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9화
성필에게 라희는 미지의 존재다. 그가 겪었던 전생에서 라희는 글로브의 멤버가 아니었으니.
솔직히 라희가 리더가 됐을 때는 적잖이 놀랐었다. 그녀는 나이로 보아도, 실력으로 보아도 리더에 어울리지 않았다.
‘윤상열은 라희에게서 뭘 본 거지?’
성필이 보지 못한 재능이 라희에게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성필은 그렇게 똑바로만 생각하진 못했다.
‘윤상열 그 새끼라면…….’
그의 음흉한 심성답게 라희가 리더 자리에 오른 것도 권모술수일 가능성이 있다.
라희는 신아름을 밀어내고 데뷔조에 들어갔다고 들었다. 즉, 라희에게 윤상열은 생명줄이자 아이돌이 되기 위한 동아줄이다.
라희는 윤상열에게 바짝 엎드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누구보다 윤상열에게 우호적인 연습생이었겠지.
‘그러니까, 라희가 리더가 된 건 윤상열이 한 선언이나 마찬가지야.’
글로브란 그룹에서 가장 중요한 건 실력이나 인성이 아니다. 오직 명령에 잘 복종하는 것뿐.
글로브 멤버들에겐 그리 보였을 게 틀림없다.
라희가 리더가 된 이유는 능력이 아니라 충성심…… 성필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라희가 성필의 맞은편에 앉았다.
차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라희는 굳이 수고롭게 가로 엔터 근처 카페까지 왔다.
그녀 본인이 아쉬운 처지이기에 되도록 성필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던 걸까.
나이답지 않게 바짝 엎드리는 법을 알았다. 윤상열 밑에 있느라 배운 처세술, 혹은 비굴해지는 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성필은 그녀의 인사를 받으면서도 찜찜했다.
“아, 이제 이사님이죠. 박성필 이사님.”
성필은 굳이 편한 대로 부르라곤 하지 않았다.
이전에 김태훈과 마주했을 때 그는 석세스 엔터와 확실히 선을 그었었다. 그를 형이 아니라 대표라고 부르는 것으로 말이다.
라희라고 다르게 대하진 않는다. 그녀가 이사님이라고 부른다면, 옛정을 되살려 호칭을 바꿀 생각은 없다.
“도와달라니?”
성필이 본론을 꺼냈다.
라희는 전화로 무슨 일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성필이 생각하기로, 외부에 알려져선 안 되는 일인 듯했다.
‘경쟁사에 알려져서 좋을 게 없는 일이겠지.’
라희는 다른 글로브 멤버들과 달리 성필을 경계했다. 지금도 테이블 위에 엎어둔 핸드폰을 흘끔거리고 있지 않은가.
성필이 핸드폰을 들어 아무런 어플도 돌아가지 않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라희가 어색하게 웃었다.
“갑자기 보자고 말씀드려서 당황하셨죠? 죄송해요. 그리고 빨리 만나주셔서 감사해요. 일단 상황을 설명드릴게요.”
라희는 지유가 벌였던 일에 대해 간략히 설명했다. 물론 최대한 축소했다. 지유가 테이블을 엎고 윤상열에게 욕했단 걸 알려봤자 딱히 도움은 되지 않을 테니.
“그래서, 지유가 아예 회사랑 대화 자체를 거부하고 있어요. 침묵을 지키는 건 아니고, 변호사랑만 이야기할 거래요.”
“따로 연락해봤어?”
“멤버들 연락도 전부 무시해요.”
성필은 ‘음’ 신음을 흘리며 커피를 마셨다.
글로브가 그런 고난을 겪다니, 안타깝다.
동시에 성필은 이래선 안 된단 것을 알아도 살짝 기꺼웠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듯했기 때문이다.
‘역시 내가 없으면 삐걱이는구나. 그래…….’
가슴 속이 폭풍우 후 환하게 갠 하늘처럼 상쾌했다.
전생의 자신은 매니저 따위 얼마든지 교체하고 대체할 수 있다고 했지만, 석세스 엔터는 자신이 필요하다.
현재가 그걸 증명했다.
아니, 오늘 라희에게 들은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불안정한 글로브의 상태가 증거다. 성필이 중요한 존재라는 무엇보다 강한 증거.
그래, 가슴은 상쾌하지만…….
‘마냥 속 시원한 것도 아니야.’
글로브가 6인조가 되는 건 보고 싶지 않다. 그녀들은 최소한 전생에 누렸던 명예와 인기를 얻어야만 한다.
케이어스 문제만 해도 머리가 아픈데, 글로브마저 망가져선 안 된다.
“사실 제가 지유네에 찾아갔었어요.”
“지유는 만났어?”
“만났어요.”
“그래서?”
“돌아갈 마음 없대요.”
연습생 시절부터 함께한 동료의 부탁을 깔끔하게 거절하다니. 지유는 단순히 돌발적으로 회사와 연을 끊은 건 아닌 듯했다.
“설마 나한테 부탁할 게…….”
“지유를 만나주세요. 팀장, 아, 이사님은 저희 멤버들이랑 연이 깊잖아요. 특히 지유는 팀장님이 직접 캐스팅하셨구요. 지유가 예전에 말한 적이 있는데, 아이돌이 되기로 결심한 게 팀장님 때문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아이돌이 되기로 결심한 사람이 설득하면 돌아오지 않을까.
라희는 이렇게 생각하여 성필에게 부탁했다. 사실상 이게 마지막 남은 방법이기도 했다.
지유와 성필의 인연을 믿는 것.
“지유가 그렇게 말했어?”
그런데 성필의 반응이 이상했다.
“네? 아, 지유가 분명 그렇게 말했는…… 데요…….”
“그렇게까지 거창한 건 아니야. 적어도 네가 기대한 수준은 아닐걸…….”
* * *
“안녕하세요 석세스 엔터테인먼트 매니저 박성필입니다. 아이돌 관심 있으세요? 연습생 해보실래요?”
아직 명동의 젊은 열기가 꺼지기 전.
성필은 길거리를 걷다가 지유를 발견했다.
교복을 입은 그녀는 두 친구와 함께였다.
지유는 성필의 명함을 약간 얼떨떨한 표정으로 받았다. 그러자 옆의 친구들이 ‘오오’ 소리를 내면서 장난스럽게 웃었다.
“연습생요? 저요?”
지유는 갑작스러운 이벤트에 불쾌해하기보다 즐거워했다. 하긴, 아이돌이 되어 보겠냐는 말을 듣고 싫어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마는.
그런데 갑자기 지유가 표정을 굳히면서 명함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근데 석세스 엔터테인먼트는 처음 들어보는데요. 누구 있어요?”
“엡실론이요.”
“아…….”
지유는 예의상 감탄하는 척했다.
그녀는 엡실론이란 이름은 알고 있지만, 딱히 유명한 그룹이 아니라 실망했다. 당시엔 엡실론이 유명세를 얻기 전이었다.
“꺄아아악!”
근데 바로 옆의 친구가 실신할 것처럼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고선 지유의 어깨를 팍팍 때렸다.
“에, 엡실론요?! 그, 그그, 그, 연습, 연습생 시, 시험? 그, 그거 지유, 지유가 보러 갈 때 저희도 같이 견학할 수 있어요?!”
“물론이죠.”
성필이 긍정적으로 답하자 그 친구는 정말 실신하기 직전이 됐다. 친구는 지유의 팔에 매달려 애원했다.
“지유야 해봐!”
“너 오빠들 보자고 아이돌이 되라고?”
“무조건 하란 것도 아니잖아! 걍 노는 셈 치고!”
바로 앞에 성필을 두고 할 말은 아니지만, 성필은 이해했다. 사랑하는 오빠를 볼 기회가 생겼는데 머리가 제대로 굴러갈 리가 없지.
“한 번 해봐.”
그나마 평정을 유지하는 친구가 지유에게 부채질했다.
“어울리잖아. 솔직히 너 웬만한 아이돌보다 더 예뻐.”
“야 뭐래는 거야!”
지유는 크게 웃음을 터뜨리면서 친구를 향해 손사래를 쳤다.
그럴수록 친구들은 지유를 띄워주었다.
고작 수십 초 만에 지유는 넘어가기 직전의 상태까지 몰렸다.
“에이, 아이돌? 내가? 할 수 있을까?”
“네가 안 하면 누가 해!”
“아, 뭐어, 그러엄…….”
지유는 어깨가 한껏 올라가선 성필에게 말했다.
“일단 회사 가보고 정해도 돼요?”
그렇게, 지유는 친구들의 부채질 때문에 장래를 결정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오디션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학교 전체에 스스로 소문을 냈다고 한다.
* * *
“……그게 다예요?”
“응.”
라희는 실망했다.
성필과 지유의 연은 그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가벼웠다. 애초에 지유가 그토록 안일하게 아이돌이 되기로 결심했을 줄 상상도 못 했다.
‘오래도 버텼네…….’
윤상열에게 온갖 갈굼을 당하면서 어떻게 연습생 시절을 견뎠을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친구들에게 자랑한 게 있어서 쉽게 포기하지 못했던 걸까. 라희로선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라희는 이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성필은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열쇠였으니까. 구멍에 맞든 맞지 않든 집어넣어 봐야 했다.
“지유의 말이 틀린 게 아니네요. 정말 이사님이 지유가 아이돌이 된 이유니까요.”
“내가 말해서 지유가 들을까?”
성필은 어떻든 라희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윤상열이 어떻게 나올지 걱정되어 선뜻 나서겠다고 할 수 없었다.
“지유가 돌아온다고 해도, 결국엔 윤상열한테 받는 취급은 안 달라지면 어떡해.”
단순히 지유를 설득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그다음이 훨씬 더 중요하다.
성필은 일단 그걸 확실히 하고 싶었다.
“이사님.”
물론 라희는 그에 관한 답이 준비되어 있었다.
“소민이 일로 이미 아시겠지만, 저희가 받는 취급이 그리 좋지 않아요.”
성필은 표정을 굳힌 채 경청했다.
“그 취급을 바꿀 기회가 바로 지금이에요.”
“기회?”
“지유는 피디님과 회사의 모든 압박을 무시하고, 무시할 힘이 있어요. 지유가 마음만 먹으면 피디님의 권위를 전부 물리칠 수 있단 거예요. 그런데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아요. 저는 지유의 힘을 글로브의 힘으로 만들 거예요.”
“……자세하게 얘기해줄래?”
라희의 추측이지만, 윤상열은 생각보다 훨씬 더 글로브를 소중하게 여긴다.
그룹이 갑자기 6인조로 바뀌거나, 그룹 자체가 오명을 뒤집어쓰길 바라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는 언행을 조심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회사 차원에서도 이번 사태를 심각하게 여기고 윤상열을 제재할 것이다.
대표 김태훈은 윤상열에게 프로듀싱의 전권을 위임했지만, 그의 방식이 회사에 해를 끼친다면 가만히 두고 보진 않을 테니.
“지유가 돌아오는 게 그 기점이 될 거예요. 제가 그렇게 만들 거예요.”
윤상열이 하던 방식대로 하면 또 지유가 나가버릴 수 있다. 그렇다면 방향성을 유지하면서도 그룹의 결속을 이어갈 방법이 필요하다.
그 방법이 바로 라희가 된다.
강력한 통제가 아니라 부드러운 회유.
“윤상열이 순순히 그렇게 나올까?”
“네.”
라희가 단언했다.
“피디님은 그렇게 되실 거예요.”
윤상열이 그렇게 할 거란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만들 거란다.
성필은 라희의 단언을 듣곤 살짝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마치 사람의 마음을 제멋대로 조종할 수 있단 듯이 말하고 있었으니까.
아직 젊기에 낙관적으로 미래를 그리는 걸까?
“무슨 수를 써도 돌아오지 않던 지유를 제가 데려온다면, 피디님의 생각도 자연스레 바뀌지 않을까요?”
“아까 정확하게 못 들었는데, ‘무슨 수를 써도’라는 건…….”
“협박을 포함해요.”
계약을 들이밀어 협박했음에도 돌아오지 않던 지유가, 라희의 설득으로 돌아온다.
과연, 윤상열은 라희를 더 아낄 수밖에 없으리라.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도구로서.
라희에겐 발언력이 생긴다.
‘목줄이군.’
라희는 윤상열에게 목줄을 채우겠다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유라는 폭탄을 유일하게 다룰 수 있는 기술자가 되어서 말이다.
그런데.
‘라희가 할 수 있을까?’
사람을 마음대로 움직인다는 건 말만 쉽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상급자란 권위를 가지고도 조직 통제에 실패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가장 친한 친구와도 사이가 어그러지곤 한다.
그럴 진데, 라희는 인간의 마음을 교묘하게 파고들어 조종하겠다고 한다.
고작 20대 초반의 아이가 할 만한 게 아니다.
심지어 손윗사람을, 상급자를 조종하겠다니…….
“알겠어.”
불안한 것투성이지만 성필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지유는 글로브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그룹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녀들이 받아야 할 정당한 인기와 명예를 위해서.
또, 라희의 이야기엔 설득력이 있다. 믿져야 본전 아닌가. 라희가 윤상열과의 관계 개선에 실패하더라도, 윤상열이 이전보다 조심스러워질 건 틀림없다.
적어도 김태훈이 직접 나서서 글로브의 처우 개선에 신경 쓸 것이다.
“지유를 만나러 가자. 그런데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 네가 찾아가도 안 된 일을 내가 할 수 있을 확률은 낮아.”
“……아마 할 수 있으실 거예요.”
“그래?”
성필은 아마 라희의 희망 사항일 말을 한 귀로 흘렸다. 라희는 그렇게 믿고 싶을 뿐, 근거는 없을 터이니.
성필은 라희를 차에 태우고 지유의 집으로 향했다. 그녀의 본가는 고도성장 시대부터 재력가 1세, 2세들이 정착했던 고전적인 강북 부촌(富村)에 위치했다.
홍규헌과 그 일가가 강남에 자리 잡은 것과는 반대로, 지유네 집이 꽤 옛날부터 부를 누렸으리란 걸 추측할 수 있었다.
동네 아래에 차를 세우고, 성필과 라희는 오르막을 걸어 올라갔다.
라희가 초인종을 누르니 철제 대문이 열리고 녹빛의 마당이 반겨주었다. 둘은 돌계단을 올라 현관으로 가자 가정부가 맞아주었다.
“팀장님, 오랜만이네요.”
“네, 안녕하세요.”
성필은 지유의 집에 몇 번 왔었다.
연습생 계약을 체결할 때나, 그녀의 부모에게 학업과 관련된 상담을 나눌 때 말이다.
그래서 가정부와도 안면이 있었다. 물론 몇 년이 지나고서도 그녀가 얼굴을 기억해준 게 놀랍긴 했다.
“아가씨는 방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라희는 앞장서서 2층으로 향했다.
그녀는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하더니,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대답은 없었다.
“만나기 싫은 건가?”
“아뇨. 지유가 출입을 허가해주지 않았으면 들어오지도 못했을 거예요.”
라희는 문을 다시 노크했다.
답이 없었다.
1분을 기다렸는데도 묵묵부답이었다.
“이어폰이라도 끼고 있나 봐요.”
“그러게.”
결국 기다리다 못한 라희가 문고리를 잡고 돌렸다. 그러자 방음(防音)이 깨지고, 아까부터 방 안에 울려 퍼지던 지유의 목소리가 둘의 귀에도 들려왔다.
“이거 이겼어 이겼어! 이겼다고 이겼어 이겼어 이겼어!”
지유는 헤드폰을 쓴 채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키보드와 마우스를 연타하는 소리가 선명하게 이어졌다.
그녀는 거의 모니터에 눈을 박은 채 게임에 몰입했다.
“워후!”
갑자기 그녀가 환성을 내질렀다.
연타가 더욱 빨라지고, 그녀의 목소리엔 명랑한 웃음이 배어들었다.
“야 죽여 그냥 죽여 이 개새끼. 죽여 이 개새끼! 죽여 이 씨바알 새끼! 야 일로 와 이 개시키야. 이 X만한 새끼야. 이 X만한 새끼. 죽어 이 간나 새끼들아!”
곧이어 모니터 화면이 화려하게 빛났다.
화면 중앙에 ‘승리’란 글자가 새겨졌다.
그녀는 개운한 한숨을 내뱉곤 헤드폰을 벗었다. 기지개를 켠 그녀는 의자를 돌려 일어났다. 그리고 성필, 라희와 눈이 마주쳤다.
“…….”
“…….”
“…….”
지유는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뜨고,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이 상황을 믿고 싶지 않은 듯했다.
“너, 너, 라, 라희, 혼자, 오는 거 아니, 왜 오빠…….”
지유는 한 번 비틀거리더니, 앞머리를 손으로 정돈하곤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큰소리로 외쳤다.
“아주머니! 음료랑 다과 부탁해요!”
그녀는 다시금 성필을 향해 활짝 웃었다.
“오빠 오랜만이네요? 온다고 말씀해주시지.”
“죽여 이 개새끼?”
“아깐 척이었어요. 같이 게임 하는 친구들이 억지로 시켜서요. 아시죠?”
“죽여 이 시발 새끼?”
“진짜예요.”
“너 아직도 입버릇 못 고쳤구나.”
“아 혼자 게임 할 땐 욕 좀 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요!”
“지, 지유야.”
라희는 충격적인 사태에 입술을 벌벌 떨었다. 그녀의 입이 좀 걸걸한 건 알았지만, 설마 멤버 이외의 사람들에게도 이랬다고?
“그, 그, 게임 하는 사람들이, 너 욕하는 거 녹음하고, 퍼, 퍼뜨리면 어쩌려고?”
“……내 친구들이 왜 그러는데?”
라희는 할 말이 없었다.
지유의 말이 옳았다. 라희의 걱정은 과했다.
어느 친구가 사석에서 나눈 음담이나 욕설을 녹음해서, 자신이 취업했을 때 회사에 뿌리는 걸 걱정하는 인간은 없으니.
어지간히 비뚤어지지 않고선 친구 앞에서 그런 이유로 말조심하진 않을 것이다. 라희가 어지간히 비뚤어져서 걱정하는 거긴 했다.
잠시 후 가정부가 다과와 음료를 가져왔다. 지유는 그것을 받아 내려놓곤 성필을 향해 웃었다.
“와, 오빠 쥰내 오랜만이에요. 언제 한 번 찾아가야지, 찾아가야지 했는데 결국 이렇게 만나네요.”
“찾아오지 그랬어.”
“그럼 제가 지잖아요.”
“지긴 뭘 져.”
성필도 웃으면서 지유와 대화를 나눴다.
“오빠가 날 더 그리워해서 먼저 찾아와야죠. 안 그럼 내가 진 거잖아요. 뭐, 이렇게 먼저 오긴 했으니 내가 이겼네요. 앉아요.”
셋이 다과가 담긴 쟁반을 중앙에 두고 동그랗게 둘러앉았다. 앉자마자 지유가 말했다.
“라희 너 되게 과감하네. 어떻게 오빠 데려올 생각을 했어? 뭐, 오빠가 오면 내가 막 설득돼서 회사로 돌아갈까 봐?”
지유는 순식간에 라희의 희망을 박살 냈다.
라희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애초에 돌아갈 생각이었어.”
그런데 지유가 갑자기 그리 말했다.
당연히 라희는 당황했다.
“으, 응……?”
“당연히 돌아가지! 내가 글로브에 피해를 줄 순 없잖아! 회사에 말한 건 그냥 협박이야 협박.”
라희는 얼떨떨하게 ‘어, 응, 고마워’라고 말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반응이라, 너무 정석적인 답변밖에 할 수 없었다.
지유는 킥킥 웃으면서 성필의 무릎을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괜히 오빠만 귀찮게 했네요. 하여튼 라희 얜 너무 성질이 급한 게 탈이에요. 그죠?”
“내 무릎 치지 마.”
“오빠 왜 이렇게 차갑게 변했어요? 나 연습생 땐 어깨에 손 얹거나 눈웃음 쪼금만 보내도 당황하는 거 귀여웠는데. 나이 먹어서 이래요?”
“내 무릎 치지 말란 건 무릎을 꽉 쥐란 뜻이 아니야. 아니 어디에 손 올려! 얼굴 좀 예쁘니까 세상이 다 네 거 같아?!”
“와, 개상처. 너무하다 진짜. 마상. 마음의 상처!”
지유가 만화 기술을 쓰듯 성필을 어깨를 손바닥으로 확 밀었다. 그러고선 혼자서 깔깔 웃었다.
“암튼 뭐…….”
지유의 웃음이 점점 잦아들었다.
“그냥은 안 가.”
“그럼?”
“더는 윤상열 그 새끼한테 안 휘둘려. 약속받아야 할 게 있어.”
“나한테 말해줘. 내가 피디님한테…….”
“라희야.”
지유가 ‘왜 그렇게 순진하니?’라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변호사 부르고 한 게 쇼 같아? 아니야. 약속받을 게, 계약으로 확답받고 싶은 게 있어서야.”
“……뭔데?”
“글로브의 계약이 끝날 때까지 앨범 5개 이상 발매.”
지유는 사과 주스로 입술을 적셨다.
“우리가 그 인간한테 휘둘린 건, 걔가 우릴 버릴까 봐 무서워서잖아. 그런데 발매해야 할 앨범 개수를 계약으로 확정하면, 그런 걱정할 필요도 없지 않아? 석세스 엔터는 모가 되든 도가 되든 무조건 앨범 다섯 개를 내야 해. 그렇게만 되면, 우린 그저 열심히 하기만 하면 돼.”
그녀가 후련한 듯 말했다.
“더는 그 인간 비위 맞추거나 할 필요 없어. 놈이 판을 깔아주길 초조하게 기다리는 게 아니라, 정해진 판을 대비하며 나아가는 거야. 윤상열이 프로듀싱을 안 맡아도 돼. 석세스 엔터에 프로듀서가 한 명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밥을 기다리는 비참한 애완견이 될 생각은 없다. 윤상열에게 비굴하게 꼬리를 흔들고 싶지도 않다.
계약 종료까지 앨범 다섯 개 이상 발매라는 조건은, 글로브가 자유로워지기 위한 최소 조건이다.
“이게 내가 바라는 조건.”
자유다.
지유는 자유를 바란다고 선언했다.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글로브의 모두를 위해서.
라희는 얼떨떨하게 물었다.
“너 설마 처음부터…….”
지유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당연하지. 내가 그냥 화나서 판을 뒤엎겠어? 애들도 안 할 행동을 내가 할 리 없잖아.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지유가 성필의 무릎을 손바닥으로 탁탁 쳤다.
“이유와 계획이 있어.”
“내 무릎에서 손 떼.”
“라희야, 미안해.”
지유는 성필의 무릎 대신 라희의 손을 맞잡았다.
“진작 이렇게 했어야 하는데, 미안.”
“그게 다야?”
감동적인 순간, 성필이 물었다.
“네?”
“이유는 그게 다야?”
지유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성필은 그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전생에서 그녀와 지내왔던 기억이 있으니까.
직설적으로, 성필은 전생의 지유에게 협박 아닌 협박을 당한 기억이 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순간, 온갖 상황이 맞물려가서 지유의 뜻대로 모든 게 흘러갔었다.
‘그땐 놀랐었지.’
한 수 앞을 본다, 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세상엔 한 수 앞은커녕 바로 앞에 놓인 일조차 못 보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인간사에 벌어지는 일은 한 수 앞을 예측하는 것만으로도 힘들다.
그런데 지유는 언제나 한 수 앞을 생각할 줄 알았다. 그녀가 벌이는 일의 표면 아래엔 언제나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
이번에도 그러리란 예감이 들었다.
적어도 지유는 자신의 의도를 적나라하게,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인간은 아니었으니까.
“음, 무슨 말인…….”
지유는 부정하려다가, 그냥 씩 웃었다.
“아 뭐, 오빠도 있고 하니 미리 말하는 것도 괜찮겠네요. 오빠한테도 나쁜 얘기 아니에요. 사실 우리 전부한테 좋은 얘기죠?”
“전부가 아니라니, 지유야?”
라희는 이야기를 따라가기 힘들어했다.
당연했다.
아직 지유는 본심을 꺼내지 않았으니까.
전생의 그녀를 아는 성필이 아니고서야, 표면 아래에 깔린 섬뜩한 의도를 깨달을 수 없었다.
“내가 최종적으로 보는 건.”
지유는 갑자기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그러고선 헤헤 웃었다. 비밀이라는 뜻이다.
귀여운 미소였다.
“글로브 전원의 계약 해지야.”
그리고 그 미소와는 상반되게, 입에서 나오는 말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계약을 해지하고, 편력 기사처럼 받아줄 영지를 찾는 거지. 나는 가로 엔터로 생각하고 있어. 오빠도 우리 그리웠죠? 앞으론 매일 매일 봐요.”
라희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