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517화 (517/760)

517화

민시화의 수업이 시작되기 전, 조아라는 방송국을 찾았다. 볼 사람이 있어서였다.

“여기.”

매니저 안이상이 조아라에게 방문증을 건넸다.

조아라는 방문증을 목에 걸고선 익숙한 걸음으로 음악 방송 대기실을 찾았다.

안이상은 긴장하여 조아라의 뒤를 따랐다.

어째서 긴장했냐면, 오늘 조아라가 만나기로 한 사람 때문이었다.

상대는 무려 남자 아이돌이었으니.

‘아라 연애 금지가 끝나기까지 앞으로…….’

약 3개월 하고 조금 더 남았다.

사실상 풀렸다고 봐도 무방한 기간이지만, 계약은 계약이다. 매니지먼트팀은 계약에 따라 조아라의 행동을 감시해야 할 의무와 필요가 있었다.

‘물론 아라가 상대를 찾은 이유는 뭐라 못할 정도로 합리적이긴 한데…….’

상대는 보이그룹 시에이스의 멤버인 규영이다.

규영은 더 스튜디오에서 진행하는 ‘아오아’에 출연한 경력이 있었다. 조아라는 선배에게 자문을 구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것이다.

‘그렇지만 방심은 금물이야.’

옛날부터 성필은 규영와 조아라의 관계를 의심하고 경계해왔다.

어째선지는 아무도 몰랐다. 조아라가 만난 보이그룹이 한둘도 아닐 텐데, 성필은 유독 규영을 경계했다.

그 경계심은 민경섭에게도 그대로 전염되어, 오늘 안이상은 조아라와 규영 사이의 분위기를 살피란 명령을 들었다.

가는 도중 안이상이 가볍게 물었다.

“아라야, 근데 직접 찾을 필요가 있어?”

“번호가 없는데 어떡해요.”

잘 피하는군.

“전화로 할 만한 얘기도 아니고요.”

“친해?”

“누구, 규영 선배님이랑요?”

“응.”

조아라는 잠시 고민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별로.”

“근데 이렇게 막 찾아오고 그래? 혹시 아라 너…….”

“억지 우결충 아웃.”

“추, 충?”

“충성 충(忠)요. 충성 충성.”

조아라가 대강 경례하는 척했다.

대기실 앞에 도착하는 건 금방이었다. 안이상은 문을 두드리곤 소녀연맹의 조아라가 왔음을 알렸다.

미리 연락을 받았던 매니저가 반갑게 안이상과 조아라를 맞아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규영을 찾았다.

“야 규영아!”

시에이스는 최근 컴백하여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규영은 의자에 자리를 잡고 거의 기절하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규영!”

매니저가 소리를 지르고서야 규영이 꺾였던 고개를 바로 세우고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선 하품 섞인 외침을 뱉었다.

“아 왜요!”

“소녀연맹 아라 씨 오셨어.”

규영은 아직 잠이 깨지 않은 얼굴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그 뒤로 장난기 넘치는 멤버들의 얼굴이 비쳤다.

그들도 안이상, 민경섭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점이라면 규영을 응원하고 있다는 점일까.

그것만 보고도 조아라는 규영이 겪은 사건 하나를 추측해냈다.

‘여친분이랑 헤어졌나 보네.’

스타일리스트? 메이크업 스태프? 그런 사람이랑 사귄다고 했던가.

규영은 조아라의 앞에 서서 두 눈을 비볐다. 그러자 잠에 취해 늘어져 있던 쌍꺼풀이 선명해졌다.

그는 뒤를 보지도 않고 매니저에게 말했다.

“형 얼마나 시간 있어요.”

“카메라 리허설까지…… 2시간?”

“씁, 뭐, 그렇대요.”

규영은 어디서 얘기할 거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조아라는 대기실 안을 보았다.

시에이스 멤버들이 후배님 혹은 미래의 제수 씨가 될지도 모를 조아라를 향해 소리 없는 환호를 보냈다.

그걸 보고 조아라는 픽 웃었다.

‘하긴, 직접 찾아온 걸 보면 오해할 만하지.’

당장 뒤따라오는 안이상이 그러한데 남들이라고 안 그럴까.

“1층에 카페 갈래요?”

“거긴 사람이 많아서 별론데.”

“그럼 자판기 앞에 벤치?”

“거기도 사람이 많아서 별로.”

“그럼 뭐 어디 가자고요?”

“어…… 카페로 가죠.”

잠이 덜 깨서 그런가, 사람이 영 맥없어 보인다.

조아라와 규영, 그리고 둘의 매니저들은 함께 방송국 1층의 카페로 향했다.

규영은 커피 대신 차를 시켰다. 카페인을 너무 많이 마셔서 그런지 속이 안 좋다는 이유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조아라가 아이스 브레이킹 겸 가벼운 화제를 꺼냈다.

“선배님 앨범 잘 팔던데, 축하해요.”

“잘 팔긴……. 우리 팬싸 오지게 많이 돌려서 중복으로 수십 장씩 사게 하는 건데…….”

옆에서 듣던 규영의 매니저가 기겁했다.

시에이스는 슬슬 계약 기간이 끝나간다. 매니저에게도 쉽게 쫄던 옛날의 그가 아니었다. 몇 년 동안 연예계 물은 먹을 대로 먹었다.

“팬싸 얼마나 하는데요?”

“후배님은 얼마나 해요?”

“뭐, 한두 번?”

“우린 활동 기간 동안 거의 주에…….”

“규, 규영아 그건 말하면 안 되지.”

매니저가 말리자 규영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코로 한숨을 푹 내쉬더니 차로 입술을 적혔다.

“그래서 후배님 왜요? 뭐가 궁금한데요?”

“선배님 왤케 시니컬해졌어요.”

“원래 내 성격인가 보죠. 왜요, 옛날이랑 달라요?”

“옛날엔 대학 새내기처럼 활기찼잖아요.”

“뭐…… 그랬던가.”

“‘아오아’ 나가보셨죠?”

규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몇 년 전이냐 그게.”

“3년인가 4년 됐어요. 잘 추던데요? 그거 알아요? 우리 ‘롱 포’ 때 메인 의상 컨셉, 선배님 그거 영상에서 따온 거.”

“정장?”

“네.”

그 이야기엔 규영도 놀랐다.

자신의 영상이 다른 그룹에 영감을 줬으리란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진짜예요?”

“내가 거짓말해서 뭐 해요.”

정말이었다.

조아라가 ‘롱 포’ 앨범 작업 당시 의상 아이디어를 내면서 보여주었던 영상은 규영의 것이었다.

정확히는 규영이 ‘아오아’에 출연했을 때 선보인 퍼포먼스였다.

“어…….”

규영은 입꼬리를 씰룩댔다.

기쁜 것이다.

그는 칭찬을 들은 아이가 기쁨을 숨기려 노력하는 것처럼, 괜히 의자에 등을 기대어 여유로운 티를 내려 했다.

“음, 뭐, 도움이 됐다니 기쁘네요. 그래서, 나가는데?”

“나갈 만해요?”

규영은 조아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단번에 깨달았다.

옛날에 그녀를 만났을 때부터 느낀 게 있다.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멘탈리티를 가졌다.

“나가는 목적은요? 회사가 시켜서?”

“회사가 물어봤어요. 나갈 거냐고.”

“나갈 거예요?”

“모르겠어요.”

“홍보가 목적이라면 나가요. 다른 목적이 있으면 들어야 대답해줄 수 있겠는데.”

조아라는 뜸을 들였다.

그러자 규영이 그녀 대신 말했다.

“춤으로 인정받고 싶다?”

“……네, 그쵸. 춤이 중요한 무대잖아요. 춤밖에 없는 무대고요.”

“사람들이 춤을 봐줄 거다…… 음. 그런 거면 나가요.”

규영이 간단히 답하자 조아라는 맥이 빠졌다. 하지만 규영의 이야기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근데 그 춤을 보임으로써 뭔가 아티스트로서 인정받고 싶다, 그러면 그다지 좋은 선택은 아녜요.”

조아라는 그가 하는 말이 정확히 어떤 뜻인지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감만은 확실히 느꼈다.

규영은 정확히 조아라의 속내를 집어냈다.

“그러니까, 아라 씨 연습생 되기 전에 스트릿 댄스 했었죠? 대회 영상 봤어요. 그때랑 같은 감각으로 서면 실망해요.”

“실망요?”

“스테이지 위의 플레이어로서 인정받고 싶단 거잖아요. 그게 안 되거든요, 웃기게도. 프로그램 이름이 ‘아티스트 오브 아티스트’인데, 아티스트로 봐주질 않아요. 뭐라고 하나…….”

“어차피 시키는 걸 할 뿐이니까?”

“어, 맞아요. 그냥 평범한 무대랑 똑같아요.”

“아이돌이라서?”

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메인 댄서들은 고달프죠. 직접적으로 ‘잘한다’라고 느낄 만큼 실력을 보여줄 수 없잖아요. 메인 보컬처럼 직관적으로 사람들이 ‘잘한다!’라고 하지도 않고. 회사가 그런 파트를 주지도 않고……. 보컬보다 취급이 박하죠. 물리적으로 눈에 보여서 그런가.”

“무슨 뜻이에요?”

“인형이라고요, 인형.”

규영이 태엽을 돌리는 시늉을 했다.

“태엽 돌리면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인형. 어차피 우리가 하는 거 전부 누가 만든 거고, 그걸 따라 할 뿐이고, 그러니까 보는 건 그냥 우리 얼굴…….”

예쁘고 멋진 사람이 춤을 추니까 보기 좋다.

그 정도의 감상일 뿐이다.

저 사람 춤이 대단하다, 라고 보진 않는다.

“댄서들 대회는 춤을 보러 오잖아요. 그러니까 춤으로 인정받는 거고. 우린 아이돌이니까, 그런 면은 포기해야죠. 종합 예술인…… 이라고 하면 너무 거만해 보이나. 댄스 가수? 엔터테이너? 아니 그냥, 아이돌니까.”

“표현자로 봐주고 그러지 않아요?”

“……표현자?”

“왜, 클래식 연주자들 같이요. 이미 만들어진 걸 연주하지만, 예술가라고 하잖아요. 아티스트.”

“대중음악 듣는 사람들이랑 클래식 듣는 사람들 생각이 같다고 생각해요? 듣는 귀가 같고?”

할 말이 없었다.

클래식을 즐기려면 지식과 경험이 필요하다. 직관적으로 즐길 수 있는 건 잠시거나, 아주 소수의 경우뿐.

그에 비해 대중음악은 왜 대중음악이겠는가.

듣자마자 그 재미와 즐거움을 이해할 수 있고, 그대로 즐길 수 있으니 대중음악이다. 해석과 지식이 필요하면 대중음악이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나도 후배님 마음 아는데, 그런 마음가짐이면 지쳐요.”

“……선배님은 왜 아이돌이 됐어요?”

“돈을 많이 버는…… 춤출 수 있는 일이라서요. 근데 만족해요. 돈과 인기를 얻었으니까, 뭐 하나는 포기해야죠.”

춤으로 얻는 인정은 포기했다.

세상사 다 그러하다.

모두 얻을 순 없다.

조아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표정만큼은 ‘아오아’ 촬영을 마치고 규영이 말했던 모든 고뇌를 겪은 후인 듯했다.

“근데.”

그때 규영이 처음으로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좋았어요. 최종 결과 내는 거.”

“아, 선배님 이겼었죠.”

‘아오아’는 세 명의 아이돌이 대결을 펼치는 것이다. 그 판단 기준은 영상 조회 수나 대중의 투표, 혹은 전문가의 심사가 아니었다.

“네, 이겨서 좋았어요. 아니, 이긴 거보다 같이 나간 사람들한테 인정받은 게 좋았지. 행복했어요.”

같은 출연자들의 투표가 승리의 기준이다.

단 세 명의 출연자들이 자신을 제외한 이에게 표를 준다. 홀수이기에 결과가 무조건 난다.

물론 세 명 모두 한 표씩 얻으면 훈훈하게 무승부로 끝나기도 한다.

그 가운데서 규영은 2표를 얻어 승리했다.

규영이 드물게도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내 영상 조회 수가 아마 지금 1,000만이 넘을 텐데. 1,000만 명이 봤던 거보다, 그 2표를 얻은 게 훨씬 진짜 훨씬 훨씬 좋았어요.”

같은 고민과 특기를 가진 이에게, 같은 세계에 사는 이에게 인정받은 것이니까.

춤으로 인정받았으니까.

“그걸 바란다면, 출연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아니, 무조건 출연해요.”

“선배님.”

“네?”

“아이돌로 오래 활동했잖아요.”

“그죠.”

“아까 인형이라고 했는데, 진짜 그렇게 생각해요?”

규영이 소탈하게 웃었다.

“그런 말이 거슬리기엔, 아이돌로 너무 오래 지냈네요. 후배님이 거슬렸으면 미안해요.”

“아뇨.”

규영이 흠칫했다.

조아라가 말한 ‘아뇨’는 사과를 받는 사람의 어투가 아니었다. 마치 당장이라도 싸움에 뛰어들 듯한 사람의 목소리 같았다.

하긴, 의지가 없는 인형이라고 부르는 데 기분이 좋을 사람이 어딨겠는가.

경찰한테 권력의 앞잡이라고 하거나, 의사한테 돈에 미쳐서 생명을 구별하는 놈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어느 직업이건 경멸하는 표현이 있고, 규영은 상대를 향해 그 표현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규영이 어색하게나마 사과하려던 때, 조아라가 다시 말했다.

“선배님 덕에 떠올랐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쾌활하기까지 했다.

“뭘요……?”

“컨셉요, 컨셉. 이번 앨범 곡 컨셉!”

조아라는 흥분하여 일어났다.

규영은 그걸 보면서 어버버 거리다가, 아까 했던 말을 되뇌었다.

“음, 뭐, 도, 도움이 됐다니 기쁘네요…….”

자신도 데뷔 3년차 정도일 땐 저렇게 눈이 빛났을까.

규영은 괜스레 씁쓸해졌다.

* * *

약속 시간보다 빨리 조아라가 작업실로 들어왔다. 그녀 없이 군것질을 하고 있던 세 명이 깜짝 놀라 허겁지겁 그녀를 맞았다.

성필은 입 안에 빵이 든 채로 말했다.

“으어, 어, 아라야. 벌써…….”

“아저씨 나 곡 컨셉 떠올랐어요!”

“뭐?!”

컨셉은 됐으니 댄스 구성부터 신경 쓰겠다고 하던 조아라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니!

성필은 미처 씹지도 않은 빵을 목구멍으로 밀어 넣으면서 자리를 잡았다. 그러자 리카와 정지음도 뭔가 큰일이라도 벌어질 것처럼 재빠르게 앉았다.

조아라가 만면에 흥분을 띤 채 말했다.

“인형이요, 인형.”

“인형?”

“오토마타(자동인형)요! 알아요?”

내부에 동력 장치가 있어 스스로 움직일 수 있는 인형을 말한다.

서양에선 인간―기계론 철학이 발전했다. 동물-기계론에서 한층 더 과감하게 나아가, 인간조차 기계로 보는 철학. 인간은 기계이니, 잘 설계하면 인간을 만들 수도 있겠단 생각이 말이다.

그리하여 증기와 태엽을 이용해 인형을 인간처럼 움직이려는 시도가 곳곳에서 발생했고, 그로 인해 태어난 것이 자동인형이다.

일본에서도 18세기~19세기에 태엽을 이용한 자동인형인 가라쿠리가 만들어졌었다.

“자크 오펜바흐의 오페레타 중에 호프만 이야기란 게 있는데…….”

“잠시만, 아라야 조금만 진정해.”

“왜요!”

조아라는 괜찮은 아이디어를 떠올린 사람들이 그러하듯 잔뜩 흥분해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말을 계속 듣고만 있을 순 없었다.

먼저.

“오페레타가 뭐야?”

“그것도 몰라요? 오페라인데 춤이랑 대사랑 오케스트라가 있어요.”

정말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조아라는 춤에 관련해서 만큼은 굉장히 사소한 것마저도 알고 있었다.

“암튼 거기에 ‘올림피아’란 자동인형이 나와요. 사람으로 착각할 만큼 사람 같은 자동인형요. 결국엔 태엽이 망가져서 멈춰요.”

“그으, 그러니까 극을 표현하고 싶단 거야?”

“아뇨! 아 왜 이렇게 이해를 못 해요?”

네가 제대로 설명을 안 하니까 그러지…….

“그니까, 인간기계론은 기계를 인간으로 만들려는 시도잖아요? 그걸 나는 역으로 표현하고 싶다고요.”

“인간을 기계처럼? 자동인형으로?”

“네. 오늘 규영 선배랑 얘기하는데 떠오르더라고요. 뭐 아이돌이 시키는 대로 하는 인형이다 같은 말 많잖아요? 해외에서도 기획사 명령대로 움직이는 뮤지션한테 인더스트리얼 베이비라고 하고.”

“아라야 그건 해외에선 아티스트의 삶과 음악적 메시지가 일치하는 걸 최고의 가치로 치는 조류가…….”

“알아요 나도 아저씨 음악사 강의 들었어요! 얼터너티브 록이랑 힙합의 가치관 진정성 뭐 어쩌고저쩌고 안…….”

“그런 사람들은 컨셉이나 기믹이나 캐릭터 같은 거 자체를 그냥 안 받아들이니까 설득할…….”

“안다고요! 내가 말하자는 건 그런 게 아니라요…….”

조아라는 흥분으로 인해 동공이 크게 팽창한 상태로, 그야말로 흥분의 도가니에서 말했다.

“사람들이 우릴 인형으로 보면, 진짜 멋진 인형이 돼보자는 거예요!”

“……인형이 돼?”

사람들이 아이돌을 비하할 때 쓰는 용어를 아예 컨셉으로 잡자는 건가?

“기계처럼! ‘와, 인간이 저렇게 해?’ 그렇게 아예 감탄하도록! 인간기계론을 역으로 뒤집은 거예요! 인형이라고 무시하면 진짜 무시 못 할 정도로 대단한 걸 하자는 거죠!”

즉, 기교의 극에 달하자는 이야기였다.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몇 시간에 이르는 안무를 소화하는 발레리나.

플레절렛을 장시간 이어가는 오페라 가수.

이미 창조된 것을 수행하지만, 예술가로 불리는 이들처럼. 그 창조된 것 자체의 기교 수준을 끌어올리자.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도록.

“어때요? 이 컨셉?”

조아라는 몰랐으나,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무용의 한 조류에 다가서게 됐다.

리애니메이팅(ReAnimating).

애니메이션이 현실을 묘사하려는 노력이라면, 리애니메이팅은 반대다. 현실로 묘사할 수 없을 만한 것을 현실로 가져오려 한다.

예를 들어, 비인간적인 움직임을 보여주려는 기계라던가. 혹은 자동인형의 움직임을…….

“제목은 비유적으로 하면 ‘올림피아’로 하고, 직설적으로 하면 ‘오토마타’. 진짜 더 직접적으로 하면 ‘인형’? 아, 이건 엡실론 선배님들 곡명이라서 안 되나? 그럼 ‘자동인형’?”

정지음과 리카는 침묵을 지키며 성필을 보았다.

성필도 딱히 말이 없었다.

컨셉 단어가 나온 것만으로도 엄청난 진전이다. 사실상 컨셉 단어로 이후의 작업은 엄청난 박차를 가하게 될 것이다.

컨셉은 곡만이 아니라 안무, 뮤비, 의상에도 영향을 끼치니 동시에 일을 진행할 수 있게 된다.

그럴 텐데, 성필은 답이 없다.

조아라는 불안해져서 피를 진득하게 끓이던 흥분마저 가라앉았다.

“뭐, 별로예요……?”

성필은 코로 천천히 숨을 뱉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훌륭하다, 아라야.”

“그죠? 맞죠?! 최소한 혁명보다 백배 낫잖아요!”

“너 그거 별로라고 생각했어?!”

고작 ‘자동인형’이란 단어 하나.

그게 앨범 작업을 통해 어디까지 발전할 수 있을까. 성필은 벌써부터 기대됐다.

이대로 조아라와 컨셉 회의에 들어가도 되겠지만, 성필은 이성을 되찾았다.

“우리도 너한테 할 말 있어.”

“뭔데요?”

성필이 눈짓하자 정지음은 노트북 앞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곡을 재생했다.

조아라에게 ‘컴플렉스트로’, 혹은 그와 비슷한 스타일을 이해시키기 위한 곡들이었다.

버츄얼 라이엇, 스크릴렉스, 포터 로빈슨의 옛 작품을 포함시켰다.

성필은 곡을 들으면서 설명했다.

“지금 들으면 약간 구식이라고 느낄 수도 있어. 원래 일렉트로닉이 그런 느낌이 진하거든. 케이팝 곡 중에서도 이 스타일에 영감을 받아 쓴 사운드나 흐름이 꽤 있어. ‘이거 옛날 거 아냐?’란 생각이 드는 것도 당연해.”

조아라가 느꼈으면 하는 건 분위기다.

정지음과 리카에겐 그리 말했지만, 성필은 조아라가 다르게 받아들일 걸 알았다.

‘아라가 가장 주의 깊게 들을 건 복잡하게 교차하는 선율 같은 게 아니라, 리듬.’

이 변화무쌍함은 분명 조아라에게 영감을 주고, 그녀의 마음에 들 것이다.

성필에겐 확신이 있었다.

게다가 이 장르 곡들의 분위기는 조아라가 제시한 ‘자동인형’이란 주제에도 맞아들어갔다.

태엽과 증기가 아니라 전기로 움직이는 인형, 로봇이라면 말이다.

“그리고 이게.”

정지음이 마지막 곡을 재생했다.

이는 기존의 곡이 아니었다.

정지음과 리카가 해당 장르를 최대한 대중음악에 적합하도록, 멜로디컬하게 짠 곡이었다.

물론 정식으로 쓸 게 아니라, 조아라에게 분위기만 전달하기 위해 즉석으로 만든 것에 불과했다.

“아마도 최종 결과물과 가장 비슷한 스타일이야. 대중음악의 송 폼을 지키면서 만들었어.”

“아저씨.”

조아라가 무표정으로 성필을 보았다.

흥겨운 리듬과 멜로디가 방을 뒤덮은 가운데 보이기엔 너무나 차가웠다.

혹시 앞에 서 있는 조아라가 진짜가 아니라 자동인형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성필은 괜히 움츠러들었다.

“어, 응…….”

“이거 하자고 한 거 누구예요?”

조아라는 성필은 물론 리카와 정지음도 보았다. 조아라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았던 리카는 바로 성필을 팔았다.

혀를 내밀어 성필을 가리켰던 것이다.

조아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저씨가 하자고 했어요?”

“응, 그런데…….”

“뽀뽀해줄까요?”

“어?”

“아니, 진짜 찰떡인데? 내가 진짜 찾던 거예요. 어, 이거!”

“아타시(내)가 하자고 했어!”

리카가 입술을 들이밀었지만 조아라는 반응하지 않았다. 조아라는 옆에 리카를 달고, 아까처럼 흥분해서 말했다.

“나 솔직히 덥스텝 하고 싶었거든요? 근데 케이팝에서 들어본 적이 없는 거 같아서 말을 못 했어요. 괜히 되지도 않는 거 말하면 아저씨 혼자 끙끙 앓을까 봐요.”

“괜한 걱정을…….”

“근데 이런 거 해도 돼요?”

“되지 그럼. 아라가 하고 싶으면 뭐가 안 될까. 오케스트라 사운드도 써줄 수 있어.”

“아라야 속지 마.”

정지음이 끼어들었다.

“의외로 이런 거 케이팝에도 많더라고. 가사 빼고 인스트루멘탈버전으로 들으니까 다 알겠어. 의외로 흔해. 아니, 흔하다고 할 만큼 많지는 않지만…….”

“어떤 거요? 대표적으로 뭐 있어요?”

“많이 옛날 건데, 다키스트의 ‘더 킹’이 이 스타일이었어.”

“진짜요?!”

조아라는 ‘더 킹’의 인스트루멘탈 버전을 듣곤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그런 느낌이 났다.

“근데 이건 옛날 느낌이 별로 안 나네요.”

“그게 대단한 점이지.”

“암튼 뭐…… 아저씨, 잘했어요. 뽀뽀는 받을래요 말래요?”

“왜 자꾸 물어봐. 당연히 안 받지.”

“나중에 뭐라고 하지 마요.”

“아타시(나)도 노력했어! 아라쨩 설득하려고 데모곡도 만들었는데! 내가 열심히 만들었는데!”

참고로 정지음도 노력했다.

하지만 조아라의 뽀뽀를 노리는 것으로 보이고 싶진 않아서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때 조아라가 기습적으로 리카의 뺨에 입술을 부딪쳤다. 거의 부딪친 수준이었지만, 리카는 얼굴이 확 붉어져선 방방 뛰었다.

“아라쨩 대담해!”

“네가 해달라면서.”

“빨리 아라쨩 어장에 넣어줘! 물고기가 될게! 가끔 사료만 줘!”

“아라야.”

“왜요?”

성필이 묻자 조아라가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얼굴엔 큰일이라도 이룬 듯한 행복이 가득했다.

성필은 물으려고 하던 말이 쏙 들어갔다.

물을 필요도 없으려나 했지만, 혹시 몰라 말했다.

“정말 괜찮은 거야? 이런 스타일로 좋아?”

“좋아요.”

“아타시(내)가?”

“너 말고.”

조아라가 성필에게 눈웃음을 지었다.

“진짜 좋아요.”

“하아, 다행이다.”

“아 맞다 또. 나 ‘아오아’ 나갈래요?”

“어? 나 아직 너한테 안 들이댔는데?”

리카와 정지음이 무슨 뜻이냐는 듯 성필을 보았다. 그에 성필이 재빨리 변명했다.

“아라가 자기 ‘아오아’ 나가는 거 바라면 적극적으로 들이대랬단 말야! 내가 뭘 하겠단 게 아니라 아라가 시킨 거야!”

“맞네. 아직 아저씨 안 들이댔는데. 어떡하지.”

“뭘 어떡해. 나가기로 했으니까 그쪽에 말한다?”

“음, 그러면, 나중에 밥 한 번 사죠.”

“그 정도야 뭐…….”

“술도.”

“너 방금 드라마 대사…….”

“맞고, 창피하니까, 말하지 마요. 연기도 아무나 할 게 아니네.”

아니, 엄청 잘 어울렸는데…….

역시 연기를 시켜야 할까?

‘무슨 연기야.’

지금은 앨범 작업에 집중하자.

“자, 그럼.”

조아라가 소파에 앉았다.

“폐관 수련, 다시 들어갈까요?”

폐관 수련 2일 차, 시작!

“하기 전에!”

성필이 말했다.

“아저씨 또 왜요. 왜 초 쳐요.”

“이걸 제일 먼저 말했어야 하는데, 깜빡하고 있었네. ‘아오아’에 나오는 출연자들.”

“누구 나와요. 누가 나오든 내가 다 패버릴게요.”

“케이어스 진저 씨.”

“…….”

“에, 아라쨩 혹시 쫄았어?”

“아니.”

조아라는 찰랑이는 단발을 손으로 가볍게 쓸어 넘겼다. 봄날의 바람을 맞아 머리칼을 쓰는 것처럼 여유로웠다.

“상대로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을 뿐.”

“아라쨩 츄니뵤(중2병).”

“진저랑 또 누군데요?”

“확실하지는 않은데…….”

* * *

“에이 씨팔 안 해!”

글로브의 멤버, 지유가 테이블을 뒤집었다.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생수병이며 다과가 이리저리 날아갔다. 그 앞에 서 있던 윤상열의 얼굴에 과자 부스러기가 타닥타닥 날아가 붙었다.

우당탕탕!

쓰러진 테이블이 굉음을 만들어냈다.

윤상열이 아래를 보고, 다시 지유를 보았다.

“뭐?”

“안 한다고 이 개새끼야!”

“너, 너, 너……!”

“응 고소해! 위약금 물게! 글로브 앞으로 6인조로 활동시키든가 지랄하든가! 우리 집 존나 부자라서 돈 다 낼게! 법정에도 설게! 네 맘대로 지랄하면서 잘 살아라 캬악 퉷!”

지유는 침을 뱉는 시늉만 했다. 그것만으로도 윤상열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가 입술을 벌벌 떨었다.

지유는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연습실을 나가려 했다. 멤버 중 누구도 그녀를 잡지 못했다.

오직 리더인 라희만이 제정신이었다.

“지유야, 거기 서.”

“…….”

지유는 서서, 뒤로 돌았다.

그녀는 허리를 굽혀 바닥에 떨어진 과자 봉지를 집어 들었다. 그것을 윤상열에 얼굴에 집어 던졌다.

멤버들이 2차로 경악했다.

“엿이나 처먹어라 이 X만한…….”

인터넷으로 다져진 욕설을 후련하게 뱉어낸 지유는 망설임 없이 연습실을 나섰다.

“…….”

“PD님, 괜찮으세요?”

멀쩡한 라희만이 손수건을 가지고 와 그의 얼굴과 옷에 붙은 과자 부스러기며 여러 가지를 닦아주었다.

“스읍, 하아…….”

윤상열은 울먹임이 섞인 듯한 한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주마등이 스쳐 지나가고, 그의 마음속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한숨 또한 흘러내리는 피와 같이 생명을 담아 낮은 소리로 빠져나오는 듯했다.

“하아아…….”

라희는 윤상열의 바로 앞에 서 그의 얼굴을 가려주었다. 그리고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그의 눈가를 두드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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