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4화
약 10분 후, 서유선이 돌아왔다.
그는 결연한 표정으로 아까 못다 한 일을 마쳤다.
“서, 서유선입니다.”
“…….”
성필은 서유선의 뒤로 슬쩍 다가가 몇 마디 속삭였다. 그러자 서유선이 퍼뜩 소개를 덧붙였다.
“저, 전공은, 전공이랄 건 없고, 어반 댄스…… 방송 안무 오래 추고…… 취미로 여러 춤을…… 네.”
서유선의 맥없는 자기소개가 끝나자 안무가들이 조촐한 박수를 쳐주었다.
다들 표현만 안 했지 내심 실망했다.
아이돌은 어떤 사람인가 싶었는데, 외모만 훤칠하지 상당히 내성적인 성격이라 반짝임 같은 게 보이지 않았다.
“안무(按舞) 경험은 있으십니까?”
자칭 무브먼트 아티스트, 현대무용가 강한별이 물었다. 그가 말하는 안무란, 한 곡에 맞춘 전용 안무를 개발한 적이 있냐는 의미였다.
서유선은 괜히 주눅 들어서 답했다.
“제 작품이라고 할 만한 건 없, 없어요. 아이돌 곡에 맞춰 각색 같은 걸 한 적은 있긴 한데…….”
“음.”
강한별과 다른 안무가들은 난색을 표했다.
실상 이곳에 모인 이들 중 방송 안무에 정통한 사람들은 없었다. 대부분 극장에서 춤을 선보인 경험뿐이었다.
물론 방송 안무란 게 극장 춤과 맞닿아 있긴 했으나, 카메라를 고려한 안무는 또 다른 이야기였다.
‘유선 씨에게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강한별은 그 평가를 실시간으로 바꾸었다.
춤을 추는 것과 만드는 건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따지자면 서유선은 안무가가 아니라 플레이어란 이름을 붙여야 하리라.
나름 방송 안무에 일가견이 있겠지만, 다른 이들과 비교하여 크게 뛰어난 수준은 아닐 듯했다.
‘무엇보다 리더십이 없다.’
개성 강한 안무가를 여러 명 데려왔다.
이중 깃발을 쥐고 이끌어야 할 사람이 필요하다. 다들 그게 서유선이 되리라 믿었지만, 이제 보니 그럴 수 없을 듯했다.
서유선은 너무 소심했다.
리더는 사랑받는 것뿐 아니라 미움받는 방법을 알아야 했다.
쏟아지는 아이디어 중 맞지 않는 걸 거절하고 뭉개야 하는데, 서유선은 소심한 데다가 사람이 너무 좋아 보였다.
과연 이 십자가를 누가 져야 할까…….
‘내가 해야겠네.’
‘나네.’
‘아, 귀찮은데 내가 해야 하나?’
‘이번 프로젝트는 내가 이끄는 건가.’
‘내가 하는 수밖에.’
각양각색의 5인은 모두 자신이 리더가 되리라고 결심했다.
물론 이건 협업 프로젝트이지만, 다들 자신의 춤에 자부심이 있었다. 그렇지 않고선 전공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건 본인들의 춤을 대중과 미디어에 알릴 절호의 기회이니, 욕심이 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작업 방식은…….”
안무가들이 토론을 시작했다.
그 가운데에서 서유선은 어깨를 굽힌 채 눈치만 살폈다. 성필은 그걸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 * *
“아저씨!”
조아라는 회사로 오자마자 당차게 성필을 불렀다. 때마침 성필은 1층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어.”
“아 깜짝야. 왜 거기 있어요? 회의 끝났어요?”
“아니, 아직 하고 계셔.”
“빨리 가요!”
조아라는 새 장난감이 기대된단 듯 잔뜩 상기된 얼굴로 계단을 올랐다. 그에 비해 그녀를 따라 올라가는 성필의 얼굴엔 피로감이 가득했다.
“지금 뭐 얘기하고 있어요?”
“작업 방식.”
“아, 방금 시작했나 보네.”
“2시간 됐어.”
“네? 작업 방식을 2시간째 얘기하고 있다고요? 왜요?”
‘왜요’라고 물으면, 성필도 답변이 궁했다.
아이돌 안무 공동 작업 방식은 어느 형태로든 확립되어 있다.
한 명에게 맡기는 게 아니고서야, 안무를 총괄하는 퍼포먼스 디렉팅팀이 존재한다.
디렉팅팀이 여러 안무가의 시안을 종합하여 하나의 완성된 안무를 뽑아낸다. 즉, 여러 가지 안무 중 좋은 부분을 잘라내어 이어 붙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디렉터의 역량이 드러나기에, 디렉터 선정이 중요하다.
“그냥 하던 대로 하는 거 아니에요?”
“그게…… 아니, 직접 봐.”
성필이 연습실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마자 강렬한 논의의 열기가 조아라를 덮쳤다. 연습실 안에선 안무가들이 반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양쪽 반과 겉절이가 된 서유선, 이렇게 세 개로 나뉘어 있었지만 말이다.
“가로 엔터가 바라는 건 모든 장르의 조화로운 융합이에요. 저희들이 각자 짠 안무를 이어 붙이는 걸론 요구사항을 만족시킬 수 없지 않나요?”
모던 발레, 리리컬 댄스 전공 하희진을 위시하여 세 안무가가 주장했다.
그들은 블록을 쌓듯 모두 합심하여 동작 하나하나를 만들어가길 바랐다.
처음 그 말을 들은 조아라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면 어느 세월에 안무를 완성해……?’
생각해본 적도 없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조아라는 하희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점점 감화되어 갔다.
“여러분이 주장하는 방식으로 춤을 만들어봤자 엉성한 누더기만 나올 거예요.”
여러분, 즉 하희진에게 반대하는 이들이 답답하단 듯 표정을 찌푸렸다.
자칭 무브먼트 아티스트인 강한별은 조곤조곤 하희진의 주장에 반박했다.
“그런 식으로 해서 어느 세월에 춤을 완성합니까? 저희에게 주어진 시간이 무제한도 아니잖습니까.”
강한별을 위시하여 두 안무가는 하희진의 주장에 반대했다.
숫자로 보자면 하희진 세력이 셋, 강한별 세력이 둘이었다. 여럿이 주장하면 주장에 힘이 실리는 법이라, 강한별은 상당히 수세에 몰려 있었다.
“유선 씨도 말했다시피.”
강한별은 중립파인 서유선을 끌어들였다.
“아이돌 안무 협동 작업이란 건 개개인이 따로 만든 안무에서 시작합니다. 마지막에 디렉터가 하나로 만드는 거예요. 왜 그런 방식이 정착했겠습니까? 더 효율적이라서예요. 어째서 효율적인 방식을 버리려고 합니까?”
“그건.”
하희진은 이미 예상했단 듯 날카롭게 받아쳤다.
“안무가들이 같거나 비슷한 장르를 전공했을 때겠죠? 방송 안무 만드는 사람들이야 다 비슷하니까요. 그렇죠, 유선 씨?”
하희진 또한 서유선을 끌어들이려 했다.
서유선은 어느 쪽의 편도 들지 못하고 진땀만 뻘뻘 흘렸다. 저러다가 혼절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안색이 안 좋았다.
“저희는 놀랍도록 겹치는 면모가 없어요. 그런데 개개인이 안무를 만들어 그걸 합치면 어떻게 되겠어요? 통일성을 부여할 수 없단 말이에요, 통일성. 저희가 추는 모든 춤에 정통한 사람이 있을 리도 없잖아요.”
그 순간 서유선은 입술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그 입술 사이로 말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그때였다.
강한별 쪽에 합류해 있던 주킨 댄서, 신지욱이 손을 번쩍 들었다.
“댄스 배틀로 승부합시다!”
싸늘한 시선만이 쏟아졌다.
신지욱은 ‘헤헤’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고선 혼자 쓸쓸히 바운스를 탔다.
강한별과 하희진은 오래도록 논쟁했다. 도중에 다른 안무가들도 본인의 의견을 표출했고, 그럴수록 논의는 암흑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두 세력 모두에게 명분과 합리성이 있었다. 그랬기에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다. 조아라와 성필마저도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줄 수 없었으니 말이다.
그들의 대립은 프랑스 혁명 시기 평원파와 산악파의 대립을 생각나게 했다.
어느 한쪽의 목이 길로틴에 잘려 나가기까지 결판 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양쪽 다 길로틴을 꺼내 들려고 했다.
“유선 씨 생각은 어떠세요?!”
“예, 디렉터님 생각을 들어야겠습니다!”
하희진과 강한별이 서유선을 쳐다보았다.
서유선은 심장에 칼이 꽂힌 것처럼 몸이 굳더니, 느슨하게 풀어진 미소와 함께 말했다.
“저는…….”
둘은 광선처럼 빛나는 눈빛을 서유선에게 쏟았다. 서유선은 침을 꼴깍 삼키고 말했다.
“화장실 좀!”
서유선이 바람처럼 연습실을 뛰쳐나갔다.
모두 어처구니가 없단 듯 그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그에 성필이 나섰다.
“여러분, 잠시만요.”
조아라가 오고 나서도 논쟁은 약 한 시간 더 이어졌다. 더는 두고 볼 수 없던 성필이 중지를 선언했다.
“여러허부훈, 크흠.”
서유선이 뛰쳐나간 게 너무 충격적이라 자기도 모르게 쇳소리를 내버렸다.
성필은 목청을 가다듬고 다시 말했다.
“여러분은 협업 관계예요. 그리고 가로 엔터는 여러분 모두를 존중합니다. 다수결로 하자, 이런 속 편한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합의로 결론을 도출한 뒤, 하나가 되어 작업해주시길 바라니까요. 아쉽지만 그…….”
성필은 서유선이 뛰쳐나간 문 쪽을 곁눈질했다.
“디렉터님도 명확한 결론을 내릴 수 없으신 거 같으니까요. 오늘은 간단한 자리이지만 논의가 가열됐으니, 내일 다시 생각을 정리하고 모여주실 수 있으실까요?”
안무가들은 불만스러워하면서도 동의했다. 아까까지만 해도 팔팔하게 본인의 의견을 피력했지만, 그들도 꽤나 지쳐 있었다.
오늘은 서로 안면을 튼 것에 의의를 두어야 하리라.
“아라야, 안무가분들께 할 말 있어?”
“네.”
이번 프로젝트의 주인, 조아라가 나오자 안무가들이 주목했다.
그들은 조아라가 선 모습을 보자마자 그녀가 어떤 춤을 추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꽤나 춤을 오래 춘 것 같아, 절로 그녀를 존중하게 됐다.
조아라는 적어도 주는 안무만을 소화한 아이돌은 아닌 듯했으니.
“이 작업은 센세이션이 돼야 해요.”
조아라가 선언했다.
“사람들이 저희 춤을 보고 신기해했으면 좋겠어요. 신기해서, 춤을 배우고 싶단 마음이 들면 더 좋겠죠. 저는 춤이 대중적인 취미가 된 사회를 바라요. 록밴드들이 득세하고 악기 하나 배우는 게 특별하지 않은 취미가 된 것처럼, 춤도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이번 프로젝트가 그런 문화에 일조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조아라는 안무가들을 둘러보았다.
“여러분들의 어깨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요. 멋들어진 거 만들어주세요. 제가, 저희가 멋들어지게 출게요.”
지나치게 무거운 기대, 혹은 자리에 걸맞지 않게 우스꽝스러운 목표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안무가들은 조아라의 말을 흘려듣지 않았다. 조아라가 그들에게 부여해준 건 사명감이었다.
단순히 돈을 받았으니 춤을 만들어라. 그게 아니라 ‘춤의 대중화에 이바지하자’란 사명감을 주었다.
조아라의 말마따나, 신기하게 느껴서 사람들이 춰보고 싶단 생각이 드는 안무를 만들어 세계를 조금이나마 바꾸는 것.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조아라는 그런 사명감을 안무가들에게 부여했다. 이 프로젝트가 단순히 돈벌이로 끝나지 않도록.
* * *
“아저씨.”
텅 빈 연습실.
조아라는 성필과 나란히 앉아 프로틴 바를 씹었다.
“서유선 선배 이 일 할 수 있는 거 맞아요?”
“…….”
성필은 자신 있게 ‘어’라고 대답하고 싶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원통하다.
최애가 불신받고 있는 상황에서 시원하게 변호할 수 없다니.
냉혹한 이그제큐티브 프로듀서 성필이 보기에도 서유선은 협업에 걸맞지 않은 인물이었다. 아예 그 혼자 안무를 만들면 모를까.
“안무가로선 모르겠는데, 사람들을 이끄는 디렉터로서의 재능은 없으신 거 같아요.”
“음…….”
“내가 웬만해선 이런 말 안 하는데요. 새삼 아저씨 리더십 다시 보게 됐어요.”
“지금까진 뭐라고 생각했길래……?”
“음, 눈물이랑 신뢰 투 툴(Two tool)?”
“내가 너희한테만 그러지 다른 사람들한테는 안 그래. 설마 내가 다른 관계자들 앞에서도 울고불고 그러겠어?”
“아니었어요?”
아니다.
성필은 낙담하여 괜히 턱만 긁적였다.
“지금이라도 다른 디렉터 데려오는 거 어때요. 쌤이라던가.”
“설하?”
“민정 쌤이요. 백민정 쌤.”
“아, 민정이.”
“우리랑 오래 일했고, 방송 안무가로 경력 많고, 이 일에 적격 아니에요?”
“적격이긴 하지.”
그러나 서유선의 능력을 대체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성필이 서유선을 디렉터로 초청하고자 한 건 그의 방을 보고 나서이다.
서유선은 각종 춤에 박식하다. 그는 취미 수준이라고 했었지만, 이미 취미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세상 어떤 인간이 취미로 여러 장르 춤 작품들을 완벽히 외우고 뜯어고치기까지 하겠는가.
“근데 아라야, 우리 처음 퍼포먼스 디렉터 구했을 때 떠올려 봐.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이 없었잖아. 유선 씨는 적어도 지금까진 조건을 만족하는 유일한 분이셔.”
“그렇긴 한데…….”
“안무 제작 단계까지는 기다려보자.”
그때 연습실로 서유선이 들어왔다. 그는 기운 없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다가, 연습실에 안무가들이 없는 걸 알아차리자 당황했다.
성필은 몸을 일으켜 그를 맞았다.
“다른 분들은 돌아가셨어요.”
“아, 어?”
서유선은 시간을 확인했다.
생각보다 시간이 훨씬 많이 흘렀다.
서유선은 죄책감을 느끼는지 성필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유선 씨.”
성필은 그에게로 다가갔다.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이렇게 오신 것만 해도 큰 용기를 내신 거잖아요. 천천히 적응해가시면 돼요.”
서유선은 답이 없었다. 일부러 성필의 눈을 피하는 것 같기도 했다.
“미안해하실 필요 없어요.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다른 분들이랑 곧 친해지셔서 협업도 원활히 될 테니까요.”
“…….”
“유선 씨는 잘하실 거예요. 아니, 오늘만 같아도 좋아요. 다른 분들한테 말씀하시기 뭐하시면, 지금 저희한테 말씀해주세요.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요.”
서유선은 여전히 시선을 피하고만 있었다. 성필과 조아라를 대할 땐 이렇게까지 소심하지 않았는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조아라는 불만을 담아 성필을 보았다. 정말 이런 사람을 계속 디렉터로 쓰겠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저는, 한별 님 의견이 맞다고 생각해요. 다른 아이돌 안무 협업처럼, 개인이서 안무를 만들고 합치는 쪽이 낫다고요.”
“……!”
조아라가 놀랐다.
논의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서유선이 명확하게 본인 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그는 단순히 우유부단한 게 아니었다.
“물론 희진 님 의견도 일리가 있어요. 그런데, 오히려 여러 장르의 춤이 불연속적으로 이어지고 조화롭지 않을 때 얻는 이득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네……. 그게, 컨셉이 ‘자동인형’이니까요. 부자연스러운 것도 하나의 특징이 되는, 그런…….”
그 말엔 성필이 놀랐다.
설마 조화를 해치는 것 자체가 개성이 되리라곤 생각도 못 했다.
이걸 아까 자리에서 말했으면 어땠을까?
서유선이 강한별의 편을 들었으니 3:3 상황이 되었겠지만, 서유선의 주장에 감화되는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컨셉이 자동인형이니, 오히려 불연속적이고 부자연스러운 게 개성이 된다…….’
맹점이다.
안무 작업 자체에만 집중했던 안무가들과 달리, 아이돌로 활동했던 서유선이기에 낼 수 있는 의견.
성필이 감탄하여 칭찬하려던 순간.
“그러니까, 으…….”
서유선은 눈을 질끈 감고 등을 돌렸다.
“가,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도망가듯이 연습실을 나섰다.
성필과 조아라 둘 다 당황했다. 하지만 아까처럼 서유선이 도망가도록 두지 않았다.
성필은 달려서 서유선을 따라잡았다.
“유선 씨! 그 얘기 조금만 더……!”
서유선은 성필이 쫓아오자 더 빨리 달렸다.
“……?!”
성필은 그를 쫓을 생각도 못 하고 멈춰 섰다.
서유선은 계단을 날 듯이 뛰어 내려가 기어코 건물을 나가버렸다.
“이게 뭔……?”
“아저씨.”
조아라가 성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저거 보고도 계속 디렉터로 두고 싶어요? 대화 자체가 안 되잖아요.”
“…….”
“적어도 회의를 이끌어갈 사람은 필요하지 않아요?”
성필은 서유선이 도망간 방향을 멍하니 보곤 말했다.
“내일까지만 보자.”
그래도 안 된다면, 정말 무슨 수를 내야 할 것이다.
* * *
서유선은 가방끈을 꾹 부여잡으면서 도망가듯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가로 엔터와 멀어져가는 내내 자책했다.
‘난 대체 뭐 하는 놈이야…….’
성필에게, 클라이언트에게 그토록 무례하게 대하다니. 마음의 병이란 말로도 커버가 불가능한 짓거리였다.
하지만 서유선은 정말 어쩔 수 없었다.
왠지 모르지만, 성필을 대면하는 게 힘들었다. 그의 머릿속엔 오로지 도망가야 한단 생각만이 가득했었다.
서유선은 마음이 괴로워 자꾸만 입으로 ‘으으’ 같이 낮은 신음을 뱉었다.
그의 괴상한 행동을 멈추게 한 건 전화였다. 서유선은 액정에 적힌 이름을 보더니 조금은 진정할 수 있었다.
[야, 왜 연락이 없어.]
“하민아…….”
다키스트의 멤버 중 한 명인 하민이었다.
서유선은 한국에 온단 소식을 멤버들에게 알렸다. 두 명이 얼굴을 보자고 했고, 하민은 그중 한 명이었다.
[마쳤어?]
“어, 응. 지금…….”
[차 없지? 데리러 갈게.]
얼마 안 있어 마세라티 SUV가 우렁찬 엔진 소리와 함께 거리에 멈춰 섰다.
창문이 내려가고 하민이 손을 흔들었다. 서유선은 살았단 듯 재빨리 조수석에 탔다.
“차 좋은 거 타네.”
“좋긴 뭐가. 근데 좋긴 하지?”
“어쩌란 건데.”
서유선은 격의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젊은 시절의 기억과 감정은 평생토록 사라지지 않는다. 하민과의 관계도 그러했다.
둘은 이제 아저씨라고 불릴 나이가 되었지만, 둘의 관계는 어렸을 때와 같았다.
함께 다키스트로 활동했던 찬란한 시절과 달라지지 않은 우정을 지녔다.
“오랜만에 거기 가자. 국밥집.”
“아, 거기?”
하민은 고개를 끄덕이곤, 서유선의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액섹을 밟았다.
둘이 온 곳은 KS 엔터 근처에 위치한 국밥집이었다. 다키스트 멤버들끼리 자주 왔던 곳이다.
음식을 주문한 둘은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벽 한 편에 다키스트 멤버 전원의 사인이 걸려 있었다.
서유선은 추억에 젖어 눈빛이 몽롱해졌다. 그러나 하민은 그가 추억에 젖을 시간을 주지 않았다.
“야, 받어.”
서유선의 잔에 소주가 가득 채워졌다.
“나 내일 일 있어.”
“조금만 마시면 되지.”
오랜만에 만났는데 술이 빠질 수 없었다.
서유선은 하민의 권유에 못 이기는 척 소주를 쭉 들이켰다. 몇 잔 마시지 않아 그의 눈동자가 술에 잠겨 흔들렸다.
서유선이 물었다.
“요즘 잘 지내?”
“잘 지내지. 나야 워낙 낙천적이잖냐.”
“솔로 활동은 할 만하고?”
“너희들이랑 있을 때보다 더 편해.”
서유선은 씁쓸하게 ‘다행이네’라고 말했다. 그에 하민이 푹 한숨을 쉬었다.
“네가 그러면 내가 뭐가 되냐? 편하기야 편하지. 재미는 없지만. 아, 맞다. 나 몇 개월 전부터 복싱 배우기 시작했다?”
“복싱? 네가? 왜?”
서유선은 복싱이란 말에 하민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민은 체격이 작은 편인데다가, 옛날부터 근육이 발달한 몸은 아니었으니까.
“내 조카가 복싱을 배우거든.”
“조카?”
“정훈이 있잖아. 내가 자주 얘기했지 않나?”
“아.”
그러고 보니, 하민은 자주 조카 이야기를 했었다.
성질이 사나워서 하민의 누나가 힘들어했다던가.
그 개구쟁이가 어느새 커선 복싱을 배운다니…….
“걔도 이젠 중학생이야. 얼굴 볼 겸 걔가 복싱 배우는 체육관에 갔거든. 근데 걔가 스파링을 하더라, 성인이랑.”
하민은 갑자기 목소리가 높아지고 말이 빨라졌다. 그는 관심 있는 주제가 나오면 항상 이렇게 변했다.
“그 어린애가 성인한테 쨉이나 되겠냐? 그냥 뒈지게 처맞더라고. 불쌍해서 원.”
“아…….”
“근데, 걔 눈빛이 말야.”
하민이 자신의 눈을 검지로 가리켰다.
“전혀 죽질 않아. 계속 처맞고 있는데도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상대를 보는 거야. 와, 진짜 온몸에 소름이 돋더라. 난 누가 와서 주먹만 들어도 바로 깨갱할 텐데. 나보다 나이는 어려도, 그놈 참 깡이 대단하다 싶었어. 그래서…….”
하민은 소주를 쭉 들이켰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더라. 난 아이돌이지만, 하핳! 이 나이에도 아이돌이라고 불리지만, 의외로 소심해서 사람 눈을 제대로 못 봐.”
“알아.”
“어, 알지? 어릴 때부터 작아서 괴롭힘을 많이 당해서 그런가. 길거리 저편에서 사람이 걸어오기만 해도 겁먹고 그러는데, 복싱 배우면 좀 달라질까 싶었어.”
“그럼, 막 경기도 나가고 그래?”
“내가 경기를 어떻게 나가! 이 나이에 경기 나가면 진짜 죽어! 뭐, 나갈 수도 없고, 실력도 없고…….”
“그럼 체육관 사람들이랑 모의 경기?”
서유선은 그저 대화를 이어나가기 위해 계속 질문을 던졌다. 복싱 같은 건 관심도 없었다.
그런데.
“아니, 모의라도 경기 자체를 안 해. 단련만 하지.”
“왜?”
그 질문 하나가, 서유선의 마음가짐과 정신을 완전히 바꾸었다.
“난 아이돌이니까.”
“……어?”
“눈에 멍이라도 들어 봐. 아니면 내가 아픈 체라도 해봐. 팬들이 마음이 얼마나 아프겠어? 뭐, 복싱이 취미라면 좋아하는 팬들도 있겠지만. 팬들은 내가 아픈 걸 좋아하진 않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경기는 안 해.”
“…….”
“한 명의 팬이라도 있다면, 난 팬이 슬퍼할 일은 단 하나도 안 하고 싶거든.”
그 순간 서유선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성필이었다. 다키스트가 활동할 시절부터 장막이어서, 팬미팅까지 참석할 정도로 열성적인 팬.
심지어 지금도 다키스트 팬 커뮤니티에서 활동 중인.
서유선의.
‘내 팬…….’
“진짜 복싱하려면 아이돌 관두고, SNS 계정 다 지우고, 정말 일반인으로 돌아간 다음에 해야지.”
* * *
다음 날.
서유선은 뭔가를 감싼 종이 뭉치를 품에 안고 가로 엔터로 왔다. 휴게실로 들어온 그는 그 물건을 테이블 위에 두고 빤히 바라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곧 작업 시간이다.
서유선이 종이 안에 든 걸 꺼내려던 때, 휴게실 문이 열리고 조아라가 들어왔다.
조아라는 서유선을 보더니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고서 정수기로 다가가 물통에 물을 받았다.
서유선은 조아라가 있는 게 껄끄러워 물건을 꺼내지 않았다.
“선배님.”
“아, 네? 네.”
“힘들면 굳이 버틸 필요 없어요.”
“네?”
“선배님이 못 하겠다고 해도 아저씨는 이해해줄 거예요. 그, 문제가, 아니, 아픈, 암튼, 그런 사람한테 누가 뭐라고 하겠어요.”
서유선은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선배님이 어떤 일 겪었는지 알아요. 아저씨한테 들었어요.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큰 용기 낸 거잖아요. 뭐라고 탓하는 게 아니라, 선배님이 무리하지 않길 바라서 말하는 거예요. 아니면 적어도 커뮤니케이션 담당을 따로 두던가요.”
“디렉터 자리에서 내려오라는…….”
“거기까지는 모르고요.”
조아라는 서유선을 배려했다. 그가 상처받지 않도록 최대한 말을 골랐다.
하기 싫은 걸 억지로 의무감 때문에 하는 기분은 조아라도 익히 알았다.
서유선이 왜 이 일을 받아들였는지는 모른다.
재활훈련 하는 기분으로 했든, 춤에 대한 사랑 때문이든, 안무가로서 꿈이 있든, 아무래도 좋았다.
중요한 건 서유선이 협업 프로젝트를 견뎌낼 힘이 없단 사실이었다.
“힘들면 버틸 필요는 없단 뜻이에요. 자기를 괴롭게 만드는 일에 억지로 매달리는 건, 좋은 선택이 아니잖아요.”
옛날의 다키스트가 그러했듯이.
“힘들 때 그만두는 것도 현명한 거라고 생각해요.”
서유선은 조아라가 배려해준단 걸 알았다. 그래서 마음이 약해졌다.
어제의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게 보였으면, 까마득한 후배가 이런 말을 하겠는가. 괜히 미사토가 서유선을 붙잡았던 게 아니다.
‘나는 미사토가 옆에 없으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히키코모리에 사회 부적응자, 혹은 도피자.
서유선은 그 정도일 뿐이다.
그도 알았다.
“오히려 아저씨가 선배님한테 미안해하던데요.”
그래, 그도 알았다.
그가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지.
하지만.
“후배님, 그치만, 저는, 저는, 아이돌이에요.”
“……아이돌인 게 왜요?”
“저는…….”
서유선은 종이에 감싸져 있던 와인 병을 꺼냈다. 코르크가 아닌 캔으로 닫혀 있는 와인이었다.
서유선은 와인 뚜껑을 비틀어 간단히 개봉하곤, 병을 강하게 붙잡았다.
“저는 단 한 명의 팬이라도 남아 있으면, 비참해질 수 없어요. 비참해져선 안 돼요. 이대로 그만둬 봐요…….”
서유선이 스스로를 비웃었다.
“박 이사님이 저한테 얼마나 실망하시겠어요…….”
아이돌은 언제나 태양처럼 빛나야 한다.
우상이 되어야 한다.
자신을 동경하는 팬을 위해서.
“아이돌은 팬이 있어서 존재하는 거니까…….”
서유선은 눈을 질끈 감고 와인을 입가로 가져갔다.
“팬이 한 명이라도 있는 한, 아이돌을 그만둘 수 없어요.”
서유선은 빛나야만 한다.
* * *
연습실 분위기는 냉랭했다.
하희진과 강한별은 합의할 생각이 없는 듯 저마다 의견을 같이하는 이들과만 함께 모여 있었다.
공식적인 회의가 시작되면 또 서로를 향해 이빨을 드러낼 기세였다.
그 순간 서유선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다키스트가 왔다아아아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