괜찮으리라.

조아라는 목록 너머로 성필을 흘끗했다.

“근데 아저씨는 내가 했으면 하는 팝송 있어요?”

“아니.”

“아저씨 팝송 많이 안 들어요? 적당한 거 하나라도 말해봐요.”

“네가 출 곡인데 어떻게 적당히 말해.”

“나랑 그렇게 돌아다니고 한 곡도 생각 안 난다고요?”

사실, 생각 안 나는 게 아니었다.

너무 많이 생각나서 문제였다.

성필은 전생에 조아라가 팝송에 맞춰 춤추는 걸 자주 보아왔다. 그래서 그녀에게 어떤 곡이 어울리는지도 안다.

‘근데 내가 바로 말해주기보다는 아라가 직접 찾았으면 좋겠어.’

전생의 조아라와 현재의 조아라는 엄연히 다른 사람이니까. 물론 취향이 겹치긴 하지만, 성필은 조아라의 자율성을 존중해주려…….

“그러지 말고 말해봐요. 이 회사에서 아저씨만큼 나 잘 아는 사람 있어요?”

“네 아이돌적인 이미지를 가장 잘 아는 거지, 널 잘 아는 건 아니야.”

“왜 단호하게 부정한대. 암튼 말해보라고요.”

조아라가 은근한 몸짓으로 성필의 팔을 쓸었다. 마치 삐친 아이를 달래는 것만 같았다.

“으이그, 내가 뭐 아저씨 선곡 가지고 놀리기라도 할까 봐요? 걱정도 팔자다. 너무 빼지 말고 빨리 말해봐요.”

“……‘배드’.”

“침대? 뭐, 침대 가자고요?”

“크리스토퍼의 ‘배드(Bad)’.”

성필은 조아라의 은근한 권유에 못 이겨 곡명을 뱉어냈다.

전생의 조아라는 현직 댄서들이 겨루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 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 조아라를 스타덤에 올렸던 곡이 바로 ‘배드’였다.

어찌나 인기가 있었는지 드라마에까지 출연해버렸으니.

“음.”

조아라는 곡을 찾아보곤 고개를 주억였다.

“괜찮네. 이걸로 할까요?”

“네가 정하는 거지. 잘 생각…….”

“이걸로 할게요. 배드.”

“진짜?”

“네. 으아, 드디어 끝났네.”

조아라는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그럼 바로 안무가 섭외해요. 아니다, 회사에 안무가가 잔뜩 있잖아요. 그 사람들…….”

“이렇게 간단하게 정한다고? 그래도 돼?”

“네. 아저씨가 괜찮겠다면서요.”

“내가 추천했다고 바로 하는 건…….”

“난 아저씨…….”

조아라가 성필의 눈과 귀를 차례로 가리켰다.

“눈이랑 귀, 믿어요. 아저씨가 나한테 제일 잘 어울리는 곡이라고 생각하면, 아마 그게 맞아요.”

성필은 그 말을 듣고 기뻐해야 할지 당황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어쩌면 조아라의 목적은 그냥 성필과 노는 거였고, 실은 원래부터 성필에게 추천받을 예정이었을지도 모른단 생각마저 들었다.

“먼저 유선 선배님한테 물어볼게요.”

조아라는 2층 연습실로 가 문을 열었다.

“선배님, 안무가님들 잠시만…….”

“불렛타임!”

서유선이 영상을 2배속으로 감은 것처럼 현란하고 빠른 춤사위를 선보였다. 그의 눈에서 어렴풋한 광기가 아른거렸다.

안무가들은 그새 기력을 전부 빼앗긴 듯, 죽은 눈으로 서유선의 춤사위를 구경만 하고 있었다.

“어? 후배님이다!”

서유선은 조아라를 발견하곤 두 눈을 번뜩였다.

“여기 와서 이것 좀 춰……!”

조아라가 문을 쾅 닫았다.

“이거 안무는 선배님 술 깨면 물어봐요.”

“그게 좋겠다.”

“그때까지 뭐하지. 리카랑 곡이라도 볼까요.”

시간 때울 걸 생각하던 조아라는 성필이 왠지 모르게 안절부절못한단 것을 눈치챘다.

“아저씨 왜요?”

“어, 아냐.”

“아니긴 뭐가 아녜요. 왜요.”

“…….”

성필은 누가 들을까 두렵단 듯 주변을 둘러보곤 조아라의 귀 가까이 입을 가져갔다. 그러자 조아라가 흠칫하면서 물러났다.

“어?”

“가, 갑자기 가까이 왔잖아요.”

“……뭐?”

그럼 네가 평소에 하는 짓은 뭔데?

성필은 목구멍 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그래, 조아라가 하는 것과 자신이 하는 건 엄연히 다르지.

성필은 그녀에게 귓속말하는 대신 목소리를 낮추고 속삭였다.

“저, 아라야. 네가 원하면 말인데…….”

“네.”

“…….”

“아 뭔데 그래요. 나 화나기 전에 빨리 말해요.”

“그, 혹시, 내가 안무 도와줘도 될까?”

“…….”

조아라는 새끼손가락으로 귀 파는 시늉을 하곤 반문했다.

“뭐라고요?”

“내가 안무 도와줘도 될까?”

“아저씨가요? 어? 뭔데, 진짜 뭔데요?”

놀라운 사실.

성필은 전생에 조아라의 ‘배드’ 안무를 익혔다.

왜 익혔냐고?

조아라가 시켰다.

그 기억은 성필의 신경 구석구석까지 전달되어 살아 있었다. 성필은 기억이 신경에까지 영향을 미친단 사실의 산증인이다.

물론 조아라가 성필에게 춤을 익히게 한 건, 성필이 춤의 재미를 깨달았으면 한다는 이유 같은 게 아니었다.

매우 사적이고 이기적인 이유였지만, 아무튼 성필은 조아라의 ‘배드’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출 줄 안다.

“나도 조금 아이디어가 있어서…….”

전생의 조아라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춤.

성필은 그것을 현재의 조아라에게 전달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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