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회 안 하는 프로듀서-514화 (514/760)

514화

성필은 투룸에서 산다.

방이 두 개라지만 영상 감상실 겸 침실, 즉 하나의 방을 제외한 다른 방은 딱히 쓰지 않는다.

그나마 드레스룸으로 이용하는 정도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창고나 다름없었다.

성필은 창고에 다른 아이돌 관련 굿즈, 특히 조아라가 보면 기분이 안 좋을 케이어스 용품들을 몰아넣었다.

‘이제 끝인가?’

성필은 마지막 박스를 창고에 몰아넣은 후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냈다.

시계를 확인하니 약 20분이 지나 있었다.

정지음과 조아라를 집 밖에 20분이나 세워 뒀으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성필은 마지막으로 침실을 확인하곤 현관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들어와.”

“빨리 끝났네요.”

쪼그려 앉아 기다리던 조아라는 전자 드럼이 든 박스를 들고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를 정지음이 호기심 넘치는 눈빛과 함께 따라왔다. 그는 옛날 옛적, ‘아니’ 녹음 당시 병문안하러 올 때를 제외하고 성필의 집은 처음이었다.

“다시 봐도 형 좋은 데 사네요.”

현관에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복도는 넓고 쾌적했다. 좌측에 달린 큼지막한 창문에선 자연조명 역할의 따스한 햇볕이 시원하게 비쳐 들어왔다.

복도 끝에 보이는 주방은 매우 깔끔하고 넓었다. 정지음은 신발을 벗으면서 구석구석을 살폈다.

“전세죠? 얼마예요?”

“어…… 몇 번 올라서 1억 7,000만 원. 처음 계약할 때보다 꽤 비싸졌어.”

“처음 들어올 땐 대출 껴서?”

“응.”

“다 갚았어요?”

“응.”

“그럼 형 억대 자산가네요?”

“내 손에 돈이 없는데 무슨 억대 자산가야.”

“오빠, 아저씨 집에 왤케 관심이 많아요.”

조아라는 현관 앞에 우두커니 멈춰 선 정지음에게 타박하듯이 물었다. 정지음은 머쓱해선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나도 집 새로 구하고 싶어서 그러지.”

“……지음이 너 설마 나랑 만났을 때 살던 곳에서 계속 살아?”

“네…….”

일시불로 차를 사더니 돈이 없는 걸까? 아니, 더 나은 월세로라도 옮기지.

가로 엔터의 뮤직 프로듀서가 그 좁은 원룸 생활을 계속하고 있던 건가?

성필이 어이없단 듯 쳐다보자 정지음이 변명했다.

“저는 환경이 바뀌는 거에 거부감 있어요.”

“너 환경 안 바꾸면 언젠가 마음이 곪아. 이상한 음향 기기 사지 말고 집부터 옮겨.”

“이상한 음향기기가 아니라 꼭 필요한 거예요!”

정지음.

인간의 필수 조건이라는 의식주보다 음향기기가 소중한 남자.

그에겐 음악이 곧 유흥이고 여자고 이하 생략.

조아라와 정지음은 성필의 침실, 오늘은 작업실로 쓰일 공간으로 들어왔다.

과장을 보태서 벽면의 절반을 채운 대형 TV, 컴퓨터 모니터가 올려진 간소한 책상, 여러 종류의 책이 꽂힌 책장, 그리고 침대.

전체적으로 지저분한 구석 없이 깔끔했다.

깔끔한데, 그게 도리어 이상하다.

“뭐야.”

조아라가 박스를 내려놓으면서 의문을 표했다.

“벽에 붙은 브로마이드들이랑 굿즈들 다 어디 갔어요?”

침대 위 천장에 붙은 소녀연맹 브로마이드가 그나마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붙일 데도 없고, 괜히 정신 사나워서 다 뗐어. 굿즈들은 창고에 보관하고. 버린 거 아냐.”

“누가 버렸대요? 혼자 찔려선 변명하네.”

“여기 있는데?”

정지음은 책상 옆에 놓인 5단 선반을 가리켰다. 5단 선반 가장 위엔 소녀연맹의 ‘인트로: 러브’ 앨범과 굿즈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 그건 뭐랄까. 트로피 같은 거야.”

“트로피요?”

“‘우리들의 프로듀싱’ 진행될 때마다 한 칸씩 차는 거지.”

“흐음.”

조아라는 선반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맨 위에 놓인 ‘인트로: 러브’ 칸을 살피더니, 네 번째 층을 손으로 쓸었다.

“그럼 내 앨범은 여기에 놓여요?”

“그렇지.”

“왜 내가 쌤 밑이에요. 위로 올려줘요.”

“어?”

“아니다. 이거 판매량 순으로 둬요.”

성필은 헛웃음을 뱉었다.

“그런 식으로 경쟁시키긴 싫어. 다 소중한 추억들이잖아.”

“쓰읍, 좀 실망인데요. 아저씨 방 훨씬 요란하게 바뀌었을 줄 알았어요.”

“잡담 그만하자. 놀러 온 거 아니잖아. 일단 자리가 세 개 있거든.”

침대 위.

책상 앞 의자.

그리고 리클라이너 의자.

성필은 침대에 앉을 셈이었다.

침대에 앉는 사람은 등을 기댈 수도 없어서 가장 불편하다. 작업하러 왔는데 눕거나 기대는 건 예의가 아니니까.

성필은 손님에게 불편을 강요하고 싶지 않…….

“오, 남자 침대.”

조아라가 침대 위에 앉았다.

“아 뭐야. 생각보다 딱딱하네요. 매트릭스 좋은 걸로 좀 써요.”

앉는 것을 넘어서 이젠 누워버렸다.

성필은 말문이 막혀서 어버버 입을 뻐끔거렸다.

“그럼 저는 여기.”

정지음은 리클라이너 의자에 앉았다.

아니, 누웠다.

그는 리클라이너를 최대한 뒤로 젖힌 후, 허벅지 위에 그의 애착 노트북을 놓았다.

“미친 이거 완전 편해요! 형 이거 어디서 샀어요? 얼마예요?”

성필은 답이 없었다.

유린당하는 자신의 침대를 보고, 트라우마라도 떠올린 사람처럼 표정과 몸이 굳어 있었다.

조아라는 옆으로 돌아누워 비웃음을 띠었다.

“왜요. 내가 아저씨 침대에 눕는 거 싫어요?”

“……아니.”

“약간 아저씨 그런 타입이에요? 남이 자기 자리 가져가는 거 싫어하는? 그럼 나올게요. 아님 여기 여자가 누운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충격이라도 받았어요?”

“야이 아라야 너 너무 과감하다.”

정지음이 껄껄 웃으면서 몸을 달싹였다.

성필은 무미건조하게 하하 웃으면서 말했다.

“거기 자리 앉아도 되겠어?”

“뭐요.”

조아라는 아예 침대와 하나가 될 작정인지 대자로 드러누웠다.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이유 하나라도 말해봐요. 그럼 바로 비킬게.”

“드럼은 어떻게 치게?”

“아 맞네.”

조아라는 순순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전자 드럼을 순서대로 조립하기 시작했다.

성필은 한숨을 쉬면서 침대로 다가갔다. 싸구려 매트릭스라 그런지 회복력이 좋지 않았다. 조아라가 누운 자국이 남아 있었다.

“…….”

성필은 그 위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오빠, 여기.”

조아라는 전자 드럼과 연결한 잭을 정지음에게 내밀었다. 정지음은 작곡 프로그램을 켠 후 잭을 노트북과 연결했다.

“이거 오디오 입력 바로 되는 모델이야?”

“리카 걸로 시험해봤어요. 돼요.”

“지금 해볼래?”

조아라가 채로 탐탐을 두드렸다.

정지음은 제대로 소리가 인풋되는 것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자아, 갑니다.”

조아라가 채를 들어 올렸다.

폐관 수련, 시작.

* * *

성필은 현관문을 열었다.

잔뜩 삐친 얼굴의 리카가 보였다.

“왜 아프단 걸 말 안 해주셨나요!”

리카는 무려 2시간이나 회사에서 홀로 기다렸다. 세 사람을 놀라게 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작업실에 계속 숨어 있던 것이다.

그리고 너무 늦는 리카를 걱정한 성필이 매니지먼트팀에 먼저 연락하는 것으로, 리카의 장대한 계획은 마무리됐다.

성필이 먼저 리카의 안부를 물으려 하지 않았다면, 리카는 할머니가 될 때까지 기다렸을 수도 있었다.

“박 이사님 때문에 아타시(저)만 바보가 됐어요!”

“스케줄 끝나면 연락한다면서.”

“그거랑 이건 다른 얘기예요!”

리카는 ‘흥!’ 소리를 내면서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자 삐친 티가 금방 사라지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여기저기 바라보았다.

“이런 곳은 얼마나 하나요!”

“전세로?”

“매매요!”

“이런 덴 방만 팔진 않지. 건물 통째로 팔아.”

“헤에, 그런가요.”

리카는 복도를 찬찬히 걸으면서 곧 침실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문 앞에 서자 옷매무새와 머리칼을 정돈했다.

심호흡을 한 그녀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문을 열었다.

“아라쨩의 연인 리카가 왔……!”

조아라가 채 두 개를 한 손으로 쥐고, 부술 기세로 드럼을 쾅쾅쾅 두드리고 있었다.

심지어 드럼에서 나는 건 드럼 소리도 아니었다. 기타 베이스 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다.

“오빠 이거 어때요!”

“어, 좋아! 이걸로 할래?”

“조금만 더요!”

음향이 너무 커서 둘은 소리 지르면서 대화했다.

우웅, 우웅, 우웅, 우웅.

규칙적인 베이스 음이 귀가 아릴 정도로 울려 퍼졌다.

성필의 아이돌 음악 감상 전용 스피커는 과도한 베이스 음 때문에 죽도록 혹사당하는 중이었다.

“아 베이스 죽인다!”

조아라가 됐단 듯 손가락을 튕기자 정지음이 미리 녹음해두었던 멜로디와 트랙을 재생했다.

조아라의 베이스 위로 다채로운 음들이 입혀졌다. 그리고 왠지 모르겠지만 조아라는 계속 드럼을 부술 기세로 두드렸다.

리카는 조심조심 문을 닫았다.

“……뭐 하는 건가요?”

“아아, 이건 리듬 작곡법이란 거다. 리듬을 먼저 정하고 그 위에 멜로디와 코드를 덧입히는…….”

“전혀 진지하지 않잖아요!”

적어도 리카가 아는 작곡 모임의 형태와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조아라는 대체 뭘 하는 건가? 앉아 있는 것도 아니고, 침대 위에 쪼그려 앉아 사람 패듯이 드럼을 패고 있다.

곡이 너무 나오지 않아서 분노를 표출하는 걸까?

“이건 노는……!”

“아라는 진지해.”

리카의 외침에 성필이 한없이 진지하게 답했다.

“진지하게 하고 있어.”

“……그렇네요.”

외형에 속으면 안 된다.

어쩌면 저런 광기야말로 아티스트에게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리카는 뺨을 짝짝 두드린 후 다시 문을 열었다.

“아라쨩, 내가 왔어!”

리카는 광기의 안으로 발을 디뎠다.

* * *

창밖으로 어둠이 몰려 들어왔다.

성필의 방 안은 녹초가 된 인간으로 가득했다.

정지음은 리클라이너 의자에 누운 채 마우스를 딸깍거렸다.

조아라는 힘없이 소리도 나오지 않는 드럼을 툭툭툭 성의 없이 두드렸다.

리카는 조아라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워 싱글벙글 웃었다.

그때 성필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에너지 드링크 사 왔어.”

“으어.”

정지음은 화들짝 놀라 잠을 깼다. 마우스를 누르고 있던 건 잠결에 했던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그는 눈을 비비면서 성필이 내민 드링크를 받아마셨다.

드링크 캔을 한 번에 절반 정도 비운 정지음이 이제야 살겠단 듯 시원하게 숨을 내쉬었다.

성필은 지친 이들을 둘러보다가 손뼉을 쳤다. 다들 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일단 세 개가 나왔잖아. 하나씩 점검해보자.”

정지음은 고개를 끄덕이곤 데모 버전 1을 재생했다. 그 리듬, 드럼, 베이스는 록을 닮아 있었다.

소녀연맹 안의 밴드인 브레멘 음악대는 주로 록을 연습한다. 그러다 보니 드럼을 쥔 조아라는 처음에 록 스타일의 리듬을 만들었다.

만들고 보니 괜찮아서 세이브 데모로 두었다.

“뭐, 아저씨 어때요?”

조아라가 힘없이 물었다.

성필은 작업 도중에는 계속 판단을 보류했었다. 그건 상담가나 정신분석가의 자세와 닮아 있었다.

어디까지나 자신을 죽이고, 오로지 상대의 이야기에만 몰입하여 상대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자신의 자아보다 상대를 먼저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 그런 성필이 드디어 판단을 내렸다.

“좋아.”

“아타시(제)가요? 이미 알고 있다구요!”

“내가 계속 생각했던 게 있거든. 아라는 머릿속에 곡의 컨셉 같은 게 없잖아. 무대 구성만 집중하고 있으니까.”

조아라가 떨떠름하게 수긍했다.

그녀는 이전의 프로듀서인 백설하보다 구체적인 목표를 지녔지만, 오히려 곡을 만들거나 선정하는 데 난관을 겪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제시한 구체적인 목표란 춤과 관련된 것이었으니까.

분위기와 관련된 지침이 없었다.

“컨셉을 정하지 않는다면, 스타일을 정해야 해.”

“스타일요?”

“아직 춤을 생각할 단계가 아니라면, 뮤직비디오를 떠올려보자는 거지.”

성필은 품에서 USB를 꺼냈다. 그것을 컴퓨터에 꽂아 파일을 띄웠다. A&R팀의 팀원들이 제출한 기획 파일들이 들어 있었다.

성필은 A&R팀에게 조아라의 타이틀곡이 지녀야 할 ‘스타일’을 구상하라고 지시했었다.

“스타일은 컨셉보다 훨씬 유연해. 유연하고 가볍지. 전체적인 분위기 같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구체적이지 않아도 돼. 내가 생각하기에 버전1이랑 어울리는 스타일은 이거야.”

성필이 모니터에 띄운 기획안의 제목이 큼지막하게 떠올랐다.

“옆집 소녀(Girl next door)?”

이는 대중음악의 역사에 통달한 A&R팀 이재호가 낸 기획이었다.

“스타일의 하나야. 옆집에 살 것처럼 친근한 이미지를 뜻해. 2000년대에 팝 시장에서 흥했던 스타일인데, 우리나라 사정에는 안 맞지만 묘사해볼게.”

옆집에 사는 소녀.

그녀는 프리한 옷을 입고 항상 모자를 거꾸로 쓰고 집을 나선다. 한쪽 겨드랑이엔 스케이트보드를 끼고, 나와 마주치면 싱그럽게 인사해준다.

“소꿉친구네요!”

리카가 ‘옆집 소녀’를 곧바로 일본식으로 로컬라이즈했다.

“센피루쿤 아사다요(아침이야)! 빨리 안 일어나면 치코쿠 시챠우요(지각해버려)! 손나 칸지(이런 느낌)?”

“와, 진짜 싫다.”

조아라가 학을 뗐다.

그때 정지음이 크게 ‘아!’ 소리를 냈다.

“에이브릴 라빈! 팝 펑크 프린세스!”

“오, 역시 뮤직 프로듀서.”

성필이 기획안의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여러 팝스타들 가운데 에이브릴 라빈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2000년대를 대표하는 팝스타다.

정지음은 계속 ‘와와’ 소리를 냈다.

“아니, 이 곡 듣는데 계속 우효민이 생각나는 거예요. 근데 분명 우효민 말고 다른 아티스트가 있는데 생각이 안 나서 미치는 줄 알았어요!”

“효민 씨 최근 컴백곡이 팝 펑크긴 했지. 이해해. 아무튼 스타일로 따지자면, 이 곡엔 이 스타일이 제일 잘 어울릴 거 같거든.”

“난 별론데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울상을 지은 이재호가 눈앞에서 아른거렸지만, 성필은 곧바로 조아라의 의견에 동의해주었다.

“아니 뭐, 스타일 자체가 나쁘단 게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춤이랑 안 어울릴 거 같아요.”

“사실 스타일을 이렇게 가져가면 사랑 노래거나 걸스 파워 쪽으로 가야 하지 않나 싶거든. 그런데 사랑은…….”

“별로.”

백설하가 이미 했으니까.

물론 다른 멤버는 또 사랑이란 주제를 고를 수도 있겠지만, 조아라는 탐탁지 않았다.

최대한 오리지널리티를 살리고 싶었다.

“그리고 걸스 파워, 걸크러쉬 쪽은 아직도 우리나라에서 흥하긴 해. 근데 팝 시장은 영 그렇거든. 아라 목표가 ‘빌보드 200’ 차트 100위 안으로 들어가는 거라면서? 그럼 이건 피해야지.”

“뭔데. 아저씨 그때 리카한테 미쳐서 내 얘기 안 듣고 있던 거 아니었어요?”

“아라 말이면 자면서도 다 듣고 있지.”

“히도이(너무해)! 주변이 보이지 않을 만큼 저한테 미쳐주셨어야죠!”

“근데 그런 스타일이 팝에선 별로예요?”

성필은 오랜만에 음악사 강의를 시작했다.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걸그룹, 스파이스 걸스가 들고나왔던 컨셉이 두 가지였어. 걸스 파워랑 걸스 프렌드십이야.”

소녀들아 힘내자!

우리의 우정은 영원해!

대강 이런 내용이다.

스파이스 걸스 최대 히트곡인 ‘Wannabe’에 그 정수가 들어 있다.

“그때를 기점이라고 해야 할까, 팝은 신나고 활기차고 자신감 넘치는 분위기가 지배했어.”

이는 아이돌의 탄생과 맥을 같이한다. 아이돌의 원형인 ‘뉴 키즈 온 더 블록’ 말이다.

‘뉴 키즈 온 더 블록’은 음악적으로 혁신을 이루진 못했다. 그저 어마어마하게 인기가 있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단순하게 인기가 많은 그룹인 게 다가 아니다.

“아이돌이 등장하기 전까지 10대들은 대중음악에서 철저하게 소외당해 있었거든.”

마치 록이 탄생하기 전의 20대와 같았다.

로큰롤 이전, 20대는 부모님이 듣던 음악을 물려 듣는 게 전부였다. 집에 있는 드뷔시나 바그너, 모차르트의 LP만이 음악이었다.

온전한 그들만의 문화가 없었다.

그러나 로큰롤 이후 모든 게 변했다.

20대는 자신들만의 문화를 손에 넣었다.

“아이돌은 로큰롤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어.”

용돈이나 받는 것들이 무슨…….

과거엔 이런 분위기가 팽배했었다.

하지만 ‘뉴 키즈 온 더 블록’ 이후 모든 게 바뀌었다. 그들은 10대의 영웅이자 우상이 되어 세계를 휩쓸었다.

“아이돌은 소외당한 10대를 대중문화의 주요 소비자이자 주체로 올려놨어. 그리고 그 맥락과 함께 스파이스 걸스가 등장한 거지.”

10대 소녀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불안정하고 수동적인 존재로만 비쳤지만, 10대가 대중문화의 소비자로 올라서자 상황이 바뀌었다.

많은 프로듀서와 아티스트들이 10대의 감성을 공략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억압받던 소년, 소녀들의 가오와 자신감이 폭발하기 시작했다.

우상, 아이돌, 멋진 형, 멋진 언니들로 인해서.

10대들의 긍정적이고 활기찬 개성은 대중음악을 통해 표현됐다.

“장장 15년…… 활기찬 인싸들의 시대가 이어졌어. 흥 넘치는 EDM의 최전성기, 댄스 음악의 황금기. 그런데 2010년부터 조류가 달라졌어. 감성적인 느낌의 음악이 대세가 된 거지. 요즘 EDM은 들어보면 뭔가 감성적이고 그러지 않아?”

“음…….”

조아라가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였다. 그때 리카가 손을 번쩍 들었다.

“아티스트란 분위기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강점을 어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라쨩, 시장이 어떻니 그런 거에 흔들리지 마! 소꿉친구로 밀고 나가는 거야!”

“아니, 그런 거 하기 싫다니까.”

“나는 좋은데…….”

리카는 작게 ‘센피루쿤 아사다요(아침이야)……’란 말을 반복했다.

“나는.”

조아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여기서 미리 말해두는데요, 오빠, 아저씨. 곡은 내 오리지널리티가 들어가길 바라지만, 일단 듣기 좋아야 해요. 대중들한테 먹혔으면 한다고요. 그게 제1 조건이에요.”

“난 아라가 힙스터인 줄 알았어. 맨날 음악 들어도 보통은 모르는 팝 같은 거만 들어서.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는데.”

“아니 오빠, 그건 춤추기 괜찮은 곡 찾으려다 보니까 그런 거고요. 나도 대중음악 댄스 가수로서 자각이 있어요.”

“무슨 자각?”

“내 어깨에 가로 엔터 식구들이 올라가 있는 거잖아요. 성공은 해야죠.”

침묵.

조아라가 당황했다.

“뭐, 뭐예요.”

“오오, 우리 아라.”

성필이 장난스러운 웃음과 함께 박수를 쳤다. 조아라는 그게 놀리는 것처럼 들려서 얼굴이 붉어졌다.

“그런 생각까지 해? 너무너무 대견하다.”

“놀리지 마요.”

“놀리긴? 할 수만 있다면 비행기도 태워주고 싶네.”

“저는 아라한테 사탕 사주고 싶어요.”

“너도?”

“형도?”

조아라가 성필과 정지음의 정강이를 번갈아 발로 찼다. 둘은 그러고도 뭐가 좋은지 미소만 띠었다.

“아무튼…….”

“에에, 박 이사님 맞았는데도 웃고 있어. 조금 기분 나쁠지두…….”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내 의견은 프로듀서로서의 최종적 판단이 아니야. 곡이 좋다, 안 좋다 판단을 내리더라도 그건 수정의 여지가 있단 뜻이거든. 한 곡을 30번 40번씩 수정하고 그만큼 버전을 만드는 경우도 있어. 너무 시야를 좁히지 말자. 하루 만에 적당히 만든 곡이 완벽할 수도 없고.”

“노엘은 ‘슈퍼소닉’을 30분 만에 썼고 프레디 머큐리는 ‘킬러 퀸’ 멜로디를 5분 만에 찍었고, 폴 매카트니는…….”

조아라의 줄줄이 설명에 정지음이 툴툴댔다.

“아라야 천재들 예시는 그만 들면 안 돼?”

“알았어요. 지음 오빠 잘하고 있어요.”

“아타시(나)는?”

“리카 너도.”

사실 리카 덕에 작업이 훨씬 빨라졌다.

리카는 정지음과 조아라 둘을 동시에 이해하는 작곡가였다. 그렇기에 둘의 의견을 적절히 조합하여 곡을 수정하고 보완하는 데 특기가 있었다.

리카는 조아라의 인정을 받자마자 그녀에게 매달려 한껏 애정을 갈구했다.

성필은 그것을 보면서 픽 웃었다.

“괜히 음악사 강의한다고 시간을 너무 썼네. 야식이라도 시키고 이어서 할까?”

다들 이구동성으로 ‘네’라고 외쳤다.

야식 메뉴는 치킨으로 정해졌다.

성필은 어깨가 다쳐서 운동을 못 하니 식단 조절이 의미가 없었다(변명). 그래서 먹기로 했고, 두 아이돌은 컴백까지 멀었으니 먹기로 했다.

주문을 마친 후, 성필은 잠시 바람 좀 쐬고 온다는 이유로 방을 나서려 했다.

누운 조아라 위에 겹쳐 올라가 있던 리카가 소리쳤다.

“설마 담배는 아니겠죠! 실버타운 메이트의 맹약을 어기고 있는 건가요!”

“나 끊었다니까.”

“돌아오시면 구석구석 냄새 맡을 거예요! 숨길 생각하지 마세요!”

성필은 해볼 테면 해보란 듯 어깨를 으쓱하곤 방을 나왔다. 그는 나오자마자 몇 시간 전 민경섭에게 왔던 문자를 확인했다.

조아라의 스케줄 관련 문자였다.

‘더 스튜디오인가.’

더 스튜디오.

구독자가 수백만 명에 달하는 거대 아이튜브 채널이다. 주요 콘텐츠는 아이돌의 퍼포먼스다.

웬만한 아이돌은 컴백하면 이 채널에서 컴백곡 퍼포먼스를 펼친다. 특이점은 춤에 집중하기에 노래는 립싱크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 더 스튜디오에서 들어온 일은 소녀연맹이 컴백하면 출연해달란 게 아니었다.

‘아티스트 오브 아티스트.’

팬들은 줄여서 ‘아오아’라고 부르는 콘텐츠다.

달에 세 명의 아이돌을 뽑아 그들만의 오리지널 퍼포먼스를 선보여 우위를 겨룬다.

당연히 춤으로 이름을 날리는 그룹의 메인 댄서들이 주로 참여한다.

하지만 괜찮은 실력의 세 명을 동시에 구하기란 어렵기에, 1년에 ‘아오아’가 벌어지는 건 고작 서너 번.

거기에 조아라가 섭외된 것이다.

‘아라라면 기쁘게 받아들이겠지.’

드디어 자신의 춤 실력을 팬들에게 보여줄 때가 됐다면서 함박웃음을 지을 것이다.

‘아오아’의 퍼포먼스 영상은 기본 조회 수가 수백만이고, 히트한 영상의 조회 수는 1,000만이 넘어가기도 한다.

‘아이돌 간의 경쟁이 끼어 있으니까 화제성도 높을 수밖에 없지. SNS 같은 데서 저절로 홍보가 되고.’

이번 ‘아오아’가 채널에 게시되는 건 운이 좋게도 이번 소녀연맹의 컴백 타이밍이다.

홍보로써 이보다 좋은 수단을 찾기 힘들 정도다. 소녀연맹의 뮤비 티저보다 조회 수가 더 많이 나올 수도 있으니.

그래, 조아라는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다만…….

‘이번 아오아 출연자가…….’

출연자에 케이어스의 진저가 포함되어 있다.

조아라는 진저에게 경쟁심이, 아니. 열등감이 있다.

성필은 한숨을 쉬면서 벽에 등을 기댔다.

‘출연하는 게 아라한테 도움이 될까, 아니면 해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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