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1화
윤상열은 대표 집무실에서 김태훈과 마주 보고 앉았다. 김태훈이 아까부터 뭐라고 지껄이는 중이었다.
“상열아, 슬슬 애들 풀어줄 때도 됐잖아. 네가 트레이닝에 열정적이란 건 알겠는데, 그 정도가 과한 감이 없잖아 있다고 할까…….”
윤상열은 그의 이야기에 관심이 없었다.
수척하고 피로한 얼굴로 과거를 반추할 뿐이었다. 그의 텅 빈 눈동자에 씌워진 건 아주 오래된 과거, KS 엔터에 있을 시절이었다.
‘내가 뭐가 달랐지.’
정호환이 이끌던 다키스트와 뭐가 달랐을까.
다키스트 멤버들은 지유 같은 짓을 저지르지 않았었다. 단순히 지유의 성질이 더러웠던 탓일까?
‘내가 정호환이랑 뭐가 달랐던 거지…….’
꿈?
정호환은 다키스트에게 항상 꿈 이야기를 했었다. 그게 그들에게 현실을 이겨낼 마취제가 되어주었던 건가?
그렇다기엔 자신도 항상 최고를 말했었다.
그게 글로브의 마음에 닿지 않았던 걸까?
“……시이발.”
윤상열이 눈두덩을 문지르면서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에 김태훈이 깜짝 놀랐다.
“뭐?”
“형한테 말한 거 아니에요…….”
윤상열은 자기 눈을 손꿈치로 팍팍 쳤다.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성필의 이미지를 지우기 위해서였다. 그가 연습생들과 화기애애하게 지냈던 게 떠오른다.
그 시절엔 윤상열도 연습생들, 아이돌들과 관계가 나쁘지 않았었다.
‘잘 대해주는 거? 친절해지는 거? 인간적으로 대해주는 거? 그거라고?’
그런데, 윤상열은 그럴 수 없다.
태생부터 그런 인간이 아니다.
명확히 급이 나뉜 관계라면 몰라도, 친밀감에 기반한 관계를 키울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 개같이 대할지언정, 진심에서 우러나온 친절로 대할 수 없다.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한단 것 자체를 혐오한다.
왜냐하면, 그런 감정은 배반당했을 때 너무 괴로우니까.
차라리 타인을 막 대하는 게 낫다. 돌아올 반응이야 뻔하고 예측에서 빗나가지 않으니까.
‘시발…….’
윤상열은 성필을 볼 때마다 역겨웠다.
사랑을 주는 만큼 돌아올 거라고 의심하지 않는 태도가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왜 그렇게까지 성필을 혐오했을까.
윤상열 본인도 알 만큼 간단하다.
자신은 애정과 존경, 존중에서 우러나온 관계를 바라지만 그럴 수 없으니까!
사람들은 본인이 얻을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걸 얻으려 노력하는 대신 공격적으로 변하는 법이다.
인터넷에 넘쳐나는 남성혐오, 여성혐오 글이 인간의 그러한 심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애초에 자신은 이성을 사귈 가능성이 없으니, 상대를 악으로 규정하여 물어뜯는 것이다.
누구보다 그것을 바라면서, 누구보다 그것을 혐오한다. 윤상열에겐 친밀함에 기반한 관계가 그런 것이었다.
심성의 밑바닥부터 뒤틀린 인간…….
“상열아 너 괜찮냐?”
“……어쩌죠.”
“어?”
“지유 걔가 안 돌아오면…… 어떡하냐고요…….”
“내 말이! 그년이 회사를 망치려고 작정했어! 참나, 변호사라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참!”
윤상열은 짜증이 치밀었다. 자신의 고민과 김태훈의 고민은 일치하지 않았다.
가진 공포의 크기도 달랐다.
그때였다.
노크 소리가 들리고 매니저가 들어왔다. 라희가 윤상열을 찾는단 이야기였다.
“어, 야. 라희가 지유 잘 만나고 왔나 보다. 빨리 가서 얘기 들어봐.”
김태훈이 한층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윤상열은 그가 말하기 전부터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집무실 밖으로 나아갔다.
“후우.”
김태훈은 윤상열이 나가자마자 한숨을 팍 내쉬었다. 그는 듬성듬성해지기 시작한 머리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었다.
그러고서 그는 윤상열이 나간 문을 불쾌한 듯 바라보았다.
“시발?”
계속 맞춰주니 위아래도 구분 못 하게 됐나.
“아직도 석세스 엔터가 동네 구멍가게인 줄 아나…….”
여하튼, 예술 한단 인간들은 하나같이 쓸데없이 자의식만 높다. 맞춰주기 힘들고 더러워서 못 살겠다.
김태훈이 부족할 때야 윤상열한테 매달렸지, 이젠 아니다.
‘슬슬…….’
윤상열에게 위계를 알려줄 때가 된 것 같다.
정확히는, 그에게 냉정한 현실을 알려주어야 한다.
윤상열 또한 톱니바퀴 중 하나에 불과하다.
얼마든지 바꿔 끼고, 원한다면 여러 개를 굴릴 수도 있다.
* * *
라희는 윤상열의 작업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피로감이 가득한 몰골이었다.
머리칼도 제대로 정돈되지 않은 게, 윤상열이 보아도 피곤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윤상열은 그녀의 상태 같은 건 묻지 않았다.
“어떻게 됐지?”
“제가, 진짜, 힘들게, 설득했어요. 온대요.”
윤상열은 머리칼이 쭈뼛 곤두서는 듯했다.
에너지 드링크를 몇 캔이나 위장에 들이부어도 떠지지 않던 눈이 번쩍 떠졌다.
마음 같아서는 라희를 안고 360도 돌고 싶을 지경이었다.
그가 그답지 않게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최대한 평정을 가장하면서.
“그래, 온다고, 그래, 그래야지…….”
“그런데 조건이 있대요.”
“조건? 아.”
앨범을 다섯 장 이상 내달라거나, 글로브의 휴식 기한을 정해달라, 뭐 그런 거였나.
변호사와 만날 때 계약서를 훑어보았었다.
조금 건방지긴 하지만, 그래도 그 정도면…….
“여기요.”
라희가 서류를 한 장 내밀었다.
윤상열은 그걸 받고 읽었다. 그의 표정이 굳어갔다.
그는 고개를 들어 라희를 바라보았다. 라희의 표정엔 아부하는 미소 같은 건 없었다. 한없이 진지한 채로 그를 응시했다.
“이게, 뭐냐…….”
[소민: 체스판을 돌려주세요.
노아: 그래서 학점 A 받았나! 알려달라!
세라: 주간, 월간 평가 폐지해주세요. 저희가 연습생도 아니잖아요.
정진: 앨범 활동기간 제외하고 저녁 이후 트레이닝 스케줄 빼기.
유현: 인신공격, 욕설, 비꼬기, 비웃음을 삼가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지유: 추가 부속 계약서 이행.]
“뭐냐, 고, 이게…….”
윤상열은 서류를 든 손을 벌벌 떨었다.
지유가 변호사를 대동하고 와서 내밀었던 계약서보다 훨씬 더 읽기가 괴롭다.
“거기 적힌 걸 들어주셔야, 지유가 들어온대요. 그리고요 피디님, 저도 거기 적힌 거엔 전부 동의해요. 피디님이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아니, 좋은 게 아니라.”
라희가 단호하게 답했다.
“들어주셔야 해요.”
“…….”
윤상열은 주체할 수 없는 울분이 위장으로부터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들어달라고?
이 조건을?
이건 지유의 어리광을 들어주는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하다.
왜냐하면 이건.
“나보고, 이걸……?”
윤상열이 잘못했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의 잘못을 시인하는 것과 진배없으니까.
사실상 글로브 멤버들에게 무릎 꿇고 ‘내가 잘못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감히, 감히……!
“피디님.”
라희는 그가 분노를 터뜨리기 전 재빨리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제가 전에 말씀드렸잖아요. 피디님의 방향성은 옳지만, 방법이 과감한 감이 있다고요. 이거예요. 애들은 피디님의 애정을 이렇게 해석한 거예요. 이해하지 못해요. 아직 다들 어리니까요.”
라희는 아이를 달래듯 말했다.
놀랍게도 윤상열은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다들 지유를 등에 업고, 좋은 기회가 왔다 싶어서 마음껏 하고픈 말을 하고 있어요. 피디님이 걱정하시는 건 이거죠? 이건 시작이고, 앞으로 멤버들의 요구가 더 과해질 거라는 거요.”
“…….”
사실 윤상열은 본인의 잘못을 시인하는 것 자체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굴욕이었다. 그런데 라희가 하는 말을 인정하는 게 훨씬 어른스럽게 보일 듯했다.
그래서 그는 가만히 분을 삭이면서 들었다.
“피디님, 이번에 지유가 돌아온 걸 보셔서 아시겠지만요. 멤버들이 저를 많이 의지하고 믿어요.”
확실히 그러하다.
라희가 없었다면 지유가 돌아온다고 했을까? 알 순 없지만, 라희가 지유를 설득하는 것에 성공했단 건 명백하다.
“피디님께 약속드릴게요. 멤버들이 이 이상 요구하는 일은 없어요. 프로정신 없이 연습을 게을리하지도 않을 거예요. 제가 그렇게 만들어요. 그렇게 할 수 있어요. 허언이 아니에요. 어떻게 피디님 앞에서 허언을 하겠어요. 존경하는 피디님께요. 만약 이 일 이후 저희가 피디님 마음에 안 든다면, 그때 벌하시거나 화내셔도 늦지 않아요. 그러니까요, 피디님.”
라희는 본인의 가슴에 꼭 쥔 주먹을 올렸다. 본인의 결의를 보여주려는 것처럼.
“저를 피디님의 손발로 써주세요. 제가 피디님의 말씀을 멤버들에게 전달하고, 제가 피디님의 계획을 실행할게요. 멤버들이 피디님의 눈높이에 도달하도록 노력할게요. 화를 낼 게 있으면 저한테 내주세요. 멤버들에게 전달하고 싶으신 게 있다면 저한테 해주세요. 피디님은, 애들에게 칭찬만 해주세요. 그것도 여의치 않으시면 저한테만 칭찬해주시고요.”
윤상열은 다시 글로브 멤버들의 요구사항을 보았다. 이것만 들어주면, 지유가 돌아온다.
글로브는 원상태로 복구된다.
물론 예전처럼은 아니겠지만.
“진짜, 네가 할 수 있다고?”
라희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억지로 낮추었다. 이 순간 모든 게 결정됐다.
이걸 받아들이는 순간부터 윤상열은 무의식적으로 인정한 거나 마찬가지다. 자신은 멤버들을 통제할 수 없지만, 라희는 할 수 있다고.
그러한 인식이 라희와 글로브의 힘이다.
라희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숙이지 않으면 흥이 넘치는 미소가 그에게 보일까 봐.
“저는 최고를 바라요. 피디님은 그걸 저에게 주실 수 있는 분이에요. 할 수 있어요. 피디님이 바라시는 건 뭐든…….”
“하.”
윤상열이 쓰레기라도 된단 듯 요구사항이 적힌 종이를 바닥에 내던졌다.
“전부 제정신이 아니야. 미쳤나? 너희들도 방송가에 널리고 널린 쓰레기 아이돌들처럼 되려고? 내 손으로 만든 이상 절대 안 돼! 자유? 말이 좋아 자유지 방종으로 변질될 게 뻔한데…… 내가 미쳤다고 이걸 들어줘?”
윤상열이 종이를 짓밟았다.
“착각하지 마. 너희는 뮤지션이 아니야. 아티스트가 아니라고. 아이돌이야. 누가 시키는 것밖에 못 하면서, 이젠 시키는 것도 안 하겠다? 말이 되는 소리를 지껄여!”
“그러면요?”
“뭐?”
“안 들어주시면 뭐, 어떡하시게요?”
라희의 표정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어떻게든 윤상열의 호감을 얻기 위해 꾸며내었던 미소가 완전히 사라졌다. 그에 윤상열은 분노가 치밀었다.
글로브의 오만방자한 요구사항을 보았을 때도 화났지만, 면전에서 이런 취급을 받으니 도저히 화를 참을 수 없었다.
“너……!”
“어쩔 거냐고요.”
라희가 한 걸음 내디뎠다.
윤상열이 움찔 떨면서 뒤로 물러났다.
라희는 또 앞으로 나아갔다. 걸음이 올곧았다.
거리가 너무 가깝다.
윤상열은 비틀거리는 다리로 계속 물러났다.
“……!”
그러다가 테이블에 부딪혔다.
더는 물러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라희는 계속 나아간다.
이윽고 둘 사이의 거리가 0에 가깝게 줄어들었다.
“안 받아들이시면.”
라희는 소름 끼치는 무표정 대신 미소를 지었다.
“어떡하시려고요?”
“…….”
“피디님, 피디님, 피디님…….”
라희는 그의 어깨를 붙잡고 마사지하듯 주물렀다.
“저희가 이대로 망가지고 방치되면, 저희만 아쉬운 게 아니에요. 피디님도 저희와 운명을 함께 하실 거예요.”
“너, 너는,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이돌 그룹 하나 만드는 데 10억, 20억. 인간으로 만들 수 있는 가장 값비싼 무언가. 그걸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본인 자존심 때문에 망가뜨린 프로듀서를, 세상 누가 믿을 수 있을까요?”
“나는, 난 윤상열이다!”
윤상열은 몸속으로 세균이 들어오자마자 반응하는 백혈구처럼, 반사적으로 그리 외쳤다.
그건 방어기제였다.
자신이 불리하단 것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새어 나온 영혼의 외침이었다.
“KS 엔터의 수석 프로듀……!”
“석세스 엔터의 총괄 프로듀서가 아니라, 아직까지도 본인을 그렇게 생각하시네요. 쫓겨난 자리가 그렇게나 그리우세요?”
윤상열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저희가 망가지는 건 다키스트와 근본적으로 달라요. 네, 피디님의 이상향인 다키스트랑은 전혀 다르죠. 다키스트는 7년 채우기라도 했지, 저희는요? 심지어 그 이유가 피디님의 자존심 때문이라니…….”
라희는 윤상열에게서 떨어졌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주워 그에게 내보였다.
“피디님은 다키스트를 만드실 수 없어요.”
“너, 너, 네가 뭘……!”
“그러니까 제가 도와드릴게요.”
라희가 윤상열의 가슴팍에 종이를 안겼다. 윤상열은 자기도 모르게 그것을 양손으로 받아들였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피디님의 수족이 될게요. 피디님이 할 수 없는 일을 할게요. 피디님의 꿈을 위해 뭐든 할 수 있어요. 그 조건은, 피디님이 저희들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라희는 눈동자는 어두운 작업실 안에서도 형형하게 빛났다. 아마 윤상열의 등 뒤에 있는 녹음 부스로부터 새어 나온 빛을 받아서이겠지만, 그는 그녀의 눈동자에 압도당했다.
그녀에게서 다른 사람이 보인다.
성필이었다.
수없는 갈등과 화해를 반복했었던 그의 모습이, 라희에게서 보인다.
“자, 이제.”
라희와 성필이 겹치자 윤상열의 마음이 가라앉았다. 더는 라희가 통제해야 할 아이돌, 어린아이로 보이지 않았다.
윤상열은 라희를 경쟁자로 보았다. 통제력과 권력, 권위를 두고 다투는 경쟁자 말이다.
그게 역설적으로 윤상열을 편하게 만들었다.
라희는 경쟁자이자 협력자. 그렇기에 일방적인 관계가 아니다. 머리 아프게 감정을 소모할 필요도 없다. 서로 주고받는, 아주 계산적인 관계일 뿐.
라희가 말했다.
“사인해요, 저희랑 같이 침전하고 싶지 않으시면요.”
“……나한테 이딴 짓을 하고도, 내가 네 말에 따를 거라고 생각하나?”
“그럼요.”
라희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피디님은 저희를 사랑하시잖아요.”
* * *
성필은 지유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들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잘 해결된 모양이다.
무엇보다 좋은 건 윤상열을 연습실에서 직접 마주치지 않아도 된단 점이라고 한다.
“오빠도 빨리 드세요.”
지유는 이쑤시개로 떡볶이를 콕 집어서 맛있게 먹었다.
둘이 만난 곳은 지유의 중학교 근처 분식집이었다. 아직 학생들이 수업받는 중이라, 분식집은 텅텅 비어 있었다.
성필은 싸구려임이 분명한, 그렇기에 값이 매우 싼 순대와 떡볶이를 바라보았다.
탄수화물 덩어리를 보자 몸이 거부했다.
“아냐, 나는 됐어. 너 많이 먹어.”
“왜 이래요. 드셔보세요. 추억 있고 좋지 않아요? 자, 아아.”
“아 뭔 ‘아아’야. 나이 든 남자 놀리니까 재밌어?”
“네, 개꿀잼인데요?”
본인의 매력을 알고 있는 사람을 상대하는 건 피곤하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더 피로하다.
싸늘하게 대하면 괜히 자격지심 있는 것 같고, 맞춰주면 넘어가는 것 같고, 어버버 거리면 의식하는 것 같고…….
애초에 지유는 성필을 놀리는 것이다. 성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어른으로서 따끔하게 혼내는 거지만, 뭘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난 아직 애인가 봐.’
이런 일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성필은 한숨과 함께 떡볶이를 받아먹었다.
“맛있죠?”
권강철 트레이너의 웃음소리가 머릿속을 맴돈다. 안 그래도 어깨에 통증이 쉽게 가시지 않아서 운동 가는 빈도를 줄였는데, 이렇게 타락해버리다니.
“여긴 맛이 안 바뀌네. 그런데 지유야, 일이 잘 해결된 건 좋은데. 어쩌다가 폭발한 거야?”
“내가 폭발한 게 잘못했단 거예요?”
“아니. 진작 그 새끼 면상에 라면 부어버리고 나왔어야지.”
지유가 테이블을 쿵쿵 두드리면서 웃었다.
중학생을 위해 설계된 테이블은 성인의 손바닥질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주인아주머니가 노려보았다.
지유는 머쓱하게 고개를 꾸벅이곤 다시 성필을 보았다.
“뭐 계기가 있어?”
“계기, 있죠. 아니, 저희 곧 컴백이거든요. 안 그래도 그 변태같은 새끼 기준 충족하느라 죽을 맛인데, 그 새끼가 저보고 ‘아오아’ 나가라는 거예요. ‘아오아’ 알죠?”
“알지. 우리 아라 거기 나가.”
“……‘우리 아라’?”
지유가 싸늘하게 노려보자 성필이 급히 변명했다.
“‘우리 소녀연맹 쪽 아라’ 말이야! 애정 담긴 호칭이 아니라 우리 회사 쪽 소녀연맹 아라!”
“예예, 알아요. 암튼 안 그래도 힘들어 뒈지겠는데 그거 준비까지 같이하려니까 죽을 맛이죠. 윤상열이 ‘아오아’ 퍼포먼스 감독까지 했거든요. 저는 두 배로 힘드니까, 두 배로 짜증 났어요. 그래서 결국 뭐 이렇게 됐고, 결과적으로는 좋았네요. 진짜 그 새끼가 바뀔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요.”
“그럼 ‘아오아’는 안 나가?”
“아뇨, 나가요.”
“엥?”
“나가기로 했어요.”
지유는 순대를 이쑤시개로 콕콕 찌르면서 말했다.
“라희가 트레이닝 스케줄 적절히 조정해줘서, 머리가 좀 식더라고요. 머리가 식다 보니까…… 이런 기회 다시 없겠더라고요.”
“어떤 기회?”
“케이어스랑, 소녀연맹이랑, 동시에 붙어볼 기회요. 현세대 탑티어인 그룹들이잖아요. 그런 그룹 멤버들이랑 경쟁하고, 이길 기회가 쉽게 오겠어요?”
“그렇긴 하지.”
“어? 기분 안 좋아요? 내가 이긴다니까?”
“안 좋긴. 얼마든지 덤벼.”
지유가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는 다시 떡볶이와 순대에 집중했다.
덤비라니, 마치 글로브가 적이라도 된단 듯한 말투 아닌가. 아니, 그야 적이긴 하지. 성필은 소녀연맹의 프로듀서이니, 글로브는 이겨야 할 적이지…….
‘노아랑 유현이가 한 말뜻, 이제 알겠네.’
글로브가 가로 엔터로 가도, 글로브는 2등이다.
성필의 애정을 받더라도, 두 번째겠지.
지유는 유리벽 밖을 보았다. 익숙한 하굣길이다. 이곳에 온 건 얼마 만인지.
“지유야, 전에 라희랑 만났을 때 한 말 있잖아. 가로 엔터로 오고 싶다고. 정말 그렇게 됐으면 좋겠어?”
“음.”
지유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오빠, 나 졸업식 때 기억나요?”
“응, 잊을 수가 없지 그 날은.”
“그때 내가 말했던 꿈도 기억하겠네요?”
* * *
중학교 졸업식.
지유는 꽃다발을 안고 부모님과 사진을 찍었다. 사진사는 성필이었다.
“오빠랑도 찍을래요.”
“나랑? 에이, 무슨…….”
“아 빨리요!”
성필은 지유의 아버지에게 조심스레 카메라를 넘기곤 지유의 옆에 가서 섰다. 왠지 모르게 아버지와 어머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성필은 죄라도 지은 기분이었다.
둘은 나란히 서서 브이를 그렸다.
“오빠, 나 고등학교 안 갈까 봐요.”
“또 또 말도 안 되는 소리 한다.”
“갈 필요가 없잖아요. 내 꿈이랑 연관 자체가 없는데.”
“네 꿈? 황금으로 지어진 별장에 미남 10명이 끄는 황금 가마 타고 매일 풀 파티 여는 거? 연관이 없긴 하네.”
“아이돌요. 최고의 아이돌. 최고의 아이돌은 학력 제한 없잖아요.”
“네 꿈이 언제부터 최고였어. 언젠 돼도 그만 안 돼도 그만이라더니.”
“사실, 공부가 하기 싫어요.”
“에휴.”
찰칵.
플래시가 터지고 아버지가 카메라를 내렸다. 그러자 지유가 아버지를 닦달하여 여러 장을 찍으라고 했다.
아버지의 표정이 더 안 좋아졌다.
둘은 양손으로 브이를 그렸다.
“공부가 도움 안 되는 거 같아도 다 도움이 되는…….”
“공부는 싫은데 춤추고 노래하는 건 재밌거든요. 저 완전 즐기는 자 모드예요.”
“너 인생 모토가 즐거운 일은 직업으로 안 삼는 거라면서.”
“그쵸. 그냥 해도 즐거운데, 괜히 직업으로 삼아서 누구랑 경쟁한다고? 진짜 그게 지옥이지.”
“근데 왜?”
“이왕 태어난 거, 어디에서든 최고 한 번 되고 싶어서요. 그게, 누가 나를 알아본단 게 생각보다 훨씬 기분 좋더라고요. 지금은 학교랑 근처에서만 유명한데, 최고의 아이돌이 되면 전국에서 유명할 거 아녜요.”
성필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 나이 때의 아이들이야 원래 꿈이 거창하다. 실제로 이루고픈 마음이 없어도 말해보기나 하는 것이다.
지유가 그러했다.
최고의 아이돌이 되고 싶은 이유? 유명해지고 싶어서. 사실상 아이돌은 유명해지고 싶은 도구다.
그런 마음으로 최고가 될 수 있을 리 없는데…….
“아빠 정성 들여 좀 찍어줘!”
벌써 수십 장을 찍었는데, 지유는 더 찍으라고 했다. 아버지의 표정이 더 더 더 안 좋아졌다.
성필은 슬슬 살해 협박을 받을까 두려워졌다.
지유가 왼손으로 하트 반쪽을 그렸다. 그리고 성필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뭐? 너 미쳤어? 나 암살자들한테 죽는 거 보고 싶어서 그래?”
“뭐야, 오빠 설마 중학생한테 부끄러워하는 거예요? 미친 기분 나빠. 개소름 돋아.”
“그게 문제가 아니라 아버님이 나를 죽이려고 하신다고…….”
“하기나 해요.”
성필은 하트 대신 주먹을 가져다 댔다. 지유는 크게 웃더니 그대로 포즈를 잡았다.
“실은, 거짓말이에요.”
“뭐가?”
“제가 최고의 아이돌이 되고 싶은 건요.”
“싶은 건?”
“돈으로 해결할 수 없어서예요.”
“진짜 부자가 할 법한 말이네.”
“그리고 팀장님이 쫌 멋있어서요.”
“응?”
지유가 끝끝내 성필이 하트를 맞춰주지 않자, 한 손으로만 하트를 만들었다.
“아빠가 석세스 엔터 투자하겠다고 했을 때 안 받은 거요. 멋있었어요.”
“그거야 뭐…… 당연하지. 투자받으면 데뷔조 선발이 공정하지 않잖아.”
“김태훈 대표님이랑도 그걸로 싸우시고, 쫌 많이 멋있었어요.”
“이런 말 하긴 뭐한데, 너한텐 안 좋은 거 아니야?”
“팀장님 멋있는 게 더 좋은데요? 나 솔직히 서민, 아니, 보통 사람들 그냥 강아지처럼 보였거든요. 아빠랑 엄마한테 꼬리 흔드는 사람 얼마나 많은 줄 알아요? 하는 짓도 가관이에요. 머리 박으라면 콘크리트 바닥에서도 박을 사람 줄 섰을걸요. 어릴 때부터 그런 걸 봐 왔는데, 팀장님은 그런 사람들이랑 달랐어요. 진짜 진짜 멋있…….”
“아 그만 좀 띄워. 부끄럽…… 진짜 그만해줘……. 아버님이 나 계속 노려보시잖아…….”
* * *
“생각해보니까, 최고란 건 하나잖아요. 저희가 가로 엔터로 가면, 오빠는 소녀연맹이랑 글로브 중 누구를 최고로 만들 거예요? 누구한테 더 관심을 쏟을 거예요?”
“…….”
“하하.”
지유는 마지막 남은 순대를 집어 먹었다.
“바로 대답 안 나오네.”
“그, 내가 마음을 먹는다고 어느 한쪽이 더 성공한다거나 그런 건 없지. 그리고 만약 온다 해도 둘 다 신경을 쓸 거고. 난 총괄 프로듀서니까.”
“2등은 되기 싫어요. 두 번째도 되기 싫고. 윤상열은 개새끼지만, 그래도 우릴 첫 번째로 생각해요. 저는 최고가 돼서, 첫 번째로 오빠 앞에 설 거예요. 그렇잖아요.”
누군가의 애정을 갈구하고, 경쟁하며, 꼬리 흔드는 개가 되고픈 마음은 없다.
지유는 자유롭고 싶으니까.
“좋아하는 사람이더라도, 그 사람의 두 번째가 되고 싶은 사람은 없어요.”
“……맞는 말이네.”
“기대해요, 오빠. 우리 놔두고 간 거 후회하게 해줄 테니까.”
진저도 조아라도, 모조리 이겨버릴 것이다.
* * *
“메이, ‘아오아’ 사전 미팅이야?”
“그렇슴미다.”
진소유는 진저를 현관까지 배웅했다. 진저는 신발장에서 오랫동안 신발을 골랐다.
그러다가 결국은 앰배서더를 맡은 ‘셀린느’의 운동화를 신었다. 그녀는 현관에 달린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더니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다녀오겠슴미다!”
“거기, ‘아오아’에 누구 나와?”
“아…….”
“아라 씨는 알아. 나머지 한 명은?”
“모르겠슴미다. 보긴 했는데 잊어버렸슴미다.”
“그래.”
진저라면 알아서 잘하겠지.
진저는 진소유의 배웅과 함께 숙소를 나섰다. 1층으로 내려가니 신인개발부의 신태웅이 기다리고 있었다.
둘은 친밀감이 높다. 아마 미국에 함께 갔었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신태웅은 댄서이자 댄스 트레이너이니, 이번 자리에 잘 맞으리란 판단하에 진저와 동행하게 되었다.
“오우, 진저.”
“안녕하심미까.”
진저는 조수석에 타자마자 손거울을 꺼내 머리칼을 정돈했다.
단순한 미팅 자리임에도 신경 쓴 티가 났다. 샵에 들르지 않았을 때, 진저가 뽐낼 수 있는 최고 단계의 꾸밈이라 해도 좋았다.
신태웅은 그걸 보며 미소 지었다.
‘아라 씨를 만나는 게 그렇게 좋은가?’
신태웅은 적어도 친구를 만날 때 꾸미진 않는다. 하지만 여자 사이엔 다른 거겠지. 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저 어떻슴미까.”
“괜찮은데?”
“괜찮은 걸로는 안 됨미다. 경성경국(傾城傾國), 경국지색(傾國之色) 정도는 돼야 함미다.”
“진저야 뭐 항상 그렇지.”
“진심이 없슴미다. 이대론 안 됨미다. 메이크업 샵으로 가야 함미다.”
“하하.”
“웃어?”
“어?”
“진심이니까 빨리 가십쇼.”
놀라운 사실.
케이어스는 이번 분기부터 정산에 들어간다.
그 액수는 가히 놀라운 수준.
그리하여, 케이어스는 확실하게 KS 엔터의 보배로 떠올랐다.
“뭐 함미까? 액셀 안 밟고?”
“아, 아니, 진……?”
“두 번 말하게 하지 않는 검미다!”
“하이잇(네에엡)!”
진저, 권력을 손에 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