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5화
소녀연맹이 소화할 스케줄은 두 가지 통로로 만들어진다.
섭외 요청이 들어오거나, 매니지먼트팀이 일을 구해오거나.
매니지먼트팀이 구해오는 일은 가로 엔터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일이니, 소녀연맹이 무조건 수행한다.
‘이번 더 스튜디오 출연은 외부에서 요청이 들어온 것.’
이 경우 매니지먼트팀에서 자체적으로 판단을 내린다. 이후 그 스케줄을 A&R팀, 즉 프로듀싱 파트에서 심사한다.
소녀연맹의 이미지나 팀컬러에 적합하다는 결론이 나오면, 최종적으로 홍규헌에게 허가받는다.
그러나 모든 일이 프로듀싱 파트의 심사로 결정되는 건 아니다. 매니지먼트팀도 프로듀싱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으니, 간단한 건 그들 선에서 결정하기도 하니.
‘예외는 우리 애들의 자발성이 중요한 일이거나, 애들의 멘탈과 체력에 피해를 줄 수 있는 일.’
더 스튜디오 섭외 요청은 이 두 가지 모두에 해당된다.
오리지널 퍼포먼스를 펼치게 되니 조아라의 자발성이 중요하고.
컴백 타이밍에 맞춰서 준비하게 될 테니 조아라의 체력이 걱정이고.
무엇보다 경쟁 대상이 진저이니 조아라의 멘탈 또한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비슷한 사례는 설하가 더 언노운 싱어에 출연했을 때, 하양이가 패션쇼에 섰을 때, 리카의 일본 체류 결정 당시, 그리고 아름이한테 특별 스테이지 일정이 잡혔을 때.’
그렇다.
어떤 일을 받아들일 때는 멤버들의 의사가 중요하다. 하지만, 모든 일을 멤버들에게 물어보고 정하진 않는다.
사실상 대부분의 일은 가로 엔터에서 자체적으로 판단하여 진행하니까.
그리고 프로듀서인 성필은 이렇게 생각했다.
‘스케줄 자체를 아라한테 안 알리는 쪽이 나을 거 같아.’
성필은 민경섭에게서 온 문자를 다시 확인했다.
민경섭은 일을 받는 쪽이 좋다곤 했으나, 한 가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바로 소녀연맹의 컴백 퍼포먼스와 ‘아오아’에서 선보일 오리지널 퍼포먼스를 조아라가 동시 숙달해야 한단 점이었다.
‘아라가 받을 체력적, 정신적 스트레스를 걱정하는 거겠지.’
조아라는 분명 하겠다고 할 것이다.
‘아오아’ 출연은 소녀연맹의 컴백을 홍보할 매우 좋은 방법이었으니.
‘그렇지만 이 일 하나 안 받는다고 홍보가 부족하진 않아.’
김민주와 마주하는 신아름.
에리카와 마주하는 백설하.
진소유와 마주하는 장하양.
그녀들은 라이벌인 케이어스와 연관될 때마다 심리적인 부담감을 느꼈었다. 긍정적이기도, 때론 부정적이기도 한 부담감 말이다.
‘아라는 진저 씨와 경쟁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을 거야.’
그것뿐이면 괜찮다.
건전한 경쟁심은 성장에 도움이 되니.
‘문제는 그게 앨범 작업, 컴백과 함께 이뤄진다는 점이야.’
조아라는 소녀연맹 컴백 성적으로도 스트레스를 받을 게 분명하다. 그게 얼마나 큰 압박감인지, 성필은 이미 알고 있었다.
프로듀서 본인인 성필이 받았던 압박감은 말할 것도 없었다.
‘우리들의 프로듀싱을 진행하면서 설하가 느꼈던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했겠지.’
그 스트레스에 더해 라이벌과 경쟁을 벌인다. 그냥 라이벌도 아니고 열등감을 지닌 대상과 말이다.
사람이 할 게 못 된다.
그러니…….
“어? 뭐야.”
성필이 복도에서 고민을 이어가던 중, 문이 열리고 조아라가 고개를 내밀었다.
“아저씨 계속 여기 있었어요? 바람 쐬러 간다면서요.”
“바람 쐬고 있잖아.”
성필은 얼굴에서 고민을 지워버렸다. 그리고 활짝 열린 창문을 가리켰다.
슬슬 여름도 끝나가려는지, 창문으로 선선한 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조아라는 그것을 기분 좋게 느끼더니, 성필에게 손짓했다.
“뭔 바람을 그렇게 오래 쐬어요. 할 거 없으면 들어와요. 데모 버전2랑 3도 빨리 들어봐야죠.”
“야식 먹고 한다며?”
“놀면 뭐 해요.”
성필은 조아라의 표정을 살폈다.
오랜 작업 때문에 피로감이 엿보였지만, 압박감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녀는 앨범 작업 과정을 즐기는 걸까?
모를 일이다.
‘설하도 초반에는 기력이 넘쳤으니까.’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낙타.
그 낙타의 등에 바늘 하나를 떨어뜨린 순간, 낙타는 무너질 수도 있다.
지금은 꿋꿋하고 씩씩하게 이 과정을 버티는 조아라도, 사소한 바늘 하나에 무릎을 꿇을 수도 있다.
“어, 들어갈게.”
그런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서, 성필은 조아라에게 최대한 짐을 지우지 않길 바랐다.
데모를 들으며 의논하는 도중 치킨이 도착했다.
네 사람은 걸신들린 듯 빠르게 야식을 해치웠다. 뭔가를 먹고 나니 일할 의욕이 사라졌다.
밤도 늦고 해서 슬슬 돌아가기로 했다.
오늘만이 날이 아니니까.
이 폐관 수련은 며칠 동안 이어질 것이다.
“보드게임 해요!”
다들 돌아갈 기미를 보이자 리카가 다급하게 말했다.
“한 판만이라도요! 재밌어요! 제가 정말 재밌을 걸로 가져왔어요!”
다들 그다지 반기지 않자 리카는 아까보다 훨씬 더 다급하고 절박하게 말했다.
리카가 저렇게 부탁하니 한 판 정도는 괜찮겠지. 모두 나갈 채비 대신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때 정지음이 성필의 팔을 툭툭 쳤다.
“형, 편의점 갔다 올래요? 입 심심할 거 같아서요. 에너지 드링크도 떨어졌고요.”
“너 그러다 신경 망가지는 거 아니야? 에너지 음료 좀 그만 마셔.”
“내 피예요, 피.”
“아타시(저)는 아이스크림으로 부탁할게요!”
“난 제로 슈가 과자요.”
성필과 정지음은 집을 나섰다.
나오자마자 정지음은 ‘어우’ 소리를 내면서 몸을 움츠렸다. 생각보다 밤이 쌀쌀했던 까닭이다.
성필은 동네 밤거리를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그때 정지음이 말했다.
“형, 그냥 폐관 수련 끝내는 거 어때요?”
“어? 왜?”
“아라가 부담가지는 거 같아서요. 차라리 A&R팀 자체적으로 곡을 준비하고, 아라는 빨리 퍼포먼스 구성 쪽으로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요.”
성필은 걸음을 멈추고 그를 응시했다. 그러다가 짧게 물었다.
“아라가 뭐라고 했어?”
* * *
성필이 나간 방.
남은 세 사람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시간을 때웠다. 그러던 중 조아라가 가볍게, 친구의 안부라도 묻듯이 말했다.
“지음 오빠, 솔직히 나랑 작업하는 거 별로죠?”
해외 사운드 사이트에서 쓸 만한 효과음을 장바구니에 담고 있던 정지음.
그는 조아라의 목소리를 들었지만 무슨 의미를 지녔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되물었다.
“어어, 뭐가?”
“음악 하나도 모르는 애랑 작곡 작업이랍시고 하는 거요. 솔직히 전문가 입장에선 좀 아니꼽다거나, 안 그래요?”
그제야 정지음은 조아라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들었다. 그는 터치 패드에서 손을 떼고 조아라를 바라보았다.
약간 황당하다는 눈으로.
“뭐?”
“아니, 그렇잖아요.”
조아라가 드럼을 채로 툭툭 성의 없이 두드렸다.
“난 뭐, 쌤처럼 제대로 배우지도 않았고요. 오빠 입장에선 답답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요.”
“아, 아라쨩 왜 그래…….”
리카가 헤실헤실 웃으면서 경직된 분위기를 풀려고 했다.
“지금까지 잘했잖아! 겨우 하루밖에 안 됐……!”
“난 오빠한테 물었어.”
“…….”
“솔직히, 그냥 오빠 혼자 하거나 A&R팀끼리 하는 쪽이 훨씬 낫죠? 내가 작곡하겠다고 객기 부리는 것보다?”
정지음은 리클라이너 의자를 평범한 의자의 각도로 돌렸다.
“솔직히?”
“네, 솔직히.”
“솔직히, 어느 쪽이 더 나을지 확답 못 하지.”
“…….”
“네가 바라는 게 단순히 듣기 좋은 곡이었다면, A&R팀끼리 하는 게 훨씬 낫지. 그런데 그게 아니잖아. 네 머릿속에 있는 퍼포먼스 구성을 표현하기 위해선 댄서의 감각이 필요해.”
정지음은 의자에서 일어나 대강 느낌이 오는 대로 발을 굴렀다.
“난 춤추는 리듬이라던가 그런 거 하나도 몰라. 그냥 댄서들은 음악이 있으면 춤을 추는구나, 그 정도 인식밖에 없어. 난 작곡 단계에서부터 댄서의 심리를 떠올릴 수 없어. 그러니까, 네 목표를 이루려면 이 과정이 필요하지. 난 그렇게 생각해.”
그리 말하곤, 정지음은 한마디를 덧붙였다.
“형도 그렇게 믿을 거고. 불필요하지 않다고,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조아라는 정지음의 말을 듣고도 딴청부리듯 드럼을 계속 툭툭 두드렸다. 그러다가 조용히 물었다.
“그래도, 쌤이랑 할 때가 더 편했죠?”
“편한 거야 뭐…….”
조아라랑 할 작업을 백설하와 했다면, 시간이 절반 이상은 단축됐을 것이다. 만약 작곡을 습득한 리카와만 작업을 했다면 시간이 거의 1/10밖에 안 걸렸을 것이고.
하지만 숙련자와의 작업이 무조건 좋은 결과를 낸다고 보장할 순 없다.
오히려 음악을 전문적으로 배우지 않은 이들이 더 감각적인 곡을 쓰는 경우가 더러 있다. 마이클 잭슨이 그러했듯이.
‘아라가 자신감이 없나?’
작업을 시작한 지 겨우 하루밖에 안 됐는데.
정지음은 그녀의 걱정이 불필요한 고민이란 점을 더 설명하려 했다. 그에 앞서 조아라가 또 입을 열었다.
“폴 매카트니랑 마이클 잭슨 얘기 알아요?”
“어떤 얘기?”
“마이클 잭슨이 폴 매카트니한테 작곡 배우러 갔을 때요.”
폴 매카트니는 비틀즈의 멤버다.
보통 한국 사람들은 비틀즈가 그냥 엄청나게 유명했던 밴드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서양권에선 인식이 전혀 다르다.
비틀즈는 현대 대중음악의 스타일을 확립한 위대한 음악가, 밴드이다. 현대 대중음악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송폼(Song form)을 확립한 게 바로 비틀즈이니.
벌스(1절) - 코러스 - 벌스(2절) - 코러스 - 브릿지 - 코러스.
현대에 사는 사람이라면 익숙한 것을 넘어 귀가 닳도록 듣는 이 음악 형식을 확립한, 불세출의 음악가들.
현대 대중음악을 과거로 가져가면 성공하냐고? 성공한다. 비틀즈가 확립한 형식을 그대로 따른다면, 뭘 가져가도 성공할 거다.
그 비틀즈의 메인 작곡가가 폴 매카트니다.
“마이클 잭슨은 폴 매카트니한테 작곡을 배우고서 히트곡을 빵빵 써댔대요. 그전에도 잘 썼는데, 더 잘하게 된 거예요.”
마이클 잭슨의 앨범 ‘스릴러’는 세계적으로 1억 장 이상 판매됐다. 세상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다.
두말할 나위 없이 굉장한 천재다.
훗날 누군가 폴 매카트니에게 마이클 잭슨의 재능이 어땠냐고 물었다. 그에 폴 매카트니가 답했다.
“그냥저냥이었다고, 했더라고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앨범을 판 밴드, 비틀즈의 메인 작곡가답다고 해야 할까.
“난 마이클 잭슨도 그냥저냥이라고 할 만한 천재를 만난 적은 없지만요. 나보다 뛰어난 사람은 알아요. 쌤이요.”
조아라에게 백설하는 넘을 수 없는 산이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음악적으로 절대 백설하에게 도달할 일은 없을 것이다.
“쌤은 오빠랑 작업했었잖아요. 근데, 내가 오빠랑 작업해서 쌤보다 나은 결과물이 나올 거라곤 생각을 못 하겠어요. 내가 무슨 마이클 잭슨처럼 감각이 뛰어나서, 배운다고 잘할 거란 생각도 안 들고요.”
“…….”
“…….”
리카도 정지음도 입을 다물었다.
조아라가 백설하보다 더 나은 결과물을 낼 거다, 그리 쉽게 말을 꺼낼 순 없었다.
그리고 조아라의 고민도 이해가 됐다.
백설하가 이룩한 업적을 이어가야 하니 부담감이 이만저만이 아니겠지. 심지어 그녀와 같은 작업 과정을 따라가고 있으니.
“그래서 그냥…… 뭐, 내가 하겠다고 해놓고서 우습긴 한데.”
조아라가 어색하게 웃었다.
“음악은 오빠한테 완전히 맡기는 쪽이 낫지 않을까요? 나 같은 초보자랑 해봤자 오빠도 답답할 테니까…….”
* * *
“으아앙 말도 안 돼!”
리카가 파산 선고를 당하자마자 장난감 돈을 사방으로 흩뿌리면서 쓰러졌다. 그리고 아기가 보채듯이 사지를 흔들어가면서 앙탈 부렸다.
“얼마나 연습했는데에!”
운이 거의 전부인 게임을 아무리 많이 연습해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리카가 준비한 보드게임의 승자는 오늘따라 운수가 좋은 조아라가 되었다.
“아, 오랜만에 하니까 재밌네.”
“크윽, 분하다…….”
리카는 입술을 꼭 물면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거 받아. 상품이야. 소중하게 간직해야 해…….”
“뭔데?”
조아라는 선물을 받았다.
홍규헌의 바디 프로필 사진이었다.
“오.”
옆에서 사진을 본 정지음이 감탄을 터뜨렸다.
“‘오’는 뭔 ‘오’야?!”
성필이 재빨리 홍규헌의 사진을 가로챘다. 그에 리카가 반발했다.
“상품을 가지고 싶으시면 정정당당하게 승부에서 가져가세요!”
“내가 혼자 간직하랬잖아! 이렇게 상품으로 마음대로 뿌리면 어떡해! 너, 너 설마 나랑 한 이사님 사진도 막 다른 데 유출한 거 아니지?!”
“…….”
“진짜 유출했다고?!”
“이, 이에(아뇨)! 유출한 건 아닌데에…….”
“그럼?”
“한 이사님 바프 사진은 있는데, 박 이사님 바프 사진은 사라졌어요…….”
“사라졌다니?”
“잃어버렸어요…….”
성필은 이마를 탁 쳤다.
사라졌다니.
세상 어딘가에 자신의 사진이 돌아다니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몇 달 전부터 이상한 한기가 들더라니. 웬 괴한의 손에 들어가서 이상한 용도로 사용되는 건 아니겠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이건 압수야. 덤으로 한 이사님 사진도 돌려줘.”
“하이(네)…….”
“앞으로 너랑은 사진 안 찍어. 어디에 유출될지 모르니까.”
“손나(그런)!”
리카는 거의 울먹이면서 성필에게 용서를 구했다. 다신 이런 일이 없을 테니 사진 금지령을 내리지 말아 달라고.
애초에 같이 사진을 찍는 경우도 별로 없건만, 왜 이렇게 필사적인지 모르겠다.
이런 식으로 노는 게 오랜만이라 집에 돌아가지 않을 구실을 자꾸 만드는 걸까?
하지만 끝은 찾아온다.
성필은 리카를 달래어 일으키고 세 사람을 함께 배웅했다.
“지음아, 잘 부탁할게.”
“네. 제가 또 베스트 드라이버잖아요. 애들 숙소까지 잘 모실게요.”
“그거 유류비 권 경리님한테 청구해.”
“진짜 나 정 없는 사람으로 만들지 마요. 어차피 집 가는 길인데요.”
리카와 조아라는 정지음의 차 뒷좌석에 탔다.
뒷좌석 창문이 내려오고 리카가 고개를 내밀었다.
“박 이사님! 침대 냄새 맡거나 하면 안 돼요!”
“넌 나를 뭘로 보는 거야.”
“와 씨.”
리카의 옆자리에 있던 조아라가 크게 웃었다.
“맞네. 우리 쉴 때 계속 거기 앉고 눕고 했잖아. 소름 끼치네.”
“아주 확신범으로 몰고 가는구나…….”
“확신범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그리고 침대에서 아라쨩 시그니처 냄새가 나면 그건 아라쨩 냄새가 아니라 제가 뿌린 아라쨩 시그니처 프래그넌스니까 오해하지 마세요!”
“얘가 더 소름 끼치네. 너 그거 재고 아직도 갖고 있냐?”
“내 옷장 서랍에 열 개도 넘게 있어!”
“숙소 가자마자 폐기해야겠다.”
“그건 너희들 알아서 하고 빨리 가.”
성필이 손을 흔들었다.
리카는 창문을 올리지 않고 손 키스만 날렸다.
“형, 갈게요.”
“그래. 잘 가.”
정지음은 창문을 닫았다.
그의 차가 천천히 나아갔다.
그걸 보던 성필은 ‘하아’ 한숨을 쉬면서 차의 뒤꽁무니를 톡톡 쳤다. 차가 멈춰 섰다.
다시 운전석 창문이 내려왔다.
“형 왜요?”
“아라한테 잠시만 내리라고 해줄래?”
“네? 어, 네. 아라야.”
뒷좌석 문이 열리고 조아라가 나왔다. 그는 성필의 앞까지 와서 섰다.
날이 추운지 그녀는 팔짱을 껴 양팔을 손으로 덮고 있었다.
“추워?”
“쌀쌀하네요.”
“웃옷 벗어줄까?”
“뭐래. 어차피 차에 타고 가잖아요.”
“그러네.”
“왜요? 할 말 있어요?”
“‘아오아’ 나가볼래?”
조아라는 놀랐는지 눈썹이 올라갔다.
“더 스튜디오에 그거요?”
“응.”
성필은 원래 이 스케줄 자체를 자신의 선에서 끊으려고 했었다. 그런데 정지음의 이야기를 듣곤 마음이 바뀌었다.
조아라는 근본적으로 자신의 창조성에 의문을 품고 있었다. ‘롱 포’ 때 추가했던 댄스 브레이크는 단순히 운이 맞아들어갔다고 여긴다.
이러다가 조아라는 앨범 작업이 끝날 때까지도 확신 없이 괴로워할 것이다. 그전에 그녀의 능력을 일깨워주어야 한다.
‘아라는 20대 초반부터 안무가로 활동했어.’
댄스씬에서 플레이어로 활동하는 동시에 안무를 만들기도 했었다. 현재 조아라의 나이는 그때와 같다.
‘그리고 아라의 배움은 절대 그때보다 모자라지 않아.’
오히려 아이돌의 춤, 즉 방송 안무에는 훨씬 통달하고 있다.
그러니 안무 제작이 불가능할 리 없다.
현재의 조아라에게 없는 건 오직 경험뿐이다. 험난한 댄스 업계에서 악착같이 버텼던 경험. 끊임없이 자신의 창조성과 재능을 증명해야만 했던 삶.
‘그게 없어서 재능을, 창조성을 보일 기회가 없었을 뿐.’
그래서 자신감이 없을 뿐.
차라리 앨범 작업에 앞서 자신감이 생길 경험을 주도록 하자. 힘들겠지만 그녀에겐 반드시 필요한 일이리라.
“아니, 뭐, 좋긴 한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조아라는 빠르게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
일단은 기뻐하는 듯했다.
기회만 된다면 나가고 싶다고 말해왔었으니까.
그러나 ‘우리들의 프로듀싱’ 프로젝트를 맡으면서 할 수 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준비 기간이 길진 않아. 프로젝트 하면서 충분히 수행할 수 있어. 컴백 전에 촬영 다 끝낼 거야.”
“뭐, 컴백 홍보로 좋겠네요. 근데…….”
“아라야.”
성필이 그녀의 말을 끊었다.
“난 네가 거기서 춤추는 거 보고 싶어.”
조아라가 움찔했다.
그러고선 더듬더듬 말했다.
“……보고, 싶어요?”
“응.”
조아라가 ‘하’ 웃으면서 손부채를 부쳤다.
이젠 쌀쌀함 따윈 다 잊었단 듯 팔짱도 풀었다.
“아니, 왜 이렇게 적극적이래. 아저씨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말하는 거 나 연습생 영입할 때 빼고 처음인 거 같…….”
“그때만큼, 원해.”
조아라는 뺨을 검지로 긁적였다.
얼굴로 피가 너무 많이 모이면 미세혈관이 팽창해서 가렵다고 한다.
어둠 속으로 보이는 그녀의 안색은 명확하지 않았다. 그건 성필도 마찬가지였다.
조아라는 ‘흐으음’, 이유를 알 수 없는 낮은 콧소리를 내더니 눈을 치켜올려 성필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안…… 할래요…….”
“……응?”
안 해?
“왜, 왜?”
“왜냐고요?”
조아라가 성필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리고 속삭이려는 듯 얼굴을 더 가까이 가져갔다.
비밀 이야기라도 하려는 것일까.
성필이 무릎을 굽혀 그녀와 시선이 맞는 높이로 내려갔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돌려 귀 쪽을 내밀었다.
“내가.”
AMSR처럼 목소리의 떨림, 호흡마저 전부 들릴 만한 거리.
“춤추는 거 보고 싶어요?”
성필은 고막을 울리는 목소리에 소름이 돋아 몸이 떨릴 지경이었지만, 억지로 떨림을 참아냈다.
“응.”
“그럼.”
조아라는 입을 더 가까이 가져가고, 목소리를 더 낮추었다. 바닥에 들러붙을 정도로 낮고 끈적하게.
“더 적극적으로 들이대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