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화
‘아오아’ 사전 미팅은 간단하게 인터뷰와 출연자 간 대화를 녹화한다.
지유는 촬영 스튜디오에 가장 먼저 도착하여 준비했다. 기다리는 동안 스태프들에게 인사하며 간단한 선물을 돌리기도 했다.
아이돌이 직접 살갑게 인사해오자 스태프 사이의 분위기가 좋아졌다.
‘촬영 분위기는 아이돌이 있는 현장이 가장 좋다더니, 정말 그러네.’
‘더 스튜디오’는 아이튜브 채널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기획사 산하 채널이었다.
그 기획사에 최근 입사하여 더 스튜디오로 배정된 작가는 새삼 아이돌이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됐다.
아이돌은 사랑받는 게 존재 목적인 직업. 그렇기에 어디에서나 살갑고 다정한 분위기를 풍긴다.
글로브의 지유를 보니 정말 그러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 넵.”
작가는 지유에게서 자그마한 과자와 음료를 받았을 뿐인데도 말을 더듬었다.
지금까지 아이돌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건만, 오늘부로 글로브 팬덤인 ‘어스’가 될 것만 같았다.
작가는 지유가 준 음료가 빨리 줄어들까 조심조심 아껴 마셨다.
‘여기에 아이돌이 두 명 더 온다는 거지.’
아이돌에 관심이 없지만, 그는 작가로서 사전 조사를 마쳐두었다.
이후로 오는 건 소녀연맹의 조아라, 케이어스의 진저다. 두 그룹이 얼마나 유명한지는 말하면 입 아플 수준이다.
‘지유 씨만 있어도 촬영 분위기가 이렇게 좋은데, 남은 둘이 오면 어떨까.’
10분 후.
지유 다음으로 도착한 진저는 스튜디오 구석 자리에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인사는 들어올 때가 전부였다. 진저는 지유처럼 스태프들 사이를 돌아다니면서 인사하긴커녕, 관심도 없는지 아예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아이돌도 케바케, 사바사구나…….’
작가는 은근한 실망을 숨겨야만 했다.
* * *
‘쟨 뭐야?’
지유는 아닌 척 진저에게 관심이 많았다.
경쟁자라 관심을 안 가질 수 없긴 했으나, 진저의 태도는 특이했다.
진저는 들어오는 순간부터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는 것만 같았다. 심지어 경쟁자인 지유에게도 말이다. 여태껏 계속 진저를 몰래 관찰했기에 알 수 있었다.
‘나를 한 번도 안 보잖아?’
보통은 인사할 각을 재려고 흘끗 보기라도 할 텐데, 인사도 들어올 때 했던 게 전부였다.
지유와 진저의 매니저만 신나서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는 중이다.
‘사교성이란 게 없나?’
물론 지유가 먼저 다가가도 된다. 하지만 진저가 관심의 파편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니 지유도 오기가 생겼다.
진저는 그야말로 완벽하게 지유를 무시하고 있었으니까.
‘일부러 무시하는 건…… 아니겠고.’
애초에 일부러 무시할 이유가 없다. 진저의 성격이 원래부터 저렇게 생겨 먹은 것이리라.
그래, 진저가 어떤 인간인지는 알겠다.
하지만 이 상황은 좀 특수하다.
지유는 우연히 한 장소에서 만난 타인이 아니라, 곧 자웅을 겨뤄야 할 경쟁자이지 않은가.
자신이 누구와 붙을지 궁금해하는 건 인간으로서 당연한 본능이다. 그런 본능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건…….
‘어떤 상대라도 상관없다?’
‘아오아’의 우승자 선정 방식은 경연 치곤 특이하다. 경쟁자들끼리 우승자를 뽑으니 말이다.
호의를 쌓아 표를 사려고 할 만도 하다.
그런데도 진저는 호의를 사려고 하긴커녕 반감만 부추기는 중이다.
‘실력으로만 인정받을 수 있다고 확신하나?’
만약 그러하다면 참으로 오만했다.
당연히 지유는 진저가 어떤 아이돌인지 안다.
여러 명 가운데 세워두어도 확연히 눈에 띄는 아우라를 지니고 있다. 아이돌 댄서로서 그 수준은 쉽게 타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아마 연습생이 되기 전부터 춤을 오랫동안 배워온 거겠지.
그러니 보석들만 모였다는 KS 엔터의 연습생 가운데서 데뷔조로 뽑히고, 케이어스의 메인 댄서로 자리매김했겠지.
‘어떤 춤을 배웠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저의 춤은 미려한 곡선을 그리하는가 하면 어느 순간 강렬한 직선을 뽐내곤 했다. 그녀가 숙달한 게 형식에 치중한 춤인가, 표현에 치중한 춤인가도 알 수 없었다.
지유는 단지 진저가 지닌 춤의 깊이에 감탄하기만 했었다. 진저가 대단한 건 알겠지만…….
‘그래도 이런 취급은 좀.’
지유는 오랜만에 호승심이 생겼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진저에게 다가갔다. 진저가 끝까지 무시할 속셈이라면, 먼저 다가가 존재를 각인시켜줄 생각이었다.
그때 스튜디오 문이 열리고 마지막 출연자, 소녀연맹의 조아라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소녀연맹 아라입니다.”
“아라 씨 왔슴미까!”
진저는 지유를 무시했던 게 거짓말인 듯 용수철처럼 튀어 올라 조아라에게 쇄도했다.
“……?”
지유는 얼이 나갔다.
* * *
촬영이 시작되기 전, 진저는 귀찮도록 조아라에게 붙어왔다.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건 알겠지만, 조아라는 진저가 귀찮을 지경이었다.
“박 이사님이 안 오셨다니, 아쉽슴미다.”
무엇보다 드문드문 성필의 이야기를 꺼내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하긴, 소녀연맹은 유명함미다. 가로 엔터도 커졌슴미다. 프로듀서인 박 이사님이 한가하게 아라 씨를 따라다닐 순 없슴미다.”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조아라는 맞는 말을 듣고 기분이 나빠져서 바로 반박했다.
“원래 아저씨가 나 따라오려고 했거든? 근데 진짜 중요한 일 있어서 간 거야. 계속 나 따라오려고 했는데 내가 계속 가라 가라 해서 겨우 갔다고.”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저는 아라 씨가 가끔 부러웠슴미다. 프로듀서라는 높은 사람이 스케줄마다 따라다니면서 보살펴주지 않았슴미까. 저도 정호환 이사님이 스케줄마다 따라오면 좋겠다고 생각했슴미다.”
‘우리 회사 중소라고 꼽 주는 건가?’
“아라 씨, 오늘 저 어떻슴미까? 예쁘지 않슴미까? 가죽바지임미다, 가죽바지. 힐도 신었슴미다. 이거 9cm임미다. 저 거인임미다.”
“어, 너 원래 거인이었어.”
“헤헤, 아라 씨가 어린애처럼 보임미다.”
‘진짜 얘를 어떡하면 좋지?’
진저는 못 보던 사이 많이 바뀌었다.
가장 달라진 점이라고 하면 역시 자신감이었다. 옛날에는 왠지 모르게 위축된 분위기가 보였었는데, 이젠 해맑음만이 보인다.
회사에서 대우가 꽤 좋은 모양이다.
‘옛날에도 대하기 힘들었는데…….’
이렇게 해맑게 붙어오니 이전보다 훨씬 상대하기 거북했다.
특히 그녀와 바로 옆에 있으니 신체가 너무 비교되어, 당장이라도 뒤돌아서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다.
‘얘 말대로 진짜 내가 어린애 같잖아.’
조아라는 벌써부터 피곤했다.
그때 진저의 뒤로 엉거주춤 서 있는 지유가 눈에 들어왔다. 조아라는 잘됐다 싶어 그녀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드디어 관심을 얻어낸 지유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녀는 조아라에게 다가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안녕하세요 아라 씨. 글로브 지유입니다.”
“말씀 낮추셔도 돼요 언니.”
“방금 만났는데?”
지유가 능숙하게 반말을 쓰자 조아라와 지유가 동시에 웃었다.
조아라는 웃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유가 그녀의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조아라는 지유의 면면을 살폈다.
‘이 인간도 만만치 않네.’
지유는 한 가지 일로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 유명해졌었다. 글로브가 해외로 뮤직비디오 로케이션 촬영을 갔을 때 팬이 찍은 영상 때문이었다.
지유가 거리를 걸을 뿐인 1분 남짓한 영상의 조회 수는 고작 며칠 만에 조회 수 수백만에 달했다.
화제의 이유는 지유의 얼굴과 비율이었다. 그 어떤 보정 없이 촬영됐음에도, 그녀는 본인이 어째서 아이돌인지 만천하에 알렸다.
‘8등신 되겠네…….’
이유이가 동양인은 평균적으로 7.3등신이고 서양인은 평균적으로 7.5등신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지유는 서양인에 더 가까우리라.
조아라는 본인이 동양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려고 노력했다. 애초에 지유나 자신이나 얼마나 차이 난다고 주눅 들겠는가.
모델은 웬만해선 9등신이다. 모델에 비하면 아이돌끼리 우열을 가릴 필요는…….
“왜 그러심미까?”
조아라는 진저를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바꿀 수 없는 걸 생각하면서 끙끙대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조아라는 지유와의 악수를 끝내면서 물었다.
“발레 배웠다면서요?”
“오, 나 만나기 전에 위키라도 읽었어?”
“아저씨가 말해줬어요.”
“아저씨……?”
“박성필.”
“……?”
“아저씨요.”
“아, 네.”
지유는 순간 당황해서 존댓말까지 나왔다.
‘박 이사님’도 아니고 ‘박성필 이사님’도 아니고 그냥 ‘박성필’이라니. 심지어 그 호칭이 아저씨라니.
지유는 조아라가 별종이라도 되는 듯 보았다.
“미팅 시작할게요! 모여주세요!”
셋은 이야기를 멈추고 PD가 있는 쪽으로 쪼르르 갔다. 가는 도중 진저가 물었다.
“그런데 급한 일이 뭠미까?”
“뭐가.”
“박 이사님이 안 오신 이유 말임미다. 이전에 통화했을 때 저한텐 온다고 하셨슴이다.”
성필이 사전 미팅에 참가하는 걸 조아라가 허락해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런데 성필은 그새 진저에게 가겠다고 한 건가.
조아라는 작게 혀를 차며 답했다.
“마중.”
* * *
성필은 ‘오토마타(가제)’를 들으면서 약속 상대가 도착하길 기다렸다.
공항 입국장은 항상 붐비며, 매니저 출신에겐 언제나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곳이었다.
입국이나 출국 때마다 팬들과 육탄전을 벌이기도 하니 말이다.
성필은 평온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내심 긴장했다. 혹여나 그가 온단 소식을 누군가 접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말이다.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방금 비행기가 도착했단 사실이 전광판에 표시됐다. 얼마 안 있어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상대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고만고만한 인파 속 확연하게 키가 큰 이가 있었으니까. 성필은 이어폰을 벗고 준비해두었던 피켓을 흔들었다.
그러자 상대도 성필을 발견했는지 인파를 헤치며 다가왔다.
“다키스트으……!”
성필은 누가 들을지 몰랐기에 아주 작게 환호했다. 그것을 본 약속 상대, 서유선이 어색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에 성필이 더 열광하면서 피켓을 흔들었다.
[다키스트 서유선 입국 환영!]
서유선은 마냥 싫지는 않은지 웃음을 보여주었다. 그에 성필도 미소를 지으면서 장난을 끝냈다.
“먼 길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먼 길이라뇨, 제 고향인데요 뭘.”
그래, 고향이다.
몇 년 만에 밟는 고향.
여기저기서 익숙한 언어가 들려왔다. 태어날 때부터 들었고, 가장 오랫동안 사용해온 언어가.
하지만 서유선은 그게 어색했다.
그는 이제 한국어보다 일본어가 더 익숙했다.
“가시죠.”
성필은 서유선의 안색이 살짝 안 좋은 것을 재빨리 캐치해냈다.
그는 프로젝트 퍼포먼스 디렉터 일을 받아들이긴 했으나, 마음의 병이 완전히 나은 건 아니었다.
서유선은 성필의 배려를 기껍게 받았다.
둘은 재빨리 공항을 빠져나가 차에 올랐다. 기다리고 있던 매니저가 익숙하게 차를 몰고, 성필과 서유선은 뒷좌석에서 간단한 담소를 나누었다.
아니, 그냥 담소가 아니었다.
서유선은 일하러 온 거였으니까.
“‘오토마타’ 들어봤어요.”
“어떠셨어요?”
“좋았어요. 빈말이 아니라, 진짜 좋았어요.”
“아, 다행이네요.”
성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혹여나 그가 안 좋다고 할까 봐 내심 마음을 졸였었다.
“그런데.”
서유선은 걱정하는 기색을 내비쳤다.
“제가 좋아하면, 오히려 안 좋은 게 아닐까 싶어서…….”
“네? 무슨 뜻…….”
“제가 아이돌 퍼포먼스 카피를 자주 하긴 하는데요, 그게, 실은.”
서유선은 자꾸만 말을 더듬거나 끌었다. 사람 짜증 나게 만들기 딱 좋은 버릇이었지만, 성필은 잠자코 들었다.
“제가 요즘 나오는 곡들 들으면, 그다지 좋단 생각이 안 들어서요……. 아이돌 노래 듣는 것도 계속 듣다 보니 듣기 괜찮아졌단 느낌이지, 한 번에 확 끌리거나 하진 않아요.”
성필은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서유선은 한때 정점에 이르렀던 아이돌이고, 대중문화의 최선두를 달렸던 아티스트다.
그러나 그건 젊은 때의 일일 뿐. 그의 감각도 결국은 옛것이 되어 현재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변화는 성필이 항상 경계하는 것이었다. 새로운 음악을 듣고 ‘이딴 걸 왜?’라고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대신 어째서 사람들이 그런 음악을 좋아하는지 이해하려고 애썼다.
성필은 비틀즈와 비치 보이스의 음반과 사진을 불태우며, 그들을 애들이나 홀리는 경박한 뮤지션이라고 욕했던 과거의 기성세대처럼 되고 싶지 않았다.
몸은 늙어도 마음만은 젊길 바란다.
“요즘 아이돌 곡들이 꽤 전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긴 하죠. 옛날 곡들은 훨씬 단순하고 멜로디컬했는데, 그렇죠?”
“하하, 다키스트로 활동했던 제가 할 말은 아니긴 하지만요…….”
KS 엔터의 아이돌들은 항상 파격적이었다. 곡이 나오면 대중들은 항상 ‘이게 뭐야?’란 반응이었다.
KS 엔터는 유행을 이끌었지만, 다르게 말하면 대중을 배반하기도 했었다.
다키스트는 KS 엔터가 보여주는 파격성의 시초격이었다. 다키스트 이전과 이후로 아이돌 퍼포먼스의 역사가 바뀌었다고 말할 정도이니.
“그러니까, 제 귀가 꽤 구식이에요. 아, ‘오토마타’가 구식이란 건 아닌데요! 그, 아니, 아니에요. 잊어주세요.”
“옛날 노래 스타일이라 좋게 들린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진짜 좋은 노래라서 좋게 들린다고 생각하시면 어떨까요?”
“……그럴까요?”
“네. 좋은 곡은 시대와 귀를 안 탄다잖아요. ‘오토마타’가 좋은 거겠죠. 그래서, 유선 씨가 좋게 들은 곡이란 거죠? 안무는 생각나셨어요?”
서유선은 무릎을 검지로 톡톡 두드렸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뻐끔거렸으나, 나온 건 헤픈 웃음뿐이었다.
“그, 일단, 다른 안무가분들을 만나보고 말씀드릴게요. 저 혼자 하는 일이면 모르겠는데, 이번 프로젝트는 협업이니까요.”
“네, 벌써부터 신뢰가 가네요.”
“아, 네, 감사합니다.”
“그리고.”
서유선은 긴장했다.
서글서글했던 성필의 표정이 갑자기 진지하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아직 아무 일도 하지 않았지만, 서유선은 본인이 실수라도 했나 싶어 불안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릴게요. 용기 내주셔서요. 또, 공항 패션 잘 어울려요. 은퇴하시기 직전에 스타그래프 계정 만드셨었죠? 제가 찍어드릴 테니까 올려보실래요? 장막이들이 좋아할 텐데.”
“……하하.”
서유선은 긴장했던 게 우습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성필은 장막(다키스트의 팬덤)이라고 했던가. 그게 사실이든 서유선의 비위를 맞추기 위함이든, 서유선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직도 장막이들이 있을까요? 있더라도 아직도 저를 좋아하진 않겠죠…….”
“있어요. 제가 아직도 팬커뮤 활동하고 있어서 알아요.”
“……???”
“사진, 찍으실래요?”
찍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니 가로 엔터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성필은 시간을 확인하며 말했다.
“예상보다 빨리 도착했네요. 3층 연습실에 프로젝트 함께 하실 분들 모이기로 했거든요. 먼저 도착하신 분들이랑 담소라도 나누실래요, 아니면 휴게실에서 쉬실래요?”
성필은 서유선이 썩 좋은 사교성을 지녔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웬만해선 그가 먼저 도착한 사람들과 친분을 다졌으면 했지만, 그에겐 힘든 일이리라.
“아, 저는, 어…….”
서유선은 갈팡질팡하다가 나지막이 말했다.
“여, 연습실로요.”
그 나름 용기를 낸 것이었다.
성필은 그의 용기를 존중하며 연습실로 안내했다. 성필은 계단을 타고 올라가면서 프로젝트에 관해 설명했다.
“원래 아라랑 같이 오리엔테이션을 했어야 했는데, 아라가 스케줄이 있어서 저만 오게 됐네요. 제가 먼저 프로젝트의 목적이랑 컨셉, 곡, 아이디어에 관해 설명할 건데…….”
그때 성필의 전화가 울렸다.
확인하니 조아라였다.
촬영이 끝날 시각인가?
성필은 서유선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어, 아라야 왜.”
조아라는 굉장히 흥분해 있었다.
목소리와 어조가 거칠했다.
그 흥분되고 거친 목소리의 대부분은 진저를 깎아내리는 것이었다.
성필은 폰에서 귀를 떼어내고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 폰을 귀에 댔다.
[아저씨가 그년 오냐오냐하니까 나한테 지랄하는 거 아니……!]
성필은 다시 귀에서 폰을 떼어냈다.
‘……뭔 일이야?’
진짜 무슨 일인데?
* * *
진저가 숙소로 돌아왔다.
때마침 현관 복도에서 워킹 연습을 하던 진소유는 의도치 않게 진저를 마중한 게 되어버렸다.
진소유는 모델 워킹으로 진저에게 다가갔다.
“잘하고 왔어?”
“그럭저럭이었슴미다…….”
진저는 기운이 없었다.
그녀는 가장 아끼는 ‘셀린느’ 운동화를 아무렇게나 벗어두곤 터덜터덜 방으로 향했다.
“메이, 신발은 정리해야지.”
진저가 입을 비쭉 내밀곤 다시 돌아와 신발을 신발장 안에 놓았다. 그리고서 이번엔 성큼성큼 화난 채 방으로 돌아갔다.
진소유는 쾅 하고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저의 태도에 화가 난 건 아니었다.
뭐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음.”
뭐 있었나 보지.
진소유는 하던 워킹 연습을 계속하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단 듯 진저의 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침대에 엎드려 있던 진저가 몸을 벌떡 일으키곤 역정을 냈다.
“왜 노크 없이 들어오는 검미까! 프라이버시도 모름미까!”
“메이, 무슨 일 있었어?”
진소유가 침대에 엉덩이를 걸쳐 앉았다.
진저는 고개를 홱 돌리고 작게 ‘아무것도 아님미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진소유가 빤히 응시하자, 진저가 투덜대듯 말했다.
“아라 씨랑, 아라 씨가, 화냈슴미다…….”
“왜?”
“그냥 이야기하다…….”
“너 설마 우리한테 하는 것처럼 아라 씨한테 한 거야?”
“…….”
“맞나 보네.”
진저는 케이어스의 막내다.
막내답게 사랑을 듬뿍 받고 지냈다. 물론 옛날에는 있으나 마나 한 멤버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매애가 생겨났다.
그리고 진저가 사랑받는 법이란 간단했다.
언니들에게 조금 건방지게 구는 것이다. 그럼 언니들은 진저를 귀여워하면서 장난스럽게 혼내곤 했다.
예를 들어 에리카보고 자신이 키가 더 크다고 하거나, 김민주보고 춤을 자신이 조금 더 잘 추는 것 같다고 하거나, 진소유 보고 자신이 더 예쁘다고 하는 등, 악동처럼 행동했다.
그럴 때마다 언니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응, 진저는 키가 커서 예쁘네.’
에리카는 따스한 미소와 함께 진저를 쓰다듬어줬고.
‘어쩌라고.’
김민주는 어처구니없단 듯, 그러면서도 애정이 담긴 웃음을 보여주었고.
‘너 제정신이니?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진소유는 진저를 미치광이로 취급했지만, 어쨌거나 진저는 언니들의 귀여움을 받았다.
그런 진저의 태도는 멤버들에게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케이어스를 담당하는 매니지먼트 1팀의 팀장과 팀원들, 정호환, 프로듀싱 파트 직원들에게도 그러했다.
그럴 때마다 그들은 진저를 우쭈쭈 귀여워해 줬으니, 진저의 기세는 더욱 살아났다.
어느 심리학자가 인간의 성격은 삶에서 택해왔던 이로운 선택들의 총합이라고 했다.
폭력적인 인간은 폭력적인 선택을 했을 때마다 이익을 보았고, 소심한 사람은 괜히 나서지 않을 때마다 이익을 보았고, 서글서글한 사람은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갈 때마다 이득을 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저의 건방짐은, 막내로서 귀여움받는 방법들을 익힌 결과이다.
문제는 그걸 조아라에게 그대로 썼단 점이다. 성필에게 건방졌다면, 성필은 아빠 미소와 함께 공중제비를 돌면서 기뻐했을 테지만 어쨌든…….
“저 어떡함미까. 아라 씨한테 미움받았슴미다…….”
진저는 한동안 진소유에게 한탄했다.
종국엔 눈물을 훌쩍였다.
진저는 조아라의 팬이다. 거기에다가 한국에 와서 처음 사귄 친구, 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의 관계였다.
비록 연락은 뜸했지만, 진저는 조아라와의 관계와 추억을 보물처럼 간직해왔다. 조아라의 영상을 보면서 내적 친밀감마저 잔뜩 올려놓았다.
그런데 조아라에게 짜증 섞인 일갈을 얻어먹었으니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제 어떡하면 좋을지 모르겠슴미다…….”
진소유는 진저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다가, 그녀가 울다가 지쳐 잠들 때까지 옆에서 자리를 지켜주었다.
진저는 눈물 자국이 새겨진 채 눈을 감았다.
곧이어 그녀의 고른 숨소리가 방 안에 퍼졌다.
“하아.”
진저가 겨우 잠들자, 진소유는 피로를 털어내듯 기지개를 켰다.
‘연습생 때로 돌아간 거 같네.’
이렇게 진저가 고민을 털어놓고 우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진소유는 연습생 시절 진저와 가장 친했던 사람이었다. 이는 에리카도 의아하게 여기는 사실이었다.
사교성의 극에 이른 에리카마저 진소유와 교류하는 데 실패했는데, 진저는 놀랍게도 진소유와 가까웠던 것이다.
케이어스가 되고선 다시 멀어졌지만 말이다.
‘오랜만에…….’
진저를 바라보는 진소유의 눈동자에는 추억이 담겨 있었다. 몇 년이나 전의 추억이 다채롭고 따스하게 새겨져…….
‘엄청 귀찮았네.’
……따스한 추억은 아니었다.
* * *
“새로 들어온 연습생 린 메이다. 메이, 자기소개.”
진저, 메이는 트레이너의 말에 따라 중앙으로 쭈뼛쭈뼛 나왔다.
수십 명의 연습생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가운데 메이가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아, 아녀심가. 린 메이미, 이미다. 자부타드림.”
“메이는 중국에서 왔다. 한국어를 못한다. 다들 배려해주고, 잘 생활할 수 있도록 도와주도록. 자, 박수.”
연습생들이 영혼 없는 박수를 보냈다.
메이는 트레이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랐지만, 연습생들이 박수를 치기에 그냥 허리를 꾸벅꾸벅 굽혔다.
그 가운데에 앉은 한 명의 연습생, 진소유는 메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시발 또 짱깨년이야? 한한령도 터졌는데 짱깨 새끼들 다 모아서 연변으로 보내버리면 안 되나. 외노자들 시발 X같네.’
진소유 22세, 질풍노도의 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